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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젠슈타인, 《10월》을 시청하며,

 

에이젠슈타인

 

에이젠슈타인 《10월》 (1927)은 1917년 소비에트 10월 혁명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소련 정부의 위촉을 받아 제작된 무성 영화이다. 존 리드, 《세계를 뒤흔든 열흘》을 원작으로 삼아, 2월 혁명부터 임시 정부의 수립, 그리고 볼셰비키 10월 혁명의 전개 과정을 다룬다. 이 작품은 전작인 《전함 포템킨》 (1925)에 이어 혁명 영화로 선정된다.

 

영화는 개별적인 영웅 서사를 배제하고 무산 계급에 초점을 맞춘다. 역사적 사실을 충실히 재현하는 사실적 기법을 사용하면서도 시각 효과를 드러냈다. 《10월》은 10월 혁명 당시 멘셰비키와 임시 정부가 내세운 ‘신과 조국’라는 관념을 폭로하고, 교차 편집했다. 종교적 권위가 이중 권력에 더해 야만적이고 허황된 기만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시각적으로 이끌어낸다. 여기서 임시 정부의 수장 케렌스키는 권력의 정점에 올랐지만, 계단을 오르는 장면 사이에는 기계 장치로 움직이는 ‘화려한 공작새 인형’이 꼬리를 펴는 장면이 있다. 이는 케렌스키의 정치적 성격을 고발한다. 이처럼, 《10월》은 단순한 역사 기록만이 아니라, 영화라는 매체로 어떻게 인간의 계급적 의식을 자극하는 투쟁 수단이 될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당시 혁명적 역동성을 시각적으로 충실히 표현한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에이젠슈타인 외에도, 푸도프킨, 롬, 코진체프 등 소련 영화 사실주의 시기를 이끈 다수 감독들이 존재한다. 특히 에이젠슈타인은 학생들에게 영화 수업 당시 영화 이론을 설명할 때 엥겔스 문학론으로 이끌었으며, 발자크, 『고리오 영감』을 핵심 분석으로 설명하였다. 이는 1956년 파리 영화 작가 제1회 국제 대회 당시 영화 작가의 ‘도덕적 권리’와 ‘창작의 자유’보다 앞선 것으로, 영화를 단순히 예술 작품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요구한 것이 아니라 선전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1956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 격하 운동 이전의 소비에트보다도 앞선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에이젠슈타인이 활동한 초기 소비에트는 영화 정책으로 조직·선전론이 존재했음에도, 그것이 단순히 선동적인 수준만이 아니라, 교육적 수준으로까지 이끌어왔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은 논리적 단계와 구체적인 역사적 관계에서도 실천했다는 점이다. 이는 에이젠슈타인이 활동한 국립영화대학 (VGIK) 강의에서도 강조한 바 있다.

 

소련 영화사

 

레닌이 1919년 8월 27일에 서명하여 소련 영화사의 공식적인 출발점으로 기록된 법령으로는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RSFSR) 인민 위원회의 「사진 및 영화 산업의 국가 이관에 관한 법령」이 있으며, 흔히 「영화 국유화 법령」이라 불리는 법령이다. 해당 조치는 민간이 소유하고 있던 영화 통상 및 산업 전반의 주권을 노동자·농민의 국가로 강제 귀속시킨 유물론적 조치였다. 레닌은 교육 인민 위원회의 관할인 크룹스카야와 함께 모든 사진 및 영화 무역, 영화 기자재 생산, 그리고 전국의 극장 체계를 교육 인민 위원회의 직속 관할로 이관했다. 당시 룬차르스키가 이끌고 있었으며, 실질적인 영화 행정의 관리와 검열 기틀도 레닌 아내인 크룹스카야가 주도했다.

 

법령은 1919년에 공표되었으나, ‘소련 영화의 탄생’은 1920년대 초로, 이는 ‘전시 공산주의’ 시절이었기에, 물질적 파탄으로 인해 영화를 찍을 생지 (필름), 카메라, 현상액 등과 같은 원자재 역시 완전히 고갈된 상태였다. 대다수의 극장은 전력난으로 문을 닫았고, 기존 영화인들은 망명길에 올랐다. 이 시기 국가가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은 선전용 단편인 ‘아지트카’나 뉴스릴 (뉴스 영화)에 불과했다. 그러나 새로운 경제 정책 (NEP) 시행 이후, 생산 수단이 1921년 부로 복구되면서 영화 산업에도 숨통이 트였다. 필름 수입과 극장 재개장으로 재정이 확보되었고, 1922년 법령을 개정·보완하면서 국영 영화사인 ‘고스키노’ 등이 설립되어 물질적 토대가 정비되었다.

 

법령 서명 (1919년)은 선언적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내전이 끝나고 재정·기자재 등 물질적 기반을 마련하면서 1920년대 초중반에 이르러서야 에이젠슈타인, 푸도프킨, 베르토프 등이 활동하며 ‘소비에트 영화’를 성취할 수 있었다. 배급사는 《모스 필름》으로 모스크바에 위치한 대형 규모를 자랑하는 국영 영화 제작사 겸 배급사이다. 해당 배급사는 1919년 「영화 국유화 법령」과도 닿아 있는 역사적 산물이다. 1920년대 초, 국유화된 민간 영화 제작사 한존코프와 몰리에프의 촬영 시설이 소비에트 기구로 들어가면서 기틀이 마련되었다.

 

앞서 《10월》은 ‘사회주의 사실주의’ (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기반한다고 평가되지만, 실제로는 정착된 사상이 아닌 혁명적 사실주의에 가깝게 실천하여 표현되었다. 당시 소비에트 영화들도 현재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지점에서 알 수 있는 소비에트 영화의 역사적 특징을 세 가지로 나누어 서술한다.

 

1. 소비에트 탄생

 

관련 문헌에서는 지역 및 공장 노동자 대표자 협의회 (소비에트)에서 장차 수립될 기구의 보이기 시작하고 혁명의 날이 다가오던 바로 그 시점을 소비에트 영화 역사의 발전 기점으로 명시한다. 이는 소비에트 영화의 역사가 1917년 10월 권력 장악 이후 단순히 국가의 지시에 따라 사후적으로 급조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노동자·농민 자치 권력 기구인 소비에트가 먼저 형성되고 확대되는 정치적·계급적 하부의 성장과 피할 수 없이 맞물려 자라나기 시작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2. 전위 (프롤레트쿨트) 조직과 볼셰비키 지도부

 

1917년 9월, 상점 공장 위원회의 중앙 협의회가 주도하여 사회주의와 무산 계급 이념을 논의하기 위해 소집한 노동자 교육 조직들의 회담은 역사적으로 장차 소련 초기 예술 운동을 주도하게 될 프롤레트쿨트 (이하 무산 계급 전위 조직)의 최초 집회였다. 볼셰비키 핵심 지도부가 직접 참석하면서, 이 최초의 모임에는 국영 영화 행정의 교육 인민 위원에 루나차르스키, 칼리닌, 사모일로프 등 볼셰비키 중앙 인사들이 직접 출석했다. 이는 볼셰비키 정권이 수립되기도 전인 당대 혁명 전야부터, 당의 최고위 정치 지도자들이 노동 계급의 조직화와 사상 투쟁 역시 당의 핵심 전략적 과제로 직접 선도하여 조직했음을 입증한다.

 

3. 혁명 전야 결의안과 ‘영화 제도적·정책적 정체성’ 선제 확립

 

이 모임에서 수많은 현재의 논의들은 공식적인 ‘결의 서한’으로 작성되었으며, 이 결의안 내에는 이미 ‘영화에 관한 구체적인 항목’이 독립적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혁명 발발 전인 1917년 9월에 이미 노동자 결의안에 영화도 포함되었다. 볼셰비키와 무산 계급 조직들이 영화를 자본주의적 오락이나 단순한 시각 예술로만 단정하지 않았음을 뜻한다. 이들은 영화를 무산 계급 이념을 전파하고 인민을 교육할 수 있는 ‘제도적 선전·교육 매체’로 명확히 규정하고, 혁명 정부 수립 이전부터 이미 이를 정책적 기획의 범주에도 넣어 준비하고 있었다. 따라서 역사적 결론에 따른 이 지점에서 도출되는 소비에트 영화의 특징은, 소비에트 영화가 혁명 이후 단순히 우연히 탄생한 예술이 아니라, 1917년 10월 혁명 직전 볼셰비키 지도부 (루나차르스키 등)와 노동 계급 조직이 결성한 최초의 전위 조직에서 이미 제도적·정책적 결의안의 핵심 항목으로 선제 채택되어 정권 수립과 동시에 출범할 수 있도록 철저히 기획된 정치적·조직적 산물이었다는 점이다.

 

《10월》

 

영화 《10월》은 단순히 겨울 궁전을 습격하는 물리적 폭력만을 다루지 않는다. 에이젠슈타인은 공장, 거리, 그리고 전선에서 노동자와 병사들이 계급적 각성을 이루며 치열하게 논쟁하는 ‘정치적 토론’을 매우 비중 있게 다루었다. 이는 혁명적 사건을 재현하면서, 영화 구조의 총체성에 대한 연구를 포기하지 않았음을 상기한다. 이에 따라 영화 내 케렌스키를 폭로하는 방식에는 그의 정치적 본질을 단순히 비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실상에 대한 사실로 다룬다. 특히 영화 후반부, 임시 정부를 사수하기 위해 겨울 궁전에 배치된 유산 계급 출신의 여성 군대는 단순히 무자비한 적군으로만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혁명 앞에 결국 자신들의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는 장면으로, 그러한 체제 아래에 종속된 여성의 입체적인 모습도 다룬다. 영화 속 케렌스키 (임시 정부 수반)는 그의 정치적 성격과 마찬가지로, 이중적인 모습이며 ‘최정점의 장면에서 제자리걸음을 하지만,’ 그가 계단을 오르는 동일한 장면을 기계적으로 수없이 반복한다. 실제 시간선으로는 이미 꼭대기에 도달했어야 하지만, 케렌스키는 끊없이 계단을 오르며 ‘역사의 정체이자 퇴행’이라는 시각적 구조를 드러낸다. 

 

케렌스키는 웅장한 겨울궁정 문 앞에 서서 거드름을 피우거나, 나폴레옹 동상처럼 한쪽 손을 군복 상의에 집어넣는 특유의 자세를 취한다. 그러나 그가 당당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거대한 황제의 문과 조각상들 사이에 낀 그가 얼마나 작고 초라한 ‘정치적 인간’에 불과한지를 포착한다. 혁명의 열기가 거세질수록 케렌스키는 집무실에서 소리를 지르거나 물건을 집어던지는 등 본모습이 드러나지만, 볼셰비키는 완벽하게 절제되고 조직적이다. 볼셰비키 노동자들의 집단적 움직임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체제의 몰락을 예견한다.

 

이처럼, 케렌스키가 거만하게 문을 열고 들어서거나 훈장을 자랑할 때, 앞서 에이젠슈타인은 이 장면에 태엽 장치로 꼬리를 활작 펴는 ‘화려한 황금 공작새 인형’의 장면을 교차 편집했다. 이 장면으로, 케렌스키를 내실은 없고 ‘겉만 번지지르한 기계 인형과 같은 인물’임을 시각적으로 구성하였다. 단순히 ‘악인’으로 박제된 것이 아니라, 반복 편집에 따른 운동 거부와 기계적 충돌, 압도적 왜소화로 정교한 허영 가득한 인물로 완전히 해체시킨다.

 

마야코프스키가 이전에 지적한 대로, ‘영화는 연극을 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연극, 배우의 예술에 문을 열어줄 것’이라 예견했다. 이처럼 무대 예술은 단순히 모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신체로 표현할 수 있는 운동과 발성, 그리고 역동성을 증명한다.

 

또한 1917년 4월 3일, 레닌이 독일 정부가 주선한 열차를 타고 망명지에서 돌아와 페트로그라드의 핀란드역에 도착했던 역사의 결정적 순간 (망명 환국)과, 그것을 기록하려 했던 당대 촬영 장비들의 물리적 한계를 증언도 있다. 당시 현장에 파견되었음에도, 기차 연착과 야간의 어둠이라는 물질적·기술적 한계 (당시 필름의 낮은 감도와 야간 조명 장비의 부재 등)로 인해 레닌의 도착과 장갑차 위에서의 연설을 단 한 장면도 촬영하지 못했다. 에이젠슈타인 《10월》은 ‘기록의 부재’를 딛고 10년의 세월 이후 영화적 기법으로 되살린다. 당시 유럽의 영국과 프랑스 대사가 레닌을 경고하는 각서를 제출하고, 외무부 차관은 신문으로 레닌을 ‘독일의 첩자’로 몰아세우는 등 중상모략을 폈음에도, 당시 핀란드역 광장은 인민들로 가득찼다.

 

1917년 4월 3일, 레닌이 핀란드역에 도착했을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기에, 스위스에서 망명 중이던 레닌과 볼셰비키 일행은 러시아를 전쟁에서 이탈시키려는 목적을 가진 독일 정부의 전술적 협조를 얻어 열차를 타고 러시아 경내로 진입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 대사는 러시아 임시 정부 외무 장관에게 레닌의 귀국에 대해 강력한 경고 각서를 제출했다. 임시 정부 외무부 차관 역시 관제 언론으로 레닌에 대해 ‘독일 정부의 호의를 받은 첩자’이자 ‘배신자’로 규정하며 제재를 가해야 한다는 중상모략 기사를 대대적으로 유포했다. 유산 계급 언론의 대대적인 반대 선전에도, 임시 정부의 전쟁 지속 정책과 식량난을 참을 수 없던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 병사, 수병 등 수만 명은 볼세비키 조직의 주도하에 핀란드역 광장에 집결하여 결국 레닌을 환영했다.

 

이처럼, 1917년 당일 밤에 촬영이 실패했던 해당 장면은 국영 영화로 상영되기까지 ‘10년’이라는 물리적 세월이 걸렸다. 이 10년은 소련이 내전 (1918-1922)을 종식하고, 새로운 경제 정책 (NEP)으로 영화 촬영 재정과 야간 조명, 고감도 필름 등 기술적 생산 수단을 복구하는 데 걸린 필수적인 기간이었다.

 

1927년, 소련 정부는 10월 혁명 10주년을 기념하는 국책 사업의 일환으로 에이젠슈타인에게 《10월》 제작을 위촉했다. 에이젠슈타인은 1917년 당일 밤 볼찬스키 분과가 촬영하지 못해 10년간 공백으로 비어 있던 ‘핀란드역 도착과 장갑차 연설’을 당대 생존자들의 증언과 사료를 바탕으로 현장에서 완전히 재현해 냈다. 따라서 《10월》은 1917년 당대 촬영 기술의 낙후성으로 인해 유실되었던 레닌이 귀국한 역사적 실재와 물증을 10년 후 복구된 소련의 기술력을 동원하여 중대한 역사적 기록의 중요성을 지닌다.

 

그렇다면 제시된 1917년 10월 혁명 직전의 일지들과 볼셰비키 권력 장악 과정은 에이젠슈타인 영화 《10월》 (1928)의 중후반부를 구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역사적 서서의 뼈대이자 실재했던 물증들이다. 투쟁 전야에 열린 ‘프롤레트쿨트 (전위) 모임’에서 무산 계급 영화의 혁명적 역할이 사전에 기획되었다. 에이젠슈타인은 영화 초반부터 임시 정부를 옹호하는 유산 계급 및 관제 언론의 중상모략을 보여준 뒤, 이와 완전히 대조되는 공장과 전선 노동자·병사들의 치열한 토론 장면을 배치했다. 이는 유산 계급적 유흥으로서의 영화·예술 산업을 배격하고, 계급 투쟁의 역사를 시각적 영화로 드러낸다.

 

10월 10일, 레닌 참석 하에 무장 봉기가 결정되고, 12일 군사혁명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15일 각지 소비에트가 권력 이양을 찬성했다. 이에 맞서 임서 정부는 7월 시위 관련 볼셰비키들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영화 내 장면으로는 임시 정부 수장 케렌스키의 독단적인 체포령과 군사 행동 지시, 그리고 이에 대응하여 지하에서 은밀하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볼셰비키 군사혁명위원회의 조직 단계를 교차 편집으로 보여준다. 각 도시의 소비에트가 권력 이양에 찬성하는 모습도 장면으로 재현된다.

 

10월 24일, 임시 정부는 무장 봉기를 저지하기 위해 군사 학교 사관생도들을 동원하고, 노동자 구역과 중심지를 차단하기 위해 페트로그라드의 모든 교량 (다리)을 폐쇄·인양했으며, 소비에트와의 전신 연락을 차단했다. 영화 내 장면에서는 임시 정부의 명령으로 페트로그라드의 거대한 교량들이 위로 두 갈래로 갈라져 열리는 장면이 등장한다. 에이젠슈타인은 이때 다리 위에 쓰러진 노동자의 시신과 죽은 말, 그리고 인양되는 다리 틈새로 강물에 떨어지는 무산 계급 신문의 장면들을 배치하여, 임시 정부가 노동 계급을 물리적으로 격리하고 탄압하려 했던 10월 24일의 역사적 실재를 강력하게 고발했다.

 

10월 22일, 소비에트의 명령으로 출항 보류 조치를 철회했던 순양함 오로라호는 24일 군사혁명위원회로부터 전술적 핵심지인 네바강으로 진입하여 닻을 내리라는 명확한 작전 명령을 접수하고 공세에 동참했다. 영화 내 후반부에는 거대한 순양함 오로라호가 네바강의 어둠을 지나 육중하게 진입하여 겨울 궁전을 향해 정조준하며 닻을 내리는 역사적 장면이 존재한다. 이는 실제 오로라호 군함과 수병들이 혁명의 물적 강제력으로 작용했던 사실을 그대로 시각화한 것이다.

 

10월 24일, 변장을 한 레닌은 혁명 사령부인 스몰니 연구소에 무사히 도착하면서 군사혁명위원회 공세는 결정적인 사령탑을 얻고 밤샘 봉기로 직행했다. 무장한 노동자들과 군사혁명위원회 대원들이 스몰니 연구소 복도를 가득 메우고 긴박하게 명령서를 주고받는 전화 (전쟁의 불길)의 사령부 내부가 사실적으로 드러난다. 밤늦게 도착한 레닌과 함께, 겨울 궁전 함락 총공세의 신호탄이 떨어지기 직전의 역사적 긴장이 스몰니 연구소 장면 속에 그대로 보존되어 존재한다.

 

결국, 1917년 2월 혁명으로 인해 차르 제정이 붕괴되었고, 식량 배급에 분노한 여성 노동자들의 시위가 군대의 동조로 이어지면서 로마노프 왕조의 차르 니콜라이 2세가 퇴위했다. 영화 내에서는 인민들이 차르의 거대한 동상을 밧줄로 묶어 땅바닥으로 끌어내려 산산조각 낸다. 이는 봉건제 권력의 물리적 파괴라는 역사적 선언이다.

 

1917년 3-7월에는 차르 퇴위 후 유산 계급 중심의 임시 정부 (케렌스키 주도)가 들어섰으나, 인민의 요구인 ‘빵과 평화’마저 거부하고 제1차 세계대전을 지속 강행했다. 영화 내에서는 케렌스키가 차르의 겨울 궁전 계단을 끝없이 올라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그의 권력을 시각화하고, 전선에서 죽어가는 병사들의 시신과 기계 부속품을 교차하여 임시 정부의 전쟁 범죄를 폭로한다.

 

1917년 7월, 임시 정부의 전쟁 지속에 결국 분노한 노동자와 병사들이 페트로그라드에서 대규모 무장 시위를 벌였으나, 임시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이를 유혈 진압하고 볼셰비키를 불법화했다. 영화 내에서는 임시 정부의 명령으로 페트로그라드의 다리들이 일제히 들어 올려지며 노동자 구역이 고립되는 7월 4일의 유혈 진압 순간을 가장 정밀하게 구현했다. 다리 틈새로 늘어진 죽은 말과 강물로 빠지는 노동자들의 선전물은 당대 진압의 물증이다.

 

1917년 8월, 코르닐로프 장군의 반동 군사 쿠데타가 발발했고, 군부의 총사령관 코르닐로프가 혁명 세력을 전멸시키기 위해 페트로그라드로 군대를 진격시켰다. 케렌스키 정부는 무능했고, 결국 볼셰비키 적위대가 전면에 나서 적을 설득하고 철도를 차단해 쿠데타를 무혈 저지했다. 영화 내에서는 코르닐로프의 군대가 진격하는 장면에 나폴레옹 조각상과 종교적 우상들을 배치하여 제정 부활을 노린 반동 세력의 본질을 폭로하고, 볼셰비키 노동자들이 전선에서 적군 병사들을 계급적으로 설득해 반동을 무력화시킨 과정을 담았다.

 

1917년 10월 24-25일, 군사혁명위원회의 지휘 아래 적위대와 수병들이 전신국, 기차역 등 핵심 보루를 장악했다. 10월 25일 밤 9시 40분, 순양함 오로라호의 공포탄 신호와 함께 임시 정부의 마지막 거점인 겨울 궁전에 대한 총공세가 감행되어 각료들이 체포되었다. 영화 내에서는 실제 역사적 장소인 겨울 궁전 내부와 광장에서 수천 명의 실제 적위대 생존자들을 동원해 궁전의 거대한 철문을 지나 진입하는 함락의 순간을 담았다. 이는 제2차 전 소비에트 대회에서 레닌이 ‘노동자·농민 혁명을 완수했다.’라고 선언하는 장면으로 귀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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