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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 연구소


2025. 09. 09. 


가설이지만, 언어란 지배 수단으로는 매우 효과적이다. 국내에서도 문자에 대한 연구는 많아도, 정작 계급을 위한 도구로 사용한다고 지적한 사람들은 매우 드물다. 그러나 우리말 연구는 많아졌다. 바깥에서는 외래어가 아닌 우리말 쓰자는 움직임들도 더 세졌다. 그러면서 세종 한글이나 창제했다고 기원이나 떠들고는 초기 집현전, 근대 말모이 같은 여러 언어 운동들은 정작 빼버린다. 언어로도 선구적인 사람을 강조하지, 모여서 조직한 집단을 잘 기리지는 않는다.

 

주로 한자어로 풀이해보자면, 한자어나 영문 표기를 쓰지 말자고 내세워도, 표기를 대체할 언어는 부족하다. 그러나 쉽게 만들어 볼 수도 있다. 자주 드는 예시로는 페미니즘이 있다. 여성주의로 바꾸기만 한다면 끝날 언어일까. 다음으로는 우리말로 새롭게 바꿔야만 하는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者), 곧 놈이라는 말은 주로 사내에게 쓰이는 말이기도 하고, 여성주의자라고 한다면, 뜻을 퇴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랜스젠더도 같다. 성전환이라는 표기가 그대로 있음에도, 용어를 잘 쓰지는 않는다. 주로 외래 언어를 더 많이 쓰는 형국인지라, 주로 용어들이 생겨난 원인을 두고 딸을 위한, 딸에 대한 말이기 때문이라는 배짱을 내세우기도 한다. 그리고 언어를 영문과 한문으로만 고치고는 난해한 언어만 골라 쓰는 아주 '괴랄한' 철학자들도 있다. 번역에 대한 언어를 계급 수단으로 특히 지배계급도 쓸 수 있다고 못 보거나, 그저 손 맞잡는 연대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추종하는 일부 여성주의 운동가들도 타협주의와 지배계급적인 시각도 밝혀지겠지만, 더욱 심각하게 드러난 까닭이다. 비슷한 예시로는 공산주의 운동을 공산주의'자' 운동으로 표기하는 경우다.

 

쓰는 말에서도, 우리말을 강조하는 다른 글들을 읽어봐도 말바꿈들은 나름대로 참신하긴 하다. 그러나 모든 교과목으로는 학습이 아닌 단지 시험을 위한 용도로만 제작했고, 어려운 말들을 풀어내지도 못한다. 도대체 시험을 수단으로 사교육 시장은 넓어지는데, 정작 혁명에 대한 흥미는 잃어가는 모순은 어디에서 기인하던가. 바로 언어를 만들어봐도, 지배계급들은 언어를 자본화된 생산 수단으로 이용하고는 꾀를 부리고, 사람들에게 쉽게 타협하기만 하고, 혀만 나불거리는 언어를 홍보하거나 팔도록 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라는 말 대신에 일꾼이라는 말도 있음에도 잘 쓰지는 않는다. 아직은 우리말로 바꾸는 번역들이나 움직임은 매우 어색하거나 적다. 그리고 국어가 바로 우리말이라고 예찬하는 국문학자, 문학가들은 한자어만 골라 쓴 행태를 부려왔음에도, 정작 글에 대해서는 거리낌마저 없다. 심지어 외래어라는 인식조차 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대중들은 얼마나 더할까.

 

우리말에 대한 대표적인 예시로는 노동자를 들고 싶다. 세상에는 남성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여성 노동자들도 있다. 그러나 모두 일꾼으로 나온다면 좋겠지만, 현실이란 또 다른 싸워내야 할 일이다. 그래서 노동자도 노동자지만, 노동계급, 노동가로 주로 표기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저 주어진 일을 하는 노동자들보다는, 더욱 무산 독재를 요구하고, 계급으로 싸워낼 줄 아는 노동가들도 더욱 많아져야만 한다. 두서 없겠지만, 노동자든, 노동가든, 노동계급이든, 일꾼이든, 부질 없는 노력이더라도, 자본가들만 판 치는 국내를 보노라면, 그들에게도 맞서 참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건, 프롤레타리아트, 무산계급이라는 많은 이름들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있어 번역 연구는 참 어렵다. 매일 같이 들인 노력에 비하면, 문학과 비평은 자유도라도 높지만 실질적인 통계에 기반한 논문이나 서적이라면 번역에 공을 들이기가 어지간히 까다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중에 유통이 되는 자료를 수집할 때마다, 가장 큰 문제로는 바로 번역 문제를 꼽을 수 있다. 대표적으로 주어와 서술어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논리적으로 비약된 문장과 비문의 사용, 외래어에 대한 대체어도 없는 개념의 모호한 정의, '의', '가', '것'과 같은 수식어를 포장하는 조사의 빈번한 사용, 그리고 '표준' 국어에 따른 맞춤법과 띄어쓰기와 같은 선택이 아닌 필수 규정을 들 수 있다.

 

언어란 말을 먼저 배우고 지식을 습득하지만 그러한 규정은 참고할 뿐이다. '표준'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말을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언어를 남용하자는 말도 아니다. 왜냐하면, 가장 큰 문제는 다른 언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 속에서 벌어지는 숱한 전문 용어에 대한 정의와 제시되는 설명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가 특히 독자들에게 충분히 잘 옮겨졌을 때는 매우 올바르다고 평가할 수 있지만, 거꾸로 이전의 서적이나 문서에서 나오는 글쓰기의 방식이 매우 모호하다는 점을 반증하기도 한다.

 

문학이라면 좋은 글과 나쁜 글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연구에서는 다르다. 밝히고자 하는 문제가 무엇이고, 사실에 대한 통계를 어떻게 제시할지 충분히 보여 주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전체 본문과 결론에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갈피를 찾느라 시간을 허비하거나, 문제를 도통 알 수 없을 때 수정이 요구된다. 특히 언론 보도에서 보이는 글쓰기의 방식은 처참할 뿐인데, 기자가 평론으로 쓴 글에서도 여전히 위와 같은 문법을 지키지 않아서 전달이 명확하지 않는 경우도 여럿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런 언어 작업은 기술하는 부분에서도 신중을 요하므로, 오히려 인공 지능 검사기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게 더 알맞기도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문장을 기술하는 노력에서 본인은 쉼표를 빈번하게 쓰는 습관이 있지만, 지금은 이를 정정하면서 문장의 간격이 현저하게 줄기도 했다.

 

아무리 난해한 문장이라도 많은 개념들이 내포하고 있다. 물론 본인이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해석하지 못한 본인의 책임이라고 내세울 수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까다로운 자신의 생각일 뿐이다. 그러한 자신의 생각마저 아무리 단편적인 글에서도 말하고자 하는 바를 풀어내서 정리하는 습관을 들이지 않는다면, 더욱 축약된 언어 생활과 헷갈리는 단어만 인용하는 데 그치고 만다. 언어 생활에서 순수한 우리말의 변환은 좋은 시도일지라도, 그 한계는 연구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주장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말은 과학이다. 최소한 우리말을 연구하는 국문학자나 문헌학자가 아니더라도, 구체적으로 글쓰기가 자유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객관적인 표기에 대한 문제라는 관심을 유도할 수는 있어야 하지는 않을까. 국어 '표준'에 대한 정의가 다만 시험을 위해 어려운 문장을 더욱 어렵게 쓰고자 모국어가 있지 않다. 국어 사용이 체계적이었다면 오히려 선택의 비중도 분명 이렇게 비좁지는 않다. 아무래도 읽기에 대한 답을 고르는 해석만 배우고, 작문 쓰기가 소홀한 우리 국어 생활의 실태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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