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게 받은 이달의 적립금... 내 돈 주곤 왠지 안 살 벽돌 같은 거 사면 뿌듯한 법인데...

첫번째 후보작은 사드 전집2, 3권 중 하나 ㅋㅋㅋ(1권은 벌써 왜 저기에 꽂혀 있냐)

두번째 후보작은 엄마가 사놨지만 집안 누구도 읽을 엄두 못낸 율리시스... 종이로 된 벽돌이 있지만, 전자책 또 사면 안 무거워서 들고 다니면서 읽을지도?! 이게 다 나보코프가 다이제스트로다가 해치지 않아요- 거 읽어보면 재밌다니까! 하고 영업한 탓이다... 나보코프 문학강의랑 러시아문학강의랑 단편전집도 이렇게 샀으나 셋 중 하나만 읽은 게 함정...팔지도 못하고 저장된 채 잊혀짐...

전자책 두 권으로 당첨. 심지어 전자책 사니 잔돈이 남아 어린이 문제집까지 한 권 더 사고 흐뭇하게 마무리. 다운로드 받아서 한 줄만 읽어봐야지... (그러고나서 한 십년 뒤에 다시 읽을지도...)

+구석탱이에 처박혀 이젠 전자책에게 밀리게 생긴 벽돌 율리시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잉크냄새 2025-11-07 2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율리시스는 그을린 벽돌 느낌입니다. 질감이 느껴져요. ㅎㅎ

반유행열반인 2025-11-07 22:25   좋아요 0 | URL
듣고 보니 구들장 기왓장 그런 느낌으로 그을린 것 같아요 ㅎㅎㅎ소외된 책의 타들어가는 속인가...
 
셀붕이의 도 위픽
이미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51104 이미상.

제목만 보고는 펨붕이 뭐 이런 남초 사이트의 호칭을 떠올렸는데 비슷했다. 인셀의 셀이란다. 선언문 갤러리 라는 가상의 게시판 이용자들끼리 오손도손 선언문 올리고 살았고 중수도 그 중 하나였다. 였는데, 앞뒤 안 재고 세게 질러버린 셀프로 뒤지고 그러고 남들도 죽여, 뭐 그런 말도 개도 새도 안 되는 글때문에 중수는 신상 다 털리고 도망자처럼 활녀 할머니댁으로 숨는다.

제목의 도는 길이기도 하겠지만 칼이기도 하다. 중수는 문구멍으로 자기 글의 영향을 받아 스스로의 몸을 칼로 난자하는 어린이를 보고 말았다. 아마도 PTSD인지 질질 짠다. 그래서 그렇게 누구도 해치지 않는 예리한 면도날 동호회에서 위안을 받는 것 같다.

미히는 유학 갔다 예술가병만 얻어 돌아온 중수의 사촌 누나인데, 이전 세대의 아픔과 고통을 긁어모아 소설 써서 대박난 작가들을 좇듯(그래서 전쟁같은 맛을 싫어했어) 아픈 할아버지에게 월남 파병 이야기 같은 거 해달라고 조르다가 의절당했다. 지난 주에 월남 다녀온 큰외삼촌이 돌아가셨다. 인생의 가장 큰 공이 파병가서 외화 벌어오고 보훈자가 된 젊었을 삼촌은 술만 먹으면 부모에게 주정을 하는 패륜아가 되어 중년과 노년을 보내고 할머니 떠나보내고 4년차에 별세하셨다. 엄마는 장지인 현충원 납골묘에 다녀오면서 “죽어서야 좋은 데 간 것 같아. 위치도 딱 정가운데 눈높이이고 현충원 경치는 어찌나 좋은지” 현충원을 공원 삼아 걸어 돌아다니던 수험생활 망해본 아이는 잘 알지요. 암.암.

활녀 할머니는 아파 죽어가는 친구를 떨궈버리려고, 쓸데없이 미리 온 죽음의 공포를 떨치려고 시도하지만 약 몇 알 술 몇 잔에 금세 가책을 느끼고 이산상봉의 드라마를 펼친다. 부모를 유기하는 자식이 미워 ‘디아스포라, 장송’ 소나무든 핏줄 아닌 간병인이든 남에게 돈을 쏟아 버리고 죽어버리는 노인 세대 이야기도 비극이긴 마찬가지였다. 신이 나서 알약 러시안룰렛 돌리던 정선생도 겉 보기엔 지극정성 환자를 돌보는듯했지만 어쩜 아무 약이나 먹고 너든 나든 죽어버렸으면, 하고 지쳐버린 간병인일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말에서 스스로 영포티 하고 소개하는 작가와 유사한 세대는 소설에 안 나온다. 좀 더 어리고 희망 없거나, 좀 많이 늙고 역시 희망 없거나. 중년배에게는 그럼 희망이란 게 있을까. 내 얘기든 남 얘기든 쓴다고 다 써지나… 내 엄마도 할머니도 이야기 욕심은 많아서 자꾸 했던 옛날 이야기를 하고 또 하고 또 해서 난 맨날 지랄염병을 떨었는데, 그때 난 소재거리를 다 차냈던 것이냐? 관심과 사랑을 원하는 게 인간이라지만 어떤 부분은 그저 묻어두고 잊히고 싶은 것도 인간이다. 이번 소설도 정신 없었는데 재미있었으면 됐다. 이미상 작가의 소설은 아마도 조금 더 읽을 것 같다. 위픽 시리즈 1권 ‘파쇄’ 읽고 내내 하나도 안 보다가 이 책이 100권째라고 그 사이 많은 소설이 나왔구나 감개 무량한데 또 게으른 마음이라 시리즈를 다 파고들고 싶진 않다. 일단 단편 한 편에 한 권이라 가성비가 안 나와… 그래도 이미상 소설가라 내돈내산 했다오…아 그리고 피를 부르는 턱 쳐든 글쓰기보다는 역시 배꼽 냄새나 맡는 소소한 짓이 무해하겠다.

+밑줄 긋기
-“(…)어차피 곧 돌아가실 텐데. 죽은 후에 자신이 어떻게 쓰이든 알지 못할 텐데, 하고 생각한 적이 있어, 나는. 구정의 세뱃돈처럼 할아버지에게 비밀을 받아내려 한 적이 있어. 우리 할머니가 왜 입을 열지 않는 거죠?” 미히가 냉장고에 기대앉은 정 선생에게 물었다.
“누나 참 개 같은 년이다.” 중수가 말했다.
“내 말이 그 말이야.”미히가 말했다.(60-61, 인정할 건 인정하는 개 같은 년 미히)

-(…) 정 선생이, 신비롭고 지혜로운 자의 역할을 맡은 그가 손바닥으로 교자상을 탁 쳐서 알약들을 튕겨 올리곤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랜만에 알약 러시안룰렛을 합시다.”
그러곤 눈을 감고 상위의 약들을 마구 흩었다. 미히가 미국에서 가져온 알 수 없는 약들을 쏟아부어 총알을 추가했다. 먹지 않고 모아둔 약들 같다고 중수는 생각했다. (71, 이쯤 오니 내게도 정선생에 대한 호감이 생기고…)

-왕 큰 자아를 가진 사람이 소설을 쓰기도 하지만, 소설이 쓰는 사람에게 자기중심성을 강제,강화하기도 한다. 그래서 쓰는 일은 언제나 약간이라도 죄를 짓는 일이다 .어쨌든 여기까지가 포티의 삶이라면저 아래 영의 삶도 흐른다. (90, ‘내가 그것이오’ 하고 영포티 고백을 먼저 날리는 작가라서 나 혼자 몰래 내적 친밀감을 키우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차와 시대착오
전하영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51102 전하영.


벌써 4년, 5년 전에 소설보다 시리즈와 젊은작가상수상집에서 전하영의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를 읽었다. 영화 쪽 일을 했던 소설가라는 정도만 알았다. 단 한 편이었지만 작가의 소설이 좀 더 궁금했다. 그래서 이 소설집을 한 해 전에 사 놓고는 이제야 읽었다.

소설집 속 여성들은 예술 공부하러 유학 다녀왔지만 대개는 이것도 저것도 못되어 방황하는 중년 여성들이다. 예술가적 자의식은 있지만, 그게 밥도 명성도 못 벌어다주고 스스로 늙음을 자각하며 위기의식과 불안을 느낀다. 영화나, 미술이나, 소설에 삶을 바친 것 같지만 또 딱히 바친 것 같지도 않고 이렇게 되어 버렸군, 그래도 살아야지 별 수 있나, 이런 변주만으로 한 권이 가득 차 있었다.

지금의 나와는 접점이랄 부분이 거의 없어서, 그나마 연배가 등장인물들보다 내 쪽이 약간 어릴 뿐 이쪽도 이제는 늙을 일만 남은 중년배인데, 나는 너무 가진 게 많은가, 속물인가, 공부하다 나 모르는 사이 훅 늙어서 청년에서 중년으로 스위칭 되는 걸 잘 못 느껴서 그런가, 나이에 대한 인식마저 결국 겹치거나 공감되는 부분을 못 찾았다.

이건 내가 이 소설을 사 놓고 일년만에 펼친 시차 탓도 아니고, 작가가 시대착오적인 이상을 품어서도 아니고, 오히려 어느 시기의 마스크 빼고는 대부분 소설이 시대성을 담고 있다고도 말하기 힘들다. 좋게 말하면 아무 시대에나 들어맞을 수도 있겠지만 이 시대에도 다음 시대에도 나에게는 맞지 않는 소설…
그냥 책을 잘 못 고른 나의 착오일 뿐이다.

밴드를 한다고 깝치고 다닌 적도 있고, 소설을 쓴다고 또 한참 습작하며 좋은 글을 이뤄보고 싶은 꿈도 꿨던 적이 있지만, 대학에 다시 가겠다고 녹슨 머리 굴려가며 지키던 책상머리가 있었지만, 이상하게 회한 같은 건 없다. 그냥 딱히 뭘 한 게 없는데 무언가 되어 있는 느낌이고 독감에 걸린 것 빼면 대체로 삶에 만족한다. 내 시간과 노동을 갈아 돈을 조금이라도 계속 받아서 그럴지도 모른다. 예술은 품이 들지만 그게 돈이 되고 남들의 관심을 받고 사랑받고 계속해 나갈 만큼 동력을 얻기가 정말 쉽지 않다. 쉽지 않은 일들을 오늘도 계속해 나가고 있는 사람들은 거 어쩔 수 없죠. 힘내십쇼.

+밑줄 긋기
-왜 모든 것이 적당한 장소에 제대로 존재해주지 않는 것인지, 언제나 의문이었고, 대개 인생은 그렇게 흘러갔다. (93, ‘영향’ 중)

-“언니, 제 목표가 뭐냐면요. 약까지만 가는 거예요. 만약 미쳐서 약을 먹더라도, 남들한테 민폐 끼치지 않고 살려고요. 그게 제 목표예요.”
“아까는 결혼이라며?”
난희는 주방 찬장에 얌전히 포개져 있을 자나팜정을 생각하며 물었다. 자나팜은 마음이 너무 불안해질 때마다 하나씩 먹으라며 의사가 처방해준 약이었다.
“그건 단기 목표고요. 결혼도 하고 미치지도 않기.” (101, 그게 목표로 삼는다고 되는 건 아니란다...당신 옆의 미친년에게 무례를 범하지 않도록 아니 뭐 저 정도야 실례 정도일까, 하여간에 약은 나쁜게 아니란다. 남들한테 민폐 끼치지 않고 살려고 애쓰는 수단이기도 하단다.)

-그들은 어딜 가나 눈길을 끄는 커플이었다. 매번 호기심어린 시선이 따라다녔다. 그들의 일반적이지 않은 나이 차는 젊은 사람들에게도 곤혹스러운 것이었던 모양이다. 편협함은 늙은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길거리에서 팔짱을 기고 가다가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을 의식하게 되면, 그 눈길이 때때로 위협적일 만큼 집요하다고 느껴질 때면 숙희는 마치 찬영의 친누이, 혹은 막내 이모라도 되는 것처럼 그에게서 반걸음 떨어져 성적인 뉘앙스를 탈락시킨 채 무감하게 서 있곤 했다. 숙희는 나뭇 조각이라도 되는 것처럼 시선을 끌지 않으려 노력했다. (137, ‘숙희가 만든 실험영화’ 중, 편협함은 늙은이보다 늙지 않은 이들이 더 강력하게 발휘한다는 것... 적어도 난 그랬다)

-숙희는 다시 한번 가슴을 쓸어내렸다. 출산과 육아의 현실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감히 그런 꿈을 꾸고 앉아 있었을까. 인간이라면 마땅이 누려야 하는 권리라도 되는 듯이. 엄마가 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는 것만으로도, 개인으로서의 한 여성이 이전에 누렸던 거의 모든 삶의 지분을 빼앗기는 그런 험악한 세상에서 살아가면서도. (140, 빼앗기는 것도 많지만 쥐콩만큼 쥐어주는 것도 있긴 함. 저걸 언제 다 키우냐 하는 측은한 눈빛 같은 거. 나한테 주는 건 아닌데 애한테 주는 호의 같은 거. 예전엔 다들 아무것도 안 알려주고 부모가 되라고만 한다고 생각했는데, 뭐라도 알려주면 대부분 부모가 되는 걸 거부할 것이기 때문에 안 알랴줌 이었던 걸 뒤늦게 알았다. 인류가 이만큼 번성했던 건 대부분의 인류가 무지했기 때문이고, 만약 인류가 쇠락 멸종한다면 이젠 다들 너무 많이 알기 때문일 것이다.)

-잃은 것은 석 달 치 월급. 그녀는 세 가지를 깨달았다. 첫째, 주식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것. 둘째, 예술 너머에는 거대한 ‘진짜’ 세상이 존재하며 대다수의 인간은 예술이 아닌 돈에 관심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뼈아프게 다가오는 사실은, 그런 속물적인 욕망에 관한 한 자기 자신 또한 예외가 아니라는 것. 더이상 예술만으로 만족하며 인생을 살아갈 수 없어졌다는 것. (189, ’시차와 시대착오‘ 중. 돈은 힘이 세다. 미친 예술을 이길 만큼. 예술이 이기고 돈이 될 즈음 우린 이미 다 죽었다.)

-그러나 그녀는 기억한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엄마가 집을 떠났다는 사실을 재차 상기하며 기뻐하는 자신을. 그 여자가 집에 없어. 그 여자는, 이제 정말 집에 없다! 엄마가 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무척, 무척 슬펐지만 안도했다. 그리고 미루는 죄책감을 느꼈다. 할부로 슬픔을 나눠 갚듯이 천천히, 차곡차곡, 그것은 그녀의 일부가 되었다. 어떤 희생으로부터 현재의 삶을 얻어냈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빛나는 삶, 자유로운 삶, 먼 곳에서의 삶. 엄마가 살고 싶었던 그 삶을 자신이 대신 누리는 것. 엄마가 동경했던 어느 외국영화 속의 젊은 서양 여자처럼. (204, 미루보다 조금 더 일찍 자랐던 나는 아빠가 집을 떠난 뒤에도 늘 불안했다. 언제 이 사람이 다시 돌아올지 모른다는 불안. 불길. 죄책감 없이 슬픔 없이 남은 삶을 잘 살 자신이 있지만 부고는 들리지 않고… 미루에게 야 넌 사장님이 최저시급도 안 주다가 최저시급으로 올려줬다고 사장님 어떡해 망하면...할 사람이로구나 하고 정신차리라고 하고 싶다.)

-우습게도 그 순간 미루는 자신이 준회와의 관계를 더 이어갈 수 없었던 이유도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때, 평범하고 행복했던 어느 날들에, 작은 다툼을 끝낼 때마다 그가 미루에게 장난삼아, 작은 동물을 대하듯 그녀를 귀여워하며 “정신 나간 여자 같으니”라고 말했던 것. 아무런 악의 없이 반복되었던 그 말. 그녀의 가장 큰 두려움이었던 그것. 바로 어머니의 세계에 속해버리는 것.

망상.
미루는 일생에 한 번은 환청을 듣거나 환각을 경험하게 되리라는 예감을 안고 살아왔다. 그것은 몸안에 흐르는 잠재된 가능성으로서 항상 그녀를 괴롭혀왔다.
(205, 그래, 나 미친년이다 끼야야악- 이런 나라도 계속 사랑해 줘. 나라면 뉴욕으로 숨는 대신 그랬을 거다.)

-아버지, 인생의 절반 이상을 살았다는 건…...아무 느낌도 아니군요. (237, ‘경로 이탈’ 중. 별 거 있을 줄 알았냐)

(오 밑줄 긋기 다시 읽고 보니 ‘미친년’이라는 주요한 교차점을 놓쳤구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매월당 김시습
이문구 지음 / 문이당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20251026 이문구.

엊그제는 어린이들 동아리날이라 관악구에서부터 노들섬까지 5킬로 남짓을 걸어갔다. 이번엔 대교 중간까지 죽 갔지만, 대교를 안 건너고 서로 틀면 노량진과 사육신공원이 있다. 5년 전 여름, 코로나 들끓던 시절 10살, 3살 데리고 방학숙제 한다고 사육신공원에 갔었다. 충신들 모시는 사당 건물이랑, 묘역이랑, 한강 내려다보이는 언덕이랑, 휘-돌다가 날이 너무 뜨겁고 모기가 자꾸 애기를 물려고 해서 오래 있지는 못하고 사진 몇 방 찍어주고 집에 왔다. 그때도 충에 대해 생각했다. 그렇게까지 목숨 바칠 일이었나, 불충한 마음. 사실 욕심쟁이들이 어떤 마음이든 먹고 일러바치면 자동 충신+걸려든 사람은 저세상 예약이 되었던 시절일지도 몰랐다.

어려서 금오신화를 만화로 엮은 걸 정말 재미있게 봐서, 6학년 때인가 만약 반에서 장기자랑으로 연극제를 하면(5학년에 했었어서 또 할 줄…) 이생규장전을 극화해서 올려야지, 다짐했다. 쟤랑 쟤는 오랑캐 시켜야지...했는데 연극제는 없었고, 어린 놈이 연극 만들 원대한 구상을 했다는 기억만 호기롭네, 하고 남았다.

학이시습지불역열호. 이웃 양반 할배 최치운이 이 문구에서 따다가 김시습의 이름을 붙였다고 했다. 그런데 이름에 시가 들어가 그런가 맨날 시만 쓰고, 그래도 마음은 풀리지 않고 음습하다. 길로 숲으로 끝내 나돌아다닌다. 그렇게나 배우고 때때로 익혔어도 기뻐보이지 않는다. 이문구 선생은 문구라서 자꾸 문구를 쥐고 글을 썼겠지...죄송합니다.

어쩌다 인생 꼬인 어린 시절 수재는, 과거봐서 입신하려던 찰나, 마침 세조가 단종을 폐하고 거기에 들러붙어 잘먹고 잘살며 관련된 사람들 다 죽이고도 고개 빳빳한 관리들 사이에 끼기 싫어 응시 자체를 포기하고 떠돈다. 절과 산을 오가며, 그런데도 글 쓰는 건 놓지 않아 누가 읽어줄지 모를 ‘금오신화’도 남기고, 시편은 수두룩 빽빽 쓴다. 그런데 초야에 묻힌 야인 같지만 의외로 핵인싸여서, 친구들이 다 벼슬아치에 급제한 인간이고 보니 다들 막 시습 챙겨주고 편의 봐주고 그래서 굶어 죽지도 않고 몇 십년을 그럭저럭 술퍼먹으면서도 안 죽고 살아왔다. 시종 같은 어린중들도 있고, 결혼도 두 번(둘다 금세 사별), 친구 유자한이 후사 보라고 빌려준(헐) 기생도 있었고…
특히 기생 소동라와 잠시 맺어질 뻔하다가 금세 헤어지는 부분은 깬 척 하면서 제사에 대잇기에 자손생산에 집착 못 버린 가짜 땡중 유교아재 술주정뱅이에다 꽁생원 같아서, 김시습 좀 관심 있게 봤는데 조선 사람이 조선 했지...했다. 기생 소동라도 밉상이긴 한데 나중에 그녀가 새벽길로 도망간 뒤 먹 갈아서 추한 꽃이라고 그녀 모습을 떠올리며 휘갈긴 글은 진짜 쪼잔하게 느껴지고, 못생겼네 어쨌네 해도 미련이 남았구나 했다.

책 중간쯤에 매월당이 자기 얼굴을 먹필로 그려놓고 누구 얼굴인가? 하고 고사 속 절개지킨 인물들을 나열하고 또 그가 지은 한시를 연결하는데...그 부분을 읽어넘기기란 정말 참을성을 시험하는 일이었다. 루쉰이 단편집 3권에서 옛 고사 타령하는 거 뺨치게 모르는 사람들 나오고, 그래도 어떤 사람인지 개략적으로 소개는 하지만 그렇게 비슷한 인물들이 쎄고 쎘음을 줄줄 읊으면서 매월당이 자기도 거기에 동일시하는 건지,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한탄하는 건지, 아직도 열거 속에 있기 때문에 몇 명이나 더 나오는지 살펴보고 판단(하거나 욕)해야 겠다. 다 읽고 나니 아 이렇게까지 열거할 일이냐...쪽수 채우기 같고 재미도 감동도 없다. 서두의 작가의 말에서 작가가 아 이 작품 망했다, 하고 실토한다음 읽게 하는데 확실히 이문구의 다른 좋은 작품들 생각하면 이 작품은 좀 망한게 맞다.

무력으로 왕위 찬탈하는 게 폭력적이고 정당하지 않다는 면은 동의하지만, 이제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는 선출직 임기제 대표들을 뽑았다 말다가 하는 시대에는 직계비속이 왕위 잇지 않고 방계든, 전혀 다른 핏줄이든 왕이 바뀐 거 가지고 저렇게까지 자기 인생 바친 걸 신념이라고 우국충정 어쩌고 할 것인가 싶기도 하다. 진짜 충심이면 벌레충들 우글대는 그 아사리판이라도 뛰어들어서 나 하나 갈리더라도 바꿀 수 있는 만큼 바꾸려고 해야 하는 거 아니냐...어금니만 박박 갈고 욕만 하면 다냐...했더니 사실 그게 나네...오호호호

오히려 기존 임금 배신 때리고 새 왕 모시고 왕위 찬탈하고 하는 걸 저렇게 열거한 걸 두고 보면, 왕정이란 그렇게 무한 쿠데타로 갈고 갈리는 부실한 뭔가가 아닌가, 저걸 막겠답시고 왕의 힘을 강화하면 그 왕이 선한 왕이란 보장이 없으니 또 신하들과 백성들이 갈리고 갈리겠네, 그래서 다들 민주주의 짱짱 하는 거구나 새삼 지금 입장에서 과거를 판단하는 문화 상대주의적이지 못한 태도를 보이는 나놈이고…(대충 중학생들 배우는 내용. 정치 가르치기 너무 힘듦. 되게 재미없어함. 내 탓이다.)

그런데 마저 읽어보니 충신들이 죽을 각오하고 왕위찬탈 반대하는 말이라도 하면 다 역신으로 찢어 죽이고, 그 식솔들은 소위 공신놈들, 일름보에 죽여무새의 노비가 되고, 땅도 공신놈들이 다 빼앗아 차지하는 거 보면 세조와 친구들이 나쁜 놈들이 맞긴 하다. 벼슬 안 하고 입 꾹 닫고 초야에 묻혀 세상 안 나오는게 최선일 세상에서 김시습도 말로 못할 건 다 쓰고, 자기 봐줄 친구들 있는 자리에서만 욕하고, 사실 대부분 욕하고 성질 내는 건 세조 예종 다 죽고 성종 때이긴 하네... 진행이 역순이라 정신이 없긴 한데 이놈의 세상, 하고 울화가 치밀고 세상이 거지같아서 내가 뜻을 못 펴지 인생 꼬였지...하고 살면 고통이긴 하겠다. 그냥 내가 모자라서 그래... 하면 좀 덜 불행했을까. 내가 요새 그런다. 오세 신동이 오십세 신동 못 가듯 어려서 수재가 사십세 바보가 되는 것이다...어쩔 수 없네 하니까 조금 덜 불행함…

우리 동네에 양녕로라는 길이 있고, 양녕대군의 묘인 지덕사가 있다. 이 소설을 보니 양녕대군은 세조에게 단종을 죽이라고 소도 올리고 난리가 아니였다. 세종 손자가 싫었냐… 하여간에 코닿을 데에 나쁜 아저씨 묘도 있고, 조금만 더 걸으면 노량진이라, 평생 남을 이름 대신 일찍 목숨 거둔 선생님들 묘도 있고, 한강도 있고 국사봉도 있고 다 있다. 걷고 쓰기만 하면 되겠는데 요즘엔 걷기만 한다. 쓰고 싶음 쓰겠지.
그리고 누가 이문구 선생 책 본다고 하면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읽으시우. 그다음엔 ’관촌수필‘, 더 볼작시면 ’우리 동네‘까진 안 말리는데 ’매월당 김시습‘은 훠이훠이, 그냥 금오신화나 읽으시우, 하겠다. 이문구 선생이 1992년 51세쯤 이 소설책 내셨는데, 이제 한물 갔네, 갔어, 하기엔 이후 60세 무렵 낸 마지막 소설집으로 동인문학상도 타고, 그게 제법 읽을 법하니 사람은 죽기 전엔 모를 일이고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닐 수도 있다.

+밑줄 긋기
-너는 양 아닌 양
나는 사람 아닌 사람
같이 물건 아닌 물건이라
서로 몸 밖의 몸을 가졌으니
누가 너를 쫓고
누가 나를 찾을 것이랴
너는 바위에 뿔을 걸고
내 갓은 바람에 벗겨지는데
너는 꼬리로 푸른 이끼 만지고
나는 폭포수에 발을 씻나니
정답게 볕을 나눠 쪼이며
우리 청산에 함께 사세나.
(203,‘영양이 저만치 달아나 해바라기하다’ 중. 이렇게 김시습의 무수한 시편 중 여러 가지가 소설 안에서 소개된다. 물아일체에 그놈의 백구타령이 많은데 주로 바닷가 동네 부임했다 해먹을 만큼 해 먹은 뒤 유사 안빈낙도하는 사람들이 갈매기 타령이고, 산에 처박혀 산삼처럼 늙은 이 아저씨는 산에서 영양 타령이다. 사실 직전에 등장한 도망간 기생첩 이야기 에둘러 쓴 것 같다.)

-자종의 아내는 위에서 자종이 어진 것을 알고 불러서 크게 쓰려고 하자 자종에게 말하였다. 왈, 당신은 신을 삼는 것이 직업으로, 왼편에는 거문고가 있고 오른편에는 책이 있으니 즐거움인즉슨 그 속에 있다. 사람이 편히 쉰다 한들 고작 다리를 펴는 것이요, 비록 맛나게 먹는다 한들 고기 한 점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데 이제 다리를 펴는 재미와 고기 한 점의 맛을 위하여 바야흐로 초나라의 걱정을 짊어지겠다는 것인가. 자종은 아내의 말에 길이 있음을 알고 깊숙이 숨어 들어가 남의 논에 물을 대주는 일로 나머지 삶을 마쳤으니, 참으로 제 길을 갔던 사람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다.
‘덧없는 인생에 갈 길은 많지만 저승으로 난 길만은 똑같다’고 한 한퇴지의 시처럼, 저승길이 아닌 다음에는 각자가 선택한 길을 가는 것이 사람이 사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길을 가되 지름길이 있음을 알면서도 좁고 굽은 에움길로 들거나, 비탈지고 가파른 벼룻길로 들거나, 더디고 적적한 두름길로 들거나 하는 것은, 사람마다 사는 나름과 모습이 대개 같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이치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러니 애초에 잘못 든 길임을 가다가 알았다고 하더라도 행여 수원수구할 일은 결코 아니었다. 또 비탄하고 절망할 일도 아니었다. 만일 가다가 가던 길을 돌이킨다면 오다가 맛본 오던 길의 고달픔만을 곱으로 겪게 될 터이었다. 다만 약간의 겨를은 있으니 그것은 그 자신이 스스로 위안을 꾀할 수 있는 점일 것이었다. (211-212, 걷기 쟁이 샛길 쟁이끼리 약간의 공감은 되는 ‘길’론)

-한 30년 동안 머리 검은 짐승의 고기로 안주를 하며 주야로 갈아 대다가 잇몸에서 달아난 이빨이 그렇고, 못 볼 꼴만 보는 데에 질려 버려 저만치에 있는 것만 보이고 이만치에 있는 것은 보이지 않게 된 두 눈이 그렇고, 못 들을 소리만 듣다가 열이 오른 나머지 먼 데 소리는 가까워도 옆의 소리는 아득하게 들리는 두 귀가 그렇고, 산수간에 티끌을 이고 산 적이 없어 감고 빗기를 게을리하는 사이, 반은 세고 반은 빠져 버린 쑥대머리 또한 그러하였다.
(212-213, 그건 늙으면 거의 다 그래요 님같이 안 살아도…)
그뿐만도 아니었다. 자나깨나 들리는 영월의 소쩍새 울음소리로 애를 태우는 사이에, 그을음을 뒤발한 것 같이 타 버린 검은 얼굴도 길에서 얻은 것이었다. 한번 들어간 뒤로 더욱 우묵해진 눈이며, 볼에 갈래갈래 골이 파이면서 한결 커 보이는 코도 길에서 얻은 것이었다. (213, 단종은 불쌍하지만, 얼굴 검은 건 타기도 탄 거지만 술 너무 마셔서 간이 나빠져서 그런 거예요 아저씨… 저도 많이 걸으니까 피부도 새까매지고 나이 드니까 눈도 음푹 볼도 더 홀쭉 그러더라고요. 아, 수능 때문이냐?!학교 때문이냐?!)

-하룻밤 사이에 하늘이라도 바뀐 양 무서리를 하면서, 잇꽃물과 치자물을 한꺼번에 뒤집어쓴 것 같던 계룡산의 단풍도 며칠이 못 가 가랑잎으로 쌓이고, 자고 나면 허옇게 된내기를 하여 섬돌 밑으로나 남아 있던 늦풀 몇 포기까지 아주 못쓰게 얼데쳐 놓곤 하던 10월 하순께의 일이었다. (316, 이 계절이 입술 근처까지 왔다. 저건 음력이겠지.)

-매월당은 다 그만두더라도 초동에 베풀던 황감제만은 꼭 한 번 과필을 겨루어 보고 싶었다.
황감제는 제주도에서 진상한 감귤을 반궁과 사학에 내리고, 그 감귤을 과제로 하여 보이던 과거였다.
그렇지만 별동의 승낙은 끝내 받아 낼 재간이 없었다.
매월당은 그것이 두고두고 걸리고 섭섭하였다.
회고하면 감귤의 벗기기 아깝던 껍질의 그 빛깔, 쪼개기 아깝던 앙증한 그 태깔, 삼키기 아깝던 과육의 그 맛깔, 날리기 아깝던 그 향긋한 향기에 속절없이 반했던 숫진 동심의 소치였을 거였다. (349, 성균관 청강생이던 시절 귤을 걸고 보는 시험에 응시하고 싶었지만, 청강생이라 응시 기회 얻지 못해 아쉬웠던 귤이 먹고 싶은 귀여운 시습 어린이. 우리집 어린이들은 내가 안 떨어지게 귤을 자꾸 사 주니 조선 양반보다 낫게 사는 구나...)

-“선생들, 여기 계셨소이다그려.“
매월당은 가슴이 복받쳐서 말을 잇지 못하고 엎드려서 울었다.
육신의 머리는 섬에 담아다가 무덕지게 쏟아 부리고 간 그대로 한군데에 쌓여 있었다. 바람결에 맡은 시취로 하여 곧장 찾아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효수경중을 한다고 머리끄덩이에 명색을 적어 매어 놓은 종이 오리가 마른 풀잎처럼 바람에 나부끼고, 저만치 떨어져서 희읍스름하게 보이는 것은, 속을 비우고 내버린 섬이 바람에 뒹굴다가 움버들의 밑동에 걸려 있는 것이었다. (392-393, 효수에 능지처참 당한 육신의 머리가 버려진 갈대, 억새밭에 시습과 몸종 천석이가 비와 바람을 뚫고 몰래 스며가 울면서 수습을 해오는 장면이 나름 작가님이 제일 힘을 준 부분으로 읽혔다. 죽으면 끝, 싶었는데 그 죽음 이후마저 모욕을 주고 애도도 금기되고 제대로 쉬도록 모시지 않는게 사람들에게는 가장 상처가 되는 모양이다. 술주정뱅이 낭인으로 늙은 김시습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나름 역순으로 거슬러올라가 그가 목도한 참상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 아무 무엇도 아닌 몰골로 그렇게 이르렀다고 한다면,앞으로 그 무엇이 기어이 되리라거나, 그 무엇에 영 못 미치리라거나, 그 무엇에서 오히려 지나치리라거나 하는 따위의 앞날에 대한 어떤 기약도 막연해지는 나이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것은 대체 무엇이더란 말인가.
매월당은 그에 대한 답도 생각하고 있었다.
다 된 미완성.
아직까지는 그것이 답이었다. (409, 작가 선생님이 이 소설에 대한 답으로 생각한게 이거겠구만… 저는 아직 몇살 더 어리니 덜 된 미완성일까요?)

-하루는 외조부에게 시는 어떻게 짓는 것인지를 물었다.
“일곱 글자가 나란히 어우르는 가운데, 소리의 울림에 높낮이가 있고, 뜻은 달라도 같은 모양으로 둘식 짝이 되어야 하고, 또 일정한 곳에다 운을 달아야 하느니라.”
그 말을 듣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런 것쯤은 저도 할 만합니다. 할아버지께서 한번 첫 자를 불러 보세요.” (415, 시 짓기 조기교육과 삼세 신동의 패기. 율곡은 신동이면서 그래도 뜻을 펼치기라도 했는데 시습은 시를 잘못 타 성질만 뻗치다 갔다.)

+20251024 노들섬에서 구름 구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변신.시골 의사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0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20251020 프란츠 카프카.

1973년에 나온, 영문학 전공자가 번역했다는 문예출판사판 카프카 단편선은 아무래도 독일어를 직접 옮긴 책은 아닐 것 같다. 그런데 앞서 두 번 읽은 민음사 카프카 단편선에 비해 잘 읽혔다. 거기엔 미완의, 이미지만 잡힌 토막글들도 여럿 실려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번에 이 책에 실린 단편소설 형태를 갖춘 다섯 편(변신, 유형지에서, 단식광대, 시골의사, 판결)을 읽는데 대부분 새롭게 읽혔다. 마지막의 ‘판결’만 읽어 본 기억이 났다. 아빠가 나보고 나가 뒤지래...하고 인상 깊었던 것 같다. 작가가 법을 배워 그런가 소설이 죄 ‘판결‘, ’소송‘, ’성‘에서도 뭔 결정을 기다리다가 읽다보니 뚝 끊겨서 아...이거 미완이었구나 했던 기억만 난다. 그냥 카프카는 나에겐 졸린 작가...왜들 좋다하는지 모르던 작가였는데…‘소송’은 사 놓고 읽어야지...하다가 10년이 흘렀다.

아무튼 이번에는 졸지 않고 흥미롭게 소설을 읽었다. 악몽에 가까운 환상들은 나한테 소설이 뭔지 다시 생각해 보라고 했다.

나는 벌레가 되지 않을 것이다. 유형지에서 사형을 당하지도, 굶어 죽지도, 하녀를 불한당한테 맡겨 가며 왕진을 나가지도, 물에 빠져죽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면 벌레가 되었을 수도, 이상한 기계 속에서 살갗에 글씨가 천천히 새겨지며 12시간에 걸쳐 죽어갔을 수도, 하녀를 빼앗기고 왕진을 가거나 그 모욕당하는 하녀가 될 수도, 나가 죽으라는 부모의 말에 정말 물에 빠져 죽었을지도 모른다. 환상이라 말하지만 사실 다 있을 법한 이야기였다. 나는 내 폐의 건강을 더 살피고, 너무 결벽 떨지 않고, 글에서 구원을 찾지 않고, 역시나 호흡기에 안 좋으니까 나무를 보듬고 다듬는 일은 다음 생에 미루고, 쓰다가 힘겹다가 죽은 사람들이 남긴 글이나 보기로 했다. 만약 벌레가 되어서 사과가 등에 박히면 썩기 전에 쑥 뽑아내서 먹어버려야지. 그리고 창을 열어 놓으면 뚜벅뚜벅 기어나갈 것이다. 모처럼 만에 노예 가장에서 벗어날 참인데 왜 잠자는 누구 좋으라고 방에 처박혀 죽어줬을까… 길거리 헤매며 출근도 안 하고 쓰레기가 입맛에도 맞으니 아무거나 주워먹고 가족들따위 명절에나 보든가 말든가 하고 자유로울 수 있었는데, 벌레는 그런 생각에까지는 미치지 못해서인지 남 좋은 일만 한게 서글펐다. 아니 방밖에서도 점액 묻히며 기어다니는 나를 보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은 없겠지...경악하고 뭘 던지고 괴롭히고 경찰에나 세상에 이런일이나 동물농장에 신고할 것이다. 그럼 그럼에도불구하고 난 다 왕 물어 버리고 잡혀가든 죽든 할 거야. 기왕 태워버리기로 했으면 막스 브로트같은 못믿을 놈한테 원고 맡기지 않았을 거야.

+밑줄긋기
- 아무리 우둔한 자라도 최후에는 예지를 얻게 됩니다. 우선 눈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눈을 중심으로 해서 전신에 퍼지게 됩니다. 그것을 보면 누구나 써레 밑에 한번 누워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으로 집행은 일단 끝나고 죄수가 글자를 해독하기 시작합니다. 죄수는 마치 무엇을 엿들으려는 듯이 입을 죽 내밀지요. 당신도 보신 바와 같이 글자를 해독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 데 죄수는 자기 몸의 상처로 글자를 해독합니다.(‘유형지에서’ 중, 듣기만 해도 아프잖아 미친놈아)

-˝나에겐 맛있다고 생각되는 음식이 없습지요. 맛있는 음식이 있다면 까짓거 사람들의 인기 같은 것을 얻으려 할 것 없이 당신이나 다른 사람들처럼 실컷 배불리 먹고 살아왔을 겁니다.˝
이 말이 단식 광대의 입에서 나온 최후의 말이었다. 그러 나 흐려진 광대의 눈동자에는 단식을 계속할 수 있다는 자부심과 확신의 빛이 어려 있었다.(‘단식 광대’ 중. 이건 실제로 이렇게 말라죽는 여자애들이 많아서 에효에효 하고 읽혔다. 광대가 사랑하고 광대를 사랑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아마 같이 먹는 일을 즐겼을 수도 있어.)

-˝그러니까 너 이외에 무엇이 있는지 이만하면 알겠지. 지 금까지 너는 너밖에 몰랐다. 사실 너는 순진한 어린아이였지. 하지만 너는 더욱 엄밀한 의미에서 악마 같은 인간이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너에게 빠져 죽을 것을 선고한다!˝(‘판결’ 중. 생각보다 부모를 죽이는 소설은 오이디푸스 이후로 잘 안 나온다. 아류가 되기 싫었는지. 그런데 자식 잡아먹는 소설은 크로노스 이후로도 잘도 나오네. 예전의 내 친구는 크로노스가 자식 뜯어 먹는 그림을 보고 무서워서 울었다고 했다.)

-카프카는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도 그것에 절대로 만족할 수 없었다. 특이한 일은 시간이 나면 카프카는 가구를 만드 는 일을 배우러 다녔다는 사실이다. 대패질한 나무 냄새, 톱 소리, 망치 소리에 그는 매혹당했다.(나도 목수가 되고 싶던 공무원인데. 소설은 못 쓰고 있지만요.)

-˝나는 한 마리의 까마귀입니다. 한 마리의 카프카 Kavka(까마귀)인 것입니다. 데인호프에 있는 석탄 상인이 한 마리 가지고 있더군요. 그 카프카는 나보다 더 잘 지내고 있습니다. 물론 날개를 잘리긴 했습니다만••••••. 내 경우에는 날개를 잘릴 필요조차 없습니다. 내 날개는 퇴화되어 있으니 까요. 나에게는 높이도 거리도 없습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인간들 사이를 뛰어다닐 뿐입니다. 인간들은 나를 미심 쩍은 듯 응시합니다. 아무튼 나는 위험한 새요, 도둑이요, 까마귀입니다. 하지만 반짝이는 까만 날개를 가져본 적은 없습니다.˝(나도 사마귀 겸 까마귀인데...시방 위험한 새였는데…)


+왁 저 표지 벌레였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