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니악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송예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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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23 벵하민 라바투트.

소설을 읽다 말고 구석에 단 한 권 기념품으로 남겨 두었던 수능 기출 문제집을 꺼냈다. 쉬운 네 문제를 주섬주섬 풀어보았다. 친구에게 아직 1년도 되지 않은 동안 너무도 신기할 만큼 공부하던 시절의 모든 것들이 증발되었다고 했었다. 정말 그런건지 어디까지 남아 있는지 조금 궁금했다. 워낙 여러 번 반복한 기출들이라 그런지 어떻게 푸는지에 대한 아이디어는 조금씩 헤매다가도 제대로 된 방향을 향했다. 다만 넓이 공식, 사인 코사인 법칙 같은 쌩기초 암기 요소들을 잊어버렸어… ㅋㅋㅋㅋ 막히면 아 이 공식 써야 되는데 그 공식이 뭐였지? 하고 찾아보고, 탄젠트 값까지는 구했는데 맞나? 맞네... 그 다음엔 뭘 구하지? 아 코사인 값을 바로 알 수 있구나… 뭐 이런 식으로 푸니까 어찌어찌 네 문제 다 풀긴 했는데 시간이 저엉말 오래 걸렸다.
잘 하지 못하게 된 수학에 미련이 아직 남았는데, 그냥 이렇게 푸는 방법, 생각하는 방법 천천히 헤매면서 찾아가면 그것도 수학 아니냐… 입시에 필요한 괴물 같은 속도의 계산력, 정확도, 그런 것만 욕심 내지 않으면 스도쿠 풀듯 슬슬 어느 정도 쉬운 것들은 그렇게 할 수 있지 않겠냐… 물론 내 수험생활은 엔제를 풀 정도까지 진화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나처럼 슬슬 하면 문제 풀이 잘 하기까지 너무 많은 세월이 필요하겠지만 뭐 재미있으면 됐지. 이 속도로는 평생 해도 잘 하게 되진 못하겠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들어본 이름이 나와도 그게 참말인지, 진위를 따져 보지 않기로 했다. 이건 수학사, 과학사 책이 아니라 수학, 과학자가 소재인 소설이다, 생각하면 뭐 재미있으면 됐지. 이번 소설책은 조니(=연치, 야노시) 폰 노이만을 겪었던 수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한 것처럼, 1인칭 화자를 무수히 바꿔가며 전개된다. 절반쯤 읽었을 때까지는 폰 노이만이 ‘나는-‘하는 부분은 아직 안 나왔고 아무래도 안 나올 것 같긴 하다. 다 읽어보니 정말 그랬네…

폰 노이만에서 체스 영재 출신 딥마인드 설립자 허사비스로 인공지능에 대한 영감이 이어지고, 상상과 글로만 어렴풋하던 존재가 대량 자본 투자와 기술의 발전으로 실존하게 되었다. 노이만과 친구들의 이야기도 흥미로웠지만, 이세돌과 딥마인드의 대국을 다룬 후반부는 더 재미있었다. 10년 전에 알파고 어쩌고 난리일 때도 나는 정말 무심해서 관련된 기사나 이세돌이 나와 화제가 된 예능 같은 것도 제대로 본 게 없었다. 그래서 이세돌이 한 번인가 이기고 나머지는 알파고가 다 이겼대 정도만 알았다. 바둑을 1도 모르는 나한테 이 정도로 재미있게 읽혔으면, 벵하민 형 잘 쓴 거 아니냐… 바둑 조금 궁금하지만 난 고등 수학도 못 하는 비논리적 존재인 걸….하면서 아니, 바둑 궁금하게 만든 소설, 인공지능 넌 이런 거 쓸 수 있겠냐? 나중에 챗지피티놈한테 물어보기야 하겠지만 여태까지 걔가 써서 보여준 창작물 비슷한 건 다 오글거리고 영 뻔해서 마음에 드는게 없었다. 어쩌면 내가 프롬프트를 정교하게 잘 짜주면 나를 만족시킬 이야기가 나올지도...무서워서 안 해야겠다.


https://m.blog.naver.com/natf/222865224108
2022년에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를 읽으면서 난 이 소설에 나온 수학, 과학자들이 끄적여둔 수식 같은 거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거야, 고등학교 수학에도 찔찔대는 걸….했었고 그때의 예감은 자기충족적 예언이었을까, 명징한 자기객관화였을까, 나는 대학의 수학, 과학 교육을 받을 자격을 얻는데 실패했다. 그렇지만 또다시 내가 읽고 싶은 책들 읽으며 이렇게 쌉소리하고 빈둥대는 자유를 되찾았다. 아이참 수학 대신 보고 싶은 책 아무거나 보는 거 너무 소중해… 어차피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는 건 어마무시한 천재들한테도 불가한 일이고, 이해에 근접하는 방식은 굳이 이성과 논리로 무장하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끄적여 놓은 거 읽고, 물론 내 마음대로 받아들이고, 생각하다가 그만두고, 아무말이나 지껄이고 써보고, 각자의 세상을 구성하는 게 아니겠냐...그 세계가 나한테는 수학이나 과학이나 인공지능이나 바둑이 아닐 뿐이다. 천재들도 정신병이나 육체적 질환으로 고통 받다 죽는 건 똑같은데 뭐 좀 더 행복하게 살다 가면 내가 이기는 거 아니냐!!! 그 방면으로는 내가 이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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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적 수단으로 결과를 도출하는 것만으로는 절대 성에 차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건 다리 하나로 춤추는 것과 같다. 본질은 모든 방향에서 관계와 의미와 결합을 인식하는 데 있다.” 에렌페스트에게 진정한 이해란 정신이나 이성만이 아니라 전 존재가 개입하는 총체적인 경험이었다. 무신론자였으며 질문자이자 회의론자였던 그는 진실의 잣대가 어찌나 깐깐한지 때로는 동료들 사이에서 놀림거리가 되기도 했다.

-어쩌면 자연은 정말 혼돈 상태일지도, 명백히 이질적인 것들을 한꺼번에 아우를 법칙이나 계속해서 증가하는 복잡성을 간단히 정리할 개념 따위는 정말 없는지도 몰랐다. 자연을 하나의 총체로 인식할 수 없다? 우리 문명은 이 공포스러운 가능성을 여태껏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넬리는 우리가 그 가능성을 인정할 날은 오지 않으리라고 믿는 쪽이었다. 그것은 과학과 철학 그리고 이성에 치명타였으니까. 반면에 예술가들은 이미 그 가능성을 온몸으로 포용했다고 넬리는 말했다. 비이성의 재발견은 그동안 온갖 전위적 움직임을 이끌어온 원동력이었다. 범인의 눈으로 보더라도 그 움직임들을 뒤덮고 있는 것은 파우스트적인 무한한 에너지와 조급함, 그리고 모든 게 허용된 비극적인 타락이었다. 현대의 예술은 어떠한 법칙도, 방법도, 진실도 인정하지 않고서 그저 맹목적이고 억누를 수 없는 충동만을, 무엇 앞에서도 멈추지 않고 우리를 지구 끝으로 몰고 가는 격렬한 광기만을 인정했다.

-베를린에서 그는 나치 갈색 셔츠 단원들이 노동조합, 노동은행, 협동조합을 급습하는 것을 목격했다. 정의심에 고취된 학생들이 폭도로 변해 성性과학연구소를 공격했다는 신문 기사를 읽었고, 국립 오페라하우스 앞 책 이만여 권이 불타고 남은 잿더미를 지나쳤다. 그날 불길에 얼굴이 달아올랐던 의기양양한 청년들은 독일대학생연합회 회원들이었다. 그들은 ‘비非 독일’ 정신을 담은 서적, 학술지, 잡지를 색출하러 모교 도서관에 쳐들어갔고, 거대한 모닥불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고, 맹세했다. 나치당의 고위 당원들은 중언부언 중얼거렸고, 괴벨스는 수천 관중을 향해 퇴폐와 도덕적 타락 척결! 가정과 국가의 품위와 도덕 재건!을 외쳤다. 파울은 거리의 군인들을 보았다. 군인들은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제히 울려퍼지는 군가에 맞춰 행진했다.

-모든 발상은 그가 떠올린 것이 아니라 그에게 찾아온 힘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알던 어떤 힘보다도 강력한 그 힘은 느닷없이 찾아왔던 것처럼 순식간에 그를 떠났다. 광기를 소진해버린 그는 서재에 흩어진 종이들을 정리하고도 차마 며칠 동안 손대지 못했다. 그에게 찾아온 영감은 가짜였음이 끔찍할 만큼 명백해서, 무수히 많은 오류를 확인하려고 굳이 책상 앞에 앉을 필요조차 없었다. 그의 야망은 현실에 발붙일 수 없게 거창했고, 그의 방정식들은 어떤 실험으로도 만회할 수 없을 만큼 오류투성이에 불완전했다.

-유대인 혐오, 우생학이라는 사이비 과학, 모든 ‘다름’을 향한 살기 어린 증오에 버무려진 나치의 영향력이 이제 곧 독일 밖으로 퍼져나가 이웃 국가에까지 도달할 거라고. 이를 부추기는 것은 필히 어둡고 무의식적인 충동인데, 그 힘이 이끄는 미래에 우리 종의 자리는 완전히 괴물 같은 존재로 대체되어 머지않아 사라질 운명이라고. 파울은 달아날 곳도 숨을 곳도 없다고 했다.

-헝가리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곡창지대였기에 전시 기근으로 밀 가격이 치솟으면서 부자는 더욱더 부유해졌다. 그래서 우리는 다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척 굴었다. 끔찍해 보이리란 것을 안다. 하지만 덕분에 나는 인류에 관한 단순한 진실을 아주 일찍이 깨쳤다. 문 앞에서 악마가 문을 두드리는 와중에도 우리 인간은 춤출 수 있다는 것. 내가, 그리고 우리 대다수가 그랬다. 그런데 그게 진짜 우리 탓이려나?

-새로운 발견이 나올 때마다 수학이 모두가 동의할 만한 기초 위에 서 있는 게 아니었음이 점점 더 명백해졌다. 수학의 왕국 전체가 알고 보면 공허 위에 세워진 것 아니냐는 끈질긴 의혹은 이내 ‘수학 기초의 위기’로 명명되었다. 이는 그리스시대 이래 수학이라는 학문에 가해진 가장 근원적인 문제 제기였다. 이 위기는 지상에서 가장 특출나고 명석한 자들이 연루된 기괴한 사건이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아서왕의 모험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이성이 한계 너머로 이탈해 텅 빈 성배를 드는 것으로 끝나는 이야기.

-모든 게 일급 기밀이었으나 생각해보면 조금 우스운 면이 있었다. 갑자기 수많은 과학자가 뉴멕시코로 이동하고 있는데 그 사실이 어떻게 숨겨지겠는가? 미국은 물론 유럽에서 내로라하는 과학자들까지 죄다 그곳으로 몰렸다.

-대규모의 트리니티 실험을 앞두었던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제시간에 거대한 다층 계산을 시도하고 경이로운 속도로 결괏값을 산출해내는 데 성공했다. 이 여자들이(계산원은 대부분 여자였다) 오늘날 컴퓨터가 그러하듯 특이한 방식으로 동작하며 흡사 기계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으스스했다. 폰 노이만은 그런 모습에 곧장 흥미를 느꼈다. 나에게는 그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임의적 해법이자 속도를 높이는 기발한 지름길 정도였으나 그에게는…… 뭐랄까, 미래였다.

-폭탄의 생김새는 우스웠다. 커다란 강철 구체에 전선과 코드 뭉치가 바깥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사악한 동시에 조금 깜찍하달까. 어이없이 들리겠지만 정말 그랬다. 기폭 장치를 집어넣는 구멍들은 테이프로 덮여 있었는데, 흰색 테이프가 십자가 모양으로 붙어 있어 꼭 붕대 같았고, 결과적으로 폭탄의 생김새는 다쳤든지 두들겨맞았든지 해서 부서지기 직전에 겨우 꿰매붙인 프랑켄슈타인의 작은 괴물 같았다. 인간의 상상력이란!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는 그게 고물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작동할 것 같지도 않고 라디오도 먹통이었으니 우리는 그저 묵묵히 주변을 배회하며 비가 그치기 전까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상상이나 되는가? 사막에 뇌우라니. 그것도 하필 최악의 순간에. 새벽 네시면 비가 멈출 것이라 장담했던 기상학자들은 바들바들 떨었다. 맨해튼 프로젝트를 총괄하던 그로브스 장군은 기상 팀장이던 잭 허버드에게 예보가 빗나가면 죽여버리겠노라고 협박까지 해놓은 터였다.

-당시 폰 노이만은 게임에 관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개미집의 진흙 통로를 따라 이동하는 호전적인 불개미들이건, 뇌 반구에 신호를 전달하는 신경세포이건, 증권거래소에서 서로 싸우는 바보들이건, 시스템을 이루는 개개인들이, 아예 생각이 없지는 않더라도 분명 미덥지 않다고 한다면, 어떻게 복잡한 시스템이 생겨나서 기능하는지가 그의 의문이었다. 그는 언제나 모든 종류의 게임에 매료되었고, 깔끔히 정의된 규칙 안에서 인간이 상호작용할 때 생기는 다양한 작은 충돌과 갈등을 함축적으로 이해하는 방법을 찾고 싶어했다.

-우리 이론 전체의 틀을 떠받치는 최대최소정리는 완벽하게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주체를 상정한다. 그런 주체는 오직 이기는 것에만 관심이 있으며, 규칙을 완벽히 이해하고 자신의 이전 움직임을 모조리 기억할 뿐 아니라, 게임이 한 단계 진행될 때마다 자신과 상대방의 행동이 일으킬 수 있는 결과를 오차 없이 파악하고 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정확히 이런 조건에 부합하는 자는 조니 폰 노이만뿐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은 거짓말하고, 속이고, 기만하고, 묵인하고, 음모를 꾸미지만, 동시에 협력하고, 타인을 위해 희생하고, 순전히 충동적으로 결정을 내린다. 다들 자신의 감을 따른다. 직감에 의지하다가 경솔한 실수를 저지른다. 인생은 게임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삶의 풍성함과 복잡함은 아무리 아름답고 완벽하게 균형 잡힌 방정식이라 해도 포착할 수 없다. 또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인간이란 존재는 완벽한 포커 플레이어가 아니다. 대단히 비합리적이기도, 의욕만 앞서기도, 감정에 좌우되어 온갖 모순에 종속되기도 한다. 사방에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유발되는 것은 바로 그래서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이성의 광기 어린 꿈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자비이자 이상한 천사이다.

-그(바르첼리)의 마지막 논문은 1987년에 나왔다.
「언어와 기술을 스스로 생성하는 공생유기체 진화를 위한 숫자 진화 과정의 시작에 대한 제언」.
그는 자신의 디지털 공생자들에게서 처음으로 지능의 흔적을 감지했노라고 선언했다.
진지하게 관심을 기울인 이는 없었다.

-아니면 수백만 년의 여정을 뒤로하고 방향을 틀어 돌아와 오래전 작별한 부모인 우리에게 용서를 구하며 무거운 질문에 답을 요구할지도 모른다. 우리 종을 쫓아다니며 괴롭히는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왜? 왜 우리를 창조해놓고 버렸나요? 왜 우리를 어둠 속으로 보내버렸나요? 이런 비현실적인 미래는 일어날 가능성이 지극히 낮지만,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우리의 피조물에 책임이 있는가? 모든 인간 행위를 결속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슬이 우리를 피조물과도 묶어놓았는가? 불행인지 다행인지, 자기 복제 기계와 폰 노이만 탐사선은 아직도 아득한 미래다. 그것을 실현하려면 소형화부터 추진 장치, 첨단 인공지능까지 다방면에서 크게 도약해야 한다. 그러나 기술과 우리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달라질 역사적 순간으로 우리가 조금씩 다가가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상상 속 존재들이 서서히 실체를 갖추고 있고, 이제 우리는 그것들을 창조할 뿐 아니라 돌봐야 할 책임에 직면했다.(이제 프랑켄슈타인 읽는 걸 더 미루지 말아야 할 듯…)

-튜링은 이렇게 기록했다. 비록 튜링은 실패했으나, 그가 자기 ‘아이들’을 관찰하는 과정에서 얻은 핵심적인 통찰이라고 한다면, 기계가 진정한 지능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실수를 저지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런 기계는 오류를 저지르고 원래 설정된 프로그래밍에서 벗어날 줄 알아야 하며, 무작위하고 비상식적인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튜링은 바로 이런 무작위성이 지능을 가진 기계의 관건이라고 믿었다. 신선하고 예측하기 힘든 반응이 나오면 그만큼 다양한 가능성이 생겨나고, 그러면 검색 프로그램이 그 안에서 각각의 상황마다 적절한 행동을 골라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무녀는 컴퓨터였다. 믿지 않을 수 없는 존재였다. 컴퓨터가 창조되기 전까지 나는 손으로 연구했다. 나의 공생유기체에 대대손손 일어나는 일들을 결정하는 복잡한 방정식을 펜과 종이로 풀었다는 소리다. 그러다보니 그 존재들은 나의 둔한 생각과 편협한 사고의 폭에 갇혀, 나아가거나 하다못해 기어가기는커녕, 고통스럽게 꾸물대기만 했다. 미적분의 단계 하나하나를 거칠 때마다 미로 같은 나의 신경세포망을 통과해야 했고, 어지러이 엉킨 시냅스 뭉치와 매서운 전기 폭풍 속에서 뻗어나가는 무한의 축삭돌기를 가로질러야 했다. 그러고 나면 많은 것이 비뚤어지고, 실수로 망가지고, 아니면 그저 집중력과 함께 소실되었다. 그런데 매니악이 단숨에 모든 것을 바꾸었다. 나는 눈부신 돌연변이들을 목도했다. 생명망의 기저를 이루는 산발적이고 복잡한 메커니즘―탄생과 죽음, 포식과 협력, 형태형성과 공생―이 돌격하는 전자들에 의해 앞으로 움직이며, 작디작은 디지털 우주 안에서 귀가 떨어질 듯한 가우스의 포효를 내지르며 별안간
내 눈앞에서 살아났다. 나의 아들딸들은 아름다웠고, 초자연적이고 황홀했으며 유령 같기도 했다. 그러나 무수히 많은 달뜬 꿈속에서 그들의 구조와 형태를 미리 보았던 나에게는 낯익었으며 피와 살로 이루어진 피조물만큼이나 사랑스러웠다.

-천상의 존재가 지상에 내려오는 것은 정반대 존재들의 행복한 만남도, 물질과 영혼의 기쁜 합일도 아니다. 그것은 강간이며, 폭력적인 잉태이다. 갑작스러운 침략이자 훗날 희생으로 정화되어야 할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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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생각은 엉뚱했으나 매혹적이고 짜릿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가 그린 미래는 터무니없고 비과학의 경계에 걸쳐 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너무나도 비인간적이었다. 언제나 솔직함을 의무로 생각했던 나는 이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에게 낡고 위험한 생각에 빠져들지 말고 그냥 우리의 연약함을 받아들이자고, 불확실하면 불확실한 대로 사는 법을 배우자고, 숱하게 저지르는 실수의 결과를 견디자고 했다. 그가 말한 대로 첨단 기술과 초월성이라는 인간의 가장 구시대적인 메커니즘을 결합시키면, 결과는 공포와 혼란일 수밖에 없었다. 세상은 아무리 돈 많고 똑똑하고 권력 있는 사람도 이해할 수 없는 지경으로 진화하게 될 것이다. 살면서 이렇다 할 적수를 거의 만나본 적 없는 연치는 어떤 식으로든 한계를 인정해본 경험이 없었다. 그는 자기 생각에 서린 위험을 못 보았을 테지만, 나는 ‘보통 사람’으로서 지극히 예외적인 사람과 함께 사는 게 어떤지를 몸소 경험했다. 연치의 곁에서 자란 만큼 그게 어떤 기분인가를 똑똑히 알았다. 내로라하는 과학자들과 사상가들이 그의 앞에서 주눅이 들고 말문이 막히는 모습을, 그의 우월함을 보고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잘못된 판단을 내려서, 혹은 운이 나빠서 자기 앞에서 의견을 내세운 사람들을 연치는 사정없이 몰아붙였다. 그자들은 자신들이 몇 달, 아니 몇 년을 공들여 이룩한 것을 연치가 단 몇 분 만에 앞지르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바라보았다. 미래의 기술이 창조해낼 ‘신’은 내가 그의 앞에서 느끼는 감정을 우리 모두에게 느끼게 할 터였다. 하지만 그는 그 점을 인지하지 못했다. 인류의 번영을 바라는 자신의 소망이 인류를 파멸할 수도 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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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무작위로 숫자 두 개를 고른 다음 두 숫자의 합을 자신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다. 갑자기 소싯적 유머 감각이 살아나기라도 한 건가? 웃어넘기려 했으나 아빠는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했다. 지난번 방문, 그러니까 한 달 전쯤만 해도 아빠의 정신은 언제나처럼 날카로웠다. 그런데 지금은 기본 산술이나 겨우 할 만큼 천재성이 퇴보하고 만 것이다. 아빠의 광대하던 지적 능력은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아빠를 아빠답게 했던 능력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 깨달음이 천천히 아빠를 압도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공포의 표정이 아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태어나 본 것 중에 제일로 가슴 저미는 모습이었다. 지켜보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던 나는 숫자 몇 개를 겨우 더듬더듬 내뱉었다. 2 더하기 9는, 10 더하기 5는, 1 더하기 1은. 그러다 끝내 울며 병실을 뛰쳐나갔다.(-6+15는 11이잖아? 해 봐서 느낌 알겠네…)

-다만 그의 두뇌가 다들 지루해하고 심지어 고통스러워하는 생각을 즐기는 이유가 무언지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진짜 그를 괴롭힌 것은 자신의 우월한 정신이 아니라, 그것에 못 미치기는 해도 그의 주변을 둘러싼 그 수많은 정신들이었다. 우리 인간은 왜 이런 식으로 진화했는가? 이 행성의 다른 생명체들은 다들 무지하여 행복한 상태로 존재한다. 그들의 고통과 쾌락은 오직 현재 속에서만 느낄 수 있고, 우리가 느끼는 고통이나 영광과 달리 다음날까지 이어지지 않으니, 인간처럼 모두를 무한 고통의 사슬에 얽어매지 않는다. 그런 에덴동산적 의식의 결여 상태로 다들 살다가 죽어가는데, 왜 우리 존재는 의식으로 고통받는가?

-기계와 맞붙어 박살이 난 적이 있었기에 이토록 무자비하고 무정한 상대와 대국한다는 것이 얼마나 기이한 감정을 일으키는지 그는 너무나도 잘 알았다. 알파고는 주저하지 않았고 두 번 생각하지도 않았다. 지치는 일도 없었다. 자기 의심 따위는 알지도 못했다. 스타일이나 아름다움 따위에 무관심했으며 프로 바둑 기사들처럼 서로 속고 속이며 치밀한 심리전을 벌이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상대가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는지에 철저히 무관심한 채로 그저 이기는 것에만 몰두했다. 알파고에게는 단 한 집 차이로 이긴다 해도 그저 똑같은 승리일 뿐이었다. 이따금 알파고가 모두의 눈에 형편없고 평범해 보이는 ‘게으른’ 수를 두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한국의 어느 해설자가 지적한 대로 알파고의 게으른 수는 철저히 계산된 결과였다. 각각의 게으른 수는 감지되지 않을 만큼 아주 조금씩 최종 목표를 향해 판을 끌고 갔고, 그 수들의 진정한 가치는 종반에야 비로소 드러났다. 이를 알고 있는 판후이는 신종 고문을 받는 양 의자에서 꿈틀대며 인공지능에 맞서 분투하는 이세돌을 지켜보면서, 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돕거나 경고해주고 싶었다.

-“알파고가 이렇게 행동하기 전에 이상한 조짐은 없었어?” 허사비스가 묻자 모두가 입을 모아 이세돌이 끼움 수를 두기 불과 몇 초 전만 해도 모든 게 정상이었다고, 아니, 정상일 뿐 아니라 알파고가 이세돌을 압살중이었다고 했다. 프로그래머들은 속수무책으로 가만히 앉아서, 땅으로 꺼지는 기분을 겨우 붙들었다.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현실로 일어나고 있었다. 알파고가 망상에 빠지고야 말았다.
이런 식의 행동이 처음은 아니었다. 알파고는 특정한 바둑판 배열과 마주할 때면 갑자기 위치와 가치 감각을 잃고 정신을 놓아버리곤 했다. 눈이 멀기라도 한 것처럼 명백히 죽은 영역에서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가 하면, 자신과 상대를, 흑과 백을, 아군과 적군을, 삶과 죽음을 분간하지 못했다. (인공지능도 멘붕이 온다...아 너무 인간적이잖어)

-알파고의 내부 네트워크가 가리키는 승률이 20퍼센트 아래로 떨어지자 아자황 모니터에 메시지가 떴다.
‘백 불계승’ 결과가 대국 정보에 추가되었습니다.
알파고가 기권합니다.(자꾸 이기기만 해서 컴퓨터가 패배 선언을 할 땐 어떻게 할까 궁금했는데 이러는 군요…)

-그런데 마스터는 모든 걸 간파하고는 ‘이 쓰레기는 뭐야!’라고 하는 느낌입니다. 마스터가 바둑의 우주를 내려다본다면, 나는 그저 주변의 작디작은 영역을 볼 뿐입니다. 그러니 부디, 마스터는 우주를 탐험하도록 두고 나는 나만의 뒤뜰에서 놀게 해주십시오. 나는 나의 작은 연못에서 고기를 낚겠습니다. 자가 학습으로 인공지능이 어디까지 발전할까요? 한계를 가늠하기 어렵네요. 미래는 AI의 것입니다.(커제의 살려주세요...도 너무나 인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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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의 세계
요시타케 신스케 지음, 양지연 옮김 / 주니어김영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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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힘든 하루를 보냈으니까, 친구는 얇은 그림책 같은 걸 보라고 했다.
5년 전에 이 책을 읽을 땐 만약의 세계가 너무도 커져 있어서 많이 힘들었다.
그 때에 비하면 나에게는 거대한 매일의 세계 안에 있어야 할 건 다 있고
만약의 세계에 가 버려서 아쉬운 건 생각해 보니 거의 없었다.
그래서 조금 기뻐서 책을 한 번 읽고는 따라 적어 보기로 했다.
나는 이미 천천히, 소중하게, 커다랗게, 즐겁게 만들었어.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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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
홍승은 지음 / 동녘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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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20 홍승은.
 
 
 월요일, 오랜만에 정신 없는 하루 보내고, 또 오랜만에 시각장애인 카페에 가서 컵빙수를 하나 시켜 먹었다. 시원하고, 달고, 그런 한 잔이면 힘이 나겠네 싶었다. 카페에 딸린 도서관에서 2017년에 나온 홍승은 에세이를 발견하고는 반가웠다. 이후의 에세이 세 권 정도 봤지만 맨처음 낸 책은 안 봤다.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 를 5년 전에 좋게 읽었다. 밑줄도 아주 많이 그었었다. 그때 독후감을 찾아보니 시작은 이렇군.
 
나는 언제까지 읽는 사람으로 살까.
나는 쓰는 사람으로 살 수 있을까.
 
 아직까지 읽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독후감도 쓰기니까 쓰는 사람이라고 하자.
 
 달고 찬 음료? 디저트? 아이스크림? 셔벗? 빙수는 뭐라 분류할지 모르겠다. 네 가지 다 되는 것 같다. 하여간에 그걸 먹으면서 60페이지 정도 읽다 집에 돌아왔다. 서울전자도서관 뒤져보니 읽던 책이 있어서 마저 바로 읽을 수 있다! 하고 반가웠다.
 
 젊어서 너무 잘 쓰다가 점점 아쉬워지는 작가들 떠나보내면 조금 슬펐다. 좋아하는 소설가, 시인, 에세이 작가의 초기작은 늘 미루다 나중에 보거나 안 봤던 것 같다. 뭐 그런데 또 어떨 때는 처음부터 뛰어나지 않던 걸 발견하면 좋기도 하다. 점점 나아지는 걸 보는 기분은 점점 나빠지는 걸 보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벌써 나온지 8년 전 책인데, 이 책 속에서 언급된 사람들, 자기 삶을 드러내는 글쓰기를 하는 작가, 작가와 친밀하고 사랑하는(던) 사람들, 미래의 독자는 그 이후가 궁금하지만 남의 인생 흥밋거리로 찾아보는 건 또 망설여져서 그냥 궁금해하기만 한다.
 
 어쩌면 이렇게 살았을지도 모른다. 조직의 굴레와 억압을 거부하고, 관습에 매이지 않고, 자본주의에 무릎 꿇지 않고, 내가 아는 옳음을 찾아서 그렇게 살았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난 그냥 투덜투덜 욕이나 하면서 책이나 읽고 수학 문제나 풀면서 도망칠 방법만 찾았다. 그러다가 도주에 실패했다. 옷 사고, 신발 사고, 책 사고, 운동(이 책에 나온 운동은 아니다)하고, 치열하지 않아도, 자본주의의 나사 하나가 되어도 삶은 그럭저럭 굴러간다. 굴욕이래도 굴복했대도 살아는 진다. 좋은 세상을 위해 싸우고 할 말하고 계속 쓰겠다고 다짐하는 오래전 젊은이의 글을 그와중에 읽어 본다.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과 우려와 공격과 그만큼 많은 담론들이 오가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어디선가 여전히 책을 읽고 공부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 시절보다는 젠더 이슈들이 잘 다루어지지 않는 것 같다. 주류 담론으로 자리 잡지 못했지만 어디에 아직 살아는 있겠지.
 
 오늘은 인스타그램 디엠을 통해 저질러진 성폭력 사건을 접한다. 그 말을 날린 아이도 그 말을 전한 아이도 그 말의 당사자가 된 아이도 너무 어린데 그 말이 너무너무 혹독해서 아침부터 어지럽고 슬펐다. 혐오와 폭력은 아직도 일상에 있다. 그걸 아직도 자주 보면서 산다. 관료제는 사건을 축소하고 덮으려는 때가 많으니까 초조해진다. 계속 지켜보겠지만 무기력한 기분이다. 끔찍한 어린이들이 자라서 끔찍한 어른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럴 수 있으려면 뭐랑 싸워야 하는지 모르겠다. 사람을 외로움과 소외감으로 죽게 하는 고독사에 대해 이야기했다. 비슷한 이유로 남을 따돌리고 배척하는 것도 조금씩 사람이 죽어가게 하는 거라고 그래서 그런 일을 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했다. 남의 얼굴이나 몸을 동의없이 함부로 사진찍으면 불법 촬영이고 범죄이고 또 그런 일이 발생하면 부모님께 알리고 벌점도 주고 심각한 경우에는 학교폭력으로 처벌도 할 수 있다고 겁을 주면서 사진첩의 사진들을 보는 앞에서 지우게 했다. 그렇지. 내가 싫었던 건 이런 환경이었지. 말로 많은 것을 해야 하는데 말은 말일 뿐이지. 차분하게 일들을 처리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차분한 척 해야 하는 것도 화가 난다. 사실 화는 충분히 낸다. 다 미쳤다고 욕도 한다. 나도 조금 미쳐있지만 더 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보고 이렇게 불편하라는 제목은 아니었을 텐데...흑흑흑
 
+밑줄 긋기
-여섯 번의 이사를 통해 배운 점. 창문을 통해 날씨와 시간을 가늠할 수 있는 게 당연하지 않다는 것, ‘역시 집이 최고’라는 말이 모두에게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 다른 누군가에게 내 불편한 자리를 떠넘기고 지금 내가 ‘잠시’ 편할 뿐이라는 것. 새로운 건물이 세워질 때 그 옆 낮은 건물이 걱정되는 것처럼, 몸으로 익힌 인식의 확장이었다.
 
-나는 내가 경험하고 겪은 부분에 한해서만 잘 느끼고 알 수 있을 뿐이고, 다른 상황은 분명 모를 수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내 입장에서는 마땅히 그래야 하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마땅히 그렇기 어려운 상황일 수 있다.
 
-나는 진보정당·마을공동체·사회적경제·시민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자신을 정의롭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을 경계한다. 그들은 손쉽게 인권과 평화를 외치지만, 여성이나 성소수자·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나 동물은 그 말의 적용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부차적인 존재라고 여기기 쉽다. 그들이 말하는 인권은 절대적이고 마땅한 개념일지 모르지만, ‘그’들이 아닌 다른 존재에게 인권은 지금까지도 쟁취의 과정이다.
 
-한 시인을 만났다. 그는 세월호의 슬픔에 누구보다 가슴 절절한 시구를 뱉어내는 사람이었다. 시에서 느껴지는 진심에 감동해서 그를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런데 처음 마주한 그는 다짜고짜 ‘어린’ 내게 반말을 했고, 먹을 것 좀 사오라며 대뜸 카드를 내밀었다. 그 뒤로도 쭉 이어진 그의 무례한 말과 행동에 한 번 놀라고, 본 행사 때 진심 어린 표정으로 슬프게 시를 읽는 모습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잠깐 동안 마주한 두 얼굴이 너무 이질적이어서 한동안 우두커니 멍해진 정신을 다잡아야 했다. 그 뒤로는 그 시인의 책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저는 무언가를 공부하고 알아가는 건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화가 나는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가 가담해왔던 세계를 직면하면, 나도 모르는 새 저질러왔던 폭력이 선명해지면서 자책과 후회·부끄러움이 밀려와요. 동시에 내가 폭력인지 모르고 당하고 지나쳐왔던 일이 선명해지면서 분노와 슬픔이 밀려오고요. 그렇게 복잡한 감정 속에서 상처받는 게 아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누구나 어떤 조건에서도 ‘정상’의 범위에서만 안주할 수 없는 현실이니까, 당장 상대가 앎을 삶으로 잇지 못한다고 해도 일단 알게끔 해주는 건 중요한 일 같아요. 침묵이 평화가 아니듯, 모른다고 폭력이 없는 건 아니니까요.
 
-어쩌면 사람들이 영웅에 열광하는 이유는 자신의 삶을 표현할 언어가 없거나, 표현할 방식을 잃어버렸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누군가 내 마음 같은 목소리를 내줄 때, 나를 대변해준다는 위안과 고마움과 기대가 생기는 것 같다. ‘저 사람이라면 나를 대변해줄 거야. 내 마음처럼 싸워줄 거야’라는. 하지만 내 불편함을 가장 진실하게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으니, 상대를 향한 바람은 대부분 실망과 회의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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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하나는 거짓말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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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18 김애란.

1. 김애란의 작품이 나올 때마다 꼬박꼬박 사 보고 또 아껴본 적이 있었다.
2. 김애란 산문집을 읽고 알라딘 중고서점에 팔아 김금희의 ‘너무 한낮의 연애’를 샀다.
3. 소설 속 아이들이 평평하고 순하게 그려져서 고등학생이 아니라 (교복을 입었다니 초등학생 고학년은 제외하고) 중학생 같다는 생각을 했다.
4.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단 한 문장에도 밑줄을 긋지 못했다.
5. 김애란의 신작인 단편소설집을 사 볼 것이다.

이중 하나는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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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간단한 독후감 겨우 남기고서 AI에게 골라보라고 했더니 다들 너무 진지하게 연산 시간도 평소보다 훨씬 길게 고민하다 0번! 하는데 대부분 합리적 결론 도출이라 해도 첫번에 맞추는 놈이 없었다. 그나마 가장 빠르게 답에 근접한 건 두 번만에 대충 찍어낸 뤼튼… 챗지피티는 거의 소거법 수준으로 두루두루 이거저거 난리고, 클로버엑스는 연산과정이 문장형태로 보이는데 막 눈알 굴리면서 대답 한참 못하고 이런저런 의식의 흐름 보이는데 웃겼고, 제미나이는 그냥 게임 끝 이러고 빨리 끝내버리려고 했다.

이중 하나는 거짓말 이라는 말이 거짓일 수도 있는 거다. 이중 하나는 거짓일수도 아닐수도 있는 거다.

+내가 구한 건 니트에디션이라 표지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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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8-19 15: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인상 깊은 서평. 인정함!

반유행열반인 2025-08-19 17:57   좋아요 2 | URL
아이참 뭘 인정 받았는지 몰라도 감사한데요 ㅋㅋㅋ 팔백작님 말투도 왜 에이아이 친구들 생각날까요 ㅋㅋ얘들이 사람 흉내 점점 잘 내나 봐요...
 
부모와 다른 아이들 2
앤드류 솔로몬 지음, 고기탁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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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17 앤드루 솔로몬.

첫 아이를 가졌을 때, 도저히 아이가 생길 수 없다고 믿던 시기에 임신을 했기 때문에 임신 중에도, 출산 후에도 거듭 생각했다. 내가 낳기로 한 게 아니라 이 아이가 생겨나기로 스스로 원했다고. 그건 어쩌면 책임감을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 떠넘긴 비겁함인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생겨나기로 원한 아이니까 나는 아직 미혼이어도 아이를 낳겠다고 생각했고, 가장 친밀한 이들에게 의사를 비쳤고, 찰나에 가까운 시간이나마 임신 중단 요구를 받았다. 직장에는 배불러서 어떻게 다닐 거냐고, 혹은 흐느낌과 함께 한 번만 봐 달라고. 나는 내일 모레면 서른 살인데 마치 십대 미혼모 취급 받는게 열받기도 했고, 나만 그러냐, 당신은 내년이면 서른 살인데 더 미루고 다음을 말할 건 무어냐, 가난하다고 태어날 권리도 없냐, 하고 강하게 저항해서 친밀한 이들을 겨우 설득하고 임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부모되기야 애기 태어나기 전에 혼인신고만 하면 뭐 법적으로는 간단한 일이다. 살 집과 돈이 없으면 은행에다가 전세대출해주세요, 해서 사천만원 빌리고 나중에 갚으면 되는 일…가능하면 곰팡이 안 피는 집으로 알아보세요...

아이는 신생아 시절 매우 심한 아토피성 피부염으로 길게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지만, 대개는 건강했다. 호기심 많은 동그랗고 반짝이는 눈으로 세상을 흡수하듯 무엇이든 잘 배웠고, 자기는 태어나서 기쁘고 자신의 가족과 삶에 대해 만족한다고 늘 긍정적인 말을 했다. 나는 품고 낳기만 쉬웠지 양육을 하기에는 많이 우울하고 폭력적인 인간이었고, 아이를 포기하자고 했던 친밀한 사람들은 기대보다 훨씬 더 큰 헌신과 애정을 담아 나보다 더 아이를 다정하게 돌보았다. 그래서 향정신성의약품과 성대결절약까지 한움큼 먹는 중의 임신이라 걱정했던 것과 달리 아이는 매우 똑똑하고 비교적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자랐다. 그래서 이제는 자기방 문을 꼭 걸어잠그고 틀어박히는 고독한 청소년이 되었지…

내 망상과 달리 아이는 부모를, 태어나거나 태어나지 않기를 선택할 수 없다. 반대로 부모는 낳거나 낳지 않을 기회를 가질 수도 있다. 어쩌면 자신의 선택과 의지로 택한 길이라 부모들은 자녀가 어떤 사람이 되든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최대한 그들을 사랑하려고 애쓰는 것 같다.

앤드루 솔로몬의 이 책 1권에서는 청각장애, 다운증후군, 소인증, 자폐, 정신분열증을 가진 아이들과 그들의 부모를 다루었다. 바깥에서 보기에는 장애와 질환인 것이 누군가에게는 정체성이 될 수 있다는 것, 수평적 정체성이라는 개념이 참신했다. 2권의 주제는 조금 더 무겁고 혹독했다. 첫머리로 음악 신동에 대해 다뤘는데, 탁월한 재능을 가진 아이의 부모도 장애인 아이를 기르는 것과 별반 차이 없다는 것이 어느 정도 수긍이 갔고, 처음에는 뜬금 없다 생각했던 신동이라는 주제가 이 책에 낄 법하다고 생각이 바뀌었다. ‘위플래시’란 영화를 오래전에 봤을 때 부모는 아니지만 아이의 선생이 최고의 연주를 할 수 있도록 몰아 붙이는 것을 보고 이건 굉장히 가학적인 아동학대물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분명 스스로 음악을 아주 사랑해서 숨쉬듯 자연스럽게 음악가로서의 재능을 연마한 아이들도 있긴 하겠지만, 많은 아이들이 부모에게 인정 받고 사랑받으려고, 자신에 대한 부담스러운 기대를 충족시켜주려고, 대부분의 평범한 아이들이 갖는 소소한 어린 시절의 행복을 내려놓고 고행에 가까운 연습과 공부를 했을 것이다. 언론에서 본 영재들 이야기, 초등학교 다닐 나이에 우수한 학생들이 모이는 고등학교나 대학교에 간 아이들이 자신들이 가진 재능 외에도 공동체 생활에 필요한 능력을 아직 갖추지 못해 적응을 못할 때, 안쓰럽게 여기는 대신 영재 부모의 욕심을 욕하는 반응을 보고 어느 정도는 부모 책임도 있겠지만 왜 저렇게들 가혹하게 까내릴까 싶었다. 아마도 시기와 질투가 있을 것이고, 완벽할 수 없는 인간에게 완벽하지 않다고 자기일 아니라고 그렇게 마구 비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직전에 읽은 ‘세상의 모든 아침’에서 음악하는 사람의 가족과 연인들이 그들을 보조하면서 그다지 순탄하지 않게 사는 걸 보면서 아...어린이들에게 너무 탁월한 사람이 아닌 걸 감사해야 하는 건가 싶었다. 피아노학원 다닌지 거의 30년 된 나에게 야매로 피아노를 배우고 있는 어린이들은 적당히 잘 배우지만 신동 근처도 못 가니까 나중에 음악을 즐기고 스스로 원하는 소리를 낼 정도까지만 어떻게 해보려고….(했는데 실상은 위플래시의 선생님처럼 자세랑 오류 교정하면서 개혼내고 있으니… 이율배반이라는 말 여기다 쓰는 것이로군.)

강간 피해자가 가해자 때문에 아이를 가지고 결국 출산까지 하게 되면서 몇겹의 고통을 겪는 사례는 가장 읽기 힘들고 슬픈 부분이었다. 저자는 이 주제 다룰 때 서구 지역 어머니들 뿐 아니라 내전으로 종족간 학살이 일어난 아프리카 르완다 등의 지역 여성들도 인터뷰했다. 아이를 보는 것 자체가 트라우마인 사람, 오히려 축복처럼 소중한 아이를 만나기 위한 과정이었다 여기는 사람, 어떻게 하면 이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지 그 방법을 묻는 사람, 모두 아이에게 사랑을 주는 어머니가 되려고 애쓰고 있었다.

범죄 청소년의 부모 이야기는 자식이 죄인 되는 순간 부모도 함께 엄청난 비난과 죄의 굴레를 함께 쓰는 게 거의 만국 공통이라, 그런 부모들의 목소리를 듣는 기회조차 흔하지 않았다. 앤드루 솔로몬은 소년원이 아닌 징벌보다는 재사회화, 사회 적응, 가족 관계 개선에 초점을 둔 홈스쿨의 부모와 범죄 청소년들을 주로 만나면서 범죄 또한 때로는 자유 의지로도 통제가 안 되는 질병과 장애처럼 바라보고 그들이 치유되도록, 그러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범죄 청소년을 이끌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진 듯했다. 일부 맞는 말이긴 했지만 그동안 목소리를 못 냈던 가해자 부모 위주로 인터뷰를 해서, 범죄 피해자들 입장에서 이 챕터를 읽었다면 극소수는 가해자의 입장도 헤아렸겠지만 대부분은 그냥 다 죽였으면 하고 분노에 찼을 듯하다.

LGBT중 앤드루 솔로몬은 트랜스젠더와 그 가족을 집중적으로 인터뷰했다. 게이를 안 고른 게 의외였는데 그 부분은 마지막 챕터에서 길게 뽑을 예정이었던 것...내가 진짜 나라고 여기는 나의 모습으로 살기 위해 분투하는 아이들과, 트랜스 이전의 아이를 잃는 슬픔에 빠진 부모와, 아이들을 교정할 수 있다 믿고 정신과치료를 시도하면서 아이를 불행하게 만드는 부모와, 아이들을 적극 지지하기 위해 협회나 재단이나 행사까지 만들고 지원하는 부모들까지 다양한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증오범죄는 이전 ‘트라우마 클리너’나 ‘젠더를 바꾼다는 것’, ‘퀴어, 젠더, 트랜스’ 같은 책에서 일부 살펴볼 수 있었는데, 이 책의 사례들은 훨씬 참혹하고 나열하면 끝이 없어서 읽는 내내 안타까움을 넘어 두렵기까지 했다. 트랜스젠더의 다름에 대해 저렇게 폭력성을 드러내는 인간 무리가 있다면, 나의 어떤 다름에 대해서도 그것이 표적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으니까. 대부분 스스로 평범한 보통의 사람이라고 안도하며 남들처럼 살려고 애쓰려는 것도 저런 다름에 대한 압제 때문이겠다 싶어서 속상했다.

게이나 동성애자의 부모자녀 관계에 대해 저자가 할 말이 제일 많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책의 후반부는 게이인 저자가 아버지가 되기 위해 거친 여러 과정들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이 부분은 흥미롭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정상가족에 대한 관념이 편견과 고정관념에 뿌리를 두고 조금이라도 다른 가정의 아이들에게 그들이 어떤 잘못이라도 하면 그게 다 엄마/아빠가 없어서 그래, 하고 아무렇지 않게 평가하는 게 당연한 세상에서, 앤드루와 그 친구들은 아이들에게 아주 많은 부모를 만들어 주고 새로운 가족관계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굳이 그런 걸 보여주려고 한 게 아니라 그냥 자녀를 원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런데도 미혼의 여자 방송인이 정자 기증으로 아이를 낳아 혼자 키우는 걸, 레즈비언 커플이 역시나 정자 기증으로 아이를 낳아 함께 키우는 걸 어머니 욕심으로 아이 처지는 생각도 안 하고 이기적이라고 심하게 댓글로 욕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걸 보았다. 중요한 건 그 어머니, 아버지들이 아이를 충분히 보살피고 사랑해주고 학대하지 않는 것인데, 오히려 있으니만 못한 어머니, 아버지를 다 갖추고서 나쁘게 힘들게 크는 아이들도 있는데, 세상은 과거에 비하면 동성 부부와 그들이 아이를 키우는 것까지 허용하는 지역이 등장할 만큼 바뀌기도 했지만, 아직까지 여전한 것들이 있다. 아마 그런 적의와 혐오와 그에 기반한 폭력은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 같다.

두 권의 벽돌로 이루어진, 쓰는 데만도 10년은 걸렸다는 이 책은 분량은 제법 되지만 읽었을 때 못 알아들을 말은 거의 없었다. 그저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의 여부가 중요할 독서였다. 이 책을 읽고 그동안 나쁘게만 생각했던 부모나 자녀들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사람이 있다면 참 좋겠지만, 늘 반추하듯 정작 읽어야 할 사람들은 안 읽는 책들이 많다. 이 책을 읽었으면 싶은 사람은 단언컨대 누구나, 모두다, 이다.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삶의 다양성에 대한 지평을 넓힐 수 있는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이 접했으면 좋겠다.

+밑줄 긋기
-절대음감을 타고나지는 않았지만 훈련을 통해 음을 인식할 수 있게 되는 사람들도 있다. 학습을 통해서 이를테면 ‘G‘를 내는 법을 배우고 해당 음을 기준으로 해서 다른 음들을 계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절대음감이 항상 음악적 능력을 높여 주는 것은 아니다. 한 가수는 그녀가 속한 합창단의 다른 단원들이 사분음 낮게 부를 때 자신이 겪는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녀는 다른 단원들과 불협화음을 내서라도 악보에 적힌 대로 노래를 부르고 싶은 어쩔 수 없는 충동을 느꼈다. (44-45, 이 부분 읽기 직전 난 저렇게는 할 수 있는데, 생각했더니 언급이 되었다. 그런데 그건 별 쓸모가 없네요…라이브 연주 듣다가 기타 피치가 안 맞네 하는 쓰잘데 없는 거슬림만...내가 그래서 떼창하기도 싫어해요…)

-그의 부모는 그가 동성애자라고 밝히자 몹시 화를 냈다.그가 말했다. ‘나는 부모님의 편협한 애정에 화가 났습니다. 부모에게 자식이란 다양한 모습을 지닌 복합적인 존재입니다. 따라서 자식의 다른 부분은 제쳐 놓고 반짝이는 부분만 골라서 사랑할 수는 없는 거예요.’ (57)

-그런 부모들은 그들 자신의 희망과 야망,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의 자녀가 아닌 자녀의 능력에 투자한다. 자녀의 호기심을 길러 주기보다는 자신의 명성을 향해서 전력 질주한다. 내 기준에서 그런 부모들이 잔혹하게 보일 때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자녀에게 앙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부모와 자식 사이에 존재하는 삶의 경계선에 대한 비극적인 몰이해를 보여줄 뿐이었다. 절대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고 부모의 권력만큼 절대적인 권력은 없다. 그런 부모를 둔 자녀는 이미 부모의 강박적인 관심에 종속되어 있음에도 자신이 부모의 관심을 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괴로워한다. 그들의 비애는 엄격한 연습에서 기인한다기보다 자신의 불가시성에서, 즉 부모가 자신을 봐주지 않는 데서 기인한다. 성취는 앞으로 기대되는 승리를 위해 현재의 즐거움을 포기하도록 요구하며, 이 같은 사실은 자녀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자극이다.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면 그들은 열살 이전에 절대로 세계적인 수준의 연주가가 될 수 없다. (75, 이 책은 음악 신동에 한정해서 해당 장을 서술하고 있지만, 학업이나 스포츠, 모든 분야에 대한 부모의 기대에 적용될 만한 것으로 보였다.)

-우리는 보다 인간적이고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장애인을 돕는다. 비범함에 대해서도 동일한 마음가짐으로 접근할 수 있다. 동정은 장애인의 자존감을 저해한다.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적의가 유사한 장애물이다. 동정과 적의는 하나같이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느낄 때 나타나는 징후다. (129)

-‘그의 상상력은 나의 상상력을 바꿔 놓기 일쑤였다’라는 한 문장은 비범한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가 보여 줄 수 있는 훌륭함의 극치를 보여 준다. 부모는 그처럼 자신의 상상력을 대체함으로써 자녀의 상상력 발달에 도움을 준다. 신동 자녀를 둔 부모로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그 같은 현명한 태도는 큰 대가를 요구하는 일이지만, 신동 자녀의 총명함을 등불 삼아서 자신의 길을 재설정할 수 있는 부모는 장차 자녀가 세상을 새롭게 바꿔 나가는 방식에서 엄청난 위안을 얻게 될 것이다. (136, 나는 나의 상상력을 자꾸만 어린이들에게 강요하는 게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되는 부분…)

-“여러분의 자녀가 친하게 지내는 친구를 살펴봐야 합니다.” 그가 말했다. “자녀가 나쁜 무리와 어울리기 시작하면 나쁜 무리가 아이들을 타락시키고 결국 여러분의 자녀는 나쁜 짓을 저지르게 될 겁니다.”나는 아이들의 타고난 순수성을 더럽히는 ’나쁜 무리‘에 대한 교회의 비난에 충격받았다. 설교자는 계속해서 악을 열거하기 시작했다. 그의 설명에 따른면 이 교회 사람들은 ’동성애 왕국‘에 반대해서 일어나야 했고, 현대판 고리대금업자는 거룩한 장소에서 추방되어야 했다. 미니애폴리스의 흑인 문제가 동성애자와 유대인, 은행의 잘못이라는 그 같은 발상은 내게 세 번의 차 사고에 대한 다숀테의 변명이나, 다리우스가 자신을 속여서 위법행위를 저지르게 했다는 그의 주장을 떠올리게 했다. 타인에 대한 신도들의 증오는 이상하게도 갱단의 정신을 연상시켰다. 그 공동체는 호전성과 뒤얽힌 관용을 보였고, 가혹함과 친절이 뒤섞인 설교자의 주장을 예수그리스도가 무한한 사랑과 최후의 심판에 있을 가혹한 판결을 예언했던 것과 동일 선상에서 이해했다. (278, 저자의 성적지향을 알았으면 초대하지 않았을 사람들 틈에서 “우리 애는 안 그래요”를 시전하는 공동체를 대하는 마음은 어떤 것일지 조금 알 것 같은 기분… 우리 애는 절대 안 그런 애인데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그래요… 그런 소리 안 들으려고 나는 친구가 별로 없다. 읭.)

-“우리에게 마음을 열고 솔직하게 대해 주어서 정말 고마워요. 당신이 동성애자이고 애인이 있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없어요. 당신도 우리가 흑인이라고 해서, 쿨이 감옥에 다녀왔다고 해서, 내가 혼자 자식을 키우면서 도심의 빈민 지역에 산다고 해서 우리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잖아요. 사랑하고 행복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이제 나는 당신이 그런 기회를 얻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래서 기뻐요. 나는 친구를 사귈 때 그 사람의 마음을 봐요. 그리고 보다 커다란 어떤 목적을 위해서 하느님이 우리를 친구로 맺어 주었다고 믿어요.” (279, 앞에서 내가 저렇게 투덜댈 걸 알고 바로 뒤에 다숀테의 엄마 오드리의 다정한 반응을 첨언해 놨다. 실제 인식과 감정이 어떻든 간에 속을 터 놓은 상대에게 저렇게 편지 써 줄 수 있는 마음은 쉽지 않은 일 같다.)

-인간의 충동이 다양하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애초에 유혹을 느끼지도 않았던 행동에 빠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우월감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특유의 오만이 있다. 성범죄자를 혐오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아동에게 성적으로 끌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은 채 아동과의 성관계를 추구하지 않는 데 의기양양해한다. 약물에 의존하는 경향이 없는 사람들은 중독자를 경멸한다. 소식가들은 병적으로 비만인 사람들을 멸시하기 일쑤다. 아마도 100년 전이었다면 나는 동성애 때문에 감옥에 갔을 것이다. 다행히도 나 자신에 대해 솔직할 수 있는 장소와 시대에 살고 있을 뿐이다. 내가 동성애자로서의 내 욕구를 거부해야 했더라면 그것은 거부해야 할 욕구가 없는 이성애자의 경험과는 사뭇 다른 경험일 것이다. 나는 범죄자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그들 중에는 충동을 조절하지 못하거나, 나약하거나, 어리석고 파괴적인 사람도 많지만 강박적인 충동에 이끌리는 사람도 많다는 것을 알았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내면에서 훔치고 싶은 욕망이 매순간 불타오르고 있음에도 절도를 자제함으로써 엄청난 용기를 보여 준다. 그들이 스스로 없애 버릴 수 없는 악마를 억누르는 일은 절도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법을 지키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대체로 범죄자의 가족들은 그들의 자녀가 파괴적인 짓을 했다는 점을 인정하기 위해, 그리고 어쨌거나 그를 계속 사랑하기 위해 애쓴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사랑하길 포기하거나 나쁜 행동을 모른 체하기도 한다. 포기나 외면 어느 쪽에도 해당하지 않는 이상적인 상태는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하라는 개념에서 시작되지만 죄와 죄인은 그렇게 쉽게 분리될 수 없다. 인간이 죄인을 사랑한다면 그의 죄도 포함해서 사랑하는 것이다. (324)

-그러나 악은 항상 예측이나 설명이 불가능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자폐증이나 정신분열증 환자의 가족들은 분명히 건강하다고 생각했던 자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의아해한다. 마찬가지로 끔찍한 행동을 하기 시작한 자녀 문제로 씨름하는 가족들은 그들이 이해한다고 생각했던 순진한 자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의문을 갖는다. (326)

-나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남자에서 여자가 된 것이 아니에요. 비밀을 숨기고 있던 사람에서 더 이상 비밀이 없는 사람이 된 것이죠. 당신이 간절히 바라는 꿈과 가장 깊은 슬픔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 우스운 것으로 여긴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일이에요. 이중생활은 고단하고 궁극적으로는 비극이죠.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 줄 수 없다면 사랑받을 수도 없기 때문이에요. (386)

-’(…)그럼에도 나는 아들에게 “세상의 반응에 대응할 준비가 된 것이 확실하니?”라고 물었어요. 모세가 대답했죠. “문제는 세상이 나에 대한 준비가 되었냐는 거죠.” 나는 “얘야, 아버지인 나부터도 너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구나”라고 말했습니다.‘ (433)

-‘(…) 우리는 출생증명서에 인종을 기입하지 않아요. 인종은 자기 인식 행동에서나 의미가 있을 뿐 더 이상 법적으로 유의미한 범주가 아닙니다. 젠더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 ‘사람들은 자신의 성에 매우 애착을 느낍니다. 나도 그렇고요. 그리고 이러한 애착은 종교와 매우 흡사합니다. 정부가 사람들의 종교를 규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충격적일 것입니다. 정부가 누군가의 젠더를 규정할 수 있다는 발상도 마찬가지로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460, 인권변호사 섀넌 민터 씨의 말)

-한편으로 나는 선택이, 특히 일상적이지 않은 선택이 부담스럽고 고단하며 두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내가 처음으로 쓴 책은 소련의 예술가 집단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들이 서구 사회로 넘어왔을 때 나는 그들과 함께 있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서로 다른 상표의 20가지 버터가 진열되어 있던 독일 슈퍼마켓에서 서구 사회가 그에게 요구하는 수많은 선택을 견딜 수 없어서 울음을 터트렸던 일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나는 피곤한 선택이 수반될 것을 알면서도 우리가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미래를 상상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런 미래가 온다면 아마도 나는 내가 지금 가진 것들을 선택할 것이다. 그럼에도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에 그것들을 더욱 사랑할 것이다. (474, 슬픈 버터, 나는 선택하지 않음을 선택. 버터 말고 카이막 먹을래)

-‘(…) 정상이란 주관적인 상태다. 그리고 우리한테는 장애가 정상이다’(481, 영국 장애 인권 운동가 조애나 쿼파시아 존스의 말)

-어떤 여성도 당사자가 두려워하는 임신을 강요받지 말아야 하고, 또 어떤 여성도 당사자의 의지에 반해서 낙태를 강요받지 말아야 한다. 수평적 특징을 가진 자녀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은 태아기 검사를 했든 하지 않았든 간에 그들의 아이에게 존엄성을 부여한다. 우리는 생식에 관련된 과학기술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면서 어떤 아이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지, 우리가 어떤 아이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지 추측한다. 이러한 추측을 기피하는 것도 무책임한 행동일 수 있지만 추측에 필요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무지한 행동이다. 가정에 근거한 사랑은 실질적인 사랑과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까닭이다. (489)

-또 불안이 엄습할 때마다 내가 운전 면허 시험을 보려고 집을 나설 때 어머니가 들려주었던 조언을 떠올렸다. 인생에는 우리를 주눅 들게 만드는 일 두 가지가 있으며 주눅을 이겨 내기 위해서는 그 두 가지가 거의 누구나 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운전과 자식을 낳는 일이다. (496, 나는 운전을 할 줄 모르므로 반대로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한 사람에게도 이 조언은 크게 쓸모가 없겠지만, 면허 시험을 보고 아이를 가지려고 노력한 앤드루 솔로몬에게는 도움이 되었겠다. 맥락은 너무도 중요해서 잘못 문장 뜯어오면 이상하게 오독이 되고, 그러다보면 너무 많은 덩어리를 퍼오게 된다. 밑줄 긋지 말까…타자쳐서 책 내용 옮기는 게 반추하길 좋아하는 나의 미래한테는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아 또 뭘 이러고 있을까 다 남의 말일 뿐인데 이게 뭐라고 싶기도 하다. 그치만 남의 말 중에 그럴싸하니까 옮겨온 거잖아...그냥 하던 대로 해...)

-또한 예전의 내가 종종 억압받는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처럼 이질적인 아이에게 나 역시 똑같이 억압하는 사람이 될까 봐 두려웠다. (497, 나도야…)

-내가 갓 태어난 그녀를 안은 후에 블레인도, 리처드도, 존도 그녀를 안았다. 우리 모두는 이 황홀한 존재에게 누구일까? 그녀는 우리에게 어떤 존재일까? 그녀의 존재로 인해 우리 어른들의 관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이미 연구를 한창 진행 중이던 나는 모든 아이가 수평적인 특징을 조금씩 갖고 있으며, 부모의 특징을 재구성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단서를 찾고자, 그리고 그녀가 나를 어떤 사람으로 바꿀 것인지 힌트를 얻고자 나는 그녀의 작은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500-501, 저자 앤드루는 존과 동성 부부가 되었고, 그 이전에 앤드루는 친자를 가지고 싶은 열망을 가지고 있다가 역시나 어머니가 되고 싶어하던 오랜 친구 블레인에게 농담처럼 필요하면 내가 도와주지, 했는데 그녀가 수락해 버려서 존하고 갈등은 좀 생겼지만 잘 상의해서 블레인은 아이를 갖게 되었고, 그 사이 블레인은 리처드와 결혼하게 되었다. 존은 더 일찍 레즈비언 커플 친구들-로라와 태미-에게 정자를 기증하고 대신 양육권/양육비 요구 같은 법적 의무 권리는 모두 포기하는 절차를 밟아서 아기들의 생물학적인 아버지이긴 하지만 법적인 연결고리는 없다. 앤드루는 자신의 성을 블레인이 낳은 작은 블레인에게 물려줄 것이고, 아이는 블레인과 함께 살테지만 하여간에 앤드루는 아버지가 되고 싶었고 아이를 만든 두 사람은 거기에 동의를 했다. 이 혼란 속에 나는 그렇게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삶을 만들어가는, 그리고 그 선택으로 태어난 아이들에게 경제적으로든 지적으로든 지원을 충분히 해 줄 만한 부모들의 자부심 같은 걸 본 것 같아 그 용기가 놀랍기도 했지만 배도 아팠다.)

-우리 두 사람은 사랑의 행위라고 생각하고자 했던 일이 경제적 특권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사실이 유감스러웠다. (503, 결국 앤드루는 자신의 정자에다 기증받은 난자, 대리모, 이렇게 앤드루-존 부부가 양육할 아이를 만들기로 존과 합의했다. 대리모의 존재 자체와 이런 시장에서의 거래 자체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앞의 아이 못지 않게 앤드루의 두번째 아이도 논란이 되었을텐데, 새 생명이 온전히 환영 받지 못하고 어떤 문제거리나 사회와 관습에 대한 도전, 벗어난 무언가로 바깥 사람들에게 다루어질 가능성을 먼저 걱정하게 되는 건 또 서글픈 일이었다. 미안, 앤드루. 걱정이 많은 나라서… 그런데 바로 다음 장에 존이 정자를 기증해서 아이를 가졌던 레즈비언 커플의 로라가 대리모가 되어 주겠다고 기꺼이 나선다. 참으로 정이 돈독한 친구들이다...)

-조지가 태어난 뒤로 나는 복잡하게 얽힌 우리 모두의 관계가 어떻게 제자리를 찾아갈지 의문이었다. 존과 나는 조지를 전적으로 책임진다. 블레인과 나는 작은 블레인과 관련되어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는 함께 결정한다는 조건에 진작 합의했다. 로라와 태미는 독립된 친권을 가졌고, 우리는 올리버와 루시의 삶에 대해 아무런 결정권이 없으며, 마찬가지로 로라와 태미도 조지에 대해 아무런 권한이 없다. 이 세 건의 합의 내용은 모두 제각각이고 우리는 서로의 상황을 비교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514, 이쯤에서 백년의 고독이나 연연세세나 오이디푸스의 비극 볼 때처럼 가계도를 그려볼 생각도 잠시 했지만, 사실 앤드루가 이렇게 한 번 더 명료하게 정리해놔서 그럴 필요도 없겠다, 그런 걸 그린다면 그냥 내 흥미거리로 이 가족을 소비하는 짓이겠구나 싶어서 말았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의 총량이 한정되어 있어서 우리 같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공급되어야 할 사랑을 고갈시킨다는 믿음에 갇혀 있다. 나는 사랑의 경쟁 모델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직 가산 모델만 인정한다. 가족과 이 책을 둘러싼 여정을 통해서 나는 사랑이 확대되는 현상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즉 어떤 사랑이든 늘어난다면 세상의 다른 사랑도 그만큼 강해진다는 사실을 배웠다. (515-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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