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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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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에겐 몹쓸 전염병환자 취급을 당하고, 곁을 지키는 것이라곤 낡은 매트리스와 요금이 밀려 수신만 되는 전화기, 술에 찌들어 시원찮은 몸뚱이 뿐인 마흔여덟살의 실패한 영화감독, 오인모. 이제 죽는 일만 남았나 했는데 걸려온 엄마의 전화.

닭죽 쑤어놨는데 먹으러 올래?

 

 코미디프로에 낄낄거리며 냄비바닥의 닭죽을 긁어먹는 머리가 희끗하고 뚱뚱한 쉰두살의 형. 오한모. 일명 공사판의 바위 깨는 커다란 망치란 뜻의 오함마. 학생시절부터 책가방 안에 무기를 휴대하고 다녔고, 폭력, 강간, 사기, 절도 등 화려한 전과에, 알량한 사업은 하는 족족 돈만 날리기 일쑤인데다 엄마 집에 얹혀살며 방귀나 붕붕 껴대는. 

 아버지의 목숨과 맞바꾼 옹색한 낡은 연립주택에서 이년만에 닭죽을 인연으로 형제는 만나게 되었고 형제간 폭력의 역사를 다시금 회상하며 닭죽냄비로 서로의 몸을 마사지 해주시고 난 다음 비식 웃으며 형이 하는 말.
여기 들어와 살겠다는 걸 보니까 오감독님 인생도 이제 좆된 모양이네. 그렇지?  

 그렇게 다시 기어 들어와 살게 된 엄마의 집. 칠순이 넘은 엄마는 화장품을 팔러 다니면서도 부지런히 끼니를 챙겨주시고 오감독은 꼬박꼬박 밥만 먹고 잠만 자는 누에같은 생활 중에도 식구들 중 유일하게 비린 생선을 좋아하는 자신을 위한 고등어와 좋아하는 반찬들로 차려진 밥상에 코끝이 찡해지는 순간도 오는데.

저기요, 아저씨......내 이름 알아요? 
 조카 이름도 모르는 외삼촌이란 이유로 어린 계집애한테 망신을 당하고 눈가가 퍼렇게 멍든 채 또 이혼할 거라며 엄마 집으로 들어온 여동생, 미연의 자초지종을 듣자마자 떠오른 생각은 여동생의 안위보다도 시도때도없이 방귀를 뿜어대는 120킬로그램의 몸뚱이와 한 방을 써야하나 하는 두려움.    
 

 좋은 시절도 있었다. 극장 앞에서 그럴듯한 모습으로 함께 가족사진도 찍던.
하지만 인생은 지루한 일상과 수많은 시행착오, 어리석은 욕망과 부주의한 선택......인생은 단지 구십 분의 플롯을 멋지게 꾸미는 일이 아니라 곳곳에 널려 있는 함정을 피해 평생 동안 도망다녀야 하는 일. 

 그러거나 말거나, 주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이 훤히 보이는 심심한 노인네들을 위한 자리, 담장 아래 소파에서 노파들은 씹을수록 맛좋은 안주거리마냥 남의 집 가정사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주거니 받거니 한다.
아니, 근데 저것들은 낫살이나 처먹고 무슨 웬수가 져서 아직까지 늙은 지 에미 등골을 뽑아먹고 있댜?
그 여편네가 지지리도 복이 없어서 그러지, 머. 

 노파들이 보기엔 엄마는 그저 지지리 복 없는 여편네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엄마는 엄마. 에미 등골 뽑아먹는 숭악한 자식들이라도 엄마 눈엔 고기 한 점이라도 더 먹이고 보듬어야 할 안쓰러운 제비새끼들인 거다. 
 삶이라는 전쟁터에서 잠시 돌아온 자식들은 몸도 마음도 재정비가 필요했고 지지고 볶는 고기냄새가 집에서 떠나지 않게 열심히 자식들 입으로 고기를 넣어주는 엄마의 비장함은, 대개의 사람들이 너무나 당당하게도 당연히 여기는 종류의 것이었다. 

 오감독은 분리수거함 옆에 버려진 헤밍웨이 전집을 주워 읽으며 세상은 신비하고 달콤한 희망으로 빛나며 옆에 누워있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래서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었던 시절에 대해 떠올려도 보지만 모든 것은 사라졌고 다신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진실만 깨닫게 될 뿐. 

 그 와중에도 오감독은 조카가 담배피우는 모습을 보고 협박해 용돈을 가로채고, 오함마는 집앞에서 카섹스하던 여동생을 발견해 한밤중에 소란을 피우고, 난데없는 출생의 비밀은 밝혀지고, 어린시절의 이해되지 않던 장면들이 다시금 머릿속에서 정리되면서,
형제간의 따뜻한 우애와 건강하고 개끗한 아이들, 서로에 대한 걱정과 배려, 유순하고 성실한 가족구성원들, 사랑이 넘치는 넉넉한 저녁식사......
평범한 사람들은 그런 행복을 얻기 위해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이라는 영화 속에서 아무리 후달려도 목에 잔뜩 힘을 주고 버텨야 하는 이유,  나에 대한 기대가 부서져 산산조각난 뒤에도 그들은 나를 버리지 않았고 나 자신이 나를 포기한 뒤에도 그들은 나를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웬수같은 집구석, 죽네 사네 악다구니를 써도 가족이란 건 정말이지 매일 먹어야 하는 밥처럼 따뜻하고 배부른 것.  
 

생각해보면 인생이 늘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부지불식간에 무언가에 발목이 잡혀 이리저리 한 세월 이끌려다니기도 하는 게 세상살이일 터인데 때론 그렇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게 내버려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렇다. 가끔 살면서 하게 되는 말. 젠장, 난 왜 이 따위로 살고 있는 거지? 지금의 난 이런 모습이어서는 안 되는 건데, 그 때 그렇게만 하지 않았더라면, 혹은 그 때 그렇게 했더라면 하는 후회들.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진 않다. 이런 여유는 언제쯤 가질 수 있을까? 깡패들에게 묵사발이 되도록 얻어터지며 극한의 고통을 겪어내면 정말 도움이 될까.

나는 언제나 목표가 앞에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 이외의 모든 것은 다 과정이고 임시라고 여겼고 나의 진짜 삶은 언제나 미래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 결과 나에게 남은 것은 부서진 희망의 흔적뿐이었다. ...... 초라하면 초라한 대로 지질하면 지질한 대로 내게 허용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내게 남겨진 상처를 지우려고 애쓰거나 과거를 잊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겠지만 그것이 곧 나의 삶이고 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부서진 희망 같은 것을 영화포스터처럼 벽에 붙여놓고 오며 가며 쳐다볼 수 있으려면 얼마나 담담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할까. 담담히 다양한 생의 모습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 곁에서 비슷비슷하게 살아가는 그러나 내 편인 가족들에게 빚지고 있는 것이 많으리라.

 ‘고래’를 읽으면서 촉촉하게 잘 다져진 벽돌이 켜켜이 쌓여 가며 묵직하게 가슴을 짓눌렀다면 ‘고령화가족’을 읽으면서는 잘 구워진 딴딴한 벽돌을 마음 한 구석의 부스러진 담장 위에 차곡차곡 쌓아가는 기분이었다. 나도 과거의 상처 따위에 연연하지 않겠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께요. 착한 아이의 기도처럼 그냥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 곁의 가족들과 함께 ‘외롭지 말고 우울하지 말고’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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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문 - 2010년 제34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박민규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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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라서 더더욱 기대가 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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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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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청나게 아프고

어느 날 갑자기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다면 어떡해야 할까. 사랑한다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면...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 그 슬픔, 그 지독한 상실감을. 사랑한 사람을 잃어버린 순간, 우리 삶의 시계는 영원히 멈추어 버린다. 아주 사소한 것들이 두려워지고 삶은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흘러간다. 그렇게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슬픈 시간이 시작된다. 엄청나게 아프고 믿을 수 없이 두려운.

아홉 살 소년 오스카의 삶의 시계도 그렇게 멈추어 버렸다. 9.11 그 끔찍했던 테러가 일어났던 오전에서 멈추어 버렸다. 아빠의 전화가 울렸던 그 순간에. 아빠와 마지막 대화를 나눌 수 있었지만 받지 않았던 그 순간에. 건물을 들이박는 비행기들. 그리고 무너진 빌딩. 뛰어내린 사람들. 형체도 없이 사라져간 사람들. “왜 아빠는 안녕이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왜 아빠는 “사랑한다.”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오스카의 삶은 그렇게 허망하게 무너진 빌딩처럼 산산조각 났다. 몇 대의 비행기가 삶을 완전히 망가지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에 오스카는 너무 어리다. 아빠는 어떻게 죽어갔을까. 상상은 의지와 무관하게 상상하기 싫은 쪽으로만 흘러간다. 아빠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야 한다. 그러면 “더 이상 상상하지 않게 될 테니까.” 오스카는 아빠의 유품 중에서 우연히 열쇠를 발견하고 그 열쇠의 주인을 찾아내려고 한다. 뉴욕에 162,000,000개의 자물쇠가 있다고 해도 아빠가 남긴 열쇠의 주인을 찾아내야 한다. 단서는 단 하나. 열쇠가 들어 있던 봉투에 적혀 있는 “블랙”이라는 단어. 그렇게 오스카는 뉴욕에 사는, 블랙이라는 성씨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는 기나긴 여정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은 아빠가 남긴 마지막 수색 작전 게임이 된다.      

오스카의 할아버지. 제2차 세계대전 때 사랑하는 여자와 그녀의 배 속에 있던 자신의 아이를 잃었다. 그리고 그 사랑하는 여자의 동생과 결혼했지만 끝내 그는 상실감을 극복하지 못한다. “사랑하는 것을 잃을까 봐 너무 두려운 나머지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기로” 한다. 아내와 아내의 배 속에 있는 아이까지 버리고 떠난다. 살아갈 수 없어서. 삶은 너무 무시무시한 것이라서. 죽음보다 더 가혹한 것이어서.

그리고 오스카의 할머니. 역시 같은 이유로 사랑하는 언니를 잃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잃었다. “모두가 모두를 잃는” 전쟁으로 인해 한 평범한 삶이 무너졌다. 언니의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지만 남편은 언니를 잊지 못한다. 그를 지켜보는 그녀 역시 지쳐갈 수밖에. 가장 가까운 사람의 고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고통, 말해 무엇 할까. 오스카의 표현대로, 그녀의 온몸도 퍼렇게 멍이 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세 가지의 시점으로 소설은 진행된다. 지독한 상실감으로 말을 잃어버린 할아버지는 자신이 버린 아들에게 보내지 못할 편지를 쓴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나의 아이에게” 그러나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두꺼운 공책 속의 빈 페이지들처럼 그의 삶은 비어 있다. 그리고 그녀의 아내의 삶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이 쓴 긴 백지의 자서전처럼. 그리고 그것을 읽어줄 수 없는 그녀의 남편처럼. 또 그들이 만들어낸 무의 공간처럼 그들은 서로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말할 수 없는 삶의 빈 공간. 가장 가까운 사람조차 치유해줄 수 없는 아픈 상처. 그렇게 한 사람은 떠나가고 또 한 사람은 남겨진다. 엄청나게 아픈 가슴의 멍. 그렇게 세 사람의 삶에 지워지지 않을 멍이 들었다.  

                  믿을 수 없이 아름다운

오스카와 오스카의 할아버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상처에 대항한다. 오스카의 할아버지는 말을 잃어버리고 떠나버림으로써 상처에서 멀어지려 한다. 오스카는 사람들을 만나고 자신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아버지의 흔적을 좇아간다. 아버지를 그리워한다. 오스카는 할아버지처럼 가혹한 삶으로부터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지 않는다. 스티븐 호킹에게 꾸준히 편지를 쓰고 언제나 무언가를 상상하며 새로운 것을 발명해내는 조숙한 소년 오스카는 견디기 힘든 상처를 어린 아이다운 재기발랄한 상상력으로 버텨내려 한다.

오스카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상상했다. 그리고 그 상상은 때때로 아버지의 죽음에 이르러서 잔혹한 방식으로 흘러가기도 했다. 그렇지만 오스카는 영리하다. 그래서 결국엔 슬픔을 다루는 데 어떻게 상상력을 동원해야 하는지 알아낸다. 오스카의 멋진 상상 중 가장 아름다운 상상이기도 하다. 오스카는 아버지가 없는 삶을 살아내기 위해, 삶의 시계가 멈춘 지점에서 되돌아가기 버튼을 누른다. 오스카의 발랄한 상상력 속에서 슬픔은 더욱 더 투명한 빛을 띤다. 바로 이 부분이 소설이 믿을 수 없이 아름다워지는 지점이다.

9.11 테러와 2차대전이라는 역사적 사건에서 개인적인 슬픔을 끌어낸 작가의 상상력은 아홉살 소년의 시선에서 믿을 수 없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는 가혹한 삶에 맞서는 슬프지만 아름다운 방식에 대하여, 소통할 수 없는 삶의 지극한 슬픔에 대하여, 그리고 결국엔 지독한 상실감에서 벗어나 뜨거운 화해와 치유로 나아가는 과정에 대하여 믿을 수 없이 아름다운 방식으로 그것을 보여준다.    

비어 있는 페이지들, 흑백 사진들, 빨간 색 펜으로 동그라미 쳐진 부분들, 글자들이 겹쳐져 완전히 까맣게 되어가는 부분들, 그리고 사진으로 끝내는 마지막 형식. 소설의 실험적인 형식들은 온몸으로 전해져오는 슬픔, 여러 가지 복잡한 빛깔의 감정들, 책 한 권이 주는 두툼한 무게를 느끼게 한다. 까맣게 뭉개지는 글자들처럼 슬픔이 밀려들고, 흑백 사진에 흡수된 감정들은 좀처럼 책장을 넘기기 힘들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게 조너선 사프란 포어는 믿을 수 없이 아름답고 슬픈 책을 탄생시켰다. 그 슬픔의 무게에 눌려 차마 책장을 넘기기조차 힘든 책을.


                                                “사랑한다.”는 말

왜 우리는 사랑한다는 말이 가장 필요한 순간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할까. 소설은 그 아픈 순간을 향하고 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던 순간. 그렇지만 사랑한다는 말이 가장 필요했던 순간을. 오스카는 아버지에게, 그리고 오스카의 아버지는 오스카에게,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중요한 말을 하지 못했다. 서로에게 가장 필요한 말을 들려주지 못했다. 소통이 가장 필요했던 순간, 서로를 바라보지 않았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말이 필요 없다는 말은 너무나 게으른 변명이다. 그리고 우리는 바보같이 그것을 아주 뒤늦게 깨닫는다. 그래서 할머니가 손자에게 들려주는 말은 엄청나게 아프고, 믿을 수 없이 슬프다.

“너에게 지금까지 전하려 했던 모든 이야기의 요점은 바로 이것이란다, 오스카. 그 말은 언제나 해야 해. 사랑한다, 할머니가.”

언제나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언제나 하지 못하는 말. 이미 늦어버린 순간에 생각나는 말. 그래서 더 아프고 더 가슴 시리게 만드는 말. "사랑한다."는 말. 말할 순간을 영원히 놓쳐버리기 전에 우리는 그 말을 해야 한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온몸에 멍이 들기 전에.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미안하다고 말하기 전에. 비어 있는 무덤 앞에서 말할 수는 없는 거니까. 이미 끊겨 버린 전화 앞에서 말할 수는 없으니까.

소설은 그 아프고 가슴시린 말, 사랑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이 아프게 전해준다. 그래서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전해져 오는 묵직한 슬픔은 그 한 마디에서 우러나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 삶에서 엄청나게 중요하고, 믿을 수 없이 아름다운 말, 바로 "사랑한다."는 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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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생님이 좋아요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양철북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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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참다운 교육이란 어떤 것일까. 하이타니 겐지로의 작품을 읽을 때면 내 머릿속은 복잡해진다. 일본에서 이 책이 나왔을 땐 하이타니 겐지로를 원망하는 독자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 책이 너무나 완벽한 선생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이 책을 읽고 나면 그런 생각이 든다. 교육이란 어려운 일인데 하이타니 겐지로는 그 어려운 일들을 아주 이상적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생각. 그래서 선생님을 꿈꾸는 사람들에겐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더 커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

책을 읽으면서, 내가 만약 파리 키우는 아이를 맡게 되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부터 들었었다. 고다니 선생님처럼 처음에는 그저 말리려고 했을 것이다. 어떻게든 아이를 달래보려고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고다니 선생님처럼 아이와 함께 파리를 연구하려고 하진 못했을 것 같다. 결국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파리를 연구하게 된 데쓰조는 신문에 날 만큼 파리 박사가 된다. 만약 고다니 선생님이 그저 포기하고 말았다면 데쓰조는 파리를 키우는 불결한 아이에 불과했을 것이다. 선생님의 판단이 아이를 더 구석으로 내몰 수도, 그리고 그 속에서 꽃을 피우게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니 아찔했다.

매일 쓰레기 처리장 주변에 사는 아이들 집을 찾아가, 아이를 씻겨주고, 공부를 도와주는 고다니 선생님의 이야기는 사실 우리 주위에서 찾아보기 힘들기에 더 감동적이다. 가난하고 어려운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일과 후에도 지속적으로 돌봐주는 선생님이 과연 몇이나 될까. 책을 읽은 후 그런 씁쓸함이 몰려드는 걸 피할 수 없었다.

아름다움으로서의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는 하이타니 겐지로의 작품 속에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사랑이, 따뜻한 믿음이 진하게 배어 있다. 고다니 선생님이 모두가 맡기 꺼려하는 정신지체아를 맡았을 때, 반 아이들 모두가 정신지체아 미나코를 돌봐준다. 선생님이 혼자 미나코를 돌보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아이들도 안 것이다. 매일 당번을 정해서 미나코를 돌봐주는 아이들의 모습은 참 따뜻했고, 참 아름다웠다.

이 책에 나오는 아이들은 쓰레기 처리장 주위에 사는 가난한 서민 가정의 아이들이지만, 참 따뜻하고 밝은 심성을 지니고 있다. 고다니 선생님의 집에 도둑이 들었을 때 위로금을 걷어서 가지고 올만큼 착한 아이들이다. 그런 아이들에게 고다니 선생님도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것을 느끼게 된다. 처음엔 그저 잘 우는 마음여린 선생님이었지만 쓰레기 처리장 이전 문제로 아이들이 학교를 옮기게 될지도 모르게 되자, 손수 고물 장사에까지 뛰어드는 씩씩한 선생님이 된다.

소위 문제아였던 데쓰조가 신문에 이름이 날 만큼 감추었던 재능을 뽐내는 것처럼, 고다니 선생님도 처음에 그저 힘들다고 느꼈던 선생님이라는 직업에 점차 적응해가면서 누구보다도 씩씩한 선생님이 되는 것이다. 아이가 발전해나가는 만큼 선생님도 함께 변화해나간다. 여기에 이 책의 묘미가 숨겨져 있다. 아름다운 교육이란 그렇게 함께 하는 과정 속에 숨어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름다운 교육은 마음을 열어 숨겨진 재능을 드러낼 수 있게 도와주는 일에서부터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감추어진 보물을 찾아서 아이와 선생님이 함께 그것을 가꾸어나가는 과정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이 책을 통해 새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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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그리다 - 세계 지성들의 빛나는 삶과 죽음
미셸 슈나이더 지음, 이주영 옮김 / 아고라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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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글을 쓰는 작가들에게 죽음은 매혹적인 소재다. 그들은 자신의 작품에서 죽음에 관해 다루고, 죽음은 작품 속 중요한 모티프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들 자신의 죽음에 이르면 문제는 달라진다. 우리는 흔히 아름다운 작품을 남긴 작가들의 죽음을 마치 그들이 남긴 작품처럼 아름답게 상상하려 한다. 그렇지만 죽음이란 늘 우리의 기대를 벗어나는 법이다.

미셸 슈나이더는 여러 작가들, 사상가들의 죽음을 소재로 매혹적인 에세이집을 펴냈다. 그는 여러 작가들, 사상가들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그들 삶의 마지막 순간을 매혹적으로 재현해냈다. 죽음을 주제로 한 여러 빛깔의 단편집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다양한 죽음의 빛깔이 변주된다. 주인공은 우리에게 잊을 수 없는 책들을 남긴 소설가들, 시인들, 사상가들이다. 어쩌면 이 책의 진정한 주인공은 아무리 생각해보려 해도, 도무지 알 수 없을 것 같은 ‘죽음’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흔히 죽음의 고통도 아름다운 작품들을 남긴 작가들에게는 비켜가는 것으로 생각하곤 한다. 그들이라면, 더 아름답게 죽지 않았을까 하는 조금 어처구니없는 기대들. 그렇지만 그들은 누구보다도 더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시인 릴케는 흔히 알려진 것처럼 장미 가시에 찔려 죽은 것이 아니라 백혈병 때문에 죽었는데, 죽음에 다다랐을 때 그는 고통을 참기 힘들 정도였다. 시인다운 죽음을 맞고 싶어서 진통제까지 거부했던 릴케는 자신의 몸을 가리켜 “고통이 넘기는 사전”이라고 표현했다. 고통에조차 은유법을 쓸 수 있는 릴케였지만,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공포’와 ‘욕망’이었다. 이렇듯 죽음의 고통은 시인의 아름다운 욕망을 무참히 짓밟는다. 모파상에게 죽음은 더욱 더 고통스러운 절차였다. 또 다른 모파상을 마주한 순간부터 모파상의 삶은 죽어가기 시작했고, 그가 정신병원에서 숨을 거두기까지 그는 자신의 죽음을 이미 목격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죽음에 대한 깊은 사색을 도와주는 책을 만나기란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감동받은 작품들을 쓴 작가들조차 죽음을 두려워했고,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난 죽음을 갈망해”라고 외치기도 했던 하이네에게 있어서도 죽음이란 ‘기분 나쁜 여인숙’ 같은 것이었다. “나는 죽는다.”라는 말을 모국어가 아닌 독일어로 말하고 죽은 안톤 체호프에게 죽음은 ‘외국어’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의사이자 소설가였던 체호프조차 자신의 죽음을 그냥 삶의 마침표 정도로만, 그렇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것 같다.

우리가 여러 작가들의 죽음을 아름답게 상상하고자 하는 욕망처럼, 작가들 또한 자신의 죽음을 아름답게 꿈꾼다. 그래서 “책으로 인해 죽음을 맞는 건 모든 작가들이 꾸는 아름다운 꿈”인 것이다. 하지만 “죽음은 그리 문학적이지 않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작가들은 자신의 죽음도 자신의 작품처럼 완벽하게 종결짓고 싶어 하지만, 그리고 아름답게 매듭짓고 싶어 하지만 죽음은 늘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우리를 덮치는 것이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죽고 싶었던 스탕달이 사람들이 붐비는 큰길가에서 죽었던 것처럼.

죽음은 늘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그렇게 다가오지만, 그래도 마지막 서명은 미리 생각해둘 수 있다. 작가들이 자신의 묘비명에 관심을 갖는 것은 아름다운 매듭에 대한 욕망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묘비명은 작가를 기억하는 마지막 메타포가 될 테니까. 그리고 그들의 묘비명은 책을 다 쓰고 난 후의 서명 같은 것일 테니까. 그래서일까. 스탕달은 무려 20년 동안이나 자신의 묘비명을 생각했다. “썼노라, 살았노라, 사랑했노라.”라고. 그렇지만 스탕달의 유언 집행자는 “나는 썼다. 사랑했다. 살았다.”로 자기 마음대로 바꾸어버렸다. 자신의 묘비명을 생각하며 평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 스탕달이 이 사실을 안다면 아마 깊이 잠들지 못할 것 같다.

이렇게 미셸 슈나이더는 세계 지성들의 죽음의 순간을 그만의 빛나는 성찰들로 재현해냈다. 인생이 한 권의 책이라면, 우리 자신은 결코 죽음의 페이지를 넘길 수 없을 것이다. 단지 먼저 죽어간 사람들의 페이지를 뒤적일 수 있을 뿐이다. 미셀 슈나이더가 보여주는 건 바로 그러한 죽음의 페이지들이다. 페이지를 넘기면서, 각기 다르게 웅크리고 있는 죽음을 모습을 관찰하는 것, 그리고 그 죽음들 속에서 삶을 거꾸로 비추어보는 것은 무척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자신의 죽음의 페이지에는 어떤 말들이 적혀 있을까. 그 위태로우면서도 매혹적인 상상 속에 이 책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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