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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6년 8월
평점 :
엄청나게 아프고
어느 날 갑자기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다면 어떡해야 할까. 사랑한다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면...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 그 슬픔, 그 지독한 상실감을. 사랑한 사람을 잃어버린 순간, 우리 삶의 시계는 영원히 멈추어 버린다. 아주 사소한 것들이 두려워지고 삶은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흘러간다. 그렇게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슬픈 시간이 시작된다. 엄청나게 아프고 믿을 수 없이 두려운.
아홉 살 소년 오스카의 삶의 시계도 그렇게 멈추어 버렸다. 9.11 그 끔찍했던 테러가 일어났던 오전에서 멈추어 버렸다. 아빠의 전화가 울렸던 그 순간에. 아빠와 마지막 대화를 나눌 수 있었지만 받지 않았던 그 순간에. 건물을 들이박는 비행기들. 그리고 무너진 빌딩. 뛰어내린 사람들. 형체도 없이 사라져간 사람들. “왜 아빠는 안녕이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왜 아빠는 “사랑한다.”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오스카의 삶은 그렇게 허망하게 무너진 빌딩처럼 산산조각 났다. 몇 대의 비행기가 삶을 완전히 망가지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에 오스카는 너무 어리다. 아빠는 어떻게 죽어갔을까. 상상은 의지와 무관하게 상상하기 싫은 쪽으로만 흘러간다. 아빠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야 한다. 그러면 “더 이상 상상하지 않게 될 테니까.” 오스카는 아빠의 유품 중에서 우연히 열쇠를 발견하고 그 열쇠의 주인을 찾아내려고 한다. 뉴욕에 162,000,000개의 자물쇠가 있다고 해도 아빠가 남긴 열쇠의 주인을 찾아내야 한다. 단서는 단 하나. 열쇠가 들어 있던 봉투에 적혀 있는 “블랙”이라는 단어. 그렇게 오스카는 뉴욕에 사는, 블랙이라는 성씨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는 기나긴 여정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은 아빠가 남긴 마지막 수색 작전 게임이 된다.
오스카의 할아버지. 제2차 세계대전 때 사랑하는 여자와 그녀의 배 속에 있던 자신의 아이를 잃었다. 그리고 그 사랑하는 여자의 동생과 결혼했지만 끝내 그는 상실감을 극복하지 못한다. “사랑하는 것을 잃을까 봐 너무 두려운 나머지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기로” 한다. 아내와 아내의 배 속에 있는 아이까지 버리고 떠난다. 살아갈 수 없어서. 삶은 너무 무시무시한 것이라서. 죽음보다 더 가혹한 것이어서.
그리고 오스카의 할머니. 역시 같은 이유로 사랑하는 언니를 잃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잃었다. “모두가 모두를 잃는” 전쟁으로 인해 한 평범한 삶이 무너졌다. 언니의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지만 남편은 언니를 잊지 못한다. 그를 지켜보는 그녀 역시 지쳐갈 수밖에. 가장 가까운 사람의 고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고통, 말해 무엇 할까. 오스카의 표현대로, 그녀의 온몸도 퍼렇게 멍이 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세 가지의 시점으로 소설은 진행된다. 지독한 상실감으로 말을 잃어버린 할아버지는 자신이 버린 아들에게 보내지 못할 편지를 쓴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나의 아이에게” 그러나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두꺼운 공책 속의 빈 페이지들처럼 그의 삶은 비어 있다. 그리고 그녀의 아내의 삶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이 쓴 긴 백지의 자서전처럼. 그리고 그것을 읽어줄 수 없는 그녀의 남편처럼. 또 그들이 만들어낸 무의 공간처럼 그들은 서로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말할 수 없는 삶의 빈 공간. 가장 가까운 사람조차 치유해줄 수 없는 아픈 상처. 그렇게 한 사람은 떠나가고 또 한 사람은 남겨진다. 엄청나게 아픈 가슴의 멍. 그렇게 세 사람의 삶에 지워지지 않을 멍이 들었다.
믿을 수 없이 아름다운
오스카와 오스카의 할아버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상처에 대항한다. 오스카의 할아버지는 말을 잃어버리고 떠나버림으로써 상처에서 멀어지려 한다. 오스카는 사람들을 만나고 자신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아버지의 흔적을 좇아간다. 아버지를 그리워한다. 오스카는 할아버지처럼 가혹한 삶으로부터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지 않는다. 스티븐 호킹에게 꾸준히 편지를 쓰고 언제나 무언가를 상상하며 새로운 것을 발명해내는 조숙한 소년 오스카는 견디기 힘든 상처를 어린 아이다운 재기발랄한 상상력으로 버텨내려 한다.
오스카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상상했다. 그리고 그 상상은 때때로 아버지의 죽음에 이르러서 잔혹한 방식으로 흘러가기도 했다. 그렇지만 오스카는 영리하다. 그래서 결국엔 슬픔을 다루는 데 어떻게 상상력을 동원해야 하는지 알아낸다. 오스카의 멋진 상상 중 가장 아름다운 상상이기도 하다. 오스카는 아버지가 없는 삶을 살아내기 위해, 삶의 시계가 멈춘 지점에서 되돌아가기 버튼을 누른다. 오스카의 발랄한 상상력 속에서 슬픔은 더욱 더 투명한 빛을 띤다. 바로 이 부분이 소설이 믿을 수 없이 아름다워지는 지점이다.
9.11 테러와 2차대전이라는 역사적 사건에서 개인적인 슬픔을 끌어낸 작가의 상상력은 아홉살 소년의 시선에서 믿을 수 없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는 가혹한 삶에 맞서는 슬프지만 아름다운 방식에 대하여, 소통할 수 없는 삶의 지극한 슬픔에 대하여, 그리고 결국엔 지독한 상실감에서 벗어나 뜨거운 화해와 치유로 나아가는 과정에 대하여 믿을 수 없이 아름다운 방식으로 그것을 보여준다.
비어 있는 페이지들, 흑백 사진들, 빨간 색 펜으로 동그라미 쳐진 부분들, 글자들이 겹쳐져 완전히 까맣게 되어가는 부분들, 그리고 사진으로 끝내는 마지막 형식. 소설의 실험적인 형식들은 온몸으로 전해져오는 슬픔, 여러 가지 복잡한 빛깔의 감정들, 책 한 권이 주는 두툼한 무게를 느끼게 한다. 까맣게 뭉개지는 글자들처럼 슬픔이 밀려들고, 흑백 사진에 흡수된 감정들은 좀처럼 책장을 넘기기 힘들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게 조너선 사프란 포어는 믿을 수 없이 아름답고 슬픈 책을 탄생시켰다. 그 슬픔의 무게에 눌려 차마 책장을 넘기기조차 힘든 책을.
“사랑한다.”는 말
왜 우리는 사랑한다는 말이 가장 필요한 순간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할까. 소설은 그 아픈 순간을 향하고 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던 순간. 그렇지만 사랑한다는 말이 가장 필요했던 순간을. 오스카는 아버지에게, 그리고 오스카의 아버지는 오스카에게,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중요한 말을 하지 못했다. 서로에게 가장 필요한 말을 들려주지 못했다. 소통이 가장 필요했던 순간, 서로를 바라보지 않았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말이 필요 없다는 말은 너무나 게으른 변명이다. 그리고 우리는 바보같이 그것을 아주 뒤늦게 깨닫는다. 그래서 할머니가 손자에게 들려주는 말은 엄청나게 아프고, 믿을 수 없이 슬프다.
“너에게 지금까지 전하려 했던 모든 이야기의 요점은 바로 이것이란다, 오스카. 그 말은 언제나 해야 해. 사랑한다, 할머니가.”
언제나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언제나 하지 못하는 말. 이미 늦어버린 순간에 생각나는 말. 그래서 더 아프고 더 가슴 시리게 만드는 말. "사랑한다."는 말. 말할 순간을 영원히 놓쳐버리기 전에 우리는 그 말을 해야 한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온몸에 멍이 들기 전에.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미안하다고 말하기 전에. 비어 있는 무덤 앞에서 말할 수는 없는 거니까. 이미 끊겨 버린 전화 앞에서 말할 수는 없으니까.
소설은 그 아프고 가슴시린 말, 사랑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이 아프게 전해준다. 그래서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전해져 오는 묵직한 슬픔은 그 한 마디에서 우러나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 삶에서 엄청나게 중요하고, 믿을 수 없이 아름다운 말, 바로 "사랑한다."는 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