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이는 언제나 거기에 있어
존 그린 지음, 노진선 옮김 / 북폴리오 / 2018년 6월
평점 :
절판


한물간 MBTI 얘기를 이제 그만 좀 하고 싶은데, 솔직히 너무나도 유용한 글감인지라 가끔씩은 써줘도 된다고 우겨본다. 가장 희귀하다는 남자 INFJ의 속내를 깊이 들어본 사람이 얼마나 되겠으며, 그러니 몇십 번 우려먹는다 한들 그리 민망할 건 아니라는 정신승리 하에 이 글을 적고 있다. INFJ의 대표적인 특징은 16가지 유형 중에 N성향이 가장 높다는 것인데, 생각이 워낙 많다 보니 전지적 본인 시점의 상상을 하면서, 온갖 최악의 시나리오를 짜면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참 쓰잘데없는 염려를 해가면서 그렇게 스스로를 좀먹는 셀프 에너지 뱀파이어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추가로 INFJ의 두뇌는 24시간 오토매틱으로 풀가동하기 때문에 ‘머리를 비운다‘라는 개념이 잘 없다. 여하튼 아이러니하고 미스테리한 나 자신에게 대체 왜 그렇게 사느냐고 셀 수 없이 자문한 끝에, 그것이 INFJ의 1순위 되는 ‘욕구‘이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캐럴라인 냅의 <욕구들>을 통해서 각자의 DNA 속에 잠재된 욕구가 자신을 어떻게 지배하는가를 알게 되었다. 그렇듯 나의 무수한 염려들은 모든 사태와 사고를 방지하여 나만의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쪽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과연, 너 자신을 알라던 테스 형의 말씀은 아멘 또 아멘이시다.


실컷 쓰고 보니 또 재미없는 인트로가 되었지만 좋게좋게 넘어가자. 다름 아니라 간만에 청소년 문학 한 권 읽었는데, 이 주인공 또한 뭔 생각이 그리 많은지 사는 데에 꽤나 애먹고 있더라고. 어떤 면은 나의 옛 모습을 보는 듯도 하고 그래서 감정이입이 마구 샘솟았던 <거북이는 언제나 거기에 있어>를 소개해 본다. 고등학생 에이자는 D머시기라는 박테리아에 감염된다는 공포에 사로잡혀있다. 하여 불안해질 때면 신체를 반드시 소독하고 세척해야만 겨우 진정된다. 매사에 이렇다 보니 일상이나 인간관계도 무너져버렸고, 그렇게 어려서부터 체념하는 법을 배우며 자라난 소녀. 아빠는 병으로 갑작스럽게 죽고, 날마다 속상해하는 엄마의 얼굴은 피하기에 급급하다. 그나마 깨발랄한 데이지 덕분에 외톨이는 면했다지만 이 친구도 나를 버거워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소녀는 지금 자기 외에 누군가를 신경 쓸 여력이 없다. 이 거지 같은 세상. 아니, 거지 같은 나여...


에이자는 생각한다. 머릿속을 침투해대는 불청객의 속삭임에 대해. 의식 너머의 자아는 끝없는 강박 증세와 불안장애를 가져다주었고, 통제 불가한 정신은 손가락에 상처 내고 새 반창고를 붙이는 습관을 갖게 하였다. 박테리아에게 점령당한 몸뚱이가 역겨웠고, 그걸 측은하게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들도 지긋지긋했고, 뭐 하나 제대로 다루지도 통제치도 못하는 스스로가 혐오스러웠다. 주치의는 계속해서 약 먹고 경과를 지켜보자는데, 약을 먹어야 내가 나로서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내키지가 않는 거다. 또 다른 자아에게 굴복당하는 일이 정녕 약을 안 먹어서 생긴 일 같지도 않고 말이다. 하여간 이런 자신의 처지는 마치 기생충에 감염된 물고기와도 같은 꼴이었다. 몸은 있지만 나를 조종하는 건 내가 아니었고, 따라서 육체 안에 갇혀 있는 나를 과연 존재한다고 볼 수 있을까 싶었다. 이에 주치의는 말하길, 나의 의심은 나를 실존하게 만든다고 했다. 실존의 증명을 위하려던 데카르트의 말처럼, 계속 그렇게 부딪히기라도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에이자는 또 생각한다. 마구 엉킨 욕구의 매듭을 어떻게 하면 풀 수 있는지를. 불안과 우울을 교차하면서 커오는 동안 사회의 일원이 되는 것도 글렀고, 사랑받을 자격도 없다고 여긴지 오래이다. 가장 가까운 절친 데이지에게조차 깊은 속내를 꺼내지도 못한다. 자신의 아픔을 어떻게 묘사하고 설명해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에. 이젠 세상에 별 미련도 없지만 밑바닥에 눌려있던 욕구는 꼭 한 번씩 몸 밖으로 튀어나왔다. 에이자도 남들처럼 좋은 대학을 가고 싶고, 데이지처럼 거리낌 없는 일상도 갖고 싶어 했다. 그러나 이 지독한 공황에서, ‘나‘라는 감옥에서 부디 해방되기를 바라는 그 욕구가 혹여 괜한 욕심은 아닐는지. 이렇듯 제 머릿속에 갇혀서 지내다 보니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은 바닥을 찍었고, 이것은 끝내 데이지마저 뚜껑 열리게 하였다. 그러자 매사에 진지함이라곤 1그램도 없이 태평하게 사는 친구가 얄미웠고, 내 고통에만 집중하느라 친구가 어떤 아픔을 겪는지도 몰랐던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왜 날 뷁!!!


이런 총체적 난국에서도 다행히 숨 쉴 통로가 있었으니, 수년 만에 다시 만난 남사친 D였다. 현재 D는 경찰을 피해 도망 다니는 아빠의 실종사건으로 패닉 상태였다. 재벌가인 소년의 아빠는 이미 미국 전역의 화제거리였고, 세간의 주목을 받느라 지쳤던 D는 에이자에게 속내를 털어놓는다. 아빠를 잃고 자유를 뺏긴 그 기분을 잘 아는 소녀는 D에게 동질감을 갖고서 마음 문을 열게 된다. 그렇게 서로는, 세상에서 자기를 알아주는 유일한 사람을 만나 고통을 나누기 시작한다. 이로써 에이자도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게 되었고, 의심과의 충돌에서 떨어져 나온 진리의 조각들을 맞춰보게 된다. 안으로 향했던 관심과 생각들이 바깥을 향하게 되자, 인생이라는 소설에는 자기 얘기만 있는 게 아님을 이해한 것이다. 여전히 불청객은 자신을 괴롭혀댔지만 이제 생각은 생각이고 불안은 불안일 뿐이다. 앞으로 그것들이 나를 삼키우지 못하도록 달라져야 하겠지.


우리를 프레임에 가두고 넘어지게 하는 삶의 이벤트는 참으로 다양하다. 누군가에겐 소년처럼 환경 문제로, 또 어떤 이에겐 소녀처럼 트라우마로 나타나기도 한다. 나는 의사도 전문가도 아니지만 내 경험을 빗대어볼 때, 계속해서 통증을 동반해야만 고통과 방황에서 탈출하게 된다고 말하고 싶다. 나 역시 집안의 기나긴 가난에서, 오른쪽 목이 허전하다는 강박에서, 지나간 과거에 대한 집착에서, 그리고 누누이 말했던 생각의 저주에서 얽매여살다가 이제는 다 해방되었다. 참 많이도 무너지고 좌절했지만 지지 않고 나를 불편케 하는 모든 요인에 대해 회의하고 반문하였다. 그 길었던 터널을 빠져나온 지금은 나라는 인간을 200% 빠삭히 알게 되었고, 덕분에 인생의 리즈시절을 살아가는 중에 있다. 물론 이날이 있기까지 오래 걸렸고 시행착오도 많았는데, 지금 보니 그토록 울부짖고 발버둥 치던 과거의 내가 그렇게 대견할 수가 없다. 당신도 부디 사소한 부조리일지라도 절대 납득하지 않기를 바라겠다. 그나저나 이 정도로 좋았던 청소년 소설이 있었던가. 정말 좋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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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4-02-04 22: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생각이 많으면 확실히 고달픈거 같습니다. 저도 N 성향인데 가끔은 힘들어요ㅋㅋ

청소년 소설에 별 다섯이라니 정말 좋으셨나 봅니다~!!

물감 2024-02-04 22:59   좋아요 2 | URL
생각 자체를 막지는 못하니, 차라리 생각의 흐름을 안정적인 데로 흘려보내는 훈련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건강한 사고와 비판적인 시각의 균형잡는 법을 알겠더라고요. 정말 오래(?)살고 볼 일입니다ㅋㅋ
그보다 새파랑 님 되게 오랜만이네요. 어째 저보다 더 뜸하신듯? 저도 분발해야겠습니다 ㅋㅋㅋ
이 작품 대체로 평이 우수하네요. 존 그린의 작품들이 다 괜찮은 편인가 봅니다. 더 찾아봐야겠어요.

coolcat329 2024-02-05 11: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닌거 같은데 ISFP가 자꾸 나오네요. 물감님 글을 읽으니 저랑 많이 다르시긴 한 거 같아요. 생각이 많다...저는 깊게 생각을 안하는 거 같아요. ㅠㅠ
저 지금 서머셋 몸의 <인간의 굴레에서>를 읽고 있는데 이 책 물감님 읽고 주인공의 mbti를 좀 알려주시면 좋겠어요. 뭔가 나올 거 같은데 저는 잘 몰라서요. ㅎㅎ

지금은 수많은 좌절을 이겨내고 자신에 대해 잘 알게 된 물감님이 저는 참 훌륭하게 보입니다.

물감 2024-02-05 13:24   좋아요 1 | URL
정 안맞다 싶으시면 정식 검사를 받아보실 수 밖에요 ㅋㅋㅋ
반대로 저는 _S_P 처럼 되려고 노력중이에요. 군더더기를 덜어내고 단순 심플하게 사고하는 스탠스가 필요하거든요. 본인의 부족함을 느끼는만큼 충분히 바뀔 수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조만간 서머싯 몸의 <인생의 베일>을 읽을 건데요, 이후에 <인간의 굴레에서>도 읽어볼게요. 말씀하신 주인공의 MBTI로 추측해보겠습니다 ㅋㅋㅋ
아까까지 비가 오더니 이젠 눈이 내리네요. 감기조심하세요 쿨캣님ㅎㅎ

반유행열반인 2024-03-07 09: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또다른 INFJ 물감님께 인사 올립니다. 그런데 저는 제가 인프제라는 것만 알지 아이랑 이랑 제이랑 피랑 뭐가 다른지도 모르고 제 주변인들은 너 티야??!!를 제게 외치는 일이 많습니다…

물감 2024-03-07 10:23   좋아요 1 | URL
인프제 열반인 님 반갑습니다! mbti에 그닥 관심없으신 편이 더 다행입니다. 세상을 균형있게 살고 있다는 뜻이니깐요ㅎㅎ 저처럼 한쪽으로 크게 쏠린 유형들이나 삶이 힘들어서 이같은 검사에라도 매달리는 것이지, 사실 몰라도 전혀 상관없어 보입니다. 솔직히 어떻게 16가지로 인간이 나뉘겠어요... 글고 저 역시 직장에선 일부러 T처럼 행동합니다. F로 지냈다가 상처만 입어서 내사람한테만 F로 대합니다요 🙂🙂🙂
 
개의 심장 창비세계문학 18
미하일 불가코프 지음, 김세일 옮김 / 창비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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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작품은 죽은 남성의 뇌하수체와 고환을 개한테 이식하여 탄생한 돌연변이의 내용이다. 이 뇌를 교체한다는 소재는 현대문학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데, 무려 1925년에 <개의 심장>이 쓰인 걸 보면 인격에 대한 관심사는 아주 오랫동안 이어져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말도 안 되는 엽기적인 발상이지만, 수술받은 개는 점차 인간의 외형으로 변해가고 인간의 말도 할 줄 알며 지능도 생겨나기 시작한다. 아마도 다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을 떠올릴 텐데, 이 책에서는 창조자와 피조물의 입장이 역전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아무튼 이 기괴한 수술의 목적은 인간의 노화를 막고 젊음을 되찾는 실험이었다. 그 바램과는 딴판인 실험이 되었지만 이건 이거대로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셈이었고, 수술을 집행한 교수는 개-인간을 교육하여 완전한 사람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골목살이 하던 개의 습성이 참된 인간이기를 거부하는지,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의 행세를 반복하는 실험체였다. 하여간 이런 꼴을 볼 때마다 자업자득이란 생각이 지워지질 않는다.


개-인간과 교수 일행의 부딪힘은, 신 인류에 대한 이데올로기의 비판을 나타낸다. 출간 당시 아주 핫하던 볼셰비키의 혁명주의를 개-인간으로 압축해냈다고 볼 수 있겠다. 작중에서는 노동 계급인 프롤레타리아 무리가 교수 일행을 찾아와 고발하겠다며 시비를 건다. 이 아파트에서 교수 당신만 방 8칸을 쓴다면서. 하지만 교수는 허가된 대로 쓰는 거라 법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불청객은 훗날 개-인간을 꼬드겨서 교수가 눈 뒤집힐만한 말이나 행동을 하도록 교묘히 조종한다. 또한 개-인간에게 직책을 주어 사회의 일원처럼 느끼게 해주기도 하는데, 교수 일행은 아직 한참 발달 단계인 실험체가 맨날 이상한 것만 배워오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인 것이다. 이 양측의 상황들로써 당시 러시아의 혁명 운동 분위기를 대강 알게 해준다. 이 신 인류가 얼마나 눈엣가시였을지 참.


주제나 메시지가 명확한 작품이라 딱히 더 말할 게 없다. 이미 다른 분들이 더 상세하게 리뷰했기도 하고. 그나저나 작가는 왜 이토록 그로테스크한 이야기를 썼을까. 본인이 의사 출신이라서 더 실감 나게 쓸 자신도 있었겠지만, 신 인류의 등장을 ‘인간으로 진화한 개‘로 설정한 것은 대놓고 프롤레타리아를 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터. 반대로 자신의 권위와 계급만을 신경 쓰는 교수의 모습은, 우파에 대한 비난이자 우롱인 셈이다. 이 작품을 쓰면서 작가는 자신이 어디에 속해있다고 보았을까. 개-인간의 거친 말과 행동을 통하여 기존의 스탈린 체제가 여러모로 문제 있으며, 작품 해설대로 점진적 변화를 거쳐서 혁명을 완성해야 함을 알려주고 있다. 비록 러시아의 역사 배경은 잘 모르지만 그런대로 알아듣는 재미가 있었다. 다만 <프랑켄슈타인>같은 임팩트는 없어서 별 점은 높게 못 주겠군요. 스미마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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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4-01-30 22: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불가코프가 기괴하고 코믹하게 체제를 비판한점이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나저나 물감님, 프사 느낌이 너무 따뜻해졌는데요? 차가운게 더잘어울리시는데ㅋㅋㅋ실망입니다ㅋ

물감 2024-01-30 22:56   좋아요 1 | URL
그렇게 말씀하시니 다른 작품도 찾아볼까봐요ㅎㅎㅎ
그리고 저도 차가운 걸 선호하는 편인데, 마음 좀 다잡아볼라고 요렇게 바꿔봤어요😃😃😃

stella.K 2024-02-01 12: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공유! 멋지네요. 어쩌면 전 물감님을 공유로 인식하게 될지도 몰라요. ㅎㅎ
불가코프가 이런 책도 썼군요. 마르가리타 오래 전에 사 놓고 여태 안 읽고 있습니다. 이 사람 정말 대단하더군요. 그야말로 피의 인생이라고나 할까? ㅠ

물감 2024-02-01 13:16   좋아요 1 | URL
하하하 어쩌면 그걸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ㅋㅋㅋ
<마르가리타>가 대표작이던데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같이 도전하시죠ㅋㅋㅋㅋ
 
브라스 꾸바스의 사후 회고록 창비세계문학 20
마샤두 지 아시스 지음, 박원복 옮김 / 창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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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내 기준에서의 소설이란, 머리와 가슴 중 어느 한쪽으로는 읽혀져야만 한다.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느낀 플롯이나 구성은 ‘이야기‘로 받아들이질 못한다. 그게 촌스럽다 해도 나는 주제를 벗어나거나 흐름을 비껴가는 스타일이 극도로 싫다. 그 특유의 초점 없는 문장들이 연달아 나올 때의 당혹감은 몇 번을 반복해도 적응이 안 된다. <브라스 꾸바스의 사후 회고록> 또한 그러했다. 일단 사후 기록이라 해서 달리 특별할 것도 없었고, 어중간한 의식의 흐름 또한 출처를 알 수 없는 찐따 화법을 쓰고 있어서 집중이 하나도 안된다. 초반까지는 커가면서 있었던 일들을 짤막하게 설명하는데 흥미가 1도 안 생겨서 차라리 나님의 썰들을 대충 써도 이거보단 재밌겠다는 생각이 백만 번쯤 든다. 그러다 중반쯤 되면 결국 뻔하고 진부한 사랑 내용으로 넘어간다. 그것도 애까지 있는 유부녀와의 긴장감 1도 없는 사랑놀음으로. 그래, 이왕 그쪽으로 갈 거면 MSG라도 좀 뿌려서 그럴듯하게 꾸며나 보든가, 이건 뭐 콘텐츠도 컨셉도 없이 아무 생각이나 떠오르는 대로 두서없이 휘갈겨 쓴, 무성의함의 표본이다. 좀 더 팩폭하자면 딱 초딩 수준의 감성이어서 문법이고 맥락이고 뭐고 싹 다 무시한 허술함 그 자체이다. 이 지루하고도 정신 산만한 글들을 계속 읽어야 하나 고민될 때쯤, 71.장에서 갑자기 셀프 디스를 하는 게 아닌가. 그러니까 작가 본인도 문제점을 잘 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컨셉이 없다는 말은 취소하겠다. 전력으로 컨셉에 충실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더 이상 같지도 않은 말장난에 지쳐서 그만 중도 하차해버렸다. 그래도 뭔가 좀 얻어 갈까 했었지만 이 책은 풍자와 해학 어느 쪽도 아니었다. 브라질을 대표하는 작가라는데 이 작품만으로는 전혀 동의하지 못하겠다. 에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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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4-01-27 13: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라이, 에서 빵터짐..

물감 2024-01-27 14:00   좋아요 1 | URL
휴, 한명 웃겼다..

stella.K 2024-01-27 18: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웃었습니다. 근데 다른 리뷰어들은 좋다고 날린데 시크하신데요? 전 팩폭에서 빵~ㅎㅎ

물감 2024-01-27 18:37   좋아요 2 | URL
한국인들은 보여지는 게 중요해서 싫어도 싫다고 안합니다. 저는 한국의 서평 문화는 글러먹었다고 생각한지 오래됐어요ㅋㅋㅋ

coolcat329 2024-03-15 08: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이 책 읽다가 그만두셨군요! 빛소굴에서 나온 <정신과 의사> 읽고 작가에게 관심이 생겨 지금 이 책 40페이지 쯤 읽고 있는데 너무 산만하고 무엇보다 재미가 없어서 읽는 게 괴롭네요. 포기하려고 90프로 맘 먹고 그래도 이웃님들 글을 보고 다시 결정하자 하고 찾아보는데 별2개 반가운 물감님 글 발견 😂😂
저도 그만 읽으려구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안가서 힘드네요.

물감 2024-03-16 22:08   좋아요 0 | URL
정신과의사는 멀쩡한 편이던가요?ㅋㅋ 그래도 저는 절반 넘게는 읽었습니다. 뒤에 뭔가가 있을거라는 기대는 싸그리 무너지더라고요. 일찍 하차하길 잘하셨습니다요😁😁😁
 
브로큰 윈도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2-8 링컨 라임 시리즈 8
제프리 디버 지음, 유소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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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 타임용을 찾다가 고른 디버의 작품이다. 요 시리즈를 다 읽겠다는 다짐을 몇 년째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디버의 작품들은 기본 500쪽 이상인데, 느긋하게 읽어도 이삼일 이면 완독할 정도의 속도감을 지녔다. 이번에도 명불허전 페이지터너임을 증명했으나 솔직히 디버치고는 평범하다고 느꼈던 작품이었다. 디버를 읽어본 사람만이 공감할 아이러니라 해두자.


8편의 빌런은 웹상에 등록된 개인정보를 이용하여 범죄를 저지르는 악질 중의 악질이다. 타깃을 죽인 뒤 피해자가 사용하는 제품을 알아내, 무고한 사람의 집에다 그 물건들을 두어서 범인으로 누명을 씌운다. 또는 타깃의 신용 정보를 도용하여 빚쟁이로 만들어서 나락을 보내버리기도 한다. 피해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읽고 조종하는 그는 전지전능한 신이나 다름없었는데, 이 엄청난 설정을 적극 활용하는 장면은 얼마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이 시리즈만의 묘미인 빌런과의 대결이 빈약하게 느껴진다. 물론 링컨 수사팀은 정신없이 돌아갔지만.


작가는 그 빈약함을 메꾸고자 링컨의 개인사를 집어넣었다. 링컨의 절친이자 사촌인 아서가 살인 용의자로 지목되어 구치소에 잡혀간다. 아서의 아내에게 그 소식을 들은 링컨의 마음은 착잡하다. 한참 친하게 지내던 대학시절, 사촌이 링컨의 애인을 뺏은 후로 쭉 손절해왔기 때문에. 그러나 링컨의 감지 센서는 증거가 명백한 이 사건에 이상함을 느껴, 사사로운 감정과 별개로 수사에 흥미를 갖게 된다. 예상대로 유사 사건들이 몇 건 더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거대한 데이터 마이닝 기업이 엮여있었다. 라임은 모든 데이터의 접근 권한을 가진 기업의 직원 중 하나를 용의자로 보았고, 즉시 대상을 물색하여 수사에 들어간다. 늘 그렇듯 전부 허탕이었고, 한쪽에서는 또 다른 범죄가 발생하여 수사에 혼선을 주었다. 역시 주인공들은 굴리는 맛이 있어야 한다.


이 외에 라임의 파트너인 아멜리아 색스의 개인사도 나온다. 그녀가 딸처럼 아끼고 보호하는 여학생이 있는데, 유부남과 사랑에 빠진 데다 사건까지 휘말려서 아주 그냥 속이 타들어만 간다. 소녀로 인해 생겨나는 모정은, 형사라는 거친 직업에서 엄마라는 평범한 삶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소망이 커져갈수록 얼른 링컨과 합쳐서 심신의 안정을 얻고 싶어 함이 느껴진다. 허나 애석하게도 링컨의 고장 난 신체는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인다. 나이 많은 유부남과의 사랑과, 전신마비 장애인과의 사랑 중 어느 쪽이 더 참담할까. 정말이지 이번 편은 메인 사건보다 서브 내용들이 더 흥미롭다.


제프리 디버는 온라인 범죄의 작품을 세 권이나 출간했다. 링컨 라임 시리즈의 <브로큰 윈도>, 캐트린 댄스 시리즈의 <도로변 십자가>, 스탠드 얼론인 <블루 노웨어>인데, 같은 소재를 여러 번 쓴다는 건 그만큼 현대사회에서 개인정보 노출의 위험성을 강조하려는 뜻이 아닐까 한다. <브로큰 윈도>는 익히 들어온 ‘깨진 유리창의 법칙‘으로써, 사소한 문제를 방치했다가 훗날에 큰 범죄로 이어진다는 범죄 심리학 이론이다. 그 말대로 사소한 개인 정보들이 어느 한순간에 나락 가게끔 만드는 빌미가 되기도 한다. 특히나 요즘같이 SNS나 블로그가 대중화된 시점에서는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경고를 백날 해봤자 어찌할 수도 없는 현실 아닌가. 사는 동안 운이 따라주길 바라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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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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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여자친구를 사귄 건 고등학교 3학년에 올라가면서였다. 상대는 다른 학교의 두 살 연하였는데, 너도나도 공부에 매진하던 그 시기를 나는 연애하느라 정신없이 보내었다. 그러다 점점 다투는 일이 늘어났는데 이유인즉슨 그 애의 주변에는 항상 남자들이 있었다. 그렇게 나랑 싸우고 풀고를 반복하던 그 애는 어느새 나의 절친하고 눈이 맞아버렸다. 극소심했던 나는 주먹다짐 대신 싸이월드에다가 그들에 대한 맹비난의 글로 도배를 하였다. 우리를 모르는 제3자가 읽어도 욕 나오지 않을 수 없게끔 정성을 다해 저격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나와 주변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몇 년 뒤에는 결혼까지 하여 또다시 충격과 증오를 안겨주었다. 그 시절 나는 매일같이 거울 앞에 서서 온갖 저주를 퍼부었던 게 기억 난다. 그로부터 3년 뒤, 지인들이 그들의 이혼 소식을 들려주었다. 여자 쪽의 바람이었고, 그 내막은 여기에 담지 못할 만큼 추잡한 것이었다. 나는 수년간의 저주가 이루어진 기쁨에서 오는 복잡 미묘함을 꽤 오랫동안 느껴야 했다.


평소 사적인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편이나, 너무 내 것과 비슷하여 말하지 않을 수가 없는 작품을 읽었다. 반스 행님의 대표작인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오래 묵혀둔 내 기억의 파편들을 사정없이 끄집어내어 이 야심한 밤에 나를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주인공의 전 여자친구 V가 절친 A와 사귀게 되자 이들에게 저주의 편지를 아주 정성스레 써주었던 것이다. 이후 영문을 모르는 A의 자살 소식이 들려오고, 그렇게 40년이 지나버린다. 이제 노인이 된 주인공 앞으로 V의 엄마가 남긴 소정의 돈과 A의 일기장이 상속된다. 그러나 V는 A의 일기장을 가로채어 절대 넘겨주지 않는다. 하여 토니는 V와 연락하고 만남을 가지지만, 그럴수록 돌아오는 것은 ‘여전히 너는 감을 전혀 못 잡는다‘라는 핀잔뿐이다. 그녀는 과거 토니가 남긴 저주의 편지를 고스란히 돌려준다. 그는 자신이 썼던 저주의 내용대로 일어난 결과를 목도하며 기억의 왜곡과 균열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자연스레 친구들과 멀어지면서 직장을 다니고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살다가 은퇴한, 남들 다 그렇듯 평범한 인생 대로를 밟아온 주인공. 그의 기억 속에 A는 언제나 훌륭한 철학자이자 진실의 탐구자로써 남아있었다. 그래서 A의 자살 또한 자신들과 다르게 논리적 사고로 도출된 행동이라 보았다. 그러니까 자신은 A를 좋게만 평가하고 있었고 그건 틀림없는 사실일진대,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나는 이 낯 뜨거운 편지가 정녕 제 손으로 썼다는 게 얼마나 미치게 만들던지. 아무리 미화된 기억이라지만 긴긴 세월 동안 굳건히 믿고 지켜온 기억이 한순간에 부정당했으니 그 밖의 기억들도 안심할 수가 없게 돼버렸다. 그렇다면 나에 대한 남들의 인식 또한 내가 알던 것과 크게 다를지도 모른다는 말이 된다. 이것이 삶의 정당성을 외면하고 편한 길을 택한 결과였을까. 일찍 생을 마감한 A가 맞았고, 여태까지 살아남은 토니는 틀린 것일까.


누구나 그렇게 간단히 짐작하면서 살아가지 않는가. 예를 들면, 기억이란 사건과 시간을 합친 것과 동등하다고. ...또한 시간이 정착제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용해제에 가깝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백히 알아야만 한다. 그러나 이렇게 믿는다 한들 뭔가가 편리해지지도 않고, 뭔가에 소용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인생을 순탄하게 살아가는 데는 아무 도움이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실을 무시해버린다.

111p - 112p

이혼하고도 종종 토니를 만나주는 전처에게 사정을 말해본다. 전처는 자신을 명쾌한 여자로, V는 미스터리한 여자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남자들은 어느 한쪽의 매력에 빠진다고 했다. 명쾌함을 골랐던 주인공은 뒤늦게 미스터리에 끌리는 중이었다. 어느새 일기장을 돌려받는 문제보다 V의 환심을 사고 자신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으려는 일에 몰두하는 토니. 그래서 계속 차갑게 구는 V의 태도는 관심 밖이었고, 오로지 자신의 목적에만 매달리고 있었다. 사실 그녀의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았다. 언제나 비밀스런 구석이 있었고, 좀처럼 답을 알려주지 않았으며, 수준을 따라오지 못하는 토니를 경멸하였다. 그런 V의 성격을 알고 있기에 별 대수롭지 않아 했으나, 여전히 감을 못 잡는다는 핀잔을 듣다 보니 내가 알던 그녀의 이미지가 어쩌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드는 것이다. 또다시 전처를 찾아가 조언을 구해보지만, 이제 당신은 혼자야 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그제서야 전처도, 전여친도 돌아서게 만든 원인이 나였음을 어렴풋이 자각하는 토니 영감님. 대체 그의 기억들은 어디까지 희석되어 있던 것인지.


카뮈와 니체를 읽는다던 A의 독서 취향에서 이미 그의 죽음은 예견되어 있었다. 윤리적 결정에 따른 행동을 몸소 보여준 참 대단했던 친구. 자신보다 A에게 끌렸던 전여친이 이해가 안 될 것도 없었으나, 친구와의 비교로 심란해진 토니의 화살은 어째서인지 V를 향하고만 있었다. 사실 이제 와서 지난 연인의 속을 뒤집고 치근덕대는 건 추잡한 복수심 따위가 아닌 그녀의 경멸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지금이라도 그녀가 자신을 잘못 보고 오해했던 것으로 돌려놓고 싶어 했다. 그러나 자신이 저주했던 이의 불행한 말로를 어떻게 바꿀 수 있으랴. 틀어져 버린 사이를 무슨 수로 만회할 수 있으랴. 이것은 명쾌하든 미스터리하든 마찬가지일 테다. 토니가 어떻게든 문제를 풀고 나름의 답을 내려보는데, 정작 그녀의 경멸은 전혀 다른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토록 둔하고 눈치 없는 주인공도 결국 눈치챘던데, 왜 나는 다 읽고도 몰라서 남들의 리뷰를 읽고 이해했는지. 이거야 원, 나야말로 감을 못 잡는 놈이었다.


다시 보니까 참 역설적인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좋았던 기억들은 오물이 잔뜩 묻어있고, 외면했던 기억들엔 정답이 숨어있었으니. 나라고 다를 게 뭐 있을까. 나 같은 경우에는 누가 보더라도 상대방의 100% 과실이지만, 그게 과연 수년 동안 저주해가며 감정 상할만한 일이었나 싶다. 이제는 너무 오래 지나버린 그 사건에서 혹여 내가 간과한 문제나 일들이 있었을까 봐 걱정도 든다. 너무 강렬했던 감정과 기억들은 영영히 박제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끄집어내보니 많이 흐려져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외에도 얼마나 많은 기억들이 흩어져 날아가고 있을까. 그것들을 잡아야 할지, 내버려 두어야 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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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4-01-18 1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물감님의 고3 시절 연애담, 완전 소설이군요?
역시 한 번만 바람피우는 사람은 없네요. 속이 다 후련...ㅋ
사적인 이야기 앞으로도 종종 해주셨음 좋겠어요. 너무 재밌어요!
저에게는 그저 그런 소설이었는데 물감님의 분석에 재독하고 싶네요.

물감 2024-01-18 12:00   좋아요 1 | URL
으하하 제가 이같은 굴곡들이 좀 많았어요. 그래서 지금의 냉소적인 모습이 되었거든요. 보다시피 좋은 추억감이 못되어서 잘 꺼내지 않으려는 것도 있고요ㅋㅋ 기회되면 가끔씩 오픈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잠자냥 2024-01-18 13: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극소심했던 나는 주먹다짐 대신 싸이월드에다가 그들에 대한 맹비난의 글로 도배를 하였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첫문단 진짜 재밌네요 ㅋㅋㅋㅋㅋㅋㅋ

물감 2024-01-18 13:31   좋아요 1 | URL
역시 킬 포인트를 아시는군요 ㅋㅋㅋㅋ 따지고 보면 저의 필력(?)은 그때부터 생겨난 듯 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