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독약 창비세계문학 28
엔도 슈사쿠 지음, 박유미 옮김 / 창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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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활동을 해온 지도 벌써 10년이 되었다. 다독가는 아니지만 공백기 없이 활동했다는 점에서 스스로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다. 몇 차례 얘기했듯이 나님은 쓰기 위해 읽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많고 다양한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들 할 텐데 글쎄, 나는 인풋을 꼭 책으로만 집어넣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인풋이 압도적으로 많아야 쓸만한 아웃풋이 나오는 건 맞는데, 그 출처가 반드시 책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는 말이다. 글쟁이들은 잘 알 텐데, 글이 안 써지는 원인은 사고의 확장이나 발상의 전환이 부족한 탓이 크다. 그러니 다양한 분야의 데이터를 습득하여 유연성과 개방성을 길러야만 한다. 개인적으로는 프레임을 넓히는 것보다 깨뜨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물론 쉽지는 않다.


한편 꾸준하게 쓰는 데도 좀처럼 실력이 늘지 않는 분들을 자주 본다. 욕심도 있고 진정성도 느껴지는데 발전이 없는 분들을 보노라면 딱한 마음이 든다. 대개 이런 분들은 평범한 걸 선호하여, 남녀노소 누구나 사용하는 흔한 문장과 표현을 못 버린다는 게 특징이다. 단지 쓴다는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둔다면 모를까, 나름 글쓰기에 진심인데도 별다른 인상을 주지 못하니 이 얼마나 속상한가.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근육통이 싫어서 힘들지 않을 만큼만 훈련하는 선수한테 무엇을 기대하겠느냐고. 따라서 모든 글쟁이들은 평범함을 거부하고 좀 더 치열하게 써야 한다. 남들이 자신의 글에 ‘기대감‘을 갖고 클릭하게끔 만들어줘야 한다. 그리하여 기계적으로 좋아요를 받기 보다, 즐겁고 유익하게 느껴져서 좋아요를 받는 글과 문장이 되어야 한다. 나 역시 그렇게 되려고 부단히 노력 중이며, 당신도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


참 오랜만에 일본 고전문학을 읽었다. 나쓰메 소세키, 마쓰모토 세이초, 다자이 오사무 등등 옛 일본의 문학 감성들은 영 안 맞아서 손 뗀지도 한참 됐다. 대체로 건조한 문체인데다 지루한 문장 구사가 많은 탓이었다. 아니면 스토리텔링에 높낮이가 없다거나. 그냥 한 번 더 속아주자는 마음으로 고른 <바다와 독약>은 전혀 예상 못 한 잭팟이었지 뭔가. ‘신‘에 대해 일평생 연구했다던데, 생각보다 종교의 색채가 짙지 않았고, 내적 고통을 넘어선듯한 저자의 아웃풋을 볼 수 있어 좋았다. 이처럼 한 주제에 천착하는 작가들은 완성도와 작품성 그리고 대중성까지, 세 마리 토끼를 잡는 경우가 많은데, 잘 생각해 보니 이들만큼 치열하게 쓰는 타입도 없는 듯하다. 이와 같은 자세가 아니라면 1만 시간의 법칙조차 말짱 도루묵일 것이다. 그러므로 평범함에 익숙해지지 말자.


<바다와 독약>은 생체해부실험을 한 의료진의 민낯을 다루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경, 공습이 빗발치는 한 도시의 대학병원에는 매일같이 응급환자들이 실려온다. 진료 한 번 못 받고 죽어가는 환자들과, 감정이 거세된 직원들 사이에서 혼자 괴로워하는 스구로 의사. 동기의 말대로 의사에게 감정놀음은 한낱 사치일지 모른다. 더구나 지금은 전시상황이지 않은가. 결국 될 대로 돼라였지만 비인간적인 의료진의 만행은 참으로 못 봐줄 지경이었다. 수술 도중에 죽은 환자를, 수술 성공 후에 죽은 것으로 위장한 것도 그렇고, 공습으로 죽을 바에야 실험체로써 사회에 공헌하는 편이 더 낫다는 말들도 가증스러웠다. 그 와중에 윗사람들은 의학부장 선거를 생각하느라 마음이 콩밭에 가 있었다. 환자들의 목숨보다 중요한 밥그릇 싸움이라니. 그러나 이것이 의료계의 현주소였고, 한배를 탄 스구로 또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가슴속의 무수한 적신호들을 외면한 채로.


2부에서는 한 간호사의 수기가 나온다. 중국인 남편에게 버림받고 간호사로 복귀한 그녀는, 종종 병원을 들리는 부장 의사의 백인 아내를 보게 된다. 간호사 출신의 사모님은 이것저것 환자들을 챙겨주곤 했는데, 정작 그 수고와 배려가 모두를 불편케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반대로 이 천사표 사모님의 남편은 환자를 위하기는커녕 죽든지 말든지 선거만 생각하는 냉혈한이다. 이렇게 전혀 다른 성질의 두 사람을 한 세트로 묶어놓다니, 이것 또한 신의 장난질일까. 만약 신이 존재치 않는다면 이런 아이러니를 대체 무슨 수로 설명한단 말인가. 무너져가는 세상에서 늘 변함없이 나를 지켜보는 저 검푸른 바다. 어쩌면 신은 그곳에 서서 우리를 비웃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음은 스구로의 동기인 T가 쓴 수기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들의 점수를 따내는 일에만 움직여왔다. 계산된 행동 하에 결과만 괜찮다면 비양심적, 비도덕적일지라도 상관없었다. 그러다 자신의 ‘척‘을 발견한 전학생의 비소에 그만 무너져버린다. 전학생이 이사가고 본 캐릭터로 돌아온 T는, 아무렇지도 않던 계산된 행동들에 허탈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 내용은 일본인에게 결여된 ‘죄책감‘을 꼬집어주는 매우 중요한 장면이다. 해설에서도 얘기한 바, ‘죄의 문화‘를 지닌 서양인이 죄의식에 따라 행동하는 반면에, ‘수치의 문화‘를 지닌 일본인은 발각되지 않은 죄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슈사쿠는 일본인의 결함이 신의 부재로 생겨난 것처럼 보고 있다. 그러니까, 신의 손길을 뿌리친 민족의 당연한 결과라는 얘기다. 아무튼 종교를 떠나서 욕먹을 각오로 자국민을 디스 한 저자에게 삼삼칠 기립 박수를 보낸다.


이제 다 끝났으니 조금만 더 참아주시라. 대망의 3부에서는 미군 포로들을 데려다가 생체해부실험에 들어간다. 그리고 스구로는 어영부영 참여했다가 뒤에 가서 땅을 치고 후회한다. 이 실험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닌, 생명이 언제쯤 끊어지는가를 알아내는 게 목적이었다. 말 그대로 의학 발전에 공헌하는 일일 진대, 저 바깥양반들은 수술 장면을 보면서 왜 낄낄대고 있는 걸까. 무언가 한참 잘못됨을 느꼈지만 그래봐야 자신도 저 무리 중 하나란 사실에는 변함없었다. 혹여 피해 갈 수 없다면 차라리 동기처럼 기회를 잡고 라인 타는 게 맞을 수도 있다. 허나 이런 생각의 결과가 오늘날의 일본을 만든 거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생각해 보라. 지금도 일본은 과거의 만행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 모든 바탕에는 나만 좋으면 장땡이라는 사고가 깔려 있는데, 이것마저도 일본을 따라가는 한국 사회의 앞날이 걱정되기는 한다. 아무튼 잘 읽었고, 슈사쿠의 작품들은 좀 더 둘러볼 생각이다. 것보다 의사 파업이 한창인 때에 읽어서 그런가, 기분 참 멜랑꼴리 허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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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4-03-03 21: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서평가 10년의 물감님 대단합니다~!! 글을 잘 쓰시는 비법이 있으시군요~!!
전 그냥 책이나 읽는걸로 해야겠습니다...

엔도 슈사쿠는 그저 사랑입니다 ㅋ 이 책에서 나오는 생체실험 내용 때문에 읽기 힘들더라구요... 사람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물감 2024-03-04 10:41   좋아요 1 | URL
저도 초반에는 10줄도 안쓰던 사람이었는데ㅋㅋㅋ제가 이렇게 글쓰기를 좋아하게 될 줄 정말 몰랐어요. 그래봐야 서평에 한해서지만요 ㅋㅋ

한 때 서재에서 슈사쿠 붐이 일었었죠? 왜 열광했는지 알 것도 같습니다. 느낌있는 작가네요. 근데 이 책은 난이도가 낮은 편이라던데요ㅋㅋㅋ 다른 책들도 궁금해집니다.

은오 2024-03-04 20: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물감님이랑 저도 취향 은근 다르군요. ㅋㅋㅋㅋㅋ 물감님이 다자이오사무랑 소세키 감성 안좋아하시는거 처음 알았읍니다. 저는 최근에 다자이오사무 사양 좋게 읽었고 인간실격은 다시 읽어도 좋더라고요. 소세키 마음도 좋았어서 다른 작품들 읽어보려고 드릉드릉 ㅋㅋㅋ
그리고 10년 대단하시네요. 말이 10년이지 진짜 저도 속으로 박수..🫢🥹 쓰기 위해 읽으긴다는 것도 신기하고요. 전 읽는게 너무 재밌어서 읽기만하고싶어요!!ㅠㅋㅋㅋㅋㅋ

물감 2024-03-05 15:10   좋아요 1 | URL
은오 님 뿐만 아니라 누구와도 취향이 겹치지 않을걸요ㅋㅋㅋㅋ 이곳 분들은 다들 교양있고 점잖으셔서 저 혼자 좀 튀어보일 때가 많아요. 그냥 돌연변이인갑다 하세요 ㅋㅋㅋ
읽기만 하는 것도 당연 좋죠. 글쓰기는 안 해도 되지만 독서를 안 하는 건 죄악입니다 ㅋㅋㅋ 그리고 10년 그까이거 별거 없어요. 그냥 자기가 좋아하는 걸 즐기다보니 여기까지 온거죠 뭐. 저보다 오래된 고인물이 이곳에 얼마나 많습니까 하하하.
은오 님의 재능을 알지만, 저는 은오 님한테 글 쓰라고 압박하지 않을 거에요. 자기가 원해서 하지 않으면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지금처럼 열독하고 댓글러로 지내셔도 충분합니다 ㅋㅋㅋㅋㅋ

페크pek0501 2024-03-19 13: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를 읽고 느낀 점 : 좋은 책을 읽으면 서평을 잘 쓴다는 것.
글을 잘 풀어가셨습니다.(감히 내가 평가해도 된다면.)
물감 님이 이렇게 잘 쓰시는 분이었나, 새삼 깨달음.
책도 훌륭하네요. 시점을 달리해서 쓰는 것,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에요.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다는 이점이 있고 흥미롭거든요.
서재 운영 10년 되셨군요. 저는 15년째예요. 제가 선배임. 하하~~

물감 2024-03-19 20:35   좋아요 1 | URL
글을 올렸으면 칭찬이든 비난이든 달게 받아들여야죠. 감히 되고 안되고가 어딨나요ㅋㅋ 말씀대로 좋은 책을 만나야 좋은 글이 나오더라고요. 평소 품고있던 생각과의 교집합이 클수록 풍성한 글이 만들어지는데, 이 재미 또한 글쟁이들만 아는 것이겠죠😀 그나저나 페크님도 오래 계셨네요. 이런 선배님들이 있어주셔서 저도 실력이 늘은 거겠죠? 언제나 건필하시길요🤩
 
파문
필립 지앙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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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지앙과는 이번이 첫 만남인데 영 좋은 인상이 못되었다. 독자들의 찬사와 출판사의 소개 글에 또 속았다. 예전 같았으면 눈 뒤집혀서 팩폭하고 까대기 바빴을 텐데, 이제는 기력도 없고 시간도 아깝고 해서 혹평은 잘 안 하게 된다. 물론 비평도 좋지만 매번 삐딱한 눈으로 작품을 대하기도 썩 불편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하나 <파문>은 좋게좋게 넘어가 줄 수 없는 수준이어서, 오랜만에 전투 모드가 되어 잘근잘근 씹어보겠다.


50대의 문학 교수인 마르크. 원나잇 파트너가 다음날 죽어있자, 자신만 아는 산속 동굴 속에 시신을 유기하는 것으로 서막을 연다.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가 눈에 훤했으나, 내 예상과는 전혀 딴판으로 진행되어 대략 낭패였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일상으로 돌아왔고, 실종된 학생(파트너)에 대한 내용도 쏙 들어가 버린다. 그리고 이야기는 학과장과의 신경전과, 친누나의 들들 볶음, 그리고 파트너의 계모와 눈 맞음, 이 세 가지 내용으로 굴러간다. 마르크는 학과장의 계속된 경고에도 교칙을 어기며 학생 및 학부모와 몸을 섞어댄다. 그는 섹스만큼이나 작법을 중요시하고 있는데, 통제 안되는 수컷 짐승이 그런 말 해봤자 와닿지도 않고 말이다. 여튼 살인 용의자로 몰린다거나, 추문으로 학교서 쫓겨나게 되는 전개를 바랐는데 그냥 섹스 신으로 질질 끌다가 끝나버렸다. 어이 상실.


범죄현장이 된 동굴은, 자신을 구해준 누나와의 추억이 깃든 장소로써, 아직도 시스터 콤플렉스에 매인 마르크를 설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나온다. 정말 그게 다여서 실망스러웠다. 이어서 죽은 학생을 수소문하던 경찰도 결국 죽어, 마르크가 동굴에 또 집어넣는다. 헌데 두 사람이 대화하다가 다음 장에서 갑자기 죽어있는데 이 무슨 황당함인가. 파트너도 그렇고 경찰의 죽음도 그렇고, 저자는 가장 중요한 장면을 죄다 생략하고 있다. 이런 의도적인 장치가 몇 번 더 반복되는데, 그렇게 싹둑 잘라내니까 맥락이 계속 틀어져 버린다. 때문에 번역자도 고생 좀 했나 보더라. 난 이처럼 독자한테 습관적으로 떠넘기는, 무책임하고 불친절한 스타일을 아주 경멸한다. 사실 작가보다도 무조건 오냐오냐해주는 독자들이 더 문제지.


부모의 학대, 포기한 소설가의 꿈, 사랑을 못 느끼는 옴므파탈 등등. 주인공을 끝없이 방황하는 위태로운 캐릭터로 묘사 중인데, 하나같이 진부한 설정뿐이라 영 와닿지가 않는다. 게다가 머릿속은 온통 섹스로 가득 차있어, 방황이고 나발이고 간에 조금도 감정이입이 되질 않는다. 읽는 내내 프랑스판 하루키라는 생각밖에 안 들더군. 아무튼 성격이 되게 어중간한 작품이었다. 차라리 범죄 스릴러 쪽으로 밀고 가던가, 아니면 불안한 자신과의 투쟁으로 가던가, 또는 아슬아슬한 스캔들 끝에 추락하는 스토리여도 좋았을 건데. 쯧쯧. 좀 더 쓰고 싶지만 졸려서 안되겠다. 영양가 없는 작품에 이만큼 썼으면 과분하지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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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0
뮤리얼 스파크 지음, 서정은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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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좋게도(?) 살면서 영향력 좀 있다 싶은 인물들을 가까이서 관찰할 기회가 많았다. 이들은 잘나가는 연예인 같은 파급력을 지녔다기 보다 주변인들의 호감을 사는 매력이 타고났다고 생각된다. 그게 선천적 본능일지, 후천적인 기교일지는 알 수 없으나 대개 열에 아홉은 무장해제되어 그 매력에 흡수돼버린다. 의심병 환자인 나님의 눈으로 쭉 살펴본 바 선한 영향력은 잘 없었고, 환심을 사는 일의 이면에서 불순한 의도만 여러 번 포착되었다. 이들은 상대의 니즈를 기가 막히게 파악하여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는 만능 재주꾼이다. 하여 어느 소속과 집단이든지 이들을 따르는 추종자들이 꼭 있는데, 잘 보면 하나같이 자기 검열이 안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기생충한테 조종당하는 곤충과 다름없는 이 무리들은, 혹여 리더의 불순한 의도를 눈치채더라도 뭘 어쩌지 못한다.


여하간 절대 건강할 수가 없는 이런 주종 관계를 담백하게 풀어쓴 스코틀랜드 작품을 소개한다. 여학교 초등부 선생인 브로디와 간택 받은 6인의 제자들 이야기이다. 학교는 별난 교육방식을 고수하는 브로디를 이단아 취급하는 반면, 학급생들은 그녀의 스타일을 전심으로 지지해 주었다. 브로디 선생은 간단히 정의 내릴 수 없는 비범한 인물이었는데 뭐라 할까, 자만과 교양과 기품의 교집합에 위치해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똑 부러진 데다 눈치도 100단인 브로디의 제자 중 한 명인 샌디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6인의 제자가 어떤 기준으로 발탁된 건지 모르지만 브로디의 특별 교육으로 또래들보다 총명하고 재능 있는 모습을 갖춰나간다. 그 가르침에 뿌리내린 6인은 서서히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는데, 신기하게도 모두 다 브로디의 예견대로 흘러가는 게 아닌가. 자신의 전성기니까 그것이 당연하다는 브로디 선생. 그처럼 전지전능한 브로디는 훗날 잘 키운 제자 중 하나에게 배신을 당하고 학교를 퇴임하게 된다. 설마 그녀가 호랭이 새끼를 키웠던 걸까. 브로디의 전성기를 끝내버린 X는 대체 누구였을까.


6인의 제자는 자아가 선명해진 뒤에도 브로디 안에서 한뜻을 품고 나아간다. 여태 막연히 맹신했던 제자들이 브로디를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된 계기가 있었으니, 바로 그녀의 남자 문제였다. 브로디는 과거의 연인 H와의 일들을, 세계사나 미술사의 한 장면들과 교묘히 섞어가며 들려주곤 했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자신의 영광을 높이고자 ‘내 사람‘을 땔감으로 갖다 쓰다니, 영 아니 될 일이었다. 이건 뭐 지나간 일이니까 그렇다 치고, 현재 브로디는 음악쌤, 미술쌤과의 어중간한 삼각관계 중이다. 말로는 연애할 생각이 없다지만 그들의 뮤즈는 되고 싶었던지, 두 남자의 집을 바삐 드나드는 브로디의 이중생활이 제자들의 가슴에 불을 지핀다. 그래 이왕 들킨 거, 브로디는 제자를 하나둘씩 파견하여 두 남자의 마음을 떠보게 한다. 결국 음악쌤은 탈락하고, 미술쌤은 돌아가며 찾아오는 6인을 모델로 그림을 그려낸다. 각 모델마다 브로디의 얼굴을 하고 있어, 이건 뭐 대놓고 플러팅하는 거나 다름없었지만 정작 그녀는 점찍어둔 제자를 그의 애인으로 꽂아 넣을 심산이었다. 이 역시도 브로디 자신의 전성기를 증명해 줄 또 다른 땔감에 불과했고, 그녀에게 저항이라도 하듯 X가 미술쌤의 애인 역을 차지해버린다. 대체 어쩌다 이 끈끈한 브로디 그룹에 균열이 생겼을까.


제자 중 유일하게 통찰력을 가진 X는 브로디 선생의 정치 성향을 꿰뚫어 보았다. 브로디는 무솔리니와 히틀러를 지지하는 파시스트였고, 그 사상을 본인만의 교육 방식에 녹여서 학급을 지도한 것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물든 아이들은 각자의 미래가 그녀의 뜻대로 된 결과처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게 다 브로디의 전성기가 얼마나 위대한가를 줄기차게 심어둔 탓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내 사람을 다루는 방식‘으로 인해 브로디가 어떤 물밑작업을 해왔는지를 알 수 있었고, 뒤늦게라도 그녀의 만행을 멈출 수가 있었다. 그러나 사건의 진실을 은폐했기 때문에 세월이 흐른 뒤에도 브로디와 제자들은 여전히 잘 만나고 지냈다. 어째서 X는 배신하고도 모르쇠 하며 브로디와 계속 어울렸을까. 그건 아마도 브로디에게 내렸던 뿌리 때문이지 싶다. 가지나 줄기는 잘라낼 수 있어도 뿌리는 뽑지 못하는, 이것이야말로 영향력을 가진 이들의 무서움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화제의 인물을 만난다면 침 흘리고만 있을 게 아니라 그의 물밑작업을 눈여겨봐야 한다. 굴뚝에 연기가 나려면 땔감이 필요할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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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4-02-25 2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6인의 제자도 키우고 삼각관계도 하고 진짜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에 대한 이야기군요~!! 근데 이거 가스라이팅 아닌가요? ㅋㅋ

저도 이 책 읽었었는데 막 좋지는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좀 구성이 특이했었던거 같은데...

물감 2024-02-25 21:52   좋아요 1 | URL
그쵸 사실상 가스라이팅인데, 막 브로디의 일방통행 보다는 스승제자간에 꿩 먹고 알 먹는 느낌이라 가스라이팅 표현을 쓰고 싶진 않았어요. 결과적으로는 선생보다 교주에 더 가까웠으니 그게 그걸지도요ㅋㅋ

저도 계속 별 셋이었는데요, 저자의 빌드업이 독특한 구성으로 한땀한땀 짜여졌음을 느끼고서 무릎을 탁 쳤습니다. 이 작가는 천재구나 싶더라니까요. 언젠가 다시 재독하신다면 브로디의 불순한 의도를 어떻게 연출했는지에 집중해보셔요. 고것 참 맛납니다!

coolcat329 2024-02-26 1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관심있는 책이었는데 물감님 글이 재밌어 꼭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여담이지만 저는 유난히 잘해주는 사람을 경계합니다.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나 이런 사람들의 돌변을 경험하고 놀랐거든요. 이런 친절에는 물감님 말씀대로 대체로 불순한 의도가 있더라구요.

오늘 날씨가 화창하니 좋습니다. 굿데이!

물감 2024-02-26 21:00   좋아요 0 | URL
저도저도요! 그 경험 덕분에 사람 보는 눈이 생겼으니 다행이라 생각해야죠 뭐.

날씨는 좋았는데 업무가 너무 많아서 정신없이 지나갔네요ㅋㅋ 쿨캣님도 좋은 하루 보내셨길 바랍니다😀
 
뜨거운 피 페이지터너스
이렌 네미롭스키 지음, 이상해 옮김 / 빛소굴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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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도 그 소릴 들었다. 넌 대체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확실히 남들 눈에는 내 인생이 핵노잼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전에도 말했듯 나님은 유니콘이니깐. 이제는 해명하기도 귀찮아 그냥 오해하게 놔두지만 나도 뭐 할거 다 하면서 살고는 있다. 물론 집을 잠만 자는 곳으로 대했던 10대나 20대 때에 비하면 텐션이 확 죽은 것도 사실이다. 하기사 누군들 안 그럴까. 혼자서는 주로 독서랑 홈트밖에 안 하지만 이런 일상도 마냥 즐겁기만 한 것은, 지나간 청춘이 온통 마음고생뿐이었기 때문이다. 하여 지금의 고요하고 태평한 나날들이 내게는 더없이 소중하다. 그럼에도 간혹 한 번씩 향수에 젖을 때면 가슴이 시키는 대로 살던 어느 순간으로 날아가곤 하는데, 그때가 그립다기 보다 추억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아이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애늙은이였는데 이제는 그냥 늙은이가 다 됐다.


<뜨거운 피>는 지금의 나님과 비슷한 느낌으로 살아가는 중년이 등장한다. 실비오는 청춘을 홀라당 날려먹고 겨우 정신을 차린 본투비 탕아였다. 인적 없는 숲속에 거주하는 그는 이제야 자리 잡은 생활과 안정에 만족하는 중이다. 그의 친애하는 여사촌의 딸이 어느새 다 커서 시집을 가더니, 자기들은 완벽한 부부의 표본인 부모님처럼 살 거라나 뭐라나. 그런데 얼마 못 가서 딸의 남편이 강물에 빠져 죽는 사건으로 온 동네가 떠들썩해진다. 이후 남편을 죽인 자가 딸의 외도남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또 한 번 난리가 난다. 조카의 외도를 알고 있었던 실비오는, 비탄에 빠져있는 조카를 나무라며 이제라도 현명하게 행동하길 경고해 준다. 그건 마치 젊었을 적에 피가 끓는 대로 살았다가 후회하게 된 자신의 과거였다. 실비오 역시 열정에만 의존하던 시기가 있었고, 그때의 자신의 선택과 경험들이 헛되다곤 생각지 않으나, 누가 봐도 정답은 아닌 그 길을 조카가 걷고 있었으니 심란할 만도 했을 게다. 그러나 실비오의 마음이 혼잡한 이유는 따로 있었는데, 잠깐이지만 뜨겁게 타올랐던 여사촌과의 지나간 불장난이 떠올라서였다.


사촌에 대한 여러 번의 언급이, 주인공과 보통 관계는 아닐 거란 느낌이기는 했다. 역시나 둘은 한때 뜨거웠던 사이였으나 금방 관계를 정리하고 각자에게로 돌아갔다. 이들의 연애는 절대 잊지 못할 어느 흔적을 남겼는데, 모순되게도 잊고 있었던 그 흔적이 자신들의 발목을 붙잡는 비상사태가 발생한다. 먼저 사촌은 실비오와의 만남을 일종의 죄지음으로 여겼고, 이별한 뒤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여 쭉 행복하게 살아왔다. 자기 삶에 200% 충실했던 탓일까. 실비오가 연인이었던 것도 잊고 친근하게 대했던 것과, 둘만의 그 흔적까지도 처음 알았다는 듯한 반응 등등, 온통 망각하며 살아온 그녀의 생애는 온통 거짓 투성이였다. 피가 뜨겁던 시절들을 죄다 부정하고 헛것으로 여기는 사촌과, 그런 엄마를 동경하는 아무것도 모르는 딸을 보며 쓴맛을 느끼는 주인공.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없듯 누구에게나 과거와 비밀은 존재하고, 더는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이다. 헌데 그릇된 선택이었다 해서 부러 망각하고 자신을 부정해버린다면, 짜여진 각본 속에서 주어진 연기만 해야 하는 배역의 모습과 다를 게 뭐가 있을까. 그런 그녀를 사랑한 자신은 또 뭐가 되냔 말이다.


뒷부분은 사촌에 대한 실비오의 몰아치는 감정들로 도배된다. 내내 저텐션이었던 그가 이렇게 열을 올리는 건, 소중했던 추억이 짓밟히고 난도질당해서가 아닐까 한다. 실비오는 확신했었다. 그녀가 눈부시게 찬란했던, 살아있던 순간은 우리의 그때뿐이었다는 걸. 그런데 그녀는 자신을 속이고 거짓된 연기자의 생애로 달아나버렸다. 그렇게 식어버린 순수의 열기는, 이제 냉소를 머금을 때에만 타오르게 되었으니 이런 것도 블랙코미디라 해야 할까. 나름 인생에 굴곡이 많았던 1인으로써,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여러 번 실감하고 있다. 깊게 패인 마음의 상처들이 낫는 과정에는, 내 감정에 얼마만큼 진실되고 솔직한지에 따라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뻔한 훈수처럼 들리겠지만 자기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회피하고 망각하며 지내는 경우가 허다하므로 꺼진 불도 다시 보는 습관을 가져보도록 하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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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4-02-22 12: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외국은 사촌끼리 결혼을 할 수 있는데 왜 이별하게 되었는지 궁금하군요.
뜨거웠던 만큼 그 사랑을 잘 지켜야 했던 건 아닌가 생각되어요.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사랑이 뜨거웠다고 해서 반드시 결혼 생활을 잘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점이에요. 결혼은 어쩌면 사랑이란 감정보다 인간성과 셩격이 더 중요한 변수가 될지 몰라요.(사람에 따라서는요)
무난한 성격이 결혼 생활에 유리한 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것보다 중요한 게 있으니 서로 마음이 잘 통하는 것, 이에요. 또 서로에 대한 존중.
물론 저도 다 아는 건 아니고 여태까지 살아온 시간으로 안 것이니 앞으로 더 살아 보면 더 알게 될 것이 있을 거예요. 잘 읽고 갑니다.^^

물감 2024-02-22 14:40   좋아요 0 | URL
저도 사랑의 크기와 죽이 잘맞는 거는 비례하지 않는다고 봐요. 갈수록 높아지는 이혼률만 봐도 짐작이 가고요. 일방통행의 감정과 존중이 큰 걸림돌이지 않나 싶어요. 여튼 복잡미묘한 사랑의 허리케인은 어느 시대든지 똑같아서 재밌습니다. ㅎㅎ

coolcat329 2024-02-22 16: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 재미나겠는데요?
저는 작가의 단편집 <무도회>를 읽어봤는데 참 깔끔하면서도 여운이 오래 남는 작품들이었어요.
뜨거운 사랑의 감정보다는 가치관이나 취향이 비슷한 사람과 결혼하는 게 좋은 거 같아요. 근데 피가 뜨거울 때는 그 어떤 상대든 다 자기와 잘 맞는다고 생각하죠. ㅠ
후회할 때는 너무 늦었죠. ㅎㅎ
참 씁쓸합니다. ㅎㅎ

물감 2024-02-22 16:42   좋아요 0 | URL
요 시리즈(페이지터너스)가 검증된 작품이 많아보입니다. 암거나 골라 읽으셔도 될듯요ㅎㅎ
가치관이나 성향이 맞는 사람이 어쩜 이리도 보기 힘든지요. 그건 오래보아야만 알 수가 있는데, 새로운 만남과 관계는 너무 한시적이에요ㅠㅠ 반대로 괜히 뛰어들었다가 후회하기도 무섭고 참ㅎㅎㅎ

stella.K 2024-02-25 2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30대 아니신가요?
진짜 나이 들으면 어쩌시려고.ㅎㅎ
근데 전 정말 나이드니까 막 헷갈려요.
생각은 아직 30대 같은데 몸은 그렇지 않으니 뭔가 바뀐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왜 몸이 바뀌어서 내 몸 찾아 3만리 하는 드라마 이해가 간다 싶기도 합니다.
아실랑가? ㅋㅋㅋ

물감 2024-02-25 22:30   좋아요 1 | URL
저물어가는 삼십 대입니다만, 사오십 대가 되어도 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을거 같아요. 지금 제 모습이 십대, 이십대하고도 비슷했습니다. 이정도면 진짜 애늙은이 소리 들을만 하지 않나요ㅋㅋㅋㅋ
저도 몸이 계속 나빠져서 올해부터는 독서보다 운동에 시간을 더 쏟고 있어요. 살 빠지고 근육 생기니 삶의 질이 달라지네요. 스텔라님도 운동 많이 하셔요! 그리고 말씀하신 드라마는 모르겠습니다ㅋㅋㅋㅋ

stella.K 2024-02-26 10:07   좋아요 1 | URL
역변 할 수도 있습니다. ㅋㅋ

물감 2024-02-26 16:23   좋아요 1 | URL
우째 대화의 핀트가 안맞는거 같은데요 ㅋㅋㅋ
저는 정신적인 걸 얘기하고,
스텔라님은 육체적인 걸 말씀하시고 ㅋㅋㅋ
육체야 뭐... 알아서 노화되지 않을까요 ㅠㅠ

stella.K 2024-02-26 18: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그런가요? 아니 역변이라는 게 꼭 잘 생겼다 못 생겨지는 게 아니라 그 반대일 수도 있거든요.
아, 모르겠네요. 암튼 뭐 전 나쁜 뜻으로 얘기한 거 아니니까 오해 없으시기 바라요. 😂

물감 2024-02-26 21:02   좋아요 1 | URL
ㅎㅎㅎ오해 안합니다. 스텔라 님의 지속적인 관심 감사감사 드립니다😃
 
인생의 베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7
서머셋 모옴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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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꾸준히 하다 보면 필자가 문과인지 이과인지가 얼추 구분이 가능해진다. 이것은 다른 리뷰에도 적었듯이 글에도 웜톤과 쿨톤이 있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철저하게 문과 쪽 갬성인 나님은 이과형 사람의 글을 버거워하는 면이 있다. 이들에게는 소위 ‘낭만‘이 결여돼있는데, 쉽게 말하면 사람 냄새가 잘 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과형들은 사실과 지식을 바탕으로 글을 쓰기 때문이며, 그렇기에 소설에서도 논문이나 기사 같은 퍽퍽함이 묻어 나와 독자들의(정확히는 나 같은 문과 타입의) 말문을 막아버릴 때도 많다. 뭐랄까, ‘그들만의 세계‘, ‘그들이 사는 세상‘이라는 말이 나오는 건 전부 이과형 작가들이었다. 그렇담 서머싯 몸은 어떨까? 내게는 절대 문과 쪽 사람으로는 안 보인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의 문장마다 냉기가 흐르고 있는데 풍자소설이라서 그런가 다들 눈치채지를 못하는 듯하다. 여튼 장르를 잘 고른 덕에 어렵지 않게 대중을 휘어잡았으니, 보면 볼수록 참 영리한 작가구나 싶다. 이에 모든 글쟁이들은 이같은 생태계 교란종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이번 작품의 테마는 선입견의 새로고침과, 무가치의 재발견 정도가 되시겠다. 나이에 떠밀려 억지로 결혼한 키티는, 한 유부남과의 아슬아슬한 외도를 즐기는 중이다. 원체 말수가 적고 일 밖에 모르는 남편과 달리, 매력 뿜뿜 외도남은 모두가 인정하는 엄친아였다. 결국 외도를 눈치챈 남편은 그녀를 데리고 콜레라가 들끓는 지역에 자원봉사를 가게 된다. 자신을 붙잡지 않은 외도남에게 대실망을 하는 키티. 그렇다고 딱히 남편과 갈라선 자신을 받아줄 곳도 없어 말 그대로 진퇴양난이다. 뭐 여기까지는 심성이 곱지 못한 자의 받을 마땅한 형벌인가 보다 했는데, 슬슬 자기 객관화를 하더니 본인의 무가치함을 벗어던지는 게 아닌가. 키티는 지역 수녀원에서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며, 사랑을 받기만 하다가 사랑을 주는 쪽으로 변모하게 된다. 그리고 여전히 냉랭한 남편에게도 전에 없던 호감이 생겨났다. 그런데 사랑할 마음은 안 든단다. 헐?


난 지금껏 서머싯 몸을, 인물 설정은 훌륭하지만 스토리텔링은 아쉬운 작가로 보았었다. 그런데 <인생의 베일>은 그 반대의 인상을 남겼다. 인물보다 서사 중심의 작품이었고, 미친듯한 흡인력에다 압도적인 가독성까지 보여준다. 다만 현대에는 이와 비슷한 플롯이 많기 때문에, 예측 가능한 전개의 연속이어서 다음 장면이 막 궁금해지진 않는다는 게 단점이다. 또한 키티에 비해 입체감이 약한 캐릭터들도 아쉬운 건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몰아치는 내러티브가 단점을 모두 커버하여, 이 작가는 인물보다 서사 중심의 글이 더 낫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무엇보다도 <인생의 베일>에는 내가 줄곧 지적했던 무책임한 화자가 등장하지 않는다. 주인공이 직접 화제를 만들고 질문하기 때문에 독자가 접근하기도 쉽고 사유를 내 것으로 만들기에도 좋다. 서머싯 몸을 썩 좋게 보지 않았었는데 웬걸, 진짜 다시 보게 되네.


집 나갔던 양심을 되찾은 키티는 조심스레 남편과의 화해를 시도한다. 물론 씨알도 안 먹힌다. 그녀가 거듭난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의미는 아니었으니까. 워낙 말을 아끼는 타입인지라 남편의 진심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단지 키티보다 그녀를 사랑했던 자신을 더 경멸한다는 말만 남겼을 뿐이다. 자존심에 금이 가고도 키티를 끝까지 책임지는 그에게서, 가족들에게 시달리며 살아온 부친의 모습이 겹쳐졌다. 돈 벌어오는 기계 취급했던 아내와 딸들을 묵묵히 부양했던 아버지. 남편이자 아비로써 당연한 삶이라고만 생각했던 키티는, 눈앞의 남편을 보면서 그 당연한 의무가 얼마나 서러운 것인지를 깨닫는다. 사람들은 입이 마르도록 남편을 칭찬했고, 외도남의 추문을 떠들어댔다. 똥과 된장도 구분할 줄 몰랐던 키티의 오만과 편견. 지난날의 모습들을 회개해 보지만 이미 버스는 떠나가 버렸다. 남편도 콜레라에 감염되고 말았다.


키티의 개과천선 과정이 너무 스무스한 느낌도 든다. 유리멘탈에게 여러 가지 충격요법을 써서 불가능한 얘기도 아니겠다만. 심리학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을 잘 알기를 별로 원하지 않는다고 한다. 파고들수록 인간관계가 피곤해지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인풋이 너무 줄어들면 시야가 좁아지고 편협한 사고에 갇혀버린다.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기초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확증편향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 것이다. 그러니 데카르트가 했던 말처럼 생각하는 존재로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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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4-02-22 1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이 통쾌한 리뷰는 뭔가요? 멋지군요. 이제 리뷰를 쓰실 때 뛰어가는 게 아니라 날으시는 단계에 가신 듯합니다. 축하드려요. 역쉬~ 많이 쓰면 쓸수록 글이 나아지는 건 확실한 모양입니다.
제가 서머싯 몸의 소설을 좋아하는 건 줄거리도 재미있게 잘 전개하지만 그것보다 생각할 거리를 주는 점입니다. 몸의 소설을 읽고 나면 단상을 쓸 글감을 얻곤 했어요. 제가 가장 많이 단상을 쓰게 해 준 작가가 아마 서머싯 몸일 거예요. 사색적인 문장이 많아 밑줄을 많이 긋게 되는, 저에겐 최고의 작가예요. 완독도 함께 축하드려요!!!

물감 2024-02-22 13:14   좋아요 0 | URL
생각거리가 많은 작품을 읽으면 날개 달린 듯한 글이 써지긴 합니다ㅋㅋㅋ 절대 형식적인 글은 쓰지 말자는 생각으로 쓰고 있습니다^^ 이제야 페크 님이 서머싯 몸을 좋아하는 이유를 대강 알겠어요. 그리고 저자의 사색들이 ‘당신은 어때?‘하고 묻는 느낌이 아니어서 전 그게 신선하다고 느껴집니다. 이제 <인간의 굴레에서>만 읽으면 장편은 끝입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