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완 송 1 - 운명의 바퀴가 돌다
로버트 매캐먼 지음, 서계인 옮김 / 검은숲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엊그제는 아프간에서 지진이 발생했다. 올해는 정말 TV만 켰다 하면 재난 피해 소식이 들려온다. 지구 곳곳에서 일어난 자연재해로 전 세계가 매일같이 고통에 신음하고 있다. 마침 이같은 재앙들을 다룬 다큐 한 편을 보았는데 그중에서 가장 끔찍했던 건 재앙이 지나간 뒤 생존자 간에 일어난 폭동이었다. 약탈과 폭력, 살육이 끊이질 않는 그것은 정녕 절망이 세상을 지배하는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혹여 이런 일이 한국에서 발생한다면 미국보다 더한 야만국가가 될 것이다. 안 그래도 한국인들은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차 있으니까.


1987년에 출간된 <스완 송>은 미국과 러시아의 핵 전쟁 직후를 그린 세기말 감성의 재난물이다. 이 방대한 분량의 작품은 핵폭발 이후 생존한 자들이 겪게 될 모든 상황들을 차례대로 나열한다. 방사능에 노출된 피부의 변형부터 각종 기형 짐승들의 공습과 기후변화로 생긴 핵 겨울 등, 온갖 악조건 가운데 살아남기 위한 인간들의 처절한 몸부림을 볼 수 있다. 물론 땅덩이가 넓은 미국이라서 가능한 내용이긴 했어도 작품이 주는 위기와 공포는 충분히 수긍할만했다.


스티븐 킹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매캐먼은 <스완 송>으로 브램 스토커상을 수상하며 명성을 얻었단다. 매캐먼의 스타일은 장르문학에다 휴머니즘을 녹여내는 게 특징인데, <스완 송>에서는 그 기교의 정점을 찍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플하게는 인간의 선악에 대한 내용이고, 나아가서는 인간의 존재 가치를 돌아보게 한다. 종말의 바람이 불고 난 후 살아남은 세 일행의 시점이 교차하는데, 먼저는 핵폭발 당시 지하로 대피한 소녀 ‘스완‘과 프로 레슬러 ‘조시‘의 장면이다. 바깥세상은 이미 초토화가 되었지만 조시는 목숨을 걸고 곁에 있는 소녀를 지킬 생각이다. 스완이 지닌 기이한 생명의 기운을 못 본 체할 수가 없는 그였다.


다음은 도심 터널에서 겨우 죽음을 면한 부랑자 ‘시스터‘의 장면이다. 부서진 뉴욕 거리를 떠돌던 그녀는 인간의 형상을 한 ‘악마‘를 만나 공격을 받고서 도망친다. 그러다 어느 잔해더미에서 보석들이 녹아 붙은 유리 고리를 줍게 되는데, 이걸 만지는 자는 미래의 한 부분을 들여다보게 된다. 시스터는 유리 고리가 보여주는 환상을 따라 정처 없이 대륙을 횡단하게 되고, 악마는 유리 고리를 파괴하기 위해 시스터를 추격한다.


마지막으로 산속 벙커에서 다 죽고 살아난 두 사람, 소년 ‘롤런드‘와 공군 대령 ‘매클린‘의 장면. 군인을 동경해오던 소년은 손을 다친 대령의 오른팔이 된다. 이후 벙커 밖으로 나와 생존게임에 참가하면서 병사 놀이에 푹 빠진 소년의 잔학성이 눈을 뜨기 시작한다. 급결성된 이 인조는 무력으로 생존자들을 굴복시키며 세력을 키워간다. 이렇듯 멸망한 세상 중에도 악의 꽃은 저절로 피어나고 혼돈의 열매를 맺고 있었다.


판타지 요소가 들어있지만 작품의 정체성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런 식으로 풀어가서 기승전결이 딱 맞아떨어지니 다행이랄까. 모든 생존자들은 위기를 맞을 때마다 각자의 방식과 신념대로 해결하고 살아남는다. 혹 그 방식이 잔인하고 흉포하다 해도 결코 비난할 수가 없는 세상이었다. 서로가 경계하는 가운데 친절과 봉사로 마음을 여는 쪽과 힘으로 제압하는 쪽으로 나뉘었지만 서바이벌에 정답이란 없었다. 선을 지켜서 안전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악하게 산다 해서 천벌을 받는 것도 아니었으니.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다 무슨 소용이랴. 질서가 무너진 세상에서 의미를 찾는 것만큼 한심한 일도 없을 것이다.


방사능에 노출된 인간들의 피부는 말벌집 모양같이 변해버렸다. 그 흉측한 얼굴은 타인들 특히 정상인과의 소통을 가로막았고, 누가 죽기라도 하면 피부병 탓이라면서 더욱 서로를 멀리하였다. 그렇게 모두가 원치 않는 고립 속에 살아간다. 협조해 주지 않는 세상에 선을 행하고 마음을 전하기란 정말 쉽지가 않다. 나라면 이런 상황에서 타인에게 식량이나 물품을 나눠줄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은 없다. 평상시의 내 모습은 선이지만 종말이 닥치고도 선을 유지할지는... 아니다. 혼자 살아가느니 그냥 나도 죽고 말란다.


한편 대령과 소년은 피부병에 걸린 자들을 학살하고 정상인들은 군 입대를 시켰다. 자신들의 피부병은 보호구로 가린 채. 자유를 뺏는 대신 안전을 책임지는 대령의 방식이 무질서한 세상에서는 오히려 좋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삶의 의미나 가치 따위를 찾는 나 같은 사람들은 얼마 못 가서 튕겨져 나올 것이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끼리 세운 사상은 과연 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모양새는 달라도 서로가 추구하는 건 같은데 말이다. 어째 리뷰가 딥해지는 듯한데 종말 소설이라서 어쩔 수가 없음.


핵전쟁 후 7년이 지났다. 스완과 조시는 떠돌던 끝에 작은 마을에 정착하게 되고, 시스터는 유리 고리의 환상을 따라 마침내 스완하고 만난다. 어느 날 스완의 말벌집 같은 가면이 쩍 갈라지더니 아름다운 얼굴을 드러냈고, 이어서 조시와 시스터도 같은 현상과 같은 결과를 보게 된다. 마찬가지로 대령과 롤런드의 가면도 벗겨졌으나 두 사람은 괴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각자의 내면에 있던 것들이 겉으로 형상화가 된 셈인데, 이제껏 모호했던 선악의 기준을 작가는 변화된 얼굴로 구분 지었다. 이제 스완은 작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재능을 힘껏 발휘하여 무너진 세상을 재건하는 일에 앞장서게 된다. 스완의 능력으로 변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매캐먼이 바라는 세상이 무엇인지를 알 것도 같았다.


한참 분위기 좋은 와중에 시스터를 쫓던 악마가 마을을 방문한다. 스완의 기운에 못이긴 악마는 대령의 군대를 동원하여 스완과 마을을 공격해온다. 이날 이때까지 고생한 게 다 전쟁 때문인데 어째서 또 전쟁을 선포하는가. 그것도 원인을 제공한 러시아가 아닌 자국민끼리 싸워대는가.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말이 생각난다. 이제 반복되는 살육 아래 본래의 목적과 사상은 퇴색되었다. 이러한 인간의 모순을 볼 때마다 차라리 세상은 전멸하는 편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이야기는 세계 멸망으로 흘러간다. 결국 악마의 승리인가 싶더니 자칭 ‘신‘이라는 남자가 등장하여 종말 버튼을 누른다. 세상의 재건을 위해 현재의 선악은 사라져야 한다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자기모순을 정당화하려 들 것이다. 여기에는 끝까지 인도주의를 고수하는 스완조차도 예외가 없다. 이 작품은 접근 방식에 따라 극과 극의 평으로 갈릴듯한데, 주제를 떠나서 경종을 울리는 것만으로도 목적은 달성했다고 본다. 죽기 직전의 백조가 부른다는 진혼곡. 죽음과 맞바꾼 그 찰나의 아름다움이 오염된 세상을 정화해 준다. 어쩌면 누군가의 스완송 덕분에 오늘의 내가 현실을 버틸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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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10-10 19: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요즘 왤케 뜸하십니까?

물감 2023-10-11 10:36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전 사실 요즘 서재 분위기가 많이 어색해요. 제가 아싸에다 비주류여서 그런지 소통할 사람이 점점 줄어드네요. 어쩐지 알라딘을 떠난 분들의 마음을 알 것도 같고요.

은오 2023-10-11 17:52   좋아요 1 | URL
그래도 떠나진 마세요.. 물감님 없는 알라딘은 물감 없는 팔레트.. 그림 없는 스케치북..
 
동물농장 - 최신 버전으로 새롭게 편집한 명작의 백미, 책 읽어드립니다
조지 오웰 지음, 신동운 옮김 / 스타북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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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짧은 책들만 읽고 있는데 그만큼 서평 쓸 차례가 자주 온다는 게 문제네. 다음부터는 벽돌책으로 가야겠다. 눈팅만 했었던 <동물농장>을 두 시간 만에 완독했다.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구상할 생각을 다 했지. 풍자소설이라 그런지 <1984>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워낙 유명하니까 줄거리는 생략하겠다.


스탈린의 정치를 비판하고자 썼다곤 하나 그런 배경지식 없이 읽어도 쉽게 와닿는 것은, 인간의 정치와 사회가 오늘날까지도 전혀 달라짐이 없기 때문이다. 농장주와 가축이라는 설정부터가 현실에서의 서열과 계급사회를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가축의 종류별로 성격을 다르게 잡은 것 또한 각양각색의 인간들을 기가 막히게 표현했다. 설정에서 반 이상을 먹고 들어가다니, 보면 볼수록 오웰 쓰앵님은 뇌섹남의 아이콘이다.


농장주를 쫓아낸 가축들은 동물사회를 만들어 이제까지의 억압을 벗고 자유와 평등을 외친다. 그렇지만 하나의 사회를 갖추려면 질서와 규율이 있어야 했다. 하는 수없이 인간의 방식을 따라 지도자를 세우고 갖가지 법과 계명을 만든 동물들. 처음에나 좋았지, 갈수록 돼지들의 독재정치가 되면서 다들 피똥 싸기 시작한다. 그렇게 혁명의 결과는 또 다른 지옥을 선사했지만 우매한 동물들은 돼지들의 입발림을 찬양하며 맹신도가 된다.


공공의 적은 어느새 인간에서 배신한 동물에게로 옮겨져간다. 몇몇 동물들이 옛 습성을 잊지 못하고 몰래 법을 어기다 적발되었다. 이 배신자들은 모두 모인 자리에서 맹견들에게 물려 죽게 된다. 마침내 폭력이 개입되었음에도 세뇌당한 동물들은 슬퍼하긴커녕 더욱 충성할 뿐이었다. 유토피아를 이룩해가는 과정이라 믿으면서. 그러나 알게 모르게 이들의 절대적인 평등은 무너지고 있었다. 동등한 노동을 거부하는 이들과, 식량 배급에 편차가 생기는 등 예상 못 한 변수가 계속 나타났다. 이에 불만을 품거나 불안해하는 집단이 형성된다.


그래서 돼지들은 방황하는 어린 양들을 위한답시고 금령을 깨고서 인간들과 접촉하여 거래를 시도한다. 그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공급받음과 동시에 자신들의 적이 누구인가를 다시금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돼지들의 이 같은 행동은 농장이 아닌 본인의 지위를 위한 일이었고, 모두가 돼지들을 살찌우게 하는 일에 발 벗고 나선 셈이었다.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현대사회를 이다지도 적나라하게 풍자하다니. 이것은 기득권층의 교활함보다 민중의 어리석음을 경계로 기록한 작품이 아니던가.


한때 진보를 외쳤던 동물들은 자신이 보수가 되었다는 생각을 절대 못한다. 도리어 진보의 싹을 자르면서 스스로를 진보라 칭하고 있었다. 독재 정권도 위험하지만 분별력이 없는 직진이란 더더욱 위험하다. 실예로,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논리적이라 생각하나, 멀리서 보면 그만치 편협한 경우도 잘 없다. 극단적인 타입들은 둘 중 하나다. 돼지들처럼 군림하거나, 개나 양들처럼 광신도가 되거나. 정녕 이것이 인간의 본능이고 생리일까. 진정 우리는 폭력과 방어, 기만과 선동에서 벗어날 수 없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뾰족한 수도 없으니 조만간에 세상은 아주 그냥 폭삭 무너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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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베스 열린책들 세계문학 155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권오숙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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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책쟁이들이 얘기하길, 독서하다 보면 다음에 어떤 책을 읽을지가 알아서 정해진다고 한다. 그러니까 책이 책을 부른다는 말인가 본데 어째서 나는 그런 경험을 못해봤을까나. 내가 소설만 읽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나름 오랫동안 독서를 해왔지만 나는 딱히 선정 도서의 기준이란 게 없는듯하다. 좋아하는 작가라 해도 연속으로 읽지는 못한다. 이렇듯 계획적인 독서가 못되다 보니 책을 사서 모셔만 두는 꼴인데, 나 같은 사람은 그냥 빌려 읽는 쪽이 더 나은듯하다. 쿠폰이나 적립금으로만 책을 사고 있어서, 내 돈 주고 책을 산지는 꽤 오래됐다.


요즘 바쁘기도 하고, 기존의 책들을 처분도 할 겸 해서 짧은 책들 위주로 읽고 있다. 마침 셰익스피어가 눈에 딱 들어와서 후딱 읽어주었다. 희곡에 별 관심은 없지만 그래도 ‘4대 비극‘은 읽어볼 생각인데, <맥베스>는 그 타이틀이 민망하다 할 정도로 임팩트가 없었다. 분량도 적고 전개 속도가 빨라서 무난하게 읽혔다만 인상적인 장면이 아예 없던데. 흠.


마녀에게 장차 왕이 될 거란 말을 들은 맥베스 장군. 그와 부인은 스코틀랜드 왕을 죽인 뒤 왕위에 오른다. 이후 도망쳤던 왕자가 데려온 세력들과 싸우다 목숨을 잃는다는 내용이다. 근데 <햄릿>을 재탕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나. 주인공 시점이 왕자에서 왕으로 옮겨갔을 뿐, 거기서 거기 같은 느낌이라 크게 볼 것도 없었다. 예상한 대로 맥베스는 왕이 되고부터 갖가지 고뇌에 빠진다. 원래가 야망 있는 성격이 못되었던 그는 잠깐의 욕심이 부른 결과에 심히 자책한다. 그러다가 화끈한 군주로 각성하는데, 이 과정들이 너무도 빠르다는 게 문제였다. 인물에 몰입할 시간을 주지 않다 보니 불안에 떨다 그냥 미치광이가 되었을 뿐, 여기에는 어떤 페이소스도 느껴지지 않는다. 글쎄, 내가 너무 냉혈한인가?


주인공이 맞나 싶을 만큼 존재감이 약한 맥베스. 불안 증세가 커져갈수록 인간적인 모습은 줄어들고, 끝내는 죽었어도 아무런 감흥이 생기지가 않았다. 오히려 지주였던 부인이 갑자기 하직했던 게 더 기억에 남을 정도. 뭔가 이 작품은 주인공을 죽어마땅한 인물로 설정해둔 느낌이다. 또한 배역들마다 애정이 없어 보였고, 그 때문인지 각자의 서사에 영 흥미가 안 갔다. ‘아름다운 것은 추한 것이고, 추한 것은 아름다운 것‘이라는 모순된 인간의 본질도 썩 와닿지 않았고. 더 할 말은 많으나 시간상 이쯤에서 끝내야겠다. 갈 길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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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9-13 10: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간상 ㅋㅋㅋㅋㅋㅋㅋ 어디 가세요?! ㅋㅋㅋㅋㅋㅋㅋ

물감 2023-09-13 10:36   좋아요 0 | URL
이 글 새벽에 쓴거에요 ㅋㅋㅋㅋ 어서 출근 준비해야하니까요
그리고 읽고 해치울 책들도 밀려있다는ㅋㅋㅋㅋㅋㅋ 바쁘다 바빠

stella.K 2023-09-13 10: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반갑네요. 저도 셰익스피어 는 뭐가 좋은지 모르겠던데 이리 솔직하게 쓰시나디. 솔직히 6백년전 사람인가 그렇잖아요. 뭐 문체라도 맞으면 모르겠는데 그것도 아니고. 무조건 극찬을해대면 그냥 좀 뻘쭘하더라구요.

물감 2023-09-13 11:17   좋아요 2 | URL
셰익스피어를 거의 안 읽어봐서 어떻다 논하긴 뭐하지만요, 이 작품은 영 별로였어요. 반대로 <햄릿>은 정말 좋았습니다. 제 성격상 극찬하는 작품은 일단 매의 눈으로 보는 편이에요. 그러면 대부분 레이더망에 포착되곤 합니다 ㅋㅋㅋㅋ
 
동급생
프레드 울만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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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을 따르지 않다 보니 나의 독서는 언제나 뒷북이 되곤 한다. 이게 독서보다도 서평에서, 특히 유명작을 리뷰할 때가 제일 문제이다. 기존 평이 많을수록 내가 무슨 말을 하든지 중복일 거란 말씀. 근데 또 내 성격상 남들과 겹치는 글쓰기를 싫어하거든. 하여 어쩔 수 없이 비평모드일 때가 더 많은 것이다. 내가 이유 없이 까칠한 게 아님을 이제라도 밝혀둔다. 매우 늦은 감이 있지만.


<동급생>도 꽤나 명성 있는 작품이다. 따라서 이번에도 비평 위주로 가려 했는데 이거 잘 될지 모르겠다. 나치즘으로 인해 멀어져 버린 두 친구의 이야기. 유대인과 독일인의 민족을 뛰어넘는 우정은, 커져가는 히틀러의 세력 앞에 조각나고 말았다. 유대인 친구는 왜 자꾸 거리를 두냐며 서운해하고, 독일인 친구는 감정만 앞세우지 말고 자기를 이해해달라 한다. 그렇게 숨겨두었던 본심은 유일한 친구관계를 원망으로 바꿔놓았다.


유대인 친구는 사랑을 공급할 대상이 필요했고, 독일인 친구는 가문까지 이해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이렇게 출발점부터 다른 관계는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착 달라붙어 지내는 동안에도 선을 긋던 독일인 친구는, 기꺼이 상처받을 준비가 됐다는 절친에게 네가 자초한 일이라고 경고한다. 아니, 귀족이라면서 그게 할 말인가? 안 그래도 계급 차이를 절감하는 친구한테? 유대인들을 경멸하는 모친을 방패 삼아 제 감정을 속였던 독일인 친구는 우정의 어디까지가 진심이었을까.


부모의 권유를 따라 유대인 친구는 미국으로 넘어간다. 이때 독일인 친구가 쓴 편지가 아주 가관이다. 히틀러가 조국을 구할 테니 훗날에 다시 돌아와도 좋단다. 이런 놈하고 우정을 맹세했었다니. 얼마나 실망스러웠으면 미국에서 30년이나 짱박혀 살았겠나. 아무튼 괜히 읽었다 할 정도로 평범했는데 마지막 챕터가 작품성을 확 끌어올려놨다. 솔직히 뻔한 반전이라 놀랍지는 않았고, 잘 살고 있는 주인공에게 추모비 기부 요청서를 날려서 겨우 묵혀둔 감정들을 끄집어내게 한 연출이 압권이었다. 대부분 친구와의 끊어지지 않은 우정을 주목하는 반면, 나는 부모의 자살 소식과 본인의 인종차별, 친구에 대한 실망을 떠올렸을 주인공의 아픔에 주목했다.


그리고 나는 좀 그렇다. 마지막 문장 한 줄로 수십 년간의 묵은 감정이 눈 녹듯 사라진다? 개연성이라곤 1도 없는 말 같은데, 여기에 많은 독자들이 펑펑 울었다니까 좀 어이없다. 주인공처럼 여리고 섬세한 성격들은 평생을 가도 상처가 치유되지 않는단 말이다. 그런데 무슨 뷰티풀 엔딩 어쩌구 저쩌구. 이런 게 바로 유행 타는 독서의 단점이다. 아무튼 이만하면 중복은 아니겠지? 힘들다, 증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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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3-09-11 07: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마지막에 울진 않았지만 그래도 울컥! 했답니다. 이 책은 중고등학생이 읽으면 좋을 거 같아요.

물감 2023-09-11 08:47   좋아요 1 | URL
물론 그렇게 유도한 작품이지만요, 내가 주인공이라면 어땠을까... 기쁘거나 감동하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나를 괴롭히던 일진이 훗날 노벨평화상을 받았다해서 내 기분이 달라지지는 않으니까요. 아 모르겠다. 너무 과몰입한 것일까요 ㅎㅎㅎ

책읽는나무 2023-09-11 1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까칠했던 이유가 이제 밝혀지는군요?
근데 정말 그런 걸까?
문득 그렇게 또 생각을...
근데 전 이 책 아직 안 읽었답니다.
메모했어요.^^

물감 2023-09-11 10:37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이제와 말하긴 뭐하지만 꼭 좀 믿어주세요...
좋은 작품은 맞는데요, 솔직히 낡고 낡은 이야기였습니다.
워낙 비슷한 이야기들이 많아서 그런건지도요.
위에 쿨캣님 말씀대로 청소년한테는 좋을듯 하네요 ^^

자목련 2023-09-11 16: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써야지 하면서 미룬 책인데, 다시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ㅎ

물감 2023-09-11 17:04   좋아요 0 | URL
음.. 리뷰를 위해 재독하실 것까지야. 막상 읽으시면 별 감흥 없으실 걸요 ㅎㅎㅎ 읽어야 할 책은 많으니까요! ^^

잠자냥 2023-09-13 10: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나 울었던 거 같아...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물감 2023-09-13 10:35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가만보면 꼭 제가 T같고 자냥님이 F같다니까요?
자냥님 분발하세요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3-09-13 12:29   좋아요 1 | URL
분발해서 검사 다시 해볼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물감 2023-09-13 12:59   좋아요 1 | URL
49 대 51 나오실지도 ㅋㅋㅋㅋㅋㅋ
 
이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6
알베르 카뮈 지음, 이기언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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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곧 기분이 안 좋았다. 몇 날 며칠을 치통에 시달렸고, 빌린 책들은 연속으로 꽝이었으며, 새 직장을 들어가서 계속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무기력하던 여름에도 독서를 놓지 않았거늘, 정작 독서의 계절이 되고 나니 잘 간직했던 여유가 흩어져 버렸다. 인생의 3라운드를 맞이한 요즘, 늘 그랬듯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젓고 있지만 어떻게든 통제하는 중이다. 앞으로의 목표는 좀 더 단순하고 현실적이게 살자는 것인데, 이 새로운 마음가짐을 위해서 지긋지긋한 이방인의 자아를 떼어낼 필요가 있었다. 하여 이참에 고이 모셔두었던 카뮈의 <이방인>을 경건히 읽음으로써 평생의 애물단지와 그만 헤어지기를 다짐했다. 과연?


이 오래된 작품을 문학동네에서만 <이인>으로 출간했는데, 읽어보니까 ‘이방인‘보다는 확실히 ‘이인‘이란 표현이 더 와닿는다. <노인과 바다>만큼이나 단순 건조한 이야기. 주인공 뫼르소가 모친의 장례를 치른 뒤, 친구들과의 시간을 보내다 우발적인 살인을 저질러 재판을 받는다. 그런데 전 과정에서 주인공의 태도가 심드렁하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이런 친구들의 영혼 없는 리액션은 꼭 오해를 낳고 소문을 키우곤 한다. 사실 이들이 뭘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아니거늘 대중들은 그 언행에 타당한 이유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인조차도 설명을 못하니 그저 나사 빠진 사회 부적응자 정도로 치부할 따름. 최근 들어서 이런 사람들이 뉴스에 자주 나오는데, 그걸 다 정신질환으로 퉁쳐버리면 끝날 일일까. 뫼르소를 보는 내내 의문이 들었다.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모친의 장례를 치르면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죽음을 그렸던 게 아니었나 하는. 삶이 부질없다고 느낀 뫼르소는, 자신이 생각하는 해방과 새 출발을 모친의 죽음에서 발견했다. 하여 자신 또한 그렇게 되고 싶어서 더 이상 사회적 가면을 써야 할 필요를 못 느꼈던 게 아닐까. 작중에서는 뫼르소의 성격이 원래부터 그런 것처럼 나오지만, 직장도 다녔고 모친도 부양했던 걸로 보아 모태쿨병은 아니다. 그저 은연중에 어떻게 살든(혹은 죽더라도) 무방하다고 판단했지 싶다.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뫼르소한테는 이성과 논리가 먹히지 않는다. 게다가 종교와 신까지 거부하여 영적으로도 접근이 불가했다. 그런즉 뫼르소는 스스로가 유일신이며 절대자가 되었다고들 해석한다. 그러한 관점으로 말하자면 모친의 죽음도, 자신의 살인도, 심문과 재판들도 전부 의미를 잃어버린다. 마치 머리 위를 알짱거리는 저 날벌레가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듯이 말이다. 그러니까 죽으면 되지 않느냐는 뫼르소의 발언은, 아무리 나를 설명해 봤자 이해도 납득도 하지 못할 테니 죽고 난 뒤에 알아서들 지지고 볶으라는 말처럼 들렸다. 글쎄, 장례식에서의 태도야 그렇다 쳐도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범죄는 그리 쿨하게 넘어갈 일은 아닐 터. 정녕 카뮈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내가 정의하는 이방인은, 울타리 바깥이 아니라 안에서 겉도는 사람이다. 애매한 공감대로 형성된 소속에서 잘해보겠다며 장단도 맞춰보지만, 그럴수록 섞이지 않는 물과 기름의 관계라는 사실만 분명해진다. 끝내 자발적 아싸를 선택한 이들은 그 순간부터 타인에게 이해받기를 포기해버린다. 어차피 나도 너를 이해하지 못하니까 서로 취향 존중해 주자는 것이 오늘날의 암묵적인 룰이다. 그 정도로 차고 넘치는 이방인들의 사회가 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서로와 뫼르소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법정에 선 친구들은 패륜아에다 살인자가 된 뫼르소를 가리켜 의리와 사랑이 충만한 진짜 사나이라 증언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맞는 말도 아니었다. 선악이 공존하는 인간에게서 한쪽만을 택한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예를 들어 거짓말을 못하는 뫼르소의 입바른 소리가 정직해서 좋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선한 의도라도 누군가에겐 악이자 불편한 진실이 되고 만다. 그러니 이해하지도 않을거면서 취향을 존중하겠다는 건 모순된 말이다.


그 밖에도 생각할 문제가 많은 작품이다. 확실히 카뮈 작품의 매력은 해석의 여지가 많다는 데에 있다. 시간이 된다면 더 많은 내용들을 다뤄보고 싶다. <이인>에서 느낀 점은 한 가지다. ‘정의‘와 ‘부정‘은 같은 의미라는 것. 누군가를 정의하는 즉시 그 사람의 일부는 부정당한다는 말이다. 냉정히 말하자면 모두가 ‘이인‘인데, 우리는 꼭 누군가를 지목하여 요주인물을 만들고 싶어 한다. 타인한테 관심 없다는 사람들도 이 부조리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 어쩐지 카뮈가 콧대 높은 인간들의 저격수처럼 느껴지는데, 이 또한 함부로 정의해서는 안 될 일이지. 아무튼 나는 이번 독서로 이방인의 자아를 확 잘라내고 싶었다. 근데 반대로 우리 모두 이인이니까 그렇게 알라는 듯한 분위기여서 되게 민망하다. 아직은 때가 아닌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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