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해 여름 블루 컬렉션
에릭 오르세나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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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휴, 지루해서 혼났네. 공쿠르 상도 받은 유명한 작가던데, 일단은 원 아웃. 나만 그런 건지 모르겠는데 프랑스 문학은 정말 모 아니면 도다. 도무지 중간이 없달까. 물론 국가와 지역마다 날고 기는 놈이 있고, 인싸 아싸가 있고, 주류 비주류가 나뉜다지만 프랑스는 좀 특이한 나라다. 아니, 프랑스 작가들만 그런지도 모르지. 이들은 잘 썼든 못썼든 간에 자기들이 고품격 민족이라는 국뽕에 만취해있다. 참 대단한 철면피라고나 할까. 물론 그것이 문제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저 어느 국가보다도 정신승리가 월등하다는 얘기다.


초중반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한 번역가가 외딴섬에서 장기 체류를 하는 동안, 러시아 소설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맡게 된다. 근데 하필 번역에 초 까칠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에이다>였다. 거기다 노벨 문학상 후보자라는 말과 함께. 그 부담감 때문인지 2년간 작업에 손도 못 대고 그냥 탱자 탱자 있다가, 약속된 제출일이 다가오자 그동안 친해진 섬 주민들의 도움을 받기로 한다. 영어 좀 한다는 사람들을 모아 각자의 분량대로 나눠주고 번역을 시키는, 소위 재능기부를 구걸한 꼴이었는데 어찌나 모냥 빠지던지. 문제는 저마다의 영어 레벨이 천지차이라 이건 뭐 써먹지도 못할 수준이었다는 거.


이만하면 괜찮은 줄거린데 나도 여기에 속았다. 요약해놔서 그럴싸해 보일 뿐, 내내 무표정으로 읽다가 끝났다. 초반에 나보코프가 졸렬한 번역가들과의 전쟁을 선포한다는 기사가 떴을 때, 그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가 작품 전체를 끌고 가주었어야 했다. 허나 주인공은 제 본업을 제쳐두고 섬에서의 프리한 삶을 즐기고만 있으니, 당최 이 작품은 뭔 재미로 봐야 하나 싶더라. 도중에 번역가를 찾아온 출판사 직원으로 인해 흐름이 바뀌나 싶더니, 이내 또 제자리로 돌아가버린다. 그것까지도 좋다 이거야. 중후반에는 주인공 시점이 쏙 들어가고, 제 삼자인 사진사가 정말 느닷없이 끼어들어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게 아닌가. 한참 뒤에 번역가와 합쳐지지만 그전까지는 뭔가 내용이 붕 떠서 내가 이걸 왜 읽고 있나 싶어졌다. 그 분위기를 이어받아서 결말도 홀라당 날려먹었다지.


솔직히 엉망진창이었지만 그래도 별 셋을 준 것은, 주인공이 번역가인 만큼 ‘언어‘에 대한 이모저모를 말해주고 있어서다. 그리고 번역가란 직업의 고충과 출판사와의 관계, 작가들과의 미묘한 신경전 등 소소한 볼거리들도 제공한다. 그러나 밑반찬 먹고 싶어서 식당에 가는 사람이 어딨냐고요. 메인 요리가 맛이 있어야 제대로 된 식당 아니겄소? 내 이 작가를 또 보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원 아웃... 아니, 옐로카드요. 좀 더 분발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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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5-22 2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단 한 줄 리뷰에선 평점이 대체로 높네요.
저는 프랑스 영화나 소설을 좋아하는 편이긴 합니다. 많이 읽는 건 아니지만.
프랑스 특유의 인간 내면을 보여주는 아기자기한 면이 있거든요.
이 책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소설을 쓰려면 시나리오를 공부해야 한다고는 하지만 또 시나리오하면 허리우드를 표방하고 있어서 전 그걸 쫓아 가야하나 뭐 그런 거부감이 있죠. 전 허리우드 영화 별로거든요.
프랑스 영화도 허리우드풍 영화가 있기도한데 그런 걸 보면 꼭 굳이 이래야 하나 싶더라구요. 근데 독자의 입장이라면 소설도 그렇게 쓰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근데 물감님으로부터 원 아웃도 아니고 옐로카드라니!
이 작가 분발하긴 해야겠군요. ㅎㅎㅎ

물감 2024-05-23 16:44   좋아요 1 | URL
프랑스 영화는 저도 좋아합니다. 검증된 것만 봐서 그런가...
저한테 뺀찌먹은 작가가 뭐 한둘인가요ㅋㅋㅋ 수상자가 뭐 대수냐 이겁니다ㅋㅋㅋ
 

제목 그대로 김호연 작가님의 전작 읽기를 완료한 기념으로 적어봅니다. 몇몇 분들은 아실 테지만 저는 이 분과의 가늘고 기다란 친분을 수 년 째 유지해오고 있습니다. 제가 쓴 <파우스터>의 리뷰를 보시고 직접 연락을 주셨고, 고맙다 하시며 지금까지도 신간이 나올 때마다 보내주십니다. 저는 계속해서 리뷰를 올리는 중이고요. 제 문체나 스타일이 호불호가 극명한 편인데, 다행히 작가님은 저의 글을 좋아해주시니 저로썬 영광이고요. 이 과정을 몇 번 반복하다 보니 나무옆의자 출판사에서도 저를 좋아해주시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도 같고요. 아무튼 tmi는 이쯤하겠습니다. 그럼 작품 출간순서대로 줄줄이 소개 들어갑니다.




1. 망원동 브라더스 (2013) ★★★★★


https://blog.aladin.co.kr/loveoctave/10887092



작가님의 데뷔작이자 세계문학 우수상을 안겨준 작품입니다. 가난한 만화가의 단칸방에 남정네들이 줄줄이 들어와 홈스테이하는 이야긴데, 각자 떳떳하지 못하게 들어와 놓고 서로 견제하고 생색내는 게 보고 있으면 아주 골때립니다. 그렇게 투닥대다가 정들어버려 누구 하나라도 없는 날엔 허전해하는 것이 참 사람 냄새가 진동해서 좋았습니다. 각자 우여곡절 끝에 잘 풀리는, 정말 내가 다 뿌듯한 결말! 드라마로 치면 <커피프린스 1호점>하고 비슷했달까요? 제발x100 <망원동 시스터즈>로 리부트 작품 만들어줬으면 합니다.





2. 연적 (2015) ★★★★★


https://blog.aladin.co.kr/loveoctave/13187932


비교적 주목 받지 못한 차기작인데, 저는 아주 푹 빠져서 읽은 작품입니다. 고인이 된 애인의 유골함을 들고 튄 두 남자의 이야기인데요. 이미 떠난 사람에 대한 예의를 차리겠다고 서로 티격태격 하다가 모종의 동맹심 같은 게 생겨납니다. 두 사람은 더 좋은 곳에 유골함을 놔주자며 전국을 떠돌다 제주도까지 내려갑니다. 아 그냥 코믹한 로드 무비구나 싶었는데, 무명 소설가였던 죽은 애인이 출판계에서 받았던 하대들이 서브 내용으로 나와, 작품의 텐션과 템포 조절이 기가 맥혔던 기억이 나네요. 시나리오 작가란 이런 거구나 할 정도로 탄탄한 플롯이었습니다.





3. 고스트 라이터즈 (2017) ★★★★


https://blog.aladin.co.kr/loveoctave/10974291


다음은 사뭇 다른 느낌의 장르소설 입니다. 제목처럼 유령작가에 대한 내용이고요. 참고로 이 작품은 <망원동 브라더스>보다도 더 이전에 쓰여졌습니다. 대필 작가인 주인공이 한 여배우를 위한 시나리오를 써주자 곧 현실이 됩니다. 그래서 나 좀 쩌는듯 하던 중 갑자기 납치되더니 곧바로 보스가 등장합니다. 물론 자신의 전용 노예가 되게 하고요. 재미는 있지만 어딘가 뻔한 전개다 싶었는데 역시나, 사이드 메뉴가 있었습니다. 직접 읽고 확인하시기를.





4. 파우스터 (2019) ★★★★★


https://blog.aladin.co.kr/loveoctave/10820052


제가 처음 읽었던 작가님의 책인데요, 너무 잘 쓰셔서 극찬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당연히(?) 장르소설가인줄 알았을 정도로 잘 만든 스릴러물 입니다. 괴테의 <파우스트>를 모티브로 한 작품으로써, 음지의 조직원들이 점찍은 인물을 제 입맛대로 조종하고 키워갑니다. 야구선수인 주인공도 그 꼭두각시 중 하나인데, 후에 그 사실을 알고서 조종자를 만나러 갑니다. 헌데 그곳은 호랑이 소굴이 아니라 드래곤 소굴이었지 뭡니까. 읽어본 분들은 김호연 작가님이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말에 동의하실 거라고 봅니다. 이건 스릴러소설이지만 기득권층을 비판하는 사회소설이기도 합니다. 강추추.





5. 매일 쓰고 다시 쓰고 끝까지 씁니다 (2020) ★★★★★


https://blog.aladin.co.kr/loveoctave/12691417


자고로 글쟁이는 라이팅 철학과 이모저모를 어떻게든 글로 남기고 싶어합니다. 저부터도 그러하고요. 그래서 이 책은 작법서 같은 건가 했는데 거의 고생담에 가깝더군요. 사실 생계형 작가들이 다 고만고만 하기 때문에 막 특별한 내용은 없었지만 챕터 하나하나가 담백하게 재미있습니다. 막 재미없을 문장에도 스토리텔링을 집어넣어서 생기 돋게 만드는 능력자에요. 평소 제가 추구하는 글쓰기와 같아서 참 반갑더라고요.





6. 불편한 편의점 (2021) ★★★★★


https://blog.aladin.co.kr/loveoctave/12593309


설명이 필요 없는 메가히트작 입니다. 이 분은 언젠가 크게 성공할 거라고 장담했었는데, 그것이 현실로 일어나서 소름돋았던 기억이 나네요(그러고보니 <고스트 라이터즈>가 이런 느낌이었던). 이 작품을 시작으로 비슷비슷한 소설들이 쏟아져 나왔더랬죠. 저는 일부러 하나도 안 읽었습니다. 하하하. 잘은 몰라도 전국의 편의점 매출이 많이 올랐을 걸로 예상되네요.





7. 불편한 편의점2 (2022) ★★★★★


https://blog.aladin.co.kr/loveoctave/13890298


다음 작품은 스릴러물이라고 귀띔해주셨는데, 예상못한 편의점 2권이 나와 당황했습니다. 제가 1권 리뷰에서 분량이 짜다고 찡얼댔었는데 그것 때문인가 싶고요 ㅋㅋㅋ 여튼 1권의 주인공과는 정반대 성격의 주인공이 나옵니다. 그래서 1권보다 분위기도 몽글몽글 해졌고요. 여튼 요것도 설명이 필요없겠네요. 





8. 김호연의 작업실 (2023) ★★★★


https://blog.aladin.co.kr/loveoctave/14437516


본업에 관한 A~Z를 담은 에세이인데, 이건 일반인보다도 작가 지망생들이 읽어야 될 내용이더군요. 작업실의 건물 위치나 효율적인 내부 공간 등등 꽤나 디테일한 깨알정보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잘 읽긴 했지만 전 내용과 무관한 사람이어서 별 넷 드렸습니다 ㅎㅎㅎ





9. 나의 돈키호테 (2024) ★★★★★


https://blog.aladin.co.kr/loveoctave/15529292


최근에 나온 따끈따끈한 신작입니다. 유튜버가 된 주인공이 실종된 비디오가게 아저씨를 수색한다는 내용인데요. 좀 평범하다고 느껴지면서도 어느새 푹 빠져 읽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네요. 돈키호테를 닮았던 아저씨는 여러 실패를 겪었지만 결코 패배자가 아니었습니다. 아저씨는 살면서 각자의 열정, 광기, 집착이 왜 필요한 지를 말해주는데요. 부디 작가님의 뜻이 많은 청춘들에게 전달되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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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의 작품은 그냥 착하기만 하다고 누가 그러더군요. 먹고 살만 한 사람들은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어요. 아무튼 각자의 취향이 있는 거니까요. 이렇게 쓰고보니 참 성실한 작가님이셨네요. 거의 매년마다 책을 내셨던. <나의 돈키호테> 마지막 장에서 작가님이 그러더군요. '계속 쓰겠습니다.' 이 정도로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도 잘 없거든요. 앞으로도 계속 좋은 작품 기대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작가님의 친필샷과 함께 제 이름도 공개합니다 ㅋㅋㅋㅋ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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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단씨 2024-05-12 23: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작가님의 많은 작품이 좋지만,
연적 진짜 재밌어요. ㅎㅎㅎ
이 작품이 역주행이라도 하길 바라게 되거든요. ^^

물감 2024-05-13 08:56   좋아요 1 | URL
ㅋㅋㅋ연적 정말 재밌죠
이 분의 작품들은 다 영화화 해도 좋을만큼 시나리오가 훌륭합니다^^

새파랑 2024-05-13 2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인본 보고 이학자님인지 알았습니다 ㅎㅎ 물감님의 작가님에 대한 애정이 느껴집니다~!! 좋아하는 작가님의 친필사인이라니 너무 부럽네요~!!

물감 2024-05-13 22:13   좋아요 2 | URL
저도 첨 받아봤을때 읭? 했었습니다ㅋㅋㅋ
언젠가 한번 찾아뵐까 계획중인데, 받아주실지 모르겠네요😎

stella.K 2024-05-15 16: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햐아~! 꿀 떨어지네요. 이리 좋을까? ㅎㅎ
오늘에야 물감님 본명을 알게되는군요. 학진 씨!
저도 그 점이 좀. 착하기만 한거요. 이분도 시나리오 작가부터 시작한 걸로 아는데 그렇게 시작한 작기들이 잇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예전에 저의 싸부님도 소설 쓸 사람은 필히 시나리오 공부해야 한다고 하셨거든요. 그땐 좀 저항이 있었는데 천명관 소설을 읽으니까 알겠더라구요. 김호연 작가 조만간 저도 읽어보도록 합죠.
도장 깨신 거 축하해요!^^

물감 2024-05-15 16:35   좋아요 2 | URL
축하 감사합니다^^ 이름 공개가 사실 별 것도 아닌데 쑥쓰럽네요 ㅋㅋㅋㅋ 저는 시나리오 작가들을 존경합니다. 촘촘하게 짜여진 기승전결의 묘미가 확실히 있어요. 그리고 영화 속 연출과 구도가 바로바로 연상되는 것도 좋아하고요ㅋㅋㅋ 스텔라님의 천명관 작품 도장깨기 페이퍼도 보고 싶은데요 ^^ 부탁드립니다 ㅋㅋㅋ

다락방 2024-05-15 14: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학자 님인줄 알았네요. 오 이름 특이하시네, 했는데 다음 작품들 보면서 아?! 했습니다. ㅎㅎ

모름지기 글 쓰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이 좋겠지만, 소수라도 정말 내 글을 좋아해서 찾아 읽어주는 사람이 있는게 축복 아니겠습니까. 김호연 작가님의 축복이네요, 물감 님은.

물감 2024-05-15 16:39   좋아요 1 | URL
드렁큰 다락방 님... 속은 괜찮으신지요 ㅋㅋㅋㅋ
말씀하신대로 내 글을 좋아해주는 사람이 생기면, 필자로써 너무 힘이 납니다. 제 경험이기도 하고요. 다락방 님도 연락오는 작가분들이 있을 걸로 예상되는데, 언제 한번 썰이라도 풀어주시죠 ^^
 
나의 돈키호테
김호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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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는 <노르웨이의 숲>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려,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이나 읽을 정도면 자신과 친구 할 수 있다고 은근슬쩍 속내를 비춘 바 있다. 그에게 ‘개츠비‘가 있었듯이 나에게는 ‘돈키호테‘가 있다. 그래서 나는 하루키의 그 마음을 알 것만 같다. <돈키호테>를 감명 깊게 읽어본 사람이라면, 세 번은 됐고 한 번이라도 읽고서 진정으로 가슴 벅찼다면 나와 평생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말하겠다. <돈키호테>는 나의 몇 없는 인생 책 중 하나이며, 나 같은 이상주의자들의 최상급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지금껏 내가 쓴 글 가운데 가장 정성 들여 쓴 리뷰 역시 <돈키호테>이다. 이러한 나님의 귓가에 들려온 김호연 작가의 신작인 <나의 돈키호테>는 그야말로 ‘놀랄 노‘자였다. 아니, 저랑 잘 맞는 분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고요...


내가 지인들에게 종종 하는 말이 있다. 우리들은 아날로그 시대와 디지털 시대, 그리고 스마트 시대까지 다 경험한 복받은 세대라고. 세기말 감성 따윈 모르고 자란 요즘 애들과 달리 우린 전부 겪어봐서 참 다행이라고. 그렇게 하나하나씩 추억 팔이 하다 보면, 그때 그 시절의 향수를 더 이상 느낄 수 없는 현실이 미워지기도 한다. 한 세대는 가고, 또 한 세대가 오는 것이 삶의 순환이라지만 그래도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최대한 오래 머물렀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아날로그 감성을 간직한 김호연 작가에게 정말 감사하고 있다. 현재 많은 소설가들이 근미래 배경의 작품을 쓰는 반면, 김호연 작가는 근 과거에서부터 현시점의 배경을 다룬 작품을 써낸다. 하여 동시대를 살아가는, 당장의 앞날을 걱정하는 이들에게 위로 한 컵씩 따라주는 그런 기분이랄까. 장담컨대 이 분은 자신의 사명과 향방을 확실하게 파악하셨다.


방송 PD를 때려치운 진솔은 귀향 후 옛 아지트였던 비디오 가게를 찾아간다. 그곳의 주인장인 ‘돈 아저씨‘는 보이지 않았고, 건물 지하방에 텅 빈 비디오 가게만이 남아있었다. 듣자 하니 아저씨가 종적을 감춘지도 꽤 됐단다. 그렇다면 아저씨도 찾고 용돈벌이도 할 겸 유튜브 채널을 파기로 작정한 그녀. 그렇게 해서 가게명을 따라 ‘돈키호테 비디오‘ 채널이 탄생했다. 진솔은 아저씨와의 일화 및 추천 영화를 소개해가며, 아저씨의 행방에 대한 정보를 공개 수집하였다. 그러다 알게 된 아저씨의 인맥들을 찾아가 인터뷰를 따곤 했는데, 알고 봤더니 돈 아저씨가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네, 글쎄?


돈 아저씨의 이력은 화려함 그 자체였다. 대학시절엔 학생운동으로 감옥을 다녀오고, 출소 후 학원계에서 영어 강사로 정점을 찍었다가, 출판계로 전향해서 번역을 하다가, 영화사로 들어가서 작품 시나리오를 썼단다. 그랬던 아저씨가 왜 노잼도시 대전까지 와서 곰팡내 나는 비디오방이나 차렸느냐면, 사사건건 부조리를 참지 못하고 윗선과 싸웠기 때문이었다. 어딜 가든 권력자들의 행패가 뒤따랐고, 양반이 못되었던 아저씨는 남의 일까지도 대신 나서서 부딪히곤 했다. 자 그럼, 돈 아저씨의 과거 일들이 시사하는 바가 대체 무엇일까. 내게는 물불 안 가리는 도전정신보다도 신념과 반하는 현실 앞에 막 굴하지 말라는 메시지로 들렸다. 모두 알다시피 돈키호테는 제 신념 앞에서 둘도 없던 막가파 오야붕 아니었던가.


정착 못하고 내내 옮겨 다녔던 아저씨의 인생이, 현대인들에게는 실패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그게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돈키호테를 영 이해 못 할 자들에게는 말이지. 돈 아저씨가 썩 귀감이 될만한 인물은 아니라지만 요즘 한국 사회는 어떠한가. 수많은 청년들이 경제활동은커녕 독립할 생각조차 없는 것이 오늘날의 현주소이다. 오래전 멈춰버린 경제 성장, 탕후루만도 못한 노오력, 열정페이의 배신까지 겪은 세대들에게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당장 나부터도 어디에다 희망을 걸어봐야 할지 모르겠거든. 하여 지금은 무모하기 짝이 없던 돈키호테 식의 정신승리라도 가져야 하지 않나 싶네만.


기나긴 추적 끝에 돈 아저씨와 상봉한 주인공. 여전히 꿈을 좇는 돈키호테의 면모였건만 이제 아저씨는 자신을 ‘산초‘로 불러달란다. 돈키호테와는 정반대 캐릭터인 극 현실주의자 산초라니, 이게 다 무슨 말인가. 결국 아저씨도 매몰찬 현실에 한 수 접으셨단 말인가. 정신이 멀쩡해져서 일상으로 돌아간 돈키호테처럼? 아저씨는 자신의 옛 칭호를 진솔에게 물려주고, 저 대신 돈키호테의 후예로 살아가주길 바란다. 산초처럼 먹고사니즘이 다였던 진솔은 지인 한 명 찾겠다고 ‘유튜버‘라는 레드오션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여기저기 쑤셔댄 덕분에 목적은 달성했으나 그길로 유튜브 채널 또한 수명이 다해버렸다. 또다시 먹고사니즘을 걱정해야 할 노릇인데, 이렇게 될 것을 알면서도 끌리는 대로 무작정 돌진해댔으니. 진정 그녀는 영락없는 돈키호테의 후예였다.


세상 명랑했다가 사회에 찌들어 점차 조용한 성격으로 바뀐 케이스가 수두룩 빽빽하다. 열정이 고갈된 순간, 우리는 돈키호테에서 산초가 되고 마는 것이다. 물론 산초는 산초만의 인생을 살면 된다. 그러나 세상을 뒤집는 일들은 예로부터 또라이 담당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들 모두가 곧 돈키호테의 후예 아닐런가. 지금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내 안의 세계를 뒤집으려면, 눈앞의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돈키호테 같은 광기를 품어야 한다. 이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다. 끝으로, 책에는 없는 작가의 말을 대신 적어본다.


나댄다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란다.

(from. 정신승리 수석 졸업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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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5-11 10: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 마지막 글이 참!
글치않아도 돈키호테를 좋아하시는 물감님께서 이 책을 읽을까 했더니 정말 읽으셨네요. 주로 세계문학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말이죠. ㅎ
그 아저씨라는 분은 작가 자신을 변주한 것 같네요.
울나라 사람들이 대체로 모험을 안하고 모난돌 안되려는 경향이 있긴하죠. 실패할 수 있는 기회도 있어야 하는데 그럼 인생 끝인줄 알잖아요. 나대는 거 자체보단 그걸 제거대상으로 인식하는 것도 문제고. 암튼 잘 읽었습니다. 얼마전 박균호 작가님도 돈키호테 극찬하셨는데 언제고 꼭 읽어보겠습니다. 그때까지 물감님과 제가 친구가 되는 건 보류하는 걸로. ㅋㅋㅋ

물감 2024-05-11 11:18   좋아요 2 | URL
제 취향이 세계문학이라고 한 번도 생각을 못해봤는데, 돌아보니 제가 고전만 읽고 있었네요? 지금 알았습니다 ㅋㅋㅋㅋㅋ 여름이 오니까 슬슬 장르소설 몰아 읽어야겠어요.
작가님이 항상 신간을 보내주셔서 안 읽을수가 없습니다. 물론 안보내주셔도 찾아 읽었을테지만요. 스텔라 님에게 천명관 작가가 있듯이, 제게는 김호연 작가가 있습니다 ㅋ

저는 아저씨처럼 화려한 이력은 없지만, 그와 비슷한 행보를 걸어왔어요. 물질을 쫓는 성격이 아니라서요. 어쩌면 남들 눈에는 제가 모난돌이었겠다 싶습니다. 그래도 신념대로 살았기에 후회는 없어요 하하핳.

제 예상에 스텔라 님도 돈키호테 좋아하실 거 같아요. 막 열광까지는 아니더라도 말이에요. 젊은 세대들은 별 감흥이 없을테지만, 인생 선배님들은 대부분 공감하실 거로 생각되고요. 이건 제 사견인데요. 생활에 딱히 불편 없는 사람들, 그러니까 먹고 살만한 사람들은 이런 휴머니즘에 시큰둥 하더라고요. 제가 친구가 적은 이유를 알겠네요 .... ㅋㅋㅋㅋ 그러니 어서 제 친구가 되어주십쇼!

구단씨 2024-05-12 23: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마낫, 이 리뷰를 이제야 봤어요.
정말로 마지막 단락에서의 문장이 꽉 박히네요.
광기를 품어야 한다. ^-----^

사실 이 소설이 어떻게 흘러갈지 몰라서 계속 읽게 되는 게 아니라,
알 것 같으면서도 종종 모르게 되는 인생의 순간순간에 필요한 게 무엇인지 찾아가는 듯했어요.
멈추지 않을 용기, 님 말씀처럼 광기를 품고 살아가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이 작가 신작 알림해놓고 있다가 읽게 되었는데, 언제나 그렇듯, 재미와 감동이네요.

물감 2024-05-12 23:49   좋아요 1 | URL
막 김호연 작가님의 페이퍼를 작성했는데, 그 사이에 댓글을 써주셨네요 ㅎㅎㅎ
광기를 품어야 한다! 요즘 시대에 딱 들어맞는 슬로건 같지 않나요 ^^
구단씨 님도 김호연 작가님의 책을 좋아하시는 거 잘 알고 있었지요~~ 이번에도 즐겁게 읽으셨다니 제가 다 기분 좋습니다 ㅎㅎㅎ 부디 구단씨 님도 멈추지 않을 용기를 간직하시길요!!!!
 


오호라.


서재활동이 뜸한 사이에 요런 이벤트가 진행중이었군요?


간만에 글도 올릴 겸, 뒤늦게 참여해봅니다.


뭐, 이미 잊혀져 가는 판에 이런 거 올려봤자지만요...





고리타분하게도 소설만 읽는 지라 다른 분들처럼 유니크한 도서는 소개할 게 없네요.


그리고 위 목록에는 없지만 제 인생책은 성경입니다.


단지 해당 이벤트에 성경을 넣을 수 없어, 제 심금을 울렸던 문학 중에서 골라봤습니다.

















1. 돈키호테 1,2권 -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 


https://blog.aladin.co.kr/loveoctave/14347578


듣자 하니 당시 스페인은 정치, 문화, 종교 등등 문제가 많았던갑다. 세르반테스는 '인간다움'을 잃어버린 사회를 풍자하고자 '돈키호테'를 써서 디스며 팩트며 온갖 뼈 있는 개드립을 사정없이 갈겨댄다. 그렇게 하고도 욕먹지 않을, 또는 욕을 먹어도 끄떡없을 캐릭터가 필요해 만든 것이 미쳐버린 돈키호테와 덜떨어진 산초였다. 이런 친구들이 비판 좀 했다고 정색해버린다면 스스로 바보 인증하는 꼴이 될 테니까. 작가가 짱구를 참 잘 굴렸다.




















2. 스토너 - 존 윌리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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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니고 결혼하고 직장 다니는 내용이 다인, 누구나 살면서 겪는 일들을 덤덤하게 그려나간 작품이다. 별사건도 없이 잔잔하기만 해서 소설이라 부르기도 민망하나 주인공의 일생이 나와 너무도 닮아있어 계속 지켜보게 된다. (중략) 힘들면 힘든 대로, 불행하면 불행한 대로 어떤 시련과 불이익도 전부 감수하고 수용하는 보살 같은 태도의 스토너. 이렇게 융통성 없고 손해 보는 성격이지만 그에게는 후회나 뒤끝이 없었다. 그것은 타고난 성정이나 어떤 신념 때문이 아니고 겁이 많아서도 아니었다. 그저 주어진 상황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그의 생존 철칙이었을 뿐.






















3. 남아 있는 나날 - 가즈오 이시구로 


https://blog.aladin.co.kr/loveoctave/15109410


스스로가 위대한 집사임을 내내 강조했던 것은 어떤 자부심과 긍지 때문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걸었던 자기최면인 셈이다. 차마 고개도 들 수 없을 만큼 비참했지만 절대 내색하지 않았다. 인간으로서의 점수 미달은 그렇다 쳐도 집사로써 명예가 실추되는 일은 있어선 안되었다. 하여 프로정신으로 끝까지 자신의 확고한 소신을 밀어붙인 스티븐스는 진정 위대한 집사이다. 이렇듯 사람이 무너지지 않는 비결은 앞서 얘기했듯 평생 지켜왔던 본인의 반듯함에 달려있다. 나를 향한 타인의 비난과 질타를 나까지 따라 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나만큼은 끝까지 자신을 믿고 응원해 주어야 한다.






















4. 호밀밭의 파수꾼 - 제롬 데이비드 셀린저 


https://blog.aladin.co.kr/loveoctave/13320460


세상은 충분히 지겨웠고 사람들은 다 한심해 보였어.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다 제 나이보다 일찍 성숙해서 그랬던 거야. 난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제멋대로인 주인공의 하나부터 열까지가 전부 공감이 돼. 일탈해본 적이 없어도 얘가 사사건건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아. (중략) 찌질해보이기 싫어서 했던 행동들이 더 찌질하다는 걸 어릴 때는 잘 몰라. 소년도 그래. 상대와 의견이 안 맞으면 우겨서 설득하려 들고 그래도 안되면 미련 없이 떠나버려. 그게 상처로부터 나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야. 내가 똑같이 했던, 바보 같은 짓이었으니까 그 마음 아주 잘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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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생각하는 인생책이란, 말 그대로 '인생을 노래하는 작품'이라고 봅니다.


그나저나 저는 제가 쓴 글이 왜 이렇게 재미있는 걸까요. 허허허.


이제는 예전만큼 새콤달콤한 퀄리티의 글이 나오지 않는 것 같아 좀 씁쓸합니다.


저는 나이 들어서도 참신한 또라이다운 저세상 텐션을 유지하고 싶거든요.


그렇습니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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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4-30 18: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 성경! 근데 거봐요. 물감님과 제가 같이 읽은 책 있죠. 스토너! 저도 스토너는 정말 괜찮게 읽었습니다. 단지 저에겐 인생책은 아니었다는 정도. ㅋㅋ
돈키호테는 저에겐 죽기 전에 읽어야하는 책입죠. 언제나 읽으려나...ㅠ

물감 2024-04-30 21:26   좋아요 2 | URL
스토너가 취향은 갈릴지언정 팬층은 확고한 작품입죠ㅋㅋ
스텔라님, 돈키호테는 필독서입니다. 저는 무인도에 딱 한 권만 가져간다면 돈키호테 고를겁니다😀

라파엘 2024-04-30 20: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물감님의 인생책이 성경이라니, 정말 반갑네요~!! 그리고 마지막 사진, 새콤달콤하고 참신합니다!! 😆

물감 2024-04-30 21:28   좋아요 2 | URL
라파엘님의 댓글이 몇년만이더라...ㅋㅋㅋ
여튼 저도 반갑습니다만, 라파엘님의 인생책은 당연한? 것이라 신기하진 않군요ㅋㅋㅋ

그레이스 2024-04-30 22: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맨 아래 그림 인상적이네요^^
성경을 책에 포함시킨다면, 저도 같습니다.
제겐 살아있는 말씀이죠
그래서 누가 물어보면 인생책으로 성경을 말하지는 않아요 ^^
돈키호테도 좋았고, 스토너도 좀 답답하지만 나름 좋았어요. 남아있는 나날도 좋았습니다.
호밀밭의 파수꾼도 좋았지만 거기서 뚜렷한 메시지를 얻지는 못했던것 같아요.
다시 읽어본다면 다를지도 모르겠어요.
이번에 돈키호테 다시 읽는데 완전 다른 의미들을 찾았거든요.~~^^

물감 2024-04-30 23:18   좋아요 2 | URL
동지 발견^^ 말씀하신대로 어디 가서 성경을 인생책이라 말하긴 좀 머시기해요 ㅋㅋ
개인적으로는 저중에서 호밀밭이 가장 공감 가는 책이에요. 리뷰 또한 제가 쓴 것 중에서 베스트 5에 들고요ㅋㅋ
돈키호테 재독중이시군요! 파이팅입니다! 발견하신 다른 의미를 꼭 들려주셔요 ^^

잠자냥 2024-04-30 23:0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성경이에요? 정말 뜻밖입니다…. <남아 있는 나날> 선물용으로 구입하다가 땡투!

물감 2024-05-01 21:26   좋아요 1 | URL
크크큭. 이런 반응을 기다렸습니다. 땡투도 감사용!
위 4권의 리뷰를 보시면 저의 글 성향이 성경과 매우 밀접하다는 것을 느끼실 겁니당. 근데 지금 보니까 전부 다 이달의 당선작 리뷰군요. 오호라?

은오 2024-05-01 18: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인생책이란 “인생을 노래하는 작품”!!! 참신한 물감님의 해석. ㅋㅋㅋㅋㅋ
물감님이 선정하신 작품 중에서 전 <스토너>만 읽었네요. 전에 제 리뷰에서 물감님이 말씀해주셨듯이 스토너는 제가 좀 더 나이 들어서 읽으면 다르게 다가올 거 같아요.
<남아 있는 나날>은 제 약혼자분이 어린이날(ㅋㅋㅋㅋㅋㅋㅋㅋ)기념으로 보내주셔서 이번주에 받을 거 같은데, 물감님 인생책이라니 더더욱 기대됩니다!! 🥹🥹

물감 2024-05-01 21:33   좋아요 2 | URL
은오님 오랜만이에요. 저보다 더 뜸하다는 소문이 돌던데요 ㅋㅋㅋ
사실 누군가의 인생책이라고 해서 다 좋을수도 없고 꼭 챙겨볼 필요는 없죠. 스토너도 그냥 잊어버려요~~ 그리고 남아있는나날... 이것도 은오님 아마 별 셋 주지 않을까 싶은ㅋㅋㅋㅋ만약 별 다섯이면 은오님 다시볼듯 하네요 ㅋㅋㅋ 점점 더워지는데 늘어지지 말고 같이 열독합시다요.

페크pek0501 2024-05-04 11: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돈키호테는 동화책으로만 읽었고, 저도 스토너, 참 좋았어요. 호밀밭의 파수꾼은 너무나 사랑하는 책이라 아껴가며 읽고 있어요. 반 이상 읽었으려나... 저는 그 장면이 인상 깊어요. F학점인가 맞은 과목의 선생님 댁에 찾아가 그 앞에 앉아 대화하는 장면. 학생과 선생 사이의 대화. 잘 읽어 보면 엄청 코믹해요. 잘 보고 갑니다. 이런 이벤트 재밌습니다.^^

물감 2024-05-05 00:42   좋아요 0 | URL
진짜 이런 이벤트 너무 좋지요? 이달의 페이퍼도 대거 쏟아져나올듯 하고요 ^^ 제게는 인생책이 몇권 없어서 선정하기 수월했는데 다른 분들은 꽤나 힘들었겠어요 하하핳. 말씀하신 호밀밭에 그 장면은 코믹하다고 생각해보질 못했는데, 나중에 재독하게 되면 한번 느껴보도록 하겠습니다! 날 더워져가는데 건강 조심하시고요^^
 
창백한 말 페이지터너스
보리스 사빈코프 지음, 정보라 옮김 / 빛소굴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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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타이타닉>에서 디카프리오가 이런 말을 한다. ˝인생은 축복이니 낭비하면 안 되죠.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죠. 매일매일을 소중하게, 순간을 소중히.˝​


갈수록 시간이 빠르게 흘러감을 느끼는 요즘, 매시간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려고 노력 중이다. 그 많던 근심과 고민들은 연기처럼 흩어지고, 열망과 체념의 줄다리기도 멈추었고, 감정과 이성의 혼란들도 다 숨을 거두었다. 진리에 도달한 지금은 더 이상 어떤 질문도 던지지 않는다. 오히려 삶에 큰 변화나 자극이 없어서 더욱 고맙고 축복된 인생이지 싶다. 혹자는 인생에 목표나 목적이 꼭 필요하다는데, 반대로 그런 게 없어서 감사할 수가 있는 인생살이도 존재한다. 바로 나처럼.


떠들썩한 국내 사정에 비해 내 마음은 이다지도 평온한 걸까. 가진 게 없어도 풍요롭고, 배움이 없어도 지혜롭고, 탐구와 번뇌의 해방감을 누린다는 기쁨으로 충만한 나날들. 순간을 소중히 하라는 말의 참 의미를 이제야 깨닫는다. 늘 그래왔지만 더욱더 내 사람들에게 잠잠한 사랑으로 다가서려 한다. 내 모든 질문의 해답은 여기에 들어있다. 그리고 어쩌면 <창백한 말>의 저자인 사빈코프 역시, 어느 정도는 나와 일치한 마음이 아닐까 싶었다.


이것은 모스크바 총독을 암살하려는 테러리스트의 수기로써, 실제 혁명가로 활동한 저자의 생을 바탕으로 쓰였다. 실패한 암살 시도와 죽어가는 동료들. 각자의 이상을 위해 바친 목숨, 그것은 명예로운 죽음이었다. 그러나 이렇다 할 뜻이 없는 조지는, 막연한 제 삶이 마치 실체 없는 인형극처럼 느껴졌다. 어째서 인간은 앙망하고 갈구해야 할 대상이 필요할까. 차라리 죽음으로 존재의 의미를 증명하는 편이 낫지는 않을까. 죽음보다 삶을 바치는 게 더 어렵다더니 과연, 말도 생각도 욕망도 삶도 다 지겨워졌다. 이제 나는 아무래도 좋다.


동료 B는 조지의 죽은 심장을 위해 그리스도를 전한다. 비록 자신은 살인자가 되었으나, 자유를 위해 목숨을 버린 그리스도를 따라갈 뿐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살인을 막기 위해 대신 살인하는 게 세상을 밝히는 일이라고 한다. 그 말은 어쩐지 사랑을 전파한 그리스도에 대해 신성모독으로 들렸다. 그러나 사랑과 무관한 조지의 영혼은 법이 적용되지 않는 죽음 쪽으로 기울었다. 사랑을 가르쳤으나 배신 당했고, 진리를 전했으나 고통 받았던 그리스도의 생애는 온통 의문투성이였으니까.


그럼에도 조지는 신앙이나 사랑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에게도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고, 가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해 슬퍼할 줄도 알았다. 그녀와 함께라면 죽음도 무의미하게 느껴지곤 했다. 그랬기에 동료의 말마따나 사랑이 제일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창 마음이 오락가락하던 중, B가 총독 암살에 성공했다는 소식에 기쁨은커녕 기분만 멜랑꼴리해진 주인공. 목적을 이룬 건지 잃은 건지 알 수가 없는 가운데, 슬며시 차오른 격분으로 애인의 남편을 총살해버린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주인공에게 사랑이 전부임을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자신은 사랑을 모른다는 그의 반복된 고백 속에서 그가 얼마나 사랑을 추구하는지를 느낄 수 있다. 겨우 인생의 해답을 발견했으나 B의 말처럼 사랑의 이름으로 살아갈 수 없어, 남은 건 사랑의 이름으로 죽는 것뿐이었다.


알고 보니 B가 저자의 상징 인물이란다. 그렇다는 건 서로 상반되는 두 자아를 통해 더욱더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한 셈이 된다. 다만 여기에는 성경 말씀을 베이스로 하고 있어서 무신론자나 합리주의자는 이해하기 어렵겠고, 특히나 T들에게는 퍽 지루할 작품이겠다. 여하간 인생들은 정한 시기가 되면 후회로 점철된 생애를 되돌아본다. 그렇게라도 스스로를 자각하게 된다면 이 얼마나 축복인가. 어떤 선택을 해도 후회가 남는다면 결국 거기서 거기란 뜻일 테니,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보도록 하자. 그리고 매일매일을 소중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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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4-26 17: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매순간을 소중히 여기려고 노력 중이신 물감님의 글이 너무 잘 전달되어 옵니다.

물감 2024-04-26 19:16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그레이스님. 이 짧은 글에서 온기가 느껴지네요.
그보다 참 오랜만에 인사 드리네요. 좋은 하루 되셨기를🙂

페크pek0501 2024-05-04 11: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열망과 체념의 줄다리기가 멈추셨군요. 그게 좋을 수도 있긴 해요. 그런데 저는 아직도 줄다리기가 진행 중입니다. 다 버리려 했더니 살맛이 안 나서요. 나이들수록 뭔가 붙잡고 살지 않으면 그냥 시간이 가고 그냥 늙을 것만 같아서요. 시간을 아끼며 소중하게 쓰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인생의 허망함, 부질없음이 느껴질 때가 있죠. 물감 님이나 나나 안달복달은 하지 말자고요. 안 하는 걸로...^^

물감 2024-05-05 00:39   좋아요 0 | URL
하하하 저도 J 성향인지라 막 포기했다거나 될대로 되라식은 절대 아니고요, 조율을 하고 합의점을 보고 판단을 하는 쪽입니다 ㅎㅎ 단지 저의 것은 눈에 보이는 무언가가 아니고, 막 실현가능한 일들도 아니고, 암튼 설명하기 어렵네요 ^^; 여튼 말씀하신대로 안달복달은 안 할거에요. 지금의 제가 좋거등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