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야의 이리 을유세계문학전집 104
헤르만 헤세 지음, 권혁준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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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님은 아무래도 헤세 문학을 말할 때 mbti를 꺼내지 않을 수가 없다. 한심하단 건 알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방법 말고는 쉽게 설명하기가 어렵다. INFJ는 16가지 유형 중에서 가장 복잡하고 알기 힘든 유형으로 알려져 있다. 심리학자들은 이 INFJ를 ‘예수 아니면 히틀러‘라고 말하더라. INFJ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자 골칫거리라면 모든 만물에서 선과 악을 동시에 들여다본다는 것. 그러니까 양측의 상황을 판단하고 몇 수 앞을 내다보기까지 하는 시뮬레이션들이 한꺼번에 작동한다고 보면 된다. 어찌 보면 참 피곤 답답한 이 시스템은 내가 원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훈련으로 얻어진 기능도 아니다. 아무튼 나의 감정과 욕구보다 보편적인 관점과 입장에서 판단이 들어가기 때문에 어느 한쪽 편을 들기가 불가하여 정말 어쩔 수 없이 중립을 지키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혼자 쓸쓸히 세상을 겉도는 ‘황야의 이리‘가 탄생하게 된다. 헤세는 이중인격자로 낙인이 찍혀버린 INFJ들의 모순된 삶과 자기 연민의 종결을 위해 <황야의 이리>를 써냈다. 이 책은 나 같은 극 소수파에게는 바이블이나 다름없지만 그 외 분들은 딱히 뽑아먹을게 있을까 싶다.


황야의 이리들을 가리켜 원래 혼자가 편한 사람, 남들과 잘 못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여기에 당사자들은 일일이 해명하려 들지도 않으니 더욱 그런 캐릭터로 굳혀져버린다. 도리어 이런 상황에서조차 나를 포용하지 않는 타인을 헤아리기에 바쁜 이리들이다. 단언컨대 이리는 절대 고립되기를 바란 적이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모두와 잘 지내고 싶어서 늘 다가가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이리들의 어정쩡한 스탠스를 감지한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애매한 거리 두기를 하게 되고, 예민한 이리들은 그 분위기를 읽고서 남몰래 절규한다. 왜 나는 이렇게 생겨먹은 것일까 거듭 자책하면서. 근데 또 애정결핍처럼 보여지고 싶지 않아 아무렇지 않은 척, 오늘도 내일도 스마일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정말 매일 매 순간이 모순과의 정면충돌이라고 보면 된다. 게다가 타고나길 몸 사리는 게 있어서 겉과 속이 다른 음침한 최약체라는 오해를 많이도 받는다. 이것 또한 같은 이유로 해명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생겨먹었다고 보는 게 서로가 편한 길임을 잘 아니까. 헤세는 이 방황하는 예술가 기질의 영혼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심층 분석하였다.


다시 말해 이들의 삶은 실체가 없고 어떤 형태도 갖고 있지 않다. 이들은 보통 판사, 의사, 제화공, 교사들 같은 부류의 영웅이나 사상가 또는 예술가는 아닌 것이다. 오히려 이들의 삶은 영원히 떠다니는 고통스러운 움직임이고, 부서지는 파도처럼 불행하고 고통스럽게 찢어져있다. 만약 삶의 이런 혼돈에서 빛을 발하는 저들의 독특한 행위와 사고방식, 작품에서 어떤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없다면, 저들의 삶은 끔찍하고 무의미할 것이다.(65p)


이들은 대체로 자극적인 세상사에 썩 흥미를 갖지 못하는데, 그렇기에 온갖 유희와 쾌락과 부를 쫓는 일반 시민들과의 유대관계가 결코 쉽지 않다. 인간관계에 환멸을 느껴 아예 돌아선다면 차라리 나을 것이나 하필이면 또 이상주의자라서 인류애가 충만하다는 게 문제다. 아무튼 다시 mbti 얘기로 돌아오면, 나 자신을 고정틀에 가둔다거나 일종의 가스라이팅하고 다를 바 없다는 주장도 십분 이해한다. 그렇지만 자신을 발견치 못하고 평생 방황하며 살아온 나 같은 이방인들은, 스몰토크 용도에 불과한 mbti가 나를 알기 쉽게 정의해 줘서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헤세도 그런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자기복제의 글들을 연거푸 써왔을 터. 그토록 오래 연구해도 늘 제자리걸음인 자신에 대해 하나라도 더 알아내서 발 뻗고 맘 편히 잠들어보고 싶었을 것이리라.


나는 이 작품을 헤세의 베스트로 꼽는다. 심사숙고하던 평생 숙제를 이 한 권에 전부 집약했다는 점에서 가히 마스터피스라 하겠다. 정말이지 <황야의 이리>에서는 질문하기에 바빴던 지난날들과 달리 해탈의 경지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이질성과 시민 사회의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과 조화가 중요함을 수차례 강조하는데, 그중 내가 놀란 포인트는 이것이었다.


... 이들에게는 고통 속에서 정신이 강해지고 유연해지는 경우 유머로 나아가는 화해적인 탈출구가 남아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시민은 유머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할 능력이 없지만, 유머는 늘 어떻게든 시민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모든 황야의 이리가 자신들의 복잡하고 다양한 이상을 실현하는 것은 유머라는 상상의 영역에서다.(79~80p)


바로 이리들의 유일한 탈출구가 유머라고 언급한 점이다. 이것은 줄곧 이방인으로 살아오면서 내 나름 내렸던 버팀의 방편이었다. 그래서 글을 쓸 때도 꼭 유머를 넣어 환기시키곤 했던 건데, 그동안의 여정이 헛걸음한 게 아니어서 아무튼 천만다행이다. 솔직히 사는 게 힘들다 보면 탈출구를 생각하긴커녕 다 운명이고 팔자려니 하며 체념해버린다. 그러다 자연스레 죽음의 세계를 그려보기도 한다. 헤세 또한 삶에 대한 갈망에서 고통이라는 죄를 추구하는 자신을 발견했고, 참회하며 살아가야 할 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여겨왔다. 하여 그 속죄의 굴레를 바라기까지 하는, 자기 연민의 끝을 보여주는 것이 이리들이다. 마치 그런 배역을 맡은 배우가 제 역할 소화에 최선을 다하듯 말이다.


주인공이 술집에서 만난 여성과의 대화에서 온갖 뼈 때리는 말들이 오고 간다. 사는 게 어려운 일이라던 그에게, 더러워진 안경과 신발을 닦은 뒤 춤이나 추자는 그녀. 춤은 절대 못 춘다는 그에게, 살면서 어렵고 복잡한 일들은 다 해놓고 정작 단순한 일들은 못 배웠느냐고 타박한다. 그렇다. 그저 숲 밖에 볼 줄 모르는 이리들은 눈앞에 있는 나무부터 보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헌데 그게 다 큰 어른이 걸음마를 배우는 것처럼 창피하고 한심하게 느껴져 계속 회피한다는 게 문제다. 해보지도 않았으면서 옳지 못한 일, 나와 맞지 않는 일이라며 속단해버리는 나쁜 습관과 아집을 버려야 한다. 그것이 곧 이리들을 소외와 배제에서 해방시키는 첫걸음이다. 여튼 그녀와의 달콤살벌한 대화들을 한 줄로 압축하자면 ‘별것도 아니면서 착각 좀 하지 말라‘ 되시겠다. 결국 이리도 남들과 같은 인간에 불과하다는 얘긴데, 아 진짜 제대로 뼈 맞았다.


이 팩트 폭력은 꿈속에서 만난 괴테와의 대화로 이어진다. 괴테를 동경해온 주인공은 자기가 생각한 것과 다른 괴테의 태도에 비아냥거린다. 막말로 예술병에 걸린 그에게 너무 진지하게 살지 좀 말라는 괴테의 이 답변은, 나 같은 극 소수파들에게 꼭 필요한 처방전이었다. 이것은 앞서 유머의 중요성과도 연결된다. 이상주의자는 현실주의자가 되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날개를 접고 우주에서 지상으로 내려와야 한다. 겁이 많을수록 더 부딪혀보고 투쟁해서 뭐든 체험해 버릇 해야 한다. 이제껏 나랑 맞지 않는다며 멀리했었던 것들이 사실 시도해 볼 용기가 없어서였음을 몸소 깨달아야만 한다. 이것만 알아두어도 다시는 뼈 맞고 다니지 않을 것이다.


나의 관심사는 대개 평범하고 대중적이지 않음을 알기에 어떤 분야의 일을 프로페셔널하게 해낸들 그와 별개로 자존감은 항상 낮은 상태이다. 다만 그것을 티 내고 싶지 않아서 친절과 겸손의 덕목으로 감추곤 하는데, 이같은 강박적인 반듯함이 (찐) INFJ들의 디폴트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곧 이리들의 고질병이자 난제임을 알고서 헤세는 금단의 세계로 나를 계속 끌어들인다. 춤과 마약, 섹스 등 주인공이 겪는 체험은 온통 향락에 관한 것들인데 이런 자극을 줘서라도 ‘웃는 법‘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지 싶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모든 사람의 눈에서 파괴 욕망과 살인 욕망이 너무나 밝고 솔직한 모습으로 웃는 것을 보았다. 내 안에서도 이처럼 붉고 투박한 꽃들이 탐스럽게 피어나 활짝 웃고 있었다.(268p)‘ 이렇듯 이리의 광기가 어디로 어떻게 튀어나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 아니면 히틀러‘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니깐.


헤세가 거듭 강조하는 그놈의 체험. 당연히 중요하고 나도 물론 그러고 싶지만, 정작 그 길로 안내해 줄 가이드가 없다는 게 문제다. 주인공을 체험의 세계로 인도한 헤르미네나 마리아 같은 동료를 만나기가 어디 쉬운가. 현실은 소설과 달라서 정답을 알려줘도 실행이 어려워 금방 좌절하고 만다. 무엇보다 관계와 협동 없이 홀로 하는 체험들은 어떤 변화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반드시 사회와의 연결고리가 있어야만 한다. 하여 무도회장을 찾은 주인공처럼 나도 사람들을 여럿 만나는 장소를 종종 가보곤 하지만 그때마다 내가 있을 곳은 아니라는 생각에 조용히 물러나버린다. 기 빨리는 기분도 싫지만 그보다도 소외되는 기분이 싫은 이유에서다. 아무튼 작품의 진행형 결말처럼 우리 이방인들은 마음을 수양하며 묵묵히 오늘을 걸어가야만 하리라.


언젠가 한번은 내 속 깊은 이야기를 남김없이 털어낼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생겨서 너무 감사한 독서와 글쓰기였다. 정말 속이 다 후련하다. 이 글로 고구마를 잔뜩 먹었을 당신에게는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전한다. But I Love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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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10-23 18: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헤세가 오늘날 MBTI 하면 INFJ 가 나올까요? INFJ가 매력적인 MBTI인거 같습니다~!! 이 책 헤세책 중에서 좀 거친편인거 같아요 ㅋ


물감 2023-10-23 23:57   좋아요 1 | URL
네, 새파랑님. 헤세는 확신의 INFJ입니다. 저와 이 정도로 겹치고 공명하는 걸 보면요ㅎㅎ
저는 이 책이 거칠다는 생각을 전혀 못했는데, 그렇게 느낄 수도 있군요! 아무튼 최고였습니다. 로쟈 이현우 님도 <황야의 이리>가 헤세의 대표작이라고 하셨슴다🙂

잠자냥 2023-10-24 13: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물 좀 줘요. 이리 물감 님 ㅋㅋㅋㅋㅋㅋㅋ
제가 F가 아니라 T여서 이 작품에 크게 공명을 못했나 봅니다.
무튼 이리 물감 님 리뷰 읽으니 다시 읽어보고 싶어지기도 하는데....T라서 모르겠네요.

이상 유머의 중요성을 아는 INTJ 올림. ㅋㅋㅋㅋㅋㅋ

물감 2023-10-24 13:56   좋아요 1 | URL
??? : 나를 황야의 물감이라 부르라... (모비딕 VER.)

이왕 과몰입한 김에 좀 더 오바 떨자면, 이 책은 INFJ에 대한 고찰록이라 다른 유형들은 얻어갈 게 없겠다 싶어요. 그나저나 유머의 중요성을 알고 계시다니, 자냥 님은 배우신 분이 틀림없군요 ㅋㅋㅋㅋㅋ
 
가난한 사람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김선영 옮김 / 새움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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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등한시했던 러시아 문학도 슬슬 읽어볼 생각이다. 입문작으로 도스토옙스키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랐는데 과연 듣던 대로 상당히 골 때린다. 사랑과 정열을 그대에게 바치고 싶어 안달이 난 두 남녀의 서간체 소설인데, 주인공의 찌질한 감성과 나사 풀린 문체가 전혀 지루할 틈을 주지 않고 있어 묘하게 매력적이다. 오로지 생계를 위한 글쓰기였기에 기존의 교양 있고 점잔 빼는 스타일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워낙 거칠고 날것의 느낌이라 혹평이 쏟아질 법도 한데, 이 문화충격 MSG 덩어리에 모든 이들이 무릎 꿇고 찬양했다 하니 진정 타고난 이야기꾼이 틀림없다.


문학의 세계에는 참으로 온갖 캐릭터가 다 있다. 순화해서 말하면 좀 이상한 사람이고, 직설적인 표현으로는 정상이 아닌 사람을 말한다. 여기에는 그렇게 타고난 유형과 후천적으로 이상해진 유형이 있는데, 주인공 마카르는 둘 다 해당하는 제3의 유형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야생적인 사고가 인물에 녹아든 데다, 가난 속에 찾아온 말년의 사랑으로 살짝 맛이 가 있어서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순애보가 너무나 투명해서 불편하긴커녕 간절한 사랑은 가난할 때라야 나오는 법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뭔 헛소리냐 싶겠지만 원래 사랑이란 게 사람 바보 만들기에 일등 공신 아니었던가.


47세 중년 아재인 마카르는 먼 친척이라는 이유로 17세 고아 소녀 바르바나의 후원자를 맡는다. 갑자기 생긴 여자 인맥에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던 마카르는 간이고 쓸개고 다 갖다 바칠 분위기다. 정작 그의 주머니 사정은 말 안 해도 알 수 있을 정도였는데 없는 돈 쥐어짜서 이것저것 선물해대니 소녀는 부담스러워한다. 그러면서도 좋아해 주니까 마카르는 무리해서라도 물질 공세를 해가며 소녀의 미소를 보고 싶어 한다. 그는 이 모든 과정에서 연애 초보자들이 겪는 오류들을 범하게 된다. 늘 그렇듯 의도만 좋았을 뿐인 상황이 반복되자 나이 먹고서 이 무슨 추태냐는 말이 목밑까지 차올랐지만 그 나이까지 연애 한 번 못해봤다고 생각하니 뭐 이해는 된다. 사실 마카르가 모태솔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위기상 확실해 보인다.


아무튼 마카르의 부담스러운 직진도 썩 싫지만은 않았던 바르바나. 어차피 친구도 없고 할 일도 없었으니 답장 편지를 쓰는 재미에 푹 빠진 그녀였다. 말로는 친척 관계라곤 하나, 이들의 편지는 연인 사이의 비스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어느새 아슬아슬한 썸 타는 기분을 두 사람도 느낀 것이다. 종종 방문 와달라는 소녀에게, 관계가 들켜서 좋을 게 없다는 마카르. 그러니까 본인도 스스로의 문제를 알고는 있으나 지독한 빨간 맛의 노예가 되어 이도 저도 아닌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자신의 건강과 형편을 걱정하는 바르바나에게 허세를 부리고 자존심을 세우는 등 둘도 없는 상남자를 연기하기에 이르렀다. 알았으니까 제발 멀쩡한 옷 좀 사 입고 다니라는 말을 몇 번이나 해줘도 대체 들어먹지를 않는다. 언제는 그녀가 원하는 건 다 들어주겠다고 하더니 말이다.


마카르는 본인의 열렬한 사랑꾼 모습에 잔뜩 취해 있었다. 어쩌다 그녀가 생활비나 건강 문제에 시달릴 때면 정신이 들기도 했지만 그의 순애보는 이제 투명성을 잃어버렸다. 언뜻 보면 사랑꾼의 대명사인 돈키호테와도 닮은 것 같으면서도 달랐다. 돈키호테는 사랑 말고도 명예가 있었기에 초라한 행색에도 품위를 유지할 수 있었으니까. 마카르는 남들이 자신의 가난을 어떻게 생각하든 관여치 않는 듯했다. 단지 내가 나를 어떻게 여기는 지가 중요했을 뿐. 그런 믿음과 마인드가 잘못인 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불편을 겪는데도 고집을 부리는 태도가 문제 되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가난한 사람끼리는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을까.


제목답게 작중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여럿 등장한다. 그 여러 모양의 가난함이 나중 가서는 하나의 불행으로 귀결된다. 도스토옙스키 작품에서 가난은 지겹도록 구경할 테니 일일이 적지는 않겠다. 평론가 이현우는 도스토옙스키의 전 작품을 아우르는 주제와, 그의 일생을 관통하는 핵심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라고 했다. 저자는 인간의 존재를 여러 갈래로 뻗어가는 가지와, 공통된 하나의 뿌리 중 어느 쪽으로 보았을까. 자칭 인류학자인 나님은 이 질문의 해답을 찾고자 도스토옙스키를 파헤쳐 볼 생각이다. 투 비 컨티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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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끼 2023-10-13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리뷰 기다립니다 ㅋㅋㅋㅋ

물감 2023-10-14 13:27   좋아요 0 | URL
에고고 말만이라도 감사함다 ㅎㅎㅎ

새파랑 2023-10-14 1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사 풀린 문체‘ 딱 맞네요~!!
도스토예프스키의 가난은 정말 리얼한거 같습니다 ㅋ

물감 2023-10-14 13:29   좋아요 1 | URL
도스토옙스키와 에밀 졸라 중에 누가 더 가난 묘사의 끝판왕일까 궁금해지더라고요ㅎㅎㅎ

새파랑 2023-10-14 13:45   좋아요 0 | URL
전 도스토예프스키에 한표입니다~!!
 
스완 송 1 - 운명의 바퀴가 돌다
로버트 매캐먼 지음, 서계인 옮김 / 검은숲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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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엊그제는 아프간에서 지진이 발생했다. 올해는 정말 TV만 켰다 하면 재난 피해 소식이 들려온다. 지구 곳곳에서 일어난 자연재해로 전 세계가 매일같이 고통에 신음하고 있다. 마침 이같은 재앙들을 다룬 다큐 한 편을 보았는데 그중에서 가장 끔찍했던 건 재앙이 지나간 뒤 생존자 간에 일어난 폭동이었다. 약탈과 폭력, 살육이 끊이질 않는 그것은 정녕 절망이 세상을 지배하는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혹여 이런 일이 한국에서 발생한다면 미국보다 더한 야만국가가 될 것이다. 안 그래도 한국인들은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차 있으니까.


1987년에 출간된 <스완 송>은 미국과 러시아의 핵 전쟁 직후를 그린 세기말 감성의 재난물이다. 이 방대한 분량의 작품은 핵폭발 이후 생존한 자들이 겪게 될 모든 상황들을 차례대로 나열한다. 방사능에 노출된 피부의 변형부터 각종 기형 짐승들의 공습과 기후변화로 생긴 핵 겨울 등, 온갖 악조건 가운데 살아남기 위한 인간들의 처절한 몸부림을 볼 수 있다. 물론 땅덩이가 넓은 미국이라서 가능한 내용이긴 했어도 작품이 주는 위기와 공포는 충분히 수긍할만했다.


스티븐 킹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매캐먼은 <스완 송>으로 브램 스토커상을 수상하며 명성을 얻었단다. 매캐먼의 스타일은 장르문학에다 휴머니즘을 녹여내는 게 특징인데, <스완 송>에서는 그 기교의 정점을 찍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플하게는 인간의 선악에 대한 내용이고, 나아가서는 인간의 존재 가치를 돌아보게 한다. 종말의 바람이 불고 난 후 살아남은 세 일행의 시점이 교차하는데, 먼저는 핵폭발 당시 지하로 대피한 소녀 ‘스완‘과 프로 레슬러 ‘조시‘의 장면이다. 바깥세상은 이미 초토화가 되었지만 조시는 목숨을 걸고 곁에 있는 소녀를 지킬 생각이다. 스완이 지닌 기이한 생명의 기운을 못 본 체할 수가 없는 그였다.


다음은 도심 터널에서 겨우 죽음을 면한 부랑자 ‘시스터‘의 장면이다. 부서진 뉴욕 거리를 떠돌던 그녀는 인간의 형상을 한 ‘악마‘를 만나 공격을 받고서 도망친다. 그러다 어느 잔해더미에서 보석들이 녹아 붙은 유리 고리를 줍게 되는데, 이걸 만지는 자는 미래의 한 부분을 들여다보게 된다. 시스터는 유리 고리가 보여주는 환상을 따라 정처 없이 대륙을 횡단하게 되고, 악마는 유리 고리를 파괴하기 위해 시스터를 추격한다.


마지막으로 산속 벙커에서 다 죽고 살아난 두 사람, 소년 ‘롤런드‘와 공군 대령 ‘매클린‘의 장면. 군인을 동경해오던 소년은 손을 다친 대령의 오른팔이 된다. 이후 벙커 밖으로 나와 생존게임에 참가하면서 병사 놀이에 푹 빠진 소년의 잔학성이 눈을 뜨기 시작한다. 급결성된 이 인조는 무력으로 생존자들을 굴복시키며 세력을 키워간다. 이렇듯 멸망한 세상 중에도 악의 꽃은 저절로 피어나고 혼돈의 열매를 맺고 있었다.


판타지 요소가 들어있지만 작품의 정체성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런 식으로 풀어가서 기승전결이 딱 맞아떨어지니 다행이랄까. 모든 생존자들은 위기를 맞을 때마다 각자의 방식과 신념대로 해결하고 살아남는다. 혹 그 방식이 잔인하고 흉포하다 해도 결코 비난할 수가 없는 세상이었다. 서로가 경계하는 가운데 친절과 봉사로 마음을 여는 쪽과 힘으로 제압하는 쪽으로 나뉘었지만 서바이벌에 정답이란 없었다. 선을 지켜서 안전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악하게 산다 해서 천벌을 받는 것도 아니었으니.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다 무슨 소용이랴. 질서가 무너진 세상에서 의미를 찾는 것만큼 한심한 일도 없을 것이다.


방사능에 노출된 인간들의 피부는 말벌집 모양같이 변해버렸다. 그 흉측한 얼굴은 타인들 특히 정상인과의 소통을 가로막았고, 누가 죽기라도 하면 피부병 탓이라면서 더욱 서로를 멀리하였다. 그렇게 모두가 원치 않는 고립 속에 살아간다. 협조해 주지 않는 세상에 선을 행하고 마음을 전하기란 정말 쉽지가 않다. 나라면 이런 상황에서 타인에게 식량이나 물품을 나눠줄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은 없다. 평상시의 내 모습은 선이지만 종말이 닥치고도 선을 유지할지는... 아니다. 혼자 살아가느니 그냥 나도 죽고 말란다.


한편 대령과 소년은 피부병에 걸린 자들을 학살하고 정상인들은 군 입대를 시켰다. 자신들의 피부병은 보호구로 가린 채. 자유를 뺏는 대신 안전을 책임지는 대령의 방식이 무질서한 세상에서는 오히려 좋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삶의 의미나 가치 따위를 찾는 나 같은 사람들은 얼마 못 가서 튕겨져 나올 것이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끼리 세운 사상은 과연 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모양새는 달라도 서로가 추구하는 건 같은데 말이다. 어째 리뷰가 딥해지는 듯한데 종말 소설이라서 어쩔 수가 없음.


핵전쟁 후 7년이 지났다. 스완과 조시는 떠돌던 끝에 작은 마을에 정착하게 되고, 시스터는 유리 고리의 환상을 따라 마침내 스완하고 만난다. 어느 날 스완의 말벌집 같은 가면이 쩍 갈라지더니 아름다운 얼굴을 드러냈고, 이어서 조시와 시스터도 같은 현상과 같은 결과를 보게 된다. 마찬가지로 대령과 롤런드의 가면도 벗겨졌으나 두 사람은 괴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각자의 내면에 있던 것들이 겉으로 형상화가 된 셈인데, 이제껏 모호했던 선악의 기준을 작가는 변화된 얼굴로 구분 지었다. 이제 스완은 작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재능을 힘껏 발휘하여 무너진 세상을 재건하는 일에 앞장서게 된다. 스완의 능력으로 변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매캐먼이 바라는 세상이 무엇인지를 알 것도 같았다.


한참 분위기 좋은 와중에 시스터를 쫓던 악마가 마을을 방문한다. 스완의 기운에 못이긴 악마는 대령의 군대를 동원하여 스완과 마을을 공격해온다. 이날 이때까지 고생한 게 다 전쟁 때문인데 어째서 또 전쟁을 선포하는가. 그것도 원인을 제공한 러시아가 아닌 자국민끼리 싸워대는가.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말이 생각난다. 이제 반복되는 살육 아래 본래의 목적과 사상은 퇴색되었다. 이러한 인간의 모순을 볼 때마다 차라리 세상은 전멸하는 편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이야기는 세계 멸망으로 흘러간다. 결국 악마의 승리인가 싶더니 자칭 ‘신‘이라는 남자가 등장하여 종말 버튼을 누른다. 세상의 재건을 위해 현재의 선악은 사라져야 한다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자기모순을 정당화하려 들 것이다. 여기에는 끝까지 인도주의를 고수하는 스완조차도 예외가 없다. 이 작품은 접근 방식에 따라 극과 극의 평으로 갈릴듯한데, 주제를 떠나서 경종을 울리는 것만으로도 목적은 달성했다고 본다. 죽기 직전의 백조가 부른다는 진혼곡. 죽음과 맞바꾼 그 찰나의 아름다움이 오염된 세상을 정화해 준다. 어쩌면 누군가의 스완송 덕분에 오늘의 내가 현실을 버틸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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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10-10 19: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요즘 왤케 뜸하십니까?

물감 2023-10-11 10:36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전 사실 요즘 서재 분위기가 많이 어색해요. 제가 아싸에다 비주류여서 그런지 소통할 사람이 점점 줄어드네요. 어쩐지 알라딘을 떠난 분들의 마음을 알 것도 같고요.

은오 2023-10-11 17:52   좋아요 1 | URL
그래도 떠나진 마세요.. 물감님 없는 알라딘은 물감 없는 팔레트.. 그림 없는 스케치북..
 
동물농장 - 최신 버전으로 새롭게 편집한 명작의 백미, 책 읽어드립니다
조지 오웰 지음, 신동운 옮김 / 스타북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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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짧은 책들만 읽고 있는데 그만큼 서평 쓸 차례가 자주 온다는 게 문제네. 다음부터는 벽돌책으로 가야겠다. 눈팅만 했었던 <동물농장>을 두 시간 만에 완독했다.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구상할 생각을 다 했지. 풍자소설이라 그런지 <1984>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워낙 유명하니까 줄거리는 생략하겠다.


스탈린의 정치를 비판하고자 썼다곤 하나 그런 배경지식 없이 읽어도 쉽게 와닿는 것은, 인간의 정치와 사회가 오늘날까지도 전혀 달라짐이 없기 때문이다. 농장주와 가축이라는 설정부터가 현실에서의 서열과 계급사회를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가축의 종류별로 성격을 다르게 잡은 것 또한 각양각색의 인간들을 기가 막히게 표현했다. 설정에서 반 이상을 먹고 들어가다니, 보면 볼수록 오웰 쓰앵님은 뇌섹남의 아이콘이다.


농장주를 쫓아낸 가축들은 동물사회를 만들어 이제까지의 억압을 벗고 자유와 평등을 외친다. 그렇지만 하나의 사회를 갖추려면 질서와 규율이 있어야 했다. 하는 수없이 인간의 방식을 따라 지도자를 세우고 갖가지 법과 계명을 만든 동물들. 처음에나 좋았지, 갈수록 돼지들의 독재정치가 되면서 다들 피똥 싸기 시작한다. 그렇게 혁명의 결과는 또 다른 지옥을 선사했지만 우매한 동물들은 돼지들의 입발림을 찬양하며 맹신도가 된다.


공공의 적은 어느새 인간에서 배신한 동물에게로 옮겨져간다. 몇몇 동물들이 옛 습성을 잊지 못하고 몰래 법을 어기다 적발되었다. 이 배신자들은 모두 모인 자리에서 맹견들에게 물려 죽게 된다. 마침내 폭력이 개입되었음에도 세뇌당한 동물들은 슬퍼하긴커녕 더욱 충성할 뿐이었다. 유토피아를 이룩해가는 과정이라 믿으면서. 그러나 알게 모르게 이들의 절대적인 평등은 무너지고 있었다. 동등한 노동을 거부하는 이들과, 식량 배급에 편차가 생기는 등 예상 못 한 변수가 계속 나타났다. 이에 불만을 품거나 불안해하는 집단이 형성된다.


그래서 돼지들은 방황하는 어린 양들을 위한답시고 금령을 깨고서 인간들과 접촉하여 거래를 시도한다. 그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공급받음과 동시에 자신들의 적이 누구인가를 다시금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돼지들의 이 같은 행동은 농장이 아닌 본인의 지위를 위한 일이었고, 모두가 돼지들을 살찌우게 하는 일에 발 벗고 나선 셈이었다.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현대사회를 이다지도 적나라하게 풍자하다니. 이것은 기득권층의 교활함보다 민중의 어리석음을 경계로 기록한 작품이 아니던가.


한때 진보를 외쳤던 동물들은 자신이 보수가 되었다는 생각을 절대 못한다. 도리어 진보의 싹을 자르면서 스스로를 진보라 칭하고 있었다. 독재 정권도 위험하지만 분별력이 없는 직진이란 더더욱 위험하다. 실예로,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논리적이라 생각하나, 멀리서 보면 그만치 편협한 경우도 잘 없다. 극단적인 타입들은 둘 중 하나다. 돼지들처럼 군림하거나, 개나 양들처럼 광신도가 되거나. 정녕 이것이 인간의 본능이고 생리일까. 진정 우리는 폭력과 방어, 기만과 선동에서 벗어날 수 없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뾰족한 수도 없으니 조만간에 세상은 아주 그냥 폭삭 무너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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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베스 열린책들 세계문학 155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권오숙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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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책쟁이들이 얘기하길, 독서하다 보면 다음에 어떤 책을 읽을지가 알아서 정해진다고 한다. 그러니까 책이 책을 부른다는 말인가 본데 어째서 나는 그런 경험을 못해봤을까나. 내가 소설만 읽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나름 오랫동안 독서를 해왔지만 나는 딱히 선정 도서의 기준이란 게 없는듯하다. 좋아하는 작가라 해도 연속으로 읽지는 못한다. 이렇듯 계획적인 독서가 못되다 보니 책을 사서 모셔만 두는 꼴인데, 나 같은 사람은 그냥 빌려 읽는 쪽이 더 나은듯하다. 쿠폰이나 적립금으로만 책을 사고 있어서, 내 돈 주고 책을 산지는 꽤 오래됐다.


요즘 바쁘기도 하고, 기존의 책들을 처분도 할 겸 해서 짧은 책들 위주로 읽고 있다. 마침 셰익스피어가 눈에 딱 들어와서 후딱 읽어주었다. 희곡에 별 관심은 없지만 그래도 ‘4대 비극‘은 읽어볼 생각인데, <맥베스>는 그 타이틀이 민망하다 할 정도로 임팩트가 없었다. 분량도 적고 전개 속도가 빨라서 무난하게 읽혔다만 인상적인 장면이 아예 없던데. 흠.


마녀에게 장차 왕이 될 거란 말을 들은 맥베스 장군. 그와 부인은 스코틀랜드 왕을 죽인 뒤 왕위에 오른다. 이후 도망쳤던 왕자가 데려온 세력들과 싸우다 목숨을 잃는다는 내용이다. 근데 <햄릿>을 재탕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나. 주인공 시점이 왕자에서 왕으로 옮겨갔을 뿐, 거기서 거기 같은 느낌이라 크게 볼 것도 없었다. 예상한 대로 맥베스는 왕이 되고부터 갖가지 고뇌에 빠진다. 원래가 야망 있는 성격이 못되었던 그는 잠깐의 욕심이 부른 결과에 심히 자책한다. 그러다가 화끈한 군주로 각성하는데, 이 과정들이 너무도 빠르다는 게 문제였다. 인물에 몰입할 시간을 주지 않다 보니 불안에 떨다 그냥 미치광이가 되었을 뿐, 여기에는 어떤 페이소스도 느껴지지 않는다. 글쎄, 내가 너무 냉혈한인가?


주인공이 맞나 싶을 만큼 존재감이 약한 맥베스. 불안 증세가 커져갈수록 인간적인 모습은 줄어들고, 끝내는 죽었어도 아무런 감흥이 생기지가 않았다. 오히려 지주였던 부인이 갑자기 하직했던 게 더 기억에 남을 정도. 뭔가 이 작품은 주인공을 죽어마땅한 인물로 설정해둔 느낌이다. 또한 배역들마다 애정이 없어 보였고, 그 때문인지 각자의 서사에 영 흥미가 안 갔다. ‘아름다운 것은 추한 것이고, 추한 것은 아름다운 것‘이라는 모순된 인간의 본질도 썩 와닿지 않았고. 더 할 말은 많으나 시간상 이쯤에서 끝내야겠다. 갈 길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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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9-13 10: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간상 ㅋㅋㅋㅋㅋㅋㅋ 어디 가세요?! ㅋㅋㅋㅋㅋㅋㅋ

물감 2023-09-13 10:36   좋아요 0 | URL
이 글 새벽에 쓴거에요 ㅋㅋㅋㅋ 어서 출근 준비해야하니까요
그리고 읽고 해치울 책들도 밀려있다는ㅋㅋㅋㅋㅋㅋ 바쁘다 바빠

stella.K 2023-09-13 10: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반갑네요. 저도 셰익스피어 는 뭐가 좋은지 모르겠던데 이리 솔직하게 쓰시나디. 솔직히 6백년전 사람인가 그렇잖아요. 뭐 문체라도 맞으면 모르겠는데 그것도 아니고. 무조건 극찬을해대면 그냥 좀 뻘쭘하더라구요.

물감 2023-09-13 11:17   좋아요 2 | URL
셰익스피어를 거의 안 읽어봐서 어떻다 논하긴 뭐하지만요, 이 작품은 영 별로였어요. 반대로 <햄릿>은 정말 좋았습니다. 제 성격상 극찬하는 작품은 일단 매의 눈으로 보는 편이에요. 그러면 대부분 레이더망에 포착되곤 합니다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