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묻힌 거인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홍한결 옮김 / 민음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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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구로의 작품도 거의 다 읽어간다. 작가 특유의 느긋함이 요즘 같은 더위와 어울리지 않지만 늘 그렇듯 읽게 되면 스르륵하고 빠져들게 된다. 이시구로 작품은 초반보다 후반 쪽이 내 스타일인데, <파묻힌 거인>은 어딘가 간이 배다 만 듯한 데뷔 초반의 감성을 보여주었다. 그래도 네임밸류가 있지, 썩어도 준치였는데 누구 말대로 추천은 못하겠더라는. 일단 거인은 안 나오는 걸로 봐서 일종의 은유였는지도 모르겠네.


갑작스럽게 중세 시대 배경의 판타지 장르물이다. 이전까지의 작품들과 전혀 다른 시도라서 생뚱맞기도 했거니와 이토록 잔잔하고 담백한 기사소설은 또 처음이라 역시 이시구로 답다고 해야 할까. 아무래도 톨킨의 <호빗>이 연상되곤 했는데, 이 작품은 액션이 거의 없고 대화나 회상 위주로 흘러가는지라 막 특별한 볼거리도 없고, 작가의 날카로운 시선도 담겨있지 않아 별다른 화두도 없었다. 그냥 쉬어갈 겸 이런 책도 냈다고 하기엔 이때가 환갑이었으니 뭔가 말이 안 맞는 듯. 잡담은 이쯤하고.


색슨족 노부부가 갑자기 잊고 있었던 아들이 생각나, 아들이 사는 마을에 가자는 즉흥 여행이 시작된다. 부부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없는 이유로 과거 기억들이 삭제되었음을 반복해서 알려준다. 가끔씩 흐릿하게 떠오르는 기억의 파편들이 무언가 평범했던 과거는 아니었음을 내내 암시하는데 그게 뭐였는지 또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알 길이 없다. 노부부는 어느 마을에서 만난 의문의 전사와 소년하고 팀이 되어 길을 떠나는데, 이 전사가 주인공 A를 빤히 쳐다보며 아는 사람으로 보는 게 아닌가. 그러나 기억이 지워진 A에게는 전혀 남남이었고, 전사는 예정보다도 더 오래 A와 동행하게 된다. 흠.


그다음에는 늙은 노기사를 만난다. 그의 삼촌인 아서왕의 명을 받들어 ‘퀘리크‘라는 암용을 죽이기 위해 살아가고 있단다. 전사의 사명 또한 멸룡이었는데, 노기사는 자신의 일이라면서 전사에게 물러날 것을 강요한다. 아서왕의 백성들은 색슨족 전사의 숙적인 브리턴족이었고, 타협이 불가하여 전사와 소년은 따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노기사 역시 A를 안다는 듯이 얘기하는데, 고운 말투가 아닌 걸로 보아 왕년의 A에게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만든다. 노부부는 그들의 기억 삭제를 설명하고, 노기사는 암용이 내뿜는 숨에 그 마법이 걸려있다고 알려준다. 그것이 암용을 반드시 멸해야만 하는 이유였는데, 어째서 전사와 노기사는 손을 잡지 않은 걸까.


읽어보면 알겠지만 A의 아내는 남편 껌딱지마냥 심각한 의존증이고, 또 남편은 그런 아내를 끔찍하게 과잉보호한다. 이렇게 끈적한 남녀관계는 내가 알던 이시구로의 스타일이 아니어서 보는 내내 좀 거시기했다. 이야기는 이제 암용을 찾아가 멸하고 기억을 되찾는 것으로 끝나는데, 정말 별거 없어서 내용은 생략하겠다. 어쨌거나 이 작품에서도 작가의 중복된 시선이 담겨있긴 했다. 고집스레 밀어붙인 결단과 저지른 행동이 훗날에 또 다른 위기를 불러온다는 것. 그때엔 올바른 선택을 했다지만 이제 와보니 섣부른 판단이었다는 사실. 돌이킬 수 없는 자신의 과오로 가까운 이들이 피해를 입는다는 사실. 암용의 숨결에 마법을 걸어 모두의 기억을 지워서 민족 간에 분쟁과 증오를 멈춘 장본인이 바로 주인공이었다. 즉 지금의 평화는 거짓으로 쌓아 올린 것이었고, 암용의 마법이 풀린 현재 대륙 곳곳에서 전쟁이 발발할지도 모를 일이다. 왜 노기사가 주인공을 나무랐는지 이해가 된다는.


마지막 장에서 A는 아들을 찾아가자는 아내를 극구 말리는데, 그가 알고 있는 참혹한 내막을 곧 사랑하는 아내가 알게 될 터였다. 아마 여기에도 주인공의 잘못이 개입되어 있을 테지. 그가 선택한 거짓된 평화는 정녕 헛수고였을까. 우리 인간은 잘한 일과 옳은 일이 같은 거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그런 착각 속에 발생하는 실수와 잘못들은 언젠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지금껏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오만했었는지를 알게 한다. 하여 가즈오 이시구로는 작품마다 미래의 나에게 후회를 남기지 말자는 일인 시위를 하고 있다. 자신감과 자기신뢰가 흘러넘쳐 오만함으로 번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겠다. 독서 중독자 중에 오만한 인간들이 생각보다 많더라고,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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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8-14 14: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난 주일 날 올렸군요. 그날은 올림픽 마지막 날 여자 역도 중계가 있던 날이었죠. 제가 생중계는 안 보는데 묘하게 끌려서 보느라. 조마조마 하더군요. 워낙 잘 하는 선수긴 하지만 암튼 조마가 싫어서 안 보는데 그만...ㅠ
근데 마지막 글귀가 참 묘하게 얄밉군요.ㅋㅋ
설마 저는 아니겠죠? 근데 그럴 수 밖에 없지 않을까요? 이 책이란게 워낙 도도한 물건이라. ㅋ

물감 2024-08-14 15:03   좋아요 1 | URL
저는 여자 마라톤 딱 하나만 봤어요. 마지막 반전이 대단했습니다ㅋㅋㅋ
저는 책이 자신을 높여주는 게 아닌 더 낮춰주는 도구라고 생각해요. 과학자들도 연구를 거듭할수록 오히려 겸손해진다고들 하잖아요. 분야를 막론하고 그게 정도의 길이라 생각이 됩니다. 🙂

젤소민아 2024-08-21 05: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아있는 나날]의 잔상이 심해서 다른 작품을 당분간 미루고 싶을 정도~~~이건 환똬지라굽쇼~~? 이시구로라면 다르겠지...험험. 물감님 리뷰보니 읽고 싶습니다~

물감 2024-08-21 10:27   좋아요 0 | URL
저도 <남아 있는 나날>이 베스트였어요. 그 작품의 여운이 꽤 오래갔었거든요 ㅎㅎ
이 작품은 판타지인지도 모르고 읽은 건데, 제가 생각한 모험물이 아니어서 읭? 했다가 점점 역시 이시구로답다 하면서 읽었다죠 ㅎㅎㅎ 끝까지 읽어봐야 느낌이 오는 게 딱 이 분의 스타일이었습니다요^^
 
심연
앨마 카츠 지음, 이은선 옮김 / 현대문학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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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은 다 좋다고 난리인데 나만 또 안 맞는 작가를 발견했다. 역사와 초자연적 현상을 결합한 환상소설가라는 앨마 카츠. 내놓은 작품마다 문학상 후보작에 오르내렸다던 꽤나 잘나가는 미국 작가이다. 아직 수상 타이틀은 없는가 본데 어째선지 그 이유를 알 것도 같고. 다른 작품도 읽어봐야 판단이 설 텐데 아직 국내에는 요 한 권뿐이다. <심연>은 그 유명한 타이태닉호의 침몰사건을 가져와 유령 소재를 접목해낸 고딕 느낌 나는 호러소설이다. 늘 그렇듯이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하다 보니 그렇게 막 참신하지는 않았다. 바로 앞전의 리뷰에서도 말한 바 나는 오컬티즘에 매력을 잘 못 느껴서 더 그럴 것이다. 아니면 이 오컬티즘을 잘 뽑아내는 맛집을 아직 못 가봐서 그런 걸지도 모르제.


타이태닉호가 침몰한 1912년과, 자매선인 브리태닉호의 첫 출항인 1916년의 두 시점이 교차된다. 1912년은 타이태닉호 승무원인 주인공 애니가 승객들을 담당하는 내용과, 승객들의 잡다한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배에서 음산한 기운을 느낀 승객들은 교령회를 열어 유령과의 접촉을 시도하고, 클라이맥스에 주인공이 문 열고 들어와 파투 나지만 혹자는 애니의 정체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한편 애니는 한 유부남에게 눈이 멀어 자꾸만 접촉을 시도하고, 그의 아기를 제 자식인 양 여기며 집착해댄다. 애니의 이해 안 가는 행동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문득 이 책을 논리적으로 접근하려 했던 내가 바보였다는 생각에 깡생수를 들이켰다.


1916년은 타이태닉호에서 생존한 동기의 권유로 다시 복귀한 애니의 시점을 다룬다. 여객선의 타이태닉호와 똑닮은 병원선으로 만들어진 브리태닉호, 그리고 군 간호사가 된 주인공. 전쟁 중상자를 치료하는 바쁜 일상들로 트라우마를 회복 중인 가운데 4년전 그 유부남이 환자로 입원하게 된다. 드디어 일할 맛이 좀 나는가 했더니, 그가 애니를 보고서 기겁을 해대는 게 아닌가. 자신과 같은 마음일 줄 알았던 왕자님의 예상 못 한 배신으로 멘탈이 나가있던 중, 그가 흘린 첫 아내의 일기장을 통해 애니가 아주 대단한 착각 속에 살았던 것과, 타이태닉호에서 다들 쉬쉬했던 유령의 정체를 깨닫는다. 와 정말 놀랍지가 않다.


이런 유령 테마에서는 뭔가에 홀려서 혼비백산하는 패턴이 계속 나와주어야 한다. 헌데 <심연>은 주인공의 허둥대는 이유가 유령이 아닌 이성한테 푹 빠져서라는 게 아주 그냥 웃음벨이다. 애니의 어린 시절과 성장 배경 등등 서사에 제법 힘을 주셨던데, 캐릭터의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고 있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게다가 주인공 외에 여러 인물들의 자잘 자잘한 이야기들이 여객선의 침몰과 함께 소리 없이 흩어져 버린다. 그러니까 죄다 불필요한 얘기로 끝나버렸는데 이 맥거핀에 불과한 서사들을 뭐 하러 집어넣었을까 싶었다. 물론 작품의 분위기 조성을 위해서였기도 하지만, 용두사미로 끝나버린 나머지 역시나 실화 바탕은 별 수 없나 싶더랬다. 그런 것치곤 타이타닉 영화는 명작이었으니 거참 아리송하네. 암튼 많이들 재밌다고 하니까 저 때문에 거르지는 마시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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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8-02 21: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런 걸지도 모르제~ ㅎㅎㅎ
이거 왠지 저는 재밌게 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물감님과 제가 취향이 약간은 다르니 말입니다.ㅋ
근데 결정적인 건 저도 고딕이나 오컬티즘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래도 여름인데 이런 소설 한 권쯤 읽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텐데 말입니다.
재미없는 책 끝까지 읽은 것도 고역인데.
지금 물감님 모습이 딱 서재 이미지 같으려나요?
전 아무리 봐도 저 서재 이지미 넘 웃겨요.ㅋㅋㅋ
암튼 이 더운 날 책 읽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메다.
다음 번엔 재밌는 책 읽으시라요.^^

물감 2024-08-03 10:21   좋아요 1 | URL
별3개일때가 리뷰쓰기 가장 곤란해요 ㅎㅎㅎ 막 이렇다할 인상이 안 남아서ㅋㅋ
저야 뭐 별종이니까 그렇지, 스텔라 님은 재밌을 겁니다요. 시간은 잘 가던 작품이라 여름에 읽으면 좋겠어요 ㅎㅎ

보통 프사같은 소파에 앉아서 읽는데요, 저랑 비슷해서 저 프사를 해놓은 것도 있습니다😁 다음엔 재밌는거 읽어볼게요. 즐독하시길요ㅋ

페크pek0501 2024-08-03 14: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랑이라는 감정과 논리는 양립할 수 없지요. 저는 착각했던 애니의 모습이 그려지면서 오히려 이 책에 흥미를 느낍니다. 인간은 얼마나 착각의 왕인지 잘 아니까 말이죠. 인간이란 심지어 진실을 말해 주어도 믿지 않고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믿으려고 하거든요. 저 또한 그럴 때가 있겠지요...인간의 심리를 알게 되는 책은 관심이 갑니다.^^

물감 2024-08-04 09:50   좋아요 1 | URL
페크님같은 반응이 아마 대부분일 거에요. 제가 마이너한 취향이라 ㅋㅋ
읽어보셔야 알겠지만 좀 억지스러운 구간이 꽤 있었거든요. 믿고 싶은 걸 믿고, 착각하는 것에 태클 걸기 보다 그렇게 된 계기나 과정에서 부자연스러웠던 것 같네요. ^^;
 
심판의 날의 거장 열린책들 세계문학 271
레오 페루츠 지음, 신동화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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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문학의 대가로 알려진 레오 페루츠. 작가 소개를 보면 오스트리아 소설가인데 독일어권 문학의 거장이란다. 문득 짬뽕 문화권을 가진 루이스 세풀베다가 떠올랐는데, 이런 작가들의 세계관은 확실히 멀쩡함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레오 페루츠가 추구하는 환상문학은, 추리 형식에다 마술적 리얼리즘을 섞은 독특한 구성 방식이다. 초중반까진 현실감 있게 흘러가다가 교묘히 현재와 환상의 경계를 흩트려서 길을 헤매게 만든다. 라틴문학을 싫어하는 나에게 이런 스타일은 정말 모 아니면 도라서, 설정이 과하다 싶으면 집중력 감소로 흥미가 뚝 떨어져 버린다. 전에 읽었던 <9시에서 9시 사이>는 적당한 설정값으로 재밌게 읽었던 반면, <심판의 날의 거장>은 솔직히 무리수였다고 본다. 1923년 작품이니 그땐 신선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글쎄다.


간단한 내용에 비해 이중삼중의 액자소설이라 혼란스러울 수 있겠다. 유명한 궁정 배우가 총기 자살을 하고, 주인공 요슈 남작이 용의자로 지목된다. 현장에서 발견된 그의 파이프 담배가 증거였다.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음에도 배우의 아내와 과거 연인이었고, 배우가 자살할 만한 정보(거래은행의 파산)를 쥐고 있었다는 이유로 궁지에 몰리게 된다. 즉, 피해자의 아내를 흠모한 나머지 남편을 죽인 게 아니냐는 합리적 의심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주인공은 해명하거나 반박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아무런 관계도 없는 한 엔지니어가 이 사건을 풀겠다며 탐정을 자처한다. 제법 흥미로운 전개였는데 딱 여기까지만 재미있었고, 이다음부터는 내가 원하던 방향이 아니어서 그만 텐션이 죽어버렸다.


피해자는 죽기 전, 어느 해군 장교의 기묘한 자살 사건을 이야기했다. 그것만큼이나 배우의 죽음도 의문점 투성이였다. 그리고 얼마 뒤에, 피해자의 후배이자 약국 직원인 여성의 죽음도 등장한다. 이렇듯 해석불가한 죽음이 연달아 발생하자, 그 여성이 언급했던 ‘심판의 날의 거장‘의 단서를 찾아낸 엔지니어도 곧 죽고 만다. 엔지니어가 발견한 의문의 책에는, 어떤 묘약으로 악마의 환영을 본 예술가의 정신착란 이야기가 들어있었고, 뒤에 적힌 묘약의 제조법이 찢겨나가있었다. 아마도 거기 적힌 대로 따라 한 엔지니어가 죽었을 것이었다. 아아, 나는 이런 오컬트 식의 결말을 원한 게 아니었는데. 아직 못다 한 내용도 있고, 마지막에 반전 같지도 않은 반전이 남아있다만 이쯤 적으련다. 이런 건 내 스타일이 아니어유...


아쉬움과 별개로 재미가 없는 편은 아니었다. 겨우 두 작품 읽었을 뿐이지만, 이 분도 타고난 이야기꾼이란 걸 인정해야겠다. 나는 페루츠의 뚜렷한 개성보다도 서사의 독창성에 점수를 주고 싶다. 총 11권의 장편을 썼다는데 국내에는 겨우 3권만 나와있더라. 다른 작품들도 궁금한데 분위기를 보아하니 더 출간해 줄 것 같지도 않고. 갈수록 독서 인구가 줄고 있어서 돈 안되는 작품들은 점점 밀려날 테지. 과연 문학의 멸종은 현실이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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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4-08-21 05: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마술문학, 환상문학, 환타지문학, 장르문학 등의 쪽을 읽기 힘들어하는데 물감님 덕분에 진입장벽을 낮출 있을 것 같습니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문고라니 좋네요~다만, 열린책들 편집 스타일은 심히 괴롭습디다..행간/자간/여백에 왜 그리 인심이 박한지요..ㅎㅎ 물감님 리뷰를 계속 따라다닐 듯합니다~. 제 리뷰에 ‘좋아요‘도 감사~~

물감 2024-08-21 10:24   좋아요 0 | URL
아니 언제 이렇게 많은 댓글을 달아주셨답니까? 오랜만에 관심받는 거라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ㅋㅋㅋ 저로 인해 입문하신다면 다행이지만, 읽기 힘든 장르를 꼭 읽으실 것 까지야......
저도 열린책들 썩 안좋아합니다요. 특히 그놈의 된발음을 질색하기도 하고요. 딱히 얻어갈 게 없는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드림다 ㅋㅋㅋ
 
전몰자의 날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7-6 미치 랩 시리즈 5
빈스 플린 지음, 이영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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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프 걸렸을 때 읽으려고 계속 미루다가 어느덧 5년이나 지나버린 미치 랩 시리즈. 오랜만에 읽는데도 어색하지 않고 여전히 폭발적인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스릴러소설 마니아로써 여러 가지 시리즈물을 봐왔지만 그중에 가장 원탑은 빈스 플린의 미치 랩 시리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4편의 리뷰에 잔뜩 써뒀으니 참고해 주시고, 이번에도 촌각을 다투는 CIA 요원 미치 랩의 슈퍼 액션과 인내심 폭발을 다루고 있다. 너무 재밌어서 감탄사가 욕으로 나올 정도이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빈스 플린은 천재다.


전편에 이어서 미국은 여전히 이슬람 테러집단과 대치중이다. 파키스탄의 한 산골에 위치한 알카에다의 지휘본부를 급습하는 미치 랩과 CIA 비밀부대. 그곳에서 워싱턴을 표적 삼은 핵무기 폭파계획 지도를 발견하고 초 비상사태가 된다. 핵폭탄을 실은 배가 이틀 뒤에 미국에 도착 예정인데, 무려 4대의 배가 각기 다른 주의 항구로 향하고 있었다. 이 내용이 혹여 언론에 퍼졌다간 미국 전역이 난리가 날 것이고, 이에 동요한 적들은 폭파 일정을 앞당길 수도 있었다. 그런 이유들로 속전속결 판단과 승인이 필요한데, 대통령 곁에서 감놔라 배놔라 하는 인간들로 애꿎은 시간만 날리고 있었다. 핵폭탄이 굴러다니는데도 밥그릇 챙기기 바쁜 정치인들에게 열뻗친 미치 랩은 수차례 팩트와 쌍욕을 박아버린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그는 일전에 백악관을 공격한 테러범들에게서 대통령을 구해낸 영웅이었고, 이제는 전 국민이 떠받드는 화제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요 시리즈는 아주 그냥 안팎으로 사이다 액션을 보여준달까.


미치 랩은 강경하게 밀어붙여서 윗선의 승인들을 싹 다 생략하고, 어찌어찌해서 발견된 핵폭탄 하나를 처리하는 데에 성공한다. 부디 그거 하나였기를 바랐는데 이슬람 아지트에서는 워싱턴 지도만 있던 게 아니었고, 그것은 또 다른 폭탄이 있음을 의미했다. CIA는 이슬람 최고 지도자가 직접 미국에 행차한 것과 그의 끄나풀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지만 위치를 알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른다. 도대체 이슬람이 어떻게 핵무기를 손에 넣었나 조사했더니, 러시아의 핵폐기물 장소에 가서 실험 실패한 잔해들을 긁어모아 만든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 정도로 미국에 대한 증오의 뿌리가 깊었던 이슬람이었다.


미국은 이슬람을 근절하려 했고,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을 빼앗는 일에도 지지했다. 이슬람은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미국에 분개하여 워싱턴을 파괴하기로 했던 것. 그리하여 경제공황을 불러와 미국을 몰락시킨다는 혁명을 계획하였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정치인들과 관료들을 모조리 멸절시키기 위해, 그들이 전부 모이는 메모리얼 데이 헌정식 행사를 노리는 이슬람 전사들. 그 행사에 참여한 우방국 고위들도 함께 죽이려는 이슬람의 집념이 정말 대단했다. 무조건 한 쪽 편만 들 수가 없는 게 정치라지만, 알라의 이름으로 살생을 외쳐대는 이슬람은 아무리 봐도 납득이 안되는 법이다. 죽음을 요구하는 신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이번 편은 솔직히 스토리 자체는 평범하다. 그럼에도 내공 빵빵한 핵꿀잼을 보여주었는데, 미치 랩은 눈엣가시인 부패 정치인들과의 전쟁을 완전히 끝내버릴 생각이었다. 바로 CIA 대테러센터를 관두는 식으로 말이다. 절반은 진심이었지만 이 액션으로 자신을 붙잡는 대통령에게, 국가 안보와 전시상황에서 개인 명령 권한을 따내면서 다시 요원 활동을 이어나간다. 누군가의 말대로 미치 랩이 질서를 어지럽히는 짐승일지도 모르지만, 그의 추진력이 아니었다면 벌써 미국은 역사 저편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여튼 이번에도 대만족인데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은, 내가 지금껏 읽어본 책 중에서 가장 오탈자가 많은 책이었다. 진짜 이건 편집자를 잘라버려야 할 판이다. 한두 개라야 그러려니 할 텐데 이건 그 수준이 아니다. 아주 오래간만에 나를 예민 보스로 만든 RHK에게 핵폭탄을 선물해주고 싶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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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4-07-25 13: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탈자가 많은 책, 화가 나죠. 특히 아끼는 책이 그럴 때엔 더욱... 저도 경험한 적 있는 1인입니다.

물감 2024-07-25 14:00   좋아요 2 | URL
페크님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시죠?
오탈자 너무 거슬리네요. 저 원래 이정도로 예민하지 않은데 말이죠.
날씨 더운데 건강 조심하세요. 즐독하시고요^^

stella.K 2024-07-25 17: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난 5년간 아직 슬럼프는 오지 않았나 봅니다.
그렇다고 재밌는 책을 일부러 슬럼프를 기다리는 것도 지혜는 아니겠죠? ㅎㅎ
덕분에 모르는 시리즈 많이 알게 되네요.
표지가 미쿡스럽네요. 요즘 읽어도 실감날 것도 같고.

오탈자 한 두 개는 그냥 퍼펙트로 봐 줘야죠.
그런데 물감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면 심각한가 봅니다.
그래도 핵폭탄 선물은 자재해 주시고요.ㅋㅋ

물감 2024-07-25 17:25   좋아요 2 | URL
그러게요, 일부러 기다릴 필요가 없어요ㅋㅋㅋ냅다 읽어버려야해요😎
그나저나 번역자보다도 편집자 면상이 궁금해질 정도였습니다. 확그냥...
 
우아한 연인
에이모 토울스 지음, 김승욱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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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토울스의 독자 반열에 들어선다. 독서가들 사이에서 꽤나 핫했다던 토울스의 데뷔작 <우아한 연인>은 2011년 작품이지만 작품 배경 때문인지 한편의 고전문학을 읽는 기분이 들더랬다. 작품 특유의 잔잔하고도 품격 있는 분위기가 제법 근사해서 다들 좋아할만 했겠다 싶었다. 토울스도 40대 후반에 작가로 데뷔했다는데, 이렇게 나이 좀 먹고 등단한 작가들은 연륜이 있어서 그런가, 하나같이 분위기가 예술이더라. 지각생인 만큼 열일해 주시길 바랍니다요.


이브와 케이티, 두 친구 앞에 어느 날 팅커라는 남자가 등장한다. 화끈한 이브의 애정공세로 그를 낚아챘으나, 사실 팅커는 차분한 케이티에게 호감이 있었다. 그러다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셋 다 부상을 입고, 아름다운 이브의 얼굴은 심하게 손상된다. 운전자였던 팅커는 죄책감으로 이브를 평생 책임지기로 하는데, 이 일로 세 사람의 우정에 설명할 수 없는 거리감이 생겨난다. 여기까지가 출판사의 소개 글인데, 읽어보니까 막 의미심장한 계기는 아니었다. 이다음부터 이브와 팅커는 들쑥날쑥하고 케이티의 일인칭 시점으로 흘러가는, 얼추 케이티의 성장소설에 더 가깝지 않았나 싶다.


서머싯 몸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화자처럼, 케이티는 주인공이자 관찰자로써 뉴욕의 번영과 주변인들의 일상을 조명한다. 은행 중개인으로 잘나가는 팅커, 집에 손 벌리진 않지만 부잣집 딸인 이브. 그에 비해 흙수저인 케이티는 법률회사 직원으로 적당히 벌며 그럭저럭 자족하고 살아간다. 팅커와 인연을 맺은 덕분에, 케이티 또한 사교계에 발을 들이면서 유명 인사들을 소개받고 직장도 옮기고 더 좋은 집을 구하는 등, 제법 괜찮은 나날을 보내게 된다. 이 모든 배경에는 가진 게 없어도 당찼던 그녀의 진가를 알아본 주변과 지인들의 서포트가 있었는데, 아무리 소설적 허용이라지만 끌어당김의 법칙을 남발했다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


슬슬 약빨이 떨어지려 할 때쯤, 이브와 팅커의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한다. 팅커의 마음이 콩밭에 있다는 걸 안 이브는 프러포즈를 걷어찬 뒤에 멀리 떠나버린다. 반대로 케이티는 새로 알게 된 사교계 남성과의 만남으로 미래도 그려보고 자신에 대해서도 알아가는 시간을 가진다. 그렇지만 역시 케이티에게도 팅커의 존재는 특별했던지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고야 만다. 제 본심을 찾고 이제 좀 잘해볼까 하는데, 거짓으로 쌓아 올린 팅커의 배경이 발각되자 바로 그냥 불꽃 싸다구를 날려버리는 그녀. 그러게, 사랑은 아무나 하나.


예측불허한 삶과 세월 속에서 정답과 오답의 퍼즐을 맞춰보는 케이티. 용감한 사람들은 다 떠나가고, 자신처럼 틀에 박혀서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이들을 떠올린다. 또한 누구나가 용서를 구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의 의미도 곱씹어 본다.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고 모습을 감춘 팅커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독자마다 관전 포인트가 다를 텐데, 나는 똑 부러진 주인공이 자신의 미성숙함을 발견해나가는 데에 주목하였다. 엄밀히 보면 사랑도 메인 테마가 아니고, 우정을 그리는 내용도 아니었다. 원제가 ‘정중함의 법칙‘임을 생각해 볼 때, 예의와 교양 있는 케이티가 어째서 팅커의 정중함의 가면을 보고 기겁했는지를 따져봐야 하겠다. 아무튼 잘 읽었고 다른 작품들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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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4-07-20 09: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분위기가 예술~ 이란 말씀에 동감입니다!^^

물감 2024-07-21 08:25   좋아요 2 | URL
진짜 그렇죠?? 머리에 스쳐가는 작가들마다 분위기가 있더라고요 ㅎㅎㅎ

자목련 2024-07-25 09: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모스크바의 신사>가 좋아서 이 책도 읽고 싶은 목록에 있는데. 목록에서 나와야 할 텐데 ㅎㅎ

물감 2024-07-25 09:36   좋아요 1 | URL
모스크바 먼저 읽으셨군요. 저는 최대한 출간순서대로 읽어보려고 합니다 ㅋㅋ
모스크바랑, 링컨하이웨이도 준비해놨어요. 이제 달리기만 하면 됩니다 ^^

이 책은 읽을 땐 몰랐는데, 나중에 남들이 현대판 개츠비 같다고 해서 좀 비슷하게 느껴지더라고요. 개인적으로 개츠비보단 재밌었습니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