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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얼 헤이스 두 번 죽다 ㅣ 모중석 스릴러 클럽 34
마커스 세이키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13년 9월
평점 :
품절
정신과 의사 양재진, 양재웅이 말하길, 인간은 모호한 정보 즉 정보의 부재를 견디지 못한단다. 자아의 강도가 낮을수록 판단하고 결정짓는 게 빠르다는 것이다. 이 같은 특징은 극단적인 성향을 지닌 일명 ‘빠‘들에게서 쉽게 볼 수 있다. 정치관여, 종교활동, 사회운동, 철학논쟁, 심지어 MBTI 과몰입자까지도 일컫는다. 확증편향에 빠진 찬양론자들은 여론에 휩쓸리기 쉽고, 설령 확실한 정보와 근거가 있다 해도 이미 프레임에 갇혔기 때문에 온전한 분별력을 지녔다고 보긴 어렵다. 그건 마치 갓 태어난 새끼 사슴을 잡아먹는 어미 사자를 비난함과 같다. 사냥에 실패하면 새끼 사자들이 굶는다는 생각을 못 하기 때문에. 정답이 없는 문제를 정의하는 게 ‘앎‘이라고 착각해선 안된다. 이처럼 프레임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을 소개하겠다. 이름하야, 대니얼 헤이스 두 번 죽다!
해변에서 깨어난 한 남자.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인지 전혀 기억나질 않는다. 근처에 있던 BMW를 끌고 아무 숙박지나 들어갔는데 경찰이 와서 체포하려는 게 아닌가. 영문도 모른 채 도주하던 그는, 자신이 아내를 살해한 용의자로 지명되었음을 알게 된다. 살인은커녕 집과 아내에 대한 기억조차 없었지만 사태를 알기 위해 몸이 기억하는 대로 집을 찾아가 본다. 유명 배우였던 아내는 누군가에게 쫓기듯 운전하다 벼랑 너머로 추락한 것으로 돼있었다. 억울하지만 기억을 잃어버린 지금, 혹시 몰라 당분간 몸을 숨기고 보자는 대니얼. 한편 두 명의 괴인이 그를 노리고 추격해온다. 대체 그는 어떤 사건에 휘말렸었고, 무얼 하다 기억을 잃어버린 것일까.
오래간만에 보는 클래식한 스릴러였다. 근래 출간된 스릴러들은 소재며 수사며 여러모로 너무 세련되어져서 좀 질리는 맛이 있다. 반면 옛 작품들은 교과서대로 쓰여서 뻔하긴 하지만 그만큼 실패가 낮고 호불호도 잘 없다. 현대 감각에 피로도가 쌓일수록 사람들은 옛 것을 그리워한다. 이제 와 레트로 패션이 유행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따라서 요즘 읽을 책이 없다거나 슬럼프가 온 독서가들은 나처럼 옛 작품들을 둘러보는 걸 권한다. 다시 책 얘기로 돌아오면, 먼저 기억상실이 매우 진부한 설정이란 걸 작가가 모를 리 없다. 그렇기에 주인공을 국민의 적으로 간주하여 심각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그가 쫓겨 다니게 된 이유를 감추어 독자가 군말 없이 따라오게 하는 등 외부 설정에 많은 힘을 쏟았다. 이런 데서 작가의 영리함이 잘 드러난다. 보통 어느 정도 진도가 나가면 의문이 풀리거나 실마리가 제공되어야 하는데, 이 작품은 나중의 나중까지도 의문을 던지고 있다. 과연 끝까지 의심하게 만들라는 스릴러소설의 규칙을 철저히 지킨 프로페셔널한 작가다. ‘제2의 데니스 루헤인‘으로 불리던데, 내 눈에는 세이키가 루헤인보다 훨씬 더 나아보인다.
자, 그럼 앞서 말한 프레임에 대해 얘기해 보자. 이제 막 깨어난 대니얼은 범죄자 취급에 억울해하면서도 스스로를 범죄자라 가정하고 행동하기 시작한다. 기억을 잃었다한들 떳떳하게 수사에 협조하고 사태를 바로잡으면 될 터인데, 뭐가 자꾸 켕기는 건지 도망만 다녀서 경찰의 의심에 확신만 심어주었다. 진실의 여부와 상관없이 범죄자처럼 행동하다 보니 사고 회로 또한 이상해져버린 것이다. 도움 청할 데도 없으면서 언제까지 이렇게 숨어지낼 건가 보는 내내 답답했지만, 대니얼은 희미하게 찾아드는 기억의 파편에 운명을 걸고자 했다. 하여 자기 집을 도둑처럼 드나들어 노트북을 훔치고 그간의 정보를 파악한다. 여기서 자신의 담당 변호사를 알게 돼 찾아가지만, 한발 먼저 변호사를 다녀간 괴인의 소식을 듣게 된다. 아내가 죽고, 자신이 해변에 버려져 기억을 잃고, 경찰의 사냥감이 된 이 모든 배경에는 누군가가 있다는 걸 알아차린다. 그렇다 해도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길이 없는데 이제 뭘 어쩌나 싶을 때쯤에 등장하는 두 번째 괴인. 심장 떨어지게도 그의 죽은 아내였다.
본의 아니게 스포 해서 미안하지만 리뷰를 위해 어쩔 수 없다. 근데 읽어보시면 아내가 살아있다는 게 다 티가 난다. 아무튼 두 번째 프레임은 아내의 사망 소식이다. 아내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음에도 경찰은 국민과 대니얼에게 사망했다는 거짓 프레임을 씌웠다. 그 후 종적을 감춘 대니얼이 자연스레 범인이 되게끔 마녀사냥을 하였다. 그리하여 대니얼은 여태껏 죽은 줄로 알았던 아내가 나타난 것도 놀랐지만, 이 모든 연극을 꾸민 게 아내였다는 사실에 더 놀란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은 그녀를 탓하기도 전에 앞뒤 사정을 듣게 된 주인공. 과거 연예계에 막 들어온 그녀는 누군가에게 약점을 잡혔었고, 그는 지금도 아내에게 거액을 요구하는 중이었다. 약점이고 뭐고 당당히 경찰에 신고해서 누명을 벗고 싶은 대니얼과, 뭣 때문인지 한사코 반대하는 그의 아내. 괴인이 보통 무서운 게 아니긴 했지만, 아내의 태도에는 그 이상의 것이 있었다. 어쩜 이렇게 단타를 연속으로 날려대는지, 세이키도 참 대단한 이야기꾼이다. 내놓은 작품마다 영화 판권이 팔렸다고 하니 말 다 했다.
대니얼이 기억을 잃게 된 경위와, 괴인과의 심리전과, 커질 대로 커져버린 판국의 결말은 직접 읽어보시길 바란다. 뒷심이 살짝 부족했으나 전체적으로 만족스러운 작품이다. 리뷰하지 않은 후반부에도 아내에 대한, 또 자신에 대한 프레임이 연거푸 나온다. 기억상실의 소재를 통해 작가는, 각자의 생각과 판단에 얼마나 많은 허점이 있는지를 지적한다. 사람은 저만의 프레임에 갇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정답이라 믿어버린다. 그렇게 긴 시간 함께했던 진실에 흠집이라도 생긴다면 목숨마저 내버리기도 한다. 자살하고자 마음먹었던 이 책의 주인공처럼. 작가는 지금까지의 선택들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는 다소 뻔한 얘기를 해준다. 그러니 잘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말이겠지만, 굳이 선택하지 않아도 될 일까지 선택하는 극단적인 성향은 되지 말자고 나름대로 정리해 본다. MBTI 과몰입도 이제 그만해야겠다. 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