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큰 윈도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2-8 링컨 라임 시리즈 8
제프리 디버 지음, 유소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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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 타임용을 찾다가 고른 디버의 작품이다. 요 시리즈를 다 읽겠다는 다짐을 몇 년째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디버의 작품들은 기본 500쪽 이상인데, 느긋하게 읽어도 이삼일 이면 완독할 정도의 속도감을 지녔다. 이번에도 명불허전 페이지터너임을 증명했으나 솔직히 디버치고는 평범하다고 느꼈던 작품이었다. 디버를 읽어본 사람만이 공감할 아이러니라 해두자.


8편의 빌런은 웹상에 등록된 개인정보를 이용하여 범죄를 저지르는 악질 중의 악질이다. 타깃을 죽인 뒤 피해자가 사용하는 제품을 알아내, 무고한 사람의 집에다 그 물건들을 두어서 범인으로 누명을 씌운다. 또는 타깃의 신용 정보를 도용하여 빚쟁이로 만들어서 나락을 보내버리기도 한다. 피해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읽고 조종하는 그는 전지전능한 신이나 다름없었는데, 이 엄청난 설정을 적극 활용하는 장면은 얼마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이 시리즈만의 묘미인 빌런과의 대결이 빈약하게 느껴진다. 물론 링컨 수사팀은 정신없이 돌아갔지만.


작가는 그 빈약함을 메꾸고자 링컨의 개인사를 집어넣었다. 링컨의 절친이자 사촌인 아서가 살인 용의자로 지목되어 구치소에 잡혀간다. 아서의 아내에게 그 소식을 들은 링컨의 마음은 착잡하다. 한참 친하게 지내던 대학시절, 사촌이 링컨의 애인을 뺏은 후로 쭉 손절해왔기 때문에. 그러나 링컨의 감지 센서는 증거가 명백한 이 사건에 이상함을 느껴, 사사로운 감정과 별개로 수사에 흥미를 갖게 된다. 예상대로 유사 사건들이 몇 건 더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거대한 데이터 마이닝 기업이 엮여있었다. 라임은 모든 데이터의 접근 권한을 가진 기업의 직원 중 하나를 용의자로 보았고, 즉시 대상을 물색하여 수사에 들어간다. 늘 그렇듯 전부 허탕이었고, 한쪽에서는 또 다른 범죄가 발생하여 수사에 혼선을 주었다. 역시 주인공들은 굴리는 맛이 있어야 한다.


이 외에 라임의 파트너인 아멜리아 색스의 개인사도 나온다. 그녀가 딸처럼 아끼고 보호하는 여학생이 있는데, 유부남과 사랑에 빠진 데다 사건까지 휘말려서 아주 그냥 속이 타들어만 간다. 소녀로 인해 생겨나는 모정은, 형사라는 거친 직업에서 엄마라는 평범한 삶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소망이 커져갈수록 얼른 링컨과 합쳐서 심신의 안정을 얻고 싶어 함이 느껴진다. 허나 애석하게도 링컨의 고장 난 신체는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인다. 나이 많은 유부남과의 사랑과, 전신마비 장애인과의 사랑 중 어느 쪽이 더 참담할까. 정말이지 이번 편은 메인 사건보다 서브 내용들이 더 흥미롭다.


제프리 디버는 온라인 범죄의 작품을 세 권이나 출간했다. 링컨 라임 시리즈의 <브로큰 윈도>, 캐트린 댄스 시리즈의 <도로변 십자가>, 스탠드 얼론인 <블루 노웨어>인데, 같은 소재를 여러 번 쓴다는 건 그만큼 현대사회에서 개인정보 노출의 위험성을 강조하려는 뜻이 아닐까 한다. <브로큰 윈도>는 익히 들어온 ‘깨진 유리창의 법칙‘으로써, 사소한 문제를 방치했다가 훗날에 큰 범죄로 이어진다는 범죄 심리학 이론이다. 그 말대로 사소한 개인 정보들이 어느 한순간에 나락 가게끔 만드는 빌미가 되기도 한다. 특히나 요즘같이 SNS나 블로그가 대중화된 시점에서는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경고를 백날 해봤자 어찌할 수도 없는 현실 아닌가. 사는 동안 운이 따라주길 바라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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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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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여자친구를 사귄 건 고등학교 3학년에 올라가면서였다. 상대는 다른 학교의 두 살 연하였는데, 너도나도 공부에 매진하던 그 시기를 나는 연애하느라 정신없이 보내었다. 그러다 점점 다투는 일이 늘어났는데 이유인즉슨 그 애의 주변에는 항상 남자들이 있었다. 그렇게 나랑 싸우고 풀고를 반복하던 그 애는 어느새 나의 절친하고 눈이 맞아버렸다. 극소심했던 나는 주먹다짐 대신 싸이월드에다가 그들에 대한 맹비난의 글로 도배를 하였다. 우리를 모르는 제3자가 읽어도 욕 나오지 않을 수 없게끔 정성을 다해 저격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나와 주변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몇 년 뒤에는 결혼까지 하여 또다시 충격과 증오를 안겨주었다. 그 시절 나는 매일같이 거울 앞에 서서 온갖 저주를 퍼부었던 게 기억 난다. 그로부터 3년 뒤, 지인들이 그들의 이혼 소식을 들려주었다. 여자 쪽의 바람이었고, 그 내막은 여기에 담지 못할 만큼 추잡한 것이었다. 나는 수년간의 저주가 이루어진 기쁨에서 오는 복잡 미묘함을 꽤 오랫동안 느껴야 했다.


평소 사적인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편이나, 너무 내 것과 비슷하여 말하지 않을 수가 없는 작품을 읽었다. 반스 행님의 대표작인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오래 묵혀둔 내 기억의 파편들을 사정없이 끄집어내어 이 야심한 밤에 나를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주인공의 전 여자친구 V가 절친 A와 사귀게 되자 이들에게 저주의 편지를 아주 정성스레 써주었던 것이다. 이후 영문을 모르는 A의 자살 소식이 들려오고, 그렇게 40년이 지나버린다. 이제 노인이 된 주인공 앞으로 V의 엄마가 남긴 소정의 돈과 A의 일기장이 상속된다. 그러나 V는 A의 일기장을 가로채어 절대 넘겨주지 않는다. 하여 토니는 V와 연락하고 만남을 가지지만, 그럴수록 돌아오는 것은 ‘여전히 너는 감을 전혀 못 잡는다‘라는 핀잔뿐이다. 그녀는 과거 토니가 남긴 저주의 편지를 고스란히 돌려준다. 그는 자신이 썼던 저주의 내용대로 일어난 결과를 목도하며 기억의 왜곡과 균열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자연스레 친구들과 멀어지면서 직장을 다니고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살다가 은퇴한, 남들 다 그렇듯 평범한 인생 대로를 밟아온 주인공. 그의 기억 속에 A는 언제나 훌륭한 철학자이자 진실의 탐구자로써 남아있었다. 그래서 A의 자살 또한 자신들과 다르게 논리적 사고로 도출된 행동이라 보았다. 그러니까 자신은 A를 좋게만 평가하고 있었고 그건 틀림없는 사실일진대,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나는 이 낯 뜨거운 편지가 정녕 제 손으로 썼다는 게 얼마나 미치게 만들던지. 아무리 미화된 기억이라지만 긴긴 세월 동안 굳건히 믿고 지켜온 기억이 한순간에 부정당했으니 그 밖의 기억들도 안심할 수가 없게 돼버렸다. 그렇다면 나에 대한 남들의 인식 또한 내가 알던 것과 크게 다를지도 모른다는 말이 된다. 이것이 삶의 정당성을 외면하고 편한 길을 택한 결과였을까. 일찍 생을 마감한 A가 맞았고, 여태까지 살아남은 토니는 틀린 것일까.


누구나 그렇게 간단히 짐작하면서 살아가지 않는가. 예를 들면, 기억이란 사건과 시간을 합친 것과 동등하다고. ...또한 시간이 정착제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용해제에 가깝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백히 알아야만 한다. 그러나 이렇게 믿는다 한들 뭔가가 편리해지지도 않고, 뭔가에 소용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인생을 순탄하게 살아가는 데는 아무 도움이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실을 무시해버린다.

111p - 112p

이혼하고도 종종 토니를 만나주는 전처에게 사정을 말해본다. 전처는 자신을 명쾌한 여자로, V는 미스터리한 여자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남자들은 어느 한쪽의 매력에 빠진다고 했다. 명쾌함을 골랐던 주인공은 뒤늦게 미스터리에 끌리는 중이었다. 어느새 일기장을 돌려받는 문제보다 V의 환심을 사고 자신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으려는 일에 몰두하는 토니. 그래서 계속 차갑게 구는 V의 태도는 관심 밖이었고, 오로지 자신의 목적에만 매달리고 있었다. 사실 그녀의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았다. 언제나 비밀스런 구석이 있었고, 좀처럼 답을 알려주지 않았으며, 수준을 따라오지 못하는 토니를 경멸하였다. 그런 V의 성격을 알고 있기에 별 대수롭지 않아 했으나, 여전히 감을 못 잡는다는 핀잔을 듣다 보니 내가 알던 그녀의 이미지가 어쩌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드는 것이다. 또다시 전처를 찾아가 조언을 구해보지만, 이제 당신은 혼자야 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그제서야 전처도, 전여친도 돌아서게 만든 원인이 나였음을 어렴풋이 자각하는 토니 영감님. 대체 그의 기억들은 어디까지 희석되어 있던 것인지.


카뮈와 니체를 읽는다던 A의 독서 취향에서 이미 그의 죽음은 예견되어 있었다. 윤리적 결정에 따른 행동을 몸소 보여준 참 대단했던 친구. 자신보다 A에게 끌렸던 전여친이 이해가 안 될 것도 없었으나, 친구와의 비교로 심란해진 토니의 화살은 어째서인지 V를 향하고만 있었다. 사실 이제 와서 지난 연인의 속을 뒤집고 치근덕대는 건 추잡한 복수심 따위가 아닌 그녀의 경멸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지금이라도 그녀가 자신을 잘못 보고 오해했던 것으로 돌려놓고 싶어 했다. 그러나 자신이 저주했던 이의 불행한 말로를 어떻게 바꿀 수 있으랴. 틀어져 버린 사이를 무슨 수로 만회할 수 있으랴. 이것은 명쾌하든 미스터리하든 마찬가지일 테다. 토니가 어떻게든 문제를 풀고 나름의 답을 내려보는데, 정작 그녀의 경멸은 전혀 다른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토록 둔하고 눈치 없는 주인공도 결국 눈치챘던데, 왜 나는 다 읽고도 몰라서 남들의 리뷰를 읽고 이해했는지. 이거야 원, 나야말로 감을 못 잡는 놈이었다.


다시 보니까 참 역설적인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좋았던 기억들은 오물이 잔뜩 묻어있고, 외면했던 기억들엔 정답이 숨어있었으니. 나라고 다를 게 뭐 있을까. 나 같은 경우에는 누가 보더라도 상대방의 100% 과실이지만, 그게 과연 수년 동안 저주해가며 감정 상할만한 일이었나 싶다. 이제는 너무 오래 지나버린 그 사건에서 혹여 내가 간과한 문제나 일들이 있었을까 봐 걱정도 든다. 너무 강렬했던 감정과 기억들은 영영히 박제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끄집어내보니 많이 흐려져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외에도 얼마나 많은 기억들이 흩어져 날아가고 있을까. 그것들을 잡아야 할지, 내버려 두어야 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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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4-01-18 1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물감님의 고3 시절 연애담, 완전 소설이군요?
역시 한 번만 바람피우는 사람은 없네요. 속이 다 후련...ㅋ
사적인 이야기 앞으로도 종종 해주셨음 좋겠어요. 너무 재밌어요!
저에게는 그저 그런 소설이었는데 물감님의 분석에 재독하고 싶네요.

물감 2024-01-18 12:00   좋아요 1 | URL
으하하 제가 이같은 굴곡들이 좀 많았어요. 그래서 지금의 냉소적인 모습이 되었거든요. 보다시피 좋은 추억감이 못되어서 잘 꺼내지 않으려는 것도 있고요ㅋㅋ 기회되면 가끔씩 오픈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잠자냥 2024-01-18 13: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극소심했던 나는 주먹다짐 대신 싸이월드에다가 그들에 대한 맹비난의 글로 도배를 하였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첫문단 진짜 재밌네요 ㅋㅋㅋㅋㅋㅋㅋ

물감 2024-01-18 13:31   좋아요 1 | URL
역시 킬 포인트를 아시는군요 ㅋㅋㅋㅋ 따지고 보면 저의 필력(?)은 그때부터 생겨난 듯 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지하에서 쓴 수기 창비세계문학 10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근식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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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이라는 사회 용어가 있다. 어느 집단이든지 간에 또라이가 꼭 있어서 생겨난 말인데, 요즘은 빌런이라는 표현으로 순화해서 불리는 중이다. 지금 다니는 직장에도 그 빌런이 계시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믹서기에 넣어 갈아버려도 시원찮을 저런 인간조차 문학 속의 인물로 배정된다면 하나의 훌륭한 서사가 탄생한단 말이지. 그렇담 누구의 어떤 삶이든지 간에 다 보기 나름이라는 얘긴가. <지하에서 쓴 수기>를 읽다가 곁길로 뻗어나간 생각을 적어봤다. 이번 주인공은 분노조절장애를 가진 자의식 과잉의 또라이시다. 현실에서는 조금도 관심 주지 않을 인간인데, 왜 이같은 비호감도 책으로 만나면 잠자코 지켜보는 게 가능할까. 문학의 힘이란.


이것은 40년간의 지하 생활로 잡생각의 가지들이 마구 뻗어나갔던 어느 괴짜의 독백록이다. 1부에서는 웬 헛소리가 메들리로 나오길래 또 잘못 걸렸나 싶었다. 근데 읽다 보니 어라, 의외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가 아닌 것이다. ‘나‘는 이런저런 담론의 각 장마다 수시로 트집을 잡고 불만을 표하는데, 그의 발언들은 살다가 한 번씩 삐딱해졌을 때에 들 법한 생각이어서 막 언짢거나 거부감이 생길 정도는 아니었다. 예를 들어 ‘나‘는 남들에게 존경받기를 원하지만 그럴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고 이렇게 쓴소리나 내뱉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나‘를 경멸하고 내 말에 반박한다면 철저히 응징하겠단다. 이렇듯 심보가 고약하고 저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지만 개인의 욕구가 타인의 방향과 다른 것뿐이다. 그러니까 사회적 통념에서 좋고 나쁨은 있어도, 맞고 틀림은 없음을 반복해서 설명하고 있다. 다소 표현이 거칠어서 그렇지, 은근히 철학적이고 사색적인 작품이다.


난해하다고 알려진 작품이던데, 나는 1부에서 보여준 난해함보다 2부의 난해함이 좀 더 거시기했다. 2부는 이야기 식으로 바뀌어서 좋았다만, ‘나‘의 멘탈이 극과 극을 오가느라 따라잡기에 버거웠다. ‘나‘는 싫어하는 동창의 송별식을 억지로 따라와 물을 흐려놓는다. 친구들의 비난에도 자신의 애티튜드를 고집하는 ‘나‘는 돌아서서 후회했다가 다시 욱하는 이 태세 전환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지하공간에 오래 갇혀서 맛이 간 줄 알았더니 실제 지하가 아닌 의식의 음지를 가리키는 말이란다. 원래 남들과 잘 못 어울리는 성격의 ‘나‘는 스스로를 낭만주의자라 일컫는다. 그 특성이란 모든 걸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뚜렷하게 바라보며- 아름답고 고상한 것을 내적으로 지켜내어 자신을 완전하게 보존하는 것이다(80p). 따라서 자신의 확고한 믿음과 판단에 관하여는 절대 사수해야만 했던 건데, 혹여 그 똥고집들이 신념에서 비롯됐다면 모를까, 제 성정을 못 참고 막 나가니까 어이가 없는 거다.


‘나‘의 난해함은 계속된다. 이제 막 직업여성이 된 리자를 만난 자리에서 그는 참된 삶과 사랑을 읊어가며 인생 대선배처럼 행동하기 시작한다. 사랑이 어떻고, 결혼은 어떻고, 부부와 자식 관계는 어떠하며... 온갖 청산유수의 훈계를 스트레이트로 쏟아내는데, 바로 이전까지 친구들에게 독기를 품고 칼을 갈던 상황에서 갑자기 이런 장면으로 이어져 도무지 맥락이 없었다랄까. 그렇게 헤어지고 ‘나‘의 집을 찾아온 리자는 그의 분노조절장애를 직접 보고서 당황한다. 자신의 가난과 허세를 들켜버린 ‘나‘는 아무 잘못도 없는 어린 친구에게 괜한 자존심을 부려댄다. 지가 상처 줬으면서 수치와 모욕을 받았다는 건 또 무슨 사고방식일까. 사회활동이 없거나 인간관계가 끊어진 사람이 자기 생각에 갇혀버리면 이렇게나 위험하다. 이해 못 할 것도 없지만 진짜 참 나이 먹고 뭣들 하는 짓거리인지. 하지만 이것 또한 앞서 말한 옳고 그름이란 과연 존재하는가를 곱씹어 보게 해준다는 사실. 그래도 말야, 존경받고 싶다면 그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 아무래도 좋다지만 똥으로 메주를 쑤어선 안되는 겁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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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4-01-13 12: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을 좋아하렵니다. 재독하려고 사 놓았는데 재독 못 들어갔으나 워낙 정독하여 다 기억이 나는 소설입니다. 어떤 행동에서는 마치 나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도 선생을 왜 심리학자라고 하는지 알겠더라고요.ㅋㅋ

물감 2024-01-13 21:12   좋아요 2 | URL
여러 작가들이 인간의 추한 내면을 묘사할 때에 점잖고 세련된 방식을 택하는 반면에, 도 슨생은 그런거 없이 노빠꾸라서 참신하고 좋더라고요. 이 작품에서도 좋았던 구간이 많았는데 워낙 주인공의 감정 기복이 심해서 말이죠 ㅋㅋㅋㅋ 페크님께서 제 몫까지 좋아해주셔요....
올해에는 도스토옙스키를 독파해볼 생각입니다. 몇몇 작품은 분량의 압박이 엄청나더라고요. 그래도 작가가 한 가독성 하니까 해볼만할듯 싶어요 ㅋㅋㅋ

페크pek0501 2024-01-17 14:15   좋아요 1 | URL
도 선생의 작품으로 <죄와 벌>을 추천합니다.
저에겐 도 선생이 천재임을 인정하게 된 소설이었어요.

물감 2024-01-17 14:49   좋아요 0 | URL
1분기 안에 죄와벌 스타트 할 계획입니다. 가장 두껍다는 지만지 번역본으로요ㅋㅋㅋ

coolcat329 2024-01-13 23: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1부는 참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2부는 또 웃기더라구요. ㅋㅋ
현실에서 만나면 정말 싫을 거 같은데, 소설 속에서 만나는 이상한 사람들은 이해하고 싶고 한편으론 정이 가는 게 신기해요.
또라이 ㅋㅋㅋ 딱 맞는 표현이에요.
근데 그게 또 인간의 한 특징이기도 한 거 같습니다.

물감 2024-01-14 08:00   좋아요 1 | URL
현실에서 멀리하던 연구대상들을 엮이지 않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니까 보게 된다...가 제 결론입니다ㅋㅋ과연 쟤네들은 무슨 생각으로 사는가가 공개되는 셈이니깐요ㅋㅋㅋㅋ

자목련 2024-01-15 12: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소설 읽다가 앞에서 진도가 안 나가서 포기했어요.

물감 2024-01-15 12:45   좋아요 1 | URL
1부는 건너 뛰고 2부만 읽어도 손색없을 작품입니다(제가 보기엔).
1부와 2부가 그렇게 연관성 있다고 느껴지지 않아서요.
그나마 분량이 적은 게 다행이었지, 300 쪽 이상이었으면 저였어도...

stella.K 2024-01-17 1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건 딴 얘긴데 또라이 제조기는 천명관이 우리나라에선 최고더만요.
그건 장편소설에서 빛나죠. 드러운데 재밌어서 키득거리며 읽게 됩니다. ㅋㅋ

물감 2024-01-18 07:08   좋아요 1 | URL
<고래>,<고령화가족> 딱 두 권 읽어봤는데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ㅋㅋㅋ
근데 <고래> 말고는 대부분 좀 약하다는 평을 어딘가 들었어서 손이 잘 안갔거든요. 다른 책들도 볼만하시던가요??ㅋㅋ

stella.K 2024-01-18 10:39   좋아요 1 | URL
고래가 최고긴 하죠. 근데 나의 삼촌 브루스 리도 못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감님은 부르스 리만 읽으시면 주요작은 다 읽으시는 셈은 아닐까 싶기도하네요. 단편은 별로고 작가는 장편에 강한 것 같아요.

물감 2024-01-18 10:57   좋아요 1 | URL
그렇다면 <부르스 리>까지는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추천 감사합니다🙂🙂🙂
 
밤 끝으로의 여행
루이 훼르디낭 쎌린느 지음, 이형식 옮김 / 최측의농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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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연말연시도 다 지나갔다. 예전과 달리 이제는 기념한답시고 기록 같은 걸 남길 마음이 들지 않는다. 사실 되돌아봤자 더 나은 내가 될 것도 아니고, 이것저것 의미를 부여한들 오늘의 나와 어제의 내가 달라진 점도 없다. 그저 하루하루를 묵묵히 견디며 나아갈 뿐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새해가 반가운 사람이 과연 있기는 할까 싶은. 한 친구가 말하길, 마음에 빈 공간이 느껴지는데 채우는 방법을 잘 모르겠다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나는 채움이 아니라 비움을 추구하라고 답해주었다. 채움에는 만족이 없고 끝없는 갈증만 있다. 반면에 비움은 윤택하고 똑 부러진 삶과 정신을 갖게 한다. 풀 소유와 도파민에 쩌들은 현대인들은 이 비움의 미학을 무슨 애늙은이 취향처럼 생각하는데, 이것은 성인군자처럼 경건하게 살아가는 핵노잼 라이프를 말하는 게 아니다. 쉽게 말하면 주식하는 사람의 멘탈 관리와도 같은 이치이다. 대박 나고픈 욕심으로 주식을 샀지만 내 주식이 오를 욕심을 버려야만 한다는 모순이랄까. 그러니까 부정 에너지의 최소화라고 보면 되겠다. 이 훈련이 숙달되면 감정의 기복이 줄어들어 큰 부정은 쉬이 넘기고, 작은 긍정에도 넘치는 만족을 느낄 수 있다. 부족한 내 글들을 꾸준히 찾아주시는 소수의 분들에게 뭐든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 적어봤다.


<밤 끝으로의 여행>은 12월 중순부터 시작하여 이제야 겨우 완독하였다. 게을러진 핑계를 대자면 연말은 바빴고 연초에는 감기로 고생했다. 무엇보다도 더럽게 진도가 안 나가는 이번 책은 나님이 취약한 의식의 흐름 기법이었다. 다행히 못 읽겠다 할 만큼 횡설수설은 아니었지만 두 번 다신 읽고 싶지가 않다. 솔직히 내용마저 그냥저냥이었는데 왜 중도 하차를 안 했냐면, 이 책이 해외 투표 Top 50권 안에 든다고 해서였다. 첨 보는 작가에다 제목도 뭔가 있어 보이길래 마음을 가다듬고 초 집중해 보았지만, 이내 진지하게 임하는 건 미련한 짓임을 깨달으며 늘 그랬듯 읽었다는 데에 의의를 둔다.


짧게 요약해 보면, 의대생 바르다뮈가 자진 입대하여 1차 대전을 치른다. 그러다 전쟁 후유증으로 정신병원에 들어갔다 퇴원 후에 아프리카로 건너가 식민지 생활을 한다. 그곳을 탈출하여 동경하던 미국에 갔다가 실망한 그는 본국인 프랑스로 돌아와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로 살아간다는 내용이다. 작가의 데뷔작인 만큼 자전적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분도 꽤나 복잡하고 정신없이 살았나 보더라. 자주 느끼는 거지만 전쟁을 겪은 작가들의 글은 아무리 잘 썼대도 군데군데 나사 빠진 느낌과 횡설수설하는 기분을 갖게 만든다. 이젠 뭐 그러려니 한다. 그나저나 이 작품에 별다른 감흥을 받지 못한지라 어떻게 리뷰하면 좋을지 모르겠디야.


흐름은 크게 의사가 되기 전과 후로 나뉜다. 전반전에는 바르다뮈가 가는 곳마다 불운이 따라다님을 볼 수 있는데, 삶이 그를 포기한 것인지 아니면 끝까지 괴롭힐 작정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온 세상이 주인공을 꼭 무너뜨릴 작정이라도 한 듯했는데 개인에게 어떤 악감정을 품어서가 아니라, 불필요한 소모품이다 싶으면 일찌감치 갈아치우려는 냉담한 분위기로 느껴졌다. 여하튼 거친 세상을 쟁취할 의욕을 상실한 바르다뮈는 삶의 시련을 피하고자 계속해서 밤 속으로 도주한다. 그러나 어딜 가든 소용이 없었다. 아프리카에서는 대자연의 위협이 공포였고, 미국에서는 타인의 무관심이 공포로 닥쳐왔다. 그렇게 도망만 다니던 그가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학업을 마치고 의사가 되었다는 건, 어느 정도 현실과 타협하고 공포를 받아들였다는 게 아닐까. 오래전에 생기를 잃은 바르다뮈는 환자들을 상대하면서도 연민이나 동정 같은 감정을 갖지 못했다. 직업은 가졌지만 여전히 가난했던 그는 끊임없이 밤의 세계를 그리워했다. 대낮에 사는 사람들은 밤에 속한 사람을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거라면서.


작중에는 서브 주인공인 로뱅송이 나온다. 이 친구는 바르다뮈가 가는 곳마다 잠깐씩 등장했다가 훗날에 줄곧 붙어지내는데, 주인공과 다르게 기분파에다 본능적인 성격이다. 아마도 작가가 답답했던 본인의 어떤 틀을 깨고자 하여 로뱅송을 만들었지 싶다. 똑같이 전쟁을 겪었지만 로뱅송에게는 우울함이나 자기 연민 따위가 없었다. 미래나 계획도 없긴 했지만. 여하튼 희로애락을 잃어버린 주인공에게 커다란 자극제였던 로뱅송은, 좋든 싫든 바르다뮈의 잿빛 인생을 조금씩 변화시켜주었다. 그가 하는 거라곤 어떤 여자와 만나 연애질을 하고 사랑싸움을 하는 게 전부인데, 그로 인해 주인공의 다 죽어가던 감정들이 꿈틀대는 걸 보면 역시 이대로 살다 죽으리란 법은 없구나 하게 된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런 메시지를 주는 내용이 아니다. 읽는 내내 느껴지는 그 공허와 허무로 마무리되기 때문에. 두려움을 피해 밤이라는 사각지대로 숨어보지만, 자신을 가두고 갉아먹는 괴물 또한 그 심연이라는 사실. 이상 나님의 허접한 리뷰였습니다. 대체 이 책의 명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나. 차라리 돈키호테를 두 번 더 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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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4-01-09 03: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도 뭔가 있어 보이길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가 그 이유로 예전에 이거 담았다가 무지 지루하다는 평 보고 뺐거든요. 물감님 리뷰 읽으니까 빼길 잘했다 싶네요. 차라리 돈키호테를 두 번 더 읽으시겠다니 ㅋㅋㅋㅋㅋㅋㅋ
새해 인사가 늦은 것 같지만 이건 물감님이 늦게 오셨으니까 물감님 탓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물감님!! 저도 올해 물감님처럼 비움의 미학을 추구해보겠습니다. 아 근데 가능하면 풀소유 하고싶다.... 못하니까 비우자....

물감 2024-01-09 08:47   좋아요 1 | URL
솔직히 막 재미없다는 건 아닌데 풀어가는 방식이 좀 구식이에요. 그에 비하면 돈키호테는 아주아주 세련된 편입니다 ㅋㅋㅋ 은오님도 새해복 많이 받으시고요. 그간 잘 지내셨...나보네요 ㅋㅋㅋ올해에는 풀소유와 도파민 중독에서 해방되시길 바랍니다^^

coolcat329 2024-01-10 1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찾아보니 프랑스 문학에서 매우 중요한 작품이네요. 거의 언어에 있어서 혁명에 가까운...그래서 번역으로는 그 가치를 느낄 수 없는 게 아닐까 생각해 봤습니다.

새해가 반갑지 않지만 복은 많이 받으셔요!

물감 2024-01-10 10:49   좋아요 1 | URL
제가 좀 투덜대긴 했지만 작품성은 인정할만 합니다. 번역 탓도 없잖아 있어요. 직역도 많고요. 분량은 그렇게 긴데 생각거리를 던지는 문장도 없어서 아쉽더군요...
쿨캣님도 새해 복 많이받으세요. 올해도 잘 부탁 드립니다🙂

페크pek0501 2024-01-11 14: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세계 고전 100위 안에 드는 책이라 해서 읽었다가 많이 속았어요. 그 책을 선정한 사람들과의 시각 차이라기보다 어떤 것에 중점을 두느냐의 문제인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노벨문학상 수상작도 그래요. 좋은 공부한 셈 치시면 됩니다. 어쨌든 독서는 이로운 것만은 사실이니까요.^^

물감 2024-01-11 17:39   좋아요 0 | URL
ㅋㅋㅋ그래도 베스트셀러에 속느니 탑100에 속겠습니다. 해외의 문화나 정서가 달라서 생기는 차이지 싶어요. 그나마 이런건 완독만으로도 값진 경험이다 생각하고 있어요😅😅😅
 
오늘을 잡아라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9
솔 벨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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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님의 서평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찌질함‘이다. 원래 이야기라는 게 인물 설정만 잘해도 반 이상은 먹고 들어가는데, 그 많고 많은 캐릭터 중에서 일등공신을 꼽자면 찌질한 인물이라고 하겠다. 일단 찌질이는 누구에게나 비호감의 대상이다. 볼수록 답답하고 한심하고 미련하고 어떤 때에는 짜증이 확 밀려온다. 여하간 현실에선 절대 가까이하고 싶지 않겠지만, 작품 속에서는 독자의 시선을 뺏고 호기심을 갖게 하는 데에 누구보다도 열심이다. 이들의 뻔한 행동들은 인간의 허물을 여과 없이 들춰낸다. 하여 다소 불편하면서도 남일 같지 않으니까 계속 마음이 가는 것이다. 그야말로 애증의 관계랄까. 인생을 논했던 문인들은 하나같이 인간의 찌질함에 주목한 바 있다. 그것만큼 인간을 깨닫고 이해하기 쉬운 설명도 잘 없기에, 삶을 관통하는 이야기에는 무슨 무슨 법칙처럼 찌질한 인물이 꼭 등장하게 된 것이다. 좋은 책을 만나고도 기분이 찜찜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오늘을 잡아라>는 내 기준으로 찌질의 한도를 살짝 초과한 중년 남자가 주인공이다. 현재 무직인 그는 다달이 별거 중인 아내에게 애들 생활비를 보내는 상황이다. 윌헬름에게는 언제나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사기꾼에게 속아 대학도 중퇴하고 연기자의 길을 갔다가 실패하여 가족들과 사이가 틀어졌다. 직장에서 예정된 부사장 자리를 뺏겨 화가 나 자진 퇴사해버렸다. 아내는 일부러 이혼해 주지 않고 계속 돈을 뜯어가고 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난 그저 열심히 살고 싶었을 뿐인데. 상황이 꼬이는 게 그의 탓은 아니었으나 악화시키는 건 자신임을 알지 못했던 주인공. 이처럼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윌헬름의 문제점은, 멘탈이 과거와 미래를 널뛰는 중이라는 것. 이런 그에게 내려진 처방은 현실을 살 것, 즉 오늘을 붙잡는 일이었다.


그래도 문제 파악과 원인 해결을 본인에게서 찾는 찌질이들은 양반이다. 반면에 윌헬름은 제 실패를 외부 요인으로 전가하기에 바쁘다. 세상은 그 누구에게도 편을 들어준 적이 없거늘, 왜 자신만 불행의 번제물이 되어야 하냐며 답답해한다. 그의 정신연령은 철딱서니 없는 사춘기 청소년 정도에 머물러있지만 원래부터 이렇지는 않았다. 전 직장도 10년이나 다녔었고, 결혼하여 두 명의 아이까지 키운 걸 보면 결코 대책 없는 유형은 아니었다. 꽤나 성실했던 그가 서서히 무너진 바탕에는, 본인에게 건 기대치가 너무 높았던 게 아닐까 한다. 뭐든지 자신의 계획과 생각대로 세상이 따라와 줘야 한다고 믿는 오만함. 변수로 가득한 세상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거늘, 그런 사실을 인지조차 못해서야 원. 미안하지만 세상 널린 게 억울한 사람이거든요.


주인공 곁에는 두 남자가 있다. 은퇴한 의사인 아버지와, 심리학자 탬킨이다. 아버지는 자식의 불평과 투정을 잘 들어주지만 절대 도와주지 않는다. 나이를 이만큼 먹었으면 이제 알아서 좀 하라는 뜻이겠지만, 사실 아버지는 자식이 곁길로 샐 때마다 충고를 해주었었다. 그것을 흘려들은 결과 지금의 찌질이가 탄생한 것이다. 심리학자를 멀리하라는 아버지의 충고를 또 무시한 윌헬름은 남은 재산마저 투자 실패로 날려버린다. 이렇게 학습이 안되는 친구들을 보면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확 달아나버린다. 아버지가 그를 돕지 않는 게 이해가 된다. 물론 궁지에 몰렸을 때 지푸라기 잡고 싶은 마음이야 알지만, 애초에 성장하기를 포기한 사람에게 그 누가 손을 내밀어 주냔 말이다.


이 상처 입고 방황하는 사내의 이야기는 단순히 정신 차리고 똑바로 살자는 게 아니다. 어떠한 반전도 없이 그렇게 몰락하며 끝나버렸으니까. 요점은 제목에 나와있다. 현재에 충실하라는 뜻일 텐데 재미있게도 주인공의 뒤통수를 친 심리학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비록 사기꾼 기질이 다분했지만 세상의 이치를 꿰뚫는 말도 더러 해주던 탬킨 박사. 가벼워 보이는 이미지와 달리 아버지처럼 현실을 직시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하여 그를 믿고 공동 투자했다가 말아먹었다는 찌질이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낸다. 그러면 이제 주인공이 실패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알아보자. 그의 아내는 말하길, 당신의 사고방식이 아직도 어린애 같다고 했다. 과연 그 말대로 어렵고 복잡한 일은 죄다 남들이 맡아서 해결해 주길 바라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오늘을 잡는 것‘을 ‘오늘만 사는 것‘으로 해석하지 않았나 싶다. 아무튼 초라한 몰골을 잔뜩 보여주었지만 그의 찌질함은 곧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독자는 붙들고 있는 책마다 정면 돌파를 해야 한다. 혹여 내 얘기가 아니라고 가벼이 여긴다면 성장이 멈춘 윌헬름과 다름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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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3-12-21 23: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 문득 이 소설이 떠올랐는데 물감님 리뷰를 보네요ㅋㅋㅋ 읽는 내내 답답해 하면서도 여러 장면에서 많이 웃고 저의 일부를 마주하는것 같아 마음이 복잡했던 기억이 납니다.

물감 2023-12-22 08:56   좋아요 1 | URL
제가 받은 텔레파시가 미미 님이 보내신 거였군요 ㅋㅋㅋ
이번 주인공은 감싸주기가 좀 힘들었어요. 차라리 어리기라도 했으면 그럴수 있지 할텐데요. 게다가 내 코가 석자라 미안하다 싶었어요 ㅋㅋㅋ

coolcat329 2023-12-31 1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대학생 때 이 작품을 배웠지만 내용이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아 물감님 글 읽으며 이렇게 재밌는 얘기였구나! 했습니다. ㅎㅎ
찌질한 인물이 나오는 소설이나 영화보면 참 왜 저러나 싶지만 그게 제 얘기이기도 한 걸 발견할 때 씁쓸해집니다.ㅋㅋ
물감님도 어쩌지 못하는 이 남자 이야기 저도 궁금하네요.

물감 2023-12-31 12:55   좋아요 1 | URL
호불호 갈릴만한 작품이긴 하더라고요.
주인공이 징징거리는 게 짜증나다가도 이해될 수 밖에 없는.. 그러면서도 짜증은 나고 ㅋㅋㅋㅋ 찌질이들을 보면 나라도 저럴거다 하는 맘과 그래도 그러면 안돼 하는 맘이 계속 부딪혀요. 말씀하신대로 그게 곧 제 얘기라서요. 여튼 잘 읽었으나 막 권해주고 싶진 않네요 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