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중학생 같은 걸 하고 있을까 VivaVivo (비바비보) 14
쿠로노 신이치 지음, 장은선 옮김 / 뜨인돌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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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 정말 간만에 푹 빠져서 읽은 청소년 문학이었다. 사춘기 학생의 고뇌로 가득 찬 제목부터가 스바라시하다. 긴 말없이 리뷰 들어간다. 중2가 된 소녀의 학교 적응(이라 쓰고 생존이라 부른다)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인싸가 아니라면 누구나 걱정했을법한 성장기의 한 토막을 다루고 있다. 지방 각지에서 모인 동급생들은 벌써 초등생의 태를 벗고 발랑 까진 데다 학업에는 온통 관심도 없었으며, 주인공처럼 평범하고 어리숙한 친구들은 말상대로도 껴주질 않았다. 가뜩이나 소심한데 이미 형성된 그룹 속으로 들어갈 수조차 없어 자연히 고립돼 버린 스미레 양. 그녀를 보고 있자니 끔찍했던 나님의 중학시절이 떠오른다. 그때의 나 역시 혼돈 그 자체였걸랑.


홀로 망상을 즐기며 친구 없는 서러움을 달래길 몇 달째. 반의 이상한 종교 그룹의 친구들이 손을 내밀어온다. 감격한 나머지 어울려보지만 종교 때문에 다시 혼자가 된 스미레. 그 잠깐의 시간들로 역시 혼자보다는 친구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강해지자, 가장 핫하고 잘나가는 일진녀들 무리에 끼기로 한다. 친구들처럼 교복도 줄이고, 염색과 화장을 하고, 쇼핑과 헌팅을 즐기고, 술 담배도 시작하게 된 모범생. 자꾸 이상해져가는 딸을 혼내는 부모님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교우관계가 불가함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게 부모님과는 소원해지고 성적은 떨어지는 중에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으니, 같은 반에서 아무와도 어울리지 않는 남학생 준이치 때문이었다. 같은 동족임에도 자신처럼 휘둘리지 않고 꿋꿋하게 지내는 준이치가 묘하게 신경 쓰였다지?


일진들과 계속 지내려면 그들과 비슷한 급이 되어야만 했다. 그러니까 비주얼을 가꾸는 품위 유지 비용을 걱정해야 했는데, 아무리 어울리는 게 좋다 한들 양심의 가책과 회의감이 드는 걸 막을 순 없었다. 그러다가 화장품 샵에서 물건을 훔치는 친구들과 부딪히면서 예전의 유교걸로 돌아온 스미레. 결국 일진들을 배신한 대가로 남은 학기 동안 왕따가 되어 살아간다. 바로 이때, 말 한 번 없었던 준이치가 다가와 친구가 돼준다. 이제껏 스미레 자신은 달라지고자 노력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진짜 노력한 쪽은 스스로를 지키고 있었던 준이치였고, 지금 와서 왕따가 된 자신에게 친한 척해대는 그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를 몰라 했다. 스미레는 학교를 안 나가기 시작했고, 겨울 방학 사이에 준이치는 전학을 가버렸다. 짧은 편지 한 장만을 남기고서.


뒤늦게 고마움을 느낀 주인공은 건강한 중3의 시기를 보낸다. 점차 마음이 안정된 그녀는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본다. 어째서 나와 맞지도 않은 옷을 입겠다고 그렇게 필사적이었던가. 겨우 1년간 같이 지낼 뿐인 반 아이들이 삶의 전부인 양 마음을 졸였던가. 그렇지만 사춘기에 접어들면 이성적인 판단이 흐려지는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초등학교 때와는 확연히 다른 학급 분위기에 주눅 들 수밖에 없기도 하다. 극소심 좌였던 나님의 중1 시절은 그야말로 격동의 허리케인이었다. 우리 반의 수많은 일진들은 툭하면 싸워댔고, 멀쩡하던 친구들도 점점 무섭게 변해갔다. 그 속에서 겨우 살아남아 중2 때는 일진이 적은 반에 배정되어 한숨 돌렸지만, 운동파와 게임파와 학구파로 이미 그룹이 나뉘어있었고, 아무 재능이 없었던 나는 그냥저냥 어울렸을 뿐 진정한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그래서 스미레의 어디도 말 못 할 고민과 기분들을 십분 이해한다. 그 시절에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했던 것은 어른에 대한 동경 따위가 아니라, 두렵고 막막한 학교생활에서 탈출하고 싶어서였다. 단언컨대 나와 같은 분들은 절대 옛날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거다.


다 커서도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 이들을 보노라면, 중2병이 중2 때에 오는 것도 축복이긴 한갑다. 태생이 도파민에 절여진 분들은 제외하고, 그게 다 성장통을 잘 넘기지 못해서가 아닐까 싶다. 원래 자신에게 맞는 옷을 찾는 안목이 생기려면 수많은 시도와 실패가 따르는 법이다. 그러므로 잠깐의 비행과 탈선은 크게 문제 될 게 없다. 그 경험을 양분 삼아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게 중요한 것이므로. 이상 유흥 따위 일절 안 하는 방구석 대현자의 헛소리를 마칩니다. 사요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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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자 2024-10-08 18: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장바구니에 담고 땡투 날리고 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물감 2024-10-08 18:36   좋아요 1 | URL
오잉 감삼다ㅎㅎ 달자님 굿데이요🙂🙂🙂

stella.K 2024-10-08 20: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얼마 전 우연찮게 청소년 문학 한 권을 재밌게 읽었어요.
아니 편하게 읽었다고 해야하나?
청소년 문학이 이렇게 재밌는 줄 첨 알았습니다.
솔직히 전 청소년 때 고를 청소년 문학도 없었거든요. ㅋㅋ
이 책도 재밌겠어요.^^

물감 2024-10-08 21:52   좋아요 2 | URL
청소년문학은 가독성이 좋고 주제가 명확해서 좋더라고요. 뒤져보면 괜찮은 작품들 많을텐데요ㅎㅎ 이 책도 술술 읽혀서 좋았습니다. 굿굿😄
 
평범한 인생 열린책들 세계문학 275
카렐 차페크 지음, 송순섭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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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차페크의 작품을 읽었다. 아니 근데, 너무 탄탄대로여서 결코 평범한 인생이 아니드만? 오늘날의 현대인들에게는 조롱으로 느껴질 수준이랄까. 뭐가 됐든, 나님은 늘 그렇게 생각해왔다. 평범하다는 건 정말 정말 어렵고 힘든 것이라고. 남들은 다 하고 사는 것을 나만 못한다 해서 평범하지 않구나 여겨선 안된다. 반대로 하고 싶은 걸 하지 못할 때가 많을수록 찐 평범함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삶이란 공평치가 못하거늘 잘난 사람과 비교되는 게 당연하다면 당연한 사실을 인정해야 하고, 거기에 전혀 기죽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비교 대상이 남들이 아니라 내 안의 자아들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나 자신을 심판하고 다그치고 벌하기 시작하면 앞으로의 평범함은 물 건너간 셈이니까. 그래, 이것은 자아성찰의 끝판왕인 나님의 이야기이다.


나는 체코 문학이랑 안 맞는 줄 알았는데 차페크는 그나마 덜 복잡하게 써서 읽을만했다. 물론 이 분도 철학을 전공해서 그런지 되게 심오하고 배배 꼬여있지만, 대중성을 지닌 걸로 보아 그렇게 꽉 막힌 타입은 아닌 듯하다. <평범한 인생>은, 심장병으로 죽은 어느 노인의 회고록으로 시작된다. 학교를 졸업하고 철도회사에 들어간 뒤 결혼 하고 일만 하다가 은퇴하는, 말 그대로 평범한 삶에 관한 기록들이었다. 다만 쓰다 보니 잊었거나 놓치고 살았던 것들이 떠오르면서 저도 모르게 자아성찰을 하게 되고, 끝내는 정신분열에 이를만큼 심각한 자기검열에 빠져버린 것이다. 누구나 말년 즈음에 인생을 돌아보고 후회한다지만 이 어르신은 비교적 나이스하게 살았던 데에 비해 너무 과한 자책을 하고 있어 솔직히 보기가 흉했다.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다 그렇듯이 주인공도 부모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랐다. 아버지의 듬직함과 어머니의 감수성을 적절히 물려받은 그는, 미래를 생각하여 죽어라 공부만 하게 된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 철도청 공무원으로 들어가고, 역장의 딸과 결혼하여 지내다가 자신도 역장의 자리까지 올라간다. 어느덧 어머니의 감수성은 모조리 시들어버렸고, 아버지를 따라 일하는 것만이 전부였던 그. 결국 부부간의 애정을 포기한 아내는, 남편의 일과가 틀어지지 않도록 지탱하는 쪽으로 향한다. 여기까지만 해도 그래 뭐 평범하다 볼 수 있지만, 삶의 곳곳에서 느꼈던 다채로운 감정들이 한 사람의 세계를 풍부하고 아름답게 수놓은 것 또한 사실이다. 문제는 그걸 간과하고 망각하는 게 인간인지라, 자신이 무얼 위해서 일을 하고 일에 집착을 하는지도 모른 채로 살아가게 되었다.


시간이 더 흘러서 아내가 먼저 세상을 뜨고 혼자가 된 어르신. 언젠가 한 청년이 찾아와, 당신이 썼던 시를 보고 크게 감명했다며 찬사를 늘어놓는다. 시인이길 오래전에 관둔 어르신은 그 칭찬들이 전혀 달갑지가 않았다. 자신은 예술적 감성과 기질을 포기하고 극 현실주의자를 택했으니까. 공부가 주는 보상은 실패가 없었고 상처받을 일도 없었다. 하지만 사랑이나 예술 같은 감성적인 것들은 항상 아픔과 고통을 안겨주었더랬다. 그랬기에 불필요한 자아들은 없애고 평범함의 자아로써 살아왔거늘, 다 늙은 지금에 와서 그 시인의 자아가 고개를 내밀어 자꾸 찔러대는가. 그것을 무시하고 부인할수록 더 깊이 의식을 파고들면서, 어느새 죽은 줄로만 알았던 자아들이 하나둘씩 나타나 그를 못살게 굴기 시작했다.


중반부터는 자아들과의 논쟁과 대립으로 채워져있다. 본래의 평범한 자아는, 죄다 태클 걸고 반박해대는 또 하나의 자아 앞에 변명하기 바쁘다. 사실은 일을 그렇게 원한 것도 아니지 않았냐는 것부터 해서 기쁨과 연민, 분노와 증오 같은 제 감정들을 속여왔던 것들까지 일일이 파고들어 주인공의 본심을 끌어내는 장면의 연속. 이래저래 방어해 보지만 본인 스스로도 비겁한 변명임을 알고 있었고, 내면의 대화들로 자신의 영광스럽던 인생이 정말 그러한지를 의심해 보게 된다. 나의 경우는 이 어르신의 인생과 정 반대에 가깝다. 나에게 현실의 삶은 기본만 갖추면 그만이었다. 반대로 그림과 노래, 악기 연주, 독서, 글쓰기 등등 육체보다 영혼이 추구하는 대로 살아왔다. 물론 나 역시 이런 것들에서 상처를 안 받을 순 없었지만, 이 어르신처럼 각종 자아들과 힘겹게 다투고는 있지만 그래도 영혼이 피폐해질 일은 없어서 다행이랄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제 감정에 솔직해지는 법은 알면서도 자신을 내려놓는 법까진 잘 모른다. 그 비법을 찾아가는 여정이야말로 찐 평범한 인생이거든.


자아의 반복된 싸움에 물리긴 했지만, 저자가 해석한 인생론은 제법 흥미로웠다. 사람은 여러 성격의 자아를 지니고 있고, 상황에 맞다고 판단하는 자아가 먼저 움직였을 뿐이라는 것. 수줍어하다가도 대범해질 때가 있고, 정말 고마워했다가도 갑자기 노할 때가 오기도 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이렇다 저렇다 하며 멋대로 판단해서는 참 곤란하다. 모두에게 빌런 소리를 듣는 이가 누군가에겐 둘도 없는 절친이고 은인이기도 한 걸 보면 말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한 사람의 내면이 또 하나의 우주라고 믿어왔다. 끝없이 팽창하는 대 우주처럼 우리 내면의 우주들도 계속 팽창해가고 있는데, 그 사실을 대다수가 인생의 끝자락에 가서야 깨닫는다. 죽음 앞에서는 그토록 집착했던 재물과 지식, 명예가 썩 위안은 못될 것이다. 당신은 무엇을 찾기 위해 이 길을 헤매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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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4-10-08 08: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차페크를 <별똥별>로 시작하셨다면 역시 체코 안 맞아!! 하며 던져버리셨을 거예요 ㅋㅋ 철학 3부작 중 평범한 인생이 제일 재밌더라고요.
인생이 너무 탄탄대로여서 평범하지 않다는 말씀에 으하핫 👍

물감 2024-10-08 10:35   좋아요 2 | URL
ㅋㅋㅋ 아 진짠가요?!! 겨우 한 명 좋아졌다 했더만ㅋㅋㅋㅋ
체코 쪽은 안심할 수 없는 게, 어느 책이든 평점이 좋아서 뭐가 맞고 안 맞는지를 구분할 수조차 없어요 ㅋㅋㅋㅋㅋㅋ 큰일이다!

coolcat329 2024-10-08 21: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동유럽 작가들이 참 진지하고 철학적인 거 같아요. 저도 이 책 가지고 있는데 기대가 큰 책입니다. 저도 얼마전 체코 작가 책 읽다가 중간에 포기할 뻔했어요. ㅎㅎ

물감 2024-10-08 21:57   좋아요 2 | URL
흐라발 작품 읽으셨더군요. 전 그거 별두개 줬는데ㅋㅋㅋ적은 분량에도 전혀 진도가 안나가던...
동유럽이 진지하긴 해도 앞뒤 꽉막힌 느낌은 아니라서 손절하진 못하겠어요. 라틴문학의 리얼리즘 보다야 훨씬 낫고요ㅋㅋㅋ

구단씨 2024-10-08 23: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가지고 있으면서, 읽지도 않고 다른 분의 리뷰 보고 좋다고, 혼자 웃으면서 막 좋아요 누르고.
이상하게 읽어야지 하면서도 안 읽고 있어서 마음이 조급한데,
이렇게 읽으신 분의 별점이 높으니 괜히 제가 다 읽은 것처럼 만족스러운 이 마음은 뭘까요. ㅎㅎ

인생이 너무 탄탄대로여서 평범하지 않다는 말씀이 진짜 공감되는 게요.
평범하게 살아간다는 게 진짜 어렵다는 걸 이미 알아버려서요...
괜히 이 책 읽으면서 주인공에게 질투할 것 같아요.

물감 2024-10-09 20:35   좋아요 1 | URL
조급할 게 뭐 있나요. 매번 뒷북만 하고 있는 저를 보며 위안 삼으세요^^
그리고 저의 평이 작품성의 기준이 되는 것도 아닌데요 뭘 ㅎㅎㅎ
각자의 부족함을 느낄수록 평범하기도 어려움을 크게 느낍니다만, 본문에 적었듯이 우리 세대는 그게 진짜 평범한 거라고 봐요. 절대 하자 있는 삶이 아니옵니다! 파이팅 하시죠 !!
 
집구석들 창비세계문학 88
에밀 졸라 지음, 임희근 옮김 / 창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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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이유로 독서에 흥미가 떨어진 날들이었다. 다시 본래의 리듬을 찾아야 할 텐데 큰일이다. 게으름 때문에 여태까지 붙들고 있었던 에밀 졸라의 <집구석들>을 겨우 완독했다. 솔직히 분량도 많았지만 졸라의 작품치고는 썩 흡인력이 없었단 말이다. 등장인물은 또 어찌나 많았는지, 복잡하고 정신없어서 기 빨렸던 작품이었다. 그냥 대충 적고 끝내야겠다.


옥타브 무레가 주인공인데, 본인의 가문에 대한 소개나 언급이 전무하여 ‘루공 마카르 총서‘로 보긴 좀 애매하다. 이게 주인공보다도 주변인들의 내용이 메인이라서 그렇다. 대강 요약하자면 파리의 어느 아파트로 입주한 유부녀 킬러인 옥타브의 야심과, 콩가루 집안을 숨기려는 중산층들의 발버둥으로 나눌 수 있다. 일단 중반까지는 J 집안의 차녀가 건물주의 아들과 결혼하기까지의 내용인데, 여기까지가 드럽게 지루하고 재미없어서 하차할 뻔했다. 거기에다 온갖 인물들의 자잘한 이야기가 얼마나 치고 빠져대는지 막 정신이 없었다니까. 아직 안 읽은 분들은 참고하시길.


아파트에서 유일한 젊은 독신인 주인공은, 온갖 여자에게 들이대고 밀회를 즐기며 출세의 기회를 엿본다. 그러나 신분 상승의 기미는커녕 불륜의 현장이 발각되어 이미지만 버린다. 처음에는 옥타브가 제법 명석하고 똘똘한 인물로 묘사되더니, 갈수록 여자에게 돈과 시간을 쏟아붓는 모질이로 변해버린다. 아쉽게도 주인공의 분량이 매우 적어서, 그런 상태나 심경의 변화가 납득이 되질 않았다. 요 친구의 불륜 상대가 J 집안의 차녀였는데, 이 일로 차녀 부부의 양가는 말할 것도 없고, 끼어들기 좋아하는 주변 집들과 기타 가십 남녀들이 아주 그냥 떠들썩했다. 나는 이보다 복잡한 인간사도 잘만 읽는 편인데, 이번 작품은 분량 때문인지 읽는 내내 기가 빨렸더랬다. 어휴.


그 밖에도 등장인물이 많은 만큼 별별 장면이 많았다. 불륜을 저지르고 그걸 알고도 묵인하는 가정. 갚기로 한 돈을 주지 않고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가정. 남자의 갖다 바치는 금전을 당연시하게 가르치고 또 배우는 가정 등등. 이런 사람들과 지낸다면 성직자라도 인간 혐오증에 걸리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자연주의문학을 고집하는 작가가 왜 이런 작품을 썼는지도 대강 이해가 된다. 듣자 하니 이전에 발표한 작품들로 저격당했다고 믿은 중산층들이 작가를 잔뜩 비난했단다. 그러니까 부르주아들의 꼬락서니가 얼마나 꼴불견이었겠나. 나 같아도 맥이고 싶었을 듯. 아무튼 통쾌함과는 별개로 만족도는 높지 않았던 작품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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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10-01 17: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다시 에밀 졸라 열풍인가요?
다 사놓고 못읽고 있는 1인 마음급해지게!

물감 2024-10-01 19:02   좋아요 2 | URL
열풍인 줄은 몰랐는데요ㅎㅎ
전 권 출간 되려면 10년은 더 있어야할 것 같아요. 일단 <목로주점>부터 달리시죠!

stella.K 2024-10-01 21: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에밀 졸라는 졸라 기 빨리죠.
제가 이 얘기 언젠가 하지 않았나요? 웬지 기시감이 느껴지네요.
그래서 나이들면 했던 말 또하고 또하고 그러는 거겠죠? 했는지 안 했는지 확실치 않아서. ㅋㅋ
암튼 오랜만이어요. ^^

물감 2024-10-01 23:38   좋아요 3 | URL
스텔라님 잘 지내셨나요? 요즘은 알라딘에 잘 안오게 되네요 ㅎㅎ
저도 기억이 잘 안나기 시작했어요. 이젠 리뷰에도 전에 썼던 표현을 재탕하고 그러네요 ㅎㅎㅎ 다 그런 겁니다...

coolcat329 2024-10-02 08: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가지고 있는데 읽다가 지치셨군요 ㅎㅎ 어떤 느낌일지 알 거 같아요. 😅 정말 에밀 졸라... 어떤 장면은 징글맞게 파고들어 독자를 질리게 해요. 고생많으셨어요. 👏👏👏

물감 2024-10-02 10:19   좋아요 2 | URL
ㅎㅎㅎ 이번 작품은 유독 중산층 저격하려고 쓴 거라 그런지 더하네요. 분량이라도 좀 줄여주면 좋겠는데, 하여간 졸라도 벽돌책 장인이에요. 시리즈를 언제 다 읽나 걱정됩니다 ㅎㅎㅎ

구단씨 2024-10-02 21: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아직 완독 못 했어요. ㅎㅎㅎ
제목에 끌려서 그냥 사버렸는데, 몇년 동안 마지막 페이지를 못 덮고 앞부분에서 주춤거리고 있네요.
근데 물감님 별점 보니까 더 더디게 읽게 될 듯요. 하하~

본래의 독서 리듬을 얼른 찾으시기를. 스치듯 지나가겠지만, 가을이니까요. ^^
더불어 저도 독서 리듬을 찾고 싶으네요...

물감 2024-10-02 22:40   좋아요 2 | URL
잘 지내셨나요, 구단씨 님 ㅎㅎㅎ 독서랑 멀어지니까 알라딘도 잘 안오게 되네요 ^^
더위도 꺾였으니 다시 독서 좀 해야겠어요 하하핳
그냥 건너뛰어도 될 작품인데, 구매하셨다고 하니 뭐... 대충대충 스킵해가면서 읽으셔도 무방할 듯 합니다. 그래도 후반부에는 탄력이 좀 붙더라고요 ㅎㅎ
 
우리의 밤이 시작되는 곳 - 제18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고요한 지음 / 나무옆의자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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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난달이었나, 택배 보낸 거래처 주소가 잘못되어 수령자가 연락을 준 적이 있다. 양해를 구한 뒤 회수 택배기사가 방문하면 전달 부탁드린다는 통화 및 문자를 남겼고, 그 일은 다행히 잘 해결되었다. 그리고 며칠 있다가 그 수령자의 번호로 문자가 왔는데, 놀랍게도 가족들이 보낸 부고 문자였다. 생판 모르는 남의 일이긴 했지만 그분의 죽음이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겨우 연락 한 차례 주고받았을 뿐인데 그것 또한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과 다름없었을까.


시작부터 죽음 얘기를 꺼낸 것은, 이번에 읽은 책이 온통 삶과 죽음을 둘러싸고 있어서였다. 서른을 앞둔 취준생 두 남녀가 장례식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아간다. 우울한 장례식장의 분위기는 가뜩이나 쪽팔린 형편을 루저 인생으로 못 박아버렸다. 이 알바는 업무시간도 대중없을뿐더러 일이 매번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모두가 잠든 한밤중이 되어서야 일을 마친 두 사람은, 첫차가 운행할 때까지 서울 도심을 방황하거나 24시간 맥도날드에 들어가서 시간을 때운다. 하루 중 가장 버티기 힘든 그 시간대가 이들만의 자유이자 솔직해지는 순간이었다. 각자의 못났음을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시간.


나 하나만 힘들고 아프다면 차라리 다행일까. 집안도 문제 있고, 가족과도 소원하고, 또 그것이 내 탓이기도 한 참말로 노답 그 자체인 상황. 내 앞가림도 잘 못하는데, 나 하나 건사하기도 벅찬데 어디 가서 투정 부릴 수도 없는 노릇. 이 딱한 청춘들의 넋두리를 독자들이 들어주도록 하자. 엄마와 이혼한 남주의 아빠는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 모임을 운영하고 있다. 엄마가 이혼을 바란 것도, 아빠가 죽음에 흥미가 생긴 것도 다 누나를 죽게 한 남주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 서로 목조르기 게임하다가 그만 죽어버린 누나. 그 사건으로 가족들의 고장 난 시계는 그렇게 버려져있었다.


여주를 태운 남주의 스쿠터는 서울 곳곳의 맥도날드로 향한다. 햄버거를 씹으며 신세한탄도 좀 해주고, 소확행을 꿈꾸다가 이내 죽음의 주제로 돌아온다. 며칠 전에는 뒷집 아저씨가 돌연사 하여, 남주 아빠가 조촐한 장례를 치러주었다. 죽음은 이렇게나 우리 가까이에 서식하고 있다. 돈을 모으려면 사망자가 많아야 하는데, 그렇다고 죽어달라 할 수도 없지 않냐는 두 사람. 현실에 발목 잡히고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허락된 건 겨우 두세 시간의 서울 일주 뿐이었다. 누구는 죽음을 보고 기나긴 여행이라고 하던데, 적막한 서울의 밤을 쏘다니는 장면들이 꼭 죽음을 여행하는 듯 보이더라.


이혼 후 새 가정을 꾸린 엄마는 어쩌다 한 번씩 집을 찾아왔다. 자유분방하고 막무가내인 엄마를 이해하기에는 떨어져 지낸 세월이 너무도 길었다. 그럼에도 뭐라 할 수 없는 것은, 누나의 죽음을 남주 탓으로 돌리지 않아서였다. 말은 안 했지만 아마도 엄마의 방문은 누나가 그리워서일 거고, 그래서 아빠는 오래도록 이사도 못 가고 이 집과 누나 방을 보관하는 중일 거다.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너무 잔인한 처방이지 않나. 왕따를 당한 학생이 전학 가듯이, 또 답 없는 직장에서 이직하듯이, 고통스러운 공간에서 그만 벗어나는 게 모두를 위한 길이 아닐까. 보다시피 이런 경우는 시간이 해결해 주지도 못하는데 말이다.


다행히 남주의 트라우마는 잘 해결되었다. 그리고 둘 다 상조회사에 정규직 면접을 보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이들과 나를 포함한 청춘 모두의 좋은 결과를 바래본다. 또한 죽음을 수용하고 작별을 받아들이는 것에도 열린 마음을 가져봐야겠다. 어쩌면 그것이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하는 비결일지도 모르니까. 아무튼 예상외로 나이스 한 작품이었다. 내내 우중충한 분위기에 저텐션이라 시큰둥하게 읽었는데, 이제 보니까 가랑비에 옷이 다 젖어버렸다. 우울하면서도 뭔가 기분 좋은 멜랑꼴리함을 잘 표현한 고요한 작가에게 삼삼칠 박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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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4-09-12 09: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무척 낭만적인 제목인데 내용은 슬프네요. 그래도 뭔가 긍정과 희망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전해져 저도 박수를!

물감 2024-09-12 10:00   좋아요 1 | URL
퇴폐미를 가진 배우의 아우라와 비슷한 느낌일라나요. 슬프긴 한데 또 낭만적인 작품입니다. 이건 읽어보셔야만 이해될 거에요. 가독성도 훌륭했습니다^^

coolcat329 2024-09-12 09: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목조르기 게임을 하다가 누나가 죽었다니...기막힌 팔자네요. ㅠㅠ
너무나 센 팔자라 센 직업을 가져야 살 수 있나봅니다. 업상대체라고 하더라구요. 두 사람 다 상조회사 정규직! 됐겠죠?

물감 2024-09-12 10:24   좋아요 1 | URL
누나의 죽음에는 여러 비하인드가 있습니다만, 기막힌 팔자는 틀림없네요 ㅠㅠ
작중에서는 일자리를 찾고 찾다가 결국 상조업체까지 온 것으로 나와요. 그리고 둘 다 상처만 받고 살아와서 그런지 알바 일도 무덤덤하게 하더라고요. 괜히 찡했습니다.
알바경력을 쳐주어서 아마 정규직 되지 않았을까요?! 열린 결말식 희망이긴 해요ㅎㅎ

stella.K 2024-09-12 10: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 읽어서 좋긴한데 말씀하셨던 그분은 어쩌다 돌아가셨을까요? 그분 가족은 어떻게 물감님께 전화를 한 거고요? 그러니까 본인이 직접 못 전하고 가족이 전한 걸까요? 어쨌든 좀 황망했겠어요. 죽음이 내게서 먼 것 같아도 참 그렇지가 않아요. 그죠?
책 물감님이 좋다고 하시니 저도 기억하겠슴다. 읽게될지는 모르겠지만. ㅋ

물감 2024-09-12 10:37   좋아요 2 | URL
전화가 온 건 아니고 돌아가신 분의 번호로 문자가 온 건데, 가족들이 핸드폰 통화/문자 목록으로 전부 연락을 돌린 거더라고요. 돌아가신 사유는 안 적혀있어 잘 모르겠지만, 짧게나마 애도는 표했습니다. 어제는 보험사에서 암 진단비가 너무 적게 들어있어 추가 가입을 권장하는 전화가 왔는데요, 평소같았으면 됐다고 할텐데 일단 제안서라도 받아보기로 했습니다. 이런 걸 걱정하는 날이 오네요. 하하하...
가볍게(?) 읽기 좋은 작품입니다. 생각거리도 풍부하고요. 시간은 잘 가던데요 ㅎㅎ

stella.K 2024-09-12 16: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앗, 물감님 방금 프사 바꾸셨네요. 먼저 프사 귀여웠는데. ㅋㅋ

물감 2024-09-12 18:36   좋아요 2 | URL
ㅋㅋㅋ 파란 배경이 다가올 계절과 어울리질 않아서 말이죵

stella.K 2024-09-14 20: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핰, 그때는 스맛폰에서 봐서 몰랐는데 PC에서 보니까 이 프사도
되게 재밌네요. 이런 이미지는 어디서 구하시나요? ㅋㅋ
설마 물감님을 대변해 주는 건 아니죠?
어쨌든 들어 온 김에 추석 연휴 잘 보내십쇼.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책도 많이 읽고. 잠도 많이 자고요, ㅎㅎ

물감 2024-09-14 23:17   좋아요 2 | URL
원래 프사는 본인을 어느 정도 대변하지 않나요?ㅋㅋㅋ
스텔라님도 추석 잘 보내시길요😀😁😄

페크pek0501 2024-09-20 17: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물감 님이 바꾸신 프사 때문에 헤매다가 이제 찾음. 물감, 이란 닉네임을 쓰시는 분들이 많네요.
물감 님도 스텔라 님이 K를 붙이신 것처럼 뭘 붙여야 찾기 쉬울 것 같네요. 제 닉네임은 하나뿐인디...ㅋㅋ 세계문학상 수상작이니 기본은 너끈히 넘겠지요. 게다가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것 같고요.
저는 2024신춘문예 수상작품집을 읽고 있어요. 어떤 글이 뽑히는지 궁금했지요. 두 개만 읽으면 완독, 입니다. 그런데 제가 느낀 건 수상작이라고 해서 다 좋은 건 아니라는 것, 입니다.ㅋㅋ

물감 2024-09-23 17:36   좋아요 2 | URL
하하하, 차라리 제 댓글을 찾아서 프사 누르는게 더 편하실 거에요.
저는 서재 방문을 다 그런 식으로 하거든요 ㅋㅋ
페크님도 추석은 잘 보내셨나요? 요새는 서재를 잘 안 와서 소식도 모르겠네요.
저도 수상작 썩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그나마 나무옆의자의 세계문학상은 좀 괜찮게 보고 있어요. 읽을 건 많은데 독서는 잘 안되어 큰일입니다만.......
 
마지막 사도 1
장용민 지음 / 재담 / 2023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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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용민 작가 도장 깨기도 이제 다 끝나간다. <마지막 사도>는 2009년에 출간된 <신의 달력>의 개정판이다. 20년의 세월이 훌쩍 지났음에도 전혀 구식으로 느껴지지 않을 세련된 작품이어서 놀랬다. 작가의 전 작품을 통틀어 가장 높은 난이도라서 재미와 별개로 푹 빠져읽는 건 무리였다. 이번 테마는 민감하기 그지없는 ‘종교‘인데다 음모론에 종말론을 곁들여, 아무리 팩션이라지만 몰매 맞기 딱 좋은 모양새였다. 심지어 성경만 건든 게 아니라 각국의 신앙과 문명을 믹스했으니 말 다 했다. 그러나 읽어보면 이것저것 뒤섞은 산채비빔밥이 아니라 탄탄한 짜임새를 갖춘 20첩 반상이라고 느껴질 것이다. 다만 종교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재미없을 거라 패스하는 게 낫겠다. 그나마 성경이라도 읽어봤다면 얼추 즐길 정도는 될 게다.


복잡다단한 서사를 어떻게 리뷰하면 좋을까. 요즘은 계속 이런 작품들만 걸리는 것 같다. 필라델피아에서 7년째 사립탐정을 하고 있는 하워드. 과거 역사 교수였던 그는, 딸아이의 납치 및 살해 사건 이후로 모든 게 풍비박산 나버렸다. 또한 자신의 절규를 끝까지 모르쇠 한 신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되었다. 어느 날 한 여성이 찾아와, 실어증 걸린 딸이 언급한 사람을 찾아달라고 의뢰했다. 정보는 겨우 사뮈엘 베케트란 이름뿐이었고, 하는 수없이 경찰 친구에게 목록을 뽑아다 일일이 방문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편, 딸아이의 납치범은 변호사들 보호 아래 지금도 멀쩡히 지냈는데, 그 배경에는 사탄 신봉 단체가 떡하니 버티고 있더랬다. 하워드가 어떻게 방해받을지 대강 짐작이 가는데 진짜 문제는 그것이 아니로다. 두둥탁.


마침내 수상한 사뮈엘을 발견한 주인공. 용의자의 주소를 찾아갔더니 이미 떠나고 없다는 건물주의 말만 돌아왔다. 근데 생판 모르는 사뮈엘이 하워드에게 남긴 내용 모를 편지가 있었다. 그렇게 하워드는 건물주한테 사뮈엘에 대한 얘기를 듣고, 계속해서 사뮈엘과 접촉했던 사람들을 한 명씩 찾아가게 된다. 인터뷰를 할 때마다 사뮈엘의 기이한 점들이 드러나서, 그의 사회보장번호를 조회했더니 현재 나이가 133살이라고 한다. 헌데 관계자들은 사뮈엘의 모습이 삼십 대 초반의 젊은이라고 증언했다. 이제 하워드는 의뢰 때문이 아닌, 어떤 기묘한 힘에 이끌려 용의자를 찾고 있었다.


사뮈엘의 단서는 어느 과학 연구소로 이어지고, 한 경비원을 통해 50년 전 아인슈타인이 사뮈엘을 만난 일화를 듣게 된다. 사뮈엘이 여기 직원이었다는 말에 신상기록 열람을 신청했으나 거절되고, 우여곡절 끝에 찾아낸 아인슈타인의 편지 속에서 언급된 사뮈엘을 발견한다. 상대성 이론을 발견한 것은 자기가 아니라면서. 거참 몇 안 되는 단서마다 이만한 파급력을 보여주다니 미칠 노릇이었다. 근데 잠깐, 이대로 쓰다간 끝이 없을 것 같아 적당히 줄이겠다. 아인슈타인에 이어서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도, 오펜하이머의 원자폭탄 발명에도 전부 사뮈엘과의 접촉이 있었다. 이 용의자는 인류 문명 발전에 기여한 위인들을 만나 영감을 던져주고는 휙 사라졌다. 의도는 알 수 없으나 수백 년 전부터 찍먹하고 다닌 사뮈엘의 행적들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하워드의 돌 같은 마음을 조금씩 깨 가는 중이었다.


이쯤 되자 의뢰인이 수상해져서 캐봤더니, 그녀의 뒤엔 미국 교회를 대표하는 원로 목사가 있었다. 병 때문에 오늘내일하던 그 목사는 놀랍게도 신을 믿지 않았으며 오직 돈 때문에 성직자가 되었음을 고백한다. 또 듣자 하니 목사 앞에 나타난 사뮈엘이 이제라도 신을 찾으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단다. 하여 자신처럼 신을 믿지 않게 된 하워드를 고른 뒤, 자신이 죽기 전 사뮈엘을 데려와달라는 게 찐 의뢰였단다. 자네 또한 신에게 질문할 것이 있지 않냐면서. 약점이 긁힌 하워드는 목사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갈 때까지 가보기로 결심한다.


사실 하워드 이전에 목사가 고용한 탐정 D가 있었다. 갑자기 연락이 끊어진 D의 발자취를 따라 프라하로 날아간 하워드는 D를 언급한 이유만으로 철창신세가 된다. 사탄 추종자들과 얽힌 D가 제물이 된 소녀를 살해한 영상이 찍혔던 것. 어찌어찌해서 풀려난 하워드는, 그 사탄의 집단이 고대 이집트 신화로부터 영국의 크로울리(프리메이슨)까지 이어져내려온 배경을 발견한다. 그리고 크로울리가 쓴 사탄의 율법서인 ‘리베르 레기스‘를 추종하던 자가 마야문명에 빠져, 그들의 신인 케찰코아틀의 숭배 사상을 미국으로 들여와 지금의 사탄 신봉 단체가 생겨났다는 것도 알게 된다. 이제 본격적으로 종교와 역사가 혼합된 본론으로 넘어가는데, 머리 아프니까 일일이 이해하려 하지 마시고, 작가와 주인공이 제기하는 신의 부재와 종교의 부패성을 중점으로 접근하시길 바란다.


사뮈엘의 실마리는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항해일지로,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일가족에게로, 롱기누스의 창을 찾아다닌 히틀러에게로 이어진다. 그들 모두가 사뮈엘을 만났었고, 장래에 누군가가 자신들을 찾아올 것에 대한 암시를 받았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대체 사뮈엘은 수 세기를 걸쳐 하워드에게 무엇을 전하고자 했을까. 일단 여기까지가 1권에 대한 내용이고, 2권 내용은 비교적 간단하다. 마침내 발견한 롱기누스의 창에 적혀있던 마야의 열 두문자를 분석한 결과, 글자 하나하나가 사뮈엘이 거쳐간 뉴턴, 콜럼버스 같은 문명을 책임졌던 인물들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편 수감 중인 딸아이의 납치범이 면회 신청을 하여 찾아간 하워드는, 그에게서 사탄의 율법서인 리베르 레기스에 적힌 인류 종말 예언을 듣게 된다. 그 시일은 마야 달력인 촐킨에 의거하면 2012년 12월 21일, 즉 엿새 뒤에 벌어질 재앙이었다. 아무리 신을 믿지 않는 주인공이라도 이제는 흘려넘길만한 사태가 아님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마침내 리베르 레기스의 예언대로 6일간의 종말 징조가 차례차례 일어난다. 하워드 일행은 사뮈엘이 지금의 사태를 경고하려 메시지를 남긴 신이었다 믿는 반면에, 많은 종교단체들은 사뮈엘이 신이라는 사실을 거부하였다. 혹여 예수가 재림한다면 자신들의 설자리를 잃어버릴 것이므로. 그렇게 종교인들의 거짓된 믿음이 드러나고, 반대로 무신론자들의 의심병이 완쾌돼버리는 대역사가 펼쳐진다. 끝나려면 아직도 멀었지만 이쯤에서 마치기로 하겠다. 개인적으로 종말에 대한 장면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재앙을 끌어다 쓰지 않아서 맘에 들었다. 만약 그랬다면 정말 실망했을 건데, 다행히도 예측불허한 전개를 끝까지 유지해 줘서 역시나구나 싶었다. 그건 그렇고 민감한 종교 소재를 이토록 깊게 파고든 이유가 뭘까 했는데, 작가도 힘들었을 때 묵묵부답이었던 신의 존재를 추적하다가 이 작품이 탄생했다고 한다. 정말 신앙의 여부를 떠나서 무조건 박수 쳐줄만하다. 꽤나 의미심장한 주제였지만 딱히 종교 얘기를 나누고 싶지는 않다. 그저 읽어보라는 말 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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