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0
뮤리얼 스파크 지음, 서정은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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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좋게도(?) 살면서 영향력 좀 있다 싶은 인물들을 가까이서 관찰할 기회가 많았다. 이들은 잘나가는 연예인 같은 파급력을 지녔다기 보다 주변인들의 호감을 사는 매력이 타고났다고 생각된다. 그게 선천적 본능일지, 후천적인 기교일지는 알 수 없으나 대개 열에 아홉은 무장해제되어 그 매력에 흡수돼버린다. 의심병 환자인 나님의 눈으로 쭉 살펴본 바 선한 영향력은 잘 없었고, 환심을 사는 일의 이면에서 불순한 의도만 여러 번 포착되었다. 이들은 상대의 니즈를 기가 막히게 파악하여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는 만능 재주꾼이다. 하여 어느 소속과 집단이든지 이들을 따르는 추종자들이 꼭 있는데, 잘 보면 하나같이 자기 검열이 안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기생충한테 조종당하는 곤충과 다름없는 이 무리들은, 혹여 리더의 불순한 의도를 눈치채더라도 뭘 어쩌지 못한다.


여하간 절대 건강할 수가 없는 이런 주종 관계를 담백하게 풀어쓴 스코틀랜드 작품을 소개한다. 여학교 초등부 선생인 브로디와 간택 받은 6인의 제자들 이야기이다. 학교는 별난 교육방식을 고수하는 브로디를 이단아 취급하는 반면, 학급생들은 그녀의 스타일을 전심으로 지지해 주었다. 브로디 선생은 간단히 정의 내릴 수 없는 비범한 인물이었는데 뭐라 할까, 자만과 교양과 기품의 교집합에 위치해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똑 부러진 데다 눈치도 100단인 브로디의 제자 중 한 명인 샌디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6인의 제자가 어떤 기준으로 발탁된 건지 모르지만 브로디의 특별 교육으로 또래들보다 총명하고 재능 있는 모습을 갖춰나간다. 그 가르침에 뿌리내린 6인은 서서히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는데, 신기하게도 모두 다 브로디의 예견대로 흘러가는 게 아닌가. 자신의 전성기니까 그것이 당연하다는 브로디 선생. 그처럼 전지전능한 브로디는 훗날 잘 키운 제자 중 하나에게 배신을 당하고 학교를 퇴임하게 된다. 설마 그녀가 호랭이 새끼를 키웠던 걸까. 브로디의 전성기를 끝내버린 X는 대체 누구였을까.


6인의 제자는 자아가 선명해진 뒤에도 브로디 안에서 한뜻을 품고 나아간다. 여태 막연히 맹신했던 제자들이 브로디를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된 계기가 있었으니, 바로 그녀의 남자 문제였다. 브로디는 과거의 연인 H와의 일들을, 세계사나 미술사의 한 장면들과 교묘히 섞어가며 들려주곤 했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자신의 영광을 높이고자 ‘내 사람‘을 땔감으로 갖다 쓰다니, 영 아니 될 일이었다. 이건 뭐 지나간 일이니까 그렇다 치고, 현재 브로디는 음악쌤, 미술쌤과의 어중간한 삼각관계 중이다. 말로는 연애할 생각이 없다지만 그들의 뮤즈는 되고 싶었던지, 두 남자의 집을 바삐 드나드는 브로디의 이중생활이 제자들의 가슴에 불을 지핀다. 그래 이왕 들킨 거, 브로디는 제자를 하나둘씩 파견하여 두 남자의 마음을 떠보게 한다. 결국 음악쌤은 탈락하고, 미술쌤은 돌아가며 찾아오는 6인을 모델로 그림을 그려낸다. 각 모델마다 브로디의 얼굴을 하고 있어, 이건 뭐 대놓고 플러팅하는 거나 다름없었지만 정작 그녀는 점찍어둔 제자를 그의 애인으로 꽂아 넣을 심산이었다. 이 역시도 브로디 자신의 전성기를 증명해 줄 또 다른 땔감에 불과했고, 그녀에게 저항이라도 하듯 X가 미술쌤의 애인 역을 차지해버린다. 대체 어쩌다 이 끈끈한 브로디 그룹에 균열이 생겼을까.


제자 중 유일하게 통찰력을 가진 X는 브로디 선생의 정치 성향을 꿰뚫어 보았다. 브로디는 무솔리니와 히틀러를 지지하는 파시스트였고, 그 사상을 본인만의 교육 방식에 녹여서 학급을 지도한 것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물든 아이들은 각자의 미래가 그녀의 뜻대로 된 결과처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게 다 브로디의 전성기가 얼마나 위대한가를 줄기차게 심어둔 탓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내 사람을 다루는 방식‘으로 인해 브로디가 어떤 물밑작업을 해왔는지를 알 수 있었고, 뒤늦게라도 그녀의 만행을 멈출 수가 있었다. 그러나 사건의 진실을 은폐했기 때문에 세월이 흐른 뒤에도 브로디와 제자들은 여전히 잘 만나고 지냈다. 어째서 X는 배신하고도 모르쇠 하며 브로디와 계속 어울렸을까. 그건 아마도 브로디에게 내렸던 뿌리 때문이지 싶다. 가지나 줄기는 잘라낼 수 있어도 뿌리는 뽑지 못하는, 이것이야말로 영향력을 가진 이들의 무서움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화제의 인물을 만난다면 침 흘리고만 있을 게 아니라 그의 물밑작업을 눈여겨봐야 한다. 굴뚝에 연기가 나려면 땔감이 필요할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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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4-02-25 2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6인의 제자도 키우고 삼각관계도 하고 진짜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에 대한 이야기군요~!! 근데 이거 가스라이팅 아닌가요? ㅋㅋ

저도 이 책 읽었었는데 막 좋지는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좀 구성이 특이했었던거 같은데...

물감 2024-02-25 21:52   좋아요 1 | URL
그쵸 사실상 가스라이팅인데, 막 브로디의 일방통행 보다는 스승제자간에 꿩 먹고 알 먹는 느낌이라 가스라이팅 표현을 쓰고 싶진 않았어요. 결과적으로는 선생보다 교주에 더 가까웠으니 그게 그걸지도요ㅋㅋ

저도 계속 별 셋이었는데요, 저자의 빌드업이 독특한 구성으로 한땀한땀 짜여졌음을 느끼고서 무릎을 탁 쳤습니다. 이 작가는 천재구나 싶더라니까요. 언젠가 다시 재독하신다면 브로디의 불순한 의도를 어떻게 연출했는지에 집중해보셔요. 고것 참 맛납니다!

coolcat329 2024-02-26 1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관심있는 책이었는데 물감님 글이 재밌어 꼭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여담이지만 저는 유난히 잘해주는 사람을 경계합니다.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나 이런 사람들의 돌변을 경험하고 놀랐거든요. 이런 친절에는 물감님 말씀대로 대체로 불순한 의도가 있더라구요.

오늘 날씨가 화창하니 좋습니다. 굿데이!

물감 2024-02-26 21:00   좋아요 0 | URL
저도저도요! 그 경험 덕분에 사람 보는 눈이 생겼으니 다행이라 생각해야죠 뭐.

날씨는 좋았는데 업무가 너무 많아서 정신없이 지나갔네요ㅋㅋ 쿨캣님도 좋은 하루 보내셨길 바랍니다😀
 
뜨거운 피 페이지터너스
이렌 네미롭스키 지음, 이상해 옮김 / 빛소굴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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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도 그 소릴 들었다. 넌 대체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확실히 남들 눈에는 내 인생이 핵노잼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전에도 말했듯 나님은 유니콘이니깐. 이제는 해명하기도 귀찮아 그냥 오해하게 놔두지만 나도 뭐 할거 다 하면서 살고는 있다. 물론 집을 잠만 자는 곳으로 대했던 10대나 20대 때에 비하면 텐션이 확 죽은 것도 사실이다. 하기사 누군들 안 그럴까. 혼자서는 주로 독서랑 홈트밖에 안 하지만 이런 일상도 마냥 즐겁기만 한 것은, 지나간 청춘이 온통 마음고생뿐이었기 때문이다. 하여 지금의 고요하고 태평한 나날들이 내게는 더없이 소중하다. 그럼에도 간혹 한 번씩 향수에 젖을 때면 가슴이 시키는 대로 살던 어느 순간으로 날아가곤 하는데, 그때가 그립다기 보다 추억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아이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애늙은이였는데 이제는 그냥 늙은이가 다 됐다.


<뜨거운 피>는 지금의 나님과 비슷한 느낌으로 살아가는 중년이 등장한다. 실비오는 청춘을 홀라당 날려먹고 겨우 정신을 차린 본투비 탕아였다. 인적 없는 숲속에 거주하는 그는 이제야 자리 잡은 생활과 안정에 만족하는 중이다. 그의 친애하는 여사촌의 딸이 어느새 다 커서 시집을 가더니, 자기들은 완벽한 부부의 표본인 부모님처럼 살 거라나 뭐라나. 그런데 얼마 못 가서 딸의 남편이 강물에 빠져 죽는 사건으로 온 동네가 떠들썩해진다. 이후 남편을 죽인 자가 딸의 외도남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또 한 번 난리가 난다. 조카의 외도를 알고 있었던 실비오는, 비탄에 빠져있는 조카를 나무라며 이제라도 현명하게 행동하길 경고해 준다. 그건 마치 젊었을 적에 피가 끓는 대로 살았다가 후회하게 된 자신의 과거였다. 실비오 역시 열정에만 의존하던 시기가 있었고, 그때의 자신의 선택과 경험들이 헛되다곤 생각지 않으나, 누가 봐도 정답은 아닌 그 길을 조카가 걷고 있었으니 심란할 만도 했을 게다. 그러나 실비오의 마음이 혼잡한 이유는 따로 있었는데, 잠깐이지만 뜨겁게 타올랐던 여사촌과의 지나간 불장난이 떠올라서였다.


사촌에 대한 여러 번의 언급이, 주인공과 보통 관계는 아닐 거란 느낌이기는 했다. 역시나 둘은 한때 뜨거웠던 사이였으나 금방 관계를 정리하고 각자에게로 돌아갔다. 이들의 연애는 절대 잊지 못할 어느 흔적을 남겼는데, 모순되게도 잊고 있었던 그 흔적이 자신들의 발목을 붙잡는 비상사태가 발생한다. 먼저 사촌은 실비오와의 만남을 일종의 죄지음으로 여겼고, 이별한 뒤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여 쭉 행복하게 살아왔다. 자기 삶에 200% 충실했던 탓일까. 실비오가 연인이었던 것도 잊고 친근하게 대했던 것과, 둘만의 그 흔적까지도 처음 알았다는 듯한 반응 등등, 온통 망각하며 살아온 그녀의 생애는 온통 거짓 투성이였다. 피가 뜨겁던 시절들을 죄다 부정하고 헛것으로 여기는 사촌과, 그런 엄마를 동경하는 아무것도 모르는 딸을 보며 쓴맛을 느끼는 주인공.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없듯 누구에게나 과거와 비밀은 존재하고, 더는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이다. 헌데 그릇된 선택이었다 해서 부러 망각하고 자신을 부정해버린다면, 짜여진 각본 속에서 주어진 연기만 해야 하는 배역의 모습과 다를 게 뭐가 있을까. 그런 그녀를 사랑한 자신은 또 뭐가 되냔 말이다.


뒷부분은 사촌에 대한 실비오의 몰아치는 감정들로 도배된다. 내내 저텐션이었던 그가 이렇게 열을 올리는 건, 소중했던 추억이 짓밟히고 난도질당해서가 아닐까 한다. 실비오는 확신했었다. 그녀가 눈부시게 찬란했던, 살아있던 순간은 우리의 그때뿐이었다는 걸. 그런데 그녀는 자신을 속이고 거짓된 연기자의 생애로 달아나버렸다. 그렇게 식어버린 순수의 열기는, 이제 냉소를 머금을 때에만 타오르게 되었으니 이런 것도 블랙코미디라 해야 할까. 나름 인생에 굴곡이 많았던 1인으로써,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여러 번 실감하고 있다. 깊게 패인 마음의 상처들이 낫는 과정에는, 내 감정에 얼마만큼 진실되고 솔직한지에 따라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뻔한 훈수처럼 들리겠지만 자기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회피하고 망각하며 지내는 경우가 허다하므로 꺼진 불도 다시 보는 습관을 가져보도록 하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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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4-02-22 12: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외국은 사촌끼리 결혼을 할 수 있는데 왜 이별하게 되었는지 궁금하군요.
뜨거웠던 만큼 그 사랑을 잘 지켜야 했던 건 아닌가 생각되어요.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사랑이 뜨거웠다고 해서 반드시 결혼 생활을 잘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점이에요. 결혼은 어쩌면 사랑이란 감정보다 인간성과 셩격이 더 중요한 변수가 될지 몰라요.(사람에 따라서는요)
무난한 성격이 결혼 생활에 유리한 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것보다 중요한 게 있으니 서로 마음이 잘 통하는 것, 이에요. 또 서로에 대한 존중.
물론 저도 다 아는 건 아니고 여태까지 살아온 시간으로 안 것이니 앞으로 더 살아 보면 더 알게 될 것이 있을 거예요. 잘 읽고 갑니다.^^

물감 2024-02-22 14:40   좋아요 0 | URL
저도 사랑의 크기와 죽이 잘맞는 거는 비례하지 않는다고 봐요. 갈수록 높아지는 이혼률만 봐도 짐작이 가고요. 일방통행의 감정과 존중이 큰 걸림돌이지 않나 싶어요. 여튼 복잡미묘한 사랑의 허리케인은 어느 시대든지 똑같아서 재밌습니다. ㅎㅎ

coolcat329 2024-02-22 16: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 재미나겠는데요?
저는 작가의 단편집 <무도회>를 읽어봤는데 참 깔끔하면서도 여운이 오래 남는 작품들이었어요.
뜨거운 사랑의 감정보다는 가치관이나 취향이 비슷한 사람과 결혼하는 게 좋은 거 같아요. 근데 피가 뜨거울 때는 그 어떤 상대든 다 자기와 잘 맞는다고 생각하죠. ㅠ
후회할 때는 너무 늦었죠. ㅎㅎ
참 씁쓸합니다. ㅎㅎ

물감 2024-02-22 16:42   좋아요 0 | URL
요 시리즈(페이지터너스)가 검증된 작품이 많아보입니다. 암거나 골라 읽으셔도 될듯요ㅎㅎ
가치관이나 성향이 맞는 사람이 어쩜 이리도 보기 힘든지요. 그건 오래보아야만 알 수가 있는데, 새로운 만남과 관계는 너무 한시적이에요ㅠㅠ 반대로 괜히 뛰어들었다가 후회하기도 무섭고 참ㅎㅎㅎ

stella.K 2024-02-25 2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30대 아니신가요?
진짜 나이 들으면 어쩌시려고.ㅎㅎ
근데 전 정말 나이드니까 막 헷갈려요.
생각은 아직 30대 같은데 몸은 그렇지 않으니 뭔가 바뀐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왜 몸이 바뀌어서 내 몸 찾아 3만리 하는 드라마 이해가 간다 싶기도 합니다.
아실랑가? ㅋㅋㅋ

물감 2024-02-25 22:30   좋아요 1 | URL
저물어가는 삼십 대입니다만, 사오십 대가 되어도 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을거 같아요. 지금 제 모습이 십대, 이십대하고도 비슷했습니다. 이정도면 진짜 애늙은이 소리 들을만 하지 않나요ㅋㅋㅋㅋ
저도 몸이 계속 나빠져서 올해부터는 독서보다 운동에 시간을 더 쏟고 있어요. 살 빠지고 근육 생기니 삶의 질이 달라지네요. 스텔라님도 운동 많이 하셔요! 그리고 말씀하신 드라마는 모르겠습니다ㅋㅋㅋㅋ

stella.K 2024-02-26 10:07   좋아요 1 | URL
역변 할 수도 있습니다. ㅋㅋ

물감 2024-02-26 16:23   좋아요 1 | URL
우째 대화의 핀트가 안맞는거 같은데요 ㅋㅋㅋ
저는 정신적인 걸 얘기하고,
스텔라님은 육체적인 걸 말씀하시고 ㅋㅋㅋ
육체야 뭐... 알아서 노화되지 않을까요 ㅠㅠ

stella.K 2024-02-26 18: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그런가요? 아니 역변이라는 게 꼭 잘 생겼다 못 생겨지는 게 아니라 그 반대일 수도 있거든요.
아, 모르겠네요. 암튼 뭐 전 나쁜 뜻으로 얘기한 거 아니니까 오해 없으시기 바라요. 😂

물감 2024-02-26 21:02   좋아요 1 | URL
ㅎㅎㅎ오해 안합니다. 스텔라 님의 지속적인 관심 감사감사 드립니다😃
 
인생의 베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7
서머셋 모옴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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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꾸준히 하다 보면 필자가 문과인지 이과인지가 얼추 구분이 가능해진다. 이것은 다른 리뷰에도 적었듯이 글에도 웜톤과 쿨톤이 있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철저하게 문과 쪽 갬성인 나님은 이과형 사람의 글을 버거워하는 면이 있다. 이들에게는 소위 ‘낭만‘이 결여돼있는데, 쉽게 말하면 사람 냄새가 잘 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과형들은 사실과 지식을 바탕으로 글을 쓰기 때문이며, 그렇기에 소설에서도 논문이나 기사 같은 퍽퍽함이 묻어 나와 독자들의(정확히는 나 같은 문과 타입의) 말문을 막아버릴 때도 많다. 뭐랄까, ‘그들만의 세계‘, ‘그들이 사는 세상‘이라는 말이 나오는 건 전부 이과형 작가들이었다. 그렇담 서머싯 몸은 어떨까? 내게는 절대 문과 쪽 사람으로는 안 보인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의 문장마다 냉기가 흐르고 있는데 풍자소설이라서 그런가 다들 눈치채지를 못하는 듯하다. 여튼 장르를 잘 고른 덕에 어렵지 않게 대중을 휘어잡았으니, 보면 볼수록 참 영리한 작가구나 싶다. 이에 모든 글쟁이들은 이같은 생태계 교란종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이번 작품의 테마는 선입견의 새로고침과, 무가치의 재발견 정도가 되시겠다. 나이에 떠밀려 억지로 결혼한 키티는, 한 유부남과의 아슬아슬한 외도를 즐기는 중이다. 원체 말수가 적고 일 밖에 모르는 남편과 달리, 매력 뿜뿜 외도남은 모두가 인정하는 엄친아였다. 결국 외도를 눈치챈 남편은 그녀를 데리고 콜레라가 들끓는 지역에 자원봉사를 가게 된다. 자신을 붙잡지 않은 외도남에게 대실망을 하는 키티. 그렇다고 딱히 남편과 갈라선 자신을 받아줄 곳도 없어 말 그대로 진퇴양난이다. 뭐 여기까지는 심성이 곱지 못한 자의 받을 마땅한 형벌인가 보다 했는데, 슬슬 자기 객관화를 하더니 본인의 무가치함을 벗어던지는 게 아닌가. 키티는 지역 수녀원에서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며, 사랑을 받기만 하다가 사랑을 주는 쪽으로 변모하게 된다. 그리고 여전히 냉랭한 남편에게도 전에 없던 호감이 생겨났다. 그런데 사랑할 마음은 안 든단다. 헐?


난 지금껏 서머싯 몸을, 인물 설정은 훌륭하지만 스토리텔링은 아쉬운 작가로 보았었다. 그런데 <인생의 베일>은 그 반대의 인상을 남겼다. 인물보다 서사 중심의 작품이었고, 미친듯한 흡인력에다 압도적인 가독성까지 보여준다. 다만 현대에는 이와 비슷한 플롯이 많기 때문에, 예측 가능한 전개의 연속이어서 다음 장면이 막 궁금해지진 않는다는 게 단점이다. 또한 키티에 비해 입체감이 약한 캐릭터들도 아쉬운 건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몰아치는 내러티브가 단점을 모두 커버하여, 이 작가는 인물보다 서사 중심의 글이 더 낫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무엇보다도 <인생의 베일>에는 내가 줄곧 지적했던 무책임한 화자가 등장하지 않는다. 주인공이 직접 화제를 만들고 질문하기 때문에 독자가 접근하기도 쉽고 사유를 내 것으로 만들기에도 좋다. 서머싯 몸을 썩 좋게 보지 않았었는데 웬걸, 진짜 다시 보게 되네.


집 나갔던 양심을 되찾은 키티는 조심스레 남편과의 화해를 시도한다. 물론 씨알도 안 먹힌다. 그녀가 거듭난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의미는 아니었으니까. 워낙 말을 아끼는 타입인지라 남편의 진심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단지 키티보다 그녀를 사랑했던 자신을 더 경멸한다는 말만 남겼을 뿐이다. 자존심에 금이 가고도 키티를 끝까지 책임지는 그에게서, 가족들에게 시달리며 살아온 부친의 모습이 겹쳐졌다. 돈 벌어오는 기계 취급했던 아내와 딸들을 묵묵히 부양했던 아버지. 남편이자 아비로써 당연한 삶이라고만 생각했던 키티는, 눈앞의 남편을 보면서 그 당연한 의무가 얼마나 서러운 것인지를 깨닫는다. 사람들은 입이 마르도록 남편을 칭찬했고, 외도남의 추문을 떠들어댔다. 똥과 된장도 구분할 줄 몰랐던 키티의 오만과 편견. 지난날의 모습들을 회개해 보지만 이미 버스는 떠나가 버렸다. 남편도 콜레라에 감염되고 말았다.


키티의 개과천선 과정이 너무 스무스한 느낌도 든다. 유리멘탈에게 여러 가지 충격요법을 써서 불가능한 얘기도 아니겠다만. 심리학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을 잘 알기를 별로 원하지 않는다고 한다. 파고들수록 인간관계가 피곤해지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인풋이 너무 줄어들면 시야가 좁아지고 편협한 사고에 갇혀버린다.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기초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확증편향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 것이다. 그러니 데카르트가 했던 말처럼 생각하는 존재로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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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4-02-22 1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이 통쾌한 리뷰는 뭔가요? 멋지군요. 이제 리뷰를 쓰실 때 뛰어가는 게 아니라 날으시는 단계에 가신 듯합니다. 축하드려요. 역쉬~ 많이 쓰면 쓸수록 글이 나아지는 건 확실한 모양입니다.
제가 서머싯 몸의 소설을 좋아하는 건 줄거리도 재미있게 잘 전개하지만 그것보다 생각할 거리를 주는 점입니다. 몸의 소설을 읽고 나면 단상을 쓸 글감을 얻곤 했어요. 제가 가장 많이 단상을 쓰게 해 준 작가가 아마 서머싯 몸일 거예요. 사색적인 문장이 많아 밑줄을 많이 긋게 되는, 저에겐 최고의 작가예요. 완독도 함께 축하드려요!!!

물감 2024-02-22 13:14   좋아요 0 | URL
생각거리가 많은 작품을 읽으면 날개 달린 듯한 글이 써지긴 합니다ㅋㅋㅋ 절대 형식적인 글은 쓰지 말자는 생각으로 쓰고 있습니다^^ 이제야 페크 님이 서머싯 몸을 좋아하는 이유를 대강 알겠어요. 그리고 저자의 사색들이 ‘당신은 어때?‘하고 묻는 느낌이 아니어서 전 그게 신선하다고 느껴집니다. 이제 <인간의 굴레에서>만 읽으면 장편은 끝입니다 ㅎㅎㅎ
 
홀드타이트 모중석 스릴러 클럽 29
할런 코벤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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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코벤의 작품들을 몰아서 읽었지만 소재나 패턴이 고만고만해서인지 금방 질리고 말았더랬다. 그래서 텀을 매우 길게 뒀다가 읽었더니 제법 볼만했는데, 이 역시도 텀이 짧았으면 그냥 그랬을 작품이긴 하다. 이번 작품도 어김없이 코벤표 가족물인데 스릴러보다는 미스터리 쪽에 더 가깝지 싶다. 단점부터 짚자면 타 작품에 비해 진도가 기어가는 데다 인물 시점도 너무 많아 산만하게 느껴졌다. 퍼즐 맞추기도 초반에나 즐겁지, 플레이가 길어질수록 재미는 줄고 피로도는 높아만 가는 법이다. 여하튼 스릴러치고 꽤나 잔잔바리여서 김빠질 법도 하지만, 요 시종일관 똑같은 모던함이 작품성을 쭉쭉 끌어올린달까. 괜히 액션 넣고, 반전 빵빵에다 스피디하게 흘러갔다면 식상하다고 느껴졌을 작품이었다.


구판의 제목인 <아들의 방>이 좀 더 작품의 성격을 잘 말해준다. 내내 우울해하던 고등학생 아들이 가출한 건지 실종된 건지 갑자기 자취를 감춘다. 낌새를 맡은 부모는 미리 아들 폰에 위치추적기를 심고, 아들 PC에 감시 프로그램을 설치해두었다. 그렇게 해서 아들이 위험한 곳에 드나들고, 질 나쁜 패거리와 어울려 다님을 파악할 수가 있었다. 그렇지만 과연 자식의 사생활을 침해해서까지 부모 노릇을 하는 게 옳은지는 모를 일이었다. 어쨌거나 부모로서 낭떠러지에 서있는 자식을 못 본체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 같은 믿음 하에 아들을 찾아다니지만 그럴수록 아들은 부모에게서 더 멀어지기만 하는 것이었다. 어째서 사춘기 아이들은 하나같이 자기 세계에 빠져서 부모를 차단하는 걸까.


<홀드타이트>는 위 내용 말고도 다양한 가정사가 등장한다. 병마로 고통받는 학생도 있고, 전교생의 놀림감이 된 아이도 있고, 학교 옥상에서 자살한 친구도 있다. 그리고 이들의 부모들과 친구, 선생, 의사 등등 일일이 소개 못할 여러 인물들의 서사가 나온다. 부모들 눈에는 9살이나 19살이나 보호 대상인 베이비로 보이는 법이다. 반면에 아이들은 자아가 성장하며 독립심도 강해진다. 이 사실을 간과하거나 묵인할수록 사춘기 아이들은 삐딱해지고 엇나가게 되어있다. 하나의 인격체로써 존중받지 못하는 아이들은, 여전히 자기를 꼬꼬마처럼 생각하는 부모의 시선과 선입견에 불만이 쌓여간다. 정작 부모들은 자신이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아이를 대하고 사랑해 준다고 자신한다. 늘 붙어살다 보니 성숙해진 자녀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그저 귀엽던 아이의 어린 시절 중 한때의 모습으로만 기억하고 대하는 거다. 이에 한참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의 아이들은 차라리 표현하기를 관둬버린다.


우린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쉽게 산산조각 날 수 있는지에 관해 생각하는 것 자체를 거부한다. 그걸 깨닫는 순간 정신을 놓을 수 있기 때문에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도록 차단해버리는 것이다. 어느 누가 늘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이 정상인으로 활동하도록 치료하려고 나서겠는가? 그들은 현실이 얼마나 가느다란 줄 위에서 간신히 균형을 잡고 있는지 알아버린 사람들이기 때문에 더는 손을 쓸 수 없는 것이다. 그건 그들이 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가 아니라 진실을 차단할 수 없어서 생긴 일이다. (189p)


아들이 실종된 후로 겨우 정신줄을 붙잡고 사는 아버지의 심정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이쯤 되면 원인이 자신들 즉 부모에게 있다고 생각은 할 텐데, 아무리 찾아봐도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를 발견할 수가 없는 거다. 이와 반대로 자식들을 옥죄지 않고 프리하게 키우는 부모들도 있는데, 이거는 이거대로 잘 케어 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애들도 있기 때문에 방심해서는 안 된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진짜 방도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우리도 어느 순간부터 부모의 방식에 의문을 품고 대들거나 동굴로 숨어버리지 않았던가. 근데 이렇게 말하면 무조건 자녀한테만 편든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아들 PC에 감시 프로그램을 설치함은 누가 봐도 선 넘은 것이지만, 내 자식의 타락을 멈추고자 했던 최후의 몸부림이라고 본다면 꼭 잘못했다고는 볼 수 없지 않을까.


모든 사람은 자신의 부모들의 사고방식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으면서도 자식들은 자신과 같은 사고방식을 갖기를 원한다. 마치 자신의 사고방식이 가장 뛰어나고 가장 건전한 것이기라도 한 것처럼.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우리가 정말로 옳은 방향으로 성장하거나 우리 나름대로 이러한 균형을 잡는 방법을 찾아냈기 때문일까? (324p)


자녀 유무와 상관없이 성인이 되면 어느덧 편협한 사고방식에 길들여진다. 혹여 그것이 틀렸는데도 나와 일치한 사람들과 지내다 보면 오답을 정답으로 착각하는 우물 안 개구리가 돼버린다. 어쩌면 이런 것 또한 부모들의 부족했던 케어를 탓해야 하는 걸까? 이 각박한 세상살이에 꼭 필요한 분별력을 알려주지도 않았다면서 말이다. 사실 코벤의 매력은 서사의 재미보다도 이와 같은 사유들에 있다고 본다. 늘 똑같은 개개인의 일상 속에서 간과할 만한 점들을 콕콕 찌른다고나 할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시각과 관점이 아니라, 알지만 잊고 지냈었던 감정과 불안요소를 수면 위로 띄우는 쪽인데, 독자도 잘 아는 그 맛이 스릴러의 장르를 만나면서 강렬하고 독특한 향수가 되고 만다. 이에 매료된 독자는 장르소설을 싫어함에도 코벤 작품은 괜찮다 하게 되는 것 같다.



빼먹을 뻔했는데, 작중에는 범죄자의 활약이나 형사들의 수사 장면도 나온다. 그런데 이들은 거의 뭐 들러리나 마찬가지이다. 이 작품이 액션 스릴러는 아니어서 쫄깃쫄깃한 맛은 전혀 없다고 보면 된다. 들러리의 분량까지도 엄마 아빠들이 다 해쳐먹는 중이다. 아무튼 집집마다 각자의 비극이 드러나면서 여러 조각들이 하나의 그림으로 맞춰지기 시작한다. 그 끝을 지켜보면서 개인의 아픔들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것이기도 하겠구나 싶어진다. 그나저나 스릴러소설인데 계속 감성적인 글만 적고 있네 그래. 워낙 여러 갈래의 내용이라 어떻게 간추려야 할지 몰라서 그냥 되는대로 썼더니 영 불만족스럽다. 또 전두엽 고장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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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2-17 15: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혹시 모중석이 왜 모중석인지 아시나요? 사람 이름 아닌가요?
글구 혹시 코밴의 작품 중 추천하고 싶은 작품 있으면
부탁해요.

물감 2024-02-17 18:10   좋아요 1 | URL
요 시리즈를 기획한 분의 닉네임이라 보시면 됩니다 ㅋ
생각보다 저는 코벤 작품에 점수가 좀 짠 편인데요, 그나마 <숲>, <스트레인저>가 좋았습니다. <홀드타이트>도 나쁘진 않지만 장면 전환이 너무 잦아서 좀 피곤했어요.

저는 이 작가보다는 제2의 코벤이라 불리는 ‘린우드 바클레이‘의 작품을 적극 추천합니다. 국내에 딱 4권 출간되었는데 전부다 별 넷 이상 주었어요. 컨디션이 들쑥날쑥하는 코벤과 달리 바클레이의 폼은 떨어지질 않더라고요. 읽으실거면 <트러스트 유어 아이즈>부터... ^^

stella.K 2024-02-17 18:16   좋아요 1 | URL
아오, 친절한 답변 고맙습니다.
좋은 주말 보내십쇼.^^

페크pek0501 2024-02-22 12: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외출할 일이 있어서 요건 다음에 읽고 좋아요, 를 누를지 말지를 정하겠습니다.^^

물감 2024-02-22 14:43   좋아요 1 | URL
에고고 갑자기 자신감 확 죽는데요....ㅋㅋㅋ

페크pek0501 2024-02-23 2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아는 것 중 하나, 생각나네요. 아이는 어리다고만 보고 말하는 것보다 이제 제법 컸다고 여겨 존중해 주고 귀담아 들어 주고 하면 좋은 효과가 나타난대요. 그러니까 17세의 자식에게 20세의 성인처럼 대해 주면 정말 성인처럼 된다는 얘기예요. 자리가 사람을 만들기도 하잖아요. 말썽꾸러기가 반장을 시켜 놨더니 반장답게 모범생이 되더라는 것. 자식을 대할 때 부모가 이 점을 알아 두면 좋을 것 같아요. 부모가 ˝너에게 상의할 게 있어.˝ 이런 말로 자식을 존중해 주는 모습을 보인다면 바람직할 것 같단 생각이 들어요.
저도 가끔 작은애에게 의논할 때가 있는데 이건 그 효과를 보자고 한 건 아니고 아직 20대지만 의논해서 아이의 의견을 들어보는 게 도움이 될 때가 있어서예요.ㅋㅋ 이럴 때 아이는 진지해져서 자기 의견을 말해요.
댓글이 길어졌네요. 리뷰를 잘 써 주셔서 그런 건지 이 책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물감 2024-02-25 09:56   좋아요 1 | URL
제가 자주 놀아주던 꼬마애가 최근에 이십 대 중반이 되어서 절 찾아왔는데, 기분이 참 묘하더라고요. 예전처럼 대할까, 성인 대우를 해줄까 망설이다가 결국 후자를 택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컸다‘고 여겨지면 존중부터 하고 봐야죠. 편히 대해달라는 상대방의 말이 나오기 전까지는요. 많은 성인들(웃사람)이 요 과정을 쉽게 건너뛰는 듯 합니다. 설령 부모자식 관계라고 해도 말이죠.
경험은 윗사람들이 더 많을지 모르나, 가능성은 아랫사람들이 훨씬 크다고 생각합니다. 또 요즘같이 급변하는 문화도 잘만 따라가는 청년, 청소년들에게 배울 점은 넘쳐나고요. 이래서 각기계층의 사람들을 만나봐야 하는가 봅니다 ㅎㅎ
늘 건강한 댓글로 행복주시는 페크님 감사드립니다. 좋은 휴일 보내시길요^^
 
엽란을 날려라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조지 오웰 지음, 박경서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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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랜만에 읽는 조지 오웰이다. 독자들 사이에서는 호불호가 심한 작가로 분류되는데 일단 나는 오웰의 작품을 좋아한다. 그랬는데 이번 작품은 여태까지의 애정이 팍 식어질 정도로 거북했던, 다른 말로는 지나치게 날 것인 글이어서 곤욕을 치러야 했다. <엽란을 날려라>는 오웰 스스로도 돈벌이를 위해 썼다고 고백한 바 있고, 그래서인지 그의 6편의 장편소설 중에 가장 인기 없는 작품이기도 하다. 물론 국내 한정이다. 이 책 또한 저자의 자전소설로써, 지독한 가난과 돈에 대한 열등감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다. 이 ‘가난‘이라는 주제를 평생 천착했다던데 글쎄, 적어도 이 책에서는 화두만 던져놓고 나 몰라라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책방 점원으로 일하는 서른 살의 고든 씨. 가난하지만 품격 있는 시인의 삶을 꿈꾸며 잘나가는 광고사의 카피라이터를 때려치운 상남자이다. 뜻은 좋았는데 막상 현실에 부딪히자 창작열은 줄어들고 풀칠하기에 바쁜, 본인은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영락없는 실패자로 살아가고 있다. 글을 쓰고 살겠다는 집념 하나는 인정하겠으나 이이도 참 어지간히 현실감각과 융통성이 없는 부류였다. 도대체 옛날 문인들은 죄다 유아독존인 걸까. 가난이 낳은 피해의식은 전부 돈 문제로 귀결시키고 있었다. 소소한 일상생활부터 관계 유지까지 모든 게 돈이 개입되고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힌 고든 씨. 그래서 남들의 호의와 배려도 싹 다 거절하고 저 혼자만의 체통을 지키느라 고군분투 중인데, 으아아아 증말 피 말리는 줄 알았다.


가난한 문인들의 자존심 사수 궐기. 솔직히 이런 류의 서사는 워낙 많은 데다 대부분 거기서 거기라 이젠 좀 질리는 맛이 있다. 그나마 오웰이 썩어도 준치였던 게, 돈의 세계를 제 발로 걸어 나와서 가난함을 탓하는 이중성을 그려냈다는 데에 점수를 주고 싶다. 가난한 예술가의 영혼을 찬미함과 동시에 돈에 대한 질투의 모순을 보면서 독자는 옳고 그름의 분별력이 흐려지게 된다. 이 모호한 선의 기준은 최종 장까지 이어져, 열린 결말도 아닌데 마치 독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다소 무책임한 태도로 보인다. 특히나 이런 사디즘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모르겠다.

참을 수 없는 욕정으로 넘치는데 그것을 해소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것은 빌어먹게도 얼마나 부당한 일인가! 돈이 없다는 이유로 왜 우리는 그것을 박탈당해야만 하는가? (203p)


타인에게 존중받지 못하는 건 모두 돈이 없는 탓이라고 믿는 고든 씨. 왜곡된 해석과 억지 주장들이 어찌나 치를 떨게 하는지, 이 응석을 받아주는 주변인들이 죄다 보살이었다. 얼마 전 읽은 <지하에서 쓴 수기>의 주인공과도 닮았는데, 그 친구는 그래도 문인의 프라이드만은 고수했던 반면에 고든 씨는 매번 돈 타령만 하고 있으니 참으로 꼴불견인 것이다. 이에 비하면 <달과 6펜스>의 주인공은 신사였다고 느껴질 정도니 말 다 했다. 아니, 그렇게 돈에 쪼들려서 체면 구기는 게 싫다면 더 나은 직장을 구하던가, 왜 세상이 제 기준대로 안 돌아간다며 불평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해설에서는 그의 고집과 저항이 연민의 정을 자아낸다고 하던데, 미천한 일개 독자로써 한 말씀 올립니다. 엿이나 드세요. 본인이 백 번 옳다 한들 남들 가슴에 대못을 박아도 되는 건 아니거든. 이렇게 겉멋만 든 모순 덩어리보다는 차라리 자본주의를 숭배하는 속물이 훨씬 낫다고 본다.


고든 씨는 투고했던 시가 팔리면서 들어온 돈을 하루 만에 탕진해버리고 만다. 또한 경찰 폭행죄까지 범하여 결국 직장도 잘리고 하숙집에서 쫓겨나게 된다. 만약 이 부분도 저자의 자전적 경험이라면 정말 박수 쳐주고 싶을 정도다. 이렇게까지 밑바닥의 삶을 몸소 체험하기란 쉽지 않을 테니. 아무튼 아이러니하게도 상황이 악화되자 고든의 심신은 반대로 안정되어간다. 급여가 더 낮은 일자리를 얻고, 더 누추한 방을 구했지만 그게 오히려 체면 차리지 않아도 될 구실을 준 셈이었다. 이 얄팍한 자유에 몸과 마음을 맡기고 나니 그 자신이 런던 어딜 가든 눈에 보이는 엽란과 같은 신세로 느껴졌다. 즉 자신은 길모퉁이와 집구석마다 자리하고 있는 풀 한 포기처럼 흔하고 별 볼일 없는 존재임을 자각한 것이다. 그런 게 싫어서 이제껏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다 손절하고 살았거늘, 보다시피 결과는 이 모양 이 꼴이다.


이렇게 대책 없고 무책임한 인간에게, 모든 걸 내려놓고 자포자기할 만큼 열심히 살긴 했는지 물어나 보고 싶다. 스스로를 존중치 않는 이들은 결국 제 인생이 아닌 남의 인생을 사는 것과 다름 아니다. 결국 돈과의 전쟁에 굴복한 고든 씨는 남들처럼 돈의 규범에 따라 품위를 유지하기로 한다. 끔찍했던 광고사에 다시 들어가고, 애인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룬다. 돈이 주는 명예와 존경은, 자신과 다름없었던 엽란을 날려버리는 행위로 얻을 수가 있었다. 이로써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건만 전의를 상실한 그는 더 이상 펜을 잡지 않는다. 과연 고든 씨는 패배자에서 벗어났다고 해야 할까. 이제라도 정신 차렸으니 다행인 것일까.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는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으로 살았지만 보여지는 걸 중시한 탓에 남의 인생을 흉내 낸 것에 불과했다. 자신의 이상을 앞세워서 세상과의 타협을 불경한 것으로 여길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 고독한 싱글 플레이어로 살아갈 게 아니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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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2-09 16: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아독존 맞습니다. 기승전결을 알고 써야하니 그럴 수 밖에요. 그러니 물감님이 너그럽게 봐주십쇼. ㅋ
전 조지오웰 불호에 가깝죠. 글을 어렵게 쓰는 건 아닌데 또 딱히 와 닿지는 않더라구요. 하긴 주요작 동물농장이나 1984도 안 읽어 본 제가 이렇게 말 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ㅠ

물감 2024-02-09 17:01   좋아요 1 | URL
캐릭터를 그렇게 잡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만, 왜 하나같이 대중의 비난을 한 몸에 받겠다는 듯한 스탠스여야 하는지 이해가 안가요.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인 셈인가..
말씀하신 <동물농장>과 <1984>는 활동 후반에 나온 작품이라서 그런지 전 좋았어요. 이 책은 활동 초반에 나와서 그런지 다듬어야 할 구간이 꽤 보입니다. 왜 인기없는 작품인지 단번에 알겠네요 ㅋㅋㅋ

stella.K 2024-02-09 17:09   좋아요 1 | URL
아참, 이게 또 영화로도 만들어졌다잖아요. 혹시 보셨나요? 엽란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혹시 아시겠는지요?

물감 2024-02-09 17:14   좋아요 1 | URL
영화가 있었군요. 딱히 보고 싶지는 않네요 ㅋㅋㅋ
책 서두에 엽란 설명이 있는데요, 화초처럼 여러 잎사귀가 달린 관상용 식물이라네요. 아마도 영국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풀때기중 하나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우끼 2024-02-09 19: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난은 구조적인 게 맞다고 생각해요. 개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자기자신을 존중하려 해도 그것마저 어려운 게 가난이라고 보고요. 성격이야, 가난에 처한 존재만 나쁜 것도 아니고요.

물감 2024-02-09 19:54   좋아요 0 | URL
제 글이 가난의 여러 모양을 고려치 않고 일반화한 것처럼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요 친구가 재능, 인맥, 기회도 있으면서 활용할 생각은 안하고 이런저런 탓만 하는 게 꼴뵈기 싫어서 그렇습니다. 사실 성격이야 어떻든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주변에 피해는 주지 말아야죠.

페크pek0501 2024-02-23 2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 동물농장, 1984년, 그리고 에세이인 코끼리를 쏘다, 나는 왜 쓰는가 등을 읽었는데 이 작품은 몰랐네요. 저도 조지오웰의 글을 좋아합니다. 어떤 에세이에서 돈을 벌기 위해 서평을 썼던 이야기를 했는데 서평가로도 유명하죠. 물감 님 덕분에 알게 된 이 작품을 검색해 보겠습니다.

물감 2024-02-25 09:40   좋아요 1 | URL
이제는 좀 식상하다고 느껴질 문필가의 이야기였고요, 스토리텔링도 다 아는 맛이어서 그냥 그랬습니다. 이런저런 경험이 많은 작가라 그런지 생동감만은 끝내줘요. 근데 어쩐지 주인공을 일부러 욕 먹이려고 작정한듯한 느낌이었어요. 여기에 어떤 의도가 있는듯한데 저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페크 님이 읽어보시고 한번 확인해봐주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