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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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에 대체로 동의하는 쪽이다. 그렇지만 나도 두 번이나 큰 변화를 겪은 사람이라 쉽게 단정 짓지는 못하겠다. 나를 포함해 눈에 띌 정도로 달라진 사람들은 대개 어떤 사고로 인해 정신세계가 뒤집힌 경우였다. 설령 그 일을 계기로 좀 더 나은 모습이 되었다 해도 본연의 자신을 잃어버렸다는 점에서는 슬프기 그지없다. 인생의 베스트를 살고 있는 요즘에도 과거의 순수했던 시절로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성숙해진 만큼 본래의 내 모습은 얼마나 많이 부정당했을지.


나이 듦과 환경에 따라 변하는 건 자연스러운 이치이다. 그러나 전혀 다른 사람이 돼버린다면 얘기가 다르다. 마침 몇 년째 연락 두절이던 동창의 소식을 들었는데, 이상한 무리와 어울리더니 되지도 않는 허세남 흉내를 내며 지낸다고 했다. 전혀 그런 타입이 아니었었기에 너무 의외였고, 결국 놀림거리가 되고 말았지만 그에게도 어떤 계기가 있었을 거라 생각된다. 애석하게도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므로 기대는 물론이고 설명할 이유 또한 없다는 사실이다. 모든 인생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세상을 바라보나니.


서머싯 몸은 <면도날>을 통해서 개인의 변화와 이해관계의 충돌을 이야기한다. 1차 세계대전을 치르고 돌아온 래리에게는 이전의 쾌활함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약혼녀 이사벨은 전혀 구직할 마음이 없는 래리와의 혼사를 무르고 다른 부잣집 아들과 가정을 이룬다. 이사벨의 물질만능주의는 사교계를 주름 잡는 엘리엇 삼촌의 영향이 컸다. 엘리엇은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위해서라면 죽는 시늉도 마다않는 집념의 끝을 보여준다. 이토록 자기주장이 강한 인물들을 통해 저자는 삶의 의미가 어디에 달렸는지를 논하고 있다. 어쩐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냄새가 풍기는데 일단 무시하기로 한다.


경제 대공황으로 이사벨 부부는 완전히 파산하기에 이른다. 다행히 삼촌 덕분에 목숨은 건졌지만 더 이상 예전의 호사는 무리였다. 이때 화자는 이사벨을 찔러본다. 래리와 결혼했어도 지금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텐데 후회는 없냐면서. 래리를 사랑하지만 그래도 호화로운 삶을 택하겠다는 이사벨. 세월이 갈수록 더해져 가는 성숙함과 비례하는 욕망의 민낯을 본 화자는, 래리가 그녀의 먼 훗날을 내다본 것은 아니었나 짐작해 본다.


정작 래리는 이사벨 가문의 속물근성을 문제 삼지도 않았다. 그의 관심사는 오직 인생의 진리를 찾는 일뿐이었다. 그래서 각국의 종교, 학문, 철학, 예술, 사상을 피곤한 줄도 모르고 탐구하러 다녔다. 여전히 주변인들은 래리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딘가 여유로워진 그 모습에 존중하기 시작한다. 반대로 엘리엇과 이사벨 부부는 존중과 점점 멀어진다. 나이 든 엘리엇 삼촌은 상류사회에서 점점 밀려났고, 이사벨의 고상함은 효력이 다했고, 그녀의 남편은 일자리를 얻지 못해 망가져만 갔다. 열심히들 살았지만 현실은 이들을 배반해버렸다.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욕구가 머문 곳으로 달려가 골인한다. 엘리엇 삼촌은 끝내 사교계에 죽음을 바쳤고, 이사벨 부부는 신사업을 계획하여 부를 계속 쫓았고, 재산마저 포기한 래리는 겨우 해방되기에 이른다. 저자는 이 책으로 답을 찾기 보다 질문을 남기고 싶어 했다. 본인이 만족한다면 어떤 식으로 살았든지 간에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게 내 의견이다. 사실 지금도 제목이 상징하는 바를 잘 모르겠다. 서문에 인용 글을 보아선 면도날의 날카로움을, 구원받기 힘든 인생에 비유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 책을 감명 깊게 읽은 독자라면 구원이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함을 느꼈을 테다. 다만 그 종이를 뒤집을 줄 몰라서 다들 막연하게 살아갈 뿐이다.


래리가 인생의 해답을 찾았느냐 못 찾았느냐는 중요치 않다. 그 길을 걷는 과정만으로도 스스로에게 보상받았을 테니까. 삶의 의미를 영적인 데에서 찾는 사람들은 <데미안>에서 말한, 알을 깨고 나오려는 새와 같다. 그러니 일찍부터 바깥세상의 존재를 감지한 이들은 진정 복받은 사람이라 하겠다. 부와 명예가 전부이던 엘리엇도 죽을 때가 다가오니 종교부터 찾고 본다. 이렇게 현실 세계가 전부인 양 살던 사람도 공허해진 세월 앞에서 영적 세계를 그려보곤 한다.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이런 방황들이 무엇을 시사하는가. 앞서 말했듯 본인이 만족하면 그만이지만, 속세의 삶이 가져다주는 안락과 행복은 일시적이라 말하고 싶다. 과연 영원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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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07-26 12:5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면도날 리뷰 반가워서 달려왔습니다. 래리가 지금까지는 제 최애 남자 캐릭터거든요. 래리랑 결혼하고 싶진 않지만 래리 너무 섹시해.........
저는 서머싯 몸 소설 읽을 때마다 좋았고 면도날 읽으면서 특히 좋았던게 서머셋 몸이 모든 인물들을 미워할 수 없게 그린다는 점이었어요. 저는 그래서 이사벨도 엘리엇도 마지막까지 연민과 애정을 갖고 지켜봤습니다. 이사벨.. 래리 좋지만 결혼상대로는 아니긴 해. 난 널 이해한다.. ㅋㅋㅋㅋㅋ

물감 2023-07-26 13:07   좋아요 3 | URL
저도 나름 유니콘인데 래리는 어나더 레벨이군요 ㅋㅋㅋ
서머싯 몸 작품은 이게 처음인데 되게 재미있네요. 왜 어렵다고만 느꼈을까나...
인물마다 서사를 부여한 점은 정말 좋았어요. 특히 엘리엇이 너무 괜찮았거든요. 제가 애정하는 헤세랑 비슷한 결을 가진 양반같아보여서 좀 더 관심을 가져볼까 합니다 ㅋ

은오 2023-07-26 13:17   좋아요 3 | URL
맞아요, 인물들마다 서사가 있고 굉장히 입체적!! 독자가 서머싯몸한테 “당신 덕에 처음으로 사전 없이 소설을 재밌게 읽었다 고맙다”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낸 적이 있을 만큼 쉽게 쓰고, 서머싯몸이 소설 쓰면서 재미를 가장 중시했던 걸로 알고 있어요. 어렵지 않음과 재미를 둘 다 보장하지만 결코 얕지는 않음. 저는 그래서 누가 소설에 재미 붙이고 싶은데 고전중에 추천해달라고 하면 달과6펜스 읽으라고 합니다 ㅋㅋㅋ 물감님도 달과6펜스 드셔보세요. 개인적으로 달과6펜스>면도날>>인생의베일이었습니다. 인간의 굴레에서는 사놓고 아직 안읽음ㅋㅋ

물감 2023-07-26 14:44   좋아요 1 | URL
은오님 서머싯 몸에 진심이시네요 ㅋㅋㅋ 다른 작품도 차차 읽어보겠어요 🙂🙂🙂

coolcat329 2023-07-26 17: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저 서머셋 읽어야 하는데...면도날 저도 반갑네요. 안 읽었지만 제목이 넘 맘에 들거든요~~
인생의 굴레에서를 먼저 읽으려고 했는데 면도날로 바꿀까봐요 ㅎㅎ

물감 2023-07-26 17:39   좋아요 1 | URL
전 작품의 평이 좋던데요, 끌리는 거 먼저 읽으세요ㅋㅋ 저는 <케이크와 맥주>가 끌립니다😀

coolcat329 2023-07-26 17:40   좋아요 1 | URL
그 책도 있어요 ㅎㅎ 좋다는 책은 다 준비해놨네요 😅

물감 2023-07-26 17:42   좋아요 1 | URL
ㅋㅋㅋ저랑 서머싯 몸 작품깨기 하시죠

coolcat329 2023-07-26 17:43   좋아요 1 | URL
ㅋㅋ 네 제가 물감님 쫓아갈게요!

물감 2023-07-26 17:48   좋아요 1 | URL
👍👍👍

페넬로페 2023-07-26 20: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래리라는 인물이 넘 궁금하네요.
저는 케이크와 맥주보다 달과 6펜스를 더 선호해요 ㅎㅎ

물감 2023-07-26 21:44   좋아요 2 | URL
<달과6펜스>가 메인 반찬이로군요. 참고해두겠습니다 ㅎㅎ
아직 이 책을 안보셨다면 요즘 같이 비 내릴 때에 읽어보세요. 분위기와 제법 잘 맞습니다. 윗쪽에 은오님 호들갑 보이시죠? ㅎㅎㅎㅎ

잠자냥 2023-08-08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독서 슬럼프에 빠지면 서머싯 몸을 읽습니다.
그만큼 재미 보장 몸!

물감 2023-08-08 17:00   좋아요 1 | URL
오호... 메모메모!
 
오픈 시즌 모중석 스릴러 클럽 44
C. J. 박스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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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까지 비가 그렇게 쏟아지더니 오늘은 어쩐 일로 화창한 날씨가 찾아왔다. 매미들이 시끄럽게 울어대는 걸 보니 이제야 본격적인 여름인가 싶기도 하고. 독서가 힘든 계절이라 일부러 장르소설만 읽고 있는데 그마저도 집중이 떨어지고 있다. 책보다는 리모컨을 잡는 시간이 더 늘어났다. 이렇다 보니 최근에 쓴 글들은 퀄리티가 영 만족스럽지 못하다. 안 돌아가는 두뇌를 억지로 쥐어짜본들 뭐 하겠냐는 판단에 도달한 바, 당분간은 설렁설렁 독서할 생각이다.


독서도 글쓰기도 잘 안되는 마당에 재미없는 책을 고르면 평소보다 더 하기 싫어진다. 그런 이유로 이번 리뷰는 퀄리티 생각하지 않고 막 쓰련다. 처음 보는 시리즈물인데 주인공 직업이 웬 수렵 감시관이다. 보통 경찰이나 군인, 변호사가 일반인데, 수렵 감시관이라니 이건 신선함보다 걱정부터 앞선다. 경찰처럼 전문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니고, 수사 단체나 대단한 동료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범죄자를 상대하는 직업이 아니므로 매끈한 활약을 보여주긴 힘들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평범하고 순진무구한 산골짜기 농부 같은 컨셉의 캐릭터였다. 그래서 그런지 이야기도 매가리가 없더라고.


와이오밍의 자연 국립공원에서 밀렵꾼들을 감시하는 조 피킷. 그는 한 밀렵꾼과 싸우다가 총을 뺏겼던 일로, 관리국에는 비난을 사고 주민들에겐 웃음을 샀었다. 자신을 조롱했던 그 밀렵꾼이 그의 집 주변에서 시신으로 발견된다. 몰래 산에 들어간 일행에게 당한 것으로 판단한 피킷은 팀을 만들고 산에 오른다. 얼마 뒤 나머지 일행들도 전부 죽어있자 수사는 그대로 종결된다. 산에서 내 집 앞까지 내려와 죽은 피해자를 아무도 이상해하지 않는다는 데에 의심이 생긴 피킷. 하필 이 타이밍에 관리국은 주인공을 예전 일로 정직 처분을 내린다. 갑자기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자신의 불행들도 뭔가 의심스럽다. 와이오밍에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이번 주인공의 매력은 도덕과 윤리밖에 내세울 게 없다. 심지어 총도 잘 못 쏜다는 설정이다. 아예 대놓고 평범함으로 승부하겠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서사에 힘을 빡 줬어야 할거 아닌가. 전체적으로 평범해서 텐션이 오르질 않는다. 주내용은 멸종된 동물이 발견되어 밀렵꾼들이 사냥하러 모였고, 한 X맨이 그들을 죽인 뒤 도망친 멸종동물을 포획하러 돌아다닌다는 것. 우연히 그 동물과 접촉한 주인공의 딸과 가족을 위협하는 X맨을 막는 것이 피킷의 임무이다. 여기까진 그냥 그랬는데, X맨의 정체도 허무하고, 수사를 대충 했던 이유들도 뻔해서 화나긴커녕 그럼 그렇지 해버리게 된다. 범죄와 썩 안 어울리는 설정에 거는 기대치가 뭐 얼마나 높겠어. 이 시리즈가 몇 편을 더 이어나간대도 설정의 한계 때문에 힘들 거라고 본다. 게다가 1편부터 너무 많은 패를 보여줬어. 그래서 후속편들이 전혀 궁금하지도 기대되지도 않아. 나한테는 전형적인 범죄소설이 더 잘 맞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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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더브레 저택의 유령
루스 웨어 지음, 이미정 옮김 / 하빌리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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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4학년 때였을거다. 어느 지역이나 그렇듯 학교마다 들려오는 괴담이 있었다. 밤 12시만 되면 학교에 있는 동상이 운동장을 돌아다닌대서 친구들과 밤중에 학교로 갔다. 예상보다 일찍 도착한 초딩들은 할 일도 딱히 없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 있기로 했다. 학교들이 지금처럼 문단속을 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아무튼 손전등도 없이 반마다 구경하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복도 끝을 휙 지나가는 게 아닌가. 불빛도 발소리도 없는 그림자 하나가 복도 곳곳을 스쳐 지나갔다. 무서워서 건물 밖으로 뛰쳐나간 우리는 기절할 뻔했다. 동상이 없었다. 친구 하나가 소리 지르며 정문으로 달렸고 나머지도 따라나갔다. 한 친구의 손목시계가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겁도 없이 우리는 학교마다 확인해 보기로 했다. 그 당시 다녔던 서울 중구의 흥인초부터 해서 장충초, 청구초 등 몇 군데를 돌았다. 하지만 다른 학교 동상들은 전부 멀쩡했고, 결국 우리 학교만 저주받았다고 믿게 돼, 한동안 학교 다니기가 무서웠던 기억이 난다. 내 기억의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때 받은 자극이 워낙 강렬해서 지금까지도 실화처럼 느껴지긴 한다. 이 얘기만 했다 하면 msg 그만 뿌리라고들 한다. 내가 분명히 겪었던 일인데도 어째선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 나만 바보 된다는 게 바로 이런 거다. 억울한데도 증명할 길은 없는.


여름이니까 무서운 이야기나 해보자는 건 아니고, 이번에 읽은 책의 주인공이 딱 내 얘기 같아 생각나서 적어봤다. <헤더브레 저택의 유령>은 고딕소설인 <나사의 회전>의 현대판으로 소개되었다. 이 책을 읽고 싶어서 얼마 전에 <나사의 회전>을 읽은 거라능. 이 책에서도 주인공이 가정 돌보미로 한 저택을 방문한다. 그곳은 건축가 부부가 리모델링한 스마트하우스로, 최첨단 기능이 곳곳에 탑재되어 있는 미래지향적인 건물이었다. 부부는 주인공 로완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장기 출장을 가버린다. 어린이집 교사였던 로완의 자신감은, 협조할 마음이 1도 없는 아이들과, 저택의 복잡한 스마트 기능 때문에 급다운된다. 이보다 더 난처했던 건 저택이 무서워서 그만뒀다던 돌보미들의 이야기였다. 이렇게 끝내주는 집의 어디가 대체?


집안에서 하나둘씩 미스테리한 일들이 발생한다. 전혀 모르는 곳에 가 있는 물건들, 자동으로 열리는 현관문, 모두 자고 있는데 들려오는 발소리, 바닥에 놓여진 알 수 없는 꽃, 멋대로 작동하고 먹통이 된 스마트 기능...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우습게 여겼던 유령의 존재를 의식하게 된 주인공. 유령의 짓이 아니면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현상뿐이었다. A/S 받으러 가면 멀쩡히 작동하는 기계처럼, 다른 누가 있을 때는 물건도 제자리에 있고 기능들도 정상이라 로완은 돌아가시기 직전이다. 이상을 감지한 남직원도 있었으니 피해 망상은 분명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로완을 내내 쥐락펴락하는데 약간 지루해진다 싶어질 때에 저택의 과거를 빵 하고 터뜨려준다. 제법 밀당할 줄 아는 작가다.


저택 주변 어딘가에 금지된 화원이 있었다. 위험한 식물로 가득한 그곳은 아무도 관리하지 않았다. 왜 이런 곳을 그냥 두는 건지 이해가 안 됐다. 그러다 저택의 전 주인의 딸이 화원의 식물 때문에 죽었다는 걸 알게 돼, 어쩌면 그 아이가 지박령이 된 걸지도 모른다는 가설로 유령의 존재를 더욱더 의식하게 된다. 한편 공포가 극에 달하던 어느 날, 로완은 남직원의 숙소를 방문한다. 그런데 잠깐. 어째서 화원의 꽃이 여기에 있는 걸까. 그 꽃은 저택 거실에 갑자기 떨어져 있던 것과 같은 종이었다. 왜 그동안 눈치채지 못했을까. 의심해 볼 여지는 충분했는데.


고딕소설은 주제 파악이나 작품 해석이 중요치 않은 장르다. 미스테리 요소가 있다곤 해도 그냥 보이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된다. <나사의 회전>과 달리 이 책은 구멍 난 문장도 없어 깔끔하고 좋았다. 두 작품은 설정이나 구조 면에서 닮아있지만 크게 다른 한 가지가 있다. <나사의 회전>은 유령이 등장하나 별일은 없었고, <헤더브레>는 유령은 없지만 별일이 다 있다는 것. 전자는 비움으로 겁을 주고, 후자는 채움으로 겁을 주는 방식의 차이다. 귀신보다 무서운 게 사람이라는 말마따나, 현대에는 <헤더브레>식의 연출이 훨씬 그럴듯하게 먹혀든다. <나사의 회전>이 연상되지도 않는 걸 보면 제대로 성공했다. 이제 후반부로 갈수록 반전이 연달아 나온다. 막 놀라울 정도는 아니지만 고딕소설에서는 이 정도가 한계이지 싶다. 이렇게 고전을 현대풍으로 재해석한 이야기는 언제라도 환영입니다. 아시겠죠, 소재 고갈된 작가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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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07-14 06: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윙크하는 공유 좀 뷰담스러웟는데 바뀐 공유 좋네요 ㅋㅋㅋㅋ

물감 2023-07-14 09:48   좋아요 1 | URL
이런 댓글 예상하고 있었어요 ㅋㅋㅋ

잠자냥 2023-07-19 15:00   좋아요 1 | URL
얼마나 부담스러웠는지 *뷰담*...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목련 2023-07-14 08: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유가 손에 든 건 책은 아니고 작은 수첩일까요 ㅋㅋ

물감 2023-07-14 09:50   좋아요 1 | URL
그래도 화보인데 수첩보다는 책 들고 찍지 않았을까요?ㅋㅋㅋㅋ

자목련 2023-07-14 10:36   좋아요 2 | URL
그래서 확대를 해봤는데 책 느낌은 아니어서 ㅋ
댓글이 책 이야기가 아닌 공유로~~
요즘 악귀를 열심히 보고 있는데 매일 지내는공간과 마주하는 사람이, 가장 강력한 공포가 되는구나 생각해요.
비 피해 없는 하루 이어가세요^^

미미 2023-07-14 11: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초5때 어느 날 화장실에서 홍콩할매 나온다고. 마주치면 숨쉬지말라고 해서 대부분 그냥 화장실을 안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파리만 날렸을 그 시기의 화장실ㅋ

물감 2023-07-14 15:17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제 외가집도 화장실만 마당 구석에 따로 있었는데요, 초딩일 때는 자다가 화장실 가는 게 그렇게나 무서웠습니다. 거기만 가면 빨간휴지 파란휴지가 생각나서요 ㅋㅋㅋㅋㅋㅋㅋㅋ

coolcat329 2023-07-15 13: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동상이 없었다‘ ㅋㅋㅋㅋㅋ
어릴 때는 이런 괴담이 무서우면서도 이상하게 끌려요. 초4가 밤 12시에 학교라니 정말 무서웠겠어요. 너무 무서워서 순간 동상이 안 보인 건 아닌지요...ㅋㅋㅋ

물감 2023-07-15 18:59   좋아요 1 | URL
보통은 무서워져서 동상이 사라져보이는 거라 생각하는게 맞는데요, 네명 다 그랬다고 하니 뭐가 뭔지 참ㅋㅋㅋ 우리 어릴땐 이런 괴담들이 많았죠. 요샌 초딩들도 조숙해서 괴담 안믿다는...ㅋㅋㅋ
 
달콤한 킬러 덱스터 모중석 스릴러 클럽 36
제프 린제이 지음, 부선희 옮김 / 비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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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계획했던 대로 장르소설이나 쭉쭉 달려본다. 오랜만에 집어 든 덱스터 시리즈. 킬킬거리게 하는 맛은 여전하구나. 미국서 8편 이상 나온 걸로 아는데, 국내에는 5편까지만 출간되었다. 2014년 이후로 현재까지 미출간 상태인 걸로 보아, 국내서는 썩 인기가 없었는갑다. 솔직히 대놓고 말하면 캐릭터며 분위기며 작품의 컨셉이 초기하고는 많이 달라진 탓에 재미가 반감됐다. 특히 초기 때에 보여준 날것의 매력이 많이 죽었다. 하여 시리즈가 더 나온다고 해도 그리 읽고 싶지는 않다.


작품을 모르는 분들을 위해 간략히 소개하면 주인공 덱스터는 정의로운 연쇄살인마이다. 낮에는 경찰 수사를 돕는 혈흔 분석가로 활동하며, 밤에는 갱생 불가한 사회의 쓰레기들을 처분하러 다니는 사신이라 하겠다. 덱스터에게 살육을 불러일으키는 악마가 들어있음을 알아본 양아버지는, 그걸 누르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악인들을 제거하는 데에 활용하게끔 양육하였다. 그리하여 토막 살인을 저지르는데도 거부감이 들기는커녕 다크 히어로처럼 느껴지곤 하니, 진짜 설정 하나는 기똥차지 않은가? 이 전무후무한 독보적 캐릭터의 등장은 말 그대로 센세이션이었다. 그랬는데, 분명 그랬었는데 어느새부턴가 다리를 절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휠체어 신세가 되고 말았다.


시리즈 초에는 주인공이 본연의 설정에 충실했다. 사회 악을 처단하며 나름의 정의를 구현하고 개인의 취미생활을 누렸다. 근데 이 영혼 없는 친구가 사랑에 빠지고 가정을 꾸리더니 인간답게 살고자 발악해대는 것이다. 그리하여 킬러의 자아와 일반인의 자아가 틈만 나면 싸워대는데, 여기서 발생하는 해프닝들이 진짜 골 때리게 재미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덱스터의 멘탈 컨트롤이 좋아져서 평범한 인간에 가까워지고 말았다. 물론 이 시리즈가 괴물이 인간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다룬다지만, 더 이상 킬러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만큼 변절돼버린 캐릭터에 대단한 매력을 바라는 건 솔직히 억지라고 본다. 아무튼 시리즈는 이어가야겠고 덱스터는 단물이 다 빠졌으니, 저자는 주인공보다 기타 설정들에 힘을 쏟고 있었다. 이번 편에서는 그런 설정 변화의 시도들 덕분에 볼거리가 풍부해서 좋았다.


여학생 두 명이 실종되고, 한 시의원의 아들이 용의자로 지목돼 분위기가 어수선해진다. 그러다 한 명의 시신이 발견되는데 신체의 일부가 사람의 이빨로 물어뜯긴 형태를 하고 있었다. 이어서 발견된 경찰의 시신에도 동일하게 뜯긴 자국이 남겨져 있었다. 사람을 뜯어먹는 식인종과의 대결이라니. 아무튼 사건 수사 과정에서 덱스터에게 갖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가장 먼저 자신과 똑같은 사이코패스의 친형이 나타나 덱스터의 가족 놀이에 끼어든다. 1편에서 빌런으로 활약했던 형은 예고도 없이 집을 드나든다. 덱스터는 자신보다 형을 더 좋아하는 아내와 의붓자식들에게 점점 무시당하는 기분이 든다. 형은 자신의 자리도 뺏었지만, 아이들을 살인마의 길로 끌고 가려 했다. 꼭 덱스터가 집에 없을 때 와서 판을 치니까 일이 전혀 손에 안 잡히는 거다. 그럼에도 정색조차 못하는 찐따미 가득한 덱스터.


한편 의붓 여동생이자 경찰인 데보라의 성질머리는 예전보다 심해졌다. 거기에다 괜한 히스테리까지 부려대는데, 그게 다 오빠처럼 가정을 만들고 싶다는 소망이 삐딱하게 튀어나오는 거였다. 이게 진짜 골 때리는데, 그렇게나 부럽다던 오빠는 정작 가정에서 왕따에 찬밥 신세란다. 아무튼 이번 편에서 데보라의 태도는 정말 묘연했고, 여태껏 본 적 없는 동생의 심경 변화가 자꾸 신경 쓰이는 덱스터. 이래저래 동생에게 휘둘리다가 악마의 적신호를 등한시한 덱스터는 연달아 함정에 빠진다. 이제야 좀 인간다워져가는데 다시 또 사이코패스 킬러가 될 순 없는 노릇. 헌데 반대로 동생은 악마를 불러내라고 닦달해대고 있으니 이거야말로 코미디가 따로 없다. 그래, 내가 이 맛에 덱스터 시리즈를 읽었더랬지.


일단 시리즈 절반까지 진행된 시점에서 몇 가지 짚자면, 이대로 덱스터를 보통의 인간으로 바꿔버릴 것인가가 관건이다. 아직은 살육 본능에서 자유롭지 못하나, 평범한 아빠로 살고 싶단 마음이 간절한 덱스터. 킬러라는 직업을 버리고도 세계관을 유지하는 게 과연 가능할지 궁금하다. 두 번째로, 악마를 가진 인물이 너무 많다. 주인공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이 악마가 형에게도 있고, 의붓자식들도 있고, 심지어 5편에서는 빌런에게도 들어있었다. 아니, 형이야 혈육이니까 그렇다 쳐도 악마가 뭐 바이러스성도 아니고 이렇게 많은 건 진짜 아니라고 보는데. 아무리 덱스터의 매력이 죽었다 한들 이렇게 악마를 막 뿌리고 다니면 쓰나. 세 번째로 세계관 확장 좀 해야겠다. 5편까지 왔는데도 아직 주요 수사 인원이 주인공 남매뿐인 건 너무 하지 않은가. 제발 멀쩡한 동료부터 만들어. 매번 계란으로 바위치다가 천당 구경하는 게 지겹지도 않냐 그래. 이외에도 뭐가 많지만 여기서 끝내겠다.


기존의 색깔과 많이 바뀌어서 찬반이 꽤 나뉠 듯하다. 아쉽긴 해도 충분히 재미는 있었다. 앞으로의 방향이, 내가 기대하는 방향대로 갈 것 같지 않아 이제 그만 하차하련다. 더 출간해 줄 기미도 안 보이지만. 요즘에는 이 같은 모던/클래식 스릴러소설을 만나기가 어렵다. 요즘 나오는 작품들은 뭐랄까, 거부감이 들 정도로 세련되다고나 할까. 그래서 새로운 책들이 대거 쏟아져도 막상 손이 잘 안 가고 그렇다. 이만하고 잠이나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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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3-07-12 09: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덱스터 이상하게 안 끌려서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이런 설정이라니 정말 코믹하기도 하네요.
형은 사이코패스, 여동생은 경찰에
덱스터 본인은 평범하게 살며 거기다 행복한 가정까지 꿈 꾸다니 ㅋㅋㅋ
이 시리즈가 원래 킬킬거리며 읽는 책이었군요!저는 완전 심각한 책인줄 알았거든요. ㅎㅎ

물감 2023-07-12 09:24   좋아요 1 | URL
쿨캣 님도 덱스터 알고 계셨군요! 의외입니다 ㅋㅋㅋ
한때 영미권을 장악했던 하드보일드 스타일을 따라걷지 않고도 성공한 작가에요. 그래서 본문에 적은 날것의 재미가 아주 그만입니다. 이제는 역사 저편으로 사라져가고 있지만요 ㅋㅋㅋㅋ

다락방 2023-07-12 10:5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 이거 제일 처음편하고 그다음거 읽었나 그랫었는데 잊고 살았네요. 물감 님 덕분에 아 맞다 덱스터 시리즈가 있지! 합니다. 그나저나 시리즈 갈수록 평범한 인간이 되어가는군요?
오호라~

물감 2023-07-12 11:24   좋아요 1 | URL
역시 다락방 님은 덱스터 읽으셨을거라 예상했습니다. 몇 년 만에 읽는 건데도 옛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니, 매우 개성있는 작품이긴 합니다. ㅋㅋㅋ
말 그대로 덱스터는 평범한 인간이 되고 싶어하고, 점점 그렇게 변해가요. 캐릭터를 버리면서까지 시리즈를 만드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겠죠 뭐 ㅋㅋ

새파랑 2023-07-12 11: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미드를 잘 안보지만 덱스터는 완전 좋아했었습니다. 엄청 재미있었던 기억이 ㅋ

이게 책으로도 있었군요~!!

물감 2023-07-12 13:03   좋아요 1 | URL
미드도 재밌단 말을 많이 들었어요. 보진 않았지만요 ㅋㅋ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린 덱스터네요 ^^

미미 2023-07-12 12: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위에 새파랑님처럼 미드로 재밌게 봤었는데 물감님 리뷰를 보니 책으로도 재밌겠네요. 미드도 시즌 거듭할수록 자꾸만 산,바다로 가서 저도 덱스터를 놔버림요ㅎㅎ

물감 2023-07-12 13:07   좋아요 2 | URL
미미님 취향이 아닐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근데 결국 산으로 가는군요 ㅠㅠ 이미 미드로 뒷내용을 본 사람이 많아서 더이상 국내출간이 안되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ㅋㅋㅋㅋㅋ

고양이라디오 2023-07-12 16: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덱스터 시즌 9까지 재밌게 봤습니다ㅎ 어제까지 유튜브에서 시즌 총 요약한 거 봤는데 물감님 서재에서 만나니 반갑습니다ㅎㅎ

덱스터가 책도 있었군요. 책으로도 덱스터를 만나보고 싶네요ㅎㅎ

물감 2023-07-12 18:20   좋아요 1 | URL
시즌이 되게 많이 있네요? 저도 요약본 영상이나 봐봐야겠습니다ㅋㅋ생각외로 미드 반응이 꽤 좋네요!
책은 막 재밌다기보다도 평타이상인데 은근히 볼만한 정도에요ㅋㅋㅋ

고양이라디오 2023-07-12 18:33   좋아요 1 | URL
일단 덱스터 첫 번째 책부터 중고서점에서 구해서 봐야겠습니다ㅎㅎ

근데 미드는 강추입니다. 제 인생 드라마 중 하나입니다. 요약본으로 보기 좀 아깝지 않을까 싶습니다ㅎ

물감 2023-07-13 11:30   좋아요 1 | URL
흠 제가 또 이런 야기에 약하거든요. 그럼 정주행을 노려보겠습니다ㅋㅋㅋ

잠자냥 2023-07-13 16: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프사가 바뀌어서 들어와봤습니다.
공유가 책 따위 읽는(책은 아닌 것 같고, 읽지도 않지만 아무튼 책 비스무리한 거) 사진을 어디서 구했대요? ㅋㅋㅋㅋㅋㅋ 제 느낌엔 귀한 사진 같은 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3-07-13 16:36   좋아요 1 | URL
공유가 책 좀 읽는 사람 아닌가요? 예전에 <도가니>도 공유가 책 읽고 영화화 하자고 했던 걸로 알고 있는뎅..(맞나?)

물감 2023-07-13 16:54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전 흔한 사진은 쓰지 않습니다

독서괭 2023-07-13 16: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덱스터 설정이 흥미로워서 예전에 몇편 봤던 기억이 납니다 ㅎㅎ 계속 볼 정도는 아니었는데 물감님 말씀하시는 웃긴 포인트 보니 재밌을 것 같네요! 얼마전 이영애 나왔던 드라마에도 나쁜놈만 찾아 죽이는 싸이코패스 여성이 나오더군요.

물감 2023-07-13 16:59   좋아요 1 | URL
독서괭 님도 덱스터 보셨었군요! 마이너 감성이라 국내서는 안유명할 줄 알았는데 은근히 다들 아시네요 ㅋㅋㅋㅋ 요즘에야 싸이코패스 소재가 흔하지만 과거에는 그렇지가 않아서 거부반응이 컸지 않았나 합니다. 여튼 볼만한데 출간이 끊어져서 읽어보라 하기도 뭐하네요 ^^;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3권 합본 개역판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2014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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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명저의 기준이 뭘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십중팔구가 박수 치는 작품도 누군가에겐 느낌이 안 올 수가 있는 건데, 작품 볼 줄 모른다며 한심하게 보거나 안타깝게 여기는 사람들이 꼭 있다. 반대로 작품의 어디가 어떻게 좋은 지도 모르면서 그 십중팔구 쪽에 끼고 보는 사람들도 정말 많다. 오랫동안 독서와 글쓰기를 하면서 느낀 건데, 한국인은 진짜 좀 이상한 민족이다. 이번에 국내외에서 굉장한 파급력을 자랑했다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읽게 됐다. 헝가리 문학도 처음인데다 슬라보예 지젝이 언급한 책이라고 해서 관심이 갔다. 그럭저럭 잘 읽었는데 이상하게도 남는 게 별로 없어서 민망했다. 평소에 내가 극도의 중립 상태라서 별 감흥이 없었나 보다.


세 개의 중편을 하나로 엮은 책이다. 인물과 배경이 시간의 순서대로 이어지긴 하나, 저자가 연작을 생각하지 않고 썼다니까 참고하시길. 1부 내용은 어린 쌍둥이 형제의 성장과정이다. 엄마가 전선을 떠나면서 할머니한테 애들을 맡겼고, 쌍둥이는 산골 집에서 자연인의 생존법을 배워나간다. 감정이 결여된 쌍둥이는 잔인한 말과 이해 못 할 행동들을 서슴없이 행하였다. 먼 훗날 글쟁이가 된 쌍둥이는, 연필을 쥘 때부터 해석의 여지가 없는 글만 써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이들처럼 저자 또한 모든 문장에서 감정을 제하여 눈앞의 보이는 날것만을 서술하였다. 1부만 보면 크리스토프가 자연주의구나 할 텐데, 3부까지 읽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느끼게 된다.


2부는 한 명이 국경을 넘어가 홀로 남겨진 루카스의 내용이다. 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 형인 클라우스는 타국으로 가고 루카스는 할머니 집에 남기로 한다. 분신이 사라진 뒤에야 이웃들과 교류하며 평범한 일상을 갖게 된 소년. 또다시 공습경보가 터지고, 마침 쌍둥이를 데리러 온 엄마가 포탄에 맞아 눈앞에서 죽는다. 다들 도망치기 바쁜데 루카스와 할머니는 절대 집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성인이 된 그는 여자도 만나보고 인맥도 만들면서 어떻게든 살아본다. 어릴 때와 달리 지금은 최소한의 욕구랄 게 있었지만 뭘 하든 영혼이 없었다. 그가 형과의 재회를 기다리는 걸 알고 모두들 이해해 주었다. 오직 사실만을 기록하자던 어릴 때의 원칙을 삶 전체에 적용한 루카스에게는 의미를 부여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그래서 돈을 태워버리기도 하고, 친한 이의 죽음에도 태평했고, 형에게 썼던 글들에서 많은 부분을 지워버리기도 했다. 마치 삶이란, 생명을 유지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태도이다. 안 그래도 힘든 삶을 괜히 더 복잡하게 만드는 인간의 존재란 무엇인가.


사실주의 작품이면 그냥 보고 느끼는 대로 이해하고 감정 지을 텐데, 이 작품은 어느샌가 해석의 여지를 주는 이야기로 바뀌어서 혼란스럽다. 문장들은 여전히 날것이지만 갈수록 구조가 묘하게 틀어지는 것이다. 그러다 2부 후반부에 등장한 클라우스의 신분을 증명할 수 없는 세 가지 개인정보가 거짓말이라며 강제로 바꾸는 장면이 나온다. 국경을 넘어간 클라우스의 안전을 위한 장치였지만, 지금까지의 존재를 부정하게 된 꼴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3부는 50년 뒤에 클라우스가 루카스를 찾아오는 내용이다. 한참 전에 떠난 루카스를 대신해 지역민들이 클라우스를 맞아준다. 결국 이런 엔딩인가 싶었는데, 클라우스의 과거가 뒤죽박죽 나오기 시작한다. 그 회상들은 우리가 1부, 2부에서 보았던 장면들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고, 이전까지의 내용과 클라우스의 기억 중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가 없게 돼버린다. 이어서 흐름은 루카스/클라우스가 쌍둥이가 아니라 처음부터 한 사람이었다는 명제로 넘어간다. 몇몇 주변인들도 헤어졌던 형제의 이름을 언급하고는 있는데, 그 형제가 실존 인물이었다는 증거가 어디에도 없는 거다. 회상에서도 등장하는 쌍둥이의 기억들이, 제 존재를 지키려고 만들어낸 허구였던가.


만약 허구의 인물 쪽이 정답이라면, 인생 자체가 거짓으로 되고 만다. 허상을 쫓아온 삶. 그것이 딱하고 안타깝기만 할까. 오히려 루카스/클라우스는 그렇게라도 살아서 됐다고 본다. 어떠한 의욕도 소망도 없는 아이가 그래도 살겠다고 마음먹었던 건 형제가 있어준 덕분이니. 비록 가상으로 일궈낸 믿음이었다 해도, 반쪽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동안 남들을 돕고 말동무가 돼주는 등 충분히 존재를 증명했으니까. 마지막 장면들이 진짜 세긴 한데 이 작품이 존재에 대한 이모저모를 논하려고 쓴 건 아닐 테다. 애초에 한 권짜리 책도 아니었고 지금의 제목도 없었으니까. 어쨌거나 전쟁 관련 이야기답게 삶의 모순은 실컷 구경했다. 슬라보예 지젝은 둘이자 하나인 쌍둥이처럼 살아야 함을 강조했는데 첨엔 이게 뭔 소린가 싶었다가, 내 안의 나를 분리시키는 연습과, 떨어져 나간 나를 다시 합치려는 노력을 말한 걸로 이해했다. 어라, 이렇게 쓰고 보니 명저가 맞긴 하네. 근데 내가 좋다고 해서 누구나 좋은 책은 아니므로, 앞으로는 절대 책 추천 따위 하지 않을 생각이다. 각자 끌리는 거 읽으시되, 투명하고 솔직하게 독서합시다. 스스로를 그만 좀 속이자고요. 증말 파이팅 코리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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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3-07-07 21:0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입시교육이 솔직하지 못한 독서인을 만드는데 크게 한 몫 했다고 생각해요.
저도 그런 사람이고 때때로 반성하지만 쉽지가 않네요.
김누리 교수가 ‘자기 생각 한 줄 없이 대학에 입학 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라고
하더군요. 그래도 물감님 같은 독자들이 있어 또 한 번 되돌아보게 됩니다.ㅎㅎ

물감 2023-07-07 21:53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교육법 탓도 있고요, 남들 눈치보느라 그렇다고도 생각해요. 요즘 한국인들은 감정표현에 완전 과감한데 왜 독서는 그렇게 남 눈치를 볼까 궁금해요.
의견 들려주신 미미 님께 감사드립니다ㅋㅋㅋㅋ

새파랑 2023-07-08 09: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너무 좋았어서 이번에 나온 개정판도 샀는데 ㅋ 그런데 왠지 저도 십중팔구 쪽에 끼어 보려고 한 듯한 기분도 듭니다 ㅡㅡ

전 철학은 잘 모르지만 이책에서 그리는 낯설고 선명한 분위기가 너무 좋았습니다. 1,2부는 정말 좋았던거 같은데 3부에서는 약간 갸우뚱 했던 기억이 나네요 ㅋ

물감 2023-07-09 13:49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제 기준에 새파랑 님은 십중팔구 쪽이 분명하나, 독서와 글쓰기가 성실하셔서 참 애매합니다. 양보다 질이라고 늘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꾸준히 읽는 게 어디냐 싶어서요! 새파랑 님은 제게 연구대상 뭐 비슷한 분... ㅋㅋㅋㅋ

저도 철학 몰라요. 그냥 읽다보면 이런저런 촉이 오고, 그걸 붙잡아 쭉쭉 사고가 뻗어나가는 트레이닝을 하는 거ㅋㅋㅋ 저 역시 1~2부가 너무 좋았는데 3부는 뭔가 뜬구름 잡는 기분이었어요. 갑자기 집중력에 문제가 생겼는 줄 알고 몇 번이나 앞으로 돌아가서 읽고 그랬네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목련 2023-07-10 1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읽어야 하는데.
책장에서 합본이 아닌 세 권이 나란히....

물감 2023-07-10 12:23   좋아요 0 | URL
늘 궁금했던 책이었는데 읽어보니 꽤 만족스럽습니다. 분권으로 구매하셨었군요! 가독성 좋아 금방 읽으실 거에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