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과는 달리 글이 너무 길어지는 바람에 이렇게 나눠서 쓰게 됐습니다. 특히 읽느라 고생하신 물만두 님께 죄송합니다 (^.^)

 

2. 안티고노스는 코라이오스의 딸인 스트라토니케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얻었는데, 그 중 첫째가 바로 데메트리오스였다. 둘째는 필리포스인데 젊어서 죽었다. 그러나 다른 설에 의하면, 데메트리오스는 안티고노스의 친아들이 아니라 조카라고도 한다. 데메트리오스의 부친이 젊어서 사망했기 때문에 그의 모친이 뒤에 삼촌인 데메트리오스와 결혼하였다. 그래서 데메트리오스가 안티고노스의 아들로 알려지게 되었다.

데메트리오스의 외모는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얼굴과 몸매가 매우 수려하여 어떤 화가나 조각가도 제대로 표현해 내지 못할 정도였다고 하며, 그런 아름다움 속에서도 우아함과 강직성과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성격은 쾌활하여 벗에게 흉허물 없고 상냥했지만 전쟁시에는 놀랄 만한 인내심과 정열을 갖고 용맹을 떨쳤다.

여기서 데메트리오스의 성품을 보여주는 젊은 시절의 예를 보기로 하자.

데메트리오스의 친구 중에 미트리다테스라는 청년이 있었다. 그는 데메트리오스과 동갑으로 안티고노스 왕을 섬기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안티고노스는 잠을 자다가 이상한 꿈을 꾸게 되었다. 꿈 속에서 그는 드넓과 아름다운 벌판에서 황금빛 씨를 뿌리고 있었다. 씨가 땅에 떨어지지마자 금방 그자리에서 황금빛 곡식의 이삭이 돋아났다. 그런데 다시 한 번 자세히 보니, 이상하게도 그 곡식의 이삭은 이미 누가 다 거두어 가고 그자리에는 그루터기만 남아있었다. 안티고노스는 분해서 버럭 화를 내며 근처를 살피는데 어디선가 이상하게도,  "황금빛 곡식은 미트리다테스가 모두 거두어 폰투스로 가져가 버렸다네." 라는 소리가 들린 것이다.

꿈을 깬 안티고노스는 꿈 내용이 자꾸 마음에 걸려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들 데메트리오스를 불러 절대로 비밀을 지키라고 먼저 굳게 맹세를 시킨 다음, 그 꿈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리고 안티고노스는 "한시라도 빨리 미트리다테스를 죽여 없애야겠다." 라고 덧붙여 말했다. 그런데 얼마 후, 미트리다테스가 이런 사정도 모르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데메트리오스에게 놀러왔다. 데메트리오스는 미트리다테스에게 단 한 마디도 말하지 않겠다는 굳은 맹세를 받은 다음, 조용한 곳으로 그를 데리고 갔다. 그러자 데메트리오스는 입을 열지 않고 쥐고 있던 투창 끝으로 그의 눈 앞에다 글씨를 썼다.

'미트리다테스, 도망쳐라!'

미트리다테스는 그 뜻을 금방 알아차리고, 그날 밤으로 멀리 카파도키아로 달아났다. 그런데 그 후 오래지 않아 안티고노스의 꿈은 사실로 드러났다. 미트리다테스는 카파도키아에서 넓디 넓은 기름진 땅을 점령하고, 그의 후손들은 오랫동안 폰투스 왕으로 군림했기 때문이었다. 이 폰투스 왕국은 기원전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8대를 이어나갔다.

이번에는 전쟁터에서의 데메트리오스의 모습에 대해 알아보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들(디아도코이)은 그들의 이해 관계가 얽혀 있고 영지가 서로 접해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끊일 날이 없었다. 언젠가 이집트왕 프톨레마이오스가 키프로스 섬에서 바다를 건너 시리아로 침입하여 농촌을 마구 짓밟고, 도시를 공략하고 있다는 기별이 안티고노스에게 전해졌다. 안티고노스는 아들 데메트리오스를 보내 프톨레마이오스를 물리치게 했다. 이때 데메트리오스의 나이는 겨우 22세였으며, 이 중요한 싸움에 단독 지휘관으로 처음 출전하게 되었다.

나이도 젋고 경험이 부족했던 그는 다만 왕성한 혈기와 용기만을 믿고, 일찍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휘하에서 싸웠던 단련되고 강한 적군을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그는 가자(Gaza)시 근처의 싸움에서 크게 패하고, 5천 명이나 되는 전사자를 냈으며, 그의 부하 8천 명은 적의 포로가 되어 버렸다. 뿐만 아니라 그의 천막과 재물과 노예와 그 밖에 그가 가졌던 모든 물건까지 전부 빼앗겼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는 포로가 된 장군과 함께 이 모든 물건을 돌려보내 주었다. 그는 이것들을 돌려보낼 때, 우리가 서로 전쟁하는 목적은 오직 명예와 영토 때문이라는 내용이 담긴 무척 너그럽고 공손한 편지를 덧붙여 보냈다.

 데메트리오스는 이 편지와 함께 선물들을 받자, "원하옵건데, 프톨레마이오스에게 빚을 오랫동안 지지 않고, 저도 하루 속히 그와 같은 행동을 할 수 있는 날이 오도록 해 주소서."라고 남몰래 신에게 기도했다. 이런 난관에 처했을 때 그가 보여주는 태도는 첫번째 전쟁에서 실패를 경험하여 낙담하기 보다는 오히려 백전 노장같았다. 그는 다시 이를 악물로 흩어진 부하를 끌어모으고, 무기고를 가득 채우며, 그 근처의 도시들과 서로 동맹을 맺어 새로운 군대를 훈련시키는 데 온 힘을 다 기울였다. 안티고노스는 아들이 싸움에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어린 아이와 싸워 이겼지만, 다음 번에는 어른과 싸워야만 하리!" 그러나 그는 아들의 기를 죽이지 않기 위해 이번 실수를 회복하겠다는 아들의 청을 받아들여 다음 전투의 지휘권을 다시 맡겼다.

얼마 뒤 프톨레마이오스의 부하 장군인 킬레스가 대군을 거느리고 다시 시리아로 쳐들어왔다. 그는 지난 번 싸움에서 패배한 데메트리오스 정도는 힘도 안 들이고 손쉽게 시리아에서 몰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그의 예상은 단번에 뒤집히고 말았다. 데메트리오스는 갑자기 적을 습격하여 적장과 병사들이 놀랄 틈도 없이 킬레스 장군 이하 7천 명을 포로로 잡고 많은 재물을 확보했다. 그는 대단히 기뻐했다. 그것은 적에게 많은 재물을 얻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전리품을 적에게 도로 돌려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승리의 영광이나 재물을 얻은 것보다도, 그 재물로 앞서 프톨레마이오스에게서 진 빚을 도로 갚을 수 있게 된 데 대해 감사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 혼자만의 생각대로 이 재물을 적에 돌려주려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 부친에게 그 까닭을 편지로 적어 보냈다. 그의 편지를 받은 부친으로부터, "네가 획득한 승리의 열매이니, 네 마음대로 하거라." 라는 승락이 떨어지자, 데메트리오스는 킬레스와 그 밖의 적장들에게 값진 선물까지 얹어서 프톨레마이오스에게 돌려보냈다.  이 싸움에서 패한 프톨레마이오스 군은 어쩔 수 없이 시리아에서 떠나야만 했다. 그 뒤로도 데메트리오스는 나바타이라고 불렸던 아라비아를 공격하였다. 그때 물도 없는 지방에 들어갔다가 죽을 뻔하기도 했지만, 그는 이를 무릅쓰고 용감하게 싸워 끝내 야만족들을 정복한 뒤, 엄청난 전리품과 함께 7백 마리의 낙타를 빼앗아 돌아왔다.

디아도코이들과의 전쟁이 극심해지는 가운데 데메트리오스는 키프로스를 공격하여 프톨레마이오스의 동생 메넬라오스의 군대를 격파한 데 이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선 프톨레마이오스군에게도 대승을 거두었다. 이 싸움에서 데메트리오스는 180척을 함대를 거느리고 맹렬하게 공격하여 적선 70척을 나포하고, 나머지는 바다에 수장시켰다.  또 메넬라오스는 아예 그의 함대 전체와 1천 2백명의 기병과 1만 2천명의 보병과 함께 항복해 버렸다.  이 승리를 거둔 뒤에 비로소 사람들은 안티고노스와 데메트리오스에게 국왕이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다.  안티고노스의 친구들은 서둘러서 그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 주었고, 안티고노스는 아들 데메트리오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거기에 그를 '데메트리오스 왕'이라고 부른 것은 물론 왕관까지 보냈다. 한편 이 소식이 이집트에 전해지자 이집트인들도 프톨레마이오스를 왕이라 불렀다. 비록 지긴 했다만 자존심만은 잃지 않게 해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마케도니아의 지배자 카산드로스를 제외한 나머지 디아도코이들도 저마다 왕이라는 칭호를 쓰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그가 치룬 전쟁 가운데 유명한 것 하나만 더 소개하겠다.

기원전 307년, 안티고노스는 로도스 사람들에게 프톨레마이오스와의 전쟁에서 자기 편에 가담하라고 요구했으나, 로도스 사람들은 이집트와의 무역으로 큰 이익을 얻고 있었기에 그 요구를 거절했다. 그로 인해 2년 후 데메트리오스는 역사상 유명한 로도스 포위공격 작전을 개시했다. 데메트리오스는 4만 명의 병사와 3만 명의 인부, 200척의 전함과 170척의 수송선을 거느리고 왔다. 그의 공성 기계들 중에는 헬레폴리스('도시들의 포획자')라는 별명이 붙은, 쇠뇌(큰 화살이나 돌을 멀리 날릴 수 있는 무기)와 트석기를 잔뜩 실은 거대한 장갑탑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헬레폴리스는 그 웅장한 모습때문에 포위당한 도시의 주민들까지도 성벽으로 기어올라 이를 신기하게 구경하였다고 한다. 언젠가 데메트리오스가 뤼시마코스의 영토인 킬리키아의 솔리를 공격했을 때 원군을 이끌고 온 뤼시마코스는 이 공성 기계들을 보더니 겁을 먹고 그냥 되돌아가 버린 적도 있었다. 옛 기록에 의하면 헬레폴리스에는 여러 개의 방이 있어서 방마다 군사들이 들어갈 수 있게 되있고, 앞부분에는 각종 비행 무기를 쏠 수 있는 구멍이 뚫려 있다고 한다. (영화 '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에서 오크들이 미나스티리스를 포위공격할 때 사용했던 공성탑과 비슷한 것 같다. 혹은 '에이지 오브 미솔로지'라는 게임에 헬레폴리스가 등장하므로 대강 그 모양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덕분에 데메트리오스는 폴리오르케테스 즉, '포위 공격자' 혹은 '도시의 공략자'라는 별명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데메트리오스도 호적수를 만났다. 그는 가장 정교한 최신의 공성장비를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1년 후에는 포위를 풀지 않을 수 없었다. 양자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즉, 로도스는 자유도시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안티고노스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를 제외한 어떤 군주와 전쟁을 벌이든간에 항시 안티고노스의 동맹이 되어준다는 조건으로. 헬레니즘 시대를 통틀어 일개 도시국가가 이렇게 자유도시의 지위를 유지한 경우는 로도스를 제외하고는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들다. 데메트리오스는 로도스 사람들의 용맹함(포위 공격 기간중 로도스의 노예들까지도 성벽에 붙어서 싸웠다고 한다)에 깊은 감명을 받은 나머지, 자신의 공성기계들을 두고 떠났다.  전투현장에는 그때 쇠뇌로 날렸던 커다란 돌덩어리들이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로도스인들은 그 장비들을 비싸게 판 뒤, 그 돈으로 자기네의 수호신인 태양신 헬리오스의 거대한 청동 조각상을 세웠다. 그것이 바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인 '로도스의 거상'이다.

데메트리오스는 전쟁이 일어나면 절제하는 생활이 몸에 배여 있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진지하게 전쟁에 임했지만 평화시에는 사치와 낭비, 주흥에 빠지는 일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티고노스는 그가 여러 전투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아들의 이런 사생활을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 본보기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데메트리오스가 애인 라미아에게 홀려서 정신을 못차리던 어느 날, 배에서 상륙한 데메트리오스가 언제나처럼 아버지에게 정답게 입을 맞추며 반겼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가 다음과 같이 물었다고 한다. "그 입맞춤은 라미아로부터 배운 것이냐?"  또 언젠가는 며칠 동안 난봉꾼처럼 생활하고 난 그가, "그동안 심한 설사병에 걸려서 아버님을 뵙지 못했습니다."라고 변명했을 때 , 안티고노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랬었구나. 그래, 너를 설사병으로 시달리게 한 것이 키우스의 술이었느냐? 아니면 타소스의 술이었느냐?"

또 언젠가 안티고노스는 아들이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갔다. 그땜 문 앞에서 젊은 미인 하나와 마주쳤다. 안티고노스느 아들의 방으로 들어가서 침대 곁에 앉아 손을 잡고 아들의 맥을 짚어 보았다.  "열이 겨우 내렸습니다" 아들의 이 말을 들은 안티고노스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무렴, 그렇테지. 마침 문 앞에서 내려가는 것을 만났지." 데메트리오스의 훌륭한 공적 때문에, 안티고노스는 이처럼 관대하게 그를 대했다.(어떻게 보면 비꼬는 것 같기도 하다...)

좀더 쇼킹한 사례로는 데메트리오스가 아테네에서 했던 짓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아테네인들이 데메트리오스에게 아부하기 위해 그를 파르테논 신전의 후원에 묵게 했던 일이 있었다. 즉, 아테나 여신과 한 지붕 밑에 살게 된 것이다. 그런데 데메트리오스는 이런 곳을 태연히 숙소로 삼는 것도 모자라 아테나 여신을 자신의 누님이라 부르며, 여자들을 끌어들여 온갖 추행을 거리낌없이 저질렀다. 차리리 크리시스, 라미아, 데모, 안티키라 따위의 매춘부를 끌어들여 난봉을 부리는 것이 이 장소를 더 신성하게 사용하는 일이라고 할 정도 였다. 더 이상 그의 사생활을 들춰내는 것이 읽는 분들께는 매우 거북할 수 있겠지만 하나만 더 이야기 하겠다.

 아테네에는 다모클레스라는 미소년이 있었는데(별명도 '아름다운 다모클레스'이다), 데메트리오스는 평소에 이 소년에게 대단히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동성애가 오늘날보다 자유로운 편이었다. 플라톤의 '향연'을 읽어보시라...) 그 소년을 꼬시려고 선물을 보내기도 하고 나중에는 위협까지 하는 등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도 소년은 도무지 응해 주지 않았다. 오히려 소년은 한결같이 거절하더니 끝내는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전혀 나타나지도 않았으며, 목욕도 혼자 집에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메트리오스는 잔뜩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그가 혼자서 목욕하고 있는 틈에 마침내 소년을 붙잡았다. 주변에 도움을 청할 만한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소년은 선뜻 솥뚜껑을 열고 펄펄 끓는 물 속에 첨벙 뛰어들어가 자살하고 말았다.(미인 박명이 여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입수스 전투에서 안티고노스가 전사하고 데메트리오스는 간신히 도망치는 등 엄청난 불행이 그에게  찾아왔을 때 그는 곤경에 처한 상태였다. 아테네인들이 그를 배신했고, 그리스 내에서 데메트리오스의 평판은 몹시 나빴으며, 각 도시는 전부 적의 수중에 넘어가 있었다. 그는 얼마 안되는 군대를 이끌고 아시아로 건너가 여기 저기를 떠돌며 약탈을 하면서 기회를 노렸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힘을 회복한 뒤 아테네를 공격하여 다시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전에 데메트리오스를 배신한 적이 있음에도 그는 아테네인들을 용서하여 식량을 나누어 주고, 그들의 환심을 사 아테네를 온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그뒤 데메트리오스는 스파르타를 공격하여 만티네아 근처에서 스파르타 왕 아르키다모스를 격파했다.  이어서 스파르타 근처에서 벌어진 두번째 전투에서도 역시 그들을 여지없이 쳐부수었다. 이 전투에서 스파르타군 200명을 죽이고 500명을 포로로 잡았다. 짧은 시간 안에 데메트리오스처럼 놀랄 만한 운명이 자주 바뀌는 왕은 일찍이 없었다. 작은 일에서 시작하여 큰 일을 이루고 영화를 누리다가도 하루 아침에 붕괴되었으며, 아주 쇠약했던 세력이 또다시 권세를 쥐는 등, 몇 번씩이나 신속하고도 놀랄 만한 변화가 자주 일어났다. 데메트리오스도 자신의 운명이 변화가 심한 것을 두고, 아이스킬로스의 말을 인용해 늘 이렇게 읊었다고 한다.

그대,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웠구나. 우리를 다시 쓰러뜨리기 위해!

한편 마케도니아 왕 카산드로스가 죽자, 마케도니아에 내분이 일어났다. 본래 큰 아들 필리포스가 왕위에 올랐으나 일찍 죽고, 남은 두왕자가 서로 왕위를 두고 다투었다. 그러다가 둘째 왕자 안티파트로스가 어머니인 테살로니카를 죽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셋째 왕자인 알렉산드로스는 에페이로스 왕 퓌로스와 데메트리오스에게 원조를 청했다. 데메트리오스는 즉시 군대를 거느리고 펠로폰네소스를 떠나 마케도니아로 갔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데메트리오스의 야망이 큰 것을 보고 생각을 바꾸어 도움이 필요없다고 하며 원조를 거절했다. 이 일로 둘으 서로 의심하고 경계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잔치를 열어 데메트리오스를 초청한 다음 그를 죽이려고 계획하였다. 그런데 먼저 데메트리오스가 알렉산드로스를 잔치에 초대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나중에 데메트리오스가 자기 초대를 받고 마음놓고 혼자서 자기 진영으로 오게 하려고 자신이 먼저 그의 진영에 갈 때 호위병을 한 명도 데리고 가지 않았다. 잔치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데메트리오스가 갑자기 식탁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알렉산드로스는 겁을 먹고 펄쩍 뛰어 일어나 그의 뒤를 따라 문 쪽으로 갔다. 데메트리오스는 문을 나가면서 호위병에게 "내 뒤를 따르는 놈을 죽여라!"라고 몰래 지시를 내렸다. 이리하여 알렉산드로스는 손 한 번 써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죽음을 당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달려온 알렉산드로스의 부하들도 모두 살해되고 말았다. 그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은 죽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의 계획이 우리들보다 꼭 하루가 빨랐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마케도니아 인들은 데메트리오스를 왕으로 모셨다.  이리하여 데메트리오스는 마케도니아를 차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으로 진군하여 테살리아까지 수중에 넣었다. 그는 이미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거의 수중에 넣었고, 메가라와 아테네도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보이오티아 지방으로 진군하여 테베를 공격하였다. 이 싸움에서도 그 유명한 공성 기계 '헬레폴리스'를 사용했으나 그 기계는 지렛대를 써서 겨우 조금씩 움직이는 엄청나게 무겁고 큰 것이어서 적은 거리를 이동하는 데에도 두 달이나 걸렸다고 한다. 테베군은 용감히 저항하여 한때 데메트리오스도 적의 투창에 목을 다쳐 죽을 뻔했으나 결국 테베를 점령했다.

이후 데메트리오스는 또 한번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그의 주위에는 적이 너무 많았다. 에페이로스의 퓌로스와 트라키아의 뤼시마코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뿐만 아니라 그의 거만함과 허세 때문에 마케도니아 인들도 데메트리오스를 싫어하였다. 그러지 퓌로스, 뤼시마코스, 프톨레마이오스가 연합해서 데메트리오스를 공격하였다. 자칫 잘못하면 입소스 전투의 재앙이 재현될 수도 있는 위기였다. 게다가 그의 부하들조차도 배신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데메트리오스는 퓌로스와 싸우는 도중에 부하들의 배신으로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마케도니아는 결국 퓌로스와 뤼시마코스에게 분할되었고, 데메트리오스는 마케도니아 왕이 된 지 7년 만에 왕위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데메트리오스는 카산드레이아(카산드로스가 세운 도시이다)로 가서 숨었다.(이때 아테네 인들은 또다시 그를 배신했다) 나라를 잃고 또다시 비참한 처지로 몰락하게 되자 그의 부인인 필라는 이 가혹한 운명을 견디지 못하고 독약을 마시고 자살하고 말았다. 그러나 데메트리오스는 다시 재기의 굳은 결심을 하고 그리스로 가서 친구와 장교들을 모았다. 정말 쉴새 없이 변화만을 거듭하는 데메트리오스의 운명은 또다시 그에게 희망의  손길을 내밀었다. 극적으로 다시 일어선 데메트리오스는 다시 군대와 배들을 모아 아시아로 떠났다. 거기서  이오니아 지방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많은 도시들이 반란을 일으켜 자진해서 항복해왔다. 그러나 행운은 그때까지 뿐이었다. 뤼시마코스의 아들인 아가토클레스가 대군을 이끌고 진격하자 데메트리오스는 우선 프리기아로 후퇴하고 아르메니아로 군대를 이동시킬 계획을 세웠다. 아가토클레스는 직접 싸워서 이길 수는 없었기 때문에 전략을 바꿔 식량 보급로를 끊어 데메트리오스를 곤경에 빠뜨렸다. 게다가 부하들도 자신들을 멀리 아르메니아와 메디아의 끝까지 끌고 가려고 하는 데메트리오스에 대해 반감을 품게 되었다. 군대는 굶주림과 싸우며 쫓기다가 리쿠스 강에서 많은 병사들이 물에 떠내려가고 전염병까지 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데메트리오스는 할 수 없이 셀레우코스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처한 슬픈 운명을 한탄하고, 도움을 주기를 간절히 부탁했다. 셀레우코스는 처음에는 이 편지를 보고 그를 동정하여 충분한 양식을 보급해 주라고 명령했으나 측근인 파트로클레스가 데메트리오스가 위험한 인물이므로 도와줘서는 안된다고 조언을 하는 바람에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이제는 셀레우코스마저 대군을 이끌고 데메트리오스군을 향해 진격했다. 뒤에서는 아가토클레스가 버티고 있고, 앞으로는 셀레우코스가 다가오자 데메트리오스는 절망에 빠져 함정에 빠진 짐승처럼 마구 날뛰고 덤볐다. 이제 데메트리오스는 거침없이 나라 안을 짓밟으며 재물을 빼앗았고, 셀레우코스군과도 몇 번 싸워 작은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특히 낫을 붙인 전차 부대의 공격을 막아내고 이를 무찔렀을 뿐만 아니라 산마루를 지키는 적군도 몰아내고 시리아로 통하는 도로를 장악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처럼 중대한 시기에 데메트리오스는 운나쁘게도 병에 걸려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이 때문에 그는 완전히 파멸의 운명을 맞을 수 밖에 없었다. 부하들 가운데 더러는 적에게 도망치고, 더러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게다가 셀레우코스와 직접 부딪혔을 때 그의 용병 부대가 배신하여 셀레우코스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이제 데메트리오스는 얼마 안되는 부하들과 친구를 데리고 숲 속으로 들어가 숨었다. 그는 그 속에서 밤을 기다려 카우투스에 있는 아군 함대로 도망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미 고개마다 적병들이 모닥불을 피우고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마저도 불가능 하였다. 결국 부하 중 하나가 항복하는 길 밖에 없다고 말했다. 데메트리오스는 그 말을 듣고 노여움을 참지 못해 칼을 뽑아들고 그 사람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친구들이 말리는 바람에 행동을 멈추었다. 오히려 친구들이 그 사람이 말한 대로 하는 것이 옳다고 충고했기 때문에 데메트리오스도 마침내 항복하기로 결심했다.

그러자 셀레우코스는 데메트리오스를 왕으로 대우하여 성대하게 맞으려 하였다. 그러나 그 사실을 눈치챈 몇몇 신하와 장교를 비롯해서, 나중에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데메트리오스에게 먼저 존경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 떠나자 셀레우코스의 동정심은 이내 시기심으로 변했다. 한편 데메트리오스는 셀레우코스의 친절한 뜻을 듣고 무척 기뻐했다. 그리고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다시 재기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이때 별안간 파우사니아스가 근위병들을 이끌고 데메트리오스를 포위하여 그를 셀레우코스에게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케르소네수스로 끌고 가 감금했다. 그러나 그에게 시종과 식량을 충분히 보내 주어 불편이 없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승마와 산책을 할 장소도 제공하고, 숲에서 사냥을 즐길 수 있는 자유도 주었다. 그리고 옛 신하들도 원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만나게 해 주었다. 셀레우코스도 때때로 편지를 보내 모든 일을 잘 처리해주겠노라고 위로했다.

그러나 데메트리오스는 속지 않았다. 그는 아들 안티고노스 고나타스의 부하들과 아테네와 코린토스에 두고 온 휘하 군대의 장군들에게 몰래 편지를 보냈다. 그는 그 편지에 쓰기를, 이제 자기의 이름으로 전달되는 편지는 비록 자기 도장을 찍어 보했다고 하더라도 결코 믿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자기는 이미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그 도시를 부디 잘 지켜 주기 바라며, 아들 안티고노스를 후계자로 삼아 모든 권력을 아들에게 맡긴다고 덧붙여 말했다. 이 편지를 받은 아들은 아버지가 포로로 갇혀 있다는 뜻밖의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하며 상복까지 입고, 셀레우코스는 물론 다른 왕들에게도 편지를 보내 아버지의 석방을 도와다라고 간청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 다 내놓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볼모가 될 생각도 있으니, 아버지만은 제발 석방해 달라고 간청했다. 많은 왕들이 이 효성어린 편지를 보고 그를 지지해 주었으나 뤼시마코스만은 셀레우코스에게 데메트리오스를 죽인다면 많은 사례금을 보내겠다고 제안했다. 그렇지 않아도 늘 뤼시마코스를 미워하고 있던 셀레우코스는 한층 더 그를 야만인으로 생각하였다.

처음에는 데메트리오스도 이 불우한 생활을 잘 참았다. 얼마 후에는 그런 새활에 익숙해지고 계속해서 그 생활을 하는 동안에 기분도 풀려 운동도 하고, 때로는 정해진 범위 안에서 사냥도 하고 승마도 하면서 모든 고통을 견디었다.  그러나 점점 이런 생활에 싫증을 느끼고 술과 주사위 놀이에 빠져 지냈다.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때는 자꾸만 현재의 딱한 처지가 생각나서 더욱 더 술에 빠질 수 밖에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는 스스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지금 이런 생활이야말로 오랜 전부터 내가 하고 싶어하고 원했던 정말로 행복한 생활이다. 지금까지 나는 어리석게도 허황된 야심에 사로잡혀 이런 새활을 누리지 못했다. 대체로 야심이란 것은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몹시 괴롭히는 일밖에 안된다. 무기와 함대와 군대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 온 최고의 선을 나는 뜻밖에도 이 게으름과 한가함과 휴식 가운데서 발견해 낸 것이다."

데메트리오스는 케르소네수스에서 이 같은 감금 생활을 지내는 동안 운동 부족과 술 때문에 병에 걸려, 마침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때 그의 나이 54세였다.

그가 죽자 셀레우코스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그 자신도 데메트리오스를 시기한 데 대해 뼈저리게 뉘우쳤다. 아들 안티고노스는 아버지의 유골이 시리아로부터 온다는 슬픈 소식을 듣고, 전 함대를 이끌고 부근의 섬으로 마중을 나갔다. 여기서 셀레우코스가 금 항아리에 담아 보낸 부친의 유골을 받아 자신이 이끌고 온 가장 큰 배에 모셨다. 그리하여 그 배가 도중에 닿는 곳마다 시민들이 나와 그 영전에 꽃을 바치고 장례식에 참석할 대표단을 보냈다. 이윽고 함대가 코린토스 항구에 닿자, 자줏빛 헝겊으로 덮은 유골 항아리와 그 위에 얹은 왕관이 갑판 높은 곳에 보였다. 그리고는 한떼의 청년들이 그것을 받아서 뭍에 올랐다. 그 곁에는 당시 이름난 음악가인 크세노판투스가 피리로 장엄한 가락을 불고 있었다.  이때 노꾼들의 노젓는 소리가 마치 상여꾼의 노랫소리 같아 안티고노스는 고개를 숙인채 눈물을 흘리고, 지켜보는 사람들도 모두 한결같이 슬픔에 잠겼다. 데메트리오스의 유골은 일찍이 데메트리오스의 이름을 따서 붙인 도시인 데메트리아스로 옮겨졌다.

그 뒤의 일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안티고노스 고나타스가 마침내 기회를 틈타 마케도니아를 점령하여 왕이 됨으로써 마케도니아에 안티고노스 왕조가 뿌리내리게 되었다.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마케도니아의 왕위를 이어오다가 페르세오스 대에 이르러 로마인에게 정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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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메트리오스 2004-07-10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다 썼다!!

물만두 2004-07-10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고하셨어요...


꼬마요정 2004-07-10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명의 삶을 혼자 다 살았네요~ 좋은 이야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