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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에 남은 아름다운 날들
베스 켑하트 지음, 윌리엄 설릿 사진, 공경희 옮김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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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의 챈티클리어를 만들어 줄 아돌프는 어디에 있는가?

 

  

  내 생에 남은 날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리고 내가 받은 축복 중에서 무엇을 소중히 여겨야 하나? 무엇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날들이었다고 기억될까?  어느 날 저자 베스 켑하트의 머리 속에 떠 오른 질문이다. 그리고 엄마이자 아내이고, 딸이자 자매, 친구인 그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30에이커쯤 되는 챈티클리어 정원에 왔다. 그녀가 이 곳을 찾은 때는 바로 자신의 생일, 마흔 한살이 된 그 날이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그녀는 삶에 대한 의미와 방향을 찾은 듯했다. 그녀는 정원에서의 심정을 이렇게 말한다.

 

 내 마음을 아주 강렬하게 사로 잡은 것은 정원에서 느끼는 차분함이었다. 그곳에서는 걱정거리도 줄고 마감이나 혼란스러움에도 덜 쫓겼다. 잃은 것보다는 얻는 것과 감사함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그곳에서는 내 나이조차 축복으로 여겨졌으며 오랫동안 품었던 의문에 조용히 해답을 얻었다.

 

  급하게 달려가던 자신의 발걸음을 조금 더디게 한 후, 그녀는 그 곳에서 자연의 숨결을 호흡하며 삶의 안정과 평화, 그리고 여유로움을 느낀 것이다. 인간의 영혼이 가장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자연, 바로 그 곳에서.

 

  이 책에서 저자는, 책 속에 담겨져 있는 흑백사진과 함께, 자신이 정원에서 느꼈던 자연의 평화로움과 그 안에서 발견되는 삶의 숭고함을 조용하지만 너무나도 아름답게 표현해 주고 있다.

 

 

  몇 주전인가. 대학교 선배와 함께 전주시에 있는 신문사에 일에 있어 그 곳에 간 적이 있었다. 신문사 사장님과의 시간 약속이 지체되어 시내 도로변 구석에 있는 찻집에 들어가 전통차를 마시며 한 시간 정도를 보냈다. 그 찻집은 우리가 평소에 잘 가는 커피숍과는 다른, 옛 한옥집 그대로를 찻집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기와지붕이 있고 툇마루가 있고 안방과 사랑채가 아담한 마당을 둘러싸고 있는. 마당에는 화사하게 핀 꽃들과 조화를 이룬 잡초들이 여기저기서 자라고 있었고, 그 구석에는 돌로 만든 절구와 돌상이 있는 조용한 곳이었다. 어디에선가 은은히 퍼져 나오는 목탁소리와 풍경소리는 그런 고용함을 더욱 깊게 만들어 주었다. 그 당시 나는 내가 앉아 있는 곳이 전주 시내 한 복판임을 잊어 버린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찻집은 내가 어릴 때 동네에서 가끔 보았던 대청마루와 사랑채가 있는 단순한 한옥집이었을 뿐이었지만, 그 날 내가 느낀 감정은 어릴 때 받았던 느낌과는 전혀 다른 그런 느낌이었고, 산 속에 있는 절이나 등산을 하다 만나게 되는 자연을 바라보며 느끼게 되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 마음은 점차 편안해져 갔고, 곧 이어 눈이 스르르 감기면서 달콤한 졸음이 내 어깨를 넘어 눈가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아마도 이 곳이 그 동안 내가 보았던 자연과는 다른, 우리들과는 일정한 거리를 둔 채 보존되어 온 자연공원이나 산 속의 절간이 아닌, 내가 어릴 적 살았던, 그래서 내 인생의 구석 어딘가에 이미 존재하는 그런 곳이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선배와 나는 이런 말을 하게 되었다. '이 곳에서 느끼는 여유로움과 평안함은 바로 여기가 우리들의 유전자 속에 담겨져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을 우리 자식들에게도 물려 줘야 하지 않겠는가? 과학 문명이 발달하고 인간의 삶이 아무리 진화한다 해도, 결국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미래는 SF 영화에 나오는 첨단 과학으로 이루어 진 삭막한 철제사회는 아닌 것 같다. 도리어 우리 머리 속에서 잊혀져 가는,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그리고 수 천년동안 우리들 유전자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오래된 것을 재현함으로써 그것을 우리의 미래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오래된 미래'를 구현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인 것 같다.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이런 삶의 모습을 우리 인생에서 쫓아낸 것이 바로 우리 세대들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초가를 없애고 슬레이트로 지붕을 덮는 것이 새마을 운동이었고, 단층 기와집을 허물어 버리고 아파트를 짓는 것이 삶의 질을 높이는 것으로 생각하며 살아왔다. 고창한 거목을 잘라내고 그 곳에 시멘트 건물을 짓는 것이 현대화이었고,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맑디 맑던 개천이 화학약품으로 범벅이 되는 것 쯤은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며 살아 온 지금의 4050 세대들. 인생의 성공이란 좀 더 나은 경제력을 얻는 것이었고, 사회적인 지위 상승은 서구의 합리주의를 배우는 것으로 얻어 질 수 있다고 확신했던 50년, 60년대 생들.

 

  이와 같은 우리의 발걸음으로 인해 우리가 이 땅에 남긴 것은 유기물에 오염된 고기와 중금속으로 범벅된 야채들, 그리고 이유 모를 여러가지 질환과 항생에 내성이 강해진 세균들 뿐.혹시 한 조각의 음식과 순간의 심리적인 만족을 위해 내가 돌아가야 할 고향을 현대화라는 미물에게 팔아 넘긴 것은 아닌지?

 

  내가 예전에 더러운 곳이고 미개한 삶이라고 버린 이 곳이 지금 나의 마음을 부드럽게 쓸어주며 나에게 웃음짓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마치 자식들을 성공시키기 위해 자신이 가진 논, 밭을 팔아 학비를 대준 후, 배운 것이 없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따돌림을 당한 늙은 노부부의 모습이 떠 올랐다. 나를 키우고 오늘의 나를 만들어 준 그들이지만 대화가 안 통한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손주 한번 제대로 안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우리의 부모님들.

 

  그녀는 챈티클리어를 만든 아돌프 로젠가르텐을 생각하며 이렇게 말한다.

 

  “20세기 초 이 곳은 아름답지만 위압적이지 않은 사유지가 되었다. 챈티클리어라는 이 정원은 아돌프 로젠가르텐 주니어의 선물이다, 성공한 사업가인 그의 부친은 1913년에 이 부지를 조성했다. 아돌프 로젠가르텐 주니어는 챈티클리어 언덕에서 성장했다. (중략)이 땅에 대한 아돌프의 사랑은 실질적이며 시적이었다. 그는 나무를 사랑했고, 연못을 사랑했고, 풍경을 사랑했고, 고요함을 사랑했다. 나이가 들면서, 인근이 교외 주거단지로 변해도 그는 이 부지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아돌프가 어린 시절을 보낸 언덕을 불도저로 밀고 똑 같은 모양의 집들을 세우는 것을 참지 못한 덕분에 챈티클리어는 오늘 날 존재한다.

 

  우리의 아돌프는 어디에 있을까? 내가 돌아 갈 곳을 지켜줄, 아니 나는 이미 시기적으로 늦었다 치더라도, 내 자식과 그 자식들이 돌아갈 우리의 챈티클리어를 보존해 줄 그는 누구일까?

 

  베스 겝하트는 이 책을 통해 내 인생의 남은 날들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 지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게 해 주었고, 자연의 오케스트라를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 주었고, 그리고 물 속에 잠긴 돌상을 바라보며 내 모습을 다시 한번 되돌아 보게 해 주었다. 엄청난 인생 철학이 아닌 20분이면 돌아 볼 수 있는 한 정원 속에서의 일기를 가지고.

 

 그녀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우리에게는 돌아 갈 곳이 있어야 해요. 그리고 이 곳 챈티클리어가 바로 그 곳이예요. 이제 당신도 자신의 챈티클리어를 준비해야 되요. 지금 시작해서 혹시라고 내가 갈 수 없다면, 내 자식과 그 자식들이라도 인간 본연의 호흡을 느끼고 자신 속에 담긴 자연의 유전자를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는 그런 곳 말이죠. 이제는 챈티클리어를 상상만 하지 말고 실제로 만들어 보세요. 언젠가는 우리가 돌아 가야 할 유일한 삶의 고향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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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럿 피쉬
오오사키 요시오 지음, 김해용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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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리들이 살아오면서 만나고 헤어진 사람들과의 관계는 기억이라는 깊은 호수 속에 잠겨 있다. 이것들은 눈으로는 볼 수는 있지만, 손으로 다시 붙잡을 수는 없다. 그리고 이런 기억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 만약 이런 사실을 인정한다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당신을 위해 파일럿 피쉬가 되어 준 그 누구이다.’  [파일럿 피쉬]가 담고 있는 내용이다.  

이 책, [파일럿 피쉬]는 우리들이 살아 오면서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해 온, 그렇기에 일상적으로 항상 부딪치면서도 그것을 거의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소재로 삼은 책이다. 어쩌면 우리들은 이런 소재 자체가 소설의 주요 테마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조차도 느끼지 못한 채 살아 왔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책 자체의 이야기 전개와는 상관없이, 주인공들이 겪게 되는 사건이나 서로 주고 받는 대화 속에서 독자 자신의 지나간 모습들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의 내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이런 내 모습을 만들어 준 사람은 누구일까?

내가 과거에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사람이 다시 전화를 한다면 나는 뭐라고 반응할까?

나와 헤어진 그 사람은 지금도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나 같으면 한 직장에 19년을 다닐 수 있을까? 그것도 남들에게 내 세우기 불편한 일을 하는 직장에서 등등.

 

그리고 살아오면서 겪었던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의 순간들이 색 바랜 영화필름처럼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갈 것이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준 사람들에 대한 회상과 후회, 그리고 고마움의 감정들이 서로 교차하면서 마음이 복잡해 질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삶에 대한 심오한 철학이나 인간이 갖추어야 할 바람직한 삶의 모습과 같은 거창한 이정표를 얻고자 하지 않았다. 단지,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 깨닫지 못한, 내 안에 잠겨있는 깊은 호수 속을 한번 들여 다 볼 수 있게 나를 그 곳으로 이끌어 주기만을 바랬다. 오랜 시간 돌보지 않아 물이끼로 탁해진 호수의 수면을 걷어내고, 그 안에 고요히 잠겨 있는 과거의 아련한 추억들을 하나씩 수면 위로 끄집어 내 깨끗이 닦아 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해 주기만을 바랬다.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느꼈기에. 그리고 저자 오사키 요시오는 기대에 어긋나지 않고 나를 그 곳으로 이끌고 간다. 그는 우리에게 대단히 소중한, 그리고 무척 큰 선물을 준 것이다.

 

다만 여기에 한 가지만 더 덧붙여 보고자 한다.

 

나는 이 책에 나오는 파일럿 피쉬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나의 파일럿 피쉬는 누구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이에 대한 답은 바로 내가 나의 파일럿 피쉬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 그렇기에 함께 모여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살아 간다. 그리고 그 안에 우리가 느끼는 기쁨과 슬픔도, 사랑과 증오도, 그리고 고통의 거의 모든 것이 녹아 있다. 내가 누군가를 기쁘게 했다면, 그는 또 다른 누군가를 기쁘게 해 주었을 것이고, 내가 누군가를 슬픔에 잠기게 했다면 그 역시 또 다른 누군가를 울게 만들었을 것이다.

 

'나'라는 작은 잎사귀 하나가 호수에 떨어져 일으킨 잔잔한 파문은 호수 전체로 서서히 번져 갔을 것이고, 그러한 파장의 물결은 결국엔 나에게 다시 다가와 내 잎사귀의 갈라진 틈새 하나를 건들였을 것이다.

 

아마도 나의 파일럿 피쉬는 또 다른 누군가를 자신의 파일럿 피쉬로 삼고 살아 왔을 것이고, 나 역시 내가 아닌 또 다른 누군가의 파일럿 피쉬가 되어 살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파일럿 피쉬들의 연결 속에서 내가 보낸 하나의 메시지가 결국 나에게 전달됐을 것이다.  

 

사람은 항상 받기만 하거나, 또 반대로 주기만 하는 경우는 없다. 그리고 자신을 잊어버린채 항상 다른 누군가 만을 위해 살아가는 경우는 더더욱 없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기에. 가난한 자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조차 가난한 자, 그를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심적인 평화를 얻고자 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너무 무리한 정의일까?

 

파일럿 피쉬는 다른 사람의 삶을 위해 존재한다고 하지만, 분명히 자신의 역할을 고통스럽다고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삶 자체가 자신의 삶이라고 알고 있기에. 그리고 자신 역시 자신을 위한 파일럿 피쉬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나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이 책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대화처럼 파일럿 피쉬를 보며 불쌍하다고 느낀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살아 가는 이 세상에서 습득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위에 있는 자와 아래에 있는 자, 부리는 자와 부림을 받는 자, 버린 자와 버림을 받은 자의 이분 법적인 사고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생긴 판단이 아닐까 하는.

 

과거 언젠가 나를 위해 살았다고 기억되는, 나의 파일럿 피쉬였다고 생각되는 그 사람은 자기 스스로가 그 순간을 고통이라고 생각하며 그 순간들을 보냈을까? 그리고 그는 지금, 그 순간을 되돌아보며 괴로워하고 있을까? 그래서 그는 불쌍한 사람인가? 우리는 그것을 알 수가 없다. 오직 그 자신만이 알 뿐이다.

 

나는 우리들이 파일럿 피쉬의 삶을 불쌍하게 바라보기 이전에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것을 포기한 파일럿 피쉬의 삶을 사랑하고, 그런 행동을 기리는 세상이 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잠시 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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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유다의 밀약 - 유다복음
로돌프 카세르 지음 / National Geographic(YBM시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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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지금의 이해할 수 없지만, 무엇인가 의미를 담고 있는 복음서

 

 

  고등학교 시절을 되돌아 볼 때마다 생각나는 가슴 아픈 사연이 하나 있다. 그것은 종교때문에 고등학교 입학 때부터 2년 동안을 거의 붙어 다니다시피 했던 친구 한 명과 헤어지게 된 사건이다. 그것의 발단은 성모 마리아였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카톨릭 집안이다. 아버지쪽 집안도, 어머니쪽 집안도 모두 카톨릭 신자들이었다. 그 덕분에 나는 태어나자 마자, 나와는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물론 물어 봐도 아무 말 못했겠지만, 차디 찬 성수로 세례를 받았고, 지금의 이름도 그 때 받은 세례명을 그냥 호적에 올려버린 것이다.

 

이런 집안 분위기 덕분에 유아세례를 시작으로, 국민학교 때 영세, 고등학교 때 견진 성사, 대학원 마치고 혼인성사, 이제 죽어가면서 종부 성사만 받으면 천주교 신자가 받아야 하는 세례는 다 받는 것이다.

 

태생교우란 천주교 내력을 가진 나에게 그 친구가 어느날 갑자기 도전을 한 것이다.

 

! 너희 천주교 신자들은 왜 사람을 믿냐?

사람을 믿어? 예수님 말하는 거야?

아니 예수님말고, 마리아라는 예쁘장하게 생긴 예수님 엄마 말이야!

! 너 성모 마리아님에게 감히 예수님 엄마가 뭐냐? 넌 느그 할머니한테도 할망구라고 부르냐!

 

이렇게 말로 옥신각신하다 그 다음엔 몸싸움으로, 그리곤 주먹 싸움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의 발이 상대방의 얼굴로 가슴으로 왔다 갔다 하더니, 결국엔 피를 보게 된 것이다. 그 날 이후로 그 친구가 어떻게 지내는 지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다.

 

언제인지 날자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주일미사를 보던 중, 갑자기 그 친구 생각이 났다. 그리고 성당 제단 앞에 놓여 있는 성모 마리아상으로 눈길이 갔다. 그 때 그 분이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그 친구가 그립죠! 누구의 잘못이든지 간에. 난 이미 축복을 받았고, 선택을 받았고, 하늘에 올라 성스러운 자리에 있어요. 세상의 누가 나를 미워한다고 해서 내가 버림받는 것도 아니고, 누가 나를 헐뜯는다고 해서 나의 성스러움이 사라지는 게 아니죠. 나는 이미 성스러움 그 자체로 있어요. 마치 하느님(하나님)의 존재와 성스러움이 인간의 평가에 의해 달라지는 것이 아니듯이. 나를 위해서 화 내지 말고 사소한 일로 친구와 헤어진 자신을 생각하세요. 중요한 건 바로 자신 속에 살아 숨쉬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사랑이고,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충만함이니까요.'

 

홀로 성스럽고 홀로 존재하는 신과는 달리, 인간에게 있어 종교란 이쁘다고 해서 십자가를 목에 걸고다니는 패션의 한 방법이거나, 일주일에 한번 예배를 드리면서 자신의 정신과 영혼을 정화하는 명상과 같은 수준은 아닐 것이다. 이것은 한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뿌리박고 있는 그 사람의 근본적인 신념체계이자 가치관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런 종교의 이름으로 어떤 시대엔 수많은 여자들을 불태워 죽였고, 어떤 시절엔 자신의 종교를 강제로 전파하고자 조용히 살고 있는 나라를 침범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순수한 종교성을 이용해서 한 민족의 말살정책을 거리낌없이 선포하고 실행했으며, 또 언젠가는 신의 이름으로 대도시 한 복판에 있는 대형빌딩을 스스럼없이 비행기로 폭파하기도 했다.  

 

만약 이 책, 유다복음을 이를 심각하게 바라본다면, 세계의 3대 종교 중 2개 종교, 기독교와 이슬람교, 의 존재 기반을 흔드는 이단적인 악음(Demon Words)으로 보일 수도 있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로 인해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도 못한 새로운 종교분쟁의 씨앗이 될 수도 있는 책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유다복음의 내용은 이 책을 감수한 사람들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 시대의 철학과 신화를 그대로 이어 받은 듯한, 그래서 그 때 살고 있던 사람들의 세계관과 우주관이 바로 진리라고 말하는 듯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머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구약성서에서의 야훼, 신약성서에서의 하느님/하나님, 이슬람교의 알라 모두를 하급 신으로 규정짓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신은 하급 신이며 그 위의 더 높은 천상에는 다양한 영계가 있고, 이러한 영계들 중 가장 높은 곳으로 갈 수 있는 사람은 영이 아닌 혼을 가진 사람은 셋의 자손일 뿐이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믿음이 아닌 지식이 필요하며, 이 세상의 모든 중계자들은 모두 우리를 잘못된 곳으로 이끌고 있다. 등등

 

그러나 긍정적으로 이 유다복음의 내용을 바라본다면, 이 복음은 인간들이 필요로 하는 시기에, 필요한 지식을, 필요한 만큼 우리들에게 전달해 주는 고마운 복음이라고도 규정 지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의식혁명]을 쓴 데이비드 호킨스박사는 인간의 정신은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진화해 나간다고 한다. 그리고 이 진화단계는 아주 낮은 단계, 즉 미움과 질투, 공포를 느끼는 수준에서부터 중간보다 조금 높은 수준에 있는 사랑의 단계, 그리고 그 위에 예수와 같은 수준의 정신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진화는 점진적인 진화가 아닌, 계단식의 진화로 발전되어 나가는 데, 이러한 진화는 인간 스스로가 발전시킨 것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그 어디에 선가로부터 어느 날 갑자기 내려 받음으로써 이루어 진다고 한다. 불의 사용, 농경시대의 시작, 그릇과 무기 사용, 그리고 수많은 이론과 발명 등등.

 

그리고 [아직도 가야 할 길]로 유명해 진 심리학자 M. 스캇 펙박사는 이러한 정신적인 진화를 통해 인간이 도달하고자 하는 최종의 목적지는 바로 우리가 태어난 곳, 즉 신에게 다가가는 것이라고 한다.

 

호킨스 박사나 스캇 펙 박사의 논리가 맞다면 우리들이 어떤 사물이나 이론, 그리고 현상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거리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의 의미는 이미 우리들이 그것을 받아 들일 수 있는 정신 수준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해도 크게 무리는 없다고 본다.

 

띠라서 유다복음은 인간들이 이해할 수 없는, 우리의 정신이 감내할 수 없는 시기에 만들어졌기에 어쩔 수 없이 오랜 세월 잠자고 있다가, 우리들이 이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한 지금에야 비로소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이라도 해석한다면 너무 허무맹랑한 논리일까?

 

유다복음은 분명히 현세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의미하는 것이 있을 것 같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지 간에. 그러나 나의 지적 수준이 부족하기에 , 그래서 유다복음이 어떤 의미를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한 것이지 지금 내가 가진 지적 수준으로는 알 수 없기에, 이 책 내용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이런 것도 있었구나 하는 것과 우리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거의 모든 것이 인간의 선택에 의해 정의 내려진 것이구나 하는 두 가지만을 이해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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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치를 올려라 - QBQ 어드밴티지 법칙
존 G. 밀러 지음, 정명진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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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언제나 어떤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다. 우리 스스로에게 한 질문이던,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한 질문이던지 간에. 결국 우리의 모든 행동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실천으로 옮긴 것일 뿐이라고 한다면 너무 과장된 말일까?

 

재미있는 점은 동일한 상황에서 우리가 어떤 질문을 던지느냐에 따라 대답의 내용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건널목의 신호등이 빨간 불일 때 횡단보도 한 가운데에서 어떤 아이가 오도가도 못하고 혼자 서 있다고 가정해 보자. 만약 우리가 누가 어린 아이를 저런 곳에 세워 놓은 거야! 아이 부모는 다 어디 있어? 라고 질문을 하게 되면, 우리는 부모를 찾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동일한 상황에서 어린아이가 위험한 곳에 혼자 서 있네! 저 아이가 다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라는 질문을 생각해 내면 아마도 우리는 어린아이를 안전한 길가로 데리고 오기 위해 횡단보도를 건너 그 아이에게 다가가거나, 지나가는 자동차들을 세우려고 하거나, 아니면 경찰을 부르려고 할 것이다.

 

시장조사회사에서 정확한 자료를 모으고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연구하고 고민하는 여러 과정들 중 가장 중요한 과정은 설문지를 만드는 과정이다. 조사결과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일이란 결국 설문지를 통해 얻어진 자료를 여러 가지 통계기법을 활용해 하나의 방향성을 찾아 내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복잡하고 고차원적인 통계 프로그램이나 진단 방법을 동원해도 잘못된 설문지로 인해 얻어진 잘못된 대답의 오류를 이겨낼 방법이 없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던진 질문 그 자체가 우리의 대답과 행동을 결정할텐데, 왜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적합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것일까? 이것이 [스위치를 올려라]의 저자가 가진 기본적인 의문이었으며,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에게 던지는 올바른 질문, The Question behind the Question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핵심적인 메시지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동안 내 자신에게 또는 나와 함께 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던진 질문들을 생각해 봤다. 그리고 가장 기본적인, 그러나 삶의 방향에 무척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 하나를 잊어 살아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바로 내가 어떤 결정을 하고 행동을 했던지 간에 이 모든 것의 시발점은 바로 내가 나에게 던진 질문이라는 점이었다.

 

직장생활 시절, 상관이 나에게 어떤 일을 맡기면 이런 생각을 먼저 했던 것 같다. 이일을 누구에게 시키지? (Who) 이런 일을 왜 나에게 맡기지? (Why) 아니면 이 일이 언제나 끝날 수 있을까? (When) 이 때 만약 내가 이 일이 어떤 결과를 원하는 것이지? (What)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면 되지? (How) 와 같은 질문을 내 자신에게 던졌더라면 그 당시 내가 내린 결론보다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았을까!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QBQ질문들은 What(무엇을) 혹은 How(어떻게)로 시작한다. Why, When, 혹은 Who가 아니다. 그 이유에 대해 저자는 Why라는 질문은 곧장 불평이나 희생자적인 사고로 이어지기 때문이고, When질문은 꾸물꾸물 늑장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Who는 비난으로 이어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며칠 전 화장실에 세수하러 들어갔다가 바닥을 덮은 물에 미끄러져 크게 다칠 뻔한 적이 있었다. 그 날은 우리 아이가 샤워를 마친 직후이어서 화장실 바닥이 물에 흥건히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미끄러지면서 순간적으로 세면대를 잡았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몸 어딘가가 크게 다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 때 순간적으로 내 머리 속에 떠 오른 질문, 누가 화장실 바닥을 이렇게 만들어 놓았어? 아마 이 질문을 잊지 않고 우리 아이를 만났으면, 그 아이는 그 날 나에게 무척 혼이 났을 것 같다. 샤워를 하고 나면 당연히 화장실 바닥이 물에 적을 수 밖에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또 야단치는 아빠 역시 샤워를 한 후에 물에 젖은 화장실 바닥을 그냥 놔두고 나온 적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빠라는 이유 하나때문에.

 

그 순간 QBQ 가 떠 올랐다. 이런 질문이 과연 올바른 질문인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우리 아이의 행동 하나가 떠 올랐다. 내가 샤워를 하고 나온 후, 화장실에 다시 들어가 보면 아이가 깔아 놓은 듯한 수건이 항상 바닥에 깔려 있었던 것이 생각난 것이다. 바닥이 물이 젖어 미끄러우니까 거기에 수건을 덮어 놓은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나이 50이 다 되어가는 아버지가 이제 고2가 된 아들만큼도 문제를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질문를 스스로에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저자는 QBQ, The Question Behind the Question 질문 뒤에 숨은 더 좋은 질문, 을 이렇게 정의한다.

 

   “QBQ는 순간순간, 보다 훌륭한 질문들을 던지고, 보다 나은 선택을 함으로써, 모든 계층의 지도자들이 개인의 책임감을 실천할 수 있도록 돕는 하나의 도구이다.

 

저자는 올바른 질문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주인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여건 속에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일차적인 사람은 바로 당사자 자신이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주인의식만이 자신에게 닥친 문제의 원인이나 이유를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거나, 또 남이 해 줘야 한다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대답을 하게 만드는 질문을 하지 않게 만들어 준다는 한다.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뿐이다. 그리고 이 말에 동의한다면, 우리의 부정적이고 부적절한 행동을 바꿀 수 있는 방법중의 하나가, 우리 자신이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던, 그리고 얼마나 다양한 삶을 살아 왔던지 간에 상관없이, 그것을 결정하는 데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것, 즉 우리 스스로에게 어떤 질문을 할 것인가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질문 뒤에 숨은 더 좋은 질문 The Question behind the Question 은 우리 자신을 한번 되돌아 보게 해 주는 것 같다.

 

    어떤 문제나 좌절에 봉착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먼저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지?'라거나 '언제 다른 사람이 이 문제를 해결해 줄까?' 라는 질문으로 채워지는 경향을 보인다. 이런 질문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이해도 간다. (중략) 우리가 잠시 멈춰 서서 그런 상황에 처할 경우 가장 먼저 자연스럽게 떠 오르는 질문들의 뒤쪽을 살필 때에만 더 멋진 질문이 발견될 수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뭘까?' 라거나 '어떻게 하면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같은 말들이다. 이런 질문들을 던진다는 것은 초점을 우리 자신에게로, 그리고 상황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일로 돌린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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