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H -상
세노오 갓파 / 동방미디어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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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50여년 동안의, 잊고 잊게 하려는 거센 풍상 속에서 다 닳아버린 듯한 우리나라의 일제 36년.  그 외에 아시아, 세계 각 국의 너무도 비참했던 그동안의 세월들. 하지만 정작 우리의 이웃(?)인 그 무렵의 일본인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고 이 책은 그 시기, 한 소년의 남겨야만 할 기록이었다. 전쟁에 광분하던 일본은 국민들의 것이 아닌 악마같은 군국주의자들만 사는 나라였다. 그 일본 안에서도 진정한 신의 사랑을 지니고 시류에 휩쓸리지 않으며 소신을 지키는 가족들이 있었다는 것은 이 책의 저자가 일본인이라는 것만큼이나 큰 충격이었다. 물론 그 놀라움의 한 켠에서는, 36년 동안 고통받았던 우리들에 대한 자기 합리화인가 싶어 씁쓸함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이 책이 일본의 베스트셀러였다는 사실도 내게는 그 합리화에 대한 그네들의 동조로 받아들여졌다.

 그렇더라도 'H'의 가족은 광분하는 전쟁의 물결 속에서도 미워할 수 없는 '유일한' 일본인이었다. 단지 피해자인 우리의 입장에서 미워하고 증오했던 것과는 달리 억울하게 살아간 이들 중 하나였다. 철저한 군국주의 교육으로 어린 요시코까지 '천황 폐하를 위해 목숨을 바치자'는 끔찍한 노래에 물들어가고 강제적인 전체주의로 '비국민'을 '만드는' 때에 있어서 H의 가족은 그 허상을 철저히 깨닫고 있었다. 다른 이들도 그랬다면 이런 전쟁은 일어나지도 않았겠지만 말이다. 신중한 자유주의자인 아버지와 철저한 박애주의자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나어린 H가 주관을 세웠다는 것은 군국주의자들의 무력함을 깨닫게 했다.

 H는 그 무력함의 물결을 거슬러 올라갔다. 음침한 군가 대신에 후지와라 요시에의 오페라를 들었고 에로 천의 교련 대신에 마네를 그렸다. 잔인한 전쟁이 싫어 자살을 선택한 '남자 언니'의 길을 밟지 않으면서 자기 나름의 자유로움을 즐긴 것이다. 명색이 민주주의라는 오늘날의 체제에서도 '입시'라는 중압감으로 생각지 못하는 보석을 찾은 것이다. 심지어는 용돈이 없어서 스스로 '사업'을 생각해내기도 했다. 더구나 그 사업이 마치 어른이 하는 것만 같은 스모 역사(力士) 브로마이드의 판매도 아닌 교환 '중개'라는 데는 그 영악함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이 못잖게 영악하지만 반대로 혐오스러운 경우는 건국 기원 2600년의 경축행사였다. 전쟁을 앞두고 국민들을 더욱 선동할 필요를 느낀 군부가 유치에 실패한 올림픽, 만국 박람회의 대용으로 개최하는 것이라는 숯가게 아저씨의 말에 빵과 서커스의 또 한 가지 예를 보았다. 다만 걱정될 뿐이다. 이 서커스의 곁을 맴도는 H가 '비국민'의 괴로움을 견딜 수 있을지……(1998. 8. 7∼9, 1998. 8. 9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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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판토 해전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4
시오노 나나미 지음, 최은석 옮김 / 한길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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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감이 교차한다. 지난 얼마간 넘나들었던 지중해의 운명 속에서…… 그만큼 시오노의 필력은 나같이 하찮은 독자까지도 책을 놓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다. 하지만 이제 막은 내렸다. 마지막 무대는 떠나는 배우들을 배웅이라도 해주듯이 화려한 구석이 적지 않았다. 종막을 알리는 종소리는 길고 길었지만 정작 막은 너무도 빨리 내려온 것이 아쉬울 뿐이다.

 지중해의 한 섬, 키프로스에 대한 투르크의 공격으로 불이 당겨진 이 전쟁은 그 공격에의 대응이 너무나도 더뎌서 참고 기다리기가 힘들었다. 물론 서로 상이점이 많은 3개국 이상의 연합함대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주도국인 베네치아의 오랜 평화로 말미암은 균형 감각의 상실이 더 큰 이유인 듯 했다.

 결국 힘들게 모인 일차 연합함대는 결렬되고 말았지만 상당한 카리스마의 소유자인 돈 후안과 베네치아의 '해상 포대', 갈레아차가 등장한 이차 함대에서는, 비로소 호시탐탐 지중해를 노리는 이교도를 물리칠 수 있다는 희망을 나 자신도 느꼈다. 이 희망은 빗나가지 않아서 레판토는 '이교도' 투르크에 대한 최초, 최대의 승전지로 기록되며 메메트 2세의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래 자그마치 120여년 동안 계속되던 투르크의 지중해 지배 야망은 궤멸된 듯 했다.

 하지만 한창 떠오르는 투르크에게 이 패전의 타격이란 재상(宰相) 소콜루의 말 대로 수염이 타 버린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는 베네치아가 잘린 팔을 이을 차례였음에도 불구하고 후속 함대는 스페인의 방해로 결렬되고 베네치아는 다시금 안정으로의 회귀를 위해 투르크와 강화를 체결할 때, 너무나도 분했다. 이 강화는 종교로 대표되는 명분보다도 차라리 툭르크에서 주어지는 이익을 택하던 '상인의 나라' 베네치아의 실리주의가 아니라 오직 안정만을 희구하는 나약함만을 드러낸 꼴이었기 때문이다. 이 강화가 가져다 준 70년의 번영 동안 무대는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옮겨짐으로써 이제야 막이 내렸다. 끝이 보이지 않던 지중해의 이야기가……(1998. 4. 2∼5 1998. 4. 5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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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도스섬 공방전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5
시오노 나나미 지음, 최은석 옮김 / 한길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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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리즈의 전부가 맘에 들었다. 결국에는 이 세 권 중에서 제일 얇은 이 책에 가장 큰 관심을 쏟았음을 고백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는 사실까지도 못내 즐거웠다. 장미꽃 피는 지중해의 옛 섬, 로도스를 둘러싼 오스만의 '대제(大帝)' 술레이만과 '그리스도의 기사' 성 요한 기사단의 대결 구도는 공격과 수비의 양 극에서 누구에게 그 초점을 두어야 할지 조차 갈피잡지 못하게 했다. 나도 어느새 그곳의 장미 향기에 취했나보다. 그래도 내 눈은 역시 정의의 편(?)인 성 요한 기사단을 향했고, 그 시선의 중심에 신의 뜻에 절대 복종한다는 원칙과는 동떨어진, 너무도 자유롭고 현실적인 오르시니가 굳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이 '아이러니'라는 단어의 뜻을 음미해보게끔 했다. 

 어떤 집단이라도 전성기보다는 몰락기에 접어들어서야 그 잠재력과 정신력의 극치를 보여준다. 게다가 이 기사들에게는 그 강인한 정신에 고귀함까지 스며들어서 절로 감탄의 신음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나와 함께, 맹목적인 열정에 휩싸인 '저물어가는 기사 계급', 기사들을 차가운 웃음을 머금고 바라보던 이가 바로 '냉정하지만 자유로운' 오르시니였다. 가끔씩 보는 중세 배경의 영화에서 막연히 '멋있다'는 느낌을 주었던 기사들이었지만 밀려오는 적군을 칼로 몰아내고 날아오는 포탄을 방패로 막아내는 그들은 같은 기독교도인 서구의 왕공귀족들에게서도 잊혀진 '외로운' 존재였다. 하지만 그 외로움이 그들의 은빛 갑주를 더욱 빛나게 했으리라.

 그런 기사들의 상대 또한 그 못지 않았던 것도 이 전쟁의 볼거리였다. 술래이만은 실로 맺고 끊임이 분명한, 이 전쟁의 참가 자격이 충분한 '기사'였다. 10만의 대군을 혹한의 겨울까지 몰아침은 맺음이요, 그러다가도 금새 평화조약을 맺음은 이 전쟁을 끊음이었다. 이런 그에게 '이교도'인 기사들마저도 나날이 빛나는 투르크의 영화를 뽐내는 황금빛 천막 안에서 고개를 숙이고 떠났다. 이로써 기사로 대표되는 귀족의 시대는 막이 내리고 왕의 시대가 열렸으니 선명한 눈빛을 품은 채로 잠든 오르시니를 로도스 옛 섬의, 그 가슴의 피처럼 붉은 장미가 감싸주었다. (1998. 3. 30∼4. 2, 1998. 4. 2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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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플 함락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20
시오노 나나미 지음, 최은석 옮김 / 한길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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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유 따위는 없었다. 이런 책을 읽는 데 있어서 이유란 것은 단지 쓸모없는 잡동사니에 다름 아니었다. 희대의 대작이 될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가 쓴 책이라는 것도, 아예 사관학교에서 전쟁사 강의를 하는 옮긴이도 어서 읽지 않고는 못 견디게 하기에 남고 또 남았다. 콘스탄티노플. 해가 뜨는 곳, '오리엔트'의 어딘가에 있을 듯한, 앞으로도 그 정도로만 알 뻔했던 이 도시는 시오노와 만나며 지는 노을이 더 없이 아름다운 황금의 도시로 화(化)하였다.

 1100년의 고도, 말 그대로 지중해의 보석인 이 도시에 그 기나긴 세월 동안 외적의 침입이 없었다면 오히려 이상했으리라. 하지만 이 찬란한 보석은 그 모습만으로도 만인을 위압감에 전율케하는 삼중의 견고한 성채 안에서, 언제라도 부르면 모든 침입자를 물리쳤던 '신'의 위력으로 지켜지리라 믿었다.

 이런 도시에 다시금 손을 뻗친 갓 스물의 투르크 젊은이는 역시 달랐다. 그에게는 그만의 신이 있었으며, 그 신을 방패 삼고 8m의 포신에서 600㎏의 포탄을 쏘아대는 거포(巨砲)를 칼 삼아 밀려오는 '알라'의 이민족 앞에 신의 뜻을 찾는데 날밤을 지새던 비잔틴 인들은 애처로우리만치 약했다.

 그나마라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상인의 근성이라고는 하지만 무너져가는 제국을 위해서 몸과 마음 모두를 기꺼이 바친, 베네치아의 트레비사노, 제노바의 주스티니아니와 이 둘의 화합을 위해서 고군분투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덕이지, '신'의 덕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최후의 이면에서 추기경 이시도로스가 주도한 동 서 합동 미사로 인한 사상적 혼란, 바로 그 신에 의한 혼란이 가뜩이나 현실과 괴리된 철학 논쟁을 일삼는 비잔틴인을 분열시켰던 것이다.
 
 그 결과, 보석은 새로운 주인을 찾게 되었다. 그 광채를 먹고 자라난 서구 국가들에게는 뿌리가 끊어지는 아픔이었지만 이것으로써 세계에는 '무역 국가'가 아닌 '영토 국가'가 데뷔한 것이다. 황금 낙조에 물들어가는 콘스탄티노플은 내가 사랑하는 보석이다. (1998. 3. 21∼30, 1998. 3. 30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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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4세 3
하인리히 만 지음, 김경연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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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홀로 추궁에 시달릴 사랑스런 마르고를 염려했을까? 아니면 자신을 위해 준비된 '미끼'인 카타리나의 수많은 시녀들을 아쉬워했을까? 풍전등화의 위기 앞에서도 아름다운 여인들과 화려한 사랑만은 소중히 간직하는 그야말로 프랑스의 영원한 연인이자 바람둥이로 남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그 앞의 미래는 아름답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붉게 타오르는 증오와 붉게 물들어가는 피의 연속이었다. 언제나 푸른 물 같은 자유로움으로 파란 하늘을 내달리던 앙리에게는 괴로운 나날이었으리라. 자신의 푸르름을 검붉은 프랑스에 나눠주기 위한 통과의례일지라도 말이다. 그는 피를 원치않았던 것이다. 단지 발루아와 나바르, 기즈의 신이 제각각 피를 원했다. 그렇게 프랑스는 '세계의 지배자' 펠리페의 뜻대로 물들어갔다. 그에 저항하는 앙리에게는 끝이 없을 것만 같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펼쳐져 있었다.

 그는 경건한 위그노와 방탕한 가톨릭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즐길 수밖에 없었다. 앙리에게는 성모의 또다른 모습으로 굳어진 어머니 잔느 여왕과 신에게 거부된 자신의 결혼, 그리고 신에게 미움받는 자신의 사랑들 사이에서. 이런 경박한 생활이야말로 루브르에 있을 때부터 그가 마음 깊은 곳의 웅대한 뜻에 걸맞지 않게 하찮은 어릿광대로 여겨진 이유이기도 했다. 이 정도로 흔들거리는 나바르 왕의 길을 바로잡는 역할이 바로 모르네에게 부여되었다. 수많은 앙리의 친구들 중에서 오직 그에게만 허락된 덕(德)의 힘으로 말이다. 그의 도움으로 앙리는 비롱 원수가 쌓아올린 증오와 복수의 철옹성을 깨뜨렸다. 이 결과 앙리에게는 귀하신 카타리나 태후께서 몸소 행차하는 영광까지 아낌없이 내린다. 관리가 잘 되어있는 묘지를 가진 젊은 반란자에게 태후는 상으로 사랑에 굶주린 그의 영원한 반쪽인 마르고를 선물하고 떠난다.

 그로부터 시작된 마르고의 행복은, 구속의 사슬에 묶인 나에게는 너무도 부러운 것이었다. 유려하게 흐르는 음악 속에서 곱게 차려입은 궁정인들과 나누는 고상한 대화. 이것이야말로 비록 기울어가는 왕실의 공주지만 그녀에게 남은 마지막 꿈이었다. 그리고 남편과 주고 받는 지극한 사랑. 한 시골 소영주의 아내인 자신의 현실에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 공주는 더없이 만족했다. 비록 남편의 자유로움이 시작되는 날, 막이 내릴 행복일지라도. 고상하고 차분한 행복의 끝은 그녀의 '딸' 포쇠즈였다. 그녀의 안에 자리잡은 앙리의 고귀한 핏줄을 뒤로하고 앙리와 마르고는 상대방을 향한 복수의 불꽃을 키운다. 이제 앙리에게 그녀는 쓸모 없고, 귀찮은, 게다가 밉기까지 한 악마의 화신에 불과한 것일까? 새하얀 진주에 감싸인 코리상드여, 당신도 기억해야 하리라. 당신의 고귀한 진주들이 원망의 눈물로 맺히게 될 날을. 그렇다고 '미래의 배신자'를 향한 구원의 손길을 거둘 수는 없다. 짧지만 영원할 듯한 사랑이 필요한 사람은 정작 그가 아닌 그녀일테니. 그 사랑의 힘으로 앙리는 가여운 프랑스 왕까지도 따뜻이 감싸주고 비로소 미래의 그 자리를 약속받는다. 기즈라고 불리던 이는 발루아의 모자(母子)와 함께 깊은 심연 속으로 잠기지만 주인 잃은 왕관만은 깊이 가라앉았던 피의 강물 속에서 떠오른다. 왕관을 푸른 하늘에 장식할 주인이 나왔으니......(2000. 3. 5∼14, 2000. 3. 14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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