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감옥 버티고 시리즈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미정 옮김 / 오픈하우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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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펠리세이즈에서 태어났고
지금은 이탈리아 포시타노에서 살고 있으며
이 책의 대부분을 쓰는 동안 나의 감방 동기가 되어준
사랑하는 고양이 ‘스파이더’에게 바칩니다- P5

카터는 자기가 보는 앞에서 행키가 커버 없이 덜렁 놓인 변기를 쓰는 걸 질색했는데, 이걸 눈치챈 행키가 일부러 요란을 떨며 상스럽게 일을 봤다.- P7.8

"피트, 모르핀 좀 주게. 30밀리그램 다 줘." 의사가 지시했다.
의사와 피트가 카터의 소매를 높이 말아 올리더니 주사를 놓았다. 만조였다가 물이 쏴 빠지듯, 바다가 완전히 메말라버리듯 고통이 빠르게 쓸려 나갔다. 천국 같았다. 기분 좋고 몽롱하니 얼얼한 느낌이 머리를 뚫고 들어와 포근한 음악처럼 살랑거렸다. 두 사람이 그의 손에 치료를 시작하자 카터는 잠에 빠져들었다.- P18

인간의 본성이라는 게 사람을 괴롭히지 않으면 안 되는 거 같아.- P21

"난 여기에서 당신 생각하기 싫어. 여기 일 속속들이 당신이 아는 것도 싫고. 정말 구역질 나거든. 이 안에서 당신 사진을 보고 싶지 않은 때도 있어."- P38

결백함보다 자신감이 중요해.- P43

원래 이런 일은 그런 식이다. 일찌감치 시작하거나, 아예 아무 일 없거나.- P50

카터는 자기 침대로 돌아가 옆에 서서 눈을 질끈 감았다. 복도 입구로 새어 들어오는 거머누르께하고 벌건 빛이 그의 심정을 완벽히 대변해 주었다. 신물 나고 거짓된 새벽녘 같았다.- P73

징역살이에 완강히 저항하는 죄수들은 영화도 거부하고 출소 날짜만 세면서 동물원 우리를 거니는 짐승처럼 살짝 미친다.- P77

헤이즐이 보낸 가라테 교본은 검열에 걸리는 바람에 카터가 구경도 못한 채 반송되었다. 그래도 교도관이 지켜보는 앞에서 가라테 연습은 가능했다.- P81

허름한 교도소 벽돌과 돌벽은 몇 주 내내 햇빛을 품었다가 열기를 내뿜었는데, 겨울에 냉기를 빨아들이는 것과 비슷했다. 8월이면 사동은 초대형 오븐으로 변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아 밤에도 숨이 턱턱 막히고, 죄수들이 배출한 오줌과 땀 냄새가 진동했다.- P81

"감옥에 있으니 감정이 죄다 메마르는군." 카터는 혼잣말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화가 치밀었다.- P85

설리번이 카터를 차분히 쳐다보았다. 진지하고 침착한 것이 마치 스스로를 심히 고귀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P91

방에 그 남자만 있어서 카터는 감방 동기가 어디 갔는지 물었다.
"그 녀석 운도 좋수다. 집에 갔어요. 엄마가 죽어서."
"집이요?"
"네, 이틀 밤 자고 온대요. 시카고라나. 아내도 보고." 정수리가 뾰족한 그가 고개를 들더니 능글맞게 윙크하며 카터를 쳐다봤다.- P96

감옥에서 미소를 보기란 사실 굉장히 힘들었다. 비웃음이나 깔깔거리는 웃음은 많지만 순수하면서도 자연스럽고 행복한 미소는 그리 흔치 않았다.- P99

둘의 우정이 죄수와 일부 교도관 들의 눈에 거슬렸다. 어떤 이들은 두 사람을 게이 취급하면서 카터의 눈앞이나 등 뒤에서 쑤군거렸다. 카터는 그런 말에 마음 졸이진 않았지만, 그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살짝 걱정이 되긴 했다. 재소자 중에는 동성애자를 구타하며 쾌락을 느끼는 부류가 있었다. 오후에 맥스의 방으로 가는 길에 혹시나 누가 달려들까 봐 카터는 뒤통수가 신경쓰였다. 방에 있을 때면 맥스는 늘 문을 열어두었다. 그렇다고 해도 철창문 사이로 누가 들여다보는 건 아니었다. 감방 동기인 흑인도 방에 있었다.- P103

누굴 보고 싶지도, 얘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감옥에서는 사생활이 없으니까.- P104

"오늘은 아무것도 결정하지 마." 맥스가 차분하고 깊은 목소리로 조언했다. 신의 목소리로 말하는 것 같았다.- P105

목가적인 장면엔 하이파이 스테레오에서 쇤베르크와 모차르트의 곡이 흐른다.- P112

그(필립 카터)는 모르핀 양을 줄이려고 노력했다. 예전엔 하루에 네 번씩 맞았지만 세 번만 맞아도 버틸 수는 있었다. 그런데 기분이 달랐다. 예전만큼 기분이 좋거나 신나지 않았다. 카터가 데메롤 같은 진통제를 달라고 하자 카시니 박사가 뭔가를 건넸다. 이번에는 진짜로 약효가 있는 약이었다. 약이 듣긴 했지만 모르핀만큼은 아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카터는 현실을 훨씬 견디기 수월하게 해주는 가장 쾌적한 길이 모르핀임을 통감했다. 2주 동안 모르핀을 완전히 끊었다가 모르핀 양을 절반으로 줄이고 나머지 절반은 경구 진통제로 채웠다.- P113

교도소 전체는 물론 병사에서도 죄수들이 둘러앉아 법률 서적이나 변호사의 견본 서신과 사전을 참고해 탄원서를 썼다. 그들은 인신보호영장(신체의 자유를 보장하는 영미법의 일종), 일명 ‘자기 오심 영장’을 신청하고 천 개에 달하는 개별 고충을 적었다. 카터는 죄수들이 쓴 탄원서에서 철자와 문법을 손봐 달라는 부탁을 종종 받았다. 실수는 고치면 그만이지만 구성이 너무 한심한 편지는 손을 댈 수 없었다. 카터는 처음엔 너무 거슬려서 그들이 작성한 편지 위에 덧쓰기도 했었다. 그렇게 애를 썼건만 결실 한 번 맺지 못하게 된 다음부터는 엉성한 편지를 그대로 두었다.- P118

(카터의 숙모 에드나의) 유언장을 공증 받아 12만 5천 달러나 받았는데도 헤이즐은 사회학 석사 학위를 따려는 계획을 변경하지 않고 9월에 롱아일랜드 아델피 칼리지에서 학위를 시작하기로 했다.- P124

"이제야 감옥이 진짜 효율적으로 변했어. 대나무로 만든 들것에 뜨거운 물이 담긴 물병도 있고, 밀주까지 있다니!" 흑인이 지껄이며 높다란 웃음소리를 냈다.- P130

죄수들이 C 사동에서 교도관 여섯 명을 인질로 잡고 스테이크를 주 1회가 아닌 주 2회 제공하고, 죄수 200명을 다른 교도소로 이송해 한 방에 셋이 사는 경우를 근절하고, 식당에 더 진한 커피를 배급하라고 요구했다.- P132

(프리몬트에서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표는 57달러 90센트였다. 기내식으로 갈색 비프 로스트가 작고 고급스러운 쟁반에 담겨 나왔다. 도톰하고 양도 많았다. 노릇노릇하게 제대로 구운 감자도 있었다. 완벽하게 원형으로 썰린 토마토가 올라간 양상추에는 작은 종이컵에 담긴 하얀 드레싱이 딸려 나왔다.- P141

헤이즐 말이 맞았다. 우린 부자다. 감옥에 있을 땐 부자인 것이, 상당히 부유하다는 것이 아무 의미 없었지만 이제 별안간 중요해졸음을 카터는 깨달았다. 거실에 스테레오 세트가 있고 집에 가구와 책이 가득하다.- P146

카터는 티미가 만든 레고를 볼 새가 없었다. 저녁을 먹은 후 프로코피예프와 모차르트를 듣느라 짬이 나지 않았다. 오렌지 소스를 곁들인 새끼 오리 요리처럼 현악 화음이 상당히 풍성하게 들렸다.- P146

하루에 780밀리그램이면 모르핀 중독자가 맞는 평균량이었다.- P149

"(전략) 악덕 집주인들은 늘 부업을 두어 개 갖고 있죠."- P163

"헤어짐은, 그리고 이별은 매번 크나큰 타격을 주고 뭔가를 앗아가요. 파도가 절벽을 때리듯 말이죠. 남자는 그저 절벽처럼 서 있는 거죠. 어느날 메마르고 작아지고, 그러다 보잘것없는 존재가 되어 끝장나는 거라고요."- P165

"이 세상이 하나의 거대한 감옥 같다는 생각을 했어. 여러 개의 감옥이 모이고 모여 확장된 형태라고나 할까."- P180

두 사람은 주제를 바꾸어 낚시와 개구리 채집에 대해 얘기했다. 가윌은 개구리의 눈에 라이트를 비춘 후 개구리를 찔러 잡는 방법에 대해 설명했다. 어릴 때 뉴올리언스에서 그렇게 했다면서.- P208

카터는 그제야 헤이즐이 자신을 정말로 싫어한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헤이즐은 징역살이 이후 변해버린 그를 싫어했다. 전에도 그를 싫어한 게 확실했다. 그는 몸이 쓸려나가 소멸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고작 몇 초였지만 그랬다.- P210

"무슨 생각해?" 아름답던 그녀의 얼굴이 이제는 그저 예쁘기만 할 뿐 뭔가 헛헛하게 느껴졌다. 생각의 단비가 내리기를 기다리는 메마른 들판처럼 보였다.- P214

"나 승진했어."
"와, 축하해!"
헤이즐이 카터를 쳐다보며 계속 미소를 지었다. "축하의 의미로 새끼 비둘기 고기를 샀어. 먹을 줄 알지?"- P220

만일 격분해서 무슨 말이든 내뱉었다간 조롱거리로 전락해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P269

카터는 어둠 속에서 인상을 찌푸린 채 양심을 찾아보려고 애썼다. 양심의 부재로 생긴 빈자리라도 찾아보려 했다. 그에게 양심은 일말의 흔적도 없이 사라져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중략) 감옥에 갇힌 인간의 양심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P274

카터는 접시에 담긴 아이스크림을 막 먹어치운 티미를 바라보았다. 티미가 흰 셔츠에 파란 타이를 매고 가장 아끼는 감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깔끔히 빗은 금발이 촛불에 반짝거렸다. 전축에 앨범이 새로 걸리자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흘렀다. 카터는 영문을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러 눈을 껌뻑였다. 그날 밤 푹 자려고 헤이즐이 먹는 신경안정제를 한 알 삼켰다.- P293

오스트리처는 거의 새벽 4시까지 두 사람을 재우지 않았다. 따로 신문하기도 하고 번갈아 취조하기도 했다. 카터는 경찰서에 온 후 가윌과 전혀 마주치지 않았다. 경위에게 패배의 기운이 드리우기 시작한 건 새벽 3시경이었다. 같은 질문을 하고 또 하는 걸 보니 확실했다. 그러더니 가윌이 자백했다고 오스트리처 경위가 떠보기 시작했다.- P309

바텐더는 입술을 축이더니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솔직히 기억이 안 납니다. 제 말이 틀릴 수도 있어요. 워낙 많은 사람들이 바 앞에 석 줄로 서 있었거든요. 제가 입을 잘못 놀려서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습니다. 경위님도 이해해 주시겠죠?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잘했어. 카터는 생각했다. 평범한 시민들이 옹호하는 바람직한 신조가 있다. 괜한 일에 얽히지 말지어다.- P311

무표정은 감옥에서 최고의 표정이었다. 감정을 숨겨서 남들에게 반감을 덜 사는 길인 동시에 기운을 아낄 수 있기 때문이다.- P318

가윌이 자백했다 해도 카터는 기존의 주장을 굽히지 않음으로써 잃을 건 전혀 없고 얻을 것뿐이라는 점을 명심하면서 계속 버텼다.- P320

셔츠는 새 삶을 상징했다.- 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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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뭘 만들까 과자점
사이조 나카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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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1월에 애인과 도쿄에 다녀왔다. 그때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두 달도 지나지 않아서 이런 지경이 될 줄은 몰랐다. 어떻게든 이 질병과 상황이 가라앉기를 바랄 수밖에. 애인과 교토, 나라는 이미 몇 번 함께 갔지만 도쿄는 처음이었다. 애인의 첫 도쿄행이기도 했다. 도쿄에 갈 때 자주 머물렀던 시오도메의 미쓰이 가든 호텔에서 2, 오랫동안 기대해 온 간다의 야마노우에 호텔에서 1박을 했다. 애인이 먼저 돌아간 후에는 야마노우에에서 혼자 하룻밤을 더 지냈다.

 

 애인이 하루 먼저 서울로 돌아가던 날, 명성이 높은 호텔의 조식을 먹고서, 멀지 않은 긴자로 나갔다. 마침 서울에서 미리 예약해 둔 구우야(空也)의 계절 화과자와 모나카를 찾고서, 간 김에 좋아하는 곳에서 점심도 먹고 나들이를 즐겼다. 호텔로 돌아와서는 객실에 비치된 티백을 우리고 화과자를 곁들여 햇살처럼 스미는 오후를 보냈다. 모처럼 느긋한 시간이었다. 비교적 손쉽게 구우야의 화과자와 모나카를 예약하는 요령을 갖춘 후로는, 가급적 떠나기 전에 모나카 한두 상자와 계절의 화과자 한 상자를 주문하고는 했다. 그렇게 해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그날 오후에 화과자의 안온한 단맛처럼 감돌았던 기억이 난다. 다과, 호텔, 도시, 시간이 조화를 이루면 얼마나 편안해지는지 배웠다.

 

 돌아와서 이 책을 읽었다. 짧은 여행의 긴 여운을 잇기에 충분했다. 나름의 크고 무거운 비밀을 짊어진 노성(老成)한 화과자 장인 난보시야 지헤에, 그와 함께 도쿄 고지마치의 작은 화과자 가게 난보시야(南星屋)를 꾸려 나가는 딸 오에이, 손녀 오키미의 이야기는 특별히 파란만장하거나 경이로운 구석은 없었고, 다만 잔물결처럼 찰랑대는 은근한 풍미가 내 구미에는 잘 맞았다. 그 시절 도쿄의 서민 동네에 솜씨 좋은 장인이 운영하는 화과자 가게가 있었다면 꼭 이 정도의 소동과 사건을 겪었을 듯한 섬세한 시선과 묘사들이 내가 먹어 보았던 화과자들의 풍미와 제법 흡사한 면이 있었다. 소재와 표현이 서로 겉돌지 않았다는 점에서 보더라도, 이 작품 자체의 완성도는 상당한 셈이다.

 

지헤에는 말차를 넣은 반죽으로 작은 초록빛 단풍잎을 만들었다. 그의 손맡을 스이노스케(翠之介)가 진지한 표정으로 들여다봤다.

도련님 성함을 듣고 단풍나무를 떠올렸습니다. 덕분에 좋은 모양이 나올 것 같습니다.”

가로로 놓은 긴 나무틀 밑에 진한 초록빛으로 착색한 네리키리(착색한 팥소로 각종 모양을 만든 과자)를 얇게 깔았다. 완만한 호를 그리듯 파도무늬를 만들고 위에 작은 단풍잎을 뿌렸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한천을 부어 넣었다.

와아, 하고 스이노스케가 탄성을 질렀다.

여름 냇물에 초록 단풍잎이 춤추는 것 같아요.”

그렇지요.”

만족스러운 결과물에 지헤에도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67

 

 사건의 틀 속에 화과자를 집어넣는 것과 화과자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빚어내는 것, 모두 일정 부분은 작위적일 수밖에 없다. 이미 정해진 서사에 화과자를 간신히 올려놓은 듯한 이 책의 결말부처럼 전자의 경우가 더 어색할 수는 있겠지만, 나머지 부분에서처럼 후자의 방식에 공을 들여도 결국은 어색한 지점이 생긴다. 오직 이 책 속에서만 특정한 소재, 즉 화과자가 세상의 중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 지점이다.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화과자라는 대상의 밀도를 높여야만 볼 수 있는 이야기를 고스란히 펼쳐낼 때에, 이 작위적인 세계에 조금은 관대해진다. 지헤에의 과자들에 반한 나머지 하급 무사이나마 무사 집안을 나와서 과자 장인이 되고 싶다고 찾아온 소년 이나가와 스이노스케의 이야기에서도 그랬다. 나이든 장인은 자신의 일에 매료된 낯선 소년을 자상히 대하고, 그 소년은 그런 장인의 솜씨에 티 없이 감탄하는 장면이 사뭇 태연했다. 오직 여기에서만 가능했을지도 모르는 상황인데도 말이다.


나도 형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도는 벌써 짐작하고 있수.”

곳카이가 불쑥 이야기를 바꾸었다.

집안에 여자밖에 없잖수. 자기 편이 늘어날 것 같으니까 기분이 좋겠지. 자고로 남자는 아들이나 손주를 바라게 마련이라 여자들뿐이면 아무래도 아쉽겠지.”

저도 모르게 동작을 딱 멈춘 오키미가 이내 쏘아붙였다.

세상에! 작은할아버지는 어쩜 그런 한심한 말씀을! 대체 저랑 엄마의 어디가 마음에 안 드시는 거예요?” -71~72

 

 역시 스이노스케가 난보시야에 등장하며 벌어진 소동을 그린 같은 이야기에서, 이 어린 무사에게 친절히 대하는 지헤에의 심사를 넘겨짚는 그의 동생이자 승려인 곳카이에게 확실하게 잘못을 지적하는 조카 손녀 오키미의 모습도 이 이야기의 설득력을 더했다. 가뜩이나 일본 소설들은 아직까지도 남녀 차별에 대한 의식이 희미하고 퇴행적이어서 불편할 때가 많은데, 지극히 일본적인 헛소리를 멀쩡하게 받아치는 장면 덕분에 마음이 한결 놓였다. 스이노스케의 등장이 난보시야의 사람들에게 일으키는 저마다 다른 생각을 선명히 드러냈다는 점에서도 충분히 필요하며 인상적인 대목이었음은 물론이다. 어떤 사람은 느닷없이 찾아온 남자 아이마저 다만 정중하면서도 친절하게 대할 뿐이고, 또 다른 사람은 그런 두 사람을 소란스럽지 않게 받아들이고, 또 다른 사람은 여자들뿐이면 아쉽다면서 생판 남의 집 남자 아이를 두고서 자기편을 운운할 수도 있다. 마지막 사람이 가장 어이없지만 저런 사람이 전혀 없느냐면 그렇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는 것이 가장 우스운 노릇이다. 화과자를 자르면 이런 단면들도 드러난다.


 화과자로 시작해서 화과자로 끝나는 이야기는 아슬아슬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의외로 든든하게 이어졌다. 그만큼 과거 일본 역사, 사회에서 화과자가 나름의 중요한 도락이자, 문화였음을 새삼 확인할 수도 있었다. 한 사람의 과자 장인이 이 많은 사건을 다 겪을 수는 없었겠지만, 이 중 하나쯤은 겪어 본 장인들이 존재했을지도 모른다. 이 정도로 극적이라거나 따뜻한 결말을 맞았을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여태 대충 넘겼던 화과자의 면면이 얼마나 다채로운지 섬세하게 묘사해 준 덕분에, 그동안 일본에서 주로 즐겼던 양과자 외에 화과자에 좀 더 관심이 가게 된 것도 이 책 덕분이다. 모나카를 좋아하는 덕분에 구우야는 자주 찾았지만, 다른 가게들도 좀 더 찾아다닐 생각이 들었다. 올봄이 지나기 전에 가뿐히 다녀올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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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뭘 만들까 과자점
사이조 나카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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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양갱도 훌륭하지만 역시 요전에 먹은 카스테라가 특출나게 맛있었지."
"인로 카스테라 말이냐? 그건 이제 안 만들어."
"저런, 벌써 치워 버린 거요? 오늘도 먹을 걸 기대하고 왔는데."
"계란이 너무 비싸서 역시 카스테라는 우리처럼 작은 가게에는 안 어울려. 카스테라를 만들어 파는 가게라면 에도에 여러 군데 있기도 하고."
남만(포르투갈, 스페인을 이르던 이름)에서 전해진 카스테라는 요즘 격이 높은 무가나 조닌(도시에 사는 상인이나 장인) 사이에서 각광받고 있다. 다만 선물용 고급 과자여서 서민들은 좀처럼 맛볼 기회가 없다.
지헤에가 재료비를 최대한 낮췄지만 인로(약 따위를 넣어 허리에 차는 타원형의 작은 합)만 하게 자른 카스테라는 개당 36몬이나 했다. 난보시야에서는 파격적인 고가였지만 그래도 사러 오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고 평판도 좋았다.- P14.15

"카스도스라는 이름을 들은 적 있나?"
지헤에는 부교쇼 조사실 마루에 무릎을 꿇고 조사관 요리키(고위 무사인 마치부교를 보좌하여 도신을 지휘하는 중간 관리자)에게 심문을 받았다.
(중략) 지헤에는 요리키 앞에서 어깨를 움츠리고 대답했다.
"......아뇨, 처음 듣습니다."
"카스도스라는 건 히라도 번 마쓰라가에서 제조법을 대외비로 정한 오토메과자(다이묘가 다회나 법회에 내놓는 명품 과자로, 지정된 곳에서만 제조하고 판매할 수 있었던 과자)다."
(중략) ‘달다’를 포르투갈어로 ‘도스’라고 하는데, 카스도스는 단 카스테라를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P23.24

히라도 번 상번저(무사가 정무를 보는 에도에 위치한 저택)는 아사쿠사 구라마에 근처에 있었다. 상가 부인은 처녀 시절에 신부수업 명목으로 상번저에서 2년 정도 하녀로 일한 적이 있다(부농이나 조닌은 자기 집보다 부유한 집에 혼기에 든 딸을 보내 살림, 예의범절, 접객, 꽃꽂이 등을 배우도록 하는 관습이 있었다).- P27

히라도 번 마쓰라가는 과자에 조예가 깊어 재작년에는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과자 백 가지를 모아 ‘백과내도百果乃圖’를 편찬했다.
나중에 나가사키로 옮겨 갔지만 과거 히라도에는 화란(和蘭 네덜란드) 상관(商館)이 있었다. 카스도스는 그때 전해진 남만 과자 가운데 하나로 알려졌다. 그리고 ‘백과내도’에도 실린 유서 깊은 과자이자 서민들은 결코 맛볼 수도 없는 명품이었다.- P27.28

인로 카스테라를 가끔 (히라도 번의) 에도 번저에 납품해 달라고 부탁하며 어용 간판을 내리겠다는 의사까지 넌지시 내비쳤다. 지헤에는 어용 간판은 정중히 사양하고 주문만 고맙게 받았다.- P46.47

과자는 하사품(과자 오카시お菓子와 하사품お下賜는 독음이 같다), 즉 쇼군이 내려 주는 선물이다(‘뇌물은 과자로 주세요’(북스피어) 참조). 쇼군가에는 매년 수많은 명산품이 헌상된다. 그 양이 방대하여 남는 헌상품들은 가신이나 친척들에게 선물로 돌렸다.
그리고 오카모토가에 오는 하사품은 왠지 늘 과자였다.
오카모토가에는 어린아이가 반색할 만한 과자를 내려 주라고 명한 것은 친부였다.- P50.51

물맛은 기온이나 날씨에 따라 달라진다. 장마가 물러가지 않은 요즘은 더욱 그렇다. 소싯적 여러 지방을 떠돌던 지헤에는 에도의 수질이 결코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 나가야의 우물은 나은 편이었다. 다른 곳에 비해 우물이 깊고, 막부에서 시공한 상수도가 아니라 지하수가 고인다. 이곳에 과자점을 낸 것도 지하수가 마음에 들어서였다.- P56

지헤에는 말차를 넣은 반죽으로 작은 초록빛 단풍잎을 만들었다. 그의 손맡을 스이노스케(翠之介)가 진지한 표정으로 들여다봤다.
"도련님 성함을 듣고 단풍나무를 떠올렸습니다. 덕분에 좋은 모양이 나올 것 같습니다."
가로로 놓은 긴 나무틀 밑에 진한 초록빛으로 착색한 네리키리(착색한 팥소로 각종 모양을 만든 과자)를 얇게 깔았다. 완만한 호를 그리듯 파도무늬를 만들고 위에 작은 단풍잎을 뿌렸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한천을 부어 넣었다.
와아, 하고 스이노스케가 탄성을 질렀다.
"여름 냇물에 초록 단풍잎이 춤추는 것 같아요."
"그렇지요."
만족스러운 결과물에 지헤에도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P67

"나도 형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도는 벌써 짐작하고 있수."
곳카이가 불쑥 이야기를 바꾸었다.
"집안에 여자밖에 없잖수. 자기 편이 늘어날 것 같으니까 기분이 좋겠지. 자고로 남자는 아들이나 손주를 바라게 마련이라 여자들뿐이면 아무래도 아쉽겠지."
저도 모르게 동작을 딱 멈춘 오키미가 이내 쏘아붙였다.
"세상에! 작은할아버지는 어쩜 그런 한심한 말씀을! 대체 저랑 엄마의 어디가 마음에 안 드시는 거예요?"- P71.72

스이노스케의 부친 이나가와 사키주로는 선봉대 도신으로 일한다. 선봉대란 활부대와 철포대로 구성되며 전시에 선봉에 서서 싸우는 자들이다. 평시에는 에도 성 내 출입문을 지키며 도신은 그 선봉대의 말단에 해당한다.
사키주로의 조모를 비롯한 일가 다섯 식구를 부양하기에는 녹봉이 너무나 적은데다 생계를 보장해 줘야 하는 수하까지 있다.설사 말단 관리라도 무가에는 수하 인원부터 복장에 이르기까지 세세한 규정이 있었다.아무리 가난뱅이라도 체면을 차리려면 일정한 비용을 써야 했으므로 자연히 지출히 늘게 된다.
에도 막부가 들어선 지 250년이나 지났지만 그동안 녹봉은 전혀 오르지 않고 물가만 착실히 뛰었다. 하급 무사의 살림은 전에 없이 궁핍해졌다.- P86.87

"경단을 마루마루(동글동글)라고 부른다던데, 맞아요. 할아버지?"
"특히 규슈 과자점에서 흔히 쓰는 말이지. 마루마루라는 말은 교토의 뇨보코토바거든."
뇨보코토바란 궁녀가 사용하는 독특한 은어로, 보타모찌(찹쌀과 멥쌀을 쪄서 밥알 형태가 거반 남아 있을 정도로 대충 짓이겨 경단을 빚고 겉에 팥소를 두른 떡)를 야와야와(매우 부드러운 것을 표현한 의태어), 소면은 조로조로(부드럽고 긴 것이 힘없이 끌려가는 모습을 표현한 의태어)라고 부르는 등 겹말이 많았다. 달달하고 온화한 표현이 아마도 화과자와 잘 어울렸을 것이다. 경단을 마루마루, 쑥떡을 쑥 쓰미쓰미(나물 따위를 ‘똑똑’ 뜯는 모습을 표현은 의태어)라고 부르는 것은 화과자 서적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P104

큰 욕심 내지 않고 쓸데없이 적을 만들지 않고 맡은 바 직무를 성실하게 해내며 인생을 무난하게 보내는 것.
다른 인생을 택하긴 했지만 돌아보니 자신(지헤에)도 부친이나 형과 같은 삶을 바랐었다.- P148

속에 팥소를 넣은 찹쌀떡을 예전에는 우즈라모찌(鶉餅, 메추리떡)라고 했다. 이른바 다이후쿠모찌(한국에 흔히 모찌로 알려진 찹쌀떡)의 전신인 셈인데, 다이후쿠모찌보다 훨씬 크고 메추리처럼 통통하게 생겼다. 그래서 오오우즈라모찌라고했고, 하나만 먹어도 배가 부르다고 해서 하라부토모찌라고도 했다.- P169

"왜 반죽을 안 하세요, 도련님."
"물을, 너무 많이 넣은 것 같은데......"
"글쎄요...... 반죽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지요. 물이 많으면 쌀가루를 더 넣으면 되고요."- P172

"공교롭게도 에도에서는 물 좋은 다랑어를 구하기가 어려운 것 같더군."
"그야 에도에서는 다랑어라고 하면 싸구려 생선으로 치니까요. 허름한 주점에서나 취급해요."- P204

"(히라도 섬과 에도에 떨어진) 가와지 님과 손녀(오키미)가 열흘 간격을 편지를 주고받는다고 합니다. 답신도 오기 전에 편지를 부칠 정도로 서로 마음이 들떠서......"- P301

분탄(ブンタン, 文旦)은 지름이 다섯 치를 너끈히 넘고 무게도 두세 근은 된다. 동그란 무로 유명한 교토의 쇼고인 무만큼 커다란 것도 드물지 않다. 다만 껍질이 매우 두꺼워서 알맹이는 외형보다 훨씬 작지만, 껍질과 알맹이 모두 설탕청으로 만든다.
과즙이 많지 않아 생과일을 씹으면 아삭아삭한 식감이 있다고 한다. 온화하고 상쾌한 향과 단맛이 나는데, 많이 재배되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분탄은 에도 초기에 해외에서 들어왔는데, 기후에 예민한 과일이라 사쓰마나 히고, 도사처럼 아주 따뜻한 지역이 아니면 재배할 수 없었다. 게다가 수확 후에도 계속 관리해야 하는 과일이다.
1월 말부터 2월까지 수확하는데, 갓 수확한 분탄은 신맛이 강해서 먹기에 적당치 않다. 숙성실에 넣고 짚을 덮어 세 달쯤 숙성시켜야 한다. 숙성되면 신맛이 두드러져 초여름에 어울리는 향기를 풍기지만, 숙성시킨 열매는 신선함을 오래 유지하지 못한다.- P33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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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서로에게 미래가 될 테니까
윤이나 지음 / 코난북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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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사 한 글자로 문장의 느낌이 크게 달라진다는 사례로 김훈의 칼의 노래를 언급하는 일이 2020년에는 더 이상 없기를 바라지만 아직은 1월이고 더 나은 사례를 미처 찾지 못해서, 이 책의 제목을 보고서도 어쩔 수 없이 그 문장들을 떠올렸다우리는이 아닌 우리가’ 서로에게 미래가 된다는 데에 상당한 의미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며 되새기기에는 역시 저 퇴고가 너무 낡아 보인다. 어쨌든 우리는 서로에게 미래가 된다는 표현이 소극적이며 일단락된 결과와 같은 느낌을 준다면, 우리가 서로에게 미래가 된다고 말하는 쪽은 훨씬 적극적이며 지속되고 확산될 과정으로서 다가왔다.

 

밀레니얼 세대는 사는 곳뿐만 아니라 삶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시대와 기술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계속 달라지며 살아가기로 한 첫 세대인 것이다. -16

 

 좁게는 1981~1996, 넓게는 1980년대 초반~2000년대 초반 태생을 뜻하는 이른바 밀레니얼 세대중에서도 선두에 속하는 저자가 같은 세대의 독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듯한 이 책은, 나 자신도 저자와 비슷한 세대인 탓인지 좀 더 가깝게 다가오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동세대의 독자들이 관심을 가질 주제와 방향에 대해 저자가 항상 숙고해 왔다는 사실을 책의 곳곳에서 실감할 수 있었다. 저자가 말하는 밀레니얼 세대로서 느끼는 이 시대와 사회에 대한 서술과 인식에 대한 개인적인 동의의 여부를 떠나서, 이것이 상당히 보편타당하다는 사실은 인정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이 책에서 말하는 밀레니얼 세대의 상황과 입장이 나와 일치하는 면이 크다고 밝히기는 어렵지만, 이와 유사한 사람들을 적지 않게 보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것도 주로 SNS, 그중에서도 저자의 본진이기도 한 트위터에서 말이다. 그러고 보면 다른 것은 몰라도 주요한 사적 인간관계가 온라인에서 시작해 오프라인으로도 이어진다는 점만큼은 나도 밀레니얼의 대세에서 예외가 아니다. 그저 트위터에 중독되어 버렸다고만 생각했는데, 나름의 외재적 이유도 확실히 존재하는 셈이다. 게다가 이 온라인의 사적 친분이 나름대로 공적인 업무로도 이어진 적이 있었으니, 나름대로 어설프게나마 변화에 적응하는 셈이다.

 

 무엇보다 저 살아가기로 한이라는 표현이 참 마음에 들었다. 결심이며 태도이자, 일종의 체념이고 긍정인 여러 모습이 저 안에 담긴 듯했다.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며 산다는 말은 어떻게 보아도 참 세련된 묘사이지만, 그렇게 살기는 분명히 어렵고,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상황을 납득하는 것도 마냥 달갑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게 끊임없이 변화하고 이동하는 시대가 되었으며, 이런 상황은 앞으로 더욱 빨라지면 빨라지지 멈출 것 같지가 않다. 이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면, 그리고 이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비교적 어릴 때부터의 익숙한 상황이니, 저마다의 방식으로 최대한 적응하며 살아가기로했다.

 

우리의 미래는 불투명하지만 거기 분명히 있으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안개를 헤쳐나가며 미래를 오늘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불투명하므로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의 미래가 오직 어둡고 차갑고 불행하기만 한 것도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결정되지 않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일이 우리 세대의 용기다. -182

 

 이렇듯 납득되는 측면이 있었음에도, 이 책의 이야기가 온전히 나 자신, 혹은 내가 속한 세대의 것이라고는 여겨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저자와 같이 내가 나를 고용하고 운영하는삶을 경험해 보지 않았으며, 부모나 가족 중에 자영업자나 프리랜서 자체가 유난히 적은 데다, 저자가 그토록 피할 수 없는 흐름으로서 강조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무소속의 상태에서 삶을 꾸리기를 원치 않는 까닭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 덕분에 지금 프리랜서로서 살아가는 밀레니얼 세대들에 대해서 좀 더 잘 알게 되었다는 사실은 다행스럽다. 이렇게 읽지 않았다면 막연한 짐작조차 하지 않았을, 어떤 삶의 방식에 대해 배웠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미래가 불투명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것은 소속의 유무와 전혀 상관없는 문제에 가깝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은 내가 생각하거나 겪은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남의 이야기도 아니다. 미래는 알 수 없고, 정해져 있지도 않았기에, 어떻게든 나아갈 수 있고 바꿀 수 있으며 또한 그래야 한다는 말은 나에게도 앞으로도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좀 더 투명하게 보이는 미래를 추구한다고 해서 그것이 가장 확실하게 결정된 미래라고 착각해 버리면 안 된다. 내 삶이 남들의 것과 크게 다르거나 낫다고, 혹은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할수록 여러 가지가 뒤틀리게 마련이다.

 

술자리에서조차 해서는 안 되는 말을 책에 버젓이 실어 출판하고도 어떤 남자는 대선 후보가 되고 어떤 남자는 청와대 행정관으로 일할 수 있는 곳이 바로 한국이라는 것을 여자들은 다 알고 있다. -198

 

 또한 이 책은 지금 한국을 살아가는 젊은 여성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내가 여성이 아니기에 그 부분에 대해서 말하면 주제넘은 노릇이다. 다만 페미니즘이 이 순간 한국의 여성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될 수 있는지 저자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설득력 있게 보여 주었다는 점을 밝히지 않으면, 이 책의 중요한 부분을 빠뜨리는 것이니 옳지 않다. 다른 어떤 문제보다도 한국의 가부장제와 남성 중심주의 및 그와 결합한 제도, 사회적 인식과 결부된 문제는 남성인 내 짐작보다 훨씬 크고 깊다는 것을 거듭 배웠다. 이런 한국에서 이곳의 많은 여성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의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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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서로에게 미래가 될 테니까
윤이나 지음 / 코난북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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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한 시대를 어떤 세대로 통과했는지는 생각보다 한 인간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P7

무엇보다 밀레니얼은 일단 가치중립적인 단어라는 게 좋다. 이 단어를 가져오지 않았다가는 까딱하면 순식간에 88만 원 세대나 삼포 세대, 파이 세대 같은 것이 된다.- P8.9

새로운 기회와 가능성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볼 수 있을 때 생겨난다.- P14

밀레니얼 세대는 사는 곳뿐만 아니라 삶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시대와 기술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계속 달라지며 살아가기로 한 첫 세대인 것이다.- P16

미팅은 대체로 서로가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임을 확인하는 과정으로 협업 초반에만 의미가 있다. 상호 신뢰가 존재한다면 사실 생략이 가능한 부분이다.- P32

나는 지나칠 정도로 사소한 불운이 잦은 삶을 살면서 일종의 보상처럼 아주 가끔씩 찾아오는 역시 사소한 행운을 감지하는 하찮은 능력을 갖추게 됐는데 이 경우가 그런 것이었다.- P37

"어쩜 하남에서도 콕 찝어서 개발 안 되는 이런 동네에만 살았을까?"- P50

우리는 우리가 가진 무언가가 오르는 것을, 성장하는 것을, 보고 경험한 일이 없다. 오르는 것이라면 대출 금리, 월세, 원천징수 세율, SNS 팔로어 수 정도다. 이 중에서 가장 경제와 상관없어 보이는 SNS 팔로어 수만이 그나마 소득 상승의 가능성과 겨우 붙어 있다니 정말 놀라운 21세기 아닌가.- P51

우리는 지나치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나는 그게 우리의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P53

어쩌면 이 시대의 전문성은 전시되고 유명해질 때만 의미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P66.67

SNS는 셀프 광고판이기도 한 것이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전시하고, 기록하고, 그걸 통해 내가 일하는 조직과는 별개로 나 자신을 브랜딩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P68

내가 당신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꽃이 되었듯이, 대여를 공유라고 불렀기 때문에 새로워진 것이다. 말장난처럼 느껴지지만 어쩌면 이 말장난, 좋은 말로 하면 발상의 전환이야말로 다양한 밀레니얼 스타트업의 아이디어이고 출발점인지도 모른다.- P77

기록과 검색은 언제나 기억을 보조해주며 나는 가능하다면 새로운 기술을 이용해서 뇌와 연동하고 정리하는 일을 선호하는 사람이다.- P89

그러니까 ‘남들 다 하는 결혼을 안 하면 대체 무엇을 하는가?’라는 질문은 애초에 잘못됐다. 결혼을 안 하면 무엇을 하느냐면, 살던 대로 산다. 그리고 앞서 쓴 바와 같이 더 이상 남들이 다 결혼하지 않는다.- P115

나에게 비혼이 궤도를 벗어난 또 다른 삶의 상태 정도라면, 현재 한국 사회에서 비혼은 가부장제를 완강히 거부하는 적극적인 운동으로서도 존재하고 있다. 한국 사회는 이런 태도를 가진 이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 함께 살게 될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 역시 잊지 않을 것이다.- P121

메리언에게 레이디 버드는 주제를 모르고 주어진 것 이상을 원하는 새로운 세대다. 그리고 레이디 버드는 엄마에게서 떠나야만 자기 자신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아는 딸이다. 레이디 버드의 모든 행동은 수많은 딸이 엄마에게 하는 말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나는 자라서, 절대 엄마가 되지 않을 거야."- P141

망할 일이 없고 잘릴 일도 없는 회사를 안정적인 곳으로 여기지 않아서가 아니다. 꼭 그렇게만 일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P156

성공만이 일과 삶의 유일한 목표일 때는 ‘남들만큼 일해서는 남들처럼 살게 된다’는 이간질의 구호가 통했다.- P159

당장 프리랜서 작가로 일하며 한 팟캐스트에서 ‘비정규인’이라고까지 불렸던 나는 정규직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정규직 외의 비정규, 임시, 아르바이트, 프리랜서 등을 대충 묶은 뒤, 이런 방식으로 일하는 사람들을 다 정규직이 ‘못’ 됐기 때문에 당연히 안정적인 삶을 획득할 수 없는 노동자로 여기는 사회적 시선과 이들을 배려하지 않는 노동 정책에 반대한다. 나는 당장 각종 세금이 원천징수되는 글 한 편을 쓰고 원고료를 받을 때마다 해촉증명서를 받지 않으면 프리랜서의 건강보험료가 올라가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개선될 방안이 마련되었으면 좋겠다.- P165

그 시절 내게 (영화 <소공녀>에 나오는) 미소의 위스키와 같은 것은 책이었다. 나는 그 방에서 라면만 먹어야 했던 한 철에도 책을 읽을 수 있었기에 겨우 살았다.- P175.176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오늘을 유예할 필요가 없음을 기억하는 것 그리고 작다고 해도 내가 알고 확신을 가질 수 있는 행복을 찾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물론 인생은 한 번뿐이라고 말하며 오늘을 탕진하는 것 그리고 오늘의 고통을 수많은 자잘한 소비로 대충 돌려 막는 것은 미래를 당겨 쓰는 일이라는 점에서 지양되어야 한다. 그러나 돈의 논리 앞에서 이 모든 것은 뒤섞인다. 그리고 밀레니얼 세대는 취향에, 오늘의 쾌락에 기꺼이 돈을 지불하는 세대, 크고 작은 소비의 주체로 다시 호출된다.- P177.178

우리의 미래는 불투명하지만 거기 분명히 있으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안개를 헤쳐나가며 미래를 오늘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불투명하므로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의 미래가 오직 어둡고 차갑고 불행하기만 한 것도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결정되지 않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일이 우리 세대의 용기다. 그게 더 나빠지는 방향이거나 천천히 소멸해가는 길이라 할지라도 결국 살아남아 우리 미래를 보는 것이 우리 세대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믿는다.- P182

나는 내게 허락된 지면 안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글을 쓸 때마다 임금 차별에 대해서, 유리 천장에 대해서, 더 많은 젊은 여성이 자기 목소리를 내고 정치를 해야 하는 필요성에 대해서 쓰고 싶었다. 그러나 매번 성범죄에 대한 이야기, 남성에게 죽임을 당한 여성의 이야기를 쓰게 된다. 대개의 여성이 당한 범죄와 소수의 여성이 저지른 범죄 양쪽에서 모두 여성은 여성이기 때문에 차별 받는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은 법 앞에 평등하지 않은 일을 자주 겪고, 나는 그 선명한 격차에 대해서 쓸 수밖에 없다.- P195

술자리에서조차 해서는 안 되는 말을 책에 버젓이 실어 출판하고도 어떤 남자는 대선 후보가 되고 어떤 남자는 청와대 행정관으로 일할 수 있는 곳이 바로 한국이라는 것을 여자들은 다 알고 있다.- P198

우리는 미래를 모른다. 모두에게 각자의 정해지지 않은 미래가 있는 한, 적어도 망하지는 않았다.- P214

개인의 유능함, 노력으로 극복하는 서사를 언제나 경계해 왔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라는 최소 단위의 불안 앞에서는 나 자신만을 생각한 것이다.-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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