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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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집이 생겼다는 사실에 꽤 얼떨떨했다. 명의만 내 것일 뿐 여전히 내 집이 아닌데도 그랬다. (중략) 퇴근 후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우면 이상한 자부와 불안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어딘가 어렵게 도착한 기분. 중심은 아니나 그렇다고 원 바깥으로 밀려난 건 아니라는 안도가 한숨처럼 피로인 양 몰려왔다. (입동)- P13.14

쓸모와 필요로만 이뤄진 공간은 이제 물렸다는 듯, 못생긴 물건들과 사는 건 지쳤다는 듯. 아내는 물건에서 기능을 뺀 나머지를, 삶에서 생활을 뺀 나머지를 갖고 싶어했다. (입동)- P16

아이들은 정말 크는 게 아까울 정도로 빨리 자랐다. 그리고 그런 걸 마주한 때라야 비로소 나는 계절이 하는 일과 시간이 맡은 몫을 알 수 있었다. 3월이 하는 일과 7월이 해낸 일을 알 수 있었다. 5월 또는 9월이라도 마찬가지였다. (입동)- P18

살림과 양육에 대해 내가 조금이라도 비난하는 기색을 보이면 아내는 무척 예민하게 굴었다. (입동)- P19

다음날 퇴근길에 동네 부동산에 들렀다. 아파트 시세는 지난해 우리가 집을 산 가격보다 이천만원 이상 떨어져 있었다. 부동산을 나와 집 앞 골목에서 담배를 연달아 두 대 피웠다. 결국 아파트 파는 걸 포기하고 아내에게 ‘집이 계속 안 나가는 모양’이라 둘러댔다. (입동)- P24

할머니는 대답 대신 볼우물이 깊게 패게 담배를 빨았다. 담배 연기가 질 나쁜 소문처럼 순식간에 폐 속을 장악해나가는 느낌을 만끽했다. 그 소문의 최초 유포자인 양 약간의 죄책감과 즐거움을 갖고서였다. (노찬성과 에반)- P43

목표한 돈을 다 모은 날 찬성은 마루에 엎드려 단순한 산수를 했다. 일주일간 전단지 오천 장 이상을 돌려 십일만사천원을 벌었다. 살면서 처음 만져보는 돈이었다. 찬성은 구체적인 노동의 대가를 만지며 뜻밖에 긍지와 보람을 느꼈다. 애초 목적과 달리 예상치 못한 성취감에 살짝 어른이 된 기분이 들었다. 마지막날, 너무 지겨운 나머지 전단지 사십 장 정도를 남의 집 옥상에 몰래 버리고 왔지만, 그것 빼곤 정말 죄 묻지 않은 돈이었다. (노찬성과 에반)- P66

이날 두 사람은 평소보다 달게 잤는데, 저녁상에 오른 나물 덕이었다. 도화는 밤새 내장 안에서 녹색 숯이 오래 타는 기운을 느꼈다. 낮은 조도로 점멸하는 식물에너지가 어두운 몸속을 푸르스름하게 밝히는 동안 영혼도 그쪽으로 팔을 뻗어 불을 쬐는 기분이었다. 잠결에 자세를 바꾸다 도화는 속이 편하다는 느낌을 몇 번 받았다.
-제철 음식이라 그런가.
도화가 간밤 편안함을 설명하자 이수가 도화 쪽으로 몸을 틀며 호응했다. (건너편)- P86

여러모로 올 겨울은 겨울 같지 않았다. 파이프에서 물이 새듯 미래에서 봄이 새고 있었다. (건너편)- P87

아무렴 한창때가 지났으니 나물맛도 알고 물맛도 아는 거겠지. 살면서 물 맛있는 줄 알게 될지 어찌 알았던가. 직장 상사들은 ‘삼십대 중반이야말로 체력과 경력, 경제력이 조화를 이루는, 인생에서 가장 좋은 때’란 말을 자주 했지만 도화는 알고 있었다. 자신도, 이수도 바야흐로 ‘물 먹으면’ 속 편하고, ‘나이 먹으며’ 털 빠지는 시기를 맞았다는 걸. (건너편)- P87

도화는 서울시 종로구에 위치한 서울지방경찰청 교통안전과 종합교통정보센터에서 일했다. 처음 본청 오층에 들어섰을 때 도화는 수백 대의 관측용 모니터에 압도당했다. 재난영화에서나 보던 현대적 시스템의 현현이랄까. 자신이 사마귀나 잠자리 눈 안쪽에 들어선, 아니 그보다 ‘행정’이라는 고등 생물 뇌 속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건너편)- P89

눈 한 송이의 의지가 모여 폭설이 되듯 시시티브이에 비친 풍경이 모여 교통방송의 ‘정보’가 됐다. (건너편)- P90

이수가 택시 뒷자석에 올라타며 말짱한 척을 했다. 딴에는 교통비를 아끼려 지하철 첫차시간까지 버틴 건데 그사이 술을 너무 많이 마셔 몸을 가눌 수 없었다. (건너편)- P93

도화는 잘 개어놓은 수건처럼 반듯하고 단정한 여자였다. 도화는 인내심이 강했고, 인내심이 강했기 때문에 쾌락이 뭔지 알았다. (건너편)- P97

명학의 서글서글한 눈에 선의와 호기심이 가득했다. 도화는 속으로 ‘아직 덜 실패한 눈......’이라 중얼거렸다. 오래전 저 눈과 비슷한 눈을 가진 사람을 본 적 있다고. 자신도 가져본 적 있는 눈이라고 생각했다. (건너편)- P114

나는 내가 나이도록 도운 모든 것의 합, 그러나 그 합들이 스스로를 지워가며 만든 침묵의 무게다. 나는 부재不在의 부피, 나는 상실의 밀도, 나는 어떤 불빛이 가물대며 버티다 훅 꺼지는 순간 발하는 힘이다. 동물의 사체나 음식이 부패할 때 생기는 자발적 열熱이다. (침묵의 미래)- P125

그들은 잊어버리기 위해 애도했다. 멸시하기 위해 치켜세웠고, 죽여버리기 위해 기념했다. (침묵의 미래)- P132

웃는 것, 또 웃는 것, 무슨 일이 있더라도 웃는 것. 그리하여 영원히 절대로 죽지 않을 것처럼 구는 것. (침묵의 미래)- P133

관리자들은 각 언어의 고유성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타 부족끼리 말 섞는 걸 금지했다. (침묵의 미래)- P134

이곳(소수언어박물관)에서 가장 나이든 축에 속하는 어떤 영감은 어린 시절 언어학자들을 따라다니며 등짐을 져 나르던 소년이었다. 소년은 학자들이 바다 건너에서 가져온 커다란 ‘녹음기’를 어깨에 진 채 강을 건너고 구불구불한 골짜기를 지나 높은 산에 올랐다. 소년은 자기가 등에 지고 다니는 그것이 보통 물건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이따금 그 안에서 소년이 아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당시 학자들은 몇몇 부족의 서사시를 녹음하기 위해 무려 쌀 한 가마니 무게에 달하는 알루미늄 디스크를 사용했다. 소년은 그걸 허허벌판 첩첩산중 어디든 들고 다녔다. 그때만 해도 소년은 그 노래와 말들이 그렇게 빨리 사라질 거라곤 상상 못했다. 그렇지만 그가 정말 예상 못한 건 자기 자신이 이렇게 ‘살아 있는 테이프’로 전시될 거란 사실이었다. (침묵의 미래)- P138.139

그에게 모어母語란 호흡이고, 생각이고, 문신이라 갑자기 그걸 ‘안 하고 싶어졌다’ 해서 쉽게 지우거나 그만둘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말과 헤어지는 데 실패했다. 그렇다고 말과 잘 사귄 것도 아니었다. 말을 안 해도 외롭고, 말을 하면 더 외로운 날들이 이어졌다. (침묵의 미래)- P142

*소설 후반부에 나오는 ‘서사시를 읊는 노파’ 설정과 ‘녹음기’ 관련 정보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니컬러스 에번스, 김기혁, 호정은 옮김, 글항아리, 2012) 속 내용을 참고했다. (침묵의 미래)- P146

사진 찍을 때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무척 평범한 사람, 좋은 일은 금방 지나가고, 그런 날은 자주 오지 않으며, 온다 해도 지나치기 십상임을 아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니까 그런 순간과 만났을 떈 잘 알아보고, 한곳에 붙박아둬야 한다는 걸 알 정도로...... 나이든 사람 말이다. (풍경의 쓸모)- P149.150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한겨울, 방 한쪽에 잘 개어놓은 이불 같은 사람.반듯하고 무겁고 답답한 사람.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불미스런 일로 학교 일을 관두고 강남 어디 테니스장에서 코치 겸 심판을 맡고 있단 얘기를 들었을 때 아버지와 그 자리가 무척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풍경의 쓸모)- P155

한국은 겨울인데 태국은 여름이었다. 일 년에 세 마디, 결이 다른 삼계가 있다지만 나 같은 한국 사람에겐 그저 ‘보통 여름’과 ‘후텁지근한 여름’ ‘몹시 더운 여름’으로 느껴질 따름이었다. 관광버스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한국 날씨와 뉴스, 주가와 환율을 확인했다. (중략) 그렇게 낯선 나라에서 모국어로 된 정보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손에 스마트폰이 아닌 스노볼을 쥔 기분이었다. 유리볼 안에선 하얀 눈보라가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인. 시끄럽고 왕성한 계절인, 그런. (풍경의 쓸모)- P156

모교에서 첫 강의를 ‘트고’, 이 고장 저 고장으로 강의를 나가기 시작했을 때, 고속도로 주변에 펼쳐진 풍경을 보며 좀 심란했다. 여행중 몇 번 오간 길인데도 그랬다. 풍경이 더이상 풍경일 수 없을 때, 나도 그 풍경의 일부라는 생각이 든 순간 생긴 불안이었다. 서울 토박이로서 내가 ‘중심’에 얼마나 익숙한지, 혜택에 얼마나 길들여졌는지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내가 어떻게 중심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지 잘 보였다. (풍경의 쓸모)- P158

수도와 지방의 이음매는 무성의하게 시침질해놓은 옷감처럼 거칠었다. (풍경의 쓸모)- P158.159

그러니까 이선생도 앞으로 ‘눈 흘기는 척 침 흘리는’ 인간들을 조심하라고.
-공정한 척 우아하게 비판하지만 실은......
곽교수가 비정하게 혼잣말하듯 중얼댔다.
-몸살이 날 정도로 부러운 거지. (풍경의 쓸모)- P163

곽교수는 내게 과 분위기는 어떤지 학생들의 태도나 반응은 나쁘지 않은지 물었다.
-그래도 우리 애들 착하죠?
-예, 그럼요.
-그럼,착하지.선생들도 그렇고.
곽교수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가산점을 주듯 말했다.
-그나저나 이선생은 여기 공기 좋단 말 안 해서 좋네. (풍경의 쓸모)- P165

강의를 마치고 돌아올 때 종종 버스 창문에 얼비친 내 얼굴을 바라봤다. 그럴 땐 ‘과거’가 지나가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차오르고 새어나오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나를 지나간 사람, 내가 경험한 시간, 감내한 감정 들이 지금 내 눈빛에 관여하고, 인상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표정의 양식으로, 분위기의 형태로 남아 내장 깊숙한 곳에서 공기처럼 배어 나왔다. 어떤 사건 후 뭔가 간명하게 정리할 수 없는 감정을 불만족스럽게 요약하고 나면 특히 그랬다. ‘그 일’ 이후 나는 내 인상이 미묘하게 바뀐 걸 알았다. 그럴 땐 정말 내가 내 과거를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소화는, 배치는 지금도 진행중이었다. (풍경의 쓸모)- P173

나는 내계 괜찮은 필기구가 있다는 걸 기억해낸 뒤 서랍을 뒤져 만년필을 꺼냈다. 그러곤 자기만의 필기구를 가진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종이 위에 제일 먼저 내 이름을 써봤다. 그뒤 통장 을 새로 만들고, 혼인신고서를 작성하고, 전세 계약을 할 때마다 그 만년필을 썼다. 그래서 곽교수와 함께 ‘그 일’을 겪고 며칠 뒤 경찰서에서 조서를 작성할 때도 습관적으로 품안에서 그 펜을 꺼냈다. 그러곤 조서에 서명하기 전, 만년필을 다시 주머니에 넣은 뒤 책상 위에 있던 모나미 볼펜으로 내 이름을 적었다. (풍경의 쓸모)- P181

비늘과 내장을 제거한 우럭을 들통에 깐다. 거기 대파와 생강, 청주를 넣고 팔팔 끓인다. 익은 살은 따로 발라 한곳에 두고, 몸통 뼈와 대가리만 다시 삶는다. 먼저 미역국에 쓸 육수를 내야 한다. 뼈 국물. 어릴 때 나도 뼈를 고아 만든 음식을 먹고 자랐다. 어머니가 강릉 분이라 우리집은 생일에도 미역국에 양지 대신 우럭을 넣었다. 독립 후 한동안 잊고 살았는데 이제 나도 그렇게 한다. 특히 내 생일과 애 생일에 그렇게 한다. (가리는 손)- P187.188

문득 재이가 어린이집 앞에서 장화를 벗다 한숨 쉰 일이 기억난다. "쪼그만 게 웬 한숨이냐" 나무랐더니 "어린이는 원래 힘든 거예요"라 대꾸한 게. ‘어린이’가 무슨 직업인 양, 막일인 양 말해 어이없었지. 이제 와 생각하니 재이 말이 맞는 것 같다. 각 시기마다 무지 또는 앎 때문에 치러야 할 대가가 큰 걸 보면. (가리는 손)- P194

이윽고 아이들은 노래했다. 아직 ‘맛’ 경험이 적은, 죽은 동물을 덜 먹어본, 축축하고 맑은 혀로, 어떤 음은 허공에 가느다란 포물선을 그리다 고꾸라지고, 어떤 음은 누군가의 단독 비행을 좇다 기꺼이 함께 낙하하고, 모두가 막 사라진 음의 행방을 신경쓸 찰나 그 소멸을 위로하듯 여러 개의 음이 다시 풍등처럼 날아올랐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아름다운 가교처럼 이어지던 재이의 독창. 재이 목소리는 아주 작은 충격에도 산산이 부서질 것 같은 알전구처럼 가늘고 투명했다. 높은음을 낼 때 성대 속 필라멘트가 노란 빛을 내며 파르르 떨리는 듯했다. 부모도 자식에게 경외감을 느낄 수 있구나...... (가리는 손)- P195

매달 배포되는 ‘이달의 식단’은 전교생 중 어떤 아이도 버리지 않는 유일한 가정통신문이었다. 한 아이는 그걸 무슨 책처럼 만들어 소중히 갖고 다녔고, 또 어떤 아이는 비닐 파일에 넣어 책상에 붙여놨다. 먹을 것을 향한 사춘기 아이들의 집념은 대단했다. (가리는 손)- P198

게다가 영양사는 매일 ‘만인의 반찬 투정’을 듣는 직업이었다. 급식 메뉴에 핫도그나 돈가스를 넣어 아이들 입맛에 맞추면 선생들이 꺼리고, 아욱국이나 취나물 등 교사들 식성에 맞추면 아이들이 싫어했다. 예산 문제로 반찬을 검소하게 꾸리면 누군가 내 도덕성을 의심하는 투로 불평해 마음을 다친 적도 있다. (가리는 손)- P198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 가진 도덕이, 가져본 도덕이 그것밖에 없어서 그래.
오래전 당신과 팔짱을 끼고 걸을 때,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자 당신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 (중략) 나는 늘 당신의 그런 영민함이랄까 재치에 반했지만 한편으론 당신이 무언가 가뿐하게 요약하고 판정할 때마다 묘한 반발심을 느꼈다. 어느 땐 그게 타인을 가장 쉬운 방식으로 이해하는, 한 개인의 역사와 무게, 맥락과 분투를 생략하는 너무 예쁜 합리성처럼 보여서. 이 답답하고 지루한 소도시에서 나부터가 그 합리성에 꽤 목말라 있으면서 그랬다. (가리는 손)- P199.200

부모 아래 있으니 생각도 게을러지는지 종종 나는 내 나이를 잊었다. 마흔 넘고부터 자꾸 한두 살씩 가물거렸다.
-엄마, 나 지금 몇 살이지?
그때마다 엄마는 예닐곱 종류의 알약을 입에 털어넣으며 무심하게 답했다.
-네 나이는 네가 좀 세라. (가리는 손)- P202

가끔 엄마가 낯설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활달함이랄까 생명력이 실은 무례와 상스러움의 다른 얼굴이었나 싶어 당혹스러운 적이 많았다. 내 사촌언니 두 명이 한 달 새 나란히 사고로 아이를 잃자, 엄마는 ‘어쩌다 이런 일이 동시에 일어났는지 모르겠다’며 ‘우리 집안 죄받았다 할까봐 부끄러워 어디 가서 말도 못 꺼낸다’고 했다. 그것도 상복 입은 사촌언니 앞에서. 엄마가 늙었나? 그새 분별력과 자제심을 잃었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럼 아버지도 죄받은 거야?
돌아오는 길에 엄마에게 되묻자 엄마는 자신이 못 배우고 무식해서 그렇다며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엄마는 군인이었던 아버지가 남긴 연금으로 근근이 살고 있었다. (가리는 손)- P202

내 효심이 우리의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면 어쩌나 늘 두려웠다. 아이 일이라면 그러지 않았을 거다. (가리는 손)- P203

팬에 포도씨유를 두르고 두툼한 갈치 두 토막을 조심스레 미끄러뜨린다. 치지직 소리와 함께 사방에 고소한 냄새가 퍼진다. 콩의 고소함이나 꺠의 풍미와는 비교가 안 되는 포식자의 고소함, 남의 살을 먹고 사는 생물의 깊은 고소함이. (가리는 손)- P204.205

아무리 바빠도 음식을 플라스틱 용기가 아닌 접시에 담으려 노력하는 건 내가 부모 세대와 반 발짝 다르게 사는 법이다. 말은 반보라지만 실은 결정적으로 다르게 사는 방식. 낙향 후 그나마 주거비가 덜 들어 생긴 여유일지 모르나 평소 재이에게도 음료를 병째 마시지 말고 컵에 따라 먹으라고 잔소리한다. 그렇게 작은 것들이 나중에 큰 걸 지켜주기도 한다고. (가리는 손)- P209

아이가 선크림을 잘못 발라 하얗게 뜬 얼굴로 상긋 웃는다. 재이는 언제부턴가 선크림을 과하게 발랐다. 오늘처럼 비가 올 때도, 저녁 늦게 외출하는 날에도 잊지 않았다. (가리는 손)- P211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재이야, 어른들은 잘 헤어지지 않아. 서로 포개질 수 없는 간극을 확인하는 게 반드시 이별을 의미하지도 않고. 그건 타협이기 전에 타인을 대하는 예의랄까, 겸손의 한 방식이니까. 그래도 어떤 인간들은 결국 헤어지지. 누가 꼭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각자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해. 서로 고유한 존재 방식과 중력 때문에. (가리는 손)- P213

‘이해’는 품이 드는 일이라, 자리에 누울 땐 벗는 모자처럼 피곤하면 제일 먼저 집어던지게 돼 있거든. (가리는 손)-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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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감 넘치는 글쓰기를 위한 아이디어 - 세계 최고의 범죄소설 작가가 들려주는 박람강기 프로젝트 10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송기철 옮김 / 북스피어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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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780밀리그램이면 모르핀 중독자가 맞는 평균량이었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김미정 옮김, 유리 감옥, 오픈하우스, 149

(유리 감옥) 편집자는 내게 병원에서 통증을 다스릴 때 일반적으로 모르핀을 얼마만큼 사용하는지, 중독자들은 얼마만큼 맞는지 등을 다시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는 정확해야 했으므로 나는 이미 정확하게 썼다고 생각하면서도 다시 도서관에 가서 관련 의학서들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혹시 몰라서 결국 카터가 교도소에서 매일 맞는 모르핀의 양을 줄였다. -225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유리 감옥을 부랴부랴 읽은 것은 바로 이어서 이 책을 읽기 위해서였다. 하이스미스의 소설 중 유리 감옥이 이 책에서 주요한 사례로 등장한다기에 그 작품부터 사서 읽었다. 딱히 스포일러를 피하려 한 것은 아니고, 서스펜스 소설 쓰기를 다루는 이 책의 내용을 좀 더 잘 파악하고 싶어서였다. 유리 감옥을 먼저 읽으면 하이스미스가 이 책에서 유리 감옥을 제시해 말하려는 그 자신만의 글쓰기에 대해 보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이스미스가 유리 감옥이라는 작품을 현재의 형태로 완성한 과정을 더욱 폭넓게 바라볼 수 있었다.

 

 하이스미스의 이름을 처음 들은 때는 그의 재능 있는 리플리(리플리 1)가 원작인 앤서니 밍겔라의 영화 리플리>가 개봉한 2000년 초였을 것이다. 한창 이탈리아에 홀려 있을 때여서,영화보다도 그 나라를 배경으로 기묘한 범죄 소설과 그런 작품을 쓴 작가에게 관심이 생겼던 듯하다. 하이스미스가 미국 태생의 여성이라는 점도 그 이유였을 것이다. 어린 내가 느끼기에 하이스미스는 여러모로 시야가 무척 넓은 작가였다. 하지만 하이스미스의 작품은 2010년이 지나서야 한국에서 비교적 활발히 등장하기 시작한 까닭에, 그 이전에는 접할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다. 리플리 시리즈 전 5권도 2014년에야 전부 번역 출간되었다. 그 책은 나오자마자 구입했지만 여태 읽지 않았다.

 

 2016년에 토드 헤인스의 영화 <캐롤>을 보고 매혹되었다. 아마 지금까지 가장 마음에 든 영화 10편을 꼽으라면 넣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 원작 소설 캐롤이 하이스미스의 작품이었던 까닭에 그에게 매료되었다. 오랫동안 이름만 되뇌었던 작가에게 결국은 탄복한 셈이다. 희대의 범죄자를 창조해 낸 작가가 자신의 경험을 배경에 두고서 이토록 애틋하며 아련한 소설까지 자아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결국 하이스미스가 쓴 다채로운 이야기들보다도, 그 모든 세계를 남긴 작가 본인이 훨씬 더 궁금해졌다. 이 책에서 유리 감옥에 한 장을 할애해서 다루지 않았다면, 아마 이 긴장감 넘치는 글쓰기를 위한 아이디어부터 읽었을 것이다.

 

내용을 잘라 냈더라도 보통은 잘라 낼 부분이 더 남아 있다. 잘라 내는 작업은 갈수록 더 고통스럽고 어려워진다. 마침내 당신은 어디서도 삭제할 만한 문장을 찾아볼 수가 없게 되나, 그러고도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도 무조건네 페이지는 통으로 더 빼내야 하는데." 그리고 재검토를 더 쉽게 하느라 아마도 다른 색 색연필이나 크레용을 쥐고서 첫 페이지부터 다시 시작할 것이다. 마치 과적재한 비행기에서 초과 수화물이나 심지어 연료까지 내다 버리고 있는 것처럼 가차 없어진 태도로 말이다. -192

 

 이 책에서 하이스미스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쓰려는 작가들이 출간에 이르기 위해 갖추어야 할 기술적인 요소들을 제시하는데, 그중 적절한 집필 분량의 유지를 다양한 측면에서 강조한다. 마무리할 때까지 자신이 집필하는 작품을 작가가 입체적으로 장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인 동시에, 작가가 계산하거나 절제하지 못하고 방만하게 풀어 낸 이야기는 재미있을 수 없다는 하이스미스의 확신을 반영한 것이라고 이해했다. 작가가 마냥 자유로운 이야기는 독자에게 흥미를 줄 수 없다는 입장은 언뜻 보면 작가가 독자에 영합해서 본인의 창작욕을 배반한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은 정반대다. 하이스미스는 작가 자신을 위해, 작가 자신이 즐거운 이야기를 한 편의 글로 완성한다는 결과를 무엇보다 중시할 뿐이다. 작가가 자유롭게 상상하지 못한다면 독자가 즐길 만한 소설의 아이디어는 떠올릴 수 없으며, 이것이 단순히 작가의 즐거운 아이디어에서 그치지 않고 소설로 마무리되려면 작가가 지켜야 할 원칙이 있음을 하이스미스는 하나로 아울러 보여 주었다.

 

예술의 관건은 독자에게 흥미로운 것, 몇 분 내지 몇 시간이 아깝지 않은 무언가를 이야기함으로써 관심을 사로잡을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10

 

 이 책의 하이스미스는 자신이 그동안 쓴 작품들로 이룬 성취에 대한 자부심을 감추지 않는 동시에, 그것을 딱히 뽐내지도 않는다. 마치 자신과 같은 태도로 소설을 생각하고 또 쓴다면 누구든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을 결과라고 여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입장이 딱히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이 시대에 작가로서 하이스미스 정도의 성공, 명성, 부를 쌓기는 어렵겠지만, 그에 미칠 정도로 탁월한 작품을 쓰는 것은 그보다 쉬울 듯하다. 작가 자신의 흥미에 충실한 작품을 쓴다면 독자의 흥미도 끌 수 있다는 하이스미스와 이 책의 전제에 대한 의문은 이 책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이스미스가 정말 그 전제를 확신했을 것 같지는 않다. 하이스미스는 확률이 아닌 원칙을 확신하는 사람이 아니다. 다시 말해 독자가 읽고 싶은 이야기는 작가가 써야 한다고 생각해서 쓴 이야기보다 그가 쓰고 싶어서 쓴 이야기일 확률이 높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작가가 자신은 흥미가 없지만 독자의 흥미에 영합해서 혹은 그도 아닌 나름의 의무감과 사명감에서 쓴 이야기로 성공하기보다는, 그 자신이 재미있다고 생각해서 쓴 이야기로 성공하기가 더 쉬운 것은 당연해 보인다.

 

경험 있는 작가들이 모두 그러하듯 다음과 같은 감각을 가져야 한다. 하나의 아이디어가 나온 지점에는 더 많은 아이디어가 있고, 처음으로 힘을 발견할 수 있었던 지점에는 더 많은 힘이 있으며, 살아 있는 한 당신은 고갈되지 않는다는 감각. 아무런 과장 없이 말하건대 그러려면 낙천적인 기질이 필요하다. -39

 

 결국 작가가 재미를 느끼는 아이디어로부터 한 편의 소설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상상력을 끌어내기 위한 구상 단계에서의 유희적인 태도와 실제와 같은 소설을 이루기 위한 집필 단계에서의 심각한 태도가 결합해야 한다고 하이스미스는 설명한다. 무엇보다 소설의 재미, 그것도 작가 본인의 재미를 중시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진지하면서도 경쾌하다. 무엇보다 낙천적이다. 낙천적이고 자유로운 마음에서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것은 상식에 가까울 뿐더러, 하이스미스 자신이야말로 자신이 느끼는 재미에 충실한 소설을 써 왔기에 소설의 재미에 대한 그의 강조야말로 공허한 훈계가 아닌 경쾌한 권유에 가깝게 다가왔다. 아이디어는 늘 곁에 있으니 놓치지 말고, 재미있는 아이디어라면 써 보라고 포기하지 않으면 소설이 될 것이라는 권유만큼 낙천적이고 경쾌한 것이 또 있을까. 나머지 조언들은 아이디어를 포기하지 않고 작품을 완성하기 위한 요령에 가깝다.


 『유리 감옥을 읽으면서 떠올랐던 궁금증이 있다. 억울하게 교도소에 갇혔던 한 남성이 그곳에서 심신이 망가진 나머지 결국은 사람들을 살해한 범죄자가 되고 만 이 스산한 이야기가 왜 이렇게 재미있게 읽히는지 의아했다. 재미를 느끼기보다는 심각하고 근심해야 할 상황에서, 그런 느낌과 함께 긴장감과 재미를 느낀다는 것이 다소 낯설었다. 이 책을 읽은 덕분에, 그 재미가 유리 감옥을 구상하고 집필하면서 하이스미스가 느꼈던 감정이고, 그가 이 암울한 이야기 속에서도 전하고자 했던 핵심임을 알았다. “그럼에도 서스펜스라는 장르를 구성하는 틀은 본질적으로 생생한 이야기이기 때문에”(19유리 감옥은 거칠고 아프기 이전에 살아 움직이고 재미있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하이스미스의 재미는 이렇게나 다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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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감옥 버티고 시리즈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미정 옮김 / 오픈하우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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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손정우는 미국 교도소로 보내야 한다. 가면 어쨌든 무사히는 돌아올 수 없을 테니까. 의외로 이 책을 읽는 동안 가장 자주 떠오른 이름은 아동 성 착취 사이트를 운영한 범죄자 손정우였다. 오늘날 미국의 교도소는 하이스미스가 이 작품을 집필할 무렵처럼 야만적인 무법천지가 아니겠지만, 어째서 여전히 손정우와 그 아비가 미국으로 가기를 그토록 두려워하는지 추측하는 단서로 이 책이 상당히 유용했던 덕분이다. 이 책이 나온 때로부터 6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상당히 희석되었더라도, 사람 같지 않은 한국인 성범죄자 하나 정도는 공포 속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할 정도로 혹독한 미국의 교도소로 손정우를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가라앉지 않는다. 주권을 내세워 체면을 차린 자들에게 영원한 치욕이 있기를.

 

 하이스미스의 대표작인 리플리 시리즈를 전부 산 지가 이미 오래지만 읽지 않고 있다가 유리 감옥』으로 하이스미스의 세계를 처음 접했다. 적당한 때에 만났다고 여긴다. 고등학생 무렵에 보았다면 이 부조리하고 음습한 완벽성에 마냥 홀렸을 테고, 20대 중후반쯤에 만났다면 악을 위한 악, 부조리하기 위해 애쓰는 부조리라며 납득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보다 더 늙어서 읽었다면 그리 신선하거나 예리하게 다가오지 못했을 듯하다. 납득할 수 없고, 저질러서도 안 된다고 생각할 인간이나 사건을 너무 많이 겪게 된다면 그러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적기다. 적당히 살피고 거둔 여름의 복숭아가 생각보다도 훨씬 잘 익은 셈이다.

 

 유능하면서도 순진한 엔지니어였던 필립 카터는 그가 생각지 못할 정도로 교활한 덫에 빠져서 학교 공사비를 빼돌린 횡령범으로 몰려 교도소에 갇혔다. 자신과 가장 거리가 먼 공간에 순식간에 떨어진 카터는 당연히 이 공간의 모든 것에 적응하지 못했고, 결국 교도관 무니에게 밉보인 끝에 이유 없이 고문을 양손 엄지손가락에 영구적인 장애를 입는다. 이야기의 결말을 생각하면 필립의 뒤틀린 엄지손가락은 이 6년간의 억울한 복역이 그의 심신에 남긴 돌이킬 수 없는 상흔과 왜곡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가터의 인격과 도덕성을 파괴한 원흉은 한낱 교도관이 아니라, 그가 무고하게 전락한 교도소라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법이나 제도에 대한 불신과 거부감, 자신의 처지에 대한 억울함 속에 파묻힌 필립 자신일 것이다. 그와 같은 처지에서 자신을 둘러싼 상황에 대한 억울함에 함몰되는 것 외에 어떤 다른 대안이 있다고 확답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억울함에 사로잡히는 것만큼은 결코 답이 아니라고 확언할 수 있다. 비굴한 현실 도피일지라도 자신을 이 지경까지 떨어뜨린 운명의 섭리가 있지는 않은지, 있다면 그 의도는 과연 무엇일지 골몰하는 쪽이, 적어도 더 이상 필립 자신을 망치지 않는 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필립에게는 그 길을 택할 수 없는 이유가 너무 많았다. 교도소라는 공간 자체, 마치 공기처럼 그곳에 감도는 다른 죄수들의 폭력성, 모르핀이 없이는 잊을 수도 없는 엄지 손가락의 고통,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아내 헤이즐이 필립 자신의 변호사인 데이비드 설리번과 외도하고 있다는 의심과 확신 사이의 혼란, 고통이 그가 억울함에 탐닉하도록 도왔다. 감옥에 갇힌 채로, 동시에 밀어닥치는 여러 문제에 짓눌린 필립은 자신이 현재의 처지를 억울해 하지 않을 가능성조차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너무도 사랑하는 헤이즐과 선량한 척 미소 짓는 설리번이 지나치게 친밀해 보이지 않았다면, 필립이 죄를 뒤집어쓴 횡령 범죄와 연관된 듯한 전 회사의 수상쩍인 상사 그레고리 가윌이 두 사람의 불륜에 대한 필립의 의심을 부추기지 않았다면 상황은 다르게 전개되었을까? 필립이 너무도 억울한 처지 속에서 피해 의식에 사로잡혀 자신의 폭력성을 자제하지 못하고 범죄를 합리화하는 지경에 이르는 일만큼은 피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필립이 출소하고서야 헤이즐과 설리번의 불륜을 알게 되었다고 해도 이 작품의 전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듯하다. 무고하게 수감된 교도소라는 공간, 그곳에서 접해야 했던 이질적인 출신의 죄수들이 시시각각 불출하는 폭력성, 고문의 후유증만으로도 필립이 자신의 부조리를 합리화하기에는 충분했을 것이다. 기실 헤이즐과 설리번의 관계는 감옥에서 필립을 망가뜨렸다기보다는, 필립이 출소 후에도 여전히 교도소의 심리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낱낱이 보여 주기 위한 장치에 가까웠다. 필립은 교도소 안에서는 헤이즐의 불륜을 의심하다가도 이내 아내에 대한 믿음을 가까스로 지켰음에도, 자신의 내면이 감방 안에서 억울함과 분노로 망가지는 것을 알아채지도 막지도 못했으며 결국 출소 후에 아내와 설리번의 진실을 안 후에는 교도소에 있을 때보다도 오히려 더욱 잔혹하게 폭주하고 말았다.

 

 이런 부조리한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또 꼭 그래야만 하는지 이 작품을 읽는 동안 자주 생각했다. 엄연히 억울한 상황을 겪었으나 그 사실을 인정받지 못하고, 자신이 죄인인 상황이 어쩔 수 없는 듯이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보일 수도,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무고한 피해자로 수감되었던 필립이 교도소의 소동을 틈타 이미 죄수 하나를 살해했고, 교도소를 나와서도 오히려 두 사람을 살해해서 엄연한 범죄자가 되었다. 감방에서 억울해만 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운명의 섭리라도 생각하는 것이 나았을지 모른다고 앞에서 적었던 까닭은, 아무리 억울하더라도 그 감정에만 몰입하다가 이후의 인생 전체가 겉잡을 수 없게 되는 쪽보다는 이미 겪은 억울함을 그 지점에서 그치게 하는 쪽이 최선은 아닐지라도 그나마 덜 부조리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부조리함을 견디지 못하고 마냥 분노한다면 그 부조리의 원인을 뒤늦게 스스로 저지르는 결과를 끝내 피하기 어렵다. 그러면 그가 겪은 부조리는 더 이상 부조리가 아닐 수도 있다. 무고했으나 마침내 범죄를 저지른 필립처럼. 인간은 자신의 억울함을 이용하거나 그에 탐닉하지 않을 정도로 강인한 경우가 매우 드물다.

 

 사건과 사건의 중첩, 압박 강도의 점증으로 정신적 타격을 누적시킴으로써 결국 한 사람의 내면이 철저히 부패하도록 연출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하이스미스는 가히 대단했다. 그가 철저히 구현한 인간 심리와 행동의 부조리에서 어떻게 해야 그나마 벗어날 수 있을지 이렇게 장황하게 적은 것은 그만큼 그가 구축한 부조리가 현실적이어서, 허점이 보이지 않았던 까닭이기도 하다. 필립과 같은 상황도 마냥 드물기 어렵고, 그 상황에서 그와 비슷하게 되기는 더욱 쉽다.

 

 이 작품은 필립이 헤이즐과 설리번의 관계를 확실히 알게 되는 출소 이후의 전개가 워낙 급박하고 긴장감이 높아서 하이스미스의 역량을 납득시키기에 충분하다. 충동적으로 범죄를 저지르고서도 이성적으로 처벌을 회피하려는 필립의 시도 자체는 지극히 부조리하면서도 그 집요함에서 발휘되는 하이스미스의 흡입력은 분명 탁월하다. 게다가 이 작품의 마무리는 그의 작품이 얼마나 가차 없는지 너무도 잘 보여 준다.

 

 그럼에도 이 작품의 부조리는 범죄자인 필립이 맞이하는 결말이 아니라, 무고한 엔지니어였던 필립이 정부의 학교 공사비 25만 달러를 횡령했다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던 서두부터 이미 주어진 것이었다. 속도감 넘치는 후반부 덕분에 결말의 부조리가 더 부각되었지만, 그것은 발단으로서의 부조리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다. 앞에서 억울하게 갇힌 감방 안에서 더 이상의 부조리를 피할 방법은 없었을지 생각했던 것은 작품 후반부의 필립이 겪는 부조리는 느닷없는 사건이 아니라 이미 교도소 안에서 상당 부분이 갖추어졌다고 여겼던 탓이다.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야기가 아예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에 집착한 듯해서 민망하기도 하지만, 이 역시 부조리한 처사이므로 그리 틀린 것 같지도 않다. 이 부조리로 저 부조리를 부르는 쪽에 비하면 막는 쪽이 온당하다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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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감 넘치는 글쓰기를 위한 아이디어 - 세계 최고의 범죄소설 작가가 들려주는 박람강기 프로젝트 10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송기철 옮김 / 북스피어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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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는 작가가 자신의 소재를 마음대로 장악하고도 남아돌 만큼 힘을 지니고 있다고 느끼기를 원한다.- P137.138

다른 어떤 책도 ‘재능 있는 리플리’만큼 수월하게 쓰이지 않았으며, 나는 종종 리플리가 그 책을 쓰고 있고 나는 그저 타자를 치고 있을 뿐이라는 느낌을 받곤 했다.- P138

작가는 자기만의 시간표를 만들고 그것을 고수해야 한다. 작업에 대한 자부심은 필수적이며, 만약 방해받을 여지를 허용하고 사람들의 초대에 응한다면 이 같은 자부심은 서서히 변색된다.- P140

뒤죽박죽이 된 상태를 직시하기란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주변에 주의를 흩뜨리는 것이 나타날 경우, 책상 위에서 기다리고 있는 문제를 마주하기보다는 그 같은 기분풀이에 굴하고 싶어진다.- P140

"회화 작업은 몽상이나 영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을 수공예이고, 이를 잘하고자 한다면 숙련된 장인이 되어야 한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 Auguste Renoir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예술가이자 거장인 그가 한 이 말을 기억해 둘 만하다고 생각한다.- P142

정통 문학 작가들은 다소 추상적인 문제들을 겪고 있다. 등장인물이 작가의 플롯에 따르기를 거부한다든가, 개요 단계에서는 적절해 보였으나 문장으로 옮겨 놓고 나면 적절치 않은 윤리적 문제에 대한 해법이 필요하다든가. 서스펜스 작가의 문제들은 대개 구체적인 것으로, 열차의 속도, 경찰의 수사 절차, 수면제의 치사량, 체력의 한계, 경찰의 유능함과 무능함 사이에 있는 적정선 따위의 것들과 연관되어 있다.- P156

초보 작가가 가장 자주 맞닥뜨리는 걸림돌은 이러한 질문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지?" 이것은 작가가 무대공포증에 더하여 많은 관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들을 즐겁게 할 만한 연기조차 하지 않고 벌거벗은 채 서 있는 느낌으로 벌벌 떨게 할 만큼 무시무시한 질문이다.- P156.157

생각해 봐도 결정을 내릴 수 없다면 생각을 멈추고 다른 일을 해라.- P157

시점은 전적으로 글을 쓸 때 편안하게 느끼느냐의 문제이자, 누구의 눈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낼 것인가 하는 질문인다. 여기에 딱 한 가지 더 고려할 것은 다음과 같은 문제다. 이 글은 어떤 종류의 이야기인가? 방관자의 입장에서 서술되는 게 좋을까, 참여자의 눈을 통해 서술되는 게 좋을까?- P160

1인칭 시점은 장편 소설을 쓰기에 가장 어려운 형식이다. 다른 모든 사안은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할지언정 이 점만큼은 대개의 작가들도 동의하는 것 같다. 나도 1인칭 시점에서 소설을 쓰려다 두 번이나 꽁꽁 묶였는데, 어찌나 지독했던지 그 책들을 쓰려던 생각을 아예 단념해 버렸다. 문제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라는 대명사를 쓰는 데 진절머리가 났고, 책상 앞에 소설의 화자가 앉아 그것을 쓰고 있다는 바보 같은 느낌에 시달렸다는 것 말고는. 그러니 견딜 수가 있나! 게다가 내 작품 속 주인공들은 상당히 자주 스스로를 성찰하는데, 이를 전부 1인칭 시점에서 쓸 경우 인물들이 음흉한 모사꾼처럼 보이게 된다. 물론 그들이 실제로 음흉한 모사꾼들인 건 사실이나, 별도의 전지적 작가가 이들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들려준다면 덜 그렇게 보이는 효과가 있다.- P160

그러나 모든 소설이 그러하듯 서스펜스 소설 역시 정서적인 것이다. 정말로 중요하며 실제 책을 만들어 내는 것은 오감, 그리고 판단과 결정을 내리는 지성이다.- P161

작가가 처음으로 작품을 쓰려 할 때는 작가의 성격이 어떠한지, 어떤 종류의 생활을 해 왔는지, 어디서 어떻게 성장했는지 등등 인생의 개인적 세부에 따라 불가피하게 시점의 선택이 좌우된다. 작가로서는 감정적 측면에서 자신을 닮은 등장인물들의 시점을 우선하는 것이 분명히 더 현명한 선택이다.- P169

당신의 마음속 가장 중요한 자리에는 언제나 명료성이 있어야 한다. 이는 좋은 스타일을 갖추기 위한 최상의 길잡이이기도 하다.- P183

나는 종종 한 챕터의 말미에 있는 한두 문장을 삭제해야 글이 더 좋아진다는 사실을 깨닫곤 한다. 처음에는 그 챕터를 잘 마무리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간신히 쥐어짰던 문장들이다.- P183

출판업자들은 제작비 때문에 책의 소매가가 높아지고 매출은 줄어든다는 이유로 긴 분량의 책을 펴내기를 꺼린다.- P184

만약 편집자가 어딘가 불명료하다고 논평할 경우, 좀 더 명료하게 다듬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게 좋다. 비록 명료하게 하느라 두 번이나 고쳐 썼을지라도 말이다. 편집자에게 명료하지 않은 부분은 독자에게도 명료하지 않을 수 있다.- P187

내용을 잘라 냈더라도 보통은 잘라 낼 부분이 더 남아 있다. 잘라 내는 작업은 갈수록 더 고통스럽고 어려워진다. 마침내 당신은 어디서도 삭제할 만한 문장을 찾아볼 수가 없게 되나, 그러고도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도 ‘무조건’ 네 페이지는 통으로 더 빼내야 하는데." 그리고 재검토를 더 쉽게 하느라 아마도 다른 색 색연필이나 크레용을 쥐고서 첫 페이지부터 다시 시작할 것이다. 마치 과적재한 비행기에서 초과 수화물이나 심지어 연료까지 내다 버리고 있는 것처럼 가차 없어진 태도로 말이다.- P192

둘(헤이즐과 카터)의 결혼 생활이 지속되리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면 이 소설(‘유리 감옥’)은 행복하게 마무리된다. 그러나 카터라는 개인에 초점을 맞추면 이는 암울한 이야기이다. 수감 생활이 인격을 훼손한다는 점을 명백하게 강조하기 때문이다.- P213

설령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등장인물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생활, 직업, 태도에 대한 간단한 정보를 통해 독자는 훨씬 흥미를 느낄 수 있다.- P216.217

나는 내가 쓴 이야기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더 나을 수도 있었으리라. 희미하게라도 이런 생각이 든다면 고쳐 쓰는 게 최선이다.- P217

(‘유리 감옥’에서) 헤이즐과 설리번의 연애는 반짝하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다. 동시에 헤이즐은 카터와의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자 하므로, 자신이 설리번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카터에게 도저히 밝힐 수가 없다. 두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삶이 그녀에게 강요했거나 혹은 선사한 능력이다.- P223

(‘유리 감옥’의) 편집자는 내게 병원에서 통증을 다스릴 때 일반적으로 모르핀을 얼마만큼 사용하는지, 중독자들은 얼마만큼 맞는지 등을 다시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는 정확해야 했으므로 나는 이미 정확하게 썼다고 생각하면서도 다시 도서관에 가서 관련 의학서들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혹시 몰라서 결국 카터가 교도소에서 매일 맞는 모르핀의 양을 줄였다.- P225

숱한 초보 작가들이 이렇듯 사소한 요청들이나 책에서 등장인물 한 명을 삭제해 달라는 부탁을 두고서 발끈한다는 점은 정말이지 놀랍기만 하다. 때때로 그들은 씩씩거리며 에이전트를 떠나거나 출판사에 넘겼던 원고를 거둬들인다. 적잖은 경우 이들은 굽실거리며 돌아와야 한다. 작가의 인생에는 이따위 것들보다 훨씬 더 어렵고 중요하면서도 자존심을 보여야 할 상황들이 틀림없이 차고 넘친다.- P225.226

(‘유리 감옥’에 대해) ‘뉴욕 타임스 북 리뷰The New York Times Book Review’는 "하이스미스의 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라고 깐깐하게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당신이 직접 도전해 보고 어떤지 판단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광고에 쓰일 만한 찬사는 서평 안에 없었다.- P230

이처럼 소설을 영화로 옮길 때 생겨나는 변화는 작가를 철렁하게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이다. 영화가 자연스럽게 돌아가는가? 또한 그럴듯한가?- P231

젊은 작가들은 새로운 작업을 하고 있어야만 한다. 새로운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상상력이 신선하고 자유롭기 때문이다. 살인자니 사이코패스니 야밤의 좀도둑이니 하는 소재들은, 누군가 그것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쓰지 않는 한 하나같이 캐캐묵은 것들에 불과하다.- P235

예를 들어 서스펜스 작가가 살인자들과 희생자들에 대해, 그 끔찍한 사건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사람들에 대해 쓰고자 한다면, 단순히 잔혹성과 낭자한 유혈을 묘사하는 데만 그쳐서는 안 된다. 그는 빛을 비추어 등장인물들의 정신을 밝혀야 한다. 그리고 세계의 정의나 그것의 부재, 선과 악, 인간의 비겁함이나 용기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동시에 이들을 그저 플롯을 이리저리 움직일 동력으로 삼으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가 만들어 낸 인물들은 실제처럼 보여야 한다.- P240

통찰력이란 심리학 서적들을 뒤져서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모든 창조적 인간 안에 존재한다. 누가 뭐라 하든 작가들은 교과서보다 수십 년은 앞서 있다. 도스토옙스키를 보면 알 수 있으리라.- P241

나는 그레이엄 그린의 오락물들을 가장 좋아하는데, 그것들이 지적이고 문장도 아주 능란하기 때문이다. 그는 도덕주의자이기도 하며 심지어 오락물들에서조차 그런 면모를 드러낸다. 그리고 나는 설교하듯 주입시키지만 않는다면 도덕성에 흥미를 느낀다.- P244

권투 선수들이 그러하듯 우리도 서른 이후에는 조금씩 시들해질는지도 모른다. 즉 더 이상 네 시간만 자고서는 생활을 꾸려 나가지 못하고, 세금에 대해 푸념하며 사회가 우리는 아주 나앉게 만들려는 것 같다고 느끼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그럴 때는 이 사실을 기억했으면 한다. 사람들이 정치 체제 따위를 꿈꾸기보다 훨씬 전부터, 달팽이와 실러캔스 혹은 한결같은 형태로 지속되어 온 또 다른 생물들처럼, 예술가들이 존재해 왔고 끈질기게 존속해 왔음을.-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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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감 넘치는 글쓰기를 위한 아이디어 - 세계 최고의 범죄소설 작가가 들려주는 박람강기 프로젝트 10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송기철 옮김 / 북스피어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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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작가에게 운이란 대부분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주목을 받는 데서 비롯할 테고, 이 책에서 논하려는 것도 그러한 지점이다.- P9

예술의 관건은 독자에게 흥미로운 것, 몇 분 내지 몇 시간이 아깝지 않은 무언가를 이야기함으로써 관심을 사로잡을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P10

나는 성공하는 방법, 팔릴 만한 글을 쓰는 방법을 초보 작가에게 알려 줄 책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모든 작가의 목표가 그러한 것은 아니리라. 적어도 젊은 시절 나의 목표는 그랬다는 이야기다. 달리 비축한 재산도 없었던 당시의 나는 단편과 장편 소설을 써서 밥벌이를 하기로, 적어도 노력은 해 보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P12

서스펜스란 무엇인가? 나는 서스펜스 소설이란 폭력 행위, 더 나아가 죽음의 가능성이 시종 가까이 있는 소설이라고 대답하려 한다. 굳이 나의 상상력을 폭력이라는 주제에 한정하려 애쓰지는 않지만 이 책은 상업적 용어로서의 서스펜스 집필에 대한 것이다. 이는 폭력, 때로는 살인을 의미한다.- P13

아이디어는 작가에게 떠오르는 것이지, 작가가 몸소 아이디어를 찾아다니는 게 아니다.- P13

내가 쓴 몇몇 단편 소설은 극히 가느다란 아이디어로부터 시작되었다. 과연 무엇이 인상적인 단편 소설, 걸작 단편 소설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P15

나는 개성이란 것이 존재하고, 우리가 스스로의 모습 그대로일 수 있으며, 재능을 최대치로 활용할 수 있다고 믿는다.- P16

책을 쓸 때 즐거움을 주기 위한 대상으로 가장 먼저 떠올려야 할 사람은 당신 자신이다.- P19

액션 없이 길게 이어지는 구간이나 심오한 사상 따위를 서스펜스 소설에서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서스펜스라는 장르를 구성하는 틀은 본질적으로 생생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작가가 원하기만 한다면 물리적인 액션이 없는 구간을 집어넣거나 심오한 사상을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 묘미이기도 하다. ‘죄와 벌Crime and Punishment’은 이를 보여 주는 훌륭한 예에 해당한다. 사실 나는 도스토옙스키Dostoyevsky의 책 대부분이 만약 오늘날 발표된다면 서스펜스 소설이라 불리리라고 생각한다. 제작비 절감을 위해 분량을 좀 줄여 달라는 요구는 받겠지만.- P19.20

친구가 "너 이걸로 분명히 끝내주는 소설을 쓸 수 있을걸"이라고 결정적인 한마디를 덧붙여 들려주는 이야기들이란, 아무리 흥미로운 경우라 해도 어쨌든 간에 작가에게는 쓰잘머리 없는 것이 분명하다.- P24

스릴러물이 슬슬 심심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는 독자들은 요리책에서 깃털과 껍질로 덮인 우리 친구들에 대한 부분을 훑어보고 싶어질는지도 모르겠다. 조리 자체야 말할 것도 없을뿐더러, 가정주부는 이 같은 조리법들을 그저 읽는 데만도 돌처럼 냉담한 마음을 먹어야만 한다. 테라핀(크기가 작은 민물 거북의 일종)의 숨을 끊는 방법은 산 채로 끓이는 것이었다. 죽인다는 단어는 쓰이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으니, 대체 무엇이 끓는 물에서 살아남을 수 있단 말인가?- P25

젊은 작가들은 스스로를 너무 몰아붙이는 경우가 있는데, 젊을 때는 이러한 방식도 어느 선까지는 제법 잘 먹힌다. 그러나 그 선을 넘는 순간 무의식이 반발하고 단어들은 떠오르지 않으며 아이디어들도 태어나기를 거부한다. 휴가를 낼 여력이 있든 없든 간에 두뇌가 그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P29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교의 지평은 창조의 지평이 아니며, 창조적인 아이디어들이 그 위로 날아오를 수 있는 지평도 아니다.- P29

내 작품에 대해 다른 작가와 논의한다니 나로서는 그보다 더 나쁘거나 위험한 짓을 생각해 낼 수가 없을 정도다.- P31

(그리스와 크레타) 여행 중에 나는 미국 최상위권의 대학을 졸업한 중년의 남자에게 사기 비슷한 짓거리를 당한 적이 있었다. 몹시 귀족적이면서도 유약해 보이던 그 남자의 얼굴이 내 소설(‘1월의 두 얼굴’) 속에 등장하는 사기꾼의 얼굴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P33

책을 써 나가고 성공적으로 끝마친다는 것은, 책이 완성될 때까지 지속되는 일종의 탄력과 의지, 확신을 얻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P39

경험 있는 작가들이 모두 그러하듯 다음과 같은 감각을 가져야 한다. 하나의 아이디어가 나온 지점에는 더 많은 아이디어가 있고, 처음으로 힘을 발견할 수 있었던 지점에는 더 많은 힘이 있으며, 살아 있는 한 당신은 고갈되지 않는다는 감각. 아무런 과장 없이 말하건대 그러려면 낙천적인 기질이 필요하다.- P39

서스펜스 소설을 철저히 계산된 지성의 산물로 보더라도, 그 안에는 작가가 몸소 경험했을 사건에 대한 묘사와 그 장면이 담겨 있을 것이다. 예컨대 개가 차에 치이는 광경이라든가, 어두운 거리에서 누군가 뒤를 밟는 듯한 느낌. 이처럼 직접 겪고 실재로 느낀 경험들이 담겨 있을수록 더욱 훌륭한 책이 된다.- P42

나는 소란 피우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을 두려워하며, 두려워한다는 이유 때문에 다시 그들을 증오한다. 적대적 감정의 순환인 셈이다.- P47

우리가 혈육이긴 하고 손 모양도 살짝 비슷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나와 할머니는 거의 닮지 않았었다. 얼마 전에 나는 내 발에 맞게 모양이 잡힌, 거의 닳아 해진 내 신발 한 짝을 우연히 발견했다. 그리고 거기서 할머니의 발 모양을, 혹은 그것이 표현된 모습을 찾아냈다. 할머니의 실내화나 외출할 때 신곤 하던 굽 낮은 까만색 펌프스에서 보아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중략)
20년이 지나 내 낡은 신발을 보았을 때 나는 할머니 때문에 처음으로 진짜 눈물을 흘렸고, 처음으로 그녀의 죽음을, 그녀의 긴 생애를, 이제는 곁에 없는 그녀의 부재를 깨달았다. 그리고 앞으로 닥칠 나 자신의 죽음 역시 깨달았다.- P49.51

부정적이고 악의적인 감정들보다는 긍정적이고 애정 어린 감정들로부터 창작하는 편이 훨씬 더 쉽다. 질투란 좀먹기만 할 뿐 아무것도 주지 않는 암과 다를 바 없어서, 설령 아무리 강렬하다 한들 아무런 쓸모도 없다는 사실을 나는 깨달았다.- P52

누군가는 갖가지 부침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껍데기를 만들어 낸다. 어떤 사람에게 이는 예의나 단련이라 불릴 테고, 여기에는 모욕을 받아넘기거나 가차 없이 주는 능력, 적절치 않다고 느껴지는 감정을 은폐하고 말살하며 망각하는 능력이 흔히 수반된다. 이런 데 익숙해진 사람들은 어떤 감정에도 좀처럼 영향을 받지 않는 상태가 될 수 있다.- P53

이 모든 빈약한 아이디어들을 적어 놓아라. 공책에 적힌 한 줄의 문장이 곧장 두 번째 문장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놀라울 만큼 흔하다. 플롯은 그것을 메모할 때 발달될 수 있다.- P71

기벽들로 가득한 어떤 인물이 이따금 그 같은 기벽들로 인해 플롯에 액션의 물꼬를 틀게 되리라는 점은 명확하다. 다른 경우에는 특이한 상황이 또 다른 특이한 상황들로, 즉 액션의 전진으로 이어지리라는 점도 역시 분명하다. 그러고 나면 특정 인물이든 인물들이든, 플롯의 진척이든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나는 왜 플롯이나 등장인물이 구상을 이끌어 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그 반대인 방법보다 열등하거나 우월하다고 여겨져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P78

부조화를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는 한계가 있으나, 만약 성공한다면 그 결과는 전형적인 경우보다 흥미롭다.- P79

당신이 쓰는 문장은 마치 물리적인 현장이 그러하듯 어떤 분위기를 갖추어야 한다.- P81

결국 플롯은 작업을 시작할 때 작가의 마음속에서 경직된 것이어서는 절대 안 된다. 나는 더 나아가 플롯이 완성되어서도 안 된다고 믿는다. 나는 스스로를 위한 즐거움도 생각해야 하며, 나 자신조차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이 좋다. 만약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전부 알고 있다면 그것을 쓰는 것은 그다지 즐거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점이 있다. 플롯의 흐름이 유연하다면 등장인물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움직이고 결정을 내릴 수 있으며, 이로 인해 현실에서처럼 스스로 숙고하고 선택할 뿐 아니라 그 선택을 취소하고 다른 선택을 할 기회도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경직된 플롯들은 아무리 완벽하더라도 끝내는 자동 조작되는 인물들로 귀결되고 말 것이다.- P86.87

개인적으로 내 소설 속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주인공들 모두가 꽤나 매력적이라고, 적어도 혐오스럽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P89

나로서는 다만 살인범인 주인공한테 가능한 한 유쾌한 자질들을 많이 부여하는 방법을 제안할 수 있을 뿐이다. 누군가에게 내보이는 관용, 친절, 그림이나 음악 내지는 요리에 대한 애호. 이러한 자질들은 주인공의 범죄자 혹은 살인자다운 특성들과 대조되면서 재미를 유발할 수도 있다.- P89.90

삶의 자잘한 곤경들이라면 무수히 많다. 치통, 밀린 고지서들, 방 안이나 옆방에서 앓는 아기, 배우자네 가족의 방문, 실연의 순간, 끝도 없는 서식을 기입하라 요구하는 공무원. 그 엄선 작가가 이들로부터 시달리지 않고 작업할 수 있었으랴? 정신을 어지럽힌다고 할 만한 무언가가 우체통에 들어 있지 않은 아침을 맞은 적도 거의 없는 것 같다.- P95

작가들은 전문직 종사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의뢰인들이 직접 찾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주택관리국이나 누가 됐든 관련 법을 만든 사람한테 편지를 써 보낼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매일같이 얼마나 많은 등장인물들이 내 집의 초인종을 누르고 찾아오는지 귀하는 짐작도 못할 겁니다. 그리고 나는 생계를 위해 절대적으로 그들이 필요합니다."- P95.96

어떤 클라이맥스들은 그 뒤로 더 이상 할 말이 없고 거기서 갈채 속에 책이 끝나야 하기 때문에, 가장 마지막에 와야 한다.- P102

작가는 동시대의 유행을 좇아 논리적이고 진부한 글을 씀으로써 좋은 수입을 보장받을 수 있다. 그 같은 모방작들은 잘 팔리기도 하고 정서적인 측면에서 작가를 너무 고갈시키지도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작가는, 집필 활동에 온 힘을 쏟을 뿐 아니라 책이 거절될 위험까지도 무릅쓰는 좀 더 독창적인 작가에 비해 두 배 내지 열 배나 되는 저작물을 생산할 수 있다. 글쓰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를 가늠해 보는 게 좋다.- P104

서스펜스 소설의 범죄자는 일반적으로 이야기의 전체에 걸쳐 분명히 드러나며, 작가는 그가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묘사해야만 한다. 따라서 서스펜스 소설의 작가는 훨씬 더 면밀하게 범죄자의 심리를 다룬다. 작가가 직접 공감하지 않고서는 이런 일을 할 수 없다.- P106

프루스트Proust가 쓴 서스펜스 소설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나는 상상할 수 있다. 문장은 느긋하고 복잡한 반면에 액션은 꼭 그렇지만도 않을 것이고, 표현의 동기들은 철저히 분석될 것이다.- P109

내 소설의 느릿하고 심지어 따분하기까지 한 도입부들은 대부분 상당히 긴장감 있는 문장으로 쓰였다. 80페이지에 걸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지언정 햇볕이 내리쬐는 외국 바닷가의 활기 없이 차분한 별장을 열정적인 방식으로 묘사하는 것도 가능하다.- P109

작가는 가장 재미있고 즐거움을 주는 일련의 장면들로 소설 속의 사건들을 구성해야 한다.- P110

그리고 어떤 책이든, 또 그림의 경우에도 어쩌면, 그것을 처음 꿈꾸었을 때와 완전히 동일하게 완성되는 일은 없다.- P112

단지 독자를 놀라게 하고 충격을 주는 것은, 특히나 타당성을 포기하면서까지 그렇게 하는 것은 얄팍한 속임수다. 선정적인 사건을 제시하고 재치 있는 문장을 구사할 수는 있겠으나 부족한 작가의 독창성까지 은폐할 수는 없다.- P113

소설가일 뿐만 아니라 수필가이자 평론가이기도 한 줄리언 시먼스Julian Symons는 특정한 범주에 구속받지 않으며, 그의 서스펜스 소설들은 해당 장르가 도달 가능한 성취를 여실히 보여 준다.- P126

나는 또한 고요한 사건의 향방도 떠올려 볼 수 있다.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휠체어 신세인 할아버지를 충실히 보살피고 있는데, 이 때문에 세상과는 담을 쌓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절대로 영원할 수 없다. 당신이 이에 대해 책을 쓰고 있다면 말이다! 당신의 책에서 여자는 잠시 휠체어의 세계로부터 벗어날지도 모르며, 소설의 말미에는 그 세계로 되돌어갈지도 모른다. 다만 이것이 서스펜스 소설이라면 그녀는 돌아가지 못할 공산이 크다.- P129.130

한 권의 책을 쓴다는 것은 정말이지 오래도록 이어지는 작업이며 이상적으로 말해 이 과정은 오직 자는 동안에만 중단되어야 한다.- P134

책에서의 챕터는 연극으로 치면 ‘막’과 제법 유사하고, 그 안에는 크든 작든 극적이거나 감정적인 한 방이 있다. 이 점을 감정적인 측면에서 의식하고 있어야만 한다.- P135

나는 지금껏 쓴 원고를 폐기하고, 신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의자의 끄트머리에 아슬아슬 걸터앉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왜냐하면 리플리는 바로 그런 종류의 청년이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앉아 있을 거라면 의자 끄트머리에 아슬아슬 걸터앉아 있는 청년.- P137

내 생각에 ‘재능 있는 리플리’의 플롯에는 현란한 점이 전혀 없으나, 그 광적인 문장과 리플리 자신의 오만방자하고 대담한 성격 덕분에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나 스스로 그러한 인물 속에 들어갔다고 생각함으로써, 작품의 문장은 논리적으로 접근했을 경우 응당 그러했을 것보다 한층 자신만만해졌다. 소설은 더욱 재미있어졌다.-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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