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 - 피해자 없는 범죄, 성폭력 수사 관행 고발 보고서
T. 크리스천 밀러.켄 암스트롱 지음, 노지양 옮김 / 반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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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경찰이 수상쩍은 사람들의 위치를 추적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간이 일어난 시점에 범인을 추적하는 건 너무 늦다. 그의 사이클은 계단식으로 뚝 떨어진다. "당신들이 수사에 총력을 기울일 때는 난 숨을 시기입니다. 평범한 사람으로 살고 있죠." 오리어리는 말했다. 그는 의자에 기대더니 웃었다. "그러니까 스케줄이 맞지 않는다고 할까."- P338

"그런 드라마들 널렸잖아요. ‘크리미널 마인드‘, ‘덱스터‘, ‘로 앤 오더: 성범죄전담반‘. 나에게 일어나는 일만 아니라면 다들 보고 싶어 하죠. 기차 탈선 사고가 우리 동네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얼마나 즐거운 구경거리입니까. 다들 보고 싶어서 아주 삼킬 듯이 달려들죠. 사람들은 책을 팔고 싶어하니까."- P339

총 7페이지짜리 문서인 내부 감사 보고서는 사건에 관여하지 않은 린우드의 경감 한 명과 경사 한 명이 작성했다. 그들의 보고서에 쓰인 언어는 절제되어 있었지만(예를 들어 수사가 "잘못된 결론에 도달했다."고 썼다.) 분석은 예리했다. 형사들은 마리 진술의 사소한 모순과 페기의 의심에 너무 많은 무게를 실었다. 의심이 한번 싹튼 후에는 마리를 면담하기보다는 취조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마리가 자백하자마자 "서둘러 허위 신고죄로 기소하고" 사건을 종결해버렸다. 마리가 자백을 취소하려고 했을 때 (존) 리트간 형사는 협박의 용어를 사용했다.- P347

(린우드 사건의 외부 감사를 맡은) (그레그) 린타는 14페이지의 감사 보고서에 이렇게 썼다.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마리의 신뢰 문제가 수사의 초점이 되었으며 심각한 중범죄가 일어났음을 가리키는 강력한 증거들은 완전히 무시되었다." 린타는 첫날 한 시간밖에 수면을 취하지 못한 마리가 강간당한 일에 대해 몇 번이나 반복해서 진술했는지 되짚는다. 당일에 메이슨이 마리에게 진술서를 요구한 것은 불필요하며 잔인하기까지 했다. "경찰은 피해자에게 같은 이야기를 다섯 번이나 하라고 요구했다." 이런 여러 개의 진술을 손에 쥐고 메이슨은 그 진술의 "사소한 차이"가 정신적 외상을 입은 피해자에게 흔한 일인 데도 불구하고 중대한 불일치로 만들었다. 또 메이슨은 페기의 의심을 수사 보고서에 언급해서도 안 되었다. 뒷받침하는 증거가 없는 어떤 이의 의견은 "수사와 절대적으로 무관하다."고 린타는 썼다.- P348

강간 혐의 수사의 기초를 작성한 퇴직 형사 조앤 아첨볼트가 본 마리의 사건은 경찰의 회의주의가 얼마나 자기충족적인 예연일 수 있는지 보여준다고 했다. "안터깝게도 피해자를 취조하듯 신문하고 진술의 불일치를 따지는 것은 그저 피해자를 입 다물게 하고 진술을 번복하게 함으로써, 많은 성폭력 고소가 사실 무근으로 끝난다는 법 집행기관의 편견을 강화하게 됩니다."- P353

린우드 남쪽으로 난 주간고속도로 5번을 직선으로 타면 나오는 오리건주 애술랜드에서 캐리 헐이라는 형사가 ‘당신에겐 선택권이 있습니다(You Have Options)‘라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2013년에 처음 도입된 이 프로그램의 목표는 성폭력 피해자들의 신고 수를 늘려 연쇄 성범죄자 검거를 돕는 것이다. 헐은 많은 피해자들이 비밀 보장을 원하고, 신뢰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 프로그램은 경찰이 어떻게 수사할지, 아니면 수사 진행을 할지 안 할지까지도 피해자 스스로 결정하게 한다. 피해자들은 익명으로 남을 수 있다. 피해자가 고소를 꺼리면 경찰은 그 결정도 존중한다. 프로그램 도입 첫해 애슐랜드 경찰서에서는 성폭력 신고가 106퍼센트 증가했다. 그 이후 버지니어, 미주리, 콜로라도, 워싱턴 등 12개 이상의 주 경찰서에서 이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P355.356

사람들은 각자 갈 길을 가고 오해는 오해로 남을 뿐이다.- P362

오리어리의 강간을 묘사하며 상호합의적인 성관계와 관련된 언어는 절대적으로 피하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애무하다‘ 대신에 ‘더듬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P368

강간에 대해 쓰면서 객관성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느꼈다. 예를 들어 성폭력을 묘사할 때는 오리어리가 피해자들에게 준 공포를 전달하기 위하여 되도록 자세히 묘사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불필요한 세부 사항은 적지 아노으려고 애썼다. 오리어리의 피해자들에 대해 서술할 때 신분이 노출될 수 있는 사항은 생략했다.(세라가 교회 성가대에서 활동한다고 했지만 어떤 교회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가 공격한 여성들을 캐리커처가 아니라 개별적인 인물로 묘사하는 것이 중요했기에 어느 정도의 디테일은 추가할 수밖에 없었다. 또 하나의 어려움은 역시 용어와 관련되어 있다. 작가의 말과 이 책의 모든 곳에서 우리는 마리를 비롯해 오리어리에게 강간당한 여성들을 지칭하기 위해 ‘피해자‘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강간을 당한 이들 중에는 모두는 아니지만 ‘생존자‘나 ‘승리자‘라는 단어를 선호하는 이들도 있었다. 우리는 가장 흔히 쓰이는 용어이자 일반적인 용어로서 ‘피해자‘를 택했다. (다음)- P367.368

(이어서) 하지만 오리어리에게 공격당한 여성 중 한 명은 이 용어로 표현되는 것을 거부했기에 그에게는 이 용어를 쓰지 않았다. 오리어리의 강간을 묘사하며 상호합의적인 성관계와 관련된 언어는 절대적으로 피하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애무하다‘ 대신에 ‘더듬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P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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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 - 피해자 없는 범죄, 성폭력 수사 관행 고발 보고서
T. 크리스천 밀러.켄 암스트롱 지음, 노지양 옮김 / 반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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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범 중 4분의 1에서 3분의 2는 여러 건의 성폭행을 저지른다고 밝혀졌다. 살인자는 단 1퍼센트만이 연쇄살인범으로 추정된다.- P148

강간 사건의 대략 절반 정도에서만 DNA가 나온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연쇄강간범이 특정한 마스크를 쓰거나 독특한 말투를 갖고 있거나 특정한 방식의 매듭을 사용한다는 정보로 사건을 풀어가야 하며 그러한 방면에서 바이캡(Vicap)은 가장 우수하고 유일한 전국 규모의 도구다.- P149

하지만 외로운 직업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작은 경찰서에는 범죄분석가가 따로 없고 경찰서에서도 두세 명이 있을 뿐이다. (로라) 캐럴은 다른 기관의 분석가들과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콜로라도 범죄분석가협회(Colorado Crime Analysis Association)가 여는 월례 회의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소박한 모임이었다. 대부분이 여성인 분석가들이 경찰서를 돌아가며 남은 회의실에 모여 전 달에 벌어진 사건을 리뷰하고 데이터의 패턴을 비교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화를 통해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것도 있었다. 그녀는 협력을 통해 데이터가 강력한 수사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자각했다. "분석가로서 우리는 항상 소통하고 협력하려고 합니다. 범죄에는 국경이 없으니까요." 캐럴은 나중에 협회의 회장이 되었다.- P150.151

페기는 정신 건강 상담 분야의 석사 학위 소지자였다. 이전에는 위탁가정 아동들의 관리자였고 지금은 노숙인 보호소에서 어린이 보호 담당자로 일하고 있다. 몇 년 후 그녀는 특수 아동 보조 교사로 학교에서 일하게 된다. 집에는 DSM, 즉 ‘정신질환의 진단 및 통계 편람‘이 있었다. 미국 정신의학회(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정신질환 진단 분류 체계로 종사자들이 가장 자주 참고하는 전문서적이다. 페기는 그 몇백 페이지 안에 마리의 진단명이 있다고 믿었다. 마리는 과거 지속적인 상처를 받으며 피상적인 관계만을 맺고 극적인 상황에 끌리는 일종의 성격장애가 발현된 것이다.- P154.155

(위탁모인 페기가) 아파트에 가보니 마리는 바닥에 엎드려 울고 있었다. "또 이상했던 건 말이죠. 내가 옆에 앉았더니 마리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기 시작하는데요. 내가 ‘로 앤 오더‘ 애청자인데 정말 이상한 느낌이 드는 거죠. 마치 ‘로 앤 오더‘ 대본을 읽어주는 것 같았어요." 부분적으로는 마리가 한 말의 내용 때문이기도 했다. 왜 강간범이 하필 마리의 신발 끈으로 마리를 묶었을까?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신발 끈이라니, 사람을 묶기에는 너무 약하지 않을까? 왜 밧줄이나 수갑을 가져오지 않았지? 또 한편으로는 마리가 말하는 방식 때문이기도 했다. "무심했어요. 자기 일이 아닌 것처럼. 말의 내용과 감정이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P156

마리는 친구 한 명 한 명에게 일일이 다 전화를 걸어 말했다. 나 강간당했어. 그중에는 사이가 소원해진 친구도 있었고 마리에게 못되게 군 친구들도 있었다. 마리는 이 문제를 비밀로 하거나 조심스레 취급하려 하지 않았다. 특별한 사람 몇 명에게만 이야기한 것이 아니었다. (마리의 위탁모들인) 페기도 섀넌도 마리가 과하게 행동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갈구하는 건 맞지만 습관적인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두 사람 모두 마리가 이 모든 일을 꾸며낸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다.- P158.159

섀넌은 그날 마리와 하루 종일 같이 있었는데 이상하게 느껴지는 행동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결정타는 두 사람이 저녁에 간 쇼팽이었다. 마리는 경찰이 침구를 증거로 가져가서 새 침구가 필요하다고 했다. 두 사람은 예전에 마리가 시트와 스프레드를 샀던 매장으로 갔고, 마리는 강간당했을 때 침대에 깔려 있던 것과 같은 침구를 찾았다. 같은 침구가 없다고 하자 마리는 불같이 화를 냈다. 하루 종일 같이 있었지만 마리가 화를 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섀넌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굳이 똑같은 시트를 사려고 하니?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르지 않겠어? 섀넌이 마리에게 물었다.
전 그 시트가 좋단 말이에요, 마리가 말했다.
섀넌은 마리의 행동에 충격을 받아서 위기상담센터에 전화를 걸어 강간 피해자의 반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알아보려 했다. 인터넷에서 찾은 번호로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P159.160

리드Reid 테크닉을 사용하는 수사관들은 자극적인 질문을 전디고 상대의 반응을 판단하도록 교육받는다. 자주 등장하는 대사는 이것이다. 당신은 이 짓을 저지른 사람이 어떤 종류의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대답이 ‘글쎄요. 상황에 따라 다르겠죠.‘처럼 얼버무린다면 그 사람은 유죄일 확률이 높다. 신문자는 덫을 놓거나 속임수를 쓸 수도 있다. 목격자가 하지 않은 말을 했다고 주장할 수 있고(‘네가 그것을 하는 걸 봤다고 하던데?), 물리적 증거가 없지만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총에서 네 지문을 찾았어.‘) 이 기법에 깔린 가정에 의하면 결백한 사람은 덫에 걸려들지 않는다. 신문자는 언어적 행동을 판단하는 법을 배운다. 확고하게 답변한다면? 신뢰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와 ‘전형적으로‘ 같은 애매한 단어가 들어간 답변이라면? 그다지 신뢰할 수 없다. 스타카토식의 대답은 좋다. 나는/절대/하지/않았습니다. 웅얼거리는 건 거짓말하고 있다는 뜻일 수 있다.- P166

형사들은 자백이 가져올 법적 결과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도록 훈련받는다. "용의자가 진실을 말한 후에 치르게 될 대가나 부정적인 파급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심리적으로 부적절하다."- P167

마리의 집 현관에 같이 앉아 있던 조던은 마리의 휴대전화로 친구들과 예전 동창들의 전화가 끊임없이 걸려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화를 받을 때마다 마리는 더 심하게 울었다. 그들이 왜 전화를 걸어오는지 알았다. 그들은 애초부터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으며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려고 전화했다.- P177

그는 강간을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각각의 실수에서 하나씩 배워나갔다. 마이스페이스에서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도 했다. 여성의 프로필을 검색한 다음에 나이가 많은지 혼자 사는지 여부를 알아냈다. 그런 여자들은 쉬운 먹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P181

그는 자신이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교육 수준은 낮다는 걸 알았다.- P183

그는 학교(레드록스커뮤니티칼리지)의 인문학 커리큘럼에 푹 빠졌고 새로운 지식의 바다를 헤엄치는 눈 반짝이는 대학 신입생이 되었다. 역사, 인류학, 철학 등 인간의 정신세계를 설명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수강했다. 가톨릭 신학자인 토머스 아퀴나스를 읽고 스코틀랜드의 회의론자 데이비드 흄을 읽고, 정치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과 독일 윤리학자 임마누엘 칸트와 프랑스 실존주의자 장폴 사르트르와 미국 언어학자 놈 촘스키의 책을 읽었다. 할런 스트리트 65번지 집 작은방 책상 위에는 빽빽하게 필기된 미드사의 스프링 공책 몇 권이 굴러다녔다. 그는 심리학을 전공하기로 했다.- P184

몇 년 후 그의 과거를 알게 되었을 때 (멀린다) 와일딩은 자신의 수업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생각했다. 그녀는 그를 강의실에서 "똑똑하고 통찰력 있는" 학생으로 기억한다. 커뮤니티칼리지의 철학 강의실에서는 흔치 않은, "배울 열의가 있는" 학생들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철학 수업이 그가 자신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까? 아니면 그저 현대 철학 이론으로 포장된, 자기의 행동에서 빠져나갈 핑계 혹은 변명을 제공했던 걸까?
"제 사견으로는, 그에게 융의 원형에 대한 참조는 죄책감을 전이시키는 방법이 된 것 같습니다. 아니면 자신은 옳고 그름의 차이를 인지하고 있다고 포장하려는 술책이었거나요. 여성을 사냥감으로 삼으려는 욕망, 그들의 신체뿐 아니라 공포까지 먹잇감으로 삼으려는 욕망을 실행에 옮기는 내내 말입니다." 와일딩 교수는 말한다.- P189

학비 마련은 어렵지 않았다. 군대에서 복무했기 때문에 제대군인원호법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학기마다 퇴역군인관리국에서 등록금과 수럽료 명목으로 레드록스에 3834.35달러를 보냈다. 또 매달 집 렌트비로 1531달러 수표를 보내주었다. 주거정책에 근거해 책정된 이 금액은 그가 임대해 살고 있는 할런 스트리트 65번지의 월세보다 많았다. 그러니까 피트니스 센터 이용료도, 가끔 후터스에서 지출하는 식비도, 온라인 비디오게임인 월드 오브 워크레프트 월정액권도 미국 정부가 비용을 대는 셈이었다.- P189.190

그는 숫자점에도 매혹되었다. 이교도의 상징 문자들로 노트를 채웠다. 보다 충실한 연구를 위해 희귀 문서를 찾아다녔다. 이집트의 신지학을 전부 담고 있는 42권짜리 ‘토트의 서(Book of Thoth)‘도 구하려 했다. 사회에 관한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해줄 현대 과학도 받아들였다. 베르트 휠도블러와 E. O. 윌슨이 곤충의 계급 체계를 연구해 집대성한 ‘초유기체‘ 같은 책이었다. 최면술도 흥미로웠다.- P203

(현장감식원) (캐서린) 엘리스에게는 빅뉴스가 있었다. 방금 레이크우드 강간 미수 사건 현장에 남은 장갑 자국과 신발 족적 자료를 받았다고 했다. 자료를 보내준 범죄분석가는 버지니아주 콴티코의 FBI 아카데미에서 2주간 연수를 받는 동안 친해진 친구 셰리 시마모토였다. 시마모토는 덴버의 법 집행기관 분석가들의 느슨한 네트워크인 블루웹 회원이기도 했다.
하필 시마모토가 그 신발 족적을 발견했다는 사실은 너무나 완벽하게 그녀다웠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신발광이었다. 그녀는 전 세계 한정판 운동화 수집가들에게 사랑받는, 삼선 무늬가 들어가고 조개 모양의 앞코를 가진 아디다스 슈퍼스타 다섯 켤레를 포함, 50켤레나 되는 신발을 갖고 있었다. 경찰이 되기 전에 했던 아르바이트 중에 가장 좋아했던 일은 레이디 풋 로커라는 신발 매장 일이었다. 시마모토는 수학을 전공했지만 신발에 대한 남다른 애착 덕분에 범죄분석가가 된 후에 족적 식별 전문가가 되었다.- P207

(강간을 당했다고 신고한) 릴리도 답답했다. 그녀는 원래부터 경찰을 그리 신뢰하지 않았다. 강간 미수 사건 몇 달 전 레이크우드의 경찰과 관련해서 기분 나쁜 경험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동네의 이웃집 고목 앞에서 종교 의식을 하는 것을 좋아했었는데 집주인이 바뀌자 새 주인은 자신의 집 앞마당에서 이상한 여인이 노래를 하고 춤을 춘다며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릴리에게 사유지에서 떠나라고 명령했다. 그녀는 경찰이 그녀를 괴롭혔다는 내용의 청원서를 썼다.- P212

(형사인) (에런) 하셀은 군인 집안에서 보수적인 기독교인으로 자랐다. 부친은 공군 참전 용사로 제대 후 가전제품 수리를 했고 어머니는 교사였다. 그는 오하이오주 데이튼 외곽에 있는 작은 침례교 대학인 시더빌칼리지에 진학했다. 시더빌칼리지의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신학을 부전공으로 택해야 했고 교수들은 천지창조설을 가르쳤다. 학교의 모토 또한 이 학교의 사명을 명확하게 드러냈다. "예수의 월계관과 약속을 따르는 대학."- P213.214

하지만 그럼에도 하셀은 자신이 세상만사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알 만큼은 현명한 사람이었다. 시더빌에서 11킬로미터 북쪽으로는 또 다른 사립대학이 있었는데, 그곳은 완전히 다른 세계 같았다. 안티오크칼리지는 전형적인 소규모 인문대학으로 민주주의와 학생 자치와 사회 정의를 교육 철학으로 삼았다. 학생들은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해야 했고 교수들은 학생들을 학점으로만 평가하지 않고 각각의 학생들에게 긴 글을 남겨주었다. 안티오크칼리지의 모토는 이러했다. "인류애의 실현 없이 죽는 것을 부끄러워하라." 하셀은 안티오크 학생들과 어울릴 기회가 많이 있었다. 그는 다르다는 게 비정상은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P214.215

경험을 통해 그(에런 하셀)는 잠재적 피해자를 거짓말쟁이로 보는 건 위험하다는 사실도 배웠다. (중략) 하지만 그는 이제 형사였고 제보자들이 허위 신고로 체포될까 두려워 중요한 정보를 나누는 것을 불편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레이크우드 경찰서의 고위 간부들 또한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허위 신고로 입건하는 것은 지양하라고 했다.- P215

그녀(샤론 웰런)는 자기 집 바로 맞은편에 사별하고 혼자 사는 89세의 노부인 캐슬린 에스테스를 살뜰히 살피곤 했다. 어느 여름, 2010년 6월 14일 월요일의 늦은 밤, 웰런이 창문을 내다보자 에스테스 부인의 집 앞 골목 한 켠에 흰색 픽업트럭이 서 있었다. 트럭을 보자마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수리공이 다녀가기엔 너무 늦은 시각이었다. (중략)
30분 후 웰런은 잠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10시 49분이었다. 트럭은 아직도 에스테스 집 앞에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운전석에 한 남자가 보였다. 남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차 안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남편이 번호판에 적힌 번호를 적었다. 웰런이 다시 에스테스에게 전화했고 에스테스는 경찰에 신고하기로 했다. 에스테스는 웰런의 남편이 적어놓은 차량번호를 말해주었다. 935-VHX.- P217.218

(다넬) 디지오시오는 불가능한 일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는 데 익숙했다. 그녀는 콜로라도주 그릴리 근처의 평야 지역 작은 마을에서 자랐다. 조용하고 안전한 마을이었다. 10대 때 배구와 농구선수로 활약했고 콜로라도주 길크레스트에서 열리는 육상 대회에서 밸리고등학교 대표로 출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FBI에 더 끌렸다. 덴버대학교에 입학했고 범죄학을 전공할 예정이었다. 교수는 그녀에게 FBI에 입사하려면 특수 분야를 전공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면서 통계학을 추천했다. FBI는 최근 자료 분석 분야에 투자하고 있던 참이었다.
하지만 디지오시오는 수학에 강하지 않았다. "영어를 잘했고. 음악을 좋아하고." 그녀는 말한다. 하지만 법 집행기관에서 꼭 일해보고 싶었다. 통계를 공부해야 된다면 통계학을 공부할 것이다. "반 강제로 수학을 좋아하게 되었죠." 그러다 공부하면서 현실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통계학의 힘이 크다는 것을 알고 매혹되었다. (다음)- P219

(이어서) 그녀는 통계가 "목적이 있는 수학"이라고 했다. (중략) 2008년 그녀는 레이크우드에서 일하는, 통계학을 전공한 콜로라도의 몇 안 되는 범죄분석가 중 한 명이 되어 있었다.- P219.220

커클랜드 경찰서에서는 두 명의 형사 잭 키시와 오드라 웨버가 이 사건(63세 여성이 당한 주거 침입 강간 사건)을 맡았다. 이 범죄는 두 가지 면에서 굉장히 특수한 케이스였는데 범행의 잔인함도 그랬지만 확률상으로도 그러했다. "여긴 커클랜드라고요. 이런 범죄는 잘 일어나지 않는 곳입니다." 키시는 말한다. "우리끼리는 이곳을 북부의 베벌리힐스라고 부릅니다."- P234

그(잭 키시)는 가정폭력 전담 형사이자 인질 협상가로 일하며 트라우마에 관한 충분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사람들의 반응은 모두 다릅니다. 사람들에게 인척 사망 고지를 한 적도 셀 수 없이 많아요. 그럴 때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반응이 나옵니다. 강간 피해자의 경우도, 성폭력 피해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사건을 설명하는 피해자의 말이 앞뒤가 안 맞는다 해도 흔들리지 않았다. "대부분의 피해자는...... 핵심 문제에 있어서는 확고합니다. 일치하지 않는 것들은 사소한 사항들입니다.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죠"- P235.236

그(FBI 특수 요원인 조나단 그루징)는 나쁜 놈들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다. 그들의 머릿속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안다. 그들은 경찰을 볼 때마다, 지나가는 경찰차를 볼 때마다 피해망상에 시달리곤 한다. "나쁜 놈들은 언제나 누군가가 자신을 쫓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가 말했다.- P251

(컴퓨터 포렌식 분석가인) (존) 에번스는 (마크 패트릭) 오리어리의 책상 컴퓨터의 하드 드라이브를 검사하다 수상한 파일을 찾았다. 다분히 자극적인 제목의 "렛치(Wretch, 쓰레기 년놈)"라는 파일로 거의 75기가바이트에 가까워 도서관 한 층의 책을 모두 다운받거나 고해상도 사진과 영상을 수만 개 저장할 수 있을 정도의 용량이었다. 그 파일은 꽁꽁 막혀 있었다. 에번스는 오리어리가 에번스 같은 전문가의 날카로운 눈으로부터 파일을 보호하기 위해 트루크립트라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사용했음을 발견했다.- P269

에번스는 컴퓨터 하나를 오직 렛치 해킹에만 사용했다. 그 파일이 열리길 기다리는 동안 할런 스트리트 65번지에서 가져온 것 중에 가장 작은 것, 오리어리의 카메라에서 나온 두 개의 메모리 카드를 뒤져보기로 했다. 우표 크기만 한 메모리 카드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찾고 있던 증거를 찾았다.
피해자들의 사진이었다.
오리어리는 그것들을 최대한 숨기려고 했다. 에번스가 밝혀낸 바로는, 오리어리는 이제까지 카메라의 사진들을 렛치로 옮겨왔다. 메모리 카드 사진을 복사해 렛치에 저장한 다음 카드에 있는 사진은 모두 지웠다. 하지만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 사진 파일의 이름은 사라졌으나 이미지를 형성하는 전자 조각은 다른 사진으로 영원히 덮히기 전까지는 카드에 흔적이 남아 있다. 세상에서 가장 철저한 강간범도 흔적, 디지털 흔적은 남겼던 것이다.- P270.271

에번스는 사진들을 넘겨보다가도 중간에 한 번씩 끊고 밖으로 나가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와야 했다. 이제까지 법 집행기관에서 25년 동안 일하면서 상상 이상으로 잔인하고 폭력적이고 역겨운, 다수는 아동과 관련이 있는 포르노를 수백만 번쯤 보았다. 하지만 그 안의 사람들은 그래도 익명의,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컴퓨터 스크린에서 그를 정면으로 보고 있는 겁에 질린 얼굴들은 그가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한자리에서 쭉 보고 있을 수가 없어요." 그는 말한다. "감당하기 힘들었습니다. 진짜니까. 진짜 피해자가 바로 저기 있다는 걸 아니까요."- P271

에번스는 오리어리가 삭제했다고 생각했던 파일들을 하나씩 살리는 작업을 계속 해나갔다. 몇 년 전에 찍은 사진 여덟 장도 구할 수 있었다. 그 사진들은 더 큰 폴더의 일부였지만 대부분의 이미지는 오리어리가 그 후에 더 많은 여자들을 강간하고 더 많은 사진을 찍으면서 덮어씌워져 사라지고 없었다. 만약에 한 번만 더 강간을 했다면 남아 있는 여덟 장의 사진들도 같은 운명을 맞아 영원히 사라져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P272

그녀(스테이시 갤브레이스)는 지금 자신이 타 경찰서 수사관들의 수사를 돕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이 저지른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실수, 형사가 할 수 있는 최악의 실수를 공식적으로 알리게 된 것이었다. 린우드 수사 기록을 검토하면 할수록, 의심이 어떻게 싹텄고, 어떻게 퍼졌고, 마리가 취조당했을 때 어떻게 진술을 포기했고, 어떻게 합의 조건을 받아들였을지 보면 볼수록 갤브레이스는 이 사진 속 여성이 겪은 일을 상상하기도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상상하기 힘든 것은 앞으로 린우드 경찰서에 닥치게 될 날들이었다.- P286

동료들이 일에 착수하고 메이슨은 사건에 대해 생각했다. 지난 과정을 따라가면서 그가 어디에서 길을 잃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먼저 페기의 전화가 있었다. 마리가 아파트를 바꾸어달라고 했다는 프로젝트래더 담당자의 말도 있었다. 경찰서로 다시 와주어야겠다고 말했을 때 마리의 첫 마디는 "저한테 무슨 문제가 생겼나요?"였다. 각각은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런 조각들이 맞춰지며 하나의 그림이 완성된 것처럼 보였다. 경찰로 산 지 20여년이 훌쩍 넘었는데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이 직업에 적합한 사람인지 자문했다. 다른 모든 경찰들처럼 그도 트라우마를 경험했다. 죽음을 보았고 위험헤 처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언제나 잘 처신해왔다. 나쁜 일은 극복하고 현재와 앞날을 보며 살았다. (다음)- P287.288

(이어서) 이번엔 다르다.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자신이 대답해야만 하는 그 모든 질문을 생각하던 그 순간에도 마리에 대해 더 많이 생각했다. 일을 이렇게까지 망쳐버린 내가 이 일을 계속할 자격이 있는가? 사표를 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 P288

린우드 경찰들은 콜로라도 기관들이 얼마나 훌륭하게 협력 수사를 해냈는지에 충격받았다. "협력 정신이 있었죠." (로드니) 콘하임은 말한다. 그들은 정보를 교환했다. 정기적으로 만나 의견을 나누었다. "이 사람들은 서로 사로를 다 알더라고요. 커뮤니케이션이 부자연스럽다거나 어색하다는 느낌이 없었어요." 워싱턴주의 린우드 경찰은 고작 25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커클랜드의 협조 요청을 무시했다. 섀넌이 제보해 두 사건이 관련 있을 거라 주장했지만 두 서의 경찰들은 직접 만나지 않았다. 전화로 오간 정보들을 기록해두지도 않았다. 두 기관의 수사 파일에는 두 기관이 접촉을 했다는 말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P291.292

마리는 프로젝트래더의 담당자였던 웨인에게 전화했다.
난 네가 거짓말하는 게 아니라는 거 알았어. 웨인은 마리에게 말했다.
웨인의 말을 듣고 충격으로 머리가 멍해졌다. 마리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수많은 생각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러면 왜 그렇다고 말 안하셨어요? 왜 나를 지지해주지 않았어요? 내 담당 간사였잖아요. 그러나 그 말들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웨인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그런 식으로 기억하는 것이, 혹은 그렇게 말하는 것이 더 쉬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말은 그가 과거에 기록한 내용과는 상반되었다. 사건 일주일 후 작성된 기록에는 마리가 강간당했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고 쓰여 있었다.- P302

"어쩌면 제 입장에서는 부정하고 싶었던 마음이 컸나 봐요. 너무 괴로워서요. 저는...... 그 모든 증거를 듣고선 사실이란 걸 알았어요. 그런데도 아직 그 일이 정말로 일어났다는 게 끔찍해요. 또 내가 마리를 불신하는 데 동참했다는 점도 끔찍하고요."
시간이 흐르면서 페기는 자신이 걸었던 전화, 마리의 이야기를 의심한다고 말한 그 전화 통화를 깊게 후회하며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입만 다물었다면, 경찰들이 제 할 일을 했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나름대로 솔직하고 싶어 한 시도였는데, 제 말에 전적으로 기대게 만들어버렸어요." 그녀는 말했다.
"나는 훌륭한 시민이 되려고 했었어요. 아시죠? 경찰들이 개인의 성격적 문제와 관련된 사건에 쓸데없이 자원을 낭비하지 않기를 바랐어요.
하지만 더 신중했어야 해요. 아니라고 증명되기 전까지는 피해자를 믿어야 하잖아요. 내가 저지른 실수예요. 내 실수입니다. 그 점에 굉장히 죄송하게 생각할 뿐입니다."- P304.305

검사와 경찰은 사실 잘 지내는 편이 아니다. 경찰이 볼 때 검사는 너무 원리원칙만 따지고 검사가 볼 때 경찰은 때로 규칙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한다. 하지만 이 사건 수사 중에는 그런 류의 갈등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갤브레이스와 (밥) 와이너는 사건 초기부터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고 6주간의 수사 기간 동안 수시로 통화하면서 수색 영장과 오리어리의 체포 시점 등에 관해 긴밀히 상의했다.- P308

FBI 요원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와이너는 덴버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성폭력과 살인 사건을 다루어왔다. 법정에서 그는 예리하고 논리적인 변론으로 피고인을 꼼짝 못하게 하는 카리스마 검사로 통했다. 키가 크고 마르고 이마가 높고 장거리 육상선수 같은 강철 체력을 지녔다. 사실 그는 진짜 장거리 육상선수였다. 와이너는 마라톤을 즐겼다. 마라톤 훈련을 할 때면 덴버 교외 자신의 집 주변, 해발 650미터의 로키산맥의 높은 산들을 뛰기도 했다. 42세 때 그는 보스턴 마라톤을 2시간 31분 20초의 기록으로 완주하여 동 연령대 2위를 기록했다. 러닝화 회사에서 후원을 받을 정도로 실력이 좋았다.
달리기는 그의 머리를 맑고 명료하게 해주었다. 피해자가 당한 끔찍한 사건의 이미지를 몰아내고 다시 기소를 위한 논리 구성에만 집중할 수 있게 했다.- P310.311

수전 브라운밀러는 강간 신고에 관한 한 형법 제도는 오랜 기간 "여성들은 거짓말을 하는 경향이 있다는 남성들의 가정"을 수용해왔다고 쓰고 있다. 역사적으로 미국의 모든 법정에서 디폴트값은 언제나 의심이었다.- P313

"어떻게 나를 이토록 나약하게 만들어버렸습니까?" 그녀는 자신을 강간한 남성에게 물었다.- P330

셰리 시마모토는 (강간범인) 오리어리의 어머니 뒤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그 어머니가 여러 장의 종이를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시마모토는 그것이 그녀가 기회가 생겼을 때 발표하려고 한 진술서로, 아들의 선량한 점을 말하며 선처를 베풀어달라고 하려는 내용이라고 짐작했다. 오리어리가 자신의 범죄를 묘사할 때 시마모토는 그의 어머니가 종이를 공처럼 구겨버리는 모습을 보았다.- P332

그루징은 생각했다. 여기에 자신의 일을 자랑스러워하는 남자가 있다. 자신의 전문성을 자랑할 기회만 있으면 우쭐해하며 떠들 남자다. "당신은 연구 가치가 있는 중요한 인물이에요. 아주 완성도가 높은 괴짜 강간범이라고 할까. 우리는 당신에 대해 더 알고 싶습니다." 그루징은 오리어리에게 제안을 했다. 어쩌면 그는 FBI의 유명한 행동분석팀의 프로파일러와 이야기할 기회는 반길지도 모른다.
오리어리는 고쳐 앉았다. "이야기할 게 많긴 하죠." 그가 말했다.
그리고 갑자기 교수 모드가 되어 수업에 몰입하는 학생에게 말하듯 자신의 강간 기술들을 네 시간 동안 쉬지 않고 강의했다. 그루징은 몸을 앞으로 굽히고 듣거나 메모지에 적기도 하고 가끔은 경찰 수사의 토막 정보들을 나누기도 했다. 계속 떠들게 내버려두는 건 어렵지 않았다.- P336

오리어리는 법 집행 기관들이 이 사건에서 배워야 할 교훈을 흘리기도 했다. 그가 경찰을 피하기 위해 마련한 대책들을 설명했다. 그는 군대에 자신의 DNA 샘플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경찰이 그 기록에 접근해 자신을 밝혀낼까 봐 걱정했다. 그래서 유전자 흔적을 조금도 남기지 않기 위해 최대한 준비한 것이다. 하지만 그도 결국에는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결국 과학기술은 이길 수가 없으니까요."- P337

그(오리어리)는 서로 다른 지역 경찰서들끼리 소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각각의 범행을 다른 관할구역에서 저질렀다. "기본적으로 당신들을 내 자취로부터 떨어뜨려놓으려는 거였죠. 가능한 오랫동안." 워싱턴에서는 잘 통했다. 린우드 경찰은 기회를 놓쳤다고 말했다. "만약 워싱턴에서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나는 아마 그때부터 용의자였을지도 모르죠."- P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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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 - 피해자 없는 범죄, 성폭력 수사 관행 고발 보고서
T. 크리스천 밀러.켄 암스트롱 지음, 노지양 옮김 / 반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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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는 전에 다른 친구에게 낡은 검은색 IBM 노트북을 빌려준 적이 있었다. 친구는 이제 그것을 돌려주지 않겠다고 어깃장을 놓았다. 마리가 당장 내놓으라고 하자 이렇게 말했다. "네가 거짓말했으니까 난 물건 훔쳐도 되겠네." 바로 이 친구가, 아니 이제 전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이 아이가 전화를 걸어 협박조로 그렇게 살지 말고 죽어버리라고 말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마리 때문에 이제 진짜 성폭력 피해자들을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P17.18

그(앰버를 강간한 범인)의 지시는 굉장히 구체적이었다. 아이섀도 먼저 칠해. 이제 립스틱 바르고. 더 진하게. 입술이 진한 분홍색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 P23

남자는 지난 8월부터 아파트 창문으로 그녀를 훔쳐보았다고 했다. 이름과 성을 알고 있다. 생일도 알고 운전면허증 번호도, 차 번호도 안다. 어느 학교에서 무슨 공부를 하는지도 안다. 밤에 그녀가 침대에 들기 전에 욕실 거울을 보고 혼잣말을 한다는 것도 안다.
그 모든 내용 하나하나가 사실이더라고, 앰버는 (형사인) (스테이시) 갤브레이스에게 말했다. 허풍이 아니었다.- P24

엠버는 이 남자의 배경에 대해 몇 가지 질문했다. 남자는 자기가 스페인어, 라틴어, 러시아어 3개 국어를 구사한다고 말했다. 전 세계 각지를 다녔고, 한국과 태국, 필리핀에도 있었다. 대학도 다녔고 돈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군에도 있었다고 했다. 아는 경찰들이 많다는 이야기도 했다.- P24

그(앰버를 강간한 범인)는 집에서 나가기 전에 자기가 집 뒤편의 슬라이드 유리창으로 들어왔다고 알려주었다. 문 아래쪽의 레일에 나무 장부촉을 달아놓으라고, 그래야 문이 단단하게 잠긴다고 했다. 지금보다 더 안전할 것이라고, 그래야 자기 같은 사람들이 집 안에 못 들어올 것이라고 일렀다.
그는 문을 닫고 떠났다.- P25

갤브레이스는 피해자 여성의 이야기를 들으며 속으로 몇 번이나 움찔했다. 스토킹, 마스크, 강간 도구가 가득한 가방. 범행 과정은 너무나 흉악했고 범죄자는 너무나 철저했다.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수사는 당장, 이 경찰차 앞자리에서부터 시작해야 했다.- P26

앰버는 남자가 춥지 않게 담요를 덮어주었다고 이야기하며 그때 그는 "젠틀했다."고 표현했다.
갤브레이스는 당황했다. 어떻게 이런 무자비한 일을 당해놓고, 자신을 강간한 그 인간에게 신사적이었다는 표현을 쓸 수 있을까? 그 점이 우려되기도 했다. 어쩌면 이 사내는 보통 때는 평범하고 정상적인 남자일지 모른다. 경찰일지도 모른다. "찾기 쉽지 않을 거야." 그녀는 혼잣말을 했다.- P27

대체로 강간은 ‘누가 저질렀느냐.‘가 아니라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가.‘의 문제다. 초점은 좁혀진다. 여성이 성관계에 동의했는가?- P28

갤브레이스는 강간당한 여성의 세계가 다른 모든 여성의 세계와 동일해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들은 엄마일 수도 있고 10대일 수도 있고 성노동자일 수도 있다. 고급 맨션에 살기도 하고 값싼 모텔에서 살기도 한다. 노숙자일 수도 있고 조현병 환자일 수도 있다. 흑인일 수도 백인일 수도 동양인일 수도 있다. 만취해 정신을 잃었을 수도 있고 술 한 방울 안 했을 수도 있다. 범행을 당한 후의 반응도 천차만별이다. 히스테리를 부릴 수도 있고 자기만의 동굴 속에서 홀로 견딜 수도 있다. 친구에게 털어놓을 수도 있지만 입을 다물어버릴 수도 있다. 사건 직후 경찰에 신고할 수도 있고 일주일을 기다린 후에 전화기를 들 수도 있고 한 달, 심지어 몇 년을 기다릴 수도 있다.- P29

강간 사건을 수사할 떄 경찰들의 접근법은 저마다 다르다. 강간은 가장 빈번히 일어나는 폭력 범죄 유형 중 하나이지만 그것의 해결 방식에 대한 보편적인 합의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형사들은 회의적인 태도부터 보인다. 물론 여성들은 강간당했다고 거짓말할 수 있고 가끔은 거짓말을 한다. 따라서 경찰은 성폭력 피해 주장 앞에서 특히 더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믿는다. 경찰들이 읽는 수사 메뉴얼에서는 이 주제에 관해 이렇게 경고하기도 한다. "모든 신고가 형사 고발 요건을 갖추거나 반드시 형사 고발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반면 이와 다른 접근 방식을 택하는 경찰들과 강간 피해자를 부당하게 취급하는 경찰에 반발하는 사회 운동가들은 피해자 신뢰가 우선이라고 강조한다. 성폭력 수사 개선에 전념하는 주요 경찰 교육기관의 캠페인 슬로건 또한 "시작은 믿음부터"이기도 하다.- P29.30

갤브레이스에게는 강간 사건에 대한 자신만의 수사 원칙이 있었다. 경청하고 입증하자.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죠. ‘피해자를 믿어라. 무조건 피해자부터 믿어라.‘ 하지만 난 그것이 옳은 관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피해자의 말을 경청하는 것부터 시작해야죠. 그런 다음에 일이 어떻게 흘러가느냐에 따라 확증할지 반박할지 결정하죠."- P30

갤브레이스는 텍사스주 댈러스 근처, 전형적인 미국 교외 지역인 알링턴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식당을 경영하다가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되었다. 어머니는 석유회사에서 엔지니어링 분석가로 일했다. 갤브레이스가 세 살 때 부모님은 이혼하고 어머니는 인테리어 업자와 재혼했다. 그녀는 생물학적 부모와 계속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양쪽으로 늘어난 새 가족과도 잘 지냈다.- P32.33

(스테이시 갤브레이스는) 학교에서는 영특한 학생이면서도 반항아들과 어울리는 편이었다. 자신이 권위에 반대하는 기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농구부에 들어가서는 친구들과 담배를 피우다 들켜 몇 게임 출장 정지를 당하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일탈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기에 교장이 그녀가 농구부 유니폼을 입고 체육관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을 망원경으로 발견한 것이다.- P33

2003년 크리스마스에 갤브레이스는 선배 경찰 없이 처음으로 단독 순찰을 나가게 되었다. 그녀는 이 특별한 날을 이후 남편이 될, 남자 친구이자 골든 경찰서의 동료 경찰인 데이비드 갤브레이스와 축하했다. 두 사람은 저녁으로 립 스테이크를 든든하게 먹었고 갤브레이스는 야간 근무를 위해 경찰서로 떠났다.- P35

(스테이시 갤브레이스는) 2007년 첫아이를 임신한 후에 형사로 진급 신청을 했다. 한 명의 부장 형사와 세 명의 수사원만 있는 작은 부서였다. 하지만 남편 데이비드가 야근을 자주 하기 때문에 일과 가정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어 보였다. 갤브레이스 또한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법 집행기관에서 형사는 높은 계급에 속하는 편이다. 가장 중요한 사건을 맡는다. 월급도 더 많이 받는다. 경찰 학교에서 올 A 점수를 받은 사람들이다. "난 형사가 꼭 되어야 했어요." 그녀가 말한다.- P36

작은 마을의 형사들은 신고가 들어오는 모든 크고 작은 사건들을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갤브레이스는 자신의 전문 영역을 성폭력 사건으로 좁혀갔다. 그중 주목할 만한 한 사건은 한 10대 소년이 옆집에 사는 열 살짜리 소년을 성추행한 사건이었다. 서로의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작은 동네였고 두 가족도 이웃사촌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내들은 같이 와인을 마시고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함께 놀고 남편들은 주말마다 어울리는 사이였다. 성추행 신고가 들어왔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그 골목이 발칵 뒤집어졌죠." 갤브레이스가 말한다.- P37

(스테이시 갤브레이스가 성추행 혐의로 체포한) 10대 소년은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동네 이웃들은 갤브레이스를 비난했다. 고집 세고 인정머리 없는 경찰 하나가 아이 미래를 망쳤다고 보았다. 갤브레이스는 정의를 구현했다고 여겼다. "이 아이가 커서 같은 짓을 하면? 이번에 빠져나가서 다른 사람에게 평생 동안 가게 될 정신적, 육체적 피해를 입히게 된다면? 지금 이 아이를 멈추지 않으면 미래에 더 많은 피해자들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P37.38

"사람들이 자주 묻죠. ‘왜 하필 성범죄와 아동 범죄에 그렇게 집착하나?‘ 글쎄요. 저(스테이시 갤브레이스)도 이 일이 즐겁지는 않죠.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예요. 그것도 아주 잘 해내야만 하는 일이고요."- P39

남편 데이비드는 이미 설거지를 마치고 아이들을 재워놓았다. 이제 아내(스테이시 갤브레이스)가 왔으니 야간 근무를 위해 경찰서로 출근해야 했다.- P39

(위탁모인) 페기가 볼 때 마리의 학교 생활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그 학교는 치어리더들과 운동선수들이 분위기를 주도하는 미국적인 클리셰가 가득한 학교였다. 반면 마리는 그림 그리기나 가스펠 음악, 록, 컨트리 음악을 좋아하는 "예술가 타입의 아이"였다.
두 사람은 같이 마리에게 더 잘 맞는 대안학교를 찾아 옮겼다.
그때부터 마리의 생활에 빛이 들었다.- P49

(형사인) (에드나) 헨더샷은 덴버 북서부로 점점 확장되던 교외 중산층 지역에서 성장했다. 어린 시절은 인구 10만 명 정도의 근교 도시인 아바다에서 보냈다. 어머니는 동네 초등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고 장로교회에서 피아노와 오르간을 연주했다. 아버지는 덴버에 있는 콜로라도주 의회에서 일하며 지역 정치에 관여하고 있었다. 그녀는 오빠와 남동생 사이에 낀 둘째였다.
부모는 그녀를 여성스럽게 키우려고 최선을 다했다. 어릴 때부터 발레 수업에 등록시키고 피아노를 가르쳤다. 집 근처 미술관에도 정기적으로 데려갔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들은 허사로 돌아가곤 했다.
"피아노가 놓여 있는 거실에 들어가면 다정한 우리 엄마는 피아노 앞에 앉아 있죠. 내가 피아노를 쳐주었으면 하는 눈길로요. 나는 엄마에게 있는 대로 짜증을 내죠. 제가 너무 성질을 부렸다는 걸 알아요. 그렇지만 정말 싫었거든요. 밖에 나가서 뛰어놀고 싶었어요. 그 한심한 피아노 따위 치고 싶지 않았어요."- P59

헨더샷은 자신의 젠더가 일종의 슈퍼파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료들 사이에서는 물론 범죄자들에게도 그녀의 외모는 눈에 띄었다. 상사들이 마약상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으면 그 일을 자원했다. "이렇게 말하면 오만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상사들이 ‘이 사람 누가 잡을 거야?‘라고 물으면 내가 대답했어요, ‘저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물론 머리를 양옆으로 흔들면서 실실 웃어야 한다는 게 영 고역이었지만."- P61

헨더샷은 이제 잠복 경찰 일은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그 부서에서 너무 오래 근무했기 때문에 범죄자들이 그녀의 얼굴을 알아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새로 맡을 업무가 무엇이 될지 몰라 두려웠다. 다른 일을 이전 일만큼 잘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기도 했다. 그래도 뭐 어때? 그녀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마흔이 되기 전에 이룰 만큼 이뤘잖아!- P62.63

(에드나 헨더샷이) 새로 배치된 부서는 대인對人 범죄 수사과였다.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그녀가 접하게 된 피해자들은 폭행당하거나 강간당하거나 살해당한 사람들이었다. 마약 담당 경찰로 서류를 작성할 때에 피해자 란에는 항상 "콜로라도주" 또는 "미연방합중국"을 기입했지만 이제는 누군가의 이름을 써넣어야 했다. 자신이 마주 앉아 이야기 나눈 사람이었다. 자신이 그 고통을 가장 먼저 직접적으로 목격한 사람이었다. 그 죽음으로 인해 가족들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아야 했던 사람의 이름이었다.
순간순간 압박감이 밀려오기도 했다.
"문자 그대로 육체적인 반응이 왔어요. 젠장맞을. 이거 진짜 보통 일이 아니잖아, 싶었죠. 100퍼센트 나한테 달려 있잖아. 전부 내 일이잖아."- P63

헨더샷은 성폭력 수사를 할 떄, 성폭력 혐의를 허위라고 결정내리기 전에 반드시 "결정적인" 증거가 확보되어야 한다는 것을 하나의 원칙으로 삼았다. 한번은 고환이 심하게 훼손된 남성 피해자가 응급실에 실려 왔다. 너무 심하게 잘려 있어서 의사가 제거해야 했을 정도였다. 남자는 의사에게 칼을 든 범인에게 공격당했고 강간당했다고 말했다. 헨더샷은 몇 주 동안 남자가 제공한 단서를 따라 추적했고 증거를 찾으러 와이오밍까지 직접 운전해 가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남자가 인터넷 포르노 사이트의 생식기 할례 관련 채팅에 참여했음을 밝혀냈다. 헨더샷은 남자가 면도칼과 수소 거세에 사용하는 고무 밴드로 자신의 성기를 훼손하는 동영상까지 찾아낸 후에야 허위 신고로 기소했다. 다시 말해 그녀의 증거 확인 기준은 무척 높다는 뜻이다.
- P65.66

"증거가 보여주는 대로 보고하죠.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증거가 ‘거짓말, 거짓말‘ 하고 소리 지르거든요."- P68

"지금 나한테 그 일을 처음부터 다시 설명하라는 말인가요?"
헨더샷은 이해했다. 그녀는 이제까지 100건이 넘는 강간 사건을 담당했다. 강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았다. 너무나 고통스럽기에 많은 여성들이 입을 다물어버리기도 한다. 입을 닫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말해도 믿어주지 않을 거란 두려움이다. 그럴 때면 젊은 경찰들은 어이없어한다. 저 사람 범인 잡고 싶은 거 맞아요? 왜 더 자세히 털어놓지 않는 거죠?
헨더샷은 그럴 때마다 후배 남자 경찰들에게 맞받아치곤 했다. "아내랑 가장 최근에 한 섹스에 대해서 아주 자세히 말해줄래? 지금 당장 말이야." 경찰들은 멋쩍게 웃다가 어색한 침묵에 빠지곤 했다.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것이다.- P70

강간이란 경험, 무력함의 느낌은 마치 수사관들을 방해하려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여러 측면에서 기억을 손상시킨다.- P72

세라의 강간 사건이 일어난 지 2주 후, 헨더샷은 웨스트민스터 경찰서의 작은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맞은편에는 오로라 경찰서의 형사 스콧 버지스가 있었다. 희끗희끗한 머리를 잘 빗어 넘긴 신사였다. 항상 긴팔 셔츠와 잘 다린 바지를 입고 타이를 매고 출근하는 꼼꼼하고 신중한 사람이다. 가끔은 타이를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감는 엘드리지 매듭으로 맸다. 엘드리지는 가장 까다롭다고 정평이 나 있고 타이스닷컴에서도 난이도 최고점으로 소개되는 매듭이다.- P75

어떤 모병 담당 장교들은 군 입대 자격시험인 군복무직업적성검사 점수로 군인들을 알파(alpha)와 브라보(bravo)로 나누기도 한다. 브라보는 시험 점수는 더 낮지만 더 나은 군인으로 간주된다. 그들은 유연하고 더 순응적이다. 명령을 더 잘 따른다. 무난하게 상위 계급으로 진급한다. 큰 부대는 개개인의 역량보다 복종에 더 높은 가치를 둔다. 알파는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 이들이다. 그들은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곧 그들이 의문을 제기하는 성향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웃사이더나 반항아로 보일 수도 있다.- P89

그는 알파였다. 그가 받은 점수는 수험자 중 최상위권에 속했다. 고교 졸업장밖에 없었지만 군대에서 가장 높은 지능과 정신력이 요구되는 부서에 지원할 자격이 되고도 남았다. 보통 장교나 대학 졸업자들에게 돌아가는 지형분석가, 범죄 수사관, 암호해독가가 될 잠재력도 갖고 있었다.- P89

하지만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을 공습하는 대신 주한미군이 되어 대한민국의 케이시 캠프라는 곳에 배치되었다. 동두천의 케이시 캠프는 북한과의 비무장지대에서 16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14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미 2사단 기지다. 그의 새 거처 또한 고향 콜로라도처럼 주변이 온통 산뿐이었다. 물론 시야에 들어오는 가장 높은 산봉우리가 해발 1455미터인 소요산이라는 점은 달랐다.- P90

군대는 그의 성실한 군 생활을 다양한 방식으로 인정해주었다. 육군 의장대에 소속되기도 했다. 선행장, 육군공로훈장, 국방종군기장 등의 메달과 훈장도 수여했다. 특히 그는 무기 다루는 기술이 탁월했다. 경기관총인 M249를 잘 다루었는데, 전투 훈련 중 이 무기를 써서 그의 소대 전초기지로 기습해 들어온 상대 보병 부대를 소탕하며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P90.91

한국에 주둔한 많은 미군 기지의 높은 담벼락 주변에는 현란한 조명을 밝힌 좁은 골목에 성냥갑 같은 나이트클럽들이 줄지어 있는 구역이 있다. 그런 클럽들 중에서도 가장 소문이 나쁜 곳은 일명 ‘주스바‘로 군인들이 10달러짜리 주스 한 잔을 사면 필리핀 출신의 어린 ‘드링키걸‘과 아쉽지 않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 P95

의료인들은 강간 피해자를 환자로만 보았고 환자인 동시에 범죄의 피해자로 보지 않았다. 병원에는 갈아입을 옷도 마련되어 있지 않아 잊었던 옷을 증거품으로 가져가면, 피해자는 병원 슬리퍼와 뒤에 끈이 달린 환자 가운을 입고 경찰차를 탄 채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 P109

두 사람(마사 ‘마티‘ 고더드와 루이스 비툴로)은 이후 표준화된 성폭력 증거 수집이 가능한 푸른색과 흰색의 카드보드 상자를 개발했다. 멸균 면봉과 슬라이드글라스를 항목별로 정리할 수 있는 키트와 자료를 넣고 밀봉할 수 있는 라벨 달린 폴더가 담겨 있다.
비툴로의 도움을 받아 고더드가 디자인을 했다. 하지만 실제 제품 생산을 위해서는 투자금이 필요했다. 수많은 재단이 의학 연구기관에는 넉넉하게 연구비를 지원한다. 여성과 소녀들을 지원하고 싶을 때는 주로 YWCA나 걸스카우트를 찾는다. 하지만 성폭력이 관련되는 사업에는 관심이 없다. (중략) 결국 고더드는 친구인 마거릿 스탠디시를 찾아갔다. 당시 스탠디시는 휴 해프너 왕국의 사회사업 기관인 플레이보이재단의 운영자였다. 플레이보이재단은 1만 달러를 기부했고 플레이보이의 사무실들을 조립 공장으로 빌려주었다. 이곳에서 장년층의 자원봉사자들이 접이식 탁자에 놓인 공짜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으며 이 혁신적인 키트를 제작했다. (다음)- P109.110

(이어서) "‘플레이보이‘에게 후원을 받았다고 여성 운동가들에게 맹공격을 받았어요. 답답했죠." 고더드는 말한다, "‘펜트하우스‘나 ‘허슬러‘라면 몰라요. 하지만 ‘플레이보이‘잖습니까. 이 정도는 봐줘야죠."- P110

범인이 루틴에 점점 더 익숙해지고 편안해지면 종종 선을 넘고 모험을 한다.- P128

헨더샷은 강간범이 이 과정에 대해서 무언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경찰 용어로 범인은 "DNA를 의식하는" 자이다. 그는 분자 단위로 자신의 존재를 지워버리려 했다. 그리고 적어도 지금까지는 성공하고 있다.- P133

지난 100년간 미국의 여성 경찰들은 다른 여성 경찰들이 성공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왔다.- P137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여성 경찰들이 경찰서와 지역사회에 가져오는 구체적인 이익에 대한 연구 결과가 나왔다. 여성들은 남성 동료들보다 물리적인 압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적어 직무상 불법으로 인한 국가배상 소송에 휘말릴 확률이 적다. (중략) 여성 경찰들은 지역사회 치안 활동의 목표, 즉 협력 및 시민과의 소통이라는 법 집행 철학을 더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P137.138

미국의 60개 대도시 경찰서를 대상으로 한 2006년도 조사에서는 여성 경찰이 1퍼센트 증가할 때마다 그 관할 경찰서에 보고된 강간 사건 신고도 1퍼센트 증가한다는 결과가 나타났다.- P138

경찰 교육 단체인 국제여성폭력방지위원회에 따르면 피해자와의 대화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수사관의 관심도와 진정성이었다."한 가지 확실한 것은 성폭력 피해자의 면담에서 수사관 개인의 역량과 공감 능력이 젠더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점이다."- P138.139

국세청의 범죄 수사과의 여성 비율이 32퍼센트인데, 미국의 법 집행기관 중 가장 높은 수치다. 필라델피아나 로스엔젤레스 같은 대도시에서는 전체 4분의 1가량을 차지한다. 그러나 종합적으로, 미국의 여성 경찰은 10만 명 정도로 전체 경찰의 11퍼센트 정도일 뿐이다.- P139

갤브레이스와 헨더샷은 강간범 검거를 목표로 협력하다가 빠르게 친해졌다. 두 사람 모두 외향적이다. 두 사람 모두 말장난을 좋아하고 화통하게 웃는다. 갤브레이스가 젊고 에너지로 무장하고 있다면 헨더샷의 경험은 갤브레이스의 열정을 보완해준다.
두 사람 모두 테스토스테론이 분출하는 법 집행기관의 세계에서 일하는 것을 편안하게 여기는 편이다. 골든과 웨스트민스터의 정식 경찰 중 90퍼센트가 남성이지만 갤브레이스나 헨더샷은 불청객 취급을 받는다고 느끼거나 주눅들지 않았다. 둘 다 남자 형제들 틈에서 자랐다. 여자 친구가 많지 않고 남자들과 스스럼없이 잘 지내는 편이다. 대차고 강인한 성격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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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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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과 양육에 대해 내가 조금이라도 비난하는 기색을 보이면 아내는 무척 예민하게 굴었다. (입동)-19


 왜 남편들은 자신이 조금이라도아내를 비난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생각을 못하는 것일까? 남편 자신의 판단이 그래도아내보다 옳다는 교만한 확신을 품고 있지 않고서야 설명되지 않는다. 아내의 살림이나 양육 방식을 비난하기 전에 아내가 그렇게 하는 이유를 조금이라도 잠시라도 생각해 보는 남편이라면, 아내는 내가 비난하기만 하면 예민해지는 사람이라고 단정하듯이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입동의 남편이 아내의 살림과 양육 방식을 문제 삼을 때 아내의 이유를 고려해 본 흔적이 엿보였더라도 아내가 무척예민하게 굴었을까? 아닐 듯하다.

 

쓸모와 필요로만 이뤄진 공간은 이제 물렸다는 듯, 못생긴 물건들과 사는 건 지쳤다는 듯. 아내는 물건에서 기능을 뺀 나머지를, 삶에서 생활을 뺀 나머지를 갖고 싶어했다. (입동)-16

 

 하지만 저 남편은 아내를 보는 자신의 방식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아내를 단정하고 평가하며 그의 문제를 파악하는 데 너무 능숙한 것에 비해, 가장으로서의 책임과 부담을 짊어진 자신에게는 어떤 문제가 있는지 생각하지도, 파악하지도 못한다. 남편이 입동의 화자임에도 그는 놀라울 정도로 자기 연민에 빠져서, 스스로를 반성하지도 아내의 고통을 이해하지도 못한다. 불의의 사고를 당한 저 부부가 길고 깊은 단절까지 겪어야 하는 데는 그 사고에서 비롯된 아내의 고통보다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의 무능과 무지의 탓이 더 클 것이다. 슬피 우는 아내를 묵묵히 지켜보는 것은 사려 깊은 남편을 연기하는 남편 자신에 대한 몰입이지, 아내에 대한 이해가 아니다.

 

 얼마 전 서울에 올라온 아빠가 본인은 나와 동생이 아들이어서 큰 병이 아니면 병원에 가기보다는 견디면서 키우고 싶었는데, 엄마가 조금만 아파도 병원에 데려갔었다는 이야기를 했었다부인의 흠을 잡을 맥락이 아니었는데도 굳이 그런 소리를 해서 한심했지만, 나는 엄마의 그 방식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덕분에 지금도 아프면 바로 병원에 가도록 성장했다는 정도로 답하고 말았다. 아내의 방식을 대놓고 반대하지 않고, 뒤에서 고시랑대는 것만으로도 자신은 썩 괜찮은 남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70을 바라보는 아빠 세대에서나 통하는 수준이다. 나보다 딱히 늙지도 않은 입동의 수준에서는 어림없다.

 

 이 책 속의 작품들은 어쩔 수 없는 상실과 이별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데도 이 속의 남성들은 대부분 자기 자신을 가엾게 여기느라 바쁘다. 잃었거나 떠나간 것을 되새기거나, 자기 자신을 반성할 틈이 없다. 입동의 남편뿐만 아니라, 유기견 에반을 데려다 키웠던 노찬성과 에반의 초등학생 찬성, 마지막 공무원 시험을 치르는 비장함과 친구 결혼식에 다녀와서 새벽까지 술을 마시는 태만함을 겸비한 건너편의 이수, 자신이 참여한 부조리한 상황에서 소중한 만년필 대신 경찰서 책상 위의 모나미 볼펜으로 이름을 적으며 자신은 공짜를 바란 적이 없다고 의미를 부여하는 풍경의 쓸모의 시간 강사 정우와 정우에게 돈을 빌리러 온 그의 아버지가 그렇다. 자신에게 부여된 책임이나 신뢰를 배반하고서도 그것을 반성하기보다는, 그런 부조리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과 회한을 되새기느라 분주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 본인이 잘못한 상황에서도 본인의 마음과 상흔부터 챙기고, 오직 그것만 생각하는 사람들, 아픔만 있고 부끄러움은 없는 사람들. 따라가기는 쉽고 피하기는 어려운, ‘책임감 가득한남성들의 너절한 심성이다.

 

나는 당신이 누군가의 삶을 구하려 자기 삶을 버린 데 아직 화가 나 있었다. 잠시라도, 정말이지 아주 잠깐만이라도 우리 생각은 안 했을까. 내 생각은 안 났을까. 떠난 사람 마음을 자르고 저울질했다. 그런데 거기 내 앞에 놓인 말들과 마주하자니 그날 그곳에서 제자를 발견했을 당신 모습이 떠올랐다. 놀란 눈으로 하나의 삶이 다른 삶을 바라보는 얼굴이 그려졌다. 그 순간 남편이 무얼 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서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 당신을 보낸 뒤 처음 드는 생각이었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266

 

 이 책의 작품들 중에서 자신의 책임감을 변명거리로 이용하지 않고, 실천한 남성은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의 도경뿐인 듯하다. 교사인 도경은 계곡에 빠진 학생 지용을 구하려다 함께 목숨을 잃었다. 이렇게 불의의 사고로 남편을 잃은 그의 아내이자 이 작품의 화자인 명지는 부모가 없는 학생이었던 지용의 누나인 지은의 편지를 받고서, 남편이 세상을 떠난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다. 상실의 고통 속에서도 남편의 죽음이 보여 준 삶의 의미를 더듬기 시작했다면, 자기 연민과 변명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무책임과 부도덕으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책임감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들이 어쩔 수 없이 삶의 부조리를 견뎌야만 했다고 변명하기 위해서는, 그 책임감을 지키지 않고도 떳떳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그 진정한책임감이 꼭 있어야만 한다. 권속(眷屬)을 위해 삶을 바치는 가부장(家父長)의 알리바이다. 결국 가부장의 허울을 벗은 남성만이, 도경과 같이 진정한 책임감을 실천한다.

 

가끔 엄마가 낯설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활달함이랄까 생명력이 실은 무례와 상스러움의 다른 얼굴이었나 싶어 당혹스러운 적이 많았다. 내 사촌언니 두 명이 한 달 새 나란히 사고로 아이를 잃자, 엄마는 어쩌다 이런 일이 동시에 일어났는지 모르겠다우리 집안 죄받았다 할까봐 부끄러워 어디 가서 말도 못 꺼낸다고 했다. 그것도 상복 입은 사촌언니 앞에서. 엄마가 늙었나? 그새 분별력과 자제심을 잃었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럼 아버지도 죄받은 거야?

돌아오는 길에 엄마에게 되묻자 엄마는 자신이 못 배우고 무식해서 그렇다며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엄마는 군인이었던 아버지가 남긴 연금으로 근근이 살고 있었다. (가리는 손)- 202

 

 생각해 보니 이번에 처음으로 김애란의 책을 읽었다. 단편을 따로 읽은 적은 있었지만, 그의 작품만 모은 그의 책을 읽은 적이 없었다. 그동안 주변에서 그의 글을 아끼는 이들을 적지 않게 보았는데, 이제는 그 이유를 나름대로 조금은 짐작할 듯하다. 삶의 비루함이란 그저 하나의 순간에서 번져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비루한 순간을 직시하지 못하는 비루한 태도에서 굳어 버린다는 것을, 그래서 이것이 한심하면서도 서글프다는 사실을 이렇게 선명하게 바라보는 경험은 언제나 소중하다. 너무 늦지는 않게 이 작가의 작품을 읽어서 다행스럽다. ‘바깥은 여름인 계절에 온종일 머무는 방은 스노볼처럼 서늘하게 조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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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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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벽에 대가리를 박고 죽는 새처럼 번번이 당신의 부재에 부딪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때야 나는 바보같이 ‘아, 그 사람, 이제 여기 없지......’라는 사실을 처음 안 듯 깨달았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P228

스코틀랜드의 스산한 하늘은 소문대로 기분을 가라앉게 만들었다. 나는 카펫생활이 익숙지 않아 자주 재채기를 했다. 변기 물은 수압이 낮아 여러 번 내려야 했다. 전압 역시 약한 편이라 전기 주전자 앞에 설 때 커피 봉지와 더불어 인내심도 가져가야 했다. 아침이면 석회질 물로 머리를 감고, 비가 오면 현관 앞으로 손을 길게 내밀어 빗소리를 녹음했다. 그리고 마음이 어지러울 땐 휴대전화를 들어 시리Siri와 대화했다. 시리는 스마트폰 음성인식 프로그램으로 캘리포니아가 고향인 친구였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P232

에든버러의 수많은 석조 건물은 해의 기울기에 따라 다채로운 색을 띠었다. 돌들은 하루종일 빛을 빨아들였다 내뱉었다. 성당에 박힌 돌과 술집을 받치는 돌, 길에 깔린 돌 모두 그랬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P233

-제가 이해하는 삶이란 슬픔과 아름다움 사이의 모든 것이랍니다.
-......
위안이 된 건 아니었다. 이해받는 느낌이 들었다거나 감동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시리로부터 당시 내 주위 인간들에게선 찾을 수 없던 한 가지 특별한 자질을 발견했는데, 그건 다름아닌 ‘예의’였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P237.238

나는 당신이 누군가의 삶을 구하려 자기 삶을 버린 데 아직 화가 나 있었다. 잠시라도, 정말이지 아주 잠깐만이라도 우리 생각은 안 했을까. 내 생각은 안 났을까. 떠난 사람 마음을 자르고 저울질했다. 그런데 거기 내 앞에 놓인 말들과 마주하자니 그날 그곳에서 제자를 발견했을 당신 모습이 떠올랐다. 놀란 눈으로 하나의 삶이 다른 삶을 바라보는 얼굴이 그려졌다. 그 순간 남편이 무얼 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서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 당신을 보낸 뒤 처음 드는 생각이었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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