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센트
이언 매큐언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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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전 시대를 아주 조금이라도, 정말 어이없을 정도라도 경험했다는 사실이 이 책의 긴장감과 슬픔을 이해하는 데 꽤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소련이 한때는 얼마나 크고 강한 동시에 난해한 국가였는지 그 흔적이라도 접할 수 있었기에, 2차 세계 대전 직후의 독일 서베를린에서 소련의 기밀 정보를 빼내기 위한 기밀 작전이 얼마나 중요하고 급박했을지 상상하기가 한결 쉬웠다. 혹은 어쩌면 북한이 휴전선 북쪽에서부터 땅굴을 파서 침공하려 했던 남한에 살고 있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때는 그 땅굴에 무려 안보 교육을 간 적도 있었다. 요즘에도 그런 짓 하려나.

 

밤은 이런저런 변주와 함께 반복되었고, 아침은 변주 없이 반복되었다. -143

 

 이 작품의 배경은 1955년 여름부터 1956년 봄까지의 독일 베를린이고, 사건들은 그중에서도 미국, 영국, 프랑스가 점령 중이었던 서베를린에서 주로 이루어진다. 이때 동베를린에 주둔 중인 소련군과 소련 본국 간의 통신선을 도청하기 위해 미국 CIA와 영국 MI6가 공조한 기밀 작전이 추진된다. 영국 체신국 소속의 통신 엔지니어인 레너드 마넘은 바로 이 작전을 위한 비밀 시설을 구축하기 위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영국 바깥으로 나와 전쟁이 끝난 지 10년이 지나도록 도처에 상흔이 남아 있는 옛 제3제국의 수도이자 동서로 분단된 도시 베를린에 온다. 레너드는 히틀러의 수도였던 베를린에서 낮에는 영국, 미국과 함께 히틀러에 맞서 싸웠던 옛 연합국 소련을 도청하기 위한 비밀 작전에 열중하고, 밤에는 이곳에서 만난 마리아 에크도르프와 난생 처음으로 연애와 성애에 몰입한다. 모든 사건은 이런 배경 뒤로 펼쳐진다.

 

만남의 자리를 주도한 쪽은 로프팅 중위였다. “이것 봐요. 마넘 선생. 방금 도착했으니 상황을 알 리가 없지요. 이곳의 문제는 독일인도 러시아인도 아닙니다. 프랑스인도 아니에요. 미국인들이지. 그치들은 뭐 하나 아는 게 없어요. 설상가상 배우려고 하지도 않는다니까. 남의 말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요.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위인들이에요.” -9

(레너드)에게 영국적이라는 것은 이전 세대가 느끼는 편안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공격당하기 쉬운 약점이라는 느낌이었다. 반면 미국인들은 자기네 방식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그는 스포츠 재킷과 어차피 손뜨개 하이넥 스웨터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을 선명한 빨간색 니트 넥타이를 골랐다. -21

 

 독일에서 영국인 젊은이 레너드가 미국인 밥 글래스의 지시를 받아가며 소련을 도청하기 위한 작업에 종사하고, 패전한 독일군 출신의 오토 에크도르프와 이혼한 독일인 마리아와 사랑에 빠짐으로써 드러나는 국가와 국민의 단면은 여러모로 복잡하며 흥미롭다. 이런 관계 속에서 드러날 수 있는 양상들을 예리하게 포착해 섬세하게 교차시키는 이언 매큐언의 수완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종전 직후의 영국인들을 사로잡았을 승전국로서의 우월감과 세계의 중심에서 밀려나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는 상실감, 열등감 간의 분열상을 레너드 마넘이라는 한 인물의 짧은 청춘기에 담아냈다는 점에서 영국 작가로서의 매큐언의 가치가 드러났다고 말할 수도 있다.


(글래스의) 감색 정장은 구겨지고 군데군데 천이 닳아서 반들거렸다. 레너드는 유심히 보았다. 저렇게나 제각각으로 어울리지 않게 옷을 입는 법도 있다. 그러고도 아무렇지 않은 것이다. -23쪽

베를린에서의 첫날이 다시 떠올랐다. 독일인. . 불구대천의 적. 패퇴한 적. 이 마지막 생각은 소름 끼치는 전율도 함께 안겨주었다. 그는 순간 특정 회로의 전체 임피던스(*교류회로에서 전압과 전류의 비율)을 구하는 계산으로 생각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마리아)는 패했다. 당연히 그의 소유였다. 정복자의 전리품, 상상을 뛰어넘는 폭력과 영웅적인 행위와 희생을 통해 얻어낸 그의 것이었다. 얼마나 굉장한 희열인가! 옳다는 것, 승리한다는 것, 보상받는다는 것은. -148~149

 

 레너드는 미국인 상급자인 글래스가 독선적이며 조화롭지 못하고 조악한 인사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자신에게 베푸는 거친 호의, 호감에 공명하며 그와 밀접해진다. 작품 곳곳에서 당시 영국과 영국인들이 미국에게 느낀 미묘한 감정이 표현되지만, 이 두 인물의 관계야말로 전쟁 당시에 윈스턴 처칠과 프랭크린 루즈벨트가 보여 주었던 복잡한 친밀감의 보다 사사로우며 영국 입장에서는 보다 비굴한 변주다. 이 영국인과 미국인의 관계 속에서 영국인이 당당할 수 있었더라면 레너드가 자신의 상급자인 글래스와 자신의 연인인 마리아의 관계를 그토록 구차하게 의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레너드는 미국에 기댈 수밖에 없는 영국의 처지를 상기시키는 소련 도청 작전에서 비롯된 자존감의 균열을, 패전국 독일 출신의 마리아가 미국인 글래스가 아니라 영국인인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으로 봉합하려 부심(腐心)했다. 레너드가 마리아에게 육체적, 물리적 폭력을 행사해서 성욕을 채우려 하면서 마리아도 이것을 원하리라는 망상에 빠졌던 착란적, 변태적 상황도 이런 미국, 글래스에 대한 열패감이 기저에 있었다. 마리아가 상징하는 독일을 미국의 도움 없이 자신의 힘만으로 굴복시켰다는 충만감을 레너드가 갈구했다고 이해한다면, 서로의 애정이 절정에 이르던 시기에 레너드가 주제넘고 부조리한 지배욕에 빠져들었던 연유가 훨씬 명확해진다.


레너드는 부모님이나 친구들이 추지도 않고 출 수도 없는 춤을 추고 그들이 싫어할 음악을 좋아하고 그들은 절대 오지 않을 도시를 고향처럼 느낀다는 사실에 흥분 이상의 만족감을 느꼈다. 그는 자유였다. -228

이 모든 게 갑자기 사라진다 해도, 과거의 두 사람으로 돌아가려면 힘겨운 시간을 거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부터 두 사람이 하려는 일은 그 길을 영영 막아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두 말할 나위도 없이, 그러므로 지금 하는 이 일은 잘못이었다. -299

 

 레너드의 변태적인 행위가 초래했던 연애의 위기를 마리아의 애정과 관대함으로 극복한 후에, 때때로 마리아를 찾아와 폭력을 휘둘렀던 그의 전 남편 오토와 레너드 사이에 예기치 못한 파괴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이 사건은 레너드가 통제하지 못했던 그의 폭력적인 과시욕, 지배욕의 원인이 마리아나 패전한 독일, 독일인과 무관한 그 자신의 문제임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남은 삶 동안 자신은 승전했으나 자립할 수 없는 영국인으로 살게 되리라는 사실을 목도한 청년 레너드의 열패감은 그 자신의 힘을 가장 저열한 방식으로 확인하도록 강요했다. 그가 동시대의 다른 영국 청년들처럼 영국 안에 머물렀더라면, 비굴한 현실을 직시당하지 않았을 것이고 새삼 자신이 승리했고 승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폭주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거대한 역사적 상황의 한복판에서 영국인으로서의 그의 자의식도 한낱 평범한 가정 출신의 청년 엔지니어인 그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팽창하다가 끝내 폭발해 버린 셈이다. 그리고 레너드가 일으킨 충격은 다시 그가 속했던 체제 전체를 무너뜨리고 그의 삶도 돌이킬 수 없는 지점까지 몰고 가 버렸다.

 

그러나 이제는 승리의 그늘이 우리를 덮고 있으므로...... 이 전쟁이 끝나면 우리는 쇠약해질 테고, 돈도 힘도 없이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서 가만있어야만 할 거라고 수상은 덧붙였다.

 

얄타 회담이 끝나고 열흘 후 수상 별장에서 벌어진 처칠과의 만찬에서,

존 콜빌, ‘권력의 언저리: 다우닝 스트리트 일기, 1939~1955’-5

 

 인물들의 관계와 사건 속에서 과거의 시대상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훌륭한 역사 소설이라고 할 만하다. 거대한 역사적 상황이 그에 속한 한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것이 그의 사적인 삶을 변화시켜서, 그런 인간이 다시 역사적 변화를 일으키게 되는 흐름을 정교하게 구축해 냈다. 이런 흐름 사이사이에는 저마다의 사정, 감정, 오해가 있었고 그것이 원하거나 예측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흐름을 몰고 갔음을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되기도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이런 이면(裏面)을 알 도리가 없다. 과거에는 주어진 조건과 상황 안에서 타당해 보이는 판단을 내렸다는 사실을 절감시킬 뿐이다. 시간이 지난 후에 드러날 핵심적인 단서들은 실은 중요하지 않다. 이런 핵심을 정작 그것이 가장 중요했던 시기에는 모르거나 외면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역사의 핵심이다. 이 소설은 이런 역사적이며 인간적인 사실을 과거의 맥락 속에서 다시금 묘파(描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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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매큐언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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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의 첫날이 다시 떠올랐다. 독일인. 적. 불구대천의 적. 패퇴한 적. 이 마지막 생각은 소름 끼치는 전율도 함께 안겨주었다. 그는 순간 특정 회로의 전체 임피던스(*교류회로에서 전압과 전류의 비율)을 구하는 계산으로 생각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마리아)는 패했다. 당연히 그의 소유였다. 정복자의 전리품, 상상을 뛰어넘는 폭력과 영웅적인 행위와 희생을 통해 얻어낸 그의 것이었다. 얼마나 굉장한 희열인가! 옳다는 것, 승리한다는 것, 보상받는다는 것은.- P148.149

이제 그만의 비밀스러운 연극으로는 부족했다. 그는 두 사람 사이에 뭔가 다른 것을 원했다. 판타지가 아닌 리얼리티를. 어쨌든 그녀에게 말하는 건 불가피한 다음 수순이었다. 자신의 힘을 인정받고 그 힘 때문에 마리아가 아주 조금만 괴로워하길, 그래서 최고의 쾌감을 느끼길 바랐다.- P152

시키는 대로 하기 시작하면 그녀도 이 무언극이 모두 쾌락을 위한 것임을, 그만이 아니라 그녀의 쾌락을 위해서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해하겠지. 그러면 두려움도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내 말대로 하게 될 거야." 그는 그래주겠느냐 묻고 싶은 걸 간신히 억눌렀다.- P155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턱이 툭 떨어지고 입술은 벌어져 있었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에 떠오른 것은 경이, 아니 심지어 감탄 섞인 존경이었을지도 모른다. 곧 모든 게 달라져 즐거운 순응과 변신이 이어지겠지. (중략) 이제 같이 깔깔 웃고 있어야 하는데, 그는 생각했다. 이건 게임이었다. 짜릿한 게임. 이런 식으로 지나치게 극적인 반응을 보이는 그녀가 잘못이었다.- P156

"이제 네 차례야, 이 개새끼야, 떨려나기 싫으면 웃어."- P175

그후 몇 달 동안 가끔씩 블레이크 부인을 집 근처에서 보았다. 등이 꼿꼿한 미모의 그녀는 레너드를 보면 미소지으며 인사했지만 그는 그녀를 피했다. 그녀 앞에서는 스스로가 초라한 느낌이 들어 거북했다. 로비에서 어쩌다 그녀가 얘기하는 걸 들었을 때도 주눅들게 하는 목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P180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남자가 강간을 사과하면서 어둠 속에서 슬금슬금 다가온단 말인가?- P196

두번째 사건은 옥토버페스트 기간중에 일어났다. 그들은 일요일에 티어가르텐을 찾았고 다음날과 그 다음날 저녁에도 갔다. 텍사스 로데오도 보고 소규모 공연도 샅샅이 구경하고 맥주를 마시고 통돼지를 꼬치에 끼워 굽는 것도 구경했다. 파란색 네커치프를 한 어린이 합창단이 민요를 부르고 있었다. 마리아는 움찔하면서 그애들을 보니 히틀러유겐트가 떠오른다고 했다. 그러나 레너드에게는 노래가 아련하면서도 퍽 아름답게 들렸고 아이들은 어려운 화음을 자신만만하게 소화했다.- P211

크리스마스를 맞아 귀국하면서 레너드는 마리아에게 함께 가자고 설득했지만 실패했다. 그녀는 자기가 연상의 이혼녀에 독일인이고 더욱이 약혼한 사이도 아니니 레너드 어머니의 환영을 받을 리 만무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가 너무 융통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부모님이 여러 규칙들을 고지식하게 지키며 절제된 생활을 한다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집에 온 지 하루 만에 그녀가 옳았다는 걸 깨달았다. 쉽지가 않았다.- P214

레너드는 마리아가 그리웠고 마리아만큼이나 터널도 그리웠다. 팔 개월 가까이 매일같이 터널 끝에서 끝까지 발소리를 죽이고 다니면서 습기가 차지는 않는지 전선을 점검했던 그였다. 그러는 사이 터널의 흙과 물, 금속은 물로 지상의 그 어떤 정적과도 다른 깊고 숨막히는 정적을 사랑하게 되었다. 멀리 떠나와 있는 지금, 동독군의 발밑에서 비밀을 훔친다는 게 얼마나 대담무쌍하고 터무니없이 신나는 일인지도 깨닫게 되었다. 구조물의 완벽함, 제대로 된 첨단장비, 비밀 엄수 습관과 그에 따른 온갖 소소한 의례가 그리웠다. 구내식당의 조용한 동지애, 목적의 단일성, 모든 구성원의 유능함, 이 기획 전체와 어울리는 넉넉한 음식에 향수를 느꼈다.- P216.217

마리아는 말했다. "자기(오토)가 얼마나 용감한 사람인지 알려주고 싶을 땐 자기가 목격한 온갖 전투 얘기를 늘어놓는 거야. 그러다 술에 취하면 자기가 얼마나 똑똑한지 자랑하고 싶어서 야전본부 전화교환병으로 간 덕분에 전투를 피할 수 있었다고 떠벌리지."- P224

파트너의 의도를 짐작하는 것, 상대의 마음을 읽는 것은 신나는 놀이였다.- P227

레너드는 부모님이나 친구들이 추지도 않고 출 수도 없는 춤을 추고 그들이 싫어할 음악을 좋아하고 그들은 절대 오지 않을 도시를 고향처럼 느낀다는 사실에 흥분 이상의 만족감을 느꼈다. 그는 자유였다.- P228

블레이크는 한참 동안 레너드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레너드를 조용한 구석으로 데려갔다. "충고 하나 하지요. 저기 저 친구, 글래스 맞습니까? 저 사람은 빌 하비 밑에서 일합니다. 나한테 저 사람과 같이 일한다고 하면 당신 일이 뭔지 알려주는 꼴이에요. 알트글리니케. 작전명 골드. 나는 알 필요가 없는 것이죠. 당신은 보안상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겁니다."- P235

이 모든 게 갑자기 사라진다 해도, 과거의 두 사람으로 돌아가려면 힘겨운 시간을 거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부터 두 사람이 하려는 일은 그 길을 영영 막아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두 말할 나위도 없이, 그러므로 지금 하는 이 일은 잘못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모든 고민을 마쳤고, 밤새도록 상의했다. 그녀는 그를 등진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갑은 벗었다. 손끝을 테이블에 대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피곤했지만 한때 두 사람이 그랬듯 질문처럼 끝을 살짝 올려서, 사랑, 섹스, 우정, 함께하는 삶, 그 무엇을 막론하고 본질적인 문제를 상대에게 환기시킬 때면 그랬던 방식으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고 애썼다.- P299.300

그들은 시스템을 갖췄으니, 꼭 필요하다면 이 일을 다시 해낼 수도 있었다.- P310.311

상상은 현실보다 더 잔혹했다.- P318

난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고, 그건 정말 너무나, 너무나 잘못된 생각이었어. 지금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자니 당신이 내 말을 들어주고 또 믿어주길 내가 얼마나 바랐는지 새삼 깨닫게 돼.- P407.408

나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 누구와도 그렇게 가까워질수 없었어. 이런 말을 한다고 밥의 추억을 더럽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내 경험으로 볼 때,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는 것 같지만. 우리 관계는 정말 아주 특별했어. 그건 진실이니까 그 말을 하지 않고, 그 점을 확실히 적어두지 않고 이 생애를 흘려보낼 수는 없는 거야.- P411

그가 옳았다. 분명 그녀의 편지를 이해하기 위해 이 먼길을 올 필요가 있었다. 아달베르트 가가 아니라 여기, 이 폐허의 한복판으로. 서리Surrey의 거실에서 포착할 수 없었던 의미가 여기서는 충분히 또렷해졌다.- P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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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센트
이언 매큐언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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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찬 후에 우리는 재미있는 영화를 보았다. 밥 호프가 나오는 ‘공주와 해적‘이었다. 그러고 나서는 대강당에 앉아 축음기에서 지나치다 싶게 느릿느릿 흘러나오는 ‘미카도‘를 들었다. 수상은 이 오페라가 ‘빅토리아시대, 그러니까 영국 열도의 역사에서 안토니우스 피우스 시대에 필적할 팔십 년‘의 기억을 불러일으킨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승리의 그늘‘이 우리를 덮고 있으므로...... 이 전쟁이 끝나면 우리는 쇠약해질 테고, 돈도 힘도 없이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서 가만있어야만 할 거라고 수상은 덧붙였다.

얄타 회담이 끝나고 열흘 후 수상 별장에서 벌어진 처칠과의 만찬에서,
존 콜빌, ‘권력의 언저리: 다우닝 스트리트 일기, 1939~1955‘- P5

만남의 자리를 주도한 쪽은 로프팅 중위였다. "이것 봐요. 마넘 선생. 방금 도착했으니 상황을 알 리가 없지요. 이곳(제2차 세계 대전 직후 독일 베를린)의 문제는 독일인도 러시아인도 아닙니다. 프랑스인도 아니에요. 미국인들이지. 그치들은 뭐 하나 아는 게 없어요. 설상가상 배우려고 하지도 않는다니까. 남의 말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요.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위인들이에요."- P9

아까 오후에 템펠호프 공항에서 레너드를 데려온 육군 운전병이 올림픽 스타디움 주차장에 대기중이었다. 레너드의 숙소는 차로 몇 분 거리였다. 상병은 조그만 카키색 자동차의 트렁크를 열어주었지만, 슈트케이스들을 꺼내는 것까지는 제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P12.13

자기만의 집이라니. 그로 인해 이렇게까지 기분이 좋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P13

전쟁 당시 할머니와 함께 살던 웨일스의 시골 마을 하늘에는 적군 비행기 한 대 뜬 적이 없었다. 총을 만져본 적도, 사격연습장 밖에서 총성을 들은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심지어 베를린을 해방시킨 건 러시아군인데도 그날 저녁 베를린의 쾌적한 주거지역을 활보할 때는-바람은 잦아들었고 아까보다 따뜻했다-이 땅의 주인인 양 뻐기며 처칠 수상의 연설에 박자라도 맞추듯 걷게 되는 것이었다.- P16.17

지붕을 날리고 내부를 박살내 창문들이 빠끔히 뚫린 건물 전면만 남겨둔 천 파운드짜리 포탄들을 떠올리면 소년처럼 들뜨지 않기 힘든 법이다. 십이 년 전이었다면 자축의 의미로 두 팔을 벌리고 엔진 소리를 내면서 일이 분쯤 폭격기 흉내라도 냈을 텐데.- P17.18

다음날 아침 그는 여섯시에 일어나 목욕을 했다. 그러고는 다양한 명도의 회색과 다양한 질감의 흰색을 두고 한참 고심하며 천천히 옷을 골랐다. 그는 두번째로 좋은 양복을 입었다가 다시 벗었다. (밥 글래스와) 전화 통화를 할 때처럼 어수룩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팬티 한 장과 어머니가 챙겨준 매우 두꺼운 조끼만 걸친 채 옷장 앞에 서서 정장 세 벌과 트위드 재킷 한 벌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이 젊은이는 미국 스타일의 힘을 어렴풋하게나마 감지하고 있었다. 뻣뻣한 자신의 태도에 어딘가 우스꽝스러운 구석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에게 영국적이라는 것은 이전 세대가 느끼는 편안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공격당하기 쉬운 약점이라는 느낌이었다. 반면 미국인들은 자기네 방식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그는 스포츠 재킷과 어차피 손뜨개 하이넥 스웨터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을 선명한 빨간색 니트 넥타이를 골랐다.- P21

(글래스의) 감색 정장은 구겨지고 군데군데 천이 닳아서 반들거렸다. 레너드는 유심히 보았다. 저렇게나 제각각으로 어울리지 않게 옷을 입는 법도 있다. 그러고도 아무렇지 않은 것이다.- P23

레너드는 로프팅과 만났던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듣기에도 목소리가 꼭 새침데기 같았다. 글래스를 존중하는 뜻에서 그는 자신의 ‘t‘ 발음을 순화하고 ‘a‘ 발음을 죽이려 애썼다.- P24.25

글래스는 딱하다는 눈으로 레너드를 바라보았다. "영국인들이란. 스타디움에 들어앉은 친구들이 뭘 좀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들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닐세. 신사인 척하기 바빠 일들을 안 하신다니까."- P25

글래스는 운전대 윗부분을 양손으로 움켜잡고 보행자들과 다른 운전자들을 낱낱이 뜯어보았다. 수염이 난 턱을 치켜든 채였다. 그는 미국인이고 이곳은 (베를린의) 미국 구역이었다.- P27

과묵한 사람은 실수가 훨씬 적다. 아니, 적어 보인다.- P28

"(전략) 하지만 그 친구 생각은 틀렸어. 3급을 받았다면 그게 레이더기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테니까. 셸드레이크에게 브리핑을 받았다면 자네도 알 테고, 나야 알지만, 자네 보안등급을 조정해줄 자격은 없거든. 그래도 요점은 이거야. 누구나 자기 보안등급이 최고인 줄 알고, 누구나 자기가 전모를 알고 있다고 생각해. 더 높은 등급이 있다는 건 누군가 알려줄 때야 알게 되는 거지. 이번 일에도 4급이 있을지 모르네.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내 등급이 조정되는 일이 생기면 그때 가서야 알게 되겠지. 하지만 자네는......"
(중략) 글래스가 재빨리 덧붙였다. "자넨 2급이지만, 3이 있다는 걸 알지. 그건 사실 규정 위반이야. 변칙적 상황이라고. (후략)"- P31.32

정말이지 공을 던지기 직전 왼손을 그렇게 과장스레 쭉 뻗거나 상대의 피치를 보고 바보처럼 야유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주황색 공을 높이 띄우는 것은 솔직하게 발산되는 의기양양한 힘이었다. 하얀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공의 정확성, 상승했다 낙하하는 포물선의 대칭, 캐치를 절대 놓칠 리 없다는 확신은 거의 아름다울 지경이었고, 그 배경-콘크리트, 이중 철책과 그것에 딸린 기능적인 Y자형 기둥들, 그리고 추위-을 자연스럽게 무너뜨리고 있었다.- P34.35

"(전략) 저 (쇠네펠트) 대로 너머 배수로에 모스크바 고위사령부와 연결되는 소련 육상통신선이 매설돼 있네. 동유럽 수도들과 주고받는 모든 통신은 베를린을 거쳐 다시 나가지. 옛날 제정 통치가 남긴 유산이랄까. 그쪽 일은 위로 파올라가서 도청장치를 설치하는 거야. 나머지는 우리가 처리할 거고."- P43.44

레너드는 뭐라 설명하긴 어렵지만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옴계를 하나 집어들었다. 갈색 베이클라이트 합성수지로 마감된 독일제였다. "저항이 낮은 물질에는 이보다 더 정밀한 기기가 필요합니다. 통풍장치도 필요해요. 이 안에서는 결로가 문제될 수 있으니까요."
글래스는 치하하듯 수염 난 턱을 치켜들더니 레너드의 등을 툭 쳤다. "바로 그런 정신이야. 무리하다 싶을 만큼 요구를 하게. 그런 건 전부 존중할 테니."- P45

"내(글래스)가 말해주지. 다 정치적인 문제야. 우리가 직접 도청장치를 설치 못해서 안 하는 줄 알지? 우리라고 엠프가 없을 것 같나? 자네들을 끼워주는 건 다 정치적 이유 떄문이야. 자네들하고 특별한 관계를 맺어야 하거든. 그래서야."- P48

"그저 보안이나 망치지 말게. 입조심하고. 같이 있는 사람들도 조심하란 말이야. 자네 동포 버지스와 매클린(*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으로 소련을 위해 첩보활동을 한 ‘케임브리지 파이브‘의 멤버 가이 버지스와 도널드 매클린)을 잊지 말라고."- P49

두 사람은 RASC(영국 육군 병참단) 소속으로, 특별히 귀향을 서두르지 않는 징집병이었다. (베를린의) 맥주와 소시지, 여자들이 마음에 든다는 것이었다. 작업을 시작한 그들은 고무 덩어리에 감은 사포로 나무 부분을 매끈하게 문질렀다. 월섬스토 출신이라는 첫번째 남자가 말했다. "여기 여자들은 말이에요. 그쪽(레너드)이 러시아인만 아니면 절대 실패할 일이 없어요."
루이셤에서 온 그의 친구도 동의했다. "러시아인들이라면 끔찍이도 싫어하더라고요. 45년 5월에 이리 진군해 들어왔을 때 짐승처럼 굴었나봐요. 진짜 짐승이요. 이 여자들은 그러니까, 자기네 언니나 엄마나 심지어 망할 할멈까지 강간당하고 찔려 죽었으니까, 아니면 건너건너라도 그런 사람을 아니까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거죠."- P56

"이 삭막한 거리가 한때 도시의 신경중추였습니다. 유럽에서도 가장 유명한 간선도로 중 하나였지요. 운터 덴 린덴이라는...... 저기가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정식 국호)의 진정한 본부라 할 수 있는 소련 대사관입니다. 원래 그 자리에는 호텔 브리스틀이 있었어요. 한때 부유층이 자주 찾던......"- P60

러셀은 십 년 전 자신이 스물두 살의 젊은 중위였던 1945년 5월 미국 점령구역 접수를 위해 베를린으로 출발한 프랭크 하울리 대령의 선발대에 합류했다고 말했다.
"우리는 러시아인이 좋은 놈들인 줄 알았어요. 수백만 사상자를 감수했잖습니까. 투지가 넘치는데다 보드카를 들이켜는 덩치 크고 활달한 놈들인 줄 알았죠. 전쟁 기간 내내 우리가 그쪽으로 산더미 같은 장비들을 보내기도 했고요. 그러니 동맹이라고 철석같이 믿을 수밖에요. 하지만 그건 직접 만나기 전의 얘기입니다. 베를린 서쪽 90킬로미터 지점에서 그 친구들이 나오더니 길을 막더라고요. 트럭에서 내린 우리는 두 팔 벌려 그들을 맞았죠. 선물도 준비해놨고, 직접 만난다는 생각에 들떠 있었거든요." 러셀은 레너드의 팔쭉을 덥석 움켜쥐었다. "하지만 놈들은 냉랭했어요! 냉랭했다고요. 레너드! 우리는 샴페인도 준비해놨어요. 프랑스 샴페인이었는데, 그들은 손도 대지 않더군요. (후략)"- P65.66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 루이제 에크도르프였고, 나이는 서른살, 레너드의 아파트에서 차로 이십 분 거리에 있는 크로이츠베르크의 아달베르트 가에 살고 있었다. 슈판다우의 작은 영국 육군 차량정비소에서 타이피스트 겸 통역으로 일하는 그녀에게는 일 년에 두세 번 불시에 찾아와 돈을 요구하는 오토라는 전남편이 있었다. 가끔은 그에게 머리를 얻어맞기도 했다. (중략) 영어는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스위스에 있는 영국 여학교에서 독일어 교사로 근무했던 할머니에게 배웠다.- P76

"근무시간에 대해 할말이 있다 이건가? 어디까지가 자네 일인가 하는 것도? 이게 그 유명한 영국 공산당 노조의 말투인가? 보안등급을 부여받은 순간부터, 여기서 자네가 맡은 일은 명령을 수행하는 걸세. (후략)"- P84

지금보다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다면, 그리고 조금만 덜 피곤했다면 자기도 사랑에 사로잡힌, 사랑에 빠진 남자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꾸벅꾸벅 졸지 않고 좀 제대로 앉아서 그 문제에 정신을 쏟을 필요가 있었다. 환상이 피어날 수 있도록 권태와 닿아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일이었다.- P85

그녀(마리아)의 아파트 현관문은 다른 집과는 달리 새로 칠한 녹색이었다. 봉투를 문틈으로 밀어넣고 나서 그가 한 행동은 설명할 수도 없고 전혀 그답지도 않은 것이었다. 문손잡이를 잡고 밀어보았던 것이다. 어쩌면 잠겨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 일상을 채우는 무의미하고 사소한 행동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문은 저항 없이 활짝 열렸고, 거기 그녀가, 그의 눈앞에 서 있었다.- P94

뒤편의 그 아파트들은 창문이 가운데뜰이나 비좁은 공간 너머의 옆 건물을 향해 나 있었다. 그런 까닭에, 레너드는 성가시게 깊이 따져보지 않았지만, 그때 어떻게 열린 욕실 문에서 늦은 오후의 겨울 햇살이 두 사람 사이의 마룻바닥으로 비쳐들 수 있었는지, 어떻게 허공에 떠돌던 먼지가 붉은 기 도는 황금색의 비스듬한 빛기둥 속에서 반짝였는지 하나같이 수수께끼였다. 이웃 창문에 반사된 빛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아무 상관 없었다. 당시에는 좋은 징조로 느껴졌으니까.- P95

꼭 그가 상상했던 그대로 그녀(마리아)는 쪽지를 두 번 반복해 읽었다.
"무슨 뜻이죠, 이 ‘들렀다’는 게? 다짜고짜 우리집 문을 열어젖히는 게, 그게 들른 건가요?" 그가 막 해명하려는데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게다가 바이 탄테 엘제로 왔으면 좋겠다고요? 탄테 엘제. 그러니까 그 창녀들이 나오는 술집으로?" 그녀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바람에 그는 깜짝 놀랐다. ‘미국의 소리’에서 항상 틀어주는 노래였다. "어째서 당신은 나를 그렇고 그런 여자라고 생각한 거죠?"(*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 중 ‘Take Back Your Mink’라는 곡의 가사) 브루클린 억양을 흉내내려는 독일 여자에게 이런 말도 안 되게 달콤한 조롱을 당하다니. 레너드는 이대로 기절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참하고 또 짜릿했다.- P96.97

그녀는 영국식으로 차를 끓이고 있었다. (중략)
그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그녀는 영국 육군 전기기계기술부대 제12장갑정비소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 소장과 부소장을 위해 하루 세 번 차를 끓이는 게 담당업무였다고 말했다. (중략) 젊은 여자들이 대접해준 차는 전에도 여러 번 마셔봤지만, 우유를 밀크저그에 따로 담아내는 수고를 하지 않는 여자는 처음이었다.- P99.100

더이상의 침묵을 견디느니 차라리 시시한 얘기라도 하자고 마음먹은 그는 "여기서 오래 살았어요?"라는 질문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불쑥 말했다. "안경 벗으면 어떻게 생겼어요? 한번 보여줘요. 부탁이에요." 이 마지막 단어를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나치다고 여길 만큼 길게 끄는 바람에 레너드의 뱃속에 종잇장이 파르르 떨리는 듯한 섬세한 전율이 퍼져나갔다. 그는 낚아채듯이 안경을 벗고 그녀를 보며 눈을 끔벅거렸다. 1미터가 좀 안 되는 거리까지는 상당히 잘 보였기 때문에 그녀의 얼굴도 부분적으로만 흐릿해졌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생각했던 대로네요. 눈이 이렇게 예쁜데 그동안 내내 가리고 다녔던 거예요. 눈이 예쁘다는 얘기 아무도 안 해주던가요?" (다음)- P101.102

(이어서) 처음 안경을 꼈던 열다섯 살 때 레너드의 어머니가 비슷한 이야기를 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몸이 방에서 부드럽게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안경을 가져가 다리를 접어 선인장 화분 옆에 놓았다.- P102

"그러면 영국에서는 여자 친구들이 있었어요?"
"많진 않았어요."
"얼마나 있었는데요?"
그는 주저하다가 진실을 향해 돌진했다. "그게, 사실, 한 명도 없었어요."
"한 번도 사귄 적이 없다고요?"
"그래요."
마리아가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니까 그 말은 당신 한 번도......"
그녀가 어떤 표현을 쓸지는 몰라도 그는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네, 한 번도 없습니다."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쿡쿡 터져나오는 웃음을 억눌렀다. 1955년에 레너드 같은 배경과 품성의 남자가 스물여섯이 다 되어가도록 성 경험이 없다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남자가 제 입으로 털어놓는 건 엄청난 일이었다. 그는 대번에 후회했다.- P104.105

그녀는 그가 또렷하게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이 다가와 섰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 남자가 두렵지 않다니. 그 사실은 그녀로 하여금 그를 좋아할 기회를, 단순히 그의 욕망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욕망을 품을 기회를 주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감싸쥐었다. "하지만 전 아직 당신 눈을 다 들여다보지 못했는걸요."- P109

한번은 옆자리의 수직굴착기사 둘이 미국인 동료들 앞에서 웃음을 애써 참아가며 옛날 얘기를 하는 걸 들었다. 빈에서 이런 터널을 팠던 전례가 있는 모양이었다. 1949년 MI6가 굴착한 그 터널은 슈베하트 교외의 사유주택에서 시작해 도로 밑으로 20미터가량 뻗어가 임페리얼 호텔 주재 소련 점령군 본부와 모스크바 사령부 사이의 통신을 도청하는 용도로 쓰였다. "위장을 해야 했거든." 기사 하나가 말했다. 동료가 그의 팔에 손을 얹자 목소리를 낮추었고, 덕분에 레너드는 귀를 쫑긋 세워야 했다. "도청 장치를 설치하는 동안 드나드는 것들을 위장할 뭔가가 필요했던 거야. 그래서 해리스 트위드(*스코틀랜드의 해리스 섬에서 생산되는 최고급 트위드) 수입 상점을 열었지. 빈 사람 중 누가 그런 데 관심을 가질까 하는 생각으로 말이야. (다음)- P117

(이어서) 그런데 어떻게 된 줄 아나? 거기 사람들이 해리스 트위드를 너무 좋아했던 거야. 줄을 서서 사가는 바람에 처음 들여온 물량이 며칠 만에 동났어. 그래서 그 불쌍한 치들은 해야 할 일은 하지도 못하고 하루종일 주문서를 쓰고 전화나 받아야 했지. 결국 손님들을 돌려보내고 가게를 닫아야 했어."- P117.118

이 작은 소동의 와중에도 레너드는 반사적으로. 거의 무의식 중에 또다른 영국인의 지위를 읽어내는 영국인의 특기를 발휘해 남자의 몸가짐과 외모, 목소리를 평가하고 있었다.- P124

소탈하고 재능 있는 인물들로 이루어진 이 특별한 세대는 현대 과학전의 필요에 따라 1940년대에 정부 요직에 기용된 사람들이었다. 레너드가 그간 만나본 정부 과학자들은 존경스러웠다. 그에게 자신이 매사 어설픈데다 올바른 단어도 구사하지 못한다는 자괴감을 불러일으키는 퍼블릭스쿨(*주로 상류층 자제를 위한 대학 진학 예비교육이나 공무원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영국의 사립학교) 출신들과는 달랐다. 그런 녀석들은 구내식당에서 절대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적당한 라틴어와 그리스어 실력에 기대어 사령부의 고위직으로 출세할 생각뿐이었다.- P125

그(존 맥나미)의 치아는 낡은 묘석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P127

맥나미가 다시 그의 귓전에서 중얼거렸다. "이 프로젝트에서 마음에 드는 게 뭔지 말해줄까. 바로 태도라네. 미국인들은 일단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제대로 해내고 비용은 신경도 안 쓰지. 나도 원하는 건 전부 얻어냈는데 군말 한 번 들어본 적이 없다니까. ‘예산을 절반으로 줄여서 해볼 순 없겠나‘ 따위의 헛소리는 절대 하지 않아."
레너드는 누군가 자신에게 속내를 털어놓는다는 생각에 우쭐해서는, 재치 있게 받아쳐보려고 했다. "음식 준비에 얼마나 갖은 애를 쓰나 보세요. 전 미국인들이 감자튀김을 요리하는 방식이 정말 좋아요......"- P129

"간단히 설명해주지. 발견된 사실에 따르면 말이지, 메시지를 전기신호로 암호화해서 송신하면 희미한 전지 반향, 그러니까 원본의 암호화되지 않은 평문의 자취가 함꼐 전송돼. 그런데 그게 너무 희미해서 30킬로미터 이상 가면 사라져버리지. 하지만 적절한 장비만 있다면, 그리고 30킬로미터 이내에서 회선을 도청할 수만 있다면 아무리 암호화를 잘해놔도 판독 가능한 메시지가 텔레프린터로 곧장 들어온다고. 이것이 여기서 벌어지는 전체 작전의 근거야. 별 시답잖은 전화 수다나 듣자가 이런 규모의 설비를 건설한 게 아니라고. 그 사실은 (칼) 넬슨이 발견한 거야. 장비도 그가 고안했고. 빈에서 그 장비를 러시아 회선에 시험해볼 좋은 장소를 찾아 돌아다니던 차에 마찬가지로 러시아 회선을 도청하려고 우리가 만든 바로 이 터널로 들어온 거지. 그래서 우리는 아주 너그러운 마음으로 미국인들을 터널에 들이고 설비를 내주고 도청장치도 쓰게 해줬다고. (다음)- P134.135

(이어서) 그런데 저들이 어땠는지 아나? 우리한테 넬슨의 발명품은 언급조차 안 했어. 우리가 암호를 풀려고 골머리를 썩이는 동안 그 물건을 워싱턴으로 가져가 평문을 읽고 있었던 거지. 이런 게 우리 동맹이란 말이야. 황당해서 기가 막힐 노릇이지, 안 그런가?"- P135

"(전략) 자, 저쪽에선 뭐든지 발견하는 대로 우리한테도 알려주기로 약속을 했어. 우리는 그걸 무조건 믿을 수밖에 없거. 그렇지만 저쪽 식탁에서 흘려주는 부스러기에 의지해 살 생각은 전혀 없어. 그건 우리가 생각하는 양측 관계가 아니란 말이지. 우리는 넬슨의 테크닉을 우리 식으로 개발중이고, 훌륭한 잠재적 작전지역도 몇 군데 찾아냈어. 미국인들에게는 함구하고 있지. 고만간 러시아인들도 같은 발견을 할 것이고 그러면 기기를 손볼 테니까 속도가 중요해. 돌리스 힐 팀이 매달려 있지만 누구 한 사람이 여기서 눈과 귀를 열어놓고 있다면 도움이 되겠지. 여기도 넬슨의 장비에 대해 아는 미국인이 한 둘은 있을 거라 생각돼. 기술 분야의 경험이 있으면서 지위는 너무 높지 않은 인물이 필요해. 그들이 나(맥나미)를 보면 1킬로미터는 도망갈 테니까. (다음)- P135.136

(이어서) 우리가 찾는 건 세부사항일세. 전자기기에 관련된 자질구레한 뒷소문이라든가, 뭐든 상황을 진척시킬 수 있는 정보. 양키들이 얼마나 경솔한지는 자네도 알지. 말도 많고, 뭔가 그렇게 흘리고들 다니거든."- P136

밤은 이런저런 변주와 함께 반복되었고, 아침은 변주 없이 반복되었다.- P143

휘파람을 불며 이 노래 저 노래를 조금씩 흥얼거렸다. 처음에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야성적인 노래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가 아는 감미로운 사랑 노래들은 지나치게 점잖고 차분했다. 사실, 지금 그에게 딱 어울리는 노래는 그가 경멸한다고 생각해온 요란한 미국식 허튼소리들이었다.- P144.145

어떤 심리적인 요소가, 자아의 편린, 정말로 좋아하지는 않는 편린이 스멀스멀 스며들고 있었다. 처음이라 모든 게 새롭던 단계가 지나고, 자신도 다른 사람들처럼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고, 너무 빨리 사정하지 않을 자신이 생기고, 이런 문제들이 말끔히 해결되자, 그리고 마리아가 진심으로 그를 좋아하고 원하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확신이 생기자, 사랑을 나눌 때마다 도저히 쫓아낼 수 없는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이 생각들은 욕망과 떼어놓을 수 없게 되었다.-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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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 - 피해자 없는 범죄, 성폭력 수사 관행 고발 보고서
T. 크리스천 밀러.켄 암스트롱 지음, 노지양 옮김 / 반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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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간당한 여성을 의심하려는 인류의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 새삼 배웠다. 강간 피해자의 고발을 신뢰하면 처벌해야 하는 강간범 남성과 선례로서의 강간 사건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강간 사건이 존재하는 만큼, 사회는 그 전보다 불편하고 민감해진다. 하지만 강간 피해자의 고발을 거짓으로 몰아붙이고 단정해 버리면, 허위 사실을 퍼뜨린 여성 하나를 처벌해서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는 변함없이 편안하고 무난해진다. 강간당했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이전과 마찬가지로 아무 걱정 없이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살 수 있다. 강간 피해자의 존재와 주장을 의심하고 부정하기 위해 애쓸 동기는 부족하지 않다. 게다가 이런 동기를 가진 사람의 수가 적지도 않으니 피해자를 의심한다고 비판받아도 편들어 줄 사람이 딱히 부족할 리도 없다. 쉽게 마음 편해지고 싶은 사람은 어디에나 늘 있다. 강간 사건과 피해자가 등장한 순간부터 어떻게든 이것을 묻어 버리고 다시 안락해지려는 인간들의 욕망이 치솟는다. 그러고 보면 대중에 대한 박원순의 믿음이 부족해 보인다. 대통령 자리만 포기했더라면 얼마든지 수치스럽게 살 수 있었으련만.

 

 미국 워싱턴주 린우드에 사는 10대 소녀 마리가 눈만 보이는 복면을 한 남성에게 강간당하고 이 사실을 신고하지만 거짓으로 사건을 꾸며낸 허위 신고죄로 기소되고, 이 사건의 범인이 다른 지역에서 연쇄강간 사건을 저지르다가 여러 형사와 치안 관계자들의 노력으로 마침내 검거된 후에야, 마리의 피해 사실과 무고함도 밝혀진다. 연쇄강간범 마크 패트릭 오리어리를 가운데 두고서, 너무도 허접하고 급하게 허위 신고로 매도된 마리의 사건이 한쪽에 있고, 반대쪽에는 오리어리가 저지른 다른 연쇄강간 사건과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집요하게 추적하고 서로 결합하는 여러 경찰, 형사들 그중에서도 스테이시 갤브레이스와 에드나 헨더샷이 있다. 복잡하지만 선명하고, 납득할 수 없어도 해결에 이르는 이야기다.

 

페기는 정신 건강 상담 분야의 석사 학위 소지자였다. 이전에는 위탁가정 아동들의 관리자였고 지금은 노숙인 보호소에서 어린이 보호 담당자로 일하고 있다. 몇 년 후 그녀는 특수 아동 보조 교사로 학교에서 일하게 된다.-154

어쩌면 제 입장에서는 부정하고 싶었던 마음이 컸나 봐요. 너무 괴로워서요. 저는...... 그 모든 증거를 듣고선 사실이란 걸 알았어요. 그런데도 아직 그 일이 정말로 일어났다는 게 끔찍해요. 또 내가 마리를 불신하는 데 동참했다는 점도 끔찍하고요.”

시간이 흐르면서 페기는 자신이 걸었던 전화, 마리의 이야기를 의심한다고 말한 그 전화 통화를 깊게 후회하며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입만 다물었다면, 경찰들이 제 할 일을 했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나름대로 솔직하고 싶어 한 시도였는데, 제 말에 전적으로 기대게 만들어버렸어요.” 그녀는 말했다.

나는 훌륭한 시민이 되려고 했었어요. 아시죠? 경찰들이 개인의 성격적 문제와 관련된 사건에 쓸데없이 자원을 낭비하지 않기를 바랐어요.

하지만 더 신중했어야 해요. 아니라고 증명되기 전까지는 피해자를 믿어야 하잖아요. 내가 저지른 실수예요. 내 실수입니다. 그 점에 굉장히 죄송하게 생각할 뿐입니다.”-304~305

 

 마크 오리어리가 2008~2011년에 워싱턴주와 콜로라도주에서 저지른 연쇄강간 사건의 첫 희생자인 워싱턴주 린우드의 마리가 순식간에 허위 신고자로 몰리고 기소까지 되고 만 이유는, 너무 비열하고 졸렬하다. 경찰에 마리의 허위 신고 가능성을 제보함으로써 이 모든 사태의 결정적 동기를 제공한, 마리의 위탁모였던 페기가 꼽은 근거는 특히 그러하다. 마리가 사건을 설명하는 방식과 그 내용이 미심쩍고 평소 마리가 애정 결핍으로 주위의 관심을 원하는 성향이었다는 본인의 경험을 내세워서 마리를 의심했지만, 자신의 근거가 마리가 주장하는 강간 피해를 의심할 수 있을 정도로 결정적이고 객관적이며 이 사건 자체와 밀접한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마리가 실제로 강간을 당했으며 억울하게 경찰로부터 허위 신고죄의 누명까지 썼다는 사실이 밝혀지고서야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지만 이 조차도 지나친 자기 연민과 변명으로 치장했다. 그는 자신의 피보호자인 마리가 강간당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으며, 마리가 허위 신고했다는 사실을 밝혀냄으로써 훌륭한 시민이 되고 싶다는 공명심, 자기 현시욕까지 있었다. 페기는 항상 타인의 존경과 칭송을 받을 만한 옳은 일을 해 왔겠지만, 그런 자신의 허영과 교만을 과연 직시해 본 적은 있는지 의심스럽다.

 

 자신의 동기는 정당했으나, 단지 마리가 강간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 전에 성급하게 그를 의심한 것이 잘못이라는 페기의 사과 혹은 변명에서는 훌륭한 시민이 되려는 자신의 신념만큼은 반성하지 않겠다는 아집이 두드러진다. 페기는 다양한 위치에서 여러 소외 계층을 도왔지만, 정작 가장 보호해야 할 대상이 가장 가까운 곳에 나타났을 때는 마리를 일방적이고 개인적인 기준과 판단으로 의심하고, 다른 사람과 달리 마리의 보호자임에도 경찰에게까지 마리의 허위 신고 가능성을 제기하고 말았다. 그의 사회 활동은 훌륭한 시민으로 인정받으려는 노력이었을 뿐, 사회적 약자들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음을 암시한다. 그런 까닭에 무수한 위탁 가정을 전전하며 이미 정서적으로 많은 상처를 입은 자신의 피보호자 마리가 강간당했다는 사실을 접했을 때, 페기는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의심하고 부정하는 쪽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그는 마리가 당한 사건을 자신의 삶 속에서 함께 감당하고 이해하며 치유되도록 인도할 수 있는 사람이 못 되었다.

 

 피상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봉사도 물론 나쁘지 않다. 동기와 무관하게 약자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제공하는 것은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최소한 자기 자신이 그 약자들을 자신의 삶의 일부로도 받아들일 수 있는지 정도는 직시해야 한다. 그랬다면 페기가 주제넘게자신의 졸렬한 근거만으로 마리를 의심해서 그와 마리 모두가 상처 입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페기는 그 자신이 뒤늦게 고백했듯이 마리의 강간 사건을 자기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서 함께 고통받고 치유해 나갈 능력도 의지도 없었던 데다, 자신이 돌보는 약자들을 향한 스스로의 관점을 점검하거나, 반성하지도 않았다. 그런 까닭에 마리가 강간당했다는 주장을 부정해야만 했고, 그러기 위해서 마리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강간당했다는 거짓말까지도 지어낼 수 있다는 본인의 추측을 아주 하찮은 근거만으로 확신하고, 경찰에 제보했다.

 

그녀(스테이시 갤브레이스)는 지금 자신이 타 경찰서 수사관들의 수사를 돕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이 저지른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실수, 형사가 할 수 있는 최악의 실수를 공식적으로 알리게 된 것이었다. 린우드 수사 기록을 검토하면 할수록, 의심이 어떻게 싹텄고, 어떻게 퍼졌고, 마리가 취조당했을 때 어떻게 진술을 포기했고, 어떻게 합의 조건을 받아들였을지 보면 볼수록 갤브레이스는 이 사진 속 여성이 겪은 일을 상상하기도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상상하기 힘든 것은 앞으로 린우드 경찰서에 닥치게 될 날들이었다.-286

 

 강간 범죄의 위험성과 폭력성에 비해서 마리의 강간 신고가 허위일 수 있다는 근거로 페기가 제시한 마리의 사건 설명 방식과 그 내용, 관심을 갈구하는 평소의 성향은 균형이 전혀 맞지 않지만, 페기는 이 조차도 고려하지 못했다. 이런 페기의 제보로 말미암아 마리가 무고하게 허위 신고죄로 기소되었을 뿐만 아니라, 린우드 경찰서의 강간 사건 수사가 중단되어 결국 범인인 오리어리가 이후에 연쇄강간 사건을 일으켰음을 생각해 본다면, 개인적인 의심만으로 강력 범죄의 피해를 허위라고 단정 짓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분별한 짓인지도 확실히 드러난다. 그와 같은 사소한 구실들은 강간당했다는 주장과 동등한 수준에서 고려될 가치가 전혀 없다. 그러므로 자신의 사적 의심과 마리의 강간 피해 주장을 등치시킨 페기는 오리어리가 마리 이후에 저지른 강간 범죄에 대해서도 최소한 도의적으로는 일정한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페기의 주장을 받아들여서 마리를 허위 신고죄로 기소한 린우드 경찰서의 제프리 메이슨 경사 역시 마찬가지다.

 

갤브레이스에게는 강간 사건에 대한 자신만의 수사 원칙이 있었다. 경청하고 입증하자.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죠. ‘피해자를 믿어라. 무조건 피해자부터 믿어라.’ 하지만 난 그것이 옳은 관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피해자의 말을 경청하는 것부터 시작해야죠. 그런 다음에 일이 어떻게 흘러가느냐에 따라 확증할지 반박할지 결정하죠.”-30

 

 허위 신고로 몰린 마리에 대한 첫 강간 사건 이후에 마크 오리어리가 악랄하고 집요하게 저지른 연쇄강간과 철저히 은폐된 단서들 속에서도 이 반복되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콜로라도주의 여러 형사와 치안 관계자들이 점점 결집, 소통하며 포기하지 않고 서서히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은 분명 무척 긴박하며 분노와 슬픔이 터져 나오는 시련의 연속이다. 하지만 사건 해결, 범인 검거의 매우 미약한 가능성이 흩어지지 않고 오히려 서서히 확장된다는 점에서 조금씩 크게 안도의 숨을 내쉬어 가는 장면들이기도 했다. 강간을 당하고서도 도리어 허위 신고를 한 범죄자로 전락해 온갖 비난을 받아야했을 뿐만 아니라 사건의 해결 가능성 자체가 봉쇄되었던 마리의 상황에 비하면, 이 덕분에 활개 친 오리어리의 연쇄강간 행각은 그 잔혹함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갈수록 어떻게든 점점 더 검거와 해결의 시도들이 따라 붙었다. 그 덕분에 아주 조금이나마 안도하며 읽어나갈 수 있었다.

 

(에런 하셀)의 생각에 이 여성은 굉장히 강렬하고 생생한 꿈에서 꺠어나 미처 꿈에서 마저 깨기 전에 창문으로 뛰어내린 것이 아닌가 싶었다. 이것만이 릴리를 거짓말쟁이로 매도하지 않고 진술과 일치하지 않는 증거 부족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 같았다.-216

 

 스테이시 갤브레이스, 에드나 헨더샷을 비롯한 콜로라도의 형사, 경찰들은 피해자들의 자백 외에는 구체적, 가시적 증거가 지극히 부족한 상황에서도 어느 누구도 피해자의 강간 신고를 의심하거나 부정하는 쪽으로 결론을 몰고 가지 않았다. 마리 사건을 맡았던 워싱턴주 린우드 경찰서처럼 말이다. 피해자들에게 가장 회의적인 경찰들조차도 그들을 허위 신고자로 몰지 않는다는 전제 위에서 강간 사건이 일어나지 앉았을 가능성을 상정했을 뿐이다. 함부로 피해자를 의심하지 않고 자신들이 해결해야 할 사건의 입증 책임을 피해자에게 떠넘기거나 피해자를 허위 신고자로 매도하지 않는 콜로라도주의 경찰들 덕분에 어떤 증거도 남기지 않고 실체 없는 강간 범죄를 계속할 수 있으리라던 오리어리의 망상은 철저히 분쇄되었다. 그러므로 이 책의 나머지 절반을 차지하는 콜로라도 치안 전문가들은 딱히 분석하거나 비판할 필요가 없다. 그저 그들의 포기하지 않은 노력과 아무리 사소한 단서라도 포기하지 않은 직관, 자신의 노력과 직관을 기꺼이 다른 전문가들과 교류하는 소통의 과정에 경의를 표할 뿐이다. 강간이라는 범죄를 부정하고 매도하는 것이 얼마나 간편하고 편리한 선택인지 워싱턴주에서 보았다면, 콜로라도주에서는 강간 피해자를 신뢰하고 그 사건을 끝끝내 해결해 내는 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탁월한 헌신이 있어야만 가능한 어렵고도 놀라운 성과인지 배웠다.


(스테이시 갤브레이스는) 학교에서는 영특한 학생이면서도 반항아들과 어울리는 편이었다. 자신이 권위에 반대하는 기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농구부에 들어가서는 친구들과 담배를 피우다 들켜 몇 게임 출장 정지를 당하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일탈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기에 교장이 그녀가 농구부 유니폼을 입고 체육관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을 망원경으로 발견한 것이다.-33

(형사인) (에드나) 헨더샷은 덴버 북서부로 점점 확장되던 교외 중산층 지역에서 성장했다. 어린 시절은 인구 10만 명 정도의 근교 도시인 아바다에서 보냈다. 어머니는 동네 초등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고 장로교회에서 피아노와 오르간을 연주했다. 아버지는 덴버에 있는 콜로라도주 의회에서 일하며 지역 정치에 관여하고 있었다. 그녀는 오빠와 남동생 사이에 낀 둘째였다.

부모는 그녀를 여성스럽게 키우려고 최선을 다했다. 어릴 때부터 발레 수업에 등록시키고 피아노를 가르쳤다. 집 근처 미술관에도 정기적으로 데려갔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들은 허사로 돌아가곤 했다.

피아노가 놓여 있는 거실에 들어가면 다정한 우리 엄마는 피아노 앞에 앉아 있죠. 내가 피아노를 쳐주었으면 하는 눈길로요. 나는 엄마에게 있는 대로 짜증을 내죠. 제가 너무 성질을 부렸다는 걸 알아요. 그렇지만 정말 싫었거든요. 밖에 나가서 뛰어놀고 싶었어요. 그 한심한 피아노 따위 치고 싶지 않았어요.”-59

갤브레이스와 헨더샷은 강간범 검거를 목표로 협력하다가 빠르게 친해졌다. 두 사람 모두 외향적이다. 두 사람 모두 말장난을 좋아하고 화통하게 웃는다. 갤브레이스가 젊고 에너지로 무장하고 있다면 헨더샷의 경험은 갤브레이스의 열정을 보완해준다.

두 사람 모두 테스토스테론이 분출하는 법 집행기관의 세계에서 일하는 것을 편안하게 여기는 편이다. 골든과 웨스트민스터의 정식 경찰 중 90퍼센트가 남성이지만 갤브레이스나 헨더샷은 불청객 취급을 받는다고 느끼거나 주눅들지 않았다. 둘 다 남자 형제들 틈에서 자랐다. 여자 친구가 많지 않고 남자들과 스스럼없이 잘 지내는 편이다. 대차고 강인한 성격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140

 

 사건의 뒤엉킨 실태를 조심스럽게 풀어내듯 서술했다는 점 외에도, 그 속의 인물들을 가능한 한 선명하게 묘사했다는 점에서도 이 책은 인상적이었다. 제한된 분량 안에서도 이 연쇄강간 사건 속 인물들의 성격이 생생하게 드러나는 단면을 공들여서 그려낸 덕분에 이 인물들 각각과 그들이 바라보는 사건 속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이런 방식의 서술은 뛰어난 논픽션의 전형적이고 필수적인 특성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속의 인물 각각은 개별적이며 선택적이기에 아무리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이 연쇄강간 사건 해결의 핵심적인 역할을 한 갤브레이스와 헨더샷을 비롯한 여성 형사들은 물론 여러 여성 치안 관계자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각자의 공간을 일정 부분씩 할당했다는 점에서도 이 책은 충분히 인상적이다.

 

 이 책은 이 연쇄강간 사건을 해결한 여성 형사와 경찰들이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성장했으며, 각각이 어떤 동기로 경찰을 비롯한 법 집행기관에 투신했고 어떻게 일해 왔는지, 이 사건의 해결에 각자 어떤 방식으로 기여했는지를 내용의 중요한 부분으로서 공들여 서술했다. 이들 대부분이 한국과 미국에서 공히 여성적이라고 단정 짓고 평가하는 속성들과 거리를 두고 자기 자신에 충실하게 성장하여, 저마다의 의지에 따라 경찰, 형사가 되었음을 간명하게 보여 준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전형적인 강간 피해자의 상이 존재할 수 없듯이, 전형적인 여성의 상 따위도 존재할 수 없고 여성을 향한 그런 사회의 압력이 사라지고 더 많은 여성들이 자기 자신에 맞는 길을 택할 수 있어야만 사회는 좀 더 나아질 수 있음을 이 책은 일깨워준다. 이 여성 치안 관계자들 중 한 명이라도 여성적인 무엇을 강요하는 미국 사회의 압력 탓에 자신의 진로를 포기해 버렸다면, 오리어리는 검거되지 않았거나 더 많은 피해자에게 범죄를 저지르고서야 붙잡혔을 것이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신의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오리어리의 강간 행각은 끝장났다.

 

(마크 패트릭 오리어리)의 지시는 굉장히 구체적이었다. 아이섀도 먼저 칠해. 이제 립스틱 바르고. 더 진하게. 입술이 진한 분홍색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23

 

 동시에 오리어리가 미군 출신이었다는 점도 생각해 볼 측면이 있다, 가장 남성적인 조직이며 이런 성격을 더욱 강조, 주입하는 군대에서 복무했다는 점이 그가 복무 중에 한국에서 주거 침입, 강간을 시도하고 전역 후에는 결국 이 범죄를 시행하는 데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결국 남성들에게 남성적인 사고와 행동을 강조하고 이것이 긍정적인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하는 것은, 여성을 비하하고 지배하려는 왜곡된 사고 자체를 형성하거나 그것을 더욱 심화, 강화, 정당화시키는 기제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군 복무 이전까지 마크 오리어리는 그의 주장에 따르면 단지 여성을 지배하고 성욕을 채우려는 욕망을 통제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인간이었을 뿐이지만, 그는 군 생활을 겪으면서 결국 연쇄강간범이 되었다. 범죄적 욕망을 품었던 자가 결국 그것을 주도면밀하게 실행하는 범죄자가 되는 과정에서 남성적 특성을 미덕의 핵심으로 주입하는 군대 경험은 어떤 영향을 얼마나 미쳤을까? 오리어리는 2000년대 초반에 동두천과 서울에서 주한 미군으로 복무했다. 이 책에서는 미군과 한국에서의 삶이 오리어리의 범죄적인 성 관념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거의 서술되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이 부분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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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 - 피해자 없는 범죄, 성폭력 수사 관행 고발 보고서
T. 크리스천 밀러.켄 암스트롱 지음, 노지양 옮김 / 반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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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경찰이 수상쩍은 사람들의 위치를 추적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간이 일어난 시점에 범인을 추적하는 건 너무 늦다. 그의 사이클은 계단식으로 뚝 떨어진다. "당신들이 수사에 총력을 기울일 때는 난 숨을 시기입니다. 평범한 사람으로 살고 있죠." 오리어리는 말했다. 그는 의자에 기대더니 웃었다. "그러니까 스케줄이 맞지 않는다고 할까."- P338

"그런 드라마들 널렸잖아요. ‘크리미널 마인드‘, ‘덱스터‘, ‘로 앤 오더: 성범죄전담반‘. 나에게 일어나는 일만 아니라면 다들 보고 싶어 하죠. 기차 탈선 사고가 우리 동네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얼마나 즐거운 구경거리입니까. 다들 보고 싶어서 아주 삼킬 듯이 달려들죠. 사람들은 책을 팔고 싶어하니까."- P339

총 7페이지짜리 문서인 내부 감사 보고서는 사건에 관여하지 않은 린우드의 경감 한 명과 경사 한 명이 작성했다. 그들의 보고서에 쓰인 언어는 절제되어 있었지만(예를 들어 수사가 "잘못된 결론에 도달했다."고 썼다.) 분석은 예리했다. 형사들은 마리 진술의 사소한 모순과 페기의 의심에 너무 많은 무게를 실었다. 의심이 한번 싹튼 후에는 마리를 면담하기보다는 취조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마리가 자백하자마자 "서둘러 허위 신고죄로 기소하고" 사건을 종결해버렸다. 마리가 자백을 취소하려고 했을 때 (존) 리트간 형사는 협박의 용어를 사용했다.- P347

(린우드 사건의 외부 감사를 맡은) (그레그) 린타는 14페이지의 감사 보고서에 이렇게 썼다.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마리의 신뢰 문제가 수사의 초점이 되었으며 심각한 중범죄가 일어났음을 가리키는 강력한 증거들은 완전히 무시되었다." 린타는 첫날 한 시간밖에 수면을 취하지 못한 마리가 강간당한 일에 대해 몇 번이나 반복해서 진술했는지 되짚는다. 당일에 메이슨이 마리에게 진술서를 요구한 것은 불필요하며 잔인하기까지 했다. "경찰은 피해자에게 같은 이야기를 다섯 번이나 하라고 요구했다." 이런 여러 개의 진술을 손에 쥐고 메이슨은 그 진술의 "사소한 차이"가 정신적 외상을 입은 피해자에게 흔한 일인 데도 불구하고 중대한 불일치로 만들었다. 또 메이슨은 페기의 의심을 수사 보고서에 언급해서도 안 되었다. 뒷받침하는 증거가 없는 어떤 이의 의견은 "수사와 절대적으로 무관하다."고 린타는 썼다.- P348

강간 혐의 수사의 기초를 작성한 퇴직 형사 조앤 아첨볼트가 본 마리의 사건은 경찰의 회의주의가 얼마나 자기충족적인 예연일 수 있는지 보여준다고 했다. "안터깝게도 피해자를 취조하듯 신문하고 진술의 불일치를 따지는 것은 그저 피해자를 입 다물게 하고 진술을 번복하게 함으로써, 많은 성폭력 고소가 사실 무근으로 끝난다는 법 집행기관의 편견을 강화하게 됩니다."- P353

린우드 남쪽으로 난 주간고속도로 5번을 직선으로 타면 나오는 오리건주 애술랜드에서 캐리 헐이라는 형사가 ‘당신에겐 선택권이 있습니다(You Have Options)‘라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2013년에 처음 도입된 이 프로그램의 목표는 성폭력 피해자들의 신고 수를 늘려 연쇄 성범죄자 검거를 돕는 것이다. 헐은 많은 피해자들이 비밀 보장을 원하고, 신뢰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 프로그램은 경찰이 어떻게 수사할지, 아니면 수사 진행을 할지 안 할지까지도 피해자 스스로 결정하게 한다. 피해자들은 익명으로 남을 수 있다. 피해자가 고소를 꺼리면 경찰은 그 결정도 존중한다. 프로그램 도입 첫해 애슐랜드 경찰서에서는 성폭력 신고가 106퍼센트 증가했다. 그 이후 버지니어, 미주리, 콜로라도, 워싱턴 등 12개 이상의 주 경찰서에서 이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P355.356

사람들은 각자 갈 길을 가고 오해는 오해로 남을 뿐이다.- P362

오리어리의 강간을 묘사하며 상호합의적인 성관계와 관련된 언어는 절대적으로 피하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애무하다‘ 대신에 ‘더듬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P368

강간에 대해 쓰면서 객관성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느꼈다. 예를 들어 성폭력을 묘사할 때는 오리어리가 피해자들에게 준 공포를 전달하기 위하여 되도록 자세히 묘사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불필요한 세부 사항은 적지 아노으려고 애썼다. 오리어리의 피해자들에 대해 서술할 때 신분이 노출될 수 있는 사항은 생략했다.(세라가 교회 성가대에서 활동한다고 했지만 어떤 교회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가 공격한 여성들을 캐리커처가 아니라 개별적인 인물로 묘사하는 것이 중요했기에 어느 정도의 디테일은 추가할 수밖에 없었다. 또 하나의 어려움은 역시 용어와 관련되어 있다. 작가의 말과 이 책의 모든 곳에서 우리는 마리를 비롯해 오리어리에게 강간당한 여성들을 지칭하기 위해 ‘피해자‘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강간을 당한 이들 중에는 모두는 아니지만 ‘생존자‘나 ‘승리자‘라는 단어를 선호하는 이들도 있었다. 우리는 가장 흔히 쓰이는 용어이자 일반적인 용어로서 ‘피해자‘를 택했다. (다음)- P367.368

(이어서) 하지만 오리어리에게 공격당한 여성 중 한 명은 이 용어로 표현되는 것을 거부했기에 그에게는 이 용어를 쓰지 않았다. 오리어리의 강간을 묘사하며 상호합의적인 성관계와 관련된 언어는 절대적으로 피하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애무하다‘ 대신에 ‘더듬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P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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