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6 - 팍스 로마나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6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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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이사르는 아쉬움 속에서 눈을 감고, 아우구스투스의 팍스 로마나의 시대가 왔다. 이 시대의 '개창자(開創者)'인 카이사르는 그 시대의 초반을 자신이 이끌려 했으나 팍스(평화)의 시대는 그를 거부했다. 이미 그의 손에는 너무 많은 피가 묻었기 때문일까? 그러나 아쉬움은 남지 않았으리라. 새로운 시대의 지도자인 아우구스투스는 그가 선택을 받은 이였으니 말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가 그 자신과 다른 이들의 피로써 이뤄 놓은 기반 위에 그의 건물을 지었다. 비록 카이사르의 후계자라고는 하나, 평화의 시대의 인물인 아우구스투스는 분명 카이사르와는 다른 지도자로써의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 극명한 예가 바로 그가 입안한 '윤리 대책'이었다. 모든 부유함이 로마로 모이는 평화의 시대의 유일한 그림자라고 할 수 있는 '도덕 의식의 결여'를 방지하려는 목적으로 선포된 이 대책으로 인하여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딸과 손녀까지도 먼 섬으로 귀양보내고야 만다. 또한 정식 부인이 있으면서도 수많은 여인들과 사귀면서 사생활을 맘껏 즐긴 카이사르와의 차별성은 이로써 분명해졌다.

 국민들에게도 새 시대의 국민으로써 새로운 지도자의 리더십에 따라야 한다는 인식을 명확시 공표한 것으로도 볼 수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지도자에게 있어서 군사적 재능으로 대표되는 외치(外治)의 능력은 중요한 덕목이 아니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이제 로마는 유럽에서 아프리카까지 당시 알려져 있던 세계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로써 외치의 임무는 사실상 완수된 셈이었다. 그 넓은 영토를 자신의 것으로써 유지하고 다스리는 것은 이제부터 대제국 로마의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내치(內治)의 능력인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런 시대의 도래룰 예상했기에, 카이사르는 자신과 많은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 아우구스투스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그의 변변치 못한 군사적 재능을 보강시키기 위해 아그리파를 곁에 붙여준 것이 아닐까? 아직 안토니우스 등 쟁쟁한 경쟁자가 있던 당시로써는 아그리파가 꼭 필요했다. 이 정도로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2대에 걸친 팍스 로마나의 집념은 실로 집요했다.

 그러나 모든 정적들이 제거되고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로까지 거명되던 아그리파가 병약한 아우구스투스보다도 먼저 세상을 등지게 된다. 이렇듯 수많은 희생으로 이룩된 평화의 제단이었다. 그 제단으로 토가 자락을 이끌며 올랐을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이 그 마지막 희생자가 될 것임을 알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 평화의 끝은 결국 사회의 보수화(保守化)일 수밖에 없다. 사회 전반의 지나친 경직, 이것이 바로 평화의 함정이다. 이런 시대인 만큼 자유분방한 카이사르와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가 자신의 피로써 만든 시대였으니 참으로 아이러니였다. 그래도 아우구스투스의 77년은 카이사르의 그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았다. 그 77년 동안 로마는 그의 마지막 손가락이 가르킨 방향, 제정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아우구스투스만은 보고 싶지 않은 현실까지 냉철하게 응시하는 가운데 로마의 미래는 변하고 있었다.(1997. 10. 21∼26 1997. 10. 26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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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5 - 율리우스 카이사르 (하)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5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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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이사르는 결국 루비콘을 건너고야 말았다.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병사들의 운명이 걸린 이 순간에도 한 구절의 명언을 남길 정도로 그는 당당했다. 앞으로의 날들이 오직 한 사람, 그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서였을까? 이제 로마는 바야흐로 세계 제국으로의 첫발을 내딛고 있었으나 원로원을 중심으로 하는 과두정(寡頭政) 체제는 그 흐름을 따르지 못하고 있었다. 이로써 제정(帝政)으로의 방향 전환이라는 카이사르의 목표는 뚜렷해졌으며 그의 모든 행동은 그 목표의 달성을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미 그에게 '때'가 이른 이상에는, 성급한 판단이라고 할 지도 모르겠지만 폼페이우스와의 내전에서도 이미 그의 승리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한 성급함이 부끄럽지 않도록 그는 승리할 수 있었다. 폼페이우스의 수적 우세가 압도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르가 계속해서 승리했기에 로마의 미래를 결정할 구체제와 신체제의 격돌이라는 이 전투의 중요성을 인식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굳이 말하자면 너무 시시한 탓이었던 것일까? 하지만 카이사르가 단지 그 혼자만의 신념으로 이와 같은 승리를 얻은 것은 아니었다. 압도적인 병력을 이끌고 있었던 폼페이우스에게는 없었던 군사적 철학이 그에게는 있었다. 바로 전쟁의 주체가 되는 병사들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삼고, 그러한 자신의 철학을 당사자인 병사들의 마음에까지 새기는 것이었다. 대제국 로마의 새로운 전기를 연 인물다운 용병술이었다. 반면 폼페이우스는 그의 지지세력인 원로원파와 마찬가지로 병사들을 자신들의 지위와 재산을 지키는 소모품 정도로 여기는 듯했다. 카이사르와 마찬가지로 군대 경력이 많은 폼페이우스 자신은 그렇지 않았더라도 병사들의 입정에서는 지금까지 그들이 본 지도층, 곧 원로원 의원들의 태도에 불신을 품고 있었다. 결국 그들에게는 맘에 없는 싸움이었으니 승패는 여기에서 이미 정해진 것이다. 지휘관인 폼페이우스도 그 끝이 온전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이집트에서 비참하게 암살당하고 카이사르는 일센티미터의 코를 오늘날까지 남기는 '트러블 메이커', 클레오파트라를 만나서 자식까지 얻는다. 이 무렵 카이사르는 우리 생활에 필수인 달력을 현실에 맞게 개정했다. 대다수 서민들은 이런 사소한 배려를 고마워한다는 것을 아는 '허영심 많은'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큰 일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니었다. 그 중 하나가 사실상, 원로원을 중심으로 한 과두정의 폐지와 제정의 성립을 의미하는 정치 개혁이었다. 당연히 기득권층을 중심으로 한 불평 분자는 생겨날 수 밖에 없었고, 그 분출은 너무도 불쾌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 끝은 결국 카이사르의 너무도 어처구니없고 아쉬운 죽음이었다. 어쩌면 한 일보다 할 일이 더 많았을 지도 모르는 그였지만, 자신의 붉은 피로 로마의 대지를 적시고 말았다.

 카이사르 본인의 예상보다 10년은 일찍 전개되고야 만 이 상황으로 말미암아 약관 18세의 나이에 후계자로 지명된 옥타비아누스와 한창 혈기왕성한 장년에 스스로 카이사르의 후임자임을 공언하는 안토니우스 사이에 제2의 내란이 벌어졌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하필 안토니우스에게 끼어든 클레오파트라로 인해 안토니우스의 치밀하지 못한 성격은 그녀의 천박함과 어우러지고 만다. 그 결과로 둘은 서로의 결애서 떠나고 파르살루스 평원에 이어서 악티움 해역에서 카이사르의 이상(理想)은 두 번째 대승을 거두고, 그의 갈 길을 만천하에 알린다. 카이사르와 함께 로마 사상의 쌍벽이라던 키케로의 죽음을 끝으로 과거의 인물은 가고 새 시대가 다가온다. 아우구스투스의 팍스 로마나의 시대가.(1997. 10. 13∼20, 1997. 10. 20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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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4 - 율리우스 카이사르 (상)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4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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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이사르. 이번 권의 제목이 다름 아닌 그의 이름이었고 그 분량까지도 상 하로 나뉠 만큼 상당한 것이어서 이 인물에 대해 어느 때보다 큰 관심을 가지고 읽게 되었다. 그의 심모원려(深謀遠慮)를 나 같은 이가 어찌 알리요마는, 카이사르는 그 당시의 로마와 같은 변혁기에 나오는, 이른바 하늘이 낳은 인물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 자신이 그의 자유분방함을 가두는 영웅(英雄)의 자리를 마다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하늘이 채워준 그릇을 그냥 받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남보다는 훨씬 크지만, 역시 그들과 같이 비어있는 자신의 그릇을 홀로 채워나갔다. 그러한 큰그릇을 채우려면 범인(凡人)들이 가진 한두 가지 능력만으로는 가능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쉬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는 데 멈춤이 없었다. 그는 일생동안 자신의 그릇을 채워나갔던 것이다. 특히 기원전 60∼49년에 걸친, 이번 권의 대부분을 할애한 갈리아 전쟁은 저자의 풍부한 자료 제시와 마치 그곳에서 직접 취재하는 듯한 정학한 기술로 카이사르의 격에 맞는 분위기를 즐길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기술과 자료마저도 카이사르가 직접 써서 남긴 '갈리아 전기'가 그 바탕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일분일초가 급한 전쟁터에서 글을 쓰는 그 여유도 여유려니와 자신의 패배까지도 자신의 손으로 직접 그대로 기록하는 그의 솔직함에도 호감이 갔다. 그러나 실제로 카이사르의 패배는 손에 꼽을 정도여서 싸울 때마다 이긴다는 상승장군(常勝將軍)의 칭호가 아깝지 않았다. 말 그대로 생과 사가 오가는 전쟁터의 현장감을 그대로 전하는 그의 손끝에서 카이사르는 수 천년 후의 미래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그 자신을 스스로 창조했다. 더군다나 그가 이룩한 찬란한 승리의 뒤에는 항상 그만의 기민한 정보 수집과 시의 적절한 활용이 있음을 알았을 때 오늘날 강조되는 정보전의 중요성을 기원전의 그 시대에 알고 있었던 통찰력에 새삼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정보의 위력은 그의 '정치적' 전쟁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본국에서도 한참 떨어진 전쟁터에서 수도의 정국을 낱낱이 파악하는 예리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던가.

 이렇게 빈틈없는 카이사르가 이루려는 야심만큼 허영심도 많은 사람이라는, 허영심이란 다름 아닌 남에게 잘 보이고픈 마음이라는 작가의 새로운 해석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향에서 즐겁게 해주었다. 카이사르는 전쟁 내내 문화와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현지민들에게 과시하는 여러 가지 공사를 벌였다. 현지만에 대한 과시, 곧 허영심과 당장 로마의 우위를 피지배층에게 납득시켜야 하는 당장의 필요성을 동시에 충족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의 이런 다중효과를 노리는 성향 또한 그가 항상 이길 수 있는 키워드의 하나였다. 그가 이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기울여 로마의 밖을 다질 즈음, 안에서는 나날이 위세를 더하고 기세를 드높이는 그의 축출을 위해 조용하지 못했으니, 언제 들어도 결의에 찬 사자후(獅子吼)를 루비콘 강가에서 터뜨린다. "나아가지, 신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우리의 명예를 더럽힌 적이 기다리는 곳으로, 주사위는 던져졌다." 로마의 혼미가 기다려온 위대한 개인, 그 자격의 시험이 시작되는 것인가? (1997. 10. 3∼13, 1997. 10. 13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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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3 - 승자의 혼미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3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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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자는 항상 승리의 기쁨에 취해서 혼미(昏迷)해지는 것이 고금(古今)의 운명인가? 그 법칙 아닌 법칙을 못 벗어난 로마도 결국은 인간의 국가인게다. 결코 책의 분량으로 그 내용을 판가름해서는 안되겠지만, 명색이 한 국가의 격동기를 다룬다는 이번 권이 다른 권에 비해 여실히 얇은 것은 로마가 그 어김없는 운명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더라도 적어도 남들보다는 빨리 깨어났다는 것이다. 바로, 역시 우리가 되돌아볼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그 나라를 이끌었다는 반증이었다. 그 벗어남을 위한 격동의 와중에서 많은 이들이 제물로 삼아진 것은 역시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 중에서도 그라쿠스 형제에게는 그들이 대표하는 집단, 평민의 권리보장을 위한 권한과 열정이 있었다. 오늘날의 우리와 아쉬움과 불행은 주어진 권한은 부족하지 않음에도, 자신을 희생해서 자신에게 부여된 책무를 수행하는 적극적인 이의 부재(不在)에 있다.

 로마는 경제 사정이 지금의 우리처럼 무척이나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힘겹게 승리한 점령지 카르타고와 그 밖의 점령지에서 밀려드는 값싼 농산물로 당시 로마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자영농의 몰락이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폭발적으로 증가한 몰락 농민, 곧 실업자가 사회문제화 되는 것은 오늘날과 같았지만 바로 그 해결의 전면에 나서는 지도자, 그라쿠스 형제가 있었다는 것은 로마의 행운이요, 그들의 나라가 제국의 자격이 있다는 증거였다. 물론 그라쿠스 형제의 앞날은 순탄치가 않았다. 먼저 형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오직 평민만을 생각하는 과격한 입법 활동의 와중에, 날로 커지는 그의 세력에 위협을 느낀 귀족 세력의 음모로 사실상 '공개 처형'되었다. 다행히도 몇 년이 지난 후 나타난 '다음 타자'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형의 그러한 최후에서 배운 점이 있어서인지 온건함을 표방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귀족과 평민 사이의 격차로 인해 분열의 양상까지 보이기 시작한 국가의 유지를 위한, 개혁이라는 목표의 달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온건파라고는 해도 이미 그의 정책은 기득권을 지키려는 귀족 세력의 반발을 살 수 밖에 없었다. 그 중에서도 귀족들의 대농장 경영으로 인해 나날이 늘어나는 빈농(貧農)들에게 농지를 분배하기 위한 농지법(農地法)과 전 이탈리아 반도와 로마의 진일보된 단결을 위한 시민권법(市民權法)이 있었다. 그렇게 혼미에서의 탈출을 위해 노력하던 가이우스 그라쿠스마저도 귀족들의 '온건한' 음모로 호민관(護民官)에서 낙선하고 급기야는 형과 같은 운명을 밟아 암살되고 말았으니 안타깝기 더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그들의 죽음 후에 농지법이 폐기됨으로써 귀족으로의 부의 집중이 심화되어 하류 계층의 증가라는 사회 문제를 낳았으며, 시민권법은 그 폐지에 불만을 품은 동맹시들의 반란이 일어나고서야 재입법되었으니 오직 조국 로마의 앞날을 생각한 그라쿠스 형제의 선견지명에 감탄할 뿐이었다. 그러나 감탄하는 것도, 그런 이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결국은 '후세의' 우리다. 그들 이후에 등장한 술라는 이미 시대의 흐름인 원로원 체제의 균열에 저항하는 강경한 태도가 내 마음을 끌지 못했다. 이런 혼란의 시대에서 평민 연 수입의 10배에 해당하는 미식(美食)을 즐기며 지금도 그 이름을 호화 미식의 대명사로 남긴 루쿨루스 같은 귀족들의 존재는 술라의 목소리를 더욱 공허하게 만들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귀족들의 존재는 없는 것으로 한다고 해도 로마의 번영을 위해 노력하며 수많은 승전을 거듭한 폼페이우스는 왜 시오노가 말하는 로마 역사의 '위대한 개인'이 될 수 없는 것일까? 그 위대한 개인은 누구란 말인가? (1997. 10. 1∼3, 1997. 10. 3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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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성 2005-04-02 16:02   좋아요 0 | URL
세상에, 97년이었으면 제가 고1이었을 것이고 로, 로, 로렌초님은 그때...아니 그때 이미 저는 아직도 읽지 않은 로마인 이야기 3권을 읽고 이런 글을 쓰셨단 말이예요? 아...부끄러운 주말이어요 ㅜ_ㅜ

로렌초의시종 2005-04-03 00:04   좋아요 0 | URL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중학교 시절에서 거의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이 정말이지 차마 부정할 수 없는 정확한 제 현실이랍니다. 사과님 흙흙흙. 이 글을 다시 읽으면서 저도 제 자신을 얼마나 부끄러워했는지 몰라요. 그때는 겉늙은 아이였고, 지금은 철없는 아이이니, 언제쯤 제 나이를 제대로 찾게될까요? 저는. 흙.
 
로마인 이야기 2 - 한니발 전쟁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2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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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은 그 시대 그 나라의 모든 인간의 시험대이자 심판이었다. 로마는 1차 포에니 전쟁에서는 거의 모든 전투를 승리의 함성으로 장식했다. 그래서인지 로마는 순진(?)하게도 승자로써의 전후처리를 그들 특유의 통상적인 방식대로 패자(敗者)인 카르타고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방향으로 처리했다. 하지만 패배 후에는 결국 로마와 서서히 동화되어가면서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던 지금까지의 나라와는 달리 재전쟁을 일으킨 카르타고야말로 로마의 입장에서는 두 번이나 전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던 독일과도 같았을 것이다. 그 원인을 살핀다면 역시 1차 패전 당시의 카르타고의 손실이 시칠리아에 국한되어 영향이 미미했고, 로마의 전후처리 또한 그들이 아직은 지중해 최고의 강국 자리를 유지하는데 일익을 담당한 듯 했다. 로마의 이제까지의 너그러운 전후처리는 소소한 부족 국가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지 카르타고처럼 실력뿐만 아니라 잠재력 또한 막강한 대국을 상대로 실행할 수는 없는 것이라는 쓰디쓴 교훈을 남겨준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카르타고가 승전국인데다가 그리스에까지 손을 뻗치고 있던 로마에 다시 전쟁을 걸 생각을 하지는 못했을 테니 말이다.

 또 이 2차 전쟁은 앞에서 들었던 이유와 동시에 한니발이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확신한다. 이 전쟁이야말로 한니발에게는 그의 '존재의 이유'였던 까닭이다. 그는 바로 이 전쟁의, 이 책의, 주인공으로 불릴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그가 2차 포에니 전쟁의 8년 기간 동안 보여 준 여러 차례의 승전은 기존의 전술(戰術)을 획기적으로 바꾸었으며, 천여년의 세월이 흘러간 지금도 세계 각 국 사관학교의 전술 교과에 응용될 정도로 치밀했다. 그러나 이런 수천년 전의 전투가 그 머나먼 세월을 뛰어넘어 내게 더욱 가까이 다가올 수 있게된 데는 수십권의 문헌을 참조해가며 전투의 서술에 생동감을 부여하기 위해 열성을 다한 지은이의 노력도 한 몫을 했다. 이토록 적지(敵地)인 이탈리아에서 연전연승을 거둔 한니발도 겨우 포로의 석방 정도로 한창 강화되고 있던, 로마 최대의 버팀목인 로마 연합의 붕괴를 예상했다는 것에서 그 패배의 말로는 점쳐지고 있었다.

 그러한 결정적인 관점의 실수는 인정하더라도 결국 그는 불세출(不世出)의 명장(名將)이었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심지어는 그를 쓰러뜨린 스키피오의 전술도 한니발의 영향이 지대했다는 사실에서는 드러났듯이 말이다. 또한 이런 두 천재를 각각 한명씩 따로 내려보낸 역사의 공평함에도 아울러 감탄했다. 그렇게 조국을 위기에서 구하고 그 자신의 이름 역시 빛낸 스키피오도 적군의 화살은 피할 수 있어도 타인의 시기와 질투, 모함에서는 벗어날 수 없었다. 그 위태로웠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임에도 돈 몇 푼에 발목이 잡혀 실각했으니 말이다. 전쟁 승리 15년 만에 로마인들은 전쟁의 그 모든 것을 잊은 걸까? 아마 그들은 '잊고 싶어서' 그리 했으리라. 패배의 고통을 멀리하고 승리의 쾌락만을 원했던, 평범한 그들이 버린 것은 스키피오가 아니라 그 악몽(惡夢)같았던 전쟁이었다. 그 망각의 재물이었던 스키피오와 그 악몽의 문을 연 한니발은 같은 해에 그들의 꿈을 마쳤다. (1997. 9. 22∼10. 1, 1997. 10. 1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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