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궁정은 과학 종사자에게 사회적 정당화를 수행할 장소를 제공함으로써 새로운 과학의 인식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게 했고, 그리하여 각 분과학문discipline의 인식론적 지위를 상승시키는 역할을 했다. - P1617

갈릴레오는 특정한 사회직업적socioprofessional 문화의 구성원, 즉 수학자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하지만 궁정으로 소속을 옮기는 과정에서 독특한 유형의 철학자, 즉 기존에 확립된 사회적 역할이나 이미지가 없는 새로운 유형의 정체성으로 스스로를 재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어떤 의미에서 갈릴레오는 1610년경 ‘대공의 철학자 겸 수학자‘로 등극하면서 자신을 재발명한 셈이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사회적 역할과 문화적 규약을 차용하고 그것들과 재교섭하기는 했지만, 그가 스스로 구축한 사회직업적 정체성은 명실공히 독창적이었다. 갈릴레오는 브리콜뢰르bricoleur, 곧 즉흥적 손재주꾼이었다. - P1819

오히려 나는 갈릴레오의 일상과 그의 과학 활동을 빚어내어 오늘날 ‘갈릴레오의 경력‘이라 불리는 역사적 인공물artifact을 수십 년에 걸쳐 만들어 낸 공시적 과정과 조건, 밑천과 제약을 확인하고 탐구하는 데 더 큰 관심이 있다. 이 분석은 궁정문화, 정치적 절대주의, 과학의 정당화, 초창기 과학기관scientific institution의 발전 사이에 이어진 연관성을 고찰하면서 끝맺을 것이다. - P20

1633년의 재판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우주론적·신학적 차원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궁정의 후원과 문화(그리고 그 안에 내재한 긴장)를 이해한다면 이미 충분히 탐구되었다고 여겨지던 당시의 사건에 관한 새로운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갈릴레오가 스스로를 출세한 철학자이자 궁정인으로 세워 나갔던 바로 그 과정이 재판의 동역학dynamics을 특징지었을 가능성이 있다. - P2425

이른바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두 혁명이 하나로 통합된 것이었다. 우주론의 극적인 변화가 수용되려면 먼저 우주를 연구하는 분과학문의 체계 자체가 과감하게 재편되어야 했다. 알다시피 이것은 무척이나 오랜 과정이었다. 결국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이 정당화되었다는 것은 자유학에 간의 위계 재편이 성공했음을 의미하며, 그에 따라 수학자의 사회적 지위 또한 상승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변화는 새롭게 나타난 이론의 강점 때문만이 아니라 대학에서 궁정으로 직을 옮기는 경우와 같은 제도적 이주institutional migraton가 원인이 되기도 했다. 분과학문의 전통적 위계는 대학 내에서는 확고하게 수용되었지만 궁정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궁정은 소속된 분과학문이 아닌 군주의 호의에 따라 지위가 결정되는 곳이었다. - P26

그러나 1610년이 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갈릴레오가 (네덜란드에서 처음 발명된) 망원경을 개량하여 괄목할 만한 천문학적 발견을 여럿 이뤄낸 뒤, 파도바 대학을 떠나 메디치 궁정으로 소속을 옮겨 대공의 (수학자만이 아니라) 철학자가 된 것이다. 바로 이때부터 갈릴레오의 궤적은 동료 수학자들에게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갈릴레오의 후반기 경력 대부분을 특징짓는 궁정에서의 수완과 전략은 수학자로는 이례적이었다. 그렇지만 사회적·인식론적 정당화를 향한 갈릴레오의 열망은 그가 동시대 대표적인 수학자들과 공유했던 전문직업적 문화에 여전히 뿌리를 두고 있었다. - P30

6장은 갈릴레오 재판을 재해석할 것을 제안한다. 로마 궁정의 독특한 후원 동역학과 세대적 주기를 분석하여 맥락을 설정한 뒤에, 동시대 궁정의 논고들이 묘사한 궁정의 전형적인 사건, 즉 ‘궁정인의 몰락‘을 들여다본다. 그 사건의 몇 가지 측면을 갈릴레오 재판에 적용함으로써, 1633년의 재판이 토마스주의 신학과 근대 우주론 간의 충돌 못지않게 바로크 궁정사회 및 문화의 다양한 동역학과 긴장 사이에서 빚어진 충돌로 인해 발생했다고 주장할 것이다. 요컨대 갈릴레오의 경력과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의 정당화는 그것들을 착수할 수 있게 했던 것과 똑같은 과정 때문에 끝장나고 말았다. - P34

사실 정체성 형성의 과정이 반드시 과학공동체나 과학기관처럼 뚜렷한 전문직업 집단에서만 이루어지라는 법은 없다. 누군가가 과학공동체나 사회집단으로 사회화되면서 발달시킨 전문직업적 정체성에 토머스 쿤이나 로버트 머튼의 역사학이 부여한 근대과학의 사회학적·개념적 차원은, 반드시 근대 초기 과학자들이 후원 관계와 네트워크로 진입하며 경험했던 자기 형성의 과정에서 물색해야 한다. - P4546

공동체의 구성원은 선물을 주고받는 과정을 통해 지위와 권력을 획득하거나 유지하려 한다. 선물 주고받기가 강제임을 시인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신의 권력과 자율의 한계를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선물 교환(혹은 후원 관계)을 자유롭고 사심 없는 활동으로 표현하는 것은 그러한 게임에 뛰어드는 참여자를 정당화하기 위한 몸짓gesture인 셈이다. - P4950

사회적 지위는 신뢰를 규정할 뿐만 아니라 의사소통의 허용 여부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례로 17세기 베네치아에서 인구조사를 담당하던 사제들은 자신의 교구에 속한 가구를 조사하러 순회할 때 늘 귀족과 동행해야 했다. 귀족 신분의 주민이 한낱 성직자인 사제의 질문에 답변하지 않으려 하는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 P5051

요컨대, 새로운 과학의 정당화에는 인식론적 논쟁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 새로운 세계관은 그것을 옹호하는 종사자들과 그들이 속한 분과학문의 사회인식적 정당화가 성공해야만 수용되었다. 복합 수학은 철학의 인식론적 지위를 확보해야 했다. 사회적 지위와 신뢰 간의 밀접한 관계를 고려할 때, 높은 사회적 지위는 인식적 정당화로 진입하는 암호였고, 후원은 사회적 지위와 신뢰를 얻게 해줄 제도였으며, 궁정은 가장 강력한 후원 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장소였다. - P52

27 이러한 경칭의 변화는 생각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였다. 알레산드로 데스테 추기경의 가신 아고스티노 마스카르디는 후원자가 자신을 전처럼 "고명한"이 아닌 "매우 위대한"이라 불렀을 때, 자신의 지위가 하락한 것을 눈치챘다(Francesco Luigi Mannucci, "La vita e le opere di Agostino Mascardi", Atti della Società Ligure di Storia Patria 42[1908], p. 89). - P54

28 베네데토 카스텔리가 갈릴레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경칭이 격상된 과정을 관찰하면 이러한 패턴이 드러난다. 1607년 카스텔리는 갈릴레오를 "저의 더없이 훌륭한 선생님Eccellentissimo Signor mio"이라 불렀다. 1610년에는 (갈릴레오가 천문학적 발견을 이룩한 뒤) 신사의 어감을 더해 "고명하며 더없이 훌륭한 선생님"으로, 1613년에는 "매우 고명하며 더없이 훌륭한 선생님"으로 높여 불렀다. 1610년대 말이 되자 "더없이 존경하는 주군Padrone Colendissimo"이라는 경칭을 덧붙이기 시작했고 1620년대와 1630년대는 일상적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경칭은 발신인과 수신인의 지위에 따라 변동하므로, 이 패턴과 다른 예외가 여럿 있을 수 있다. 실제로 대공이 사용한 경칭에서 알 수 있듯이, 군주는 수신인의 경칭에 훨씬 더 보수적이었다(ASF, "Miscellanea medicea 415"). - P55

경력 초기의 갈릴레오 역시 군주 코시모 데 메디치에게 직접 서신을 보낼 수 있는 지위가 아니었다. 1605년에 이르러 충분한 지위를 확보한 다음에야 자신이 지위상의 중대한 경계를 넘어가는 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먼저 후원 에티켓을 위반할지도 모를 위험성을 조금씩 완화하는 일에 공을 들였다. - P5657

궁정인과의 중개 인맥을 발전시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가령 지롤라모 메르쿠리알레, 치프리아노 사라치넬리와 페르디 난도 사라치넬리[삼촌과 조카], 빈첸치오 주니와 니콜로 주니아 버지와 아들], 코시모 콘치니, 조반 바티스타 스트로치, 알레산드로 데스테, 바초 발로리, 안토니오 데 메디치, 실비오 피콜로미니와 에네아 피콜로미니). 인맥의 상당수는 집안의 자산이었다. 아버지 빈첸치오는 아들 갈릴레오에게 인맥을 물려주었고, 아버지가 된 갈릴레오 또한 아들에게 그것을 물려주었다. - P6061

40 (전략) 이런 것들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모두 종합 하여 갈릴레오를 기존의 해석과는 다른 인물로 본다면 흥미로울 수 있다. 단순히 자신의 발견을 메디치가에 헌정하고 궁정에서 훌륭한 경력을 쌓은 수학자가 아니라, 본인만이 아닌 부계 일족을 위해 궁정과 연결된 후원 자산을 최대로 활용한 피렌체 일족의 수장으로 보는 것이다. (후략) - P61

하지만 후원이 가장 대표적인 신분 이동 수단이었다고 해서 모든 후원 관계가 똑같은 신분 상승과 사회적 정당화의 가능성을 제공한 것은 아니었다. 사회적 신분의 큰 도약은 수많은 하급 후원자의 혼합된 후원이 아니라 위대한 후원자 단 한 명의 후원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사실은 군주의 궁정이 사회직업적 정체성을 정당화하는 가장 강력한 기관이었던 이유를 설명한다. 궁정은 절대군주의 공간, 즉 가장 위대한 후원자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 P75

물론 베네치아 공화국의 후원 네트워크는 단일한 절대군주 후원자에게 집중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갈릴레오와 같은 피후원자는 대공국의 피후원자들처럼 후원자의 죽음이나 퇴위 또는 취향의 변화로 인한 지위의 붕괴를 그리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갈릴레오 본인도 잘 알았듯이, 파도바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한 그는 "불멸과 불변의 군주"(즉 공화국 자체)의 영향 아래 있을 것이었다. 이처럼 위대한 후원자가 부재한 피후원자의 삶은 안전하긴 하겠지만 사회적 지위(더 나아가 인식적 지위)를 크게 도약시킬 기회가 축소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 P8384

선물을 받은 이가 높은 지위일 경우, 그는 선물을 명예로운 도전으로 인식했다. 반대로, 받은 이가 답례할 수 없는 경우, 선물은 증여하는 쪽인 후원자의 권력을 강조하는 온정주의적 몸짓으로 기능했다. 이런 경우 선물은 후원자에게 일종의 기념물, 즉 물신fetish이 되었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왜 그토록 많은 공식 선물에 후원자의 형상이 새겨져 있는지를 설명한다(가령 갈릴레오는 처음에는 곤차가 가문에서, 그 다음엔 메디치 가문에서 후원자의 형상이 새겨진 황금 메달을 받았다). 그런 선물은 후원자가 피후원자를 ‘소유‘한다는 증표였다. 마치 편리하게 탈부착할 수 있는 상표와 같았다. 결과적으로 후원과 선물증여의 의미는 경제적 교환 이상이었다. 지위와 정체성, 신뢰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 P101102

1609년 8월, 갈릴레오는 베네치아 상원에 망원경을 선물했다. 베네치아의 총독doge 레오나르도 도나Leonardo Donà에게 전한 소개장에는 심지어 망원경 제작의 권리를 포기한다고 쓰여 있었다. 갈릴레오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답례로는 파도바 대학 종신교수직이 적절하리라는 뜻을 내비치기까지 했다. 요청했던 답례를(그리고 그 이상을) 받은 갈릴레오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가신으로 남아야 하는 명예에 얽매여 있었다.
메디치가에 (앞서 상원에 기증했던 것과 같은 기구로 발견한) 목성 위성을 헌정하고 파도바 대학 총신직이라는 관대한 보상을 포기할 때 갈릴레오는 명예 규율code of honor을 위반했다. 갈릴레오가 본인이 요청했던 관대한 선물을 받은 다음 되돌려 준 것은 베네치아인에게 모욕이 되었다. - P109110

이 증거들로 판단할 때, 위대한 후원자와 맺는 영구적인 후원 관계의 시작점은 후원자가 가신의 선물에 감사를 표하면서도 그에 보답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후원자는 일종의 빛을 받아들였는데, 그 빚을 한 번에una tantum 갚지 않고 마치 봉급처럼 시간을 두고 다양한 특권을 정기적으로 분배하며 갚아 나갔다. 이 경우 피후원자의 선물은 투자로 기능했다. 후원자의 가장 돋보이는 선물은 긴밀한 후원 관계에 진입하지 않을 때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 P114

메디치 가문 쪽에서는 갈릴레오에게 선물로 답례하는 것보다 그가 그토록 원한 철학자 칭호와 연봉 1,000스쿠디를 주는 편이 더 편리했을 것이다. 그에게 선물을 준다면 무엇을 줄 수 있었겠는가? 당시 중요하게 여겨지던 유럽 국가들 모두 갈릴레오의 발견과 그 발견이 메디치가에 헌정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영향력 있는 수많은 저명인사 또한 갈릴레오가 메디치 외교 네트워크로 배포한 망원경과 《별의 전령》 사본을 이미 입수해서 그의 발견을 직접 확인한 터였다. 어떤 의미에서 갈릴레오는 메디치가를 통제된 포틀래치로 서서히 끌어들인 셈이었다. 갈릴레오가 헌정한 메디치의 별에 코시모가 감사를 표하자, 코시모의 관대함과 고귀함은 갈릴레오에게 망원경을 선물 받은 모든 왕과 왕비, 공작, 추기경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따라서 코시모는 적절한 답례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 P117118

권력자는 부당하다는 말을 들을까 두려워하지 않고도 수천 명의 노고를 무시할 수 있다. (마테오 펠레그리니, 1624년 출간한 궁정 논고) - P119

절대군주는 신을 닮았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개신교의 신을 닮았다. 권력은 무한하고 위대하므로 속세의 가신은 군주를 기쁘게 하고자 기꺼이 한 일에 군주가 어떻게 반응할지 예상할 수 없다. 이것으로 우리는 펠레그리니와 많은 궁정 논고의 저술가들이 은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완벽한 궁정인의 특성을 기술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실제로 궁정인이 군주에게서 보상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교인이 신에게 은총을 받는 것과 구조적으로 비슷하다. 두 경우 모두 그 사람의 행위가 은총의 성취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사함이 성립된다. 궁정인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자신이 ‘선택받았다‘는 것을 외관상 과시하기 위해 마치 은총을 입은 듯 행동하는 것뿐이었다(이것이 군주에게 사회적·문화적 통제를 위한 매우 강력한 도구였음은 분명하다. 군 주는 가신들에게 굳이 보상하지 않고도 그들을 순응하게 할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궁정인다운 무심함, 즉 스프레차투라sprezzatura가 의미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궁정인의 ‘구원‘은 오직 군주에게만 달려 있었다. - P122123

궁정인다움의 ‘정수essence‘인 스프레차투라는 궁극적으로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제시되어야 했다. 그것이 불명료한 개념으로 남아 있어야 했던 이유는 군주의 권력과 그 권력으로 형성된 궁정인의 정체성에 대한 ‘신비‘를 완벽하게 상징하는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군주는 권력의 정당성에 대한 규명을 피하는 데 성공하는 한에서만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군주의 권력은 그것의 본질과 정당성이 규명될 때가 아니라 궁정의 행실과 문화로 표출될 때 유효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군주의 권력이 논증을 통해 규명되는 것을 막으려면 스프레차투라의 불명료함과 권력의 원천에 관한 ‘신비‘가 반드시 필요했다.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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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잠자리에 누운 내 아버지는 비행기 소리를 듣곤 했다. 영국으로 들어오는 독일 비행기들이었다. 그들은 깊은 밤이면 다시 독일로 날아갔다. 런던에서 동남쪽으로 몇 마일 떨어진 켄트Kent 지방에서 벌어진 일이다. 아버지는 1934년에 태어났다. 그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아버지가 다섯 살이었다는 뜻이다. 켄트는 영국의 폭탄 골목Bomb Alley으로 불렸다. 독일 군용기들이 런던으로 향하며 지나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폭격기가 표적을 놓쳤거나 남은 폭탄이 있을 경우 돌아오는 길에 아무 곳에나 폭탄을 떨어뜨리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었다. 하루는 길을 잃은 폭탄이 할아버지 댁 뒷마당에 떨어졌다.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 P7

우리가 어린 시절의 흥미와 관심을 다 잃고 사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아니다. 나는 스파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소설이라면 모조리 읽었다는 농담을 하곤 한다. 몇 년 전 어느 날 책장을 살피다가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전쟁을 다룬 논픽션 서적을 엄청나게 많이 모아두었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역사를 다룬 유명한 베스트셀러는 물론이고 특수한 역사적 문제를 연구한 책, 절판된 자서전, 학술서까지. 그 책들 대부분은 전쟁의 한 측면을 다루고 있었다. 무엇일지 짐작이 가는가? ‘폭격‘이다. 스티븐 부디안스키Stephen Budiansky의 《공군력 Air Power》, 타미 데이비스 비들Tami Davis Biddle의 《항공전의 수사학과 실제Rhetoric and Reality in Air Warfare》, 토머스 M. 코피Thomas M. Coffey의 《슈바인푸르트에 대한 결정Decision over Schweinfurt》 등 폭격을 다룬 역사서들이 책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한 권만 더 예를 들어볼까? 로버타 월스테터Roberta Wahlsteter의 《진주만: 경고와 결정Pearl Harbor: Warning and Decision》을 읽어보았는가? 아니라면 당신은 정말 재미있는 책을 놓친 것이다. - P9

이 책을 쓰고 있을 때, 당시 미 공군 참모총장이던 데이비드 골드페인David Goldfein과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장소는 워싱턴 D.C.에서 포토맥강을 사이에 두고 바로 건너 버지니아 북부에 있는 합동기지 마이어-헨더슨 홀Myer-Henderson Hall 내의 에어하우스Ar House였다. 많은 미국 고위 군 관계자들이 모여 살고 있는 웅장한 빅토리아풍 거리에 자리한 커다란 빅토리아식 건물이었다. 저녁 식사 후, 골드페인 장군은 그의 친구와 동료, 그러니까 다른 공군 고위 관리들을 초대했다. 다섯 명이 장군의 뒷마당에 모여 앉았다. 그들은 대부분 전직 군 조종사들이었다. 그들의 아버지들도 대개 군 조종사였다. 이 책에서 다룰 사람들의 현대 버전인 셈이다. 밤이 깊어 가면서, 내 눈에 띈 것이 있었다
에어하우스는 레이건 국립 공항Reagan Nationglal Airport 바로 아래쪽에 있다. 거의 10분에 한 번씩 머리 위로 비행기가 지나갔다. 특별할 것이 전혀 없었다. 시카고나 탬파 또는 샬럿으로 향하는 일반 상업 여객기였다. 이 비행기들이 머리 위로 날아갈 때마다 장군과 그 동료들 모두의 시선이 그 모습을 보기 위해 위쪽을 향했다. 어쩔 수없는 집착이었다. 그들은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 P11

(로리스) 노스태드Lauris Norstad는 원한다면 (이 제21폭격기사령부에서) (커티스 에머슨) 르메이Curtis Emerson LeMay의 부사령관으로 잔류해도 좋다고 말했다. 너무나 모욕적인 제안이었기에 (헤이우드) 핸셀Haywood Hansell은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노스태드는 열흘 안에 정리를 마치라고 지시했다. 핸셀은 멍한 상태로 주위를 서성였다. 괌에서의 마지막 날, 핸셀은 평소보다 술을 좀 더 마시고 젊은 대령이 연주하는 기타에 맞춰 부하들을 위해 노래를 불렀다. "늙은 파일럿은 죽지 않는다. 결코 죽지 않는다. 그저~ 사라질 뿐이~다." - P17

미 육군 장교들을 키워낸 유서 깊은 훈련장 웨스트포인트West Point 사관학교의 예배당은 허드슨강 위의 가장 높은 지대에 서서 학교의 스카이라인을 압도하고 있다. 이 예배당은 1910년 웅장한 고딕 복고 스타일로 지어졌다. 오로지 어두운 회색 화강암으로만 만들었으며 창은 좁고 길다. 이 건물은 견고하고, 꾸밈없고, 흔들리지 않는 중세 요새의 힘을 가지고 있다. 빌더(제2차 세계대전 이후 펜타곤의 외부 연구 기관 역할을 하기 위해 캘리포니아주 샌타모니카에 만들어진 싱크탱크 랜드 코퍼레이션RAND Corporoion에서 일했던 정치학자 칼 빌더Carl Builder)는 이렇게 말한다.
"이곳은 서로와 그리고 그들을 키워낸 땅과 가까운 사람들이 간단한 의식을 치르는 데 적합한 조용한 장소다."
이것이 바로 육군이다. 애국심 강하며 국가에 대한 봉사에 뿌리를 둔 군대인 것이다. - P5354

해군사관학교 예배당은 아나폴리스Annapolis에 있다. 웨스트포인트 예배당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지었으나 훨씬 더 크고 웅장하다. 아메리칸 보자르beaux-art[신고전주의 양식이 프랑스 국립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에 유입되어 새롭게 정립된 구성 중심의 예술 사조] 스타일의 이 건물에는 파리 앵발리드 Invalides의 군 예배당 디자인을 기반으로 한 거대한 돔이 있다.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통해 들어온 빛이 섬세하고 화려한 내부를 비춘다. 오만하고, 독립적이며, 세계적 규모의 확고한 야심을 품고 있는 대단히 해군다운 장소이다. - P54

공군이 콜로라도 언덕 한가운데에 알루미늄과 강철을 이용해 수직으로 세워둔 전투기 모양의 예배당을 건설했다는 것이 어떤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생각하는가? 칼 빌더는 그의 책에서 이런 의문을 던진다. 그의 결론은 이렇다. 공군은 자기들을 군의 오랜 가지, 즉 육군이나 해군과 가능한 한 차별화되기를 필사적으로 원하는 사람들의 집단이다. 또한 공군은 유산이나 전통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들은 현대적이길 원한다. - P55

하지만 히틀러가 폴란드를 공격했고,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으며, 1941년 여름에는 모두가 미국 역시 곧 전쟁에 나설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한 나라가 전쟁을 시작하면, 강력한 공군력이 필요한 것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강력한 공군력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얼마나 많은 비행기가 필요할까?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 워싱턴의 육군 고위 지휘부는 절박한 심정으로 그 해답을 갖고 있을 법한 유일한 전문가 집단을 불러들였다. 앨라배마주 맥스웰필드에 있는 전술학교의 교관들을 말이다.
이렇게 해서 폭격기 마피아는 워싱턴으로 갔고, 미국이 공중전에서 한 모든 일의 본보기가 된 놀라운 문서를 내놓았다. 문서의 제목은 〈AWPD-1(Air War Plans Division One)〉이었다. 이 문서는 미국에 필요한 항공기(전투기, 폭격기, 수송기)가 어느 정도인지 극히 상세히 제시했다. 얼마나 많은 조종사와 몇 톤의 폭발물이 필요한지는 물론 초크 포인트 이론에 따라 선정한 이 모든 폭탄의 독일 표적, 즉 50개의 발전소, 47개의 수송망, 27개의 석유 정제소, 18개의 항공기 조립 공장, 6개의 알루미늄 공장, 6개의 ‘마그네슘 공급원‘도 포함되었다. 이 놀라운 기획 작업은 시작부터 마칠 때까지 단 9일이 걸렸다.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앨라배마주에 은둔해 10년을 보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종류의 초인적 개가였다.
폭격기 마피아는 전쟁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 P6364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정량적인 세계와 관련한 모든 생각을 이름은 (프레더릭) 린더만Frederick Lindemann(이후 처웰 경Lord Cherwell이 되었다)의 두뇌에 저장했다. 그리고 1940년 전쟁이 터진 직후 총리가 되자 린더만을 옆에 두었다. 린더만은 처칠 내각에서 처칠 정신의 문지기 역할을 했다. 그는 처칠과 콘퍼런스에 갔다. 처칠과 식사를 함께 했다. 린더만은 술고래인 처칠과 식사할 때 외에는 절대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럴 땐 취하도록 마셨다. 주말이면 처칠의 시골 별장으로 갔다. 사람들은 새벽 3시에 불 옆에 앉아 함께 신문을 읽는 두 사람을 목격했다.
스노C. P. Snow는 이렇게 표현한다.

절대적으로 진실하고 대단히 깊은 우정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그에 대해 얼마간의 대가를 치렀습니다. 처칠의 가까운 다른 동료들은 린더만을 몹시 싫어했지만 처칠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린더만을 떼어놓으려 했지만 처칠은 그렇게 놔두지 않았습니다. - P81

린더만의 전기 작가 중 한 명은 그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적을 꼼짝 못 하게 할 수 있다면 잘못되었다는 것을 뻔히 아는 논거도 주저하지 않고 이용할 사람이었다." - P83

헤이우드 핸셀은 남부의 명문 군인 가문 출신이다. 그의 현조부玄祖父와 존 핸셀John w. Hensell은 미국독립혁명에 참여했다. 고조부 윌리엄 영 핸셀William Young Hansell은 1812년에 일어난 미영美英전쟁 때 육군 장교였다. 증조부는 남부 연합군의 장성, 조부는 장교였다. 아버지는 흰색 리넨 양복에 파나마모자를 쓰고 저녁 식사 자리에 등장하는 육군 군의관이었다. 헤이우드는 영국군 장교처럼 단장短杖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모두가 그를 어린 시절 별명인 포섬Possum이라고 불렀다.
핸셀은 키가 작고 호리호리했다. 춤을 잘 췄고, 시를 썼으며, 가극 〈길버트와 설리번Gilbert and Sullivan〉의 광팬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책은 《돈키호테》였다. 그가 가장 우선하는 것은 비행이었고, 두 번째는 폴로, 가족은 한참 격차를 둔 3순위였다. - P90

"배워야 할 것이 많다." 핸셀은 이런 사람이었다. 이 모든 것이 그가 불굴의 정직함과 약간의 순진함을 지닌, 근본적으로는 로맨틱한 사람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 P91

볼베어링은 칼 노든이 첫 번째 원형을 제작할 때도 큰 문젯거리였다. 폭격조준기는 수십 개의 가동부可動部로 이루어진 기계식 컴퓨터였다. 폭격조준기의 계산이 정확하려면 각각의 가동부가 정확한 위치로 정밀하게 회전해야만 했다. 볼베어링의 크기가 일정하지 않거나 완벽하게 매끈하지 않다면 폭격조준기 자체가 엉망이 된다. (중략)
문제는 전쟁이 시작되면서 갑자기 수천 개의 폭격조준기를 만들어야 했다는 데 있었다. 이는 노든이 더 이상 볼베어링을 손으로 일일이 닦을 수 없다는 의미였다.

생산 쪽을 맡고 있던 동업자 (테드) 바스Ted Bath는 매우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는 한 회사에 가서 이렇게 말했다. "수십만 개의 볼베어링을 생산해주셨으면 하오." 그러고는 사람들을 시켜 볼베어링의 크기를 측정하게 했다. 완벽한 혹은 허용 오차 범위 내에 있는 볼베어링을 발견하면 그것을 폭격조준기에 집어넣었다. 완벽한 제품을 찾으려면 50, 60, 100개쯤의 볼베어링을 검토해야 했다. 기준에 맞지 않는 나머지는 버렸다. 하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그 방식이 돈이 훨씬 덜 들었으니까. - P9596

육군항공대 전략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의 그 어떤 계획보다 기발한 계획을 세웠다. 두 지역에 대한 공습이었다. 주된 작전은 B-17 폭격기 230대를 슈바인푸르트의 볼베어링 공장으로 출격시키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작전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주의를 돌리는 우회 작전이 필요했다. B-17 폭격기들이 슈바인푸르트로 떠나기 직전 다른 B-17 비행단은 슈바인푸르트 남동쪽의 작은 도시 레겐스부르크로 떠나기로 했다. 독일은 그곳에서 메서슈미트Messerschmitt 전투기를 만들었다. 레겐스부르크 공격으로 독일 방어군의 주의를 끌어 슈바인푸르트로 향하는 폭격기들의 길을 터준다는 생각이었다. 레겐스부르크로 향하는 폭격기들은 미끼였다. - P97

커티스 르메이는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의 가난한 지역에서 성장했다. 형편이 어려운 대가족의 장남이었던 그는 야간에는 주조공장에서 일하며 혼자 힘으로 오하이오주립대학 토목공학과를 졸업했다. 대학을 마치고 육군에 입대한 그는 항공단에서 놀랄 만큼 빠르게 승진했다. 33세에 대위가 된 이래 소령, 대령, 준장을 거쳐 37세에 소장으로 진급했다. - P9798

"아무런 불만도 없었습니다." 커티스 르메이는 불평하는 부류가 아니었다. 더구나 외부인에게는. (연합국의 제2차 세계대전 기록용) 영화 관계자들이 헤이우드 핸셀을 인터뷰했다면, 그는 유창하게 몇 마디 똑똑한 대답을 한 뒤 사람들을 장교 숙소로 불러 자비로 술을 대접했을 것이다. 핸셀은 르메이와 정반대였다. - P100

표적에 직선으로 날아가는 B-17 폭격기를 격추하려면 대공포 377발을 쏘아야 한다. 300발하고도 77발이라면 많은 양이다. 따라서 직선비행은 위험하긴 하지만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위험이라고는 할 수 없다.
르메이는 이렇게 말했다. "해보자. 직선비행을 하자. 7분간 직선 고정 비행으로 접근하자." 자살행위처럼 들리지 않는가? 휘하의 모든 조종사가 실제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덧붙였다. "내가 우선 시도해보지." 르메이는 1942년 프랑스 생나제르Saint-Nazaire 폭격 비행에서 선두에 나섰고, 회피 기동을 하지 않았다. 자,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표적에 떨어진 폭탄은 이전 폭격의 두 배였지만 그들은 폭격기를 한 대도 잃지 않았다. - P103

칼라일배럭스Carlisle Barracks의 육군유산교육센터Army Heritage and Education Center 소장이자 미국육군역사연구소US Army Military History Institute 소장을 역임한 콘래드 크레인Conrad Crane은 르메이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공군 사령관이라고 칭했다.

그는 역동적인 리더였습니다. 부하들의 어려움을 공유했죠. 그는 공군 역사상 최고의 항법사였고. 뛰어난 조종사였으며. 정비까지도 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맡고 있는 리더로서의 측면은 물론이고 기술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잘 알았습니다. 그는 공군 최고의 문제 해결사였습니다.
한편으로 그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주어지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많이 묻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 P107108

그러나 세심하게 계획된 이 유인 임무는 예정된 미끼 역할을 거의 하지 못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르메이의 조종사들은 여름날 새벽의 짙은 안개 속에서도 이륙할 수 있었다. 르메이가 그런 문제를 대비해 훈련시켰기 때문이다. 그는 이륙 훈련을 반복했다.
"장비만을 이용하라. 밖을 전혀 볼 수 없는 것처럼 행동하라." 하지만 다른 사령관들은 르메이처럼 하지 못했다. 전투기 승무원들은 독일로의 장거리 출격에 지쳤고, 동료를 잃은 충격에 빠져 있었다. 잠이 부족했으며, 불안하고 기진했다. 이런 부하들에게 "향후 임무 수행 때 안개가 낄 가능성이 있으니 오늘 새벽 6시에 맹목 이륙盲目離陸[시계視界 비행이 아닌 상태에서 계기나 무선 장비를 이용해 행하는 이륙]을 연습을 한다"고 말한다는 게 사령관으로서 얼마나 힘든 일일지 짐작이 가는가?
그런 일은 르메이만이 할 수 있었다. 그는 가차 없이 엄격한 사람이었다. 의미 없는 연습으로 보이는 것을 밀어붙일 때 부하들이 하는 불평 따윈 그의 관심 밖이었다. - P114

리언 페스팅거Leon Festinger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회심리학자가 되었다. 나는 공군을 위한 연구 경험이 전후戰後 그의 유명한 연구의 동기, 즉 ‘시커스Seekers‘라고 불리는 시카고의 한 종교 집단을 분석하게 된 동기가 되지 않았을까 항상 궁금하게 여겼다. 페스팅거는 한 가지 질문을 마음에 품고 시커스에 접근했다. 수년 전 폭격기 마피 l아가 믿었던 게 모두 거짓으로 판명되었던 참혹한 시기 동안 그의 마음을 스쳤을 것이 분명한 질문이었다. 확신이 현실에 부딪혔을 때 진정한 신자들에겐 어떤 일이 일어날까?
리언 페스팅거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런 상황에서는 자신이 느끼는 바나 자신이 하는 일에 잘 부합하는(그것을 정당화하는) 인식만을 받아들일 것이란 생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사람이 정말 그런 식으로 움직인다면 그런 일이 아주 흔하게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죠."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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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무라) 리도는 실크해트를 벗어 거기서 비둘기 다섯 마리를 잇따라 꺼냈다. 무슨 감자라도 캐는 듯했다. 리도는 실크해트에서 꺼낸 비둘기를 담담하게 무대에 풀어놓았다. 관객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 그저 침묵했다. 정적 속에서 누군가의 기침 소리가 공허하게 들렸다.
"아시겠습니까? 비둘기를 꺼낸다고 선언하고 비둘기를 꺼낸들 누구도 놀라지 않죠." (마술사) - P1011

마술은 연출이 전부다.
지금은 나도 잘 안다. 물론 기술이나 트릭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얼마만큼 잘 살려내는지는 연출에 달려 있다. 연출을 잘하면 시판되는 마술 도구로도 사람들은 놀라고, 연출이 서툴면 고도의 기술을 써도 쇼는 망한다. ‘지금부터 공중으로 떠올라보겠습니다‘라 말하고 공중에 뜨기만 한 내 무대가 프로 마술사인 누나의 눈에 어떻게 보였을지 지금은 알 수 있다. 나는 나를 공중에 띄우기 위해 필요한 연출을 해야 했다. (마술사) - P15

작가가 되고 오 년째 되는 해 가을, 십오 년 만에 아버지를 만났다. 교토 병원에서 아버지가 말기 암이라고 연락이 왔다.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사후 수속에 관해 몇 가지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 하는 수 없이 병원으로 갔다. 오 분 정도 병실에 얼굴을 비쳤다가 병원에서 나와 바로 도쿄로 돌아왔다. (한 줄기 빛) - P51

아버지의 글씨를 보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처음 산 자전거에 아버지가 내 이름을 써주었을 때가 생각났다. 아버지는 유성 매직펜으로 새 자전거의 흙받기에 내 주소와 이름을 썼다. 왜 그런지 그때 아주 자랑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이 년 뒤 깜박 잊고 자물쇠를 잠그지 않는 바람에 자전거를 도둑맞았을 때 아버지는 내 뺨을 때렸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자전거를 사주지 않았다. 자전거의 색깔도 모양도 생각나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쓴 내 이름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났다.
분명히 자전거에 ‘도카이 데이오‘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기억한다. 도카이 데이오가 우승한 아리마 기념에서 돈을 벌었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자전거를 사왔다. (한 줄기 빛) - P58

플로리스 컵은 1907년 마필 개량을 목적으로 미쓰비시 재벌의 고이와이 농장이 영국에서 수입한 서러브레드 20두頭 중 하나다. 청일 및 러일 전쟁을 통해 일본 육군은 군마의 질이 서양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을 자각했다. 오랫동안 전쟁이 없었던 일본에서 말은 주로 감상이나 의례용이었고 군사 작전에 쓸 일이 없었다. 당시 국내산 말은 키가 작고 성미가 거칠어 전쟁터에서 해가 됐다. 가령 1900년 의화단 사건에서 ‘일본은 말처럼 생긴 맹수를 탄다‘라고 열강에게 비웃음을 샀을 정도다. 그 때문에 질 좋은 말을 생산하고자 거국적으로 경마 육성에 주력했다. 플로리스 컵은 바로 그런 시기에 수입된 영국의 서러브레드였다. (한 줄기 빛) - P59

남은 것은 아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미스 캐넌의 딸뿐이었다. 딸을 보여달라‘라는 (마미야) 쇼지로의 말에 브로샤르는 당혹했다고 한다. 아비를 모른다‘라는 말은 서러브레드에게 중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서러브레드는 혈통이 전부다. ‘부모가 모두 서러브레드‘여야 서러브레드이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혈통 등록이 시작된 18세기 이후 모든 서러브레드는 혈통서와 함께 관리되고 있다. 그 관리에서 벗어난 말은 서러브레드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런데도 소지로는 딸을 보여달라고 졸랐다. (한 줄기 빛) - P62

레티시아의 첫 새끼는 580엔이라는 비싼 값에 팔렸다.
경매 시장에서 육군 장교가 첫눈에 반한 탓이었다. 메구로는 3세대 전에 아랍종의 혈통을 이어받았는데, 장교는 그 사 실을 알고 더욱 만족했다.
생산한 말이 군마로 징용되는 것은 말 생산업자에게 더없는 명예로 간주되었다. 검사소로 출발하는 날, 레티시아의 새끼는 군기軍旗를 짜넣은 천을 덮고 지역 주민들의 성대한 배웅을 받았다. 농장에는 무수한 일장기가 휘날렸다. 다른 군마와 함께 만주로 보내질 예정이라고 했다.
쇼지로는 울었다. 물론 기쁨의 눈물이 아니었다. 군마로 징용되는 명예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 말은 일본 더비에서 우승할 말이었다. (한 줄기 빛) - P77

쇼지로는 또다시 메구로에게 가장 알맞은 상대를 찾아 씨암말을 사러 두 번째 유럽 여행길에 오르려 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거센 전화戦火로 단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1943년에 정부가 경마 중지를 발표했고 이 년 뒤 도쿄 경마장은 식량난 해소를 위해 고구마 밭이 됐다. 다른 몇몇 중소 목장과 마찬가지로 마미야 농장은 경영난에 처해 전쟁이 끝난 직후 폐쇄됐다.
쇼지로는 서러브레드 몇 두를 매각한 돈으로 목장을 ‘마미야 승마 클럽‘으로 개조했다. 씨수말에서 은퇴한 메구로도 숭마용 말 중 하나가 됐다. (한 줄기 빛) - P87

우리가 사는 ‘현재‘에 ‘과거‘와 ‘미래‘가 포함되어 있을까요.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와 미래를 생각할 때 그것은 곧 현재입니다. 현재 안에 과거와 미래라는 상념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 모순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현재와 과거와 미래가 동시에 발생한다는 뜻입니다.
일단 저는 이 모순에 대해 ‘시간의 흐름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대답하기로 하겠습니다. 그 대답이 무엇을 의미하며 어떻게 모순을 해결하는지는 곧 알게 되실 것입니다. 혹시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 모순 자체가 마음에 걸리지 않게 되셨다는 뜻이겠지요. 그 또한 모순을 해결하는 하나의 수단입니다. (시간의 문) - P99

제가 말씀드리려는 요점은,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배경이 늘 알기 쉬운 위치에 있다는 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시간의 문‘에 관한 한, 과거가 바뀐 것도, 과거를 바꾸었다는 사실도 배경이 아닙니다.
배경은 세부에 깃듭니다. 그리고 그 세부가 과거를 바꾼 이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거듭해서 말씀드리는 ‘대가‘입니다. (시간의 문) - P117118

장대한 효론의 전주에 트럼펫이 들어왔다. 차분하게 확장되는 곡이다. 중반에 클라이맥스를 맞이한 뒤 안정되어 밑음으로 끝난다. 음높이 변화도 없이 완만한 멜로디가 두 번 반복될 뿐인 단순한 구성이었다. 도중에 조바꿈하면서 8분의 6박자로 바뀌는 부분이 작은 악센트일 것이다. 어딘지 모르게 예의 바른 느낌이 있다. 클래식을 좋아하고 음대에서 정규 교육을 받은 고지식한 청년이 자신의 가치관을 모조리 쏟아부어 만든 것 같은 곡이었다. (무지카 문다나) - P140

모모야마는 문화를 사랑했다. 영화도, 소설도, 음악도, 패션도, 미술도 모두 좋았다. 자신은 어째서 문화를 사랑하나. 모모야마는 ‘불필요해서 라고 생각했다. 문화가 없다고 굶어죽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런 ‘불필요한 것‘이 자신들의 생활에 색채를 부여하고 있었다. 저출산 고령화 경향은 멈출 줄 모른다. 일본 경제는 쇠퇴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세상에서도 다양한 문화를 접함으로써 사람들은 풍요로운 생활을 할 수 있다. 어떤 것에 감동해 세상이 다르게 보이고 평범한 일상이 특별하게 느껴진다. 그런 기분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문화 덕택이었다. (마지막 불량배) - P179

나가노 출신인 모모야마는 내내 도쿄를 동경했다. 일 년에 한 번 친구와 함께 완행 첫차를 타고 도쿄에 갔다. 시부야, 하라주쿠, 오모테산도, 아오야마를 돌며 용돈과 세뱃돈을 털어 옷이며 신발, 시디를 샀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여자는 모두 미인이고 남자는 모두 멋있어 보였다. 딱 한 번 익숙지도 않은 헌팅을 했다가 "도쿄 사람 아니구나?" 하고 웃음을 샀다. 창피했지만 역시 자신들은 촌티가 나는구나 하고 납득했다.
상경하기 위해 죽기살기로 공부해 도쿄에 있는 사립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막상 도쿄에서 살게 되니 시부야나 하라주쿠에 거의 가지 않게 됐다. 기술의 진보에 의해 옷이나 신발은 인터넷으로 살 수 있었고 음악은 클릭 한 번으로 다운로드할 수 있었다. 점원에게 추천을 받는 일도, 시디 가게에서 몇 시간씩 청음하는 일도 없어졌다. 모든 게 원클릭이었다. (마지막 불량배) - P184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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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와 마찬가지로 포커에서도 특정 결과는 우리의 전략뿐 아니라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우연적 요인에 의해서도 영향받는다. 훌륭한 포커 선수는 현명한 전략이 한 번의 경기에서 성공을 가져다주지는 않을지라도 장기적으로 승률을 높여준다는 것을 안다. - P287

7장에서 논의한 ‘딴 데 보기‘ 효과를 기억하는가? 충분히 다른 방법들과 충분히 다른 분석들로 데이터를 들여다보면 결국 자신이 입증하고 싶은 가설을 뒷받침하는 결과처럼 보이는 것을 발견하지만, 그 결과는 실은 무작위 잡음 요동에 의한 것이다. 맹분석으로 대처하려는 위험이 바로 이런 종류다. 인간은 자신의 가설을 뒷받침하지 않는 분석들을 외면하고, 자신의 가설을 우연히 뒷받침하는 분석에 집중하는 핑곗거리를 임기응변식으로 찾아내는 데 매우 능하다. 원하는 결과를 얻을 때까지 이런저런 분석을 시도하는 것을 p해킹이라고 부른다. 이 이름은 심리학자 유리 사이먼슨Uri Simonsohn, 조지프 시먼스Joseph Simmons, 레이프 넬슨Leif Nelson이 지었다. - P288

호응이 커지고 있는 또 다른 전략은 학술지들이 등록 보고서에 지면을 할애하는 것이다. 연구자들이 학술지에 연구를 제안하면 학술지는 이론적 근거와 제안된 방법이 전문적 동료 평가에 의해 승인되는 한 연구 수행 이전에 발표를 승인한다. 이렇게 하면 예상에 들어맞지 않는 결과를 학술지에서 실어줄 가능성이 낮아져 생기는 확증편향을 없애고, 더불어 흥미로운 가설을 입증하는 결과만 발표하고 반증하는 가설은 외면하는 학술지의 자연스러운 편향도 없앨 수 있다. - P292

맹분석에 친숙해졌으면 전문가를 고르거나 전문가 의견을 받아들일 때마다 맹분석(또는 확증편향을 줄이는 여러 방법 중 하나)을 모색해야 한다. 신뢰할 수 있는 전문가란 우리가 어떻게 스스로를 속이는지 아는 사람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찾고 싶은 전문가는 자신이 적절한 맹검법이나 사전 등록, 그 밖의 확증편향 방지책을 통해 결과에 도달한다는(또한 타인의 결과를 선호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더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문제를 연구하기 전에 자신이 답을 안다고 가정하는 경우에는 예/아니요 결과나 숫값을 결정하거나, 여러 조치들 중 하나를 선택할 때마다 경계해야 한다. - P293

스스로를 속이는 일을 피하기 위해 새 기법을 발명해야 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 아니다. 명료한 생각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꺾이는 것 또한 이번이 마지막이 아니다. 세상과, 서로와, 현실에 대한 집단적 연구와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변화시키는 신기술이 발명될 때마다 우리가 스스로를 속이는 전혀 새로운 방법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다음 번에는 컴퓨터가 더 복잡한 분석을 내놓고, 프로그래밍 버그의 더 많은 여지를 만들어내어 게임 규칙을 바꾸는 일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 P295

앞 장들에서 논의한 많은 개념과 마찬가지로 논의를 사실적 토대가 있는 측면들과 가치, 목표, 감정에 대체로 의존하는 측면들로 분리하는 데는 현실적 유익이 있다. 이 분리의 토대가 되는 정의와 분류에 이론의 여지가 있더라도 이 방향을 추구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이 훨씬 많다. 현실이 결정을 어떻게 제약하는지를 당사자들이 따로따로 고려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 P327

(클로드) 스틸Claude Steele의 추론에 따르면 사람들의 가치에 도전하는 정보는 위협적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자신의 가치를 긍정할 기회를 부여함으로써 회복력을 키울 수 있고 위협을 이겨내는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다양한 실험을 통해 스틸과 동료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핵심 가치를 공개적으로 인정해(이를테면 가치 목록에 대한 설문에 응답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경직적으로 방어하지 않아도 된다면, 새 증거를 더 기꺼이 고려하고 심지어 생각을 바꾸기도 한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연구자들은 학교 등의 다양한 현실 상황에서 자기긍정 프로그램을 실시해 규칙적 자기긍정이 학생들의 새로운 정보를 흡수하려는 의향을 증가시켜 학업 성적을 개선할 수 있음을 밝혀냈다. - P329

우리는 정책 결정의 요소들에 대해 명시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어떻게 점검해야 하는지 모른다. 최종 결정에 이견이 있는 사람과 논쟁하는 법을 모른다. - P333

마지막 장을 앞두고 놀라운 명제와 차분한 난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명제부터 보자. 우리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모든 사람이 잘 살 수 있는 항구적 세계의 건설을 합리적 수준에서 목표로 삼을 수 있는 최초의 세대다. 이 명제는 틀림없이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심지어 가능성이 희박할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참일 가능성만으로도 당신은 눈이 번쩍 뜨일 것이다. - P335

우리의 집합적 과제(아마도 우리 시대의 유일한 대난제)는 힘을 모아 생산적으로 생각한 다음 그 결과를 활용하는 도구를 발명하는 것이다. 세 번째 밀레니엄의 들머리인 지금 이 난제를 풀 수 있다면 행성의 번영을 위한 기초를 쌓으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 P337

공론조사는 민주주의의 걸림돌인 무관심과 불참 문제를 해결하는 유망한 해답인지도 모른다. (짐) 피시킨Jim Fishkin과 동료들이 진행한 공론조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진지한 태도를 보였다. 참가자를 무작위로 선발했는데도 경이로운 참여율을 거둘 때가 있었으며, 숙의를 시작한 인원의 95퍼센트 이상이 끝까지 동참했다. 게다가 참여한 사람들은 그 뒤에 뉴스 미디어를 더 많이 접했다. 이를테면 신문을 한 번도 읽지 않았다가 매일 세 종을 읽기 시작한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참여 초대를 받으면 이것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실제 의무로 받아들인다. - P343

(훠턴스쿨Wharton School의 필립 테틀록Philip Tetlock과 바브 멜러스Barb Mellers가 개발한 좋은 판단 프로젝트Good Judgment Project, GJP에서 예측의 정확도가 높은) 슈퍼 예측자가 나머지 예측자와 구별되는 점은 무엇일까? 앞에서 언급했듯 대단한 자격증이 필요하지 않았다. (정치적 소양이 풍부하고 지적 능력 검사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경향이 있긴 했지만.) 하지만 그들은 열린 생각이라는 인지적 태도를 갖췄으며, 자신의 지식에 한계가 있고, 논증에 약점이 있고, 더 많은 것을 알아가면서 자신의 믿음을 수정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기꺼이 인정했다. 이것은 보정 점수에 반영되었는데, 그들은 평범한 예측자에 비해 덜 과신했다. - P354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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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로켓과학을 발전시켰고 달까지 날아갈 수 있지만, 정작 필요할 때 간단한 합리적 판단을 내리기 위해 불확실성과 관점 대립을 해소하는 법을 늘 생각해내지는 못한다. - P18

의료 문제, 사업적 판단, 사회·환경 정책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우리가 개인적, 직업적, 정치적 삶에서 맞닥뜨리는 난관의 상당수는 고도로 기술적인 과학 정보를 처리하는 문제와 관계있다. 이 책은 정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고 의미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지, 정서적, 도덕적, 철학적, 영적 질문 중에서 기술적 정보가 답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답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지 들여다본다. 하지만 우리가 파악하고자 씨름하는 정보나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가 ‘과학적‘이든 아니든 이 책의 과학적 얼개는 유용성을 발휘한다.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다른 인간과 상호작용하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일상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대학원 과정에 등록하려고 빚을 지는 것이 합리적일까? 새 췌장암 치료법 연구에 피험자로 자원해야 할까? 우리 아이의 학습 장애를 해결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일까? 외래종 수생 잡초를 없앨 제초제 살포를 마을에서 승인해야 할까? 태양광 패널 설치를 위해 우리 학교의 시설 예산을 써야 할까? 정부에서 자율주행차랑을 어떻게 규제해야 할까? - P2021

함께하고 힘을 합치는 현실적이고 원칙에 입각한 방법들을 더 많이 발전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우리의 집단적 미래에 가장 중요한 열쇠인지도 모른다. - P23

이 기법들을 이해한다고 해서 과학자들의 실험을 재현하거나 과학 분야의 까다로운 전문 지식을 쌓을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정직한 연구인지, 우리를 진리에 가까이 데려다줄 것인지, 아니면 단지 우리의 선입견을 악용하는 미사여구인지 평가할 수는 있다. 즉, 전문가와 사이비 전문가를 구별할 수 있다. 과학적 사고의 기법과 도구를 다루는 능력을 갖추는 것은 이 책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다. - P34

위험에 어떤 가치를 부여할지는 당신에게 달렸다. 의사들은 위험이 얼마나 큰지는 알려줄 수 있지만, 그것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알려줄 수 없다. - P35

우리가 언제 무엇을 먹고 어떤 약을 복용하고 어떤 의료 절차를 거쳐야 하는지, 어떤 직업을 선택하고 어떤 모임에 가입하고 어떤 운동을 하고 어떤 애인을 사귀어야 하는지를 전문가가 결정하는 사회는 설령 그들의 결정이 ‘옳을‘지라도 지옥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전문가‘의 조언을 귓등으로 흘릴 권리를 갖고 싶어 한다. - P38

요즘 사람들은 과학이 다방면에서 성공을 거두는 것보다는 오늘날 과학 기술의 한계에 놀란다. 전자는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P50

인터넷에서 ‘Spurious Correlations(허위상관)‘를 검색하면 나오는 웹사이트에서 수십 가지 사례를 볼 수 있다. 예를 하나만 들어보겠다. 웹사이트에 따르면 미국의 1인당 치즈 섭취량은 2000년부터 2009년까지 꾸준히 증가했으며 홑이불에 목이 감겨 죽는 사람의 수도 정확히 보조를 맞춰 증가했다. - P73

무엇이 무엇의 원인인지 알아내기란 힘든 일이지만, 우리 삶에서 달갑잖은 결과를 줄이고 바람직한 결과를 늘리고 싶다면 꼭 알아내야 한다. 바이러스가 지역사회에 퍼지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고, 이 현상을 지배하는 과학 법칙이 무엇이고, 지금까지의 감염률이 얼마인데 1년 뒤 감염률이 열 배로 증가하리라는 것 등을 아는 일은 근사하다. 하지만 우리는 한낱 구경꾼이 아니다. 어떻게 해야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을지 알고 싶어 한다. 마스크를 쓰면 감염률이 달라질까? 우리가 먹는 음식이 바이러스의 인체 내 작용에 영향을 미칠까? 사회적 거리두기가 바이러스의 사람 간 전파를 예방하는 데 정말로 효과가 있을까? 이것들은 전부 원인과 결과에 대한 물음이다. - P7475

20세기 초가 되어서야 과학자들(특히 통계학자 로널드 피셔Ronald Fisher)은 우리가 아는 변인뿐 아니라 모든 무관한 변인을 통제하는 해법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해법이란 사람들을 두 집단에 무작위 배정하는 것이었다. 통계학적으로 말하자면 100명 중 누구를 처리군에 넣고 누구를 대조군에 넣을지를 동전 던지기로 정하면, 한 집단의 여성 수와 16세 참가자 수는 다른 집단과 대략 같다. 근사하게도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변인을 이런 식으로 통제할 수 있다. 표준화할 엄두를 결코 내지 못했을 변인도 문제없다. 두 집단은 테일러 스위프트 팬, 생일 별자리가 천칭자리인 사람, 골프 애호가, 아침을 굶은 학생 등의 수도 비슷할 것이다. 이런 까닭에 무작위 배정 실험은 황금 표준(최적 표준)‘으로 간주된다. - P77

인과는 우리가 체계에 개입할 때 관찰하는 상관관계의 문제에 불과하다. - P79

단일 인과와 일반 인과의 이런 차이는 왜 중요할까? 둘 다 인과관계가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을 확정하는 것이 주어진 목적에 맞는지 헷갈리기 쉽다. 우리는 위험한 제품(담배라고 하자)의 특정 쓰임새가 특정 결과(암이라고 하자)의 원인임을 입증할 수 없으므로 제조사에 결과의 책임을 물려서는 안 된다는 논증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이것은 분명 단일 인과 주장을 정확히 이해했지만 일반 인과 주장에 대해서는 올바르지 않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다른 인과 주장에 대한 반응을 어떻게 구조화하는지 생각하는 일은 흥미롭다. 전형적으로 우리는 일반 인과를 통해 해로운 결과를 낳은 무책임한 행위(이를테면 조명 기구에 설계 결함이 있으면 많은 구매자가 부상을 입을 수 있다)에 대해서는 이를 예방하기 위해 규제가 실시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하지만 단일 인과에 의해 해로운 결과로 이어진 무책임한 행위(이를테면 날림으로 설치한 조명이 누군가의 머리에 떨어진 경우)에 대해서는 소송을 제기(하고 비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단일 인과와 일반 인과 둘 다 이를 다루는 폭넓은 법적 메커니즘이 있다. - P8788

조금은 알지만 전부는 알지 못하는 현실과의 연결을 궁리하는 태도에 대해 과학은 극단적으로 다른 방법을 제시한다.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것만 다룰 수 있다고 말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확신의 정도가 다양한 것을 다룰 수 있으면 더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태도로 전환하게 해준다. 게다가 확신의 정도에 차이가 있다는 개념을 이해하기만 해도 세상에서 명확한 답을 얻으려 할 때보다 훨씬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증거는 우리가 원하는 절대적 확실성을 보장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 P9394

잠정적 태도를 가지면 자신이 그 순간 품은 믿음에 지나친 애착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 자신의 진술이 매번 옳다는 것에 모든 자존감을 걸지 않음으로써 당신은 자부심과 자신감을 가진 과학자이면서도 "이 이론이 현상을 포착하고 있다고 상당히 확신합니다"라는 말이 이따금 틀릴 여지를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스키에 비유하자면 각각의 명제에 무게를 다르게 싣는 셈이다. 즉, 옳을 확률을 다르게 부여한다.) 사실 목표는 매번 옳음(불가능하다)에 자신의 정체성을 거는 게 아니라 자신이 무언가에 대해 얼마나 확신하는지 얼추 판단하는 능력을 기르는 데 있다. - P95

과학자는 무언가가 참임을 아주아주 확신하더라도, 즉 명백히 확실히 절대적으로 참이라고 말하고 싶더라도, 훈련을 제대로 받았다면 "예, 100퍼센트 옳습니다. 명백히 확실히 절대적으로 참이라고요"라고 말하기를 주저한다. 그보다는 자신의 확신이 (이를테면) 99퍼센트 수준이라고, 심지어 999999퍼센트 수준이라고 말할 것이다. 무언가에 대한 확신이 99.9999퍼센트 수준이라는 말은 "이것이 참이라는 데 목숨을 걸겠어"라는 말과 사실상 같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격이기도 하다. "내가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 절대적 진술에서 한발 물러서는 능력은 확률론적 사고 초능력을 얻는 첫 번째 열쇠다. - P96

0퍼센트에서 100퍼센트까지의 확신 범위는 누구나 세상을 다룰 때 쓸 수 있는 과학 도구 중 하나다. - P97

확률론적 사고의 이점 중에서 과학자들이 자신이 틀렸을 때 체면을 구기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은 미묘하지만 강력하다. 틀리더라도 신용이 깎이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자로서 그가 말한 거의 모든 것에는 어느 정도의 불확실성이 내포되어 있으니 말이다. - P9899

진술의 구체성과 자신이 표출하고자 하는 확신도 사이에서도 반비례 관계가 관찰된다. 상세한 데이터 집합이 없는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명확하고 구체적인 진술의 진실성보다는 막연하고 일반적인 진술의 진실성을 더 확신할 수 있다(진실의 한 가지 버전에 국한되지 않으므로). - P102

솔은 유쾌한 사례도 하나 떠올렸다. 사흘간 열리는 우주학 워크숍에 참석했을 때의 일인데, 과학자들은 확실한 정량적 추정값이 없는 경우에 다양한 결과의 확신도를 어떻게 표현하는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확신도를 묘사하는 표현은 "여기에 목숨을 걸겠다."와 "여기에 집을 걸겠다"부터 "여기에 내 황무지쥐(미국에서 인기 있는 애완용 설치류-옮긴이)를 걸겠다"까지 다양했는데, 심지어 "여기에 당신 황무지쥐를 걸겠다"도 있었다! - P105

이 예들에서 보듯 세 번째 밀레니엄에 전문가가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지적(또는 인식론적) 겸손이라고 불리는 것을 함양해야 한다. 심리학자 마크 리리Mark Leary는 이 특질을 오랫동안 연구했는데, 지적으로 겸손한 사람들이 "사실 주장에 대한 증거의 힘에 더 주목하고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는 이유를 이해하는 것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는 말한다. "개방성과 유연성을 중시하고 불확실성과 모호성을 감내하는 정도는 문화마다 다르다." - P115

다음 그림은 여러 해 동안 학생들에게 보정 문제를 낸 결과다. 학생들이 50퍼센트의 확신도를 보고한다는 것은 사실상 무작위 추측을 한다는 뜻인데, 그때 학생들이 정답을 맞히는 확률은 50퍼센트보다 약간 높다. 이것은 학생들이 자신의 생각보다 많이 안다는 뜻이다. 하지만 정답에 대한 확신도가 커질수록 정확도는 자신의 생각보다 일관되게 낮아진다. 과신을 향한 뚜렷한 추세를 보여주는 ‘고전적‘ 보정 패턴은 수많은 인구집단을 대상으로 실시한 수많은 연구에서 거듭거듭 도출되었다. - P117

과신이 인간 심리의 속성이기는 하지만 보정을 개선할 수 있다. 우리는 불확실한 상황에서의 확신을 꽤 능숙하게 보정할 수 있다. 예측이 필수인 다양한 직종의 확신도 보정을 들여다보면 (이를테면) 기상학자들의 단기 예보가 놀랍도록 훌륭히 보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상 예보관이 이튿날 강수 확률을 80퍼센트로 예측한 경우를 전부 조사하면 실제로 비가 온 경우가 약 80퍼센트다. 그들의 보정은 왜 이렇게 훌륭할까? 관건은 기상학자들이 예측에 대한 즉각적 피드백을 끊임없이 받는다는 것이다. 더욱이 기상학자들의 직업적 명성은 자신의 지식(정확도) 못지않게 메타지식(보정)에도 좌우된다. - P121122

당신의 직종에서 확신도를 보정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알면 당신을 과신으로 시나브로 밀어대는 힘을 발견하고 저항할 수 있을 것이다. - P122

전문가들은 신뢰받을 만큼 확신도를 보정해야 한다. 하지만 정보 가치가 있을 만큼 구체적이어야 하는데, 이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희소식은 자신의 확신도를 정직하고 현실적으로 평가하면 전문성에 대한 신뢰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 P125

전문가의 말을 들을 때는 그들이 자신의 불확실성과 자신이 틀릴 수도 있는 상황을 인정하는지에 주목하라. 우리야 전문가들이 100퍼센트 정확하면 좋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날 리 만무하다. 하지만 우리는 100퍼센트에 가깝게 보정된 전문가를 찾을 수 있고 찾아야 한다. "확고한 의견을 제시할 만큼 잘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하는 전문가는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들이야말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다. 당신이 보기에 그들이 해당 주제에 대해 가장 식견이 높은 사람이라면 그들은 방금 당신에게 이 주제에 대해 연구가 더 필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친 셈이다. 그때까지는 행동에 신중을 기하고 얼마나 많은 것이 밝혀지지 않았는지 감안해 겸손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상책이다. - P126

과학자들은 신호 대 잡음비에 대해 이야기할 때 종종 더 근사한 통계학적 정의를 동원하기도 한다. 하지만 원리는 같다. 당신이 알고 싶은 것은 자신이 가진 신호의 잉어 비해 잡음의 양이 얼마큼인지, 이 비율이 주어졌을 때 잡음에서 신호를 탐지할 가능성이 얼마큼인지다. 이런 이유로 ‘신호 대 잡음비‘는 중요하고 알아두면 요긴한 용어다. - P141

하지만 우선 잡음 속에서 유의미한 패턴을 찾는 필터링 게임을 할 때 맞닥뜨리는 고약한 문제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 바로 우리 뇌가 무작위 잡음에서 패턴을 보고 그 패턴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이제 보겠지만 일상적(이고 장기적인) 의사결정을 위해 온갖 잡음 출처 가운데에서 필요한 신호를 인식하는 능력은 같은 방식으로 속아 넘어가는 자신의 성향을 얼마나 잘 이해하느냐에 달렸다. - P143

무작위 잡음에서 얼마나 자주 패턴이 나타나는지에 대해 뛰어난 직감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자신의 패턴 발견 노력에 늘 의문을 제기하는 법을 익히고, 무엇이 신호인가에 대한 직관이 틀릴 수 있으며 무작위 데이터에서 패턴이 나타나는 빈도와 비교해야 함을 명심하는 것이다. (통계학에는 이런 비교를 할 수 있는 수학 기법이 많다.) 당신이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앞의 생각을 깊이 내면화한다면 큰 도움을 받을 것이다. - P146

그렇다면 데이터를 더 많이 수집할 때의 이점은 가짜 잡음 패턴을 보게 되는 빈도를 더 정확히 예측한 다음, 그 개수를 데이터에서 보이는 실제 패턴 더하기 가짜 패턴의 개수와 비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비교하면 자신이 보는 것이 한낱 잡음일 확률이나 반대로 잡음 속에 있는 진짜 신호일 확률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통계학 기법이 기본적으로 이런 식이다. - P391000000

위의 모든 예에서 과학자들은 잡음이 아니라 신호를 발견했다고 결론 내리기에 충분한 확신을 얻으려면, 자신이 적절한 양의 데이터를 수집했는지 판단해야 한다. 일상생활의 사례들에서도 우리는 진짜 패턴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한낱 무작위가 아닐 가능성을 가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신호를 발견했다고 잠정적으로 주장할 수 있기 위해 가능성이 얼마나 커야 하는지는 어떻게 판단할까? - P161

관습법 전통에서 배심원단에 제시하는 입증 기준은 무고한 사람에게 유죄 평결을 내리지 않는 쪽으로 편향된다. 영국의 법학자 윌리엄 블랙스톤 경Sir William Blackstone은 무고한 사람 한 명을 단죄하는 것보다 범인 열 명을 놓치는 편이 낫다는 명언을 남겼다. 그러므로 대체로 배심원단은 "합리적 의심을 넘어서서" 피고인이 유죄라는 확신이 들지 않는 한 피고인에게 무죄 방면 평결을 내리라고 교육받는다.
어떤 사람들 눈에는 이것이 ‘범죄에 무른‘ 태도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편향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첫째, 형사사건에서는 시민 개인이 검찰이라는 공권력을 정면으로 상대해야 하는데, 검사는 피고인보다 인적•물적 자원이 훨씬 풍부하다. 둘째, 많은 경우(이를테면 범행이 저질러진 것은 알지만 누가 저질렀는지는 모르는 ‘범인 찾기‘ 범죄) 유죄 평결에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바람직하다. 무고한 사람을 단죄하는 것은 곧 진짜 범인을 풀어주는 셈이기 때문이다. - P166167

우리는 거짓양성의 위험과 거짓음성의 위험 사이에 진퇴양난 상충관계가 있음을 보았다. 다시 말하지만 기준 점수를 정하는 것은 정책 결정이며 여기에는 오류의 상대적 비용에 대한 기관 차원의 결정이 반영된다. 이런 결정은 본질적으로 과학적 결정이라기보다는 가치에 대한 정치적 결정이다. - P174

이 시점에서 과학자들은 두 종류의 불확실성을 구분하고 이름을 붙인다. 통계적 불확실성은 당신이 측정한 값을 올바른 값 주위에 무작위로 흩어지게 만드는 잡음원을 가리킨다. 호텔 체중계마다 몸무게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처럼 어떤 값은 더 높고 어떤 값은 더 낮다. 통계적 불확실성만 있을 때는 측정값을 점점 많이 평균할수록 참값에 점점 가까워진다. 이에 반해 계통적 불확실성은 모든 측정값을 한쪽으로 몰아가는 잡음원을 가리킨다. 측정할 때마다 값을 낮게 표시하는 당신의 부정확한 체중계처럼 값은 전부 더 높거나 전부 더 낮다. 계통적 불확실성만 있을 때는 측정을 몇 번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아무리 평균을 내봐야 참값이 아니라 ‘편향된‘ 결과를 얻을 뿐이다. - P182

요점은 계통적 불확실성을 일으킬 수 있는 원인을 알아낸 뒤에는 연구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불확실성의 원인을 알아내고 이 원인 때문에 측정이 결정의 토대로 삼기에 너무 불확실해지지 않도록 각각의 측정을 통제하거나, 균형을 맞추거나, 적절히 실시하는 창의적 방법을 생각해내는 일은 과학자가 받는 훈련에서 막대한 비중을 차지한다. - P190

게다가 어떤 약을 복용해야 하는지, 셰일가스 추출 정책에 찬성표를 던져야 하는지 등에서와 같이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우리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는 과학자들이 자신의 연구에서 계통적 불확실성의 범위를 충분히 탐색했는지 예민하게 점검해야 한다. 반대 견해를 가졌거나 맞수인 과학자들이 계통적 불확실성을 이미 들여다보았다면 더할 나위 없다. 어느 분야의 전문가든 자신이 어떤 과학적 발견을 왜 믿는지 설명하려면 계통적 불확실성에 대한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하며 우리는 답변을 요구해야 한다 - P191

요는 우리 인간이 천성적으로 게으르다는 것이다. 우리 잘못이 아니다.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게으르게 진화했을 것이다. 신기하게도 끝똘히 생각하는 일은 에너지를 많이 쓰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우리는 가파른 언덕을 에돌 수 있으면 굳이 올라가려 하지 않듯, 힘든 생각을 가급적 피하려 한다. 하지만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골똘히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느림보 뇌에는 여러 부담이 가해지는데, 앞에서 보았듯 잡음 속에서 거짓 패턴을 신호로 착각해 스스로를 속일 가능성이 있는 때를 알아차리려면, 또는 중대한 측정을 편향시키는 계통적 불확실성의 잠재적 원인 목록을 짜려면 상당한 정신노동이 필요하다. - P199200

문제에 진득이 매달리지 못하는 이 인간적 속성을 어떻게 해야 하나? 좀처럼 논의되지 않는 과학의 비밀 도구가 여기서 등장한다. 이 도구는 과학 문화가 발명한 단순한 심리적 수단으로 이루어졌는데, 우리는 과학적 낙관주의라고 부를 것이다. 과학적 낙관주의는 하루하루 느끼는 평범한 낙관주의가 아니다. 기본적으로는 ‘할 수 있다‘ 정신이며 당면 문제가 당신에 의해서나 당신과 동료들에 의해 해결 가능하리라는 기대다. 복잡한 문제를 맞닥뜨렸을 때 해법이 손안에 있는 것처럼 접근하면 문제를 풀 가능성이 훨씬 커진다. 기본적으로 과학자들은 문 제를 풀 수 있다고 믿도록 (실제로 푸는 데 걸리는 시간 동안) 스스로를 속이는 방법을 고안한 셈이다. 이 책에서 스스로에게 속아 넘어가는 것을 목표로 삼는 대목은 이곳뿐이다! - P200201

반복적 진전이 충분하지 않고 막무가내식 ‘과학적 낙관주의‘ 추구를 미뤄야 한다고 결론 내리더라도, 이것은 목표의 폐기보다는 일시 중단일 수도 있다. 한데 어우러져야 하는 해법의 여러 조각들이 한꺼번에 준비되지 않았을 때가 있는가 하면, 새로운 보조 기술이 개발될 때까지 문제를 제쳐두어야 하는 때도 있다. 사실 과학의 ‘할 수 있다‘ 정신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문제를 오랫동안 묵혀두었다가 기술이 등장해 해결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끄집어내는 능력이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증명된 시점에도 이런 성격이 있었다. 페르마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수학 분야에서 1980년대에 도출된 결과가 1995년의 증명 가능성을 열어주었으니 말이다.) - P208

과학적 낙관주의는 우리를 계속 나아가게 하고, 이상적으로는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필수 가속페달이다. 물론 문제를 풀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10년마다 조금씩 나아지는 것이 고작이다. 이런 점이 불만스럽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올바른 마음가짐을 가진다면, 반복과 끈기를 통해 목표에 도달하고 있다는 느낌이야말로 삶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쾌락 중 하나다. - P206

페르미 추정은 일차 설명을 이차 설명과 구별하는 데 매우 실용적인 쓰임새가 있다. 숫자를 제시해 논점을 입증하는 세상에서 페르미 추정은 그 숫자가 말이 되는지 확인하는 데 매우 요긴한 기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페르미는 학생들이 이 빠른 추정 방법에 익숙해지면서 ‘할 수 있다‘ 정신을 체득하는 일에도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세상을 이런 식으로 다룰 수 있음을 깨달으면 커다란 자신감이 생기기 때문이다. - P217

방금 제시한 예들에서 페르미 추정을 위해 쓴 세 가지 요긴한 비법을 나열해보겠다.

낯익은 항목으로 추정할 것. 낯설고 접근하기 힘든 양을 낯익고 접근하기 쉬운 양으로 분해한다. (첫 번째 경우는 미국의 차량 대수보다 미국 인구가 낯익으므로 후자를 근거로 전자를 추정했다.)

근사적일 것. 추정값은 정의상 근삿값이지만, ‘충분히 가깝‘기만 하면 대체로 무방하다. 당신이 찾는 답은 위아래로 세 배 이내까지는 괜찮은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당신이 추정하려는 양의 참값이 100이라면 33부터 300까지의 추정값은 대개 적당하다. 이 말은 당신이 추정의 토대로 삼는 낯익은 숫자가 그 이상 정확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자신이 없으면 상한과 하한을 먼저 추정한다. - P219220

우리는 ‘편향되었다‘라는 낱말을 너무 쉽게 내뱉는다. 우리가 상대방을 편향되었다‘라고 공격하는 경우는 단지 그의 관점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일 때가 많다. 다행히도 9장에서 논의했듯 판단에서의 편향은 꽤 객관적으로 정의할 수 있다. 어떤 과정이 무작위 오류를 많이 만들어낼 때는 잡음이 많다고 말하지만, 계통적 오류를 만들어낼 때는 편향되었다라고 말한다는 것을 떠올려보라. 계통적 오류란 정답보다 일관되게 높거나 낮은 오류를 말한다. 그러므로 객관적 기준이나 참값이 있을 때는 상대방의 반응을 그 기준이나 값과 비교해 편향을 확인할 수 있다. 객관적으로 참인 것을 모를 때는 그 방법을 쓸 수 없지만, 편향을 근절하는 다양한 실험적 전략이 연구자들에 의해 개발되어 있다. - P236237

후견은 선견보다 훨씬 수월하다. 심리학자 바루크 피시호프 Baruch Fischhoff는 인간 판단의 일반적 특징을 하나 제시했는데, 결과를 알고 나면 그 결과가 처음부터 명백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겠다. 1970년대 초 피시호프는 확률 판단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이를 위해 가능성이 희박해 보일 수도 있고 다분해 보일 수도 있는 미래 사건들을 선정했다. 때는 닉슨 행정부 시절이었다. 닉슨은 골수 반공산주의자였기에, 피시호프는 가능성이 희박한 사건의 예로 닉슨이 퇴임 전 중국에 외교 방문을 할 가능성을 사람들에게 물었다. 공교롭게도 닉슨은 실제로 1972년 중국을 방문해 외교정책 전문가들조차 놀라게 했다. 피시호프는 빛나는 통찰력을 발휘해 이 사건 뒤 사람들에게 다시 연락을 취해 그들이 닉슨의 중국 방문 사건에 대해 제시한 확률을 기억해보라고 주문했다. 그랬더니 사람들은 자신의 확률을 실제보다 높게 오기억했다. 한마디로 사건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예상했다고,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 P242243

지금껏 밝혀진 편향 탈피 전략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것은 반대로 생각하기(더 복잡한 경우에는 대안을 고려하기)다. 미래의 결과에 대해 확고한 예상이 든다면 잠시 멈추고 정반대 결과가 생길 수 있는 이유를 모조리 생각해보라. 이 연습을 해보면 자신이 내린 선택에 대해 물론 좋은 이유가 있지만 다른 선택에 대해서도 좋은 이유가 있을 수 있었다는 것 또한 알게 된다. 4장에서는 학교의 전국 모의고사 확대를 주제로 한 토론에 대해 서술했는데, 참가자들은 참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는 각각의 진술에 대해 확신도(예: 75퍼센트)를 부여하라는 주문을 받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결과는 이렇게 했더니 참가자들이 자연스럽게 "반대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진술에 대해 확신도가 99퍼센트 미만임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생각하기‘는 과학 수업에서 정식으로 가르치지는 않지만, 실상으로는 대부분의 과학 방법론에 배어 있다. 이를테면 무작위 배정 실험을 설계하는 것은 반대(‘반사실‘) 조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탐구하기 위해서다. - P248

좋은 과학을 기준점으로 삼아 출발하자. 과학이 훌륭히 수행되어 정확한 결과를 내놓는 것은 이상적 상황이다. 당신이 과학 연구 결과에 대한 신문 기사를 읽거나 과학 논문을 읽을 때 실제로 보고 싶어 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좋은 과학이 틀린 결과를 내놓기도 한다. 사실 4장에서 논의한 확신도를 생각해보면 좋은 과학 중에서 어떤 것은 반드시 틀린 결과를 낸다. 좋은 과학자는 당신에게 확신도를 제시해야 하는데, 확신도란 결과가 옳을 확률이다. 확신도야말로 당신이 과학자에게 기대하는 전부다. 하지만 과학자가 그 결과에 대해 95퍼센트의 확신도를 제시한다면, 그들이 최선을 다하더라도 논문 20건 중에서 한 건은 틀릴 수밖에 없다. 이 말은 틀린 결과를 내놓는 좋은 과학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확신도가 95퍼센트라면 논문 중에서 적어도 20분의 1은 그 범주에 속해야 한다. - P250251

앞에서 언급한 랭뮤어의 병적 과학 강연(노벨화학상 수상자 어빙 랭뮤어Irving Langmuir의 1953년 강연)에서는 과학적 결과가 이 수상쩍은 범주에 속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케 하는 실마리의 목록을 제시한다(문구는 살짝 바꿨다).

1. 간신히 탐지되는 원인에 의해 결과가 발생하며, 결과의 크기가 원인의 세기에 대해 대체로 독립적이다.
2. 결과 자체가 간신히 탐지되거나 통계적 유의성이 매우 작다.
3. 대단히 정확하다고 주장한다.
4. 경험과 상반되는 허무맹랑한 이론이 연구에 결부되어 있다.
5. 연구에 비판이 제기되면 임기응변으로 변명한다.
6. 지지자 대 비판자 비율이 초반에 50퍼센트 가까이로 급등했다가 0퍼센트 가까이로 급락한다. - P257

여기서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게 있다. 핵융합에 이르는 경로 중에서 훨씬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새롭고 이례적인 것을 찾으려는 탐구는 과학이 작동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위대한 사례다. 심지어 결과가 재현 가능하지 않거나 실험에 결함이 있더라도 반드시 나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모두가 갈망하는 것은 한발 물러서서 오류를 선제적으로 찾아보는 능력이다. 묻고 더블로 가는 것은 여기서는 미덕이 아니다. 그것은 무언가 심각하게 잘못되어 적신호가 켜질 가능성을 외면하는 노골적 저항이다. - P265

하지만 우리가 살펴본 사례들에는 더 기본적인 문제가 하나 예시되어 있다. 과학 연구를 실제로 수행하든 아니든 모든 사람은 무엇이 참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나름의 믿음에 홀딱 반할 수 있으며 그 믿음이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나머지 모든 것과 아무리 모순되더라도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다("놀랍게도 내가 가장 생산적인 때는 과부하가 걸리고 여러 업무를 한꺼번에 처리할 때야"). 또한 이 믿음이 통하지 않을 때마다 나쁜 핑계를 대며 앞 장에서부터 논의했듯 우리의 믿음과 잘 맞아떨어지는 최적 사례에만 주목한다("금요일에 여러 업무를 한꺼번에 처리하다 실수를 저지른 것은 물론 전날 밤 숙면을 취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확고한 발견으로 이름을 날린 저명 과학자들조차, 훈련을 통해 이런 정신적 고장모드에 저항력이 생겼어야 마땅하건만 두 사례 연구에서 보듯 이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스스로에게 이런 일이 생긴다면, 잠깐 멈춰 ‘기억력을 가진 물’과 ‘상온 핵융합‘에 대해 생각하라. 그러고 나서 한발 물러서서 이렇게 말하라. "여기서 더 회의적인 태도를 취해야겠어." - P271

문제는 이것이다. 신뢰할 수 없는 데이터를 찾아 거부하고, 소프트웨어 버그를 찾아 고치는 행위는 놀랍지 않은 답을 얻게 되는 시점까지 계속되는 경향이 있다. 즉, 당신은 뜻밖의 결과를 얻으면 불량 데이터나 버그를 찾지만 결과가 ‘옳게 보이면‘ 찾지 않는다. 근사해 보이는 결과가 잔류 불량 데이터나 컴퓨터 프로그램의 미발견 버그 때문일 경우에도 말이다. 이런 까닭에 최종 측정과 학술 논문의 결과는 과학자들이 예상한 쪽으로 계통적으로 편향된다. 과거의 물리학 측정이 무작위 잡음에서 예상되는 정도로 오르락내리락하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인 듯하다. 우주 팽창 측정이라는 더 극적인 경우에 결과가 50km/sec/Mpc(메가파섹, 태양계 밖의 천체까지의 거리를 나타내는 단위로, 우리은하와 안드로메다 사이의 거리는 약 0.7메가파섹이다-옮긴이)과 100km/sec/Mpc으로 다르게 나타난 이유는 각 연구진이 어느 데이터를 신뢰할지에 대해 서로 다른 선택을 내렸기 때문일 것이다. - P281

모든 과학자가 이 절차를 접하자마자 쓰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맹분석blind analysis은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좀 걸린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데이터나 컴퓨터 프로그램에 문제가 있는지 알아내는 방법 중 하나는 결과의 성격을 들여다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맹분석에 익숙해지려면 핵심 결과를 도출하지 않은 채 이런 문제를 찾아낼 새로운 방법을 발명해야 한다. 여기에는 어느 정도 재훈련이 필요하며 이따금 창의성이 필요할 때도 있다. 이를테면 핵심 결과를 얻기 위해 대량의 측정 집합을 평균해야 하는 과학 연구를 상상해보라. 간단한 맹분석 방법은 분석을 시작하기 전에 친구에게 모든 자료점(도표나 그래프 따위의 그래픽 좌표에서 하나의 점을 표시하는 정보-옮긴이)에 숫자 하나를 몰래 더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평균값을 알 수 없게 된다. 그런 다음 최종 분석이 끝났다는 판단이 들면 친구가 알려주는 비밀의 수를 빼서 실제 평균값을 구한다. 이렇게 하면 핵심적 최종 답을 섣불리 공개하지 않고도 (숨겨진) 평균과 거리가 먼 자료점을 찾아내어 나쁜 데이터로 간주해 폐기함으로써(그날 검출기가 고장났으려나?) 실험을 디버깅할 수 있다.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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