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식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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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내가 아는 중세(中世)는 이미 어두움이었다. 이 책의 저자도 그런 내 생각과 같았는지 바로 그 시대를 다룬 그의 첫 소설의 제목을 바로 일식으로 정했다. 찬란한 빛의 순간에 갑자기 덮치는 어둠, 일식. 수백년 동안 유럽 대륙의 평화를 지켜주던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신의 이름으로 찾아온 천여년 간의 어둠. 그 어둠 속에서 어느 누가 헤메고 있었을까? 작은 프랑스 산골에도 한 수도사, 니콜라가 있었다. 그는 그 어둠 속에서 보고 말았다. 일식의 그 찬연(燦然)한 어둠 속에서 태어난 남과 여의 일체, 영과 육의 하나됨, 신과 인간의 일치의 상징, 안드로규노스를...... 그 순간, 신의 신실(信實)한 아들인 그 역시 결국은 피에르가 창조한 그 신의 화신에게 경배하고 말았다. 그것은 단지 그 한순간의 실수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 후 그의 일생 전체를 관통하는 또다른 믿음으로 남았을는지도 모른다.
 
 바로 그 안드로규노스의 창조자인 피에르 뒤페, 자신이 신봉하는 믿음의 결정체로써 시대가 부정하는 또다른 신을 스스로 빚어낸 그야말로, 어쩌면 그 시대에 신의 손에서 벗어난 유일한 인간이었을 것이다. 끊임없이 자신을 지탱해 줄 절대자의 존재를 필요로 했던 니콜라는 그런 그의 피조물인 안드로규노스에게 자신의 뒤섞인 혼을 내던진 채 교접하고 말았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그의 마음 속을 오직 니콜라만이 유일신의 품에 안긴 채로 읽어내고 있었다. 오직 황금에의 열망으로 안드로규노스의 손을 잡고 끝을 알 수 없는 불 속으로 스스로 뛰어든 피에르. 그에 비하면 그런 그를 바라보는 니콜라는 신과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손을 갓난 아기처럼 굳게 잡고 비로소 그 이교(異敎)의 어둠에 뭣 모르고 걸어 들어가는 위태위태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질기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자신만의 신학적 가치에 대한 고집스러움과 피에르에게서 받아왔던 철학적인 호의마저도 깡그리 잊은 듯이 그의 이단 재판을 앞두고 서슴없이 떠나는 의외의 냉정함에서 그는 역시 신의 어린양이었다. 그 자신에게 피에르의 변호에 나서야 할 다소의 이유와 책임이 있었음에도 말이다. 배울 점은 너무 많은 이였지만 역시 그는 마녀와 떼기 힘든 사이였다는 달콤한 자기 변호를 빼놓지 않은 것은 오히려 니콜라 자신이 그만큼 피에르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있다는 반증에 다름 아니었다.
 
 확실히 그는 나에게까지 진심을 숨기고 있었다. 안드로규노스의 구석구석을 섬세한 손길로 애무하던 피에르의 모습을 마녀와의 의식(儀式)으로 몰고 가던 그의 깊은 심연 속에 감춰진 것은 다름 아닌 안드로규노스라는 자신만의 신을 창조해버린 피에르에 대한 질투였다. 니콜라는 인정할 수 없었을 게다. 누가 뭐래도 그에게는 하나의 신이었던 안드로규노스가 한낱 인간의 손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그리고 오직 그만이 그 신을 경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 존재는 오직 자기 자신의 것이어야만 했을 게다. 아무도 알아서는 안되었다. 이것은 신에의 죄악이었다. 그렇게 침묵 속에 외쳐대는 질투의 끝에 숨겨진 것은 바로 만인의 유일신(唯一神)이 아니라 니콜라, 그 자신만의 신으로 은밀한 곳에 봉헌된 안드로규노스였다. 그 질투를 참아내고 마냥 우습게만 보였던 기욤이 피에르를 고변할 때까지 기다린 니콜라의 인내심은 굳이 감출 필요도 없었고 말이다. 감추고 싶었던 그의 모든 것은 빛으로써 가려졌다. 태양은 그 모든 추악함을 일식의 어둠으로써 축복하고 신비로움으로 채워주었다. 이면(裏面)에 숨어야만 했던 그 모든 신의 이름으로.
 
 지식도 그 무엇도 아닌 티끌만한 나의 그 무엇으로 풀어낸 일식, 저 뒤의 태양의 광채에 아로새겨진 이 암호를 난 스스로도 비웃을 수 밖에 없다. 사전 한권쯤은 옆에 두고 정성스레 찾아가며 읽었어야 할 책이었지만 이 책과 날 끝없는 거리감에 내던지는 것 같아서 싫었다. 사실 원본은 읽지 않아서 알 수 없으나 참으로 어정쩡한 상태의 글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중요한 어구에는 역주가 있었지만 간간이 나오는 형용사를 놓치기는 아쉽고 찾기는 귀찮았다. 역자의 후기에도 있듯이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는 한글의 위대함 덕에 초라하기만 한, 장중한 의고문(擬古文)이 아닌 단순히 현학적인 천박함을 군데군데 드러낸 채로 남은 것은 아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책 속으로 깊숙이 들어서면 결국에는 불분명한 역할로 묻혀버린 인물들이 혼란스러웠을뿐더러 영(靈) 육(肉)의 일치와 분열의 초석이 다져지는 시대의 중심을 당대 철학의 중심지였던 이탈리아의 니콜라가 아닌 프랑스의 벽촌에서 광신자와 배교자 사이에서만 헤메는 니콜라로 삼은 것도 그 뜻을 좁힌 것만 같아서 서운했다. 사실 이런 데뷔작은 꿈에서도 쓸 수 없는 나이지만 나 역시 그가 드리운 일식의 신비롭기 그지없는 검은 장막을 사랑했기에 하는 말이다. (2000. 4. 6.~10, 2000. 4. 10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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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찰순례 3
최완수 / 대원사 / 199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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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덧 막바지에 이른 이 순례에 아쉬움을 느끼며, 지난 여정도 다시금 되새겨 보았다.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절의 모습 마다마다가 절실한 신앙심의 후광을 입어 깨치지 못한 나그네의 마음에 놓칠 수 없는 가르침을 남겼다. 특히 초기 남선종(南禪宗)의 중심지인 쌍봉사는 쇠락해가던 신라 말기의 사상계를 혁신한 곳이라는 역사적 의의가 요즘같은 변혁기에는 더욱 돋보여서 내 관심을 끌었다. 변혁기는 사상으로써 시작된다. 변혁 후의 새로운 사회에 대한 이론적 배경의 제공을 위한 것이다. 박혁거세 이래로 천년을 버텨온 신라의 말기 역시 그랬다. 문무왕의 통일 후, 중앙귀족세력의 비호를 받으며 성장한 교종(敎宗)이 쇠퇴하고, 나날이 그 세력을 떨치는 지방 호족 세력의 지원을 받으며 급부상한 새로운 종파가 바로 선종(禪宗)이었다. 다시 보면 통일의 태평성대라고 할 수 있는 시절에 교종이 흥성하고 피가 피를 부르는 혼란기에 선종이 흥성하기 시작한 것은 두 종파의 성격과도 뗄 수 없는 연관이 있다. 교종은 말 그대로 경전의 해석과 강독을 중심으로 하는, 지식인 곧 교육을 받은 이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으므로 교화의 폭이 좁았다. 이 좁은 '폭'이야말로 오늘날 교종적인 목소리가 우리 불교 안에서 호소력을 갖지 못하는 이유이다. 이에 비하여 선종은 불립문자의 종지(宗旨)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교종과의 차이가 분명했다. 더구나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는 말로 성불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마음이 중요함을 밝힘으로써 수도의 근본을 잡았다고 말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물론 교종의 수행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문자라는 뚜렷한 기준이 존재하는 교종의 수행방식이 나에게 더 적합하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항상 글이라는 걸 읽으며 행복을 느껴온 나로써는 그 행복의 끝에 있는 깨달음도 역시 글을 통해서 얻고 싶다는 것이 솔직하지만 역시 아직은 깨닫지 못한 생각이기 때문이다. 다만 불교의 궁극적 목적인 깨달음의 성취를 위해서 교종은 '글'이란 수단을 강조했지만 선종은 무엇보다도 깨달음이 내재된 마음만을 유일무이한 수단이자 목표로 내세운 것이다. 지난날 먼저 깨달은 이들을 경전에서 살피고 그로써 자신의 깨달음을 이루려는 교종이 피동적이라면 오직 개인의 피나는 정진에 깨달음의 모든 것을 맡기는 선종은 능동적이었고, 바로 그 개인의 정진을 강조하기 위해 자연 교종이 강조하는 경전을 무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교종과 선종의 대립 이유이자, 숙명이었다. 그래서인지 역대의 고승들이 남긴 일화를 보아도 선종의 고승들은 성품이 더 괴팍한 듯 했다. 바로 경전에 대한, 먼저 깨달은 이에 대한 무시와 선종 자체의 능동성, 적극성이 결합해서 오늘날까지도 우리 같은 속세의 중생들의 입에서도 회자되는 선사들의 기괴한 언행으로 남은 것이 아닐까? 좁은 우리나라에서도 신라 시대 국교였던 불교에 속해 있는 여러 종파 가운데 하나둘에 이렇듯 정치 사정까지 연계될 정도로 한 때 종교는 그들이 늘 말하는 '절대자', '깨달은 자', 그 자체로써 빌린 권위를 제것인양 말하던 때가 있었다. 겨우 몇 장의 지면으로 만나 본 남도의 절 쌍봉사는 이렇듯 그 역사적 의의에 걸맞게, 지나는 나그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았다. 이 또한 명찰을 순례하는 여러 기쁨 중 하나로 남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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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찰순례 2
최완수 / 대원사 / 199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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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는 동안 전 편에서 느낀대로 시문서화, 조각, 건축의 총체라고 할 수 있는 사찰 기행문은 그만한 자질과 경륜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오래된 것이라 해서 맹목적으로 칭찬하지 않고, 새로운 것이라하여 무조건 천박한 취향이라고 비웃지 않는, 시대도, 그 무엇도 아닌 오직 문화재 자체만을 바라보는 감식안은, 다름 아닌 자질과 그 속에서 길러지는 경륜의 뒷받침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니 말이다. 더구나 요즘같이 절마다 앞다투어 새로운 불사를 벌이는 때일수록 필요한 것이 이런 감식안을 소유한 전문가다. 절마다 나름대로 깃들어있는 특성을 무시하고 무조건 크고 화려하게만 세우려는 허욕보다는 미래에 또다른 문화재로 남을 수 있도록 신앙심과 장인정신을 아울러 발휘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 바로 배운 이, 학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그 중추에 서있는 이가 지은이라는 사실을 답사가 더할 수록 체득했음은 물론이다. 그런 지은이와 함께 이번에도 여러 명찰을 참례하였다. 전생과 현생의 무명(無明)으로 말미암아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까지도 모두 구하기 전에는 성불하지 않으리라 서원한 지장보살 도량인 고창 선운사는 나도 자주 찾는 우리 고장의 명찰이라 더욱 유심히 보았다. 지장보살의 거룩한 서원은 그 존상에서부터 정성으로 수놓아졌다. 때문에 세우신 바 서원의 위대함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다. 또한 지장보살 외에도 천장, 인장의 두 보살을 더 모시는 삼장 신앙이 유행하였고 도솔암 내원궁의 주존 보살이 지장보살이 아니라, 천장보살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불교 교리에 정통하신 지은이에게서만 배울 수 있는 고견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눈을 돌려 타 지방의 명찰을 살피니 부처님과 보현보살의 동물인 코끼리, 그 중에서도 왕이라는 상왕산(象王山)의 개심사(開心寺)가 있었다. 더군다나 절이 소재한 고장의 이름도 충남 서산(西山)이었다. 부처님이 서역에서 오셨다고 했으니 이 절은 여러모로 불교와 깊은 인연을 지닌 셈이다. 비록 모든 것이 하나하나 만들어진 것이라해도 이렇게 이름 하나하나가 서로 깊은 인연을 맺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니 말이다. 이렇듯 이름들도 잘 지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좋은 것은 일찍이 유홍준 교수의 책에서도 익히 보았던 수수하지만 사람을 잡아끄는 맛이 있는 경치였다. 절의 이름에 매력을 느끼고 찾아가서 그 경치를 보면 누구나 속세의 먼지에 찌든 마음을 열고 말끔히 씻어낼 테니 말이다. 이렇듯 첫 인상(?)이 좋은 개심사였다. 그래서인지 개심사에서 나는 오히려 직접 가서는 보기가 힘든 진보(珍寶)를 보는 영광을 얻었다. 바로, 무려 10.1m에 이르는 대영산 괘불탱이었다. 그 장엄함도 장엄함이려니와 개인의 자격으로 가서는 보기가 쉽지 않은 이 작품을 지면을 통해서나마 보게 해주신 지은이에 대한 감사와 이러한 신심의 결정체라 할 만한 작품을 이루어낸 오롯한 신앙심에 대한 감탄을 금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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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찰순례 1
최완수 지음 / 대원사 / 199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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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은 언제나 찾아간 이의 마음을 평안하게 감싸주는 곳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탈의 도장을 자주 찾지 못하는 것이 저마다 하루하루를 바쁘게 사는 오늘, 우리의 아쉬움이다. 나 역시 그런 아쉬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차에 시중에 있는 다양한 사찰 순례기 중에서도, 우리나라의 저명한 미술사가 이신 최완수 선생님께서 쓰신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다행히 내 선택은 어긋나지 않았다. 이 책은 단순히 절의 풍광(風光)과 지은이의 감흥만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 절의 창건 및 중창 시의 미술사조와 시대 배경까지 날카롭게 서술하는 데서 전문가의 면모가 확연히 드러났다. 특히 절과 전각들의 얼굴이라고 할 현판(懸板)에 대한 이야기까지도 세세히 기록하셔서 서예 분야에 소견이 얕은 나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이렇듯 이 책은 절이라는, 시(詩) 문(文) 서(書) 화(畵), 조각, 건축 등이 모인 종합 문화재에 대한 지식을 매우 충실하게 소개한 점이 특기할 만 했다. 그러나 한정된 지면에 많은 것을 소개한 탓인지 지은이 개인의 감상은 상당히 축소되었다. 본디 자신의 감정 드러내기를 꺼리는 선비 정신의 발현일까? 여정과 견문에 밀려서 같이 느끼고 싶은 감상의 자리가 줄어든 것이야말로 이 책의 가장 큰 아쉬움이다. 이런 허전함을 안고 떠난 길이었지만 그 여로(旅路)에서 얻은 배움만큼은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많은 가르침을 주었던 곳으로는 조선의 실학 부흥을 위해 힘썼던 정조(正祖)가 비명에 떠난 부친,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위한 원찰(願刹)로 세운 용주사가 있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널리 읽히는 부모은중경의 대부분이 바로 이곳 용주사 판(版)이라는 것도 효의 결정체로써의 이 절의 성가(聲價)를 높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더군다나 이 절의 대웅전에 모셔진 삼계여래탱화가 전에 단원 김홍도 탄신 250주년 기념전에서 감상한 작품이어서 더욱 반가웠으며, 그림에 쓰인 서양화법이 정조의 영도 아래 실학의 물결이 넘실대던 당시 시대상의 훌륭한 반영임을 비로소 알 수 있어서 기뻤다.

 이 곳을 떠나니 우리나라 최대의 비구니 강원이라는 청도 운문사가 있었다. 흔히 '사연 있는 여자' 정도로 생각하는 여승들도 교과 과정부터 심지어는 방학에 이르기까지 일반 학생들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곳에서 무엇보다도 절실하게 느낀 점은 관점의 차이였다. 바로 유홍준 교수가 생각 난 탓이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운문사의 새벽 예불을 절찬한 바 있었는데 이 책에서는 그에 대해서 일절 언급이 없었다. 일순 서운했으나 그 후 생각한 것은 제도권과 비(非) 제도권이라는 두 학자의 근본적인 성향 차이였다. 유 교수는 대게 비 제도권 쪽의 입장에 있었고, 사찰 답사에 있어서도 제도권에서 확립한 정형화된 지식과 풍경보다는 그들이 지나친 유물과 경관을 자신의 축으로 삼았다. 반면 지은이는 제도권, 곧 그동안의 전통에 충실했으며, 그 자신이 바로 새로운 전통이었다. 다르게 생각한다면 유 교수는 그 자신이 이야기했듯이 불교에 관심이 없었으나 지은이는 그에 통달한 이였다. 그래서인지 절을 볼 때도 유 교수는 그 아름다움을 보다 폭넓은 시야로써 찾았고, 지은이는 오직 그 절 자체에서 찾았다. 누가 낫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배우는 이로써는 그 두 가지 모두를 배우고 갖추기 위해서 애쓰며, 배우는 것을 즐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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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5-13 16:37   좋아요 0 | URL
종교를 떠나 사찰은, 왠지 모를 맘의 더께를 덜고 싶을 때 발걸음하고 싶은 곳이죠.
그냥 사찰에 들러 풍경 소리에 귀기울이고 , 스님들의 예불 소리에 숙연해 지고, 불당에서 퍼져오는 은은한 향내에 취해 보고, 그리고 탱화가 주는 흡입력에 잠시 이 세상이 아닌 곳에 와 있다는 느낌을 안고 오는 것만으로도 족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사찰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갖추고 사찰에 들렀을 땐 또 다른 차원의 세계를 만나게 되리라 확신합니다.
불교 사상과 미술에 관심이 있어서인지...님의 리뷰, 더 반갑고 유익하네요. 유홍준 교수의 집필관과 저자의 그것을 비교 분석하신 점..리뷰의 백미같아구요. 잘 읽고 갑니다.

2004-05-13 16:3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