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 : 평균율 클라비어 1권 전곡 (전주곡과 푸가 Vol.1-4) [4CD]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작곡, 존 루이스 (John Lewis) / 유니버설(Universal)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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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음반을 좋아할 수 없다면 클래식을 즐긴다고도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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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건축가 - Talking Architect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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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정기용, 그 이름을 언제 처음 들었더라. 아마 노무현 전 대통령 사저 짓는단 얘기할 때나, 한창 전국에 기적의 도서관 지을 때였던 것 같은데 정확하지 않다. 평소 어린이 책에 관심도 없지 않고 특히 어린이들에게 제대로 된 도서관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했었기에 그 건축 프로젝트 역시 흥미로웠지만 역시나 방송에서 나서는 떠들썩한 일은 별로여서 애써 모른 척 했다. 그러니 그 무렵에 건축가 이름 정도는 들었을 수도, 몰랐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사업이 다소 잠잠해지고 정기용이란 이름을 들었을 때 그가 어린이들만을 위한 도서관을 여러 채 지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했다. 그가 직접 쓴 ‘기적의 도서관’을 샀을 때였다.

 

 그런 그가 죽었다. 지난해 꽃피던 봄 3월 11일이었다. 아깝다는 말로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그가 지은 도서관 때문이다. 책과 아이들을 아울러, 인문학과 인간을 함께 품을 수 있는 건축가라면 앞으로 할 일도, 말도 더 많으리라 생각했다. 그가 ‘기적의 도서관’에서 보여준 것은 단순한 건축물의 진행과정이 아닌, 그곳을 이용할 아이들과 부모,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릴 책에 대한 한 인간의 깊은 애정과 통찰이었기에. 건축가라는 엄연한 자신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아니 오히려 그 자리에 있다는 이유로 바깥의 요소들을 그토록 성실하게 살피고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앞으로 더 많은 것을 보여줬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가 상영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무척이나 궁금했다. 물론 그 한편을 보기 위해 부산영화제까지 가진 못했지만 말이다. 교차상영도 아닌 서울에서 각각 한 곳의 상영관에서 19일 한번, 21일 한번 상영하는 기회만큼은 놓칠 수 없었다. 부랴부랴 도착한 아담한 상영관에는 역시나 관객들이 가득했다. 상영 상황을 보면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 이 건축가를 생각하는 이들이 이만큼은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던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으리라.

 

 100분 정도의 시간에 정기용이란 건축가의 말과 생각, 작품뿐 아니라 당연히 현재 한국의 건축현실을 아우르려다보니 영화의 전개는 다소 급한 인상을 줬다. 반면 그런 만큼 이 영화는 정기용의 한 순간 한 순간을 허투루 낭비하지 않았다. 마치 기꺼이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잘 짜인 강연처럼 정기용 본인의 생각은 물론 그에 대해 들려주는 동료들 역시 자신만이 갖고 있는 정기용에 대한 인상을 유창하면서도 예리하게 짚어냈다. 김봉렬 한예종 교수는 그를 일컬어 “사용하는 인간을 위한 건축에 천착했다”면서도 “이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힘이 필요하지만 다소 낭만성에 치우친 면도 있다”고 말했다. 승효상 역시 “표현하는 언어에 비해 실제 구현된 도면이 아쉬워 ‘형은 그냥 말만 하라’고 한 적이 있다”고 지적했지만 “그의 건축은 단순한 완결성을 추구하기보다 이용자가 책을 읽듯이 접근하는 건축”이라고 말했다. 결국 단순한 상찬을 넘어서 오직 정기용이라는 건축가만이 도달할 수 있는 지평을 보여준 셈이다.

 

 이 영화의 큰 축이 두 가지 있다면, 하나는 한국 공공건축의 ‘공공성’ 문제일 것이고, 나머지는 정기용이 죽음을 얼마 앞두고 열었던 그의 건축전 준비 과정이다. 전체적인 흐름으로 보자면 전자가 영화의 전반부를, 나날이 수척해지는 그가 마지막으로 정성을 기울인 전시회가 나머지를 차지한다. 개인적으로는 평소의 관심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전반부에 좀 더 마음이 쏠렸다. 주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무주 산골의 면사무소에 노인용 목욕탕을 놓고 10여년 만에 그가 직접 이용하는 장면은 담담하면서도 힘이 있었다. 말 그대로 자신의 온 성의를 기울여 이용자를 위한 건축을 하고 그 결과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긍지를 보여줬다. 욕탕에 몸을 담그는 그의 앞에 놓인 통유리의 빛으로 말이다.

 

 바로 이런 자부심이 있는 까닭에 그는 이 공공건축에 대한 사회의 몰상식에 누구보다도 강하게 반발한다. 운동장 둘레의 관중석 위로 등나무꽃이 기적처럼 흐드러진 운동장에 들이댄 우악스런 으리으리한 태양광 집열판에 분노하는 목소리는 이 영화 전체에서 가장 거친(?) 장면일 것이다. 그것을 단순히 자신의 작업에 대한 고집이나 애착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는 그 건물을 설계할 때부터 그 땅에서 사는 이들에게 온전히 ‘바쳤다.’ 그는 자신의 건물을 함부로 다루어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건물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주인들을 안타까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조금만 더 신경 쓰고 아껴준다면 그들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공간, 오직 그곳에 사는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삶의 우아함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공간을 너무도 무신경하게 망가뜨리는 공무원과 사람들이 그를 슬프게 했다. 그네들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 실은 중요한 세부였고, 더없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명분이며 명성이 얼마나 하찮은 장식인지 그는 알고 있었기에. 그리고 그 무신경한 건축 담당 공무원들은 심지어 자신들이 무엇을 모르는 지마저 알지 못해 건축가에게 묻지도 않는다며 거푸 한숨을 토했다. 이 장면은 정기용이 죽는 날까지 계속 그렇게 상처받았으리란 일종의 대유이기도 하다. 이는 그가 불특정 다수의 대중을 향한 건축에 집중한 이상 공무원과 대중 사이에서 피할 수 없는 상처이기도 했다.

 

 그에 비하면 허황된 세계적 랜드마크를 꿈꾼 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다룬 짧지 않은 부분은 표현 방식이 무척 절제됐다. 정기용 주변의 프로젝트 응모자들의 육성을 중심으로 진행하며 건축 장소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을 무시한 건축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지 집요하게 의문을 던졌다. 국제적 명성에 대한 집착, 평당 건축비 수천만원에 이르는 비용의 낭비를 다시금 비판하는 대신 과연 무엇을 위해 그래야만 하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정기용은 이렇게 말한다. “서울시장도, 서울시민도 아닌 건축가 한 명의 만족을 위한 건축이다. 이를 위해 그 큰 돈을 써야하는가”라고. 공공건축은 공공이 우러를 기념비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공공 대중이 저마다 자신의 시간을 담아둘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 아닐까.

 

 항상 자신의 작품으로 인간과 소통하려 했던 사람이기에 그 작품의 처음이자 마지막 이용자인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정기용의 시선은 더욱 곡진하다. 단순한 자의식이 아닌, 자신의 작품이 떠나고 돌아오는 원점이기 때문이다. “일민미술관 건축전이 끝날 때까지는 살아있을 것”이라면서도 “항상 맑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다가오는 죽음을 직시하고 싶다”고 토로한다. 그리고 위엄을 가지고 그 죽음을 맞이하겠다고 말한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작품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그 건물과 함께 늙어가며 그들 자신만이 도달할 수 있는 위엄 있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정기용은 노인들을 위해 면사무소에 목욕탕을 설계했듯, 지방의 아이들을 위해 그들이 책을 즐길 수 있는 도서관을 구상했다. 아이도 어른도 그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두 건물 모두 그들의 삶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홀수, 짝수 날에 번갈아가며 목욕탕을 찾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하루하루 개운함을 느끼며 남은 삶의 거추장스러움을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을 것이다. 자라나는 아이들은 자신들에게만 허락된 독서의 공간에서 스스로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으스대지 않고 드러내는 법을 배운다. 새해에 내려간 정읍 본가 근처의 기적의 도서관에서, 폐관일 알림을 보고 서운한 표정으로 돌아서던 소녀의 뒷모습을 봤다. 나의 소중함을 알게 해주는 공간보다 더 소중한 곳이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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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습부부 최인호 연작 소설 가족 2
최인호 지음 / 샘터사 / 198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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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만 같은 '가족' 시리즈의 둘째 권인 이 책은 제목 때문에 난감했던 일도 많이 있었지만, 지난 날의 추억을 돌아보는 감흥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동안 가족을 오랫동안 잊고 살았기에 이 책을 읽는 동안만큼은 새로운 가족의 일원이 된 듯한 환상에 빠질 수도 있었다. 그 환상 속에서 두 사람의 출발로 하여 잉태된 작가 부부의 딸은 어느덧 사회의 일부로써, 그 최초의 무대인 학교에 들어섰다.  

 워낙 여린 딸인지라 걱정도 많았지만 머지 않아 잘 적응하는 모습에 안심하는 작가의 모습에서 돌아보면 엊그제인듯한 내 초등학교 시절, 부모님의 마음을 얕으나마 헤아릴 수 있었다. 워낙에 미덥잖은 아이인 탓에, 6년의 초등학교 생활 동안 부모님, 특히 어머니는 학교에 무던히도 자주 오셨다. 그런 열성으로 작가 역시 딸의 운동회를 찾았다. 작가는 이 운동회에서 정작 운동회에 참가하는 딸보다도 이 잔치에 더욱 몰입해서 잊고 있던 자신의 지난날을 더듬으며 울고 또 웃었다. 언젠가는 작가의 어린 딸에게도 그와 같은 날이 찾아올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과거도 되고 미래되는 타임머신 같은 관계 역시 가족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이렇듯 서로를 바라보고 자신을 돌아보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역시 '여유'였다. 나에게 역시 가장 절실한 것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빨리빨리'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자인하는 작가는 이 여유를 돌아가신 장리욱 박사님에게서 배웠다. 심지어, '살기 위해 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가끔씩은 마지 못해 먹을 때도 있었던 식사 시간은 박사님께는 살아있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런 박사님의 일생은 여유 있는 순간순간의 연속이었다. 여기서의 여유가 단순히 넉넉한 시간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의 마음가짐에 달려있는 것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그래야만 나날이 스치는 순간이 추억으로 남을 테니 말이다. 

 나는 그러한 추억 중에서도 여행을 제일로 여긴다. 특히 가족 사이의 추억으로는 서로의 협력과 애정이 필요한 여행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지 않을까. 처음 가보는 여행지에서 가족은 처음 만나던 때로 돌아가기도 한다. 나는 이 순간의 여유로움을 즐기게 해주는 내 가족을 사랑한다. 작가 역시 그 때문에 주말마다 산천을 주유했으리라. 나도 떠나고 싶다. 우리 가족, 모두의 마음을 채워 줄 여유를 찾아서......(1997. 12. 4.~9, 1997. 12. 9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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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일기 최인호 연작 소설 가족 1
최인호 지음 / 샘터사 / 198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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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 언제나 서로의 곁에 머무는 것으로써 그 존재의 이유를 삼는, 없으면 허전하고 급기야는 슬퍼지기도 하는, 야릇한 관계의 집합이다. 바로 그 가족이 제목이자 주인공인 이 책은 다름아닌 지은이 자신의 가족 이야기라는 구성이 꽤나 독특하여 읽게 되었다. 나에게 있어서 한 세대 남짓 앞선, 어느덧 쉰줄에 접어든 작가의 가족사는 지금의 여느 가족들과는 다른 정감이 묻어 나와서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한 착각에 빠지게 했따.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작가의 신혼 시절인 70년대부터 잡지 '샘터'에 연재된 소설의 모음이기에 이런 현장감(?)을 살리는 데는 제격인 것이다.  

 요즘 아이들 중에는 안경을 쓴 경우가 많다. 아마도 70년대, 그 시절에는 지금만큼 많지는 않았으리라. 그런 탓인지 남들이 보기에는 단지 귀여울 수만도 있는 이 모습이 정작 그 부모들에게는 무척이나 안쓰럽고 죄스러웠나보다. 유독 자신의 아이에게만 덧씌워진 싸늘한 유리알이 부모의 마음에는 자신들의 무책임을 노려보는 것처럼 느껴졌을 지도 모른다. 그것 역시도 부모이고, 가족이라는 느낌이 들어싿. 하지만 이왕 쓴 안경이라면 언제까지나 안타까워하기보다는 그 새로운 눈으로 남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보아 주기 비는 것 또한 가족 사이의 사랑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렇듯 때로는 숨기고 싶은 세세한 가족사까지도 속시원하게 풀어놓는 작가의 배짱은 가히 수준급(?)이었다, 이 글들은 어느덧 자신들의 지난 날을 비추고 계실 지은이 연배이신 우리 부모님들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정녕 그들을 사랑한다면 그 지난 날을 느낄 수 있어야 하기에 너무도 소중한 글들이었다. 그 옛날의 문학상 수상 기념 시계. '수상 기념'의 신성 불가침 영역을 무너뜨리고 그 영원한 동반자를 데려간 것은 그 시절을 살아갔던 오늘날의 수많은 부모님들의 젊음을 지배했던, 그리고 오늘의 이 풍요로움을 이루어 낸 '돈'이었다. 이 사실이 무엇보다도 나를 서글프게 했다. 이런 끊임없는 희생이 지금 내가 서있는 현실의 바탕이라는 사실은 나를 슬프게 했다. 이제 작가 부부에게는 아이들이 자란다. 가족의 일원으로써 자라날 그들에게 부모는, 가족은 어떤 존재일까? (1997. 11. 29~12. 3, 1997 12. 4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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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공지영 지음 / 김영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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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처음 숙독(熟讀)했던 때는 2002년 겨울, 송광사(松廣寺)의 오도암(悟道庵)에서였다. 여러 가지로 힘들었던 그때로서는 뭔가를 읽는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나마 이 책이 나에게 작은 위안을 주었다고도 할 수 있으리라. 남들에게 버림받았다는 비참함을 느끼기 전에 내가 나 자신을 버리고 싶을 정도로 참담함을 느끼며 어쩔 수 없이 아무데로나 떠날 수밖에 없었던 나에게, 이유야 어찌되었든 당시 내가 머물던 암자와 적이 비슷한 ‘유럽의’ 수도원으로 떠난 저자의 기록은 어딘지 모르게 내 맘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구석이 있었다. 그때로부터 햇수로 2년이 지났다. 이제 또다시 낯선 곳에 서있다. 물론 이 곳은 새로이 정착할 곳이기에 머잖아 더 이상은 이곳에서 떠돌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아직까지는 떠돌고 있다는 느낌이 훨씬 더 강하다. 시간의 흐름을 타고 낯선 길 위에 있는 나에게는 누가 되었든, 어디로 갔든, 나보다 먼저 떠돌아다닌 자의 이야기가 필요했다. 무엇보다 외롭기 때문이다. 떠도는 경험도, 외톨이 생활도 처음은 아니지만, 떠도는 외톨이가 되기는 처음이니까. 그것도 저마다 새로운 시간 위에 서 있다는 동질감으로 함께하고 있는 이 시절에.

 그녀의 여행길은 역시 처음 기대했던 경건함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나 자신에게 꿈꾸었던, 때때로 엿보이는 돌발성과 항상 그 밑에 흐르는 잔잔한 호사스러움, 낭만, 무엇보다 정갈함이 감돌았다. 사실 이 여행은 그녀에게는 포상휴가와 같았다. 18년 동안의 번민과 방황을 끝내고 다시금 신에게 돌아온 그녀로써는 수도원만을 찾아다니는 여정 자체가 그러했으려니와 다른 조건들 역시 그녀의 바람을 거스르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여행의 톤은 시종 밝거나 혹은 진지하다. 때로 슬플 때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과거를 향할 때뿐이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이 여유로움에 취해서 마냥 흘러넘치는 행복의 감탄사나 어설픈 설교를 펼쳐놓지는 않는다. 다만 담담하게 자신의 사건, 생각, 감상을 털어놓는다. 그 목소리 안에는 오랫동안 신의 낙원을 믿지 않고 이 지상에 완벽한 낙원을 이뤄내기 위해서 자신을 전부 바쳐보았던 자의 신산함이 담겨 있다. 솔직히 정작 이제 그녀는 수도원을 찾아다녀야 할 이유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신을 찾기 위해서’만이 목적이라면, 더 이상 그녀는 수도원을 찾을 정도로 절박한 처지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녀에게는 그녀가 이제 찾아낸 신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써야할 일거리가 없고, 때로는 의무적으로라도 돌보아야 할 아이가 있는 ‘일상’에서 벗어난 경건함이 감도는 그 곳이.

 그런 까닭에 그녀가 찾아가는 수도원은 내가 생각하는 기준과는 약간 다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녀가 오직 ‘신을 찾기 위해서’ 이 여행을 나섰다 해도 나와 꼭 같았으리란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그녀는 다양한 수도원을 찾아 돌아다닌다. 웅장한 중세의 성 같은 수도원에서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수사들의 그레고리안 성가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산 위의 커다란 천막 성당에서 온갖 나라로부터 모여든 젊은이들과 함께 기도를 올렸으며, 더없이 아름다운 호반의 수도원에서는 변변한 이유조차 듣지 못하고 문전박대당하기도 했다. 그 덕분에 화려함과 조야함, 온화함과 냉담함의 간극이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또는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설령 신의 세계에 닿아있을지라도, 그 속에 인간이 존재하는 한에는. 그녀는 처음부터 자신이 가야할 정해진 길이라고 느꼈던 이 여정동안, 그녀가 다닌 수도원만큼이나 여러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의 오랜 이야기를 들었다. 그 길 위에서 만난 인간은 그 무엇과도 다를 수 없었으며, 그 무엇이나 역시 인간과 다를 수 없었다.

 누구나 겪는 일이지만 그런 까닭에 우리가 너무 쉽게 아니면 반대로 너무 어렵게 생각한 나머지, 이래저래 아무 생각조차 없이 무작정 시간에 그 해결을 떠넘겨버리거나, 아니면 도덕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상투적이고 심지어는 비인간적으로까지 느껴지는 공허한 말 몇 마디로 넘기고 마는 수많은 일상들이, 그 먼 나라의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작가는 그 말을 하는 이에게 어느 누구보다도 따뜻한 수도원의 역할을 해주었다. 그녀는 그들의 고민에 해결책을 주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그들의 문제가 틀렸다고 지적하지도 않았다. 마치 수도원 안에 계시는 예수님처럼, 단지 그들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이 같음을 알려주었을 뿐이다. ‘너는 나와 같아야 한다.’고 하는 건 폭력이지만, ‘나도 너와 다르지 않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해다. 값싼 동정도 얄팍한 계산도 아닌 말 그대로 네 마음에 대한 나의 이해. 그 이해 속에서는 사실, 어설픈 행동이 무의미하다. ‘이해’란 그의 마음을 안다는 것, 그 마음을 안다면 그 마음을 안다면 그 번민의 어려움이 어디에 있는 지도 알 것이고, 그렇다면 지켜보고 들어줄 뿐이다. 기다림이다. 나의 ‘이해’는 그 번민하는 마음에 대한 것이지, 모든 것이 해결된 그 마음을 향한 것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 내 마음도 그와 같은 번민이 있기에 이해하고 기다릴 수 있기에, 그의 번민이 해결되거나 혹은 그럴 경우에 대한 가정은 불가지의 영역일 뿐이다.

 결국 그와 같은 해결은 어떤 조건도 필요하지 않은 더없이 온전한 신의 영역이다. 하지만 인간에게 만약에라도 그러한 전능함이 부여된다면 우리는 자신과 타인의 번뇌를 모두 흩어버리고 비로소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자아도취에 빠질 것이다. 결국 인간은 번뇌가 있기에 서로를 보다 오롯이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나약함이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그녀에 대한 신의 사랑은 그녀의 말대로 돌아온 탕자에 대한 그것을 방불케 한다. 18년의 기다린 기다림도 부족하셨는지 이런 여행에서의 추억까지 베푸시는 광대한 섭리에는 자신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손길’을 결국은 자랑(?)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가 아닌 누가 보더라도 그렇게 받아들일 만 했다. 그런 사랑을 받은 그녀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나그네 길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에게 이방인으로서의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주고, 그들의 고뇌와 눈물, 평범한 일상을 나누는 모습은 설령 그녀가 신께서 따로이 택하실 만한 자질이 있듯 없든 기꺼이 기다리셨으리라 믿게 했다. 이제는 언젠가 내게 찾아올 유럽의 밤기차를 타고 이국의 산, 들, 강 그리고 도시와 시골을 지나게 될 그날을 새삼 시대하게 된다. 부족하나마 조금씩 더해가려고 애쓰는 나의 따뜻함이 그들을 부르고, 그들과 나는 따뜻한 기억으로 내가 더 따뜻한 인간이 될 수 있을 그 날을 말이다. (2004. 3. 4∼12, 2004. 3. 13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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