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베르트와 나무 -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와 나무 인문학자의 아주 특별한 나무 체험
고규홍 지음 / 휴머니스트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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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말 혹은 음악의 텍스트가 나무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도 음악처럼 언어로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무는 세상의 그 무엇보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p.193

 

 나무가 아니라 슈베르트에 끌려서 읽은 책이었는데, 예상했던 것처럼 책의 중심에는 나무가 뿌리내리고 있었다. 제목에 어느 단어가 앞에 놓여 있었는지는 역시 그리 중요하지 않았던 셈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단지 나무 칼럼니스트인 저자 고규홍이 시각 장애를 가진 피아니스트 김예지에게 나무를 보여 주는 이야기가 아니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자신의 나무를 들려주는 과정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 그리고 슈베르트는 그들이 나무에서 들었던 소리를 한데 엮은 선율을 선물처럼 남겨 준 사람이기도 했다.

 

 책의 흐름은 일종의 역순행적 구성이다. 저자가 김예지와 함께 준비한 시각과 청각이 함께 하는 콘서트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수고가 무색하게도 슈베르트의 즉흥곡 D.899 1번에 맞춰 준비했던 나무 영상은 중간에 노트북 에러와 함께 무대 전면에 거대한 블루 스크린이 뜨는 사고와 함께 막을 내린다. 회사에서 일할 때도, 외부 행사에서 노트북이나 다른 기자재가 문제를 일으켜서 난감해졌던 경우가 있었던 까닭에, 순식간에 그 낭패감을 체험하고 말았다. 더구나 저자로서도 즉흥곡이 연주되는 분초에 맞춰서 영상을 정교하게 진행시키는 작업은 처음이어서, 이미 거듭해 리허설을 하며 준비했음에도 김예지의 연주가 이어지는 중간에 영상은 끊어져 버렸다.

 

 이야기는 바로 그 시점에서 두 사람의 만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직 그들이 어떤 여정을 거쳐서 그 영상이 준비됐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예기치 않은 결말부터 본 덕에, 시각을 잃은 피아니스트가 나무 칼럼니스트와 함께 나무와 가까워지는 이 책의 여정을 보다 가볍게 따라갈 수 있었다. 이 책의 끝에서 시각을 활용할 수 없는 김예지가 고규홍처럼, 시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을 본인이 생각했던 만큼 활용하지 못했던 고규홍이 김예지처럼, 두 사람이 서로의 방식으로 나무를 보는 극적인 결말이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무거운 기대를 놓게끔 이끄는 서두였다. 두 사람의 만남이 어떤 정해진 정답을 위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확실한 암시였던 셈이다.

 

(목련) 꽃봉오리의 솜털을 손가락 끝으로 느끼던 김예지가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한 생애를 마친 열매는 아주 단단해요. 그리고 새로 다음 생애를 시작하려는 꽃봉오리는 말랑말랑하네요. 꽃봉오리 안쪽에는 틈이 많은가 봐요. 새 생명을 탄생시키려면 그런 틈, 여유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p.118

 

 나무를 비키지 않는 장애물로 생각했던 김예지와, 시각 너머에 있는 나무의 의미를 온전히 바라보지 못했던 저자는 이 책이 끝나는 순간까지 서로의 감각을 향해 조금씩 다가간다. 이 책에 담긴 1년간의 만남은 두 사람이 서로의 감각을 받아들일 틈을 찾는 과정과도 비슷했다. 시각을 갖지 못한 김예지는 저자가 관념적으로 추측했던 것 이상으로 청각, 촉각, 후각, 미각과 같은 다른 감각이 대단히 세밀하고 정교했고, 저자는 시각을 지녔지만 그가 김예지에게 건넬 수 있었던 것은 눈으로 본 나무의 형상들이 아니라 그동안 그가 키워왔던 나무에 대한 애정과 관심, 그리고 나무와 함께 살아온 경험들이었다. 서로가 지닌 감각의 차이는 이 책이 시작하기 전에 저자 자신이나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중요하지 않았다. 나무는 항상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까닭에, 함께 다가가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렇게 한 그루의 나무를 만났을 때, 그 나무는 어느 때보다도 풍성한 의미를 담고 서 있었다.

 

시각을 활용하는 데에 서투른 건 이 시대의 흠이 되지만, 다른 감각이 무딘 것은 그리 큰 흠이 아니다. 미각이 둔감하거나 후각이 예민하지 못한 건 그냥 내놓고 자신의 단점이라고 이야기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시각은 그렇지 않다. -p.308

 

 이 책을 거의 다 읽어갔을 때, 잉그리드 헤블러가 연주한 슈베르트의 즉흥곡 D.899, D.935를 들었다. 몇 년 전에 구입했지만 오랫동안 아껴 두었던 음반인데, 지금 듣는 것이 잘 어울릴 듯했다. 마침 저자가 김예지의 연주회를 위해, 각각 네 곡으로 구성된 두 작품의 첫 곡들을 위해 준비한 영상 시나리오를 읽은 후였다. 김예지가 상상할 수 있도록 세밀하게 표현한 글을 보면서, 죽음을 앞둔 슈베르트의 절망과 그 끝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듯했던 희망을 담은 곡의 의미를 선연하게 드러내는 나무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비록 그 영상을 실제로 보지 못했고, 내가 들은 슈베르트는 다른 연주자의 것이었지만, 이 선율 속에서 여러 나무들이 자라고 사라지는 숲에 들어갔다. 보이지 않는 감각을 음악으로 표현한 피아니스트와 나무에 깃들인 선율을 찾으려는 저자와 함께한 덕분에, 감각 사이의 거리를 조금은 좁힐 수 있었던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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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왕국의 성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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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어 갈수록 점점 더 흥미로워진 작품이었다. 그와 함께 내가 이 이야기 자체에는 별반 기대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처음 이 책에 관심를 가졌던 이유는, 일본어 원서의 표지였다. 흰 분필로 그린 유럽 어딘가의 성당이 교실의 칠판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주인공이 이 교실에 앉을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이리라 추측할 수 있었고, 그림의 작가가 칠판에 분필로 섬세하면서도 박력 있게 겨울 왕국의 일러스트를 그린 고등학생으로 화제를 모았던 나카지마 레나라는 사실을 듣고서 작품을 기억하게 됐다. 그저 유행을 따른 표지 컨셉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서로 잘 어울리는 표지와 작품을 적시에 결합시킨 출판사와 편집자의 기민한 감각이 발휘된 결과라고 생각했다.

 

 이 표지는 단순히 학생이 그린 일러스트가 중학교 졸업을 앞둔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야기에 실렸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 나이의 소설 속 인물이 그림에 매혹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작품이었다. 그런 까닭에 사람이 우연히 만난 그림 속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흔한 이야기에, 구체적인 형상과 설득력을 부여해 냈다. 모든 것이 웅장하고 세밀한데도, 어디선가 이 모든 것이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듯한 허망함이 감도는 그림이다. 고등학교 입시를 일찌감치 추천으로 통과하고, 다른 학생들이 명운을 건 것처럼 공부하는 교실에 혼자 무심하게 오가는 오가키 신이라면, 이 그림을 바라볼 여유와 빠져들 이유가 충분했을 것이다.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강한 때일수록 그림 속으로 깊이 들어가게 돼. 기량이 부족한 부분을 마음으로 메우는 거라고 할까.” -p.306

 

 하나다 시립 제3중학교의 3학년인 오가타 신과 시로타 다마미, 그리고 이 수수께끼의 그림 속에서 만난 사사노 이치로(파쿠 씨)가 펼치는 모험이 새롭거나 놀랍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 작품이 흥미로웠던 부분은 그들이 이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배경과 과정이었다. 자신의 평면적이고 현실적인 삶을 나름대로 인식하고 수긍하는 신과 학교와 집 모두에서 배척당하거나 외면당하지만 어느 쪽에서도 약해지지 않는 시로타,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유능한 어시스턴트로서의 삶에 의문을 갖게 된 파쿠 씨가 같은 그림 속에서 만나서 그 속에 갇힌 소녀의 정체를 밝혀 나가고, 과연 그를 구해야 하는지 대립하는 과정은, 그들이 매혹된 그림만큼이나 구체적이다. 현실적인 인물들이 세밀한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셈이다. 이 이야기는 약점만큼이나,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도 명확했다.

 

 그림 속에서 만난 소녀, 아키요시 이온을 둘러싼 사정을 평범하거나 익숙하다고 단정하기는 다소 곤란하다. 하지만 그가 처했던 문제의 무게에 비해서 다소 안이하게 해결했다는 인상이 남는다. 그렇다고 해도 작가가 이온에게 부여한 결말에는 큰 불만이 없다. 오히려 안도했다. 이 그림이 없었다면 서로 무관했을 신, 시로타, 파쿠 씨가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던 모험과 어울리는 매듭이기도 하다. 그림 안과 밖에서 그들이 서로를 도왔다면, 그림 속에 갇힌 이온을 돕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사람을 끌어들이는 그림이라는 기묘한 세계에서 비롯된 기이한 선의가 흔들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서 다행스러웠다. 결국 이 세 사람은 자신들을 만나도록 해 준 그 그림에게 답례를 한 셈이다.

 

 특히 붙임성이 좋은데다가 꿍꿍이속도 없는, 파쿠 씨는 모처럼 만난 어른스러운 인물이기도 했다. 자신보다 어린 신과 시로타의 의견에 착실히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의견을 조리 있게 이야기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가 없었더라면, 이 기이한 그림 속에서의 모험은 더욱 헐거워졌을 것이다. 그는 신과 시로타 두 사람만으로는 해결하기 힘든 그림 속 사건의 규모를 유지하면서도, 이 두 사람이 스스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지키는 훌륭한 조력자였다. 물론 한국과 일본을 막론하고, 이런 성인의 존재 자체가 일종의 비약이라는 지적은 가능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림 실력이 뛰어난 시로타는 파쿠 씨와 교감을 이루는 데 반해서, 항상 그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신의 심리 묘사가 읽을수록 인상적이었다. 분명 이렇게 희귀한 성인을 접한다면 의존하면서도, 경계하게 될 것이다. 시로타의 경우에는 스스로 소중히 여기는 그림에 대한 애정을 이해해 준 파쿠 씨에게 보다 친근함을 느끼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 면에서 신과 시로타를 존중하는 파쿠 씨는 이 두 사람에게 생동감을 불어넣기 위해 빠질 수 없는 요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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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이야기
러셀 셔먼 지음, 김용주 옮김, 변화경 감수 / 이레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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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피아노를 지금도 배우고 있었다면, 이 책을 좀 더 깊이 받아들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피아노를 지금도 배우고 있었다면, 이 책이 이렇게 경이로울 수만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이 책이 지금 내게 이토록 흥미로울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내 이야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일생을 피아노와 함께 할 사람이었다면, 무대 위에서 관객들에게 내 연주를 들려주며 나와 그들의 인생을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게 만들어야 했다면, 이 책의 명징하며 예리한 가르침이 때로는 두렵기조차 했을 것이다. 계속해서 더 나아져야 하고, 그것은 항상 어려우리라는 사실을 자주 되새겼을 테니까. 그래서 이 책의 가르침 덕에 매일매일 조금씩이라도 내 연주가 나아졌을 테지만, 내가 원하는 만큼 향상됐을지는 역시 알 수 없다.

 

 무대 아래서 피아니스트들의 연주에 도취되며 감탄하는 관객의 삶을 기꺼이 수용하고 감사해 하는 까닭에, 이 책의 이야기에도 마찬가지로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이것은 나를 매혹시켰던 소리들이 들려오기까지 연주자 내면의 편린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아니라면 무대 위에서 연주를 들으면서도, 그 연주가 형성되는 과정과 지향하는 방향은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연주자의 내면을 지니고 살 자신은 없지만, 이렇게 엿보며 조금이라도 따라가 보는 것은 관객으로서 당연하고, 또 나쁘지 않다. 그만큼 이 책은 비단 피아노와 그 연주 자체부터 예술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다는 것의 의미까지 폭넓은 사유를 담고 있다. 결국 무대와 객석은 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단순한 진리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상호모순적인 진리의 한가운데 있는 공허일 뿐이다. -p.225

진정한 연주는 아무리 상충적인 변수들이라도 유연하면서도 복잡한 균형을 이루게 한다. 그 결과는 통일성과 다양성의 5050 타협이 아니라 서로의 모든 가치를 흡수하는 것이다. 상반된 요소들의 화해와 조화에 의한 통일성은 편중된 추진력에서 비롯되는 통일성보다 훨씬 더 심오한 것이다. -p.364

 

 피아니스트이자 교수이기도 한 러셀 셔먼은 우리에게 음악과 삶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요소들의 조화와 결합을 강조한다. 그는 분명 간명함을 중시하지만, 동시에 그 간명함이 얼마나 난해한지도 절대로 외면하지 않고 있다. 그저 단순한 진리는 존재하더라도, 의미도 가치도 없다. 어디까지나 모순, 상충되는 변수들이 서로 결합한 결과여야만, 비로소 명쾌하며 단순하다고 말할 수 있다. 단순함에 이르는 복잡한 과정과 미묘한 맥락을 암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경박할 뿐만 아니라, 허황하기까지 한 요언(妖言)일 뿐이다. 충돌하고 모순되는 것들은 결국 절충되고 조화를 이루겠지만, 처음부터 단일하게 구성될 수는 없다. 마치 본래 단순하고 명료한 진리로 존재했던 것처럼 믿고 싶다는 유혹에 굴복한 신도와 같은 청중이 있고, 자신만은 언제나 처음부터 주어진 간단하고 명쾌한 음향을 연주해 낸다고 주장하고 싶어 하는 연주자와 같은 교주가 있다. 셔먼은 그런 허언을 용납하지 않으면서도, 그 밑의 욕망 역시 차분하고 집요하게 지적하고 분해해 낸다. 선생은 학생과 똑같이 굴지 않는 법이다.

 

음악은 거친 현실을 장식하고 기만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환영이다. 그러나 음악이 없으면 메마른 현실은 점점 흐릿해지는, 알맹이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환영적인 순간이 된다. 다행히도 목소리가 잠잠해지면 바람과 물이 소리를 낸다. 그러므로 음악은 어디에나 있으며, 그에 따라 현실이 존속한다(근근히). -p.344

(중략) 하늘에 대고 주먹질을 하면서 화려한 스포츠맨십을 보여주는 승자는 오히려 형식적으로 다뤄진다. 카메라는 짐짓 냉정을 가장하거나 고뇌에 찬 패자의 쓸쓸한 표정을 더 좋아한다. 불행을 즐기는 우리의 취미, 우리가 모욕을 하면서도 우리 자신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우리의 취미는 모든 균형의 기준을 무너뜨렸다. -p.173

 

 하지만 한 시대를 풍미한 음악 교사의 글답게, 다소 구태의연한 구석도 존재한다. 특히 로큰롤과 텔레비전을 비롯한 대중매체에 대한 비판과 반감이 그러하다. 물론 타인의 불행에 탐닉하는 관음증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스포츠 중계의 속성을 지적한 부분처럼 적절한 경우도 존재하지만, 대부분은 현재의 관점에서는 이미 오래 전 지나가 버린 훈계처럼 들린다. 로큰롤은 오늘날의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장르가 아니고, 텔레비전 역시 유일하거나 독자적으로 막강한 대중매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셔먼이 지적했던 파괴적인 음악, 선정적인 매체의 타이틀은 다른 곳에 붙어 있다.

 

 물론 그가 그 당시에 이런 대상을 우려했던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문화와 역사의 흐름을 생각해 본다면, 로큰롤이나 텔레비전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이런 대상들을 비판하더라도 그 변화의 방향을 이른바 클래식이라고 하는 서양 고전 음악으로 되돌릴 수는 없을뿐더러, 그것이 옳지도 않다. 오히려 새로운 음악과 매체를 원하는 시대적 환경을 클래식이 어떻게 수용할 수 있을지 분석해야 했다. 음악이 현실을 속이는 환영이고, 상충적인 변수들을 조화시켜야 하는 것이 연주라면, 시대적 변화의 반영이야말로 음악과 연주의 맥락에 빠질 수 없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음악가는 비굴하게 머리를 숙이지 않고 감상적인 생각에 빠지거나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도록 당당해야 한다. 온갖 슬픔과 고통을 민감하게받아들이지만 여러 가지 기쁨을 나타내는 고상한 표현으로 그것들을 승화시켜야 한다. 음악가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에 찬 기쁨, 인간의 고통과 희망을 표현하는 일을 맡은 것에 대한 침울한 기쁨, 무한한 색깔과 디자인으로 정원을 묘사하는 것에 대한 유쾌한 기쁨. -p.48~49

 

 관객은 작곡가들의 작품과 연주자들의 연주를 원하는 까닭에 객석에 모이지만, 연주자는 무엇 때문에 무대에 서는지 궁금할 때가 종종 있었다. 물론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들을 이끄는 예술적이며 내적인 동기가 궁금했다. 이 책은 음악가로 산다는 것의 의미와 고통, 그리고 가치를 마치 무대에서 연주하듯 다채로운 색채로 들려주었다. 무대 위의 연주자들을 사로잡은 인간의 수많은 감정을 표현해 낼 수 있다는 자부심과 중압감,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받아들였을 때의 쾌감이 그들의 음향처럼 생생했다. 그렇다면 이런 연주들을 듣고서 내 삶에서는 어떤 소리를 낼 수 있을까. 무슨 소리를 내는 것처럼 살고 싶지 않다. 남의 귀를 더럽히지 않으면 충분할 것이다. 관객이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정도면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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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을 터는 단 한 가지 방법 블랙 로맨스 클럽
앨리 카터 지음, 곽미주.김은숙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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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의 시작은 다소 어수선하다. 미술관을 턴다더니 시작은 퍽 대단해 보이는 사립학교이고, 주인공으로 보이는 카타리나() 비숍은 자신이 학교에서 사고를 치지 않았다고 선도 위원회 비슷한 자리에서 항변을 하면서도, 딱히 그 학교에 애착이 있어서 그러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단지 자신의 소행이었다고 인정하기에는, 야밤에 교장의 포르쉐를 교정 분수에 처박아 버린 사건 자체가 허술해 보여서 불편한 듯이 보이기도 한다. 조금만 생각하면 자신을 범인으로 겨냥하려는 속셈이 뻔히 보이는 수작에 아무 의심 없이 놀아나는 학교 구성원들을 한심해 하고 있는 캣을 보고 있으니, 앞으로 이 누명을 벗는 것이 이 이야기의 내용일 것 같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의 대통령에 연방 대법관까지 다녔다는 그 대단한 학교 콜건에 입학하거나 재학하는 과정은 온 데 간 데 없이 그 학교에서 퇴학당하는 데서 이야기가 시작하고 있으니까.

 

 물론 당연히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물론 캣이 학교에서 쫓겨난 이유도 밝혀지지만, 그건 저질러 놓은 발단의 정리일 뿐이다. 거칠게 줄여 본다면, 솜씨 좋고 뿌리 깊은 도둑 집안의 한 사람인 15세의 카타리나() 비숍이 그의 친척, 친구들과 함께 세계 최고의 미술관이라는 헨리에서 5점의 그림을 털기 위해, 캣은 학교에서 나와야만 했다. 심상치 않아 보이는 인물 아르투로 타코네가, 캣의 아버지 바비 비숍이 자신이 소장하던 5점의 걸작 회화를 훔쳤다며, 2주 안에 돌려주지 않으면 보복하겠다는 협박을 하면서 저지를 수밖에 없게 된 사건이다. 도둑이 생업이 되고 나면, 자신이 훔치지 않은 것도 훔친 사람이 되기가 너무나 쉽고, 한술 더 떠서 이미 남이 훔친 걸, 다시 대신 훔쳐서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일까지 생긴다는 역설을 이렇게 가볍게 배우는 것도 전혀 나쁘지 않았다.

 

 캣은 다짜고짜 타코네의 그림을 대신훔쳐 주기 위해 미술관으로 돌진하지 않는다. 캣도 바비도 훔치지 않은 그림을 실제로 타코네에게서 훔친 사람은 누구인지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훔쳤는지, 도난당한 그림은 누가 그린 어떤 그림인지, 그리고 그 그림은 지금 어디에 숨어 있는지까지 알아내기 위해 겨우 2주 동안 라스베이거스에서 바르샤바에 이르는 미국과 유럽의 여러 도시들을 돌아다니는 여정이 사뭇 현란하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듯 대서양 사이의 곳곳을 돌아다니는 전개는, 장르의 성격을 충분히 살리는 작가 나름의 설득력 있는 장치로 보였다. 그렇게 돌아다니는 틈틈이 함께 위대한 일을 이룰, 비슷한 10대의 동료들까지 모아서 계획은 마침내 점점 정교해지고, 실행의 날에 이른다.

 

최고의 거짓말쟁이라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 정직한 사람에게는 사기 칠 수 없다. 그런데도 만약에 친다면......

누구든 후회하게 될 것이다. -p.213

기묘한 일은 겨울의 길목에 일어나기 쉽다. 중간 이상 가는 도둑 누구를 붙들고 물어봐도 사기 치기 제일 좋은 때는 날씨가 변해야 하는데 안 변할 때라고 말해 줄 것이다. 사람들은 운이 좋다고 느낀다. 목표물들은 조심성이 없어진다. 하늘을 보고 저 위 어딘가 눈이 있는데, 아마 대자연이 어떻게 속아 넘어갔나 보다고 믿는다. 점점 더 많은 것을 겪지 않고 슬쩍 피하면서도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캣이 이 이론을 조금이라도 의심하고 있었다면, 헤일과 5번가를 거닐면서 메디슨 스퀘어 공원 주위를 힐긋 둘러보기만 하면 됐다. 태양은 따스했지만 바람은 차가웠고, 아이들은 모자나 스카프 없이 뛰어놀았다. -p.61

 

 도둑들의 이야기답게 사기와 기만에 대한 문장이 많고, 신뢰와 불신의 경계는 없다. 거짓말이 참말 만큼이나 자연스럽게 나오고, 또 그 말이 통하기도 한다. 본격적인 범죄 소설이 아닌 까닭에 알리바이와 인과 관계가 정확하게 조합되지 않더라도, 범죄가 피어날 어렴풋한 조짐과 그래도 넘어서는 안 될 금기는 도리어 명료하게 드러난다. “날씨가 변해야 하는 데 안 변할 때”(p.61) 경계했기에 오히련 이완된 그 마음의 빈틈을 노려 사기를 치기 쉽다는 묘사는 범죄 자체의 사실성과 성패에 집중하는 장르에서는 오히려 어울리지 않을 공산이 크다. 범죄를 일으키는 심리와 그것에 넘어가는 분위기를 적당히 가벼우면서도 깊게 짚어 가는 서술이 이야기의 흐름과 잘 어울려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정직한 사람에게는 사기 칠 수 없다.”(p.213)는 문장은 반대로, 사기꾼은 어떤 인간에게 마음 놓고 사기 칠 수 있는지를 생각하도록 만든다. 자연스럽게 우회해서 자기 자신이나 타인을 기만하는 자들이 결국 사기에 넘어간다는 지적을 한 셈이다. 범죄를 둘러싼 흐름이 사건만큼이나 섬세하게 다뤄질 수 있는 영어덜트(YA)물에 잘 어울리는 작가의 스타일이 인상적이었다.

 

 반대로 캣의 일행이 되찾은 5점의 그림에 숨겨진 사연에 대한 부분은 다소 식상했다. 애초에 이 책의 주 독자층이 아닌 까닭에, 이미 적잖게 접한 주제인 까닭도 있겠지만 그림들이 약탈된 배경에 대한 묘사가 섬세하지 않았을 뿐더러, 캣이 그 작품들을 훔쳐야만 하는 이유와도 매끄럽게 이어지지 못했다. 그저 그 그림들을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방식으로 처리하기 위한 장치로 역사적 사실을 소모한 인상이 들었다. 그저 재치 있고 영민한 10대 도둑들의 이야기 이상으로 보였으면 하는 의도가, 오히려 이야기에 불필요하고 경박한 구석을 남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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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 - 독일 튀링겐 옛 마을로 떠나는 바흐 순례
최정동 지음 / 한길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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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접에서 바흐를 어떻게 생각하나요?”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5~6년 전의 일이다. 평소에 생각했던 대로, “월급쟁이의 모범이라고 대답했었다. 그는 귀족과 교회에 고용됐던 음악가로서, 자신이 정하지 않은 일정 속에서도 규칙적으로 작품들을 지어 냈다. 또한 칸타타, 수난곡과 같은 종교 음악부터 실내악, 관현악을 막론한 세속 음악까지, 그는 누구를 위해 어디서 일해도 고용주들이 원하는 갈래의 선율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목적과 기한을 벗어나지 않고 완수했던 훌륭한 작품들이 오늘날까지 무수히 축적됐고, 바흐 자신뿐만 아니라 바이마르의 빌헬름 에른스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공작, 쾨텐의 레오폴드 대공이나 그의 고용주들까지도 역사에 의미 있게 기록될 수 있었다. 바흐는 자신이 받은 녹에 걸맞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고, 그 결과물은 그를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거장으로 만든 것이다.

 

바흐의 칸타타 작곡 작업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렇다. (1)루터교의 연간 교회력에 맞는 대본을 미리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2)월요일이나 혹은 그전에 작곡을 시작한다. 오선지에 총보를 만드는데 합창, 아리아, 레치타티보, 코랄 순서로 작곡한다. 시간에 쫓기지 않기 위해 힘든 부분을 먼지 작곡한다. (3)필사가들이 파트보 베끼는 작업을 감독한다. 작업은 자기 사무실이나 그 옆 도서관에서 한다. (4)필사된 악보를 교열, 수정하고 연주를 위해 필요한 정보를 기입한다. (5)토요일에 단 한 번 리허설을 한다. 이런 숨 막히는 작업을 통해 바흐는 다섯 개 사이클의 칸타타를 남겼다. 고도의 집중력과 절제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바흐가 위대한 것은 속도전에도 불구하고 작품들의 개성이 뚜렷하고 아름답다는 것이다. -p.405~406

 

 바흐에게 음악은 인생이고, 소명인 동시에 직업이었다. 독일 튀링겐의 소도시 아이제나흐에서 태어나 오어드루프와 뤼네부르크에서 배우고, 아른슈타트, 뮐하우젠, 바이마르, 쾨텐에서 자라서, 라이프치히에서 활짝 피었던 바흐의 삶은 그의 예술이 원숙해지는 과정인 동시에, 그의 고용주와 소속이 바뀌고 그 규모가 점점 더 커지는 단계이기도 했다. 그는 주어진 학교와 일터에서 자신의 실력을 연마했고, 그 후에는 필연적이지만 다행스럽게도 자신의 예술적 역량을 좀 더 발휘할 수 있는 자리로 나아갔다.

 

 아른슈타트에서는 실력이 형편없는 라틴어 학교 학생들에게 합창을, 실력 없는 연주자들에게 기악을 연습시키느라 씨름하던 바흐가, 뮐하우젠에서는 합창 연습은 벗어나서 기악 앙상블의 조련에 집중하게 됐고, 월등히 나은 대우를 받으며 옮긴 바이마르에서는 앞서의 도시와 달리 전문 연주자들과 함께 일했고, 이어진 쾨텐에서는 베를린의 프로이센 궁정에서 옮겨온, 독일 유수의 기악 연주자들과 자신의 작품을 연주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라이프치히의 음악감독이자 토마스칸토르, 그리고 드레스덴 궁정의 카펠마이스터에 이르렀다. 당시에 이미 5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했던 토마스 교회 합창단을 이끌고 라이프치히 시의 네 개 교회 전체의 음악 생활을 책임지는 지위였다. 그리고 만년에는 62세의 적지 않은 나이로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 베를린을 방문해, 당대의 음악 애호가로도 명성이 높았던 프리드리히 대왕을 알현하고, 탁월한 연주를 선보임으로써 독일 각지에 자신의 명성을 전했다.

 

 이 책은 단순한 바흐의 생애를 다룬 에세이나 전기가 아니라, 그가 살거나 다녀갔던 독일의 도시들을 저자가 여행하는 기행문이다. 그 덕분에 바흐의 적지 않은 이직과 이사가 그의 인생뿐만 아니라 음악에서도 중요했다는 사실을 좀 더 명료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분명 바흐는 독일 밖으로 움직인 적이 없는 음악가였지만, 그는 그 독일 안에서 끊임없이 이동하며 자신의 지위를 높이고, 영역은 넓혔다. 그가 남긴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생애 역시 월급쟁이의 모범과도 같았다. 그는 태만하지 않고 성실하게 음악가라는 자신의 직무에 충실했을 뿐만 아니라, 단순히 현재의 위치와 상황에서 정체되지도 않았던 까닭이다. 그 결과 마침내 라이프치히의 토마스칸토르로 선임된 바흐는, 1724~1725년에는 무려 40곡의 칸타타를 새로 작곡할 정도로 경이로운 창조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과 수단을 최대로 활용하며 자신의 음악을 꾸준히 성장시켜 왔기에, 그 경력의 정점에 이르렀을 때에 그 지위에 부끄럽지 않은 걸작들을 지었다는 사실을 그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이해할 수 있었다.

 

바흐는 종교음악을 작곡할 때도 극적인 표현을 자제해야 했다. 그것은 라이프치히 당국의 요구 때문이었다. 전통을 중시하는 관료들은 바흐를 토마스칸토르로 임용할 때 극적이지 않은 음악을 작곡하라고 요구했다. 바흐 이전에 라이프치히에서 오페라가 잠시 유행한 적도 있으나 시 관료들은 이탈리아 오페라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요한수난곡첫 버전의 합창 서곡(주여, 명성이 모든 나라에 드높으신 우리 주여!)은 대단히 드라마틱하다. 그런데 이듬해 발표한 버전에서는 다른 곡으로 대체된다. 나중에 마태수난곡에도 쓰이는 합창곡(오 사람들이여, 그대들의 죄가 얼마나 큰지를 슬퍼하라)이다. 이 곡은 훨씬 덜 자극적인데 개작 과정에 라이프치히 당국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견해가 있다. 결국 바흐는 종교음악에 대한 열망이 크기도 했지만 극음악적musico-dramatic 소질의 발휘가 원초적으로 봉쇄당한 환경에서 일한 셈이다. -p.350

 

 바흐를 월급쟁이라고 불렀던 몇 년 전의 대답을 다시 떠올렸던 것은, 독일의 이곳저곳에서 궁정과 시의회를 상대하며 크고 작게 시달리고, 어떻게든 자신이 주도권을 쥐기 위해 애썼던 그의 삶을 보았기 때문이다. 뤼네부르크의 미하엘 학교를 졸업한 직후에, 튀링겐 장어하우젠 성 야코프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뽑혔으나, 이 도시의 통치자인 작센 바이센펠스 공작이 내려 보낸 낙하산 연주자에게 밀려났고, 아른슈타트에서는 원치 않았던 라틴어 학교 학생들 합창 교육을 떠맡았다. 쾨텐에서는 처음에는 각별했던 대공의 음악에 대한 애정이 식고 지원이 축소되면서 떠날 수밖에 없었다.

 

 라이프치히에 정착한 바흐는 이번에는 이 자유 도시를 다스리는 시의회를 상대해야 했다. ‘요한수난곡의 서곡까지 바꿔야 할 정도였다면, 바흐의 작업에 대한 시의 지향이 명백했고 그 영향력이 무시하기 어려운 수준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가 루터교 신자이면서도 가톨릭 미사곡인 ‘B단조 미사를 작곡해서 라이프치히의 지배자인 작센 선제후에게 헌정한 것은, 라이프치히 시의 간섭에 맞서려는 의도였다. 그럼에도 바흐는 쇠약해진 말년에, 자신이 죽기도 전에 라이프치히 시가 후임 토마스칸토르 오디션을 여는 어처구니없는 사태는 결국 막지 못했다. 그 원인 역시, 그가 의지했던 작센 왕국의 수상이 자신의 개인 음악가를 후임자로 삼도록 시에 요구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선율과 악기를 다루는 예술가인 동시에 음악으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온갖 권력과 부딪히고, 그 권력을 가져야만 했던 직장인이었다.

 

 이 책이 바흐의 삶을 직접 따라가는 여행기였던 덕분에, 오래 전 바흐의 삶뿐만 아니라, 그가 활동했던 장소들의 현재 모습까지 아우를 수 있어서 보다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바흐의 생애를 그가 거쳐 갔던 도시들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책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군데군데 바흐와 다소 벗어난 이야기도 언급됐지만, 지금 그와 관련된 옛 장소들을 찾아가서 떠오르는 자연스러운 상념들로 이해됐다. 바흐의 삶을 일목요연하게 살펴보는 책은 아니지만, 그와 그의 음악이 어떤 길을 따라서 성장해 나갔는지 전체적인 흐름을 생각하도록 도와주었다. 반면에 이 책의 제목은 설득력이 약하다. ‘독일 튀링겐 옛 마을로 떠나는 바흐 순례라는 부제가 붙어 있기는 하지만, 첫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와 사별과 가장 슬픈 음악바이올린과 쳄발로를 위한 소나타’ 1b단조(BWV 1014)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더라도 이 대목이 책 전체를 포괄하는 핵심적인 부분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또한 이 책 전체에서 드러나는 바흐의 삶이 그렇게 비통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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