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기행 - 추방당한 자의 시선
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 돌베개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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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오케스트라를 지휘한다면 어느 슈트라우스라도 만족스럽다.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로 유명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지어 왈츠의 왕으로 불리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를 모두 아름답게 들려 줄 수 있는 지휘자는 카라얀과 그의 선배 격인 클레멘스 크라우스뿐이라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 책에서 “그 수준에 필적하는 연주를 지금 거의 들을 수 없게 된 것을 아쉽게 생각한다.”라는 문장을 보며, 지금도 그의 음반을 들으면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펼쳐지는 경지가 이 시대에는 참으로 도달하기 어려운 높이에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게다가 두 슈트라우스와 같이 성격이 상반되는 작품에서 모두 뛰어난 연주를 해 냈다는 점까지 생각하면, 카라얀이나 클레멘스의 존재는 더욱 특별할 수밖에 없다.


 이 두 지휘자와 작곡가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지금은 사라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라는 출신지 외에도, 오스트리아를 강제적으로 병합한 히틀러의 나치 독일 치하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영달을 누렸다는 사실을 공유한다. 나치의 제3제국에 협력한 동기는 서로 다를지언정, 수많은 소수자가 이산과 절멸의 파국에 처했을 때에 이 세 음악가는 바로 히틀러의 비호 아래서 착실히 직업적 성취를 향유하고, 축적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폭압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던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슈트라우스에게서 찾았던 “예술적 에고이즘”은 카라얀이 그 시대에 자신의 예술을 연마하는 데 기계적으로 매진했던 바탕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슈트라우스는 여전히 서양 고전 음악의 거장으로 대우받았고, 카라얀은 오히려 현대를 대표하는 지휘자로 급성장했다. 그 부자연스러우면서도 태연한 서사에는 그들이 전쟁 속에서 희생당한 소수자들을 외면하고 ‘오직’ 예술에 몰입했다는 배경이 존재했다. 만약 그들이 히틀러의 권력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는 않았다면 당대의 정치·법률적 책임만 면할 뿐이다. 인간과 인간의 존엄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본질적 목적과 가치는 외면하고서 외면적 형식과 기술에만 몰입해서 명성과 업적을 이룩했다는 예술적 책임이야말로 더 크고 무겁다. 다만 카라얀이나 슈트라우스야말로 이런 책임을 회피할 수 없을 만큼 도저한 성취를 보여 주었다는 사실까지 인식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피상·독선적인 비난의 한계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 책의 저자가 잘츠부르크 음악제를 보기 위해 오랫동안 매년 여름마다 여행을 떠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림보다도 더 깊이 감각을 자극하는 음악의 기쁨과 아름다움에 마냥 빠져들기에는 늘 마음이 무겁고 어두워 보이는 그가 꾸준히 이 도시를 찾는 이유가 궁금했었다. 심지어 그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취소했던 음악제의 한 공연이 일품이었다는 전언에 분한 심정이 들 정도로 음악이라는 예술을 아낀다. 개인적인 선호나 호오를 드러내기보다는 어느 시대에나 발생하고, 지속되는 소수자들의 위기와 이산이라는 운명을 근심하는 모습이 익숙했던 그의 또 다른 면모를 저 짧은 소회에서 엿본 듯했다. 그는 누구나 쉽게 도달할 수 없는 음악적 성취를 보았을 때의 기쁨만큼이나 그 순간에만 통찰할 수 있는 인간·시대적 모순이 존재한다는 점을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카라얀이 빚어냈던 화려한 연주와 슈트라우스가 남긴 정교한 선율에 여전히 찬탄하는 것만큼이나 예술의 본질을 외면한 두 거장의 과오를 비판하는 것도, 실상은 가볍고도 쉬운 일이다. 현재의 인류 앞에 남은 걸작들의 과오를 인식해서 반복하지 않고서도, 그것들이 보여 주었던 탁월한 경지를 지속적으로 확장하는 예술의 길을 모색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언제나 끊임없이 이산하는 소수자의 존재와 위기를 외면하지 않도록 오늘날 시민들을 고양시킬 단서를 재구성하려는 시도인 까닭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예술을 외면하거나 부조리한 걸작들만 삭제한다면 무척 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그것이 역사적으로나 심미적으로나 불가능하다는 역설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렇게 특정한 윤리적 방향으로 치달은 예술은 낱낱이 실패했고, 본질과 목표를 외면하거나 부정하고서도 수준과 미감이 탁월한 작품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슈트라우스와 카라얀, 크라우스는 유대인 작가들인 장 아메리나 파울 첼란, 프리모 레비를 나치가 강요했던 참혹한 이산과 자살에서 구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서로 다른 방향의 이 모든 예술가들을 관통해야만 그러한 역사의 반복을 막을 실마리에 다가갈 수 있다. 언제나 이산당한 소수자로서의 심경에 사로잡힌 이 책의 저자에게 매년 여름 한철, 한 순간을 스치는 잘츠부르크의 모든 선율은 힘겨워도 붙잡아야 하는 자문자답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음악을, 예술을 매개로 삼아 디아스포라의 악순환이 끊이지 않는 세계와 그것이 강요하는 근심과 비관을 평소와는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기 위해 애쓴 이 여정은 고단하고도 타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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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학의 세계사 - 중학적 세계를 넘어 일본이 유럽과 열대에서 접속하다
이종찬 지음 / 알마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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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임진왜란을 일으키면서 중국을 정복하고 인도까지 지배하겠다며 꿈을 늘어놓았다는 일화는 이 인물 특유의 과대망상 혹은 전쟁을 일으킨 말년의 병적 증상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례로 자주 등장한다. 어쩌면 그의 나라인 일본보다도 한국에 더 널리 알려진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역사적 원인과는 별개로, 이 전쟁의 핵심적인 원인을 제공한 인물이 얼마나 미치광이 같았는지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까닭이다. 사실상 도요토미의 분별없음을 조롱하는 유용한 수단 정도로 이용된 셈이다. 그 결과 일본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하기까지 국가적으로 의미 있는 준비를 하지 못했던 조선이 마치 상식적인 판단을 했던 것처럼 보이는 효과도 없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언제인가부터는 도요토미라는 인물이 이런 구체적인 망상을 어쩌다가 품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전국 시대 말기와 도쿠가와 막부 시대의 일본인들이 자신들을 둘러싼 이 세계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알고 싶어졌다. 중국을 확고부동한 세계의 중심으로 인식했던 동시대 조선의 대외관이 얼마나 협량했는지는 이미 나름대로 충분히 확인했다고 생각한 까닭이기도 하다. 그에 반해 일본은 자신들이 속한 동양과 서양의 관계를 보다 역동적으로 수용한 듯이 보이는 단서가 적지 않았다.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 일본과 네덜란드의 교역을 담당했던 나가사키(長崎)의 데지마(出島)라는 장소의 존재는 물론이고, 종종 즐겨 보는 NHK의 대하드라마 중에서 일본의 전국 시대를 다루는 작품들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다스렸던 영지의 수도격이었던 아즈치성(安土城)을 언급할 때마다 가톨릭 예수회 선교사며 유럽의 상인들이 모일 정도로 번성했다는 이미지를 활용하는 것도 그 중 하나였다.

 

어릴 때 왜구의 섬나라로 배웠던 일본이 어떻게 거대 강국인 미국이나 러시아와 전쟁을 치를 마음을 먹게 된 것인지, 또한 만주를 비롯하여 열대 동남아시아와 태평양과 인도양으로까지 진출하려는 지리적 상상력을 갖게 된 것인지를 정확하게 인식하려면 난학의 판도라 상자를 열어봐야 한다. -p.9

 

 이 책은 한국인들의 생각보다 더 일찍·멀리·깊이 세계를 인식했던 근세 일본의 대외관을 간명하면서도 유창하게 서술해 냈다. 본문에서 거듭 강조하듯이 공간적으로는 네덜란드에서 출발해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를 거쳐 일본과 동아시아로 향하며, 시간적으로는 16세기인 아즈치모모야마(安土桃山) 시대에서 시작해 도쿠가와 막부를 거쳐 19세기의 메이지 시대에 도달하는 일본 난학의 실질적 형성 과정과 그 영향을 이런 식으로 재구성하기는 쉽지 않다. 일본의 난학이 형성된 시공간적 배경의 크기와 무게를 충분히 인식하면서도 그 방대함에 압도당하지 않고, 그 속에서 주목해야 하는 핵심을 향해 곧바로 다가가는 과감함이 특히 돋보인다. 말할 만하고,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단서가 너무나 많은 주제에서, 반드시 밝혀야 하는 소재들을 선택해서 하나의 관점을 구성하는 과정은 당연하면서도 난해한 까닭이다. 이 책은 가장 기본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기준을 확실하고 탁월하게 만족시켰다.

 

 인도까지 밀고 들어가겠다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희망은, 실현은 불가능해도 상상이 가능한 범주에 속했다. 무엇보다 당시의 일본은 중국과 한국이 속한 동북아시아 밖의 세계, 즉 동남아시아와 그 너머의 인도는 물론 유럽의 국가들까지 점점 더 또렷이 바라보게 되었다. 도요토미의 말은 벼락출세한 권력자의 대책 없는 탐욕인 동시에, 일본의 대외적 시야가 앞으로 꾸준히 확장되리라는 전조이기도 했다. 그렇게 도쿠가와 막부 시대 내내 넓어진 시야가 마침내는 메이지 유신을 지나 제2차 세계 대전의 패망으로 귀결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결국 다시 도요토미의 원점으로 돌아왔다는 생각은 들었다. 이 책에서도 근세 일본의 적극적인 국제 교류를 상징하는 난학의 제국주의적 단서를 지적하고는 있다. 하지만 그 자체가 핵심 논제는 아니다.

 

덴쇼天正소년사절단이 열대 풍토와 질병을 이겨내면서 동남아시아, 인도양, 아프리카, 대서양을 몸소 체험했고, 도쿠가와 막부가 주인선 무역 제도를 통해 열대 동남아시아에 일본인 정착촌을 형성했으며, 바타비아에 본부를 둔 VOC와 데지마에서 문화접변을 이루는 과정을 통해 난학자들은 열대의 을 실증적으로 탐구했다. 조선 실학자들이 연경(현재 북경)을 통해 배우려던 유럽 지리학은 구체적인 이 사상捨象되어버린, 다시 말해 시각적 근대와는 동떨어진 관념적인 지도에 불과했다. -p.257~258

 

 분명한 사실은 한국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그리고 과거의 조선보다 동시대의 일본은 아시아 너머의 세계를 훨씬 명확히 인식하고, 구체적으로 경험했다는 것이다. 특히 저자는 도요토미 시대에 가톨릭을 믿는 다이묘들이 이탈리아 로마의 교황에게 직접 파견했던 4명의 소년들인 덴쇼소년사절단의 지난한 여정과 독특했던 그 속의 경험들을 중국이나 한국과 구별되는 일본의 대외 경험이 시작되는 중요한 사례로 평가한다. 단순히 이례적인 사건이나 여행이 아니라, 동북아시아 바깥에 존재하는 세계, 일본과 상이한 각 지역들의 자연과 문명을 실증적으로 학습하는 계기로 해석한 까닭이다.

 

 이 책은 저자 본인의 저작과 그가 번역한 도쿠가와 막부 시기의 난학자이자 사실상 일본 최초의 네덜란드어 번역서로 유명한 해체신서(解體新書)의 번역자 중 한 사람인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의 자전적 기록인 난학사시(蘭學事始)로 이루어졌다는 점이 특징이다. 도쿠가와 막부 시기에 난학이 성립하고 발전·전파된 과정을 나름대로 소상히 밝힌 겐파쿠의 기록과, 난학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신학문이 아니라 그 이전의 도요토미·도쿠가와 막부 시대부터 지속된 일본과 유럽의 문화 접변이라는 일련의 역사·학문적 흐름 속에서 획득한 성과라는 저자의 해석이 부합하는 까닭에 이렇게 구성이 된 듯하다.

 

 저자의 글은 겐파쿠의 원사료에 담긴 단서를 충실히 활용해 난학의 형성 과정과 영향력의 시공간적 범위를 자신의 시각으로 재구성했다. 저자는 난학을 단편적이거나 일시적인 사건이 아니라 동남아시아(열대 지역)와의 적극적인 교역을 매개로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 세계에 자신들의 개성과 문화를 전파하는 동시에 그들의 지식을 직접 수용했던 상호적이고 지속적인 활동으로 이해한다. 이런 글과 겐파쿠의 자술(自述)이 한 권의 책으로 결합하면서, 겐파쿠는 자신을 비롯한 학자들의 업적으로 난학을 소개했지만 그것이 가능했던 사회·경제적 기반까지 시야가 확장되고 겐파쿠의 기록에 담기거나 빠진 내용들에 대한 분석이 더해짐으로써 전체적으로 난학 자체에 대한 맥락이 더욱 풍성해졌다.

 

다시 말해, 16세기 이후 일본은 유럽의 힘에 눌려 일방적으로 문호를 연 것이 아니라 열대 동남아시아에서의 무역 활동을 통해 유럽의 문물을 선별적으로 수용하며 문화접변을 실현해나갔다. 이런 점에서 페리를 통해 미국이 일본의 문호를 강제로 열었다.”라거나 막부 시대 내내 쇄국정책을 실시했다는 역사적 기술은 네덜란드로 상징되는 유럽-열대 동남아시아-동아시아-데지마로 이루어진 문화접변을 통해 근대적 일본이 형성된 과정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일본은 데지마를 통해 조심스럽고도 주의 깊은 관찰력으로 열대 동남아시아 및 유럽과의 문화접변을 깊고도 넓게 실행했다. -p.151~152

1630년대 막부가 취했던 일련의 쇄국령은 오히려 1716년에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가 처음 사용했다고 알려전 해금海禁 정책(*하해통번지금下海通蕃之禁의 약자로 명나라의 왜구 대책 중 하나로, 해외 도항 무역을 금지한 정책)에 가깝다. 시즈키 다다오志筑忠雄가 러시아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주장하기 위해 만들었던 용어는 1850년이 되어서야 막부의 공식적인 문헌에 포함되었을 정도로 쇄국은 도쿠가와 막부의 공식적인 해외 정책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17~18세기에 일본은 중국 및 조선과 무역 관계를 꾸준히 증가시켜나갔다. 유럽이 중국 및 일본과의 무역에 박차를 가하기는 했지만 유럽이 차지했던 무역의 비중은 동아시아 권역 내부의 그것에 비하면 부수적이고 부차적이었다. -p.182~183

 

 일본이 데지마에서 네덜란드와 교역하면서 난학이 성립됐다는 사실은 비교적 잘 알려졌지만, 동시에 도쿠가와 막부 시대의 일본이 그리스도교 전파를 막기 위해 쇄국 정책을 실시했다는 주장도 일종의 역사적 상식으로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난학이 소수 학자들의 지적 교류 정도로 이해된 데는 쇄국 정책에 대한 통념이 큰 원인을 차지하며, 더 나아가 이런 관점은 도쿠가와 막부를 대체한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 일본의 급격한 국내외적 변화를 극적으로 재구성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만큼 도쿠가와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유신까지 전개되는 과정에서도 구체적인 맥락에서는 선뜻 납득되지 않는 문제들을 만들기도 했다. 국내적으로는 막부 체제 유지를 지지했던 수구 세력의 대표인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가 대외적으로 반발을 무릅쓰고 미국과의 통상·수교를 뜻하는 개항(開港) 정책을 추진하고, 국내적으로는 천황 통치 복구를 주장한 신진 세력이 대외적으로는 기존의 선별적 교류 정책을 지지하더니 이내 표변해서 적극적인 대외 개방을 추진하게 된 일련의 모순과 비약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주장하듯이 일본이 동남아시아에 거점을 형성해 교역 관계를 유지하며 인도네시아를 식민 통치하던 네덜란드로 대표되는 유럽과 깊이 접촉했고, 그런 맥락에서 데지마도 단순히 일본에서 고립·통제된 무역항이 아니라 해외와 교섭하는 일본 국내의 거점으로 활용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문제는 상당 부분 해소된다. 일본은 한국이 속했던 중화적 질서에서 벗어나 꾸준히 동남아시아와 유럽의 변화를 학습해 왔다면, 막부의 상층부에 속하는 후다이 다이묘(譜代大名)들이 그에 관한 정보를 가장 오랫동안 풍부하게 접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반면에 상대적으로 신분이 낮았을 뿐만 아니라 권력과 정보의 중심인 에도(江戸, 도쿄(東京))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 출신인 메이지 유신의 신진 세력은 활동 초기에는 해외의 물정에 어두웠을 것이다. 결국 이이 나오스케가 막부를 수호하는 동시에 대외 개방의 문호를 더욱 확대하기 위해 강압적으로 통치했다는 사실은, 그 이전의 일본이 철저히 소극적이며 폐쇄적인 쇄국 상태였다는 통념에서 벗어나야 보다 정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비록 극적 쾌감은 줄어들겠지만 말이다. 메이지 유신 세력이 겪었던 대외관의 급격한 변화 역시 유사하다. 시모노세키 전쟁(下関戦争)과 사츠에이 전쟁(薩英戦争)만으로 모든 흐름을 설명하는 것은 무리다.

 

 난학은 장기간에 걸쳐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일본의 대외 교류에서 비롯된 문화적 결실인 동시에, 사회적 변화라고 이 책은 이해한다. 무엇보다 중국과 문자(청각) 중심의 질서에서 벗어나 유럽과 열대, 그리고 물질(시각) 중심의 질서를 새롭게 홀로 구축하게 된 계기였음을 강조한다. 특히 난학 자체가 시작된 계기는 다름 아닌 도판 중심의 해부학 서적인 해체신서의 발간이었다는 점에서, 읽고 듣는 과정을 중시했던 유학·경전·청각 중심의 중국과 달리 대상을 직접 보여 주는 박물학(博物學삽화·시각의 역할을 강조하기 시작한 유럽이 일본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는 점까지 분석해 냈다. 스기타 겐파쿠의 해체신서처럼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탈아입구(脱亜入欧) 역시 하루아침에 나오지 않은 셈이다. 또한 이 책은 동남아시아가 속하는 열대 지역과의 교류 및 그곳에서 유입된 새로운 경험과 지식들이 난학을 포함한 일본의 다방면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었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규명했다는 점에서도 인상적이다.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열대 지역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학문들의 교류와 접합을 추구하는 열대학의 연구 방식을 이해하는 데도 유용했다.

 

이날 해부 대상이 된 시체는 50세 정도의 여자로 큰 죄를 지은 사람이었다. 교토 출신으로 별명은 아오차바바靑茶婆였다고 한다. (난학사시)-p.58

 

 지난해와 올해의 교토에서 종종 스친 묘비가 하나 있다. 일부러 찾아간 적은 없었지만 여기저기 가다 보니 공교롭게도 그 방향을 거치고는 했다. 한국의 부도와 형태가 비슷한 일본의 납골묘로 보였는데, 크기가 다른 곳에서 본 것보다 무척이나 거대했을 뿐 아니라, 그 위치도 언덕에 가까운 야산을 끼고 주택과 신사가 모인 조용한 동네여서 느닷없기도 하고 다소나마 위압감도 있었다. 교토 대학 의학부가 시신을 해부했던 사람들을 추모하는 묘지였다. 목적을 생각하면 형식적인 감사를 표하는 정도로 꾸미기 쉬운 장소인데, 그곳의 의미를 무겁게 되새기고자 노력했다는 인상을 자주 받았다. 물론 투박하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겐파쿠가 에도 코츠가하라(, 코즈카하라(小塚原))의 사형장에서 해부 과정을 보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그 시신의 내력을 짧게나마 적어 둔 문장을 읽고서, 다시 그 육중한 묘지를 떠올렸다. 일본의 서양 의학이 시작된 결정적인 계기 중 하나가 비로 저 사람의 시신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그 묘지의 의미도 당연히 깊을 것이다. 기억은 가벼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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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卍).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7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김춘미.이호철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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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연 거장이다. 장면들을 표현해서 작품을 구축하는 내내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시선과 필치는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이토록 확고한 작가여서, 시대를 가로지르고서도 하나같이 번잡한 이야기를 써 냈다. 그는 마치 어느 작가라도 호흡을 놓치지 않고 모든 순간을 치밀하게 그려낼 수 없는 이야기 속으로 작정하고 스스로를 몰아넣은 것만 같았다. 그렇게 애욕과 번민이 들끓어서 작품 밖의 독자까지 휘둘리는 와중에도 오직 작가 본인만 그 세계에 현혹되지 않는다. 다만 누가 자신의 욕망에 어떻게 휘둘리는지, 그들은 어떤 장소에서 어떤 방식이나 수단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지 집요하게 그려낼 뿐이다. 이런 인물, 배경, 사건을 벌여놓고도 용케 그 아수라장에 휘말리지 않는 균형감은 펜을 놓치지 않은 그의 손목에서 비롯됐을까, 아니면 글 위에서 휘청대지 않은 그의 발목에서 나왔을까. 듣는 사람을 모두 웃기고서도 혼자 무표정을 지키는 개그맨을 떠올린다면 너무 경박한 노릇이겠지만, 다니자키가 누구보다 현란한 이야기를 창조하고서도 그 세계에 도취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어쩌면 그 홀로 말이다.

 

(518. 소노코가 미쓰코에게. 봉투 길이 12센티미터, 7.2센티미터 정도. 그림은 가로로 그려져 있다. 사슴 등에 있는 흰 얼룩처럼 진홍색 바탕에 드문드문 은색 점선이 있고, 아래쪽에는 커다란 벚꽃 잎 세 장의 끄트머리가 보인다. 그 위에는 연회석에서 춤추는 무희의 뒷모습을 절반만 그려놓았다. 빨강, 보라, 검정, 은색, 청색의 다섯 가지 색을 아주 짙게 인쇄해서, 그 위에 글씨를 쓰면 알아보기 어렵기 때문에 이름은 뒷면에 쓰여 있다. 편지지는 길이 21센티미터, 13.5센티미터 크기에 2.4센티미터 정도의 하얀 백합꽃이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백합꽃 주변은 연분홍색으로 선염이 되어 있다. 따라서 줄이 그어진 부분은 지면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거기에 4호 활자보다 더 작고 가느다란 글씨로 쓰여 있다.) (())-p.42

 

 「()의 이야기를 여기서 줄일 재주는 없지만, 그게 애초에 가능한 일일지도 의심스럽다. 멀리서 보았다면 그저 빤한 치정극(癡情劇)이었을 텐데, 이렇게나 샅샅이 보았다면 그렇게 말할 수 없고 말해서도 안 된다. 어지럽고 어리석게 뒤엉켜서 더러워 보이는 욕정들을 어떻게든 섬세하게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그 가닥들은 낱낱이 탄력과 광채를 발한다. 다니자키는 비단 여느 이야기에서는 보기 어려운, 그러면서도 충분히 있을 법한 그악스러운 욕망과 파탄을 그려냈다는 점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만 드러나는 인간과 감각의 결을 기어이 찾아내고 보여 줬다는 점에서 대가라는 칭호가 너무도 잘 어울렸다. 무감(無感)해 보이는 남편과 사는 가키우치 소노코가 미혼의 미녀인 도쿠미츠 미쓰코와 정서·육체적으로 깊이 친밀해지면서 주고받았던 서신들의 외양을 묘사하는 대목은 특히 경이로웠다. 사뭇 차분한 어조로 그려내는 그 봉투와 편지지들의 요염한 자태가 그 당시 두 사람이 서로에게 품었던 감정 그 자체인 듯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저 아름다운 서한을 받았을 때의 감정은 따로 말하지 않아도 이미 들렸다. 다니자키도 그 참에 편지지 무늬에 대해서도 하나하나 소개하려 한다. 편지지 무늬가 때로는 편지 내용보다 두 사람의 사랑의 배경으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p.38)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역시 한 발은 슬쩍 빼는 소리다. 영악한 수법이라고 말하기는 누구나 쉬워도 꼭 저 위치에, 저렇듯 유려하게 묘사할 사람은 너무도 희귀하다. 무엇보다 마치 눈앞에 놓인 저 편지 하나가 아름다워서 견딜 수 없다는 듯한 달뜬 호흡은 오직 그만의 것이다. 못내 징그러워도 할 수 없는.

 

야마토 이야기에도 우다 상황께서 헤이주를 불러 어전에 국화를 심었으면 하는데, 좋은 국화 하나를 바치도록 하라˝는 분부를 내렸다고 나와 있다. 우다 상황은 헤이주가 그 지령을 받고서 황감하게 여기며 막 물러나려는 것을 다시 불러 ˝헌상하는 국화에다 노래 하나를 첨해서 들이라. 그러지 않으면 안 받으리로다라고 말하되 헤이주는 더한층 황송해 마지않으며 물러가서, 자기 집 마당에 가득 피어 있던 국화들 가운데서도 가장 멋진 것으로 몇 개를 골라 거기다가 노래 한 수를 붙여 바쳤다. 고킨슈5권의 가을 노래 가운데 닌나 사(仁和寺)에 국회를 바칠 때 노래를 달아 바치라는 어명을 받들어 만들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국화꽃에는 가을 말고도 한창때가 또 있군요

이렇게 색이 변하면서 한층 더 아름다워지니*

*상황이 닌나 사로 옮긴 후 더 번창한다는 의미이다.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p.202~203

 

 메이지 유신 이후 오사카의 상류층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을 그린 ()과 달리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는 먼 옛날 헤이안 시대의 교토 귀족 사회가 배경이다. ()이 인물들 주변의 소재와 장소를 치밀하게 묘사하며 인물과 그들 사이의 감정을 확장한다면, 이 작품은 그 시대의 각종 고문헌들을 풍부하게 인용하며 서사와 교차시킴으로써 작품의 고유한 문양을 직조한다. 이 작품 속의 다이라노 사다부미(平貞文, 헤이주(平中)), 후지와라노 구니츠네(藤原国経) 대납언(大納言), 후지와라노 토키히라(藤原時平, 시헤이(時平)) 좌대신(左大臣), 후지와라노 시게모토(藤原滋幹) 좌근위소장(左近衛少将) 등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일본 고전 문학 속에서 이 작품으로 걸어 나온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먼 과거의, 그것도 소설 속 인물들에게 사실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다만 연기처럼 흐릿하고 희미해지기 쉬운 존재들에게 명확한 윤곽 정도를 부여할 뿐이다. 매끄럽게 짜인 비단 위의 무늬가 아무리 또렷해서 하나하나의 결이 선연히 만져지더라도 섬유의 표면에 굳게 붙들려서 벗어나지 못한다. 애초에 구체적일 수 없는 방식으로 구현된 세계인 셈이다. 그럼에도 바탕과 무늬가 함께 빛나면 이렇게 아름답다.

 

문득 그 건너편을 보니 시냇물가의 깎아지른 언덕 위에 커다란 벚나무 한 그루가 주위로 막 내리는 저녁 그늘을 와락 튕겨내듯이 찬란하게 꽃을 피우고 있었다. ‘보는 이 하나 없이 피고 지는 싶은 산중의라고 읊은 쓰라유키의 옛 노래는 가을 단풍을 읊은 것이었지만 그런 때 그런 골짜기에, 누구 하나도 모르게 봄을 자랑하며 피어 있는 벚꽃 또한 밤의 비단인 것은 틀림없었다.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p.320~321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예술은 형식이다. 형식, 기교, 문체에 의해 미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해설)-p.342

 

 아내보다 늙어 버린 자신의 열등감을 분별없이 해소하려다 도리어 괴멸된 대납언, 타인의 아내를 그악하며 얄팍하게 빼앗고서도 사뭇 교묘하고 능란하게 수작을 부렸다며 자만하기까지 하는 좌대신, 무절제한 욕정과 여성 편력으로 과거의 상대였던 대납언의 아내를 좌대신이 빼앗도록 결정적인 빌미를 바치고서도 아내 쪽은 남편의 눈을 속이고, 남편 쪽은 아내의 눈을 속여서 조금 무리하게 아슬아슬한 위험 지대를 건너서 아무도 모르게 살짝 한두 번 만나는 것이야말로 연애의 진미였다. (중략) 높은 지위나 권세를 이용해 남의 여편네를 강탈하는 식의 폭거는 너무나 야만적인 이야기”(p.249)라면서 마치 남의 일처럼 분노하며 변명하는 헤이주, 아내를 위한다는 망상에 빠졌던 남편인 아버지 탓에 어이없이 어머니를 잃었다는 사실에만 하염없이 몰입하며 자기 연민에서 차마 벗어나지 못하는 시게모토 소장까지 이 작품의 인물들이 저지른 소행부터 당하는 감정까지 그 어디서도 새로운 구석은 찾아내기가 어렵다. 너무도 흔한 남자들의 저마다 아픈 사연이다. 다만 그것들을 가닥가닥 자아내고 서로 엮어서 그 위에는 무늬를 넣고 하나로 펼친 사람이 다니자키였다. 모든 것은 그의 수완 아래서 휘황했다.

 

다이마루 백화점 앞까지 가지 않고 다자에몬바시 거리 남쪽으로 꺾은 지점에서 여기가 가사야마치인데 어디에 댈까요?”라고 운전수가 말하기에, “이 부근에 이즈쓰라는 요릿집이 있나요?” 하고 물었지만 모르더라고요. 그래서 그 부근 사람한테 물어봤더니 거긴 요릿집이 아니라 여관입니다하기에 어디지요?” 하고 물었더니 바로 앞의 골목 안쪽입니다라고 대답하더군요. 그런데 그게 말이죠. 소에몬초(쇼와 시대(1926~1989) 초기까지 오사카에서 최고급 화류계 거리였던 곳)랑 신사이바시 바로 뒤인데도 사람 왕래가 적은 어두운 골목이더라고요. 기생들 집이라든가 작은 요릿집이라든가 여관이 많았는데 모두 일반 주택처럼 조용하고 입구가 좁은 수수한 구조였고요. 가르쳐준 골목에 가보니까 여관 이즈쓰라고 작게 써놓은 등이 달려 있어서, “오우메, 여기서 기다려하고는 저만 들어갔어요. 여관이라고는 하지만 애매하고 수상쩍은 집이 골목 막다른 곳에 있는 것이라 격자문을 열고도 잠시 머뭇거렸어요. (())-p.62

 

 다니자키의 이야기로 접어드는 경로는 분명 어두웠다. 음울하지는 않아도 음습하다고는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희미하고 협소하다.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무엇도 없는 골목길을 따라 한참 걸어 들어가야만 숨김없는 속내를 매끄럽게 풀어내는 공간에 이른다. 그곳에 맘에 드는 인물이라고는 하나도 없을지 모르지만, 어느 이야기라도 하찮지는 않을 것이다. 깊고 그늘진 길 끝에서 아무것도 아닌 듯이 시침을 뚝 따고 앉은 그의 세계인 까닭이다. 기껏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이럴 줄 몰랐다며 도로 나갈 사람을 처음부터 꺼리는 방법으로는 이만한 장치가 드물다. 물론 내키지 않는데도 기어이 들어왔다가 도저히 못 견디겠다며 뛰쳐나가거나, 이제는 도무지 나갈 수 없다고 진상을 부리더라도 둘 다 다니자키의 탓은 아니다. 일단 그 입구를 알아채고, 열어서, 들어온다면 좀처럼 빠져나가기 어려운 욕망들을 만난다. 축축하고 그늘진 자리에서만 보드랍고 반짝이는 이끼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좁고 어둡다는 이유만으로 이 세계를 외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골목들이 깊을수록, 들어갈수록 재미있다는 사실은 이미 교토에서 충분히 배웠다. 이왕이면 짙은 밤에 들어가야 더 흥미진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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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새벽 세시
오지은 지음 / 이봄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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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상 오사카를 떠나서 인천으로 돌아오지만, 그곳을 떠날 때 슬펐던 기억은 없다. 애초에 머문 적 없는 도시였기 때문이다. 그저 교토를 가기 위해 거쳐야만 한다는 의미에서, 나에게 오사카는 인천과 유사한 장소다. 인천에 도착했을 때 기분이 바닥을 치는 것은 오사카를 떠났기 때문이 아니다. 항상 오사카에 도착했을 때부터 충분히 저조한 상태다. 이미 교토를 떠나왔고, 다시 돌아가려면 시간이 꽤 걸릴 테니까. 내가 원해서 만든 패턴이어서 앞으로 변하지 않겠지만 익숙해질지는 잘 모르겠다. 가서 살지 못한다면 이럴 수밖에 없겠지.

 

나는 시간을 갖기로 결심했다. 사치스러운 결정이지만 절박한 마음에서였다, 지금 이 생각, 이 상황을 그냥 흘려버리면, 많은 것을 포기한 어른이 되어버릴 것 같아 두려웠다. 방향 없이 그저 어슬렁거리고, 변명만 가득한 사람이 되어버릴까 봐 무서웠다.

 

짐을 싸서 늦겨울의 교토로 떠났다. 조용하고 쓸쓸한 곳에 가고 싶었다. 옛것이 보고 싶었다. 싸락눈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결혼하고 한 달이 지난 때였다. -p.16

 

 역시 교토로 떠난 이야기가 실린 까닭에 이 책을 읽었다. 지금 이 상황을 놓칠 수 없어서 그곳으로 떠났다는 대목에서 어쩔 수 없이 작년에 교토에서 보낸 80일이 떠올랐다. 재작년 말, 작년 초의 나는 이 책의 저자처럼 다급하거나 우려스러운 마음은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결정적인 순간에 그저 태평했을 뿐이다. 용케 적절한 결정을 내렸을지는 몰라도, 운이 좋아서 제때 제자리를 찾아갔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했다. 누구도 붙잡지 않는데도 지난 해 초봄에 떠나지 않고 그대로 머물렀다면, 올해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는 변명만 남았겠지.

 

 다행히 제때 떠난 덕분에, 돌아온 후로는 많은 문제들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문제의 원인이었던 셈이다. 떠나서 바라보니 그 자리에서는 당연하게만 생각했던 많은 상황이 더 이상 해결할 수 없고, 해결해서도 안 되는 문제들이 된 후였다. 그대로 서울에 머물며 어느새 풀리지 않게 묶여 버린 매듭에 얽혀 있었다면, 얼마나 절박한 지경에 빠졌는지도 모른 채로 허덕였을 것이다.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던 것은 파탄이 닥치기 바로 직전이었던 까닭이다.

 

(호텔 매니저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한참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찾았다, 하고 작게 혼잣말을 하고는 열쇠를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이 방에는 멋진 책상이 있어요.”

(중략) 책상은 오래된 원목이었다. 매니저가 강조할 만했다. 이 책상을 리폼한 디자이너가 여기 있다면 어디서 발견했는지, 어떤 식으로 리폼했는지,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한참을 떠들 수 있을 것 같은 가구였다. 시간이 보이는 물건이 있는 덕에 방이 살풍경해 보이지 않았다.

(중략) 원래 기숙사였던 건물을 호텔로 리모델링했다는 글을 본 기억이 났다. 창문 옆에 있는 커다랗고 낡은 히터가 유일한 흔적이었다. 살면서 점점 기대 이상의 순간을 만나기 힘들어지는데 여기는 기대보다 좋은 방이다. 운이 좋다. -p.21~22

 

 절박한 마음이 조용하고 쓸쓸하며 예스러운 도시를 떠올렸다는 점만으로도 이 책에 호감을 가질 이유는 충분했다. 게다가 그가 바라본 교토는 내가 겪으며 아꼈던 정경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더 기꺼웠다. 그가 잠시 깃들었던 동네와 골목이 내게도 익숙하며 각별한 곳이라는 사실은 마치 행운처럼 여겨졌다. 교토 역에서 남쪽으로, 마냥 멀다고 말하기에는 조금 가까운 거리에 있는 그 호텔에 두 번 묵었다. 처음으로 혼자 떠났던 두 번째 교토 여행에서 뭣 모르고 머물렀던 이 곳이 퍽 맘에 들어서, 그 후에도 한 번 더 들렀다. 앞으로도 자주 찾고 싶지만 이제는 무척 인기가 높아서 쉽지 않을 듯하다. 그래도 어떻게든 찾아야지. 그게 내 성의니까.

 

 읽자마자 근처에 이온 몰이 있는저 호텔이 어디인지 확신할 정도라면, 내가 교토와 아주 조금은 친해졌다고 말해도 괜찮을까? 책을 읽는 동안, 교토에서 머물렀던 경험을 다룬 글을 읽을 때는 저자보다도 그가 걸었던 거리들을 훨씬 더 깊이 생각했다. 트레이드 마크였던 긴 머리를 교토의 미용실에서 선뜻 자를 때는, 두 달 넘게 머물면서도 도무지 시원치 않은 일본어로는 뭐라 말하고 싶지 않아서 고스란히 머리를 길러서 돌아온 기억이 다시 떠올라 버렸다.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역시 가장 한심했던 흔적.

 

그리워하던 것 그대로였는데 실망하게 되는 이 얄팍함은 무엇일까. -45 


 저자는 교토에 다녀와서도 자신은 크게 나아지거나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이 책을 읽어 나갈수록 그는 점점 더 나아지는 듯이 보인다. 교토에 들어갔을 무렵의 그가 그만큼 자기 연민과 자기 비하의 감미로운 순환 논리에 탐닉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처음부터 스스로의 기대가 얼마나 얄팍했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그리워했던 팬케이크가 기대한 그대로인데도 실망하는 자신이 이상한지 되묻는, 결국 팬케이크를 먹기 전의 자신도, 먹은 후에 실망한 자신도, 팬케이크도 모두 잘못이 없다고 변명하듯 부연하는 모습을 보면 너무도 전형적이다.

 

 실망할 가능성은 외면하고 기대했다면 결국 실망하는 것이 당연하다. 본인이 무엇을 기대하는지도 모른 채로 일방적으로 떠맡긴 그런 것을 충족시켜 주는 상대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대하는 내용을 꾹꾹 눌러 담을 시간에, 그것들이 그렇게나 요구할 가치는 있는지도 상상할 필요가 있다. 기대의 속을 온전히 자신의 희망으로만 꽉꽉 채우고서는, 이렇게 소중한 마음이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서글퍼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이제 꽤 많이 지겹다. 분명히 하루 이틀 그렇게 살지 않았을 텐데도 나아지지 않아서 더욱더 그렇다.

 

같은 교토라고 해도 꽃이 피는 시기는 다 다르다. 꽃놀이를 좋아하는 국민성과 정원으로는 한가락하는 절들이 가득한 교토의 특성 덕분에 개화시기 지도라는 것이 있을 정도다. 어디는 일찍 피어서 좋고, 어디는 늦게 피어서 좋다. -87~88

그곳에 있는 나무는 위치가 응달이라 그런지 다른 나무보다 꽃을 틔우는 것이 느렸다. 사람도 별로 없었다. 작은 꽃봉오리들이 키 작은 나뭇가지에 맺혀 있었다. 참 예뻤다. 활짝 핀 꽃보다 더 예뻐 보였다. 저 작은 몸에 어마어마한 힘이 모여 있겠구나. 앞으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고, 떨어질 힘. 그리고 그것을 반복할 힘. 그 옹골찬 모습을 나는 한참 바라보았다. -88~89

 

 지난 주 일요일에 교토-나라에서 돌아왔다. 꼭 나라에서 보고 싶은 전시회가 열린 까닭에 일요일에서 일요일까지 78일을 보냈다. 그동안은 월요일 출근 탓에 주로 토요일에 귀국하는 일정이었는데, 이렇게 다녀오니 역시 딱 예상했던 만큼 한 주 동안 피곤했다. 은근히 신경은 쓰이는데, 굳이 토요일에 돌아오느니 일요일까지 채울 수는 있을 것도 같고 아리송했다. 어쩌면 이 예상을 확인하는 것도 썩 내키지 않아서 여태 토요일에 돌아왔을지 모르겠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서 쓸모는 없다.

 

 4월 둘째 주의 교토는 이미 벚꽃이 절반 훨씬 넘게 지고 떠난 후였다. 작년에는 예년보다 추워서 4월 셋째 주는 되고서야 꽃이 만발했는데, 올해는 예년보다 더워서 첫째 주에 이미 꽃이 거의 피고 져 버린 탓이었다. 이래서야 예년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지 싶었지만, 작년에 겪었듯이 벚꽃이 그렇게나 지고서도 교토는 여전히 봄이었다. 애인과 남은 벚꽃이나마 보아서 기뻤고, 덕분에 올해의 첫 등꽃 향기를 벌써 함께 맡았다. 올해의 벚꽃을 교토에서 만났다고 하기에는 다소 허전했지만, 내년에는 못 볼지도 모를 교토의 등꽃이 벌써 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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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교토, 판타스틱 호루모
마키메 마나부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꼭 작년 이맘때 교토에서 80일을 머물렀다. 바꿔 말하면 많지 않은 리뷰를 쓸 때마다 그 이야기를 한 지도 거의 1년이 됐다는 뜻이다. 80일 중에서 40일을 햐쿠만벤(百万遍) 교차로 어귀의 한 방에서 지냈다. 아침마다 어딘지 신나 보이는 대학생들이 바쁘게 오가는 거리였다. 당연하다. 교토 대학이 있는 동네였으니까. 학교 근처여서 싸고 양 많으며 무엇보다 맛이 좋은 밥집도 몇 있었고, 교토에서 가장 아끼는 장소인 철학의 길도 졸 듯이 걷다 보면 어느새 닿을 거리여서 참 좋았다. 골목 곳곳에서 학생들이 나와 저마다의 학교로 흩어지는 이 도시의 아침이 얼마나 활기 넘치는지 가르쳐 준 곳이기도 했다. 관광객 없이 주민만으로 번성하고서야 비로소 볼 만한 매력이 생긴다.

 

 그렇게 지난 해 봄의 교토에서 무수히 스쳤던 대학생 중 누군가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이 소설을 읽었다. 그 중 누군가는 호소카와 다마미처럼 주머니 사정이 신통치 않아서 휴대폰 요금이 연체 중이었고, 다른 누군가는 구스노키 후미처럼 아르바이트하는 식당에서 갑자기 홀 전체를 지휘해도 매니저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을 보였을지 모른다. 내가 매일 시간을 길에 흘리듯이 헤매고 다니기 훨씬 이전에, 모짱 같은 학생이 이미 교토 곳곳의 골목을 훨씬 이전에 마치 핥아 먹듯이 돌아다녔다. 당연히 내가 머물던 때에도 잠시 생각하다가 택하지 않았던 반대쪽 골목에는, 신기하다는 듯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거나 지도를 보며 걷는 신입생이 있었을 듯하다.

 

모짱은 산조, 시조, 가와라마치 외곽 지리에 이상할 만큼 밝았다. 모짱이 열렬한 골목 마니아였기 때문이다. 종횡무진으로 얽히고설킨 갈림길들을 지나다가 낯선 골목을 발견하면 모짱은 망설이지 않고 발을 들여놓았다. 내가 잘 따라오는지 살피지도 않고 ˝이쪽이야, 이쪽˝ 하며 등을 구부리고 정신없이 걸어갔다. 이렇게 골목을 지날 때 전혀 모르는 동네가 나오지는 않을까, 상상하는 순간이 못 견디게 즐거운 모양이었다.

실제로 좁은 골목 끝에 난데없이 음식점 문살문이 나타나거나 더 안쪽으로 또 골목이 이어지거나 지장보살 사당이 조용히 서서 기다리는 등 교토의 골목들은 신비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럴 때 나(아베)는 모짱이 품는 기대와는 정반대로 이대로 계속 가다가 원래 장소로 돌아가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이 더 컸다. 아마 그런 불안마저도 모짱에게는 흥분의 소재일 것이다. -p.162~163

 

 교토는 스쳐 지나가는 뜨내기의 여행지이기 전에, 주민들의 거주지이고 학생들의 체류지다. 동시에 살고 머물다 떠나는 사람들의 시간과 경험이 무척 오랫동안 쌓인 퇴적지다. 그런 까닭에 교토 내 4개 대학교의 동아리 학생들이 각자 귀신들을 부려 승패를 겨룬다는 설명을 들어도 납득이 가지 않을 호루모’(오래 전에 본 전작 가모가와 호루모가 이 난제에서는 유용했다.) 경기와 이 단편들 속 인물들이 어떻게든 엮이는 모습이 미심쩍지 않았다. 교토의 거리와 골목 곳곳에서 헤이안(平安)에서 헤이세이(平成)에 이르는 기나긴 시간이 실은 아주 살짝 벌어진 틈새일 뿐이라고 생각하지 않느냐고 사뭇 태연스레 묻는 듯한 풍경을 자주 보았다. 이 책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고개를 끄덕였을 때, 교토가 들려 줄 법한 이야기를 모아 두었다

 

 교토의 과거와 현재가 완전히 같을 수는 없어도 그렇다고 여느 도시처럼 판이하게 다르지도 않은 까닭에 호루모라는 기상천외한 유희가 이야기 속 인물들의 일상에 제법 그럴싸하게 스몄겠지만, 반대로 호루모야말로 교토의 시간들이 얼마나 절묘하게 맞물렸는지 보여 준다고 말할 수도 있다. 오랜 우정보다 새 연정을 택하려는 친구들 사이의 다툼, 고등학생 화자가 아르바이트 다니는 식당의 과묵하고 민활한 새 아르바이트 동료가 물어도 알려 주지 않을 듯한 대학교 동아리 활동, 교토의 운전면허 학원이나 도쿄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만나는 다른 대학교 출신 지인과의 관계 속 호루모는 타인에게 말하기는 퍽 곤혹스러워도, 본인에게는 대단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여가처럼 보인다. 그저 교토의 가장 예스럽고 낡은 흔적일 뿐이다.

 

 이미 절판된 책의 표지는 언뜻 보면 아기자기하거나 부산스럽겠지만, 잘 보면 제법 착실히 압축한 교토 지도 일러스트다. 곳곳의 지명을 손 글씨풍의 서체에 한자로 적어서 이게 뭐고 또 어딘지 오랫동안 와 닿지 않았다. 표지를 넘기면 나오는 면지는 같은 그림 지도를 한글로 옮긴 것이지만, 예전에 봤더라도 딱히 느낌이 다르지 않았을 듯하다. 아는 사람과 친한 사람은 다르니까. 2년 전 다녀온 첫 여름 교토 여행 후에 봤다면 조금 이른 감은 있어도 이 도시와 한결 가까워진 느낌이 들어서 좋았을 테고, 이 책을 가져갔던 작년의 교토에서 봤다면 어디든 당장 내일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뿌듯했을 것이다. 하지만 벚꽃이 많이 떠났을 교토 한 구석의 호텔에서 한발 늦은 꽃놀이 계획을 세우기 1주일 전에 읽으니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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