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 문학과 예술로 읽는 서울의 일상
류신 지음 / 민음사 / 201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 얼마간 도시에 대한 책들을 읽었다. 저마다 다른 분야였지만 도시를 주제로 삼은 책들을 여러 권 사들였던 덕에, 하나씩 읽어가는 동안 복잡한 도시를 다채롭게 살펴볼 수 있었다. 개별 건물의 관점, 건물들이 모인 거리의 크기, 건물을 짓고 허무는 사람들과 기업의 입장, 도시를 제어하는 정부의 위치, 건물·거리·사람·기업·정부가 모여 성장하거나 위축되는 도시 자체의 시야, 그리고 그런 도시 속에서 살거나 걷는 사람들의 기억까지 대강이나마 더듬어 온 것 같다. 책 속에서 도시를 여행한 느낌도 들었다. 책을 읽는 동안, 앞에서 읽었던 도시에 대한 책의 내용이나 실제로 가 보았던 도시에서의 경험을 상기했던 까닭이기도 하다.

 

 이 책으로 도시에 대한 여행을 일단 마무리하기로 했다. 이 책의 인상을 정리한다면, 사회의 일부로서의 도시에 대한 개인적 사유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자본주의와 도시의 관계,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깊숙이 탐구했던 발터 벤야민의 아이디어에 깊이 의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목까지도 그에게서 빌려온 것을 보면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화자인 구보는 단순히 21세기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첨단의 적나라한 단면으로서의 서울을 관찰했다.

 

하지만 상품 물신의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는 한 우리는 여전히 19세기 자본주의적 꿈의 도시를 거니는 대중으로 남을 뿐이다. 해결의 관건은 정신의 각성이다. 자본에 의해서 배제되고 망각되고 억압된 유토피아적 이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인식론적 전환이 필요하다. -p.269

 

 이 책의 단서가 발터 벤야민과 그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만은 아니다. 20세기 초 일본 제국의 통치하에 있던 조선 경성의 거리를 걷던 소설가 박태원의 작품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속 구보가 실마리의 반대편 끝을 잡고 있다. 그리고 2016년 서울을 바라보는 이 책의 허점 중 상당 부분은 저자가 택한 화자가 20세기 초반의 경성을 거닐었던 소설가이자 무직자 남성이었던 구보에 의존하고 있다는 데서 기인한다. 그에게 여전히 도시는 허망한 물질문명의 광휘에 눈부셔 하는 의식이 잠들어 있는 대중들의 무대이다. 이러한 인식은 20세기의 구보와 마찬가지로 21세기의 서울에서도 여전히 특정한 위치,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직업을 얻지 못한 구보 자신의 내적 인식을 반영한다.

 

 하지만 상품 물신이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을 그저 마취라고 단정하기에는 그것들이 대중의 삶에 미치는 실질적인 가치, 편익이 극적으로 증가, 변화했다. 약간 바꿔서 말하면 오늘날 생산되고 있는 대단히 다양한 물품들과 그것을 택한 사람들의 이유와 취향을, 이 책에서 물신화의 대상으로 통칭한 상품이라는 한 단어 속에 모두 우겨넣고 있다는 것이다. 분명 20세기 초의 구보와 벤야민의 경험 속에서 이러한 일반화는 무리가 아니었겠지만, 그 관점을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21세기 자본주의의 생산 과정과 결과는 너무나 입체적이다. 그저 물신에 빠져 눈을 감고서는 지금 저 수많은 상품들을 고르고 구입해서 사용할 수가 없다. 이미 사람들은 오래 전에 눈을 뜨고 저마다의 물신을 영접하고 있었다. 그것이 화자의 우려처럼 한낱 마취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 마취 상태는 그의 짐작처럼 단일하고 혼란스러울 수가 없다.

 

 상품 자체의 고유성과 다양성은 무시한 채, 그에 빠진 사람들은 여전히 ‘19세기자본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라는 화자 구보의 일갈은 그래서 설득력이 없다. 이런 관점에서 알렉산더 벨의 전화기와 스티브 잡스의 아이폰은 얼마나 유의미한 차이가 있을까? 화자도 짧게 언급했듯이, 그저 사람들이 지하철 안에서도, 거리 위에서도 언제든 들여다보며 남들과 연결될 수 있을 뿐 전화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정도로 이해한다면 굳이 21세기의 서울을 산책하는 의미도 그리 클 수 없을 것이다.

 

118개국 진출, 33000개 이상의 매장 수로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고 있다고 자처하는 외식 브랜드 맥도날드 안에서 구보는 고독했고 쓸쓸했고 섬뜩했다.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고 대화를 나누며 행복해야 할 식사 시간마저도 철저하게 고립되어 햄버거 하나와 사투를 벌이는 자신이 측은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p.126

소파에 앉은 구보는 어머니가 냉장고에서 꺼내 준 시원한 보리차부터 한잔 들이켰다. 그리고 라면을 끓여 먹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아까 코엑스몰 식당가에서 김밥 두 줄로 허겁지겁 저녁을 대신했던 터라 배가 출출했지만, 어머니가 손수 빚은 찹쌀떡 몇 개를 전자레인지에 해동해 먹는 것으로 간단하게 설요기를 했다. -p.298

 

 이 책에서 21세기를 사는 20세기풍의 지식인, 구보는 끼니를 챙길 때도 자신의 시대를 온전히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명동의 맥도날드에서 스스로에게 연민까지 느끼며 햄버거로 요기를 하면서, 행복해야 할 식사 시간을 되새기지만 정작 집에 온 그는 보리차조차 어머니가 꺼내 주고 직접 라면을 끓이는 대신 먹은 찹쌀떡은 어머니가 손수 빚었다. 그가 생각하는 맛있고 행복한 저녁 식사는 과연 누가 차리게 될까? 적어도 그가 차리는 밥상이었다면 그가 점심의 맥도날드에서 자기 연민까지 빠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결국 햄버거에서 느낀 서글픔은 어머니가 꺼내 주는 보리차에서 비롯된 셈이다.

 

구보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다. 강남대로 일대 빌딩의 유리들은 일제히 자살을 결심하고 지상으로 장렬히 몸을 던질지도 모른다. 이건 도시의 신의 분노가 극에 달했고 그의 인내심이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전조이리라. -p.299

 

 결국 화자는 21세기의 서울을 20세기의 파리로 끌고 가려하는 상품 물신의 파국을 경고하려 애썼지만, 이 책에서 드러난 것은 그가 20세기의 경성에서 왔다는 사실이었다.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간편하고도 거대한 파국을 상상하게 된다. 그리고 그 상상이 그의 부적응을 더욱 명확하게 증명하기도 한다. 김중혁의 단편 소설 유리의 도시를 인용하며, 강남대로를 가득 채운 빌딩들의 유리들이 비처럼 쏟아지는 상상을 해 보지만, 그것은 도시의 분노보다는 그의 분노가 현재 임계에 다다랐다는 전조에 더 가까워 보인다. 자신이 속하지 않은 상황의 모순일수록 더욱 거대해 보이는 법이다.

 

 화자는 어머니와 함께 사는 영등포의 아파트에서 아침 일찍 출발해, 숭례문, 경복궁, 서울광장, 롯데호텔, 세운상가, 홍대 입구, 코엑스몰, 가로수길, 강남역 등을 거쳐 자정에 가까워서야 다시 영등포로 돌아오는 긴 산책을 했지만 그가 보는 서울은 19세기의 파리 마냥 평면적이다. 롯데호텔의 지하 아케이드와 코엑스몰의 현란한 쇼윈도에서 마치 모두를 삼킬 듯한 물신의 현현에 근심하거나, 세운상가의 늘어선 쇄락처럼 버림받은 물신의 말로”(p.146)에 비애를 느낄 뿐이다. 이래서야 지금 이 거대한 서울 곳곳을 굳이 누빌 이유가 없다. 어디를 가도 물신의 흔적을 찾고, 있으면 두려워하고 없으면 안타까워할 뿐이니 명동과 삼성동에서도 차이를 찾지 못한다. 20세기 경성의 구보를 계승한 21세기 구보의 관점을 엿보는 데는 부족함이 없지만, 21세기 서울의 일상은 20세기 속에 갇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은하영웅전설 외전 1 - 황금의 날개 이타카
다나카 요시키 지음, 김완 옮김, 미치하라 카츠미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은하영웅전설의 정전이 10권인데, 외전은 5권에 이른다. 권마다의 분량은 다르지만, 수로만 따지면 절반이다. 이미 정해진 이야기 밖에서 무슨 이야기가 그렇게 많이 남아 있을까 싶었다. 막상 읽어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민주주의의 자유행성동맹과 전제주의의 은하제국 사이의 거대한 항쟁이 결말을 향해 치닫는 10권의 긴 이야기 속에서, 짧은 이야기들은 언급되지도 못한 채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당장 은하영웅전설1권에서 보았을 때, 이미 라인하르트 폰 뮈젤이 아닌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이었고, 이번 권의황금의 날개에서 소령이었던 양 웬리는 벌써 준장의 계급을 달고 있었다.

 

 이 외전에 실린 이야기들이 은하영웅전설의 정전에 대한 복선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다. 그 정도의 무게가 있었다면 밖으로 나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실린 오명처럼 외전의 이야기들은 아무리 거대한 규모라고 해도 결국 주인공들이 잠깐 나선 휴가의 추억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실제로 오명의 지크프리트 키르히아이스는 모처럼 라인하르트 폰 뮈젤 없이 혼자서 휴가를 온 행성에서 퇴역 장성의 애처로운 사랑 이야기를 지켜보는 관찰자 역을 맡았다. 그를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사건은 아니지만, 안네 로제를 향한 마음을 깊이 은유하는 계기는 되었다.

 

젊은이, 내가 누구에게 사랑을 받는가는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누구를 사랑하는지가 중요하지요.”

대답에 궁색해지는 경우가 최근 2, 3일 사이에 몇 번인가 있었으나 이것도 그중 하나에 속할 모양이었다.

미하엘이 크리스토프보다 선량하고 성실한 사람이란 것은 나도 잘 알아요. 하지만 젊은이, 인간적인 평가가 높은 것과 애정의 깊이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답니다.”

키르히아이스의 가슴속을 한순간 날카로운 아픔이 가로질렀다. 노부인이 했던 말은 진실이었으며, 수많은 진실 속에서도 겨울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었다. -p.228~229

 

 무기력한 지휘로 은하제국군을 참패시켰다는 오명을 쓴 카이저링 퇴역소장의 이면에는 한 여인을 향한 오랜 애정이 있었다. 응답받지 못했기에, 마음은 더 깊어졌고 결국 감내해서는 안 되는 치욕까지도 그녀를 향한 사랑이라 믿게 되고 말았다. 카이저링과 그가 사랑한 요한나, 그리고 카이저링의 친구이자 요한나의 남편인 바젤의 이야기는 한낱 오래된 통속극이었지만, 그런 까닭에 오히려 예측하기 어려운 반전을 품은 일화이기도 했다. 수많은 병사의 목숨을 희생시켰고, 한가로운 휴가를 기대했던 키르히아이스까지 끌어들여 위태롭게 만들었던 사건이 결국 세 노인 사이의 옛 사랑 때문이었다는 결론은 너무나 뻔해서 오히려 한동안 감춰질 수 있었다.

 

 돌려받을 수 없는 마음이어서, 오히려 더 깊어지고, 그 끝에 다다랐을 때에야 비로소 깨어진다. 아무리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은 대가로 카이저링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짐을 지고 말았다. 그는 단지 요한나에 대한 사랑만으로 짊어지기에는 자신의 오명이 너무나 거대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더구나 요한나의 남편인 바젤이 당했어야 할 치욕을 덮어쓴 그런 헌신을 요한나가 원했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것은 처음부터 인간적인 평가보다 애정을 택한 요한나가 받았어야 할 몫이었다. 자신의 헌신을 자부했던 카이저링의 수고는 필연적인 파탄에 이르렀다.

 

 두 퇴역장성과 한 귀부인의 이야기는 안네 로제에 대한 헌신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통찰했던 키르히아이스의 삶에 대한 일종의 전조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마음이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품었기에, 그는 라인하르트를 위해서 기꺼이 희생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은하영웅전설정전에서 종종 언급되는, 자유행성동맹과 은하제국의 첫 격전의 내막을 보여 준 다곤 성역 회전기는 말로만 듣던 작품 속 세계의 설정을 확인하는 기회였고, 나머지 4편 백은 계곡, 황금의 날개, 아침의 꿈, 밤의 노래, 오명은 누이인 안네 로제를 황제의 후궁으로 빼앗긴 이래, 차근차근히 서둘러 은하제국 군부에서 출세해 가는 라인하르트 폰 뮈젤과 그의 친구 지크프리트 키르히아이스의 성장담이다. 분명 앞의 정전에서 이들에게 흥미를 가지지 않았더라면 굳이 읽을 필요가 없는 이야기다. 그들이 키워 낸 꿈이 결말을 보았기에, 그들이 키워 갔던 꿈에 가치도 생겼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시의 승리 - 도시는 어떻게 인간을 더 풍요롭고 더 행복하게 만들었나?
에드워드 글레이저 지음, 이진원 옮김 / 해냄 / 201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무래도 올해는 영화를 자주 볼 운수인가 보다. 한창 영화에 빠져 지냈던 때는 대학교에 다니던 2004~2007년이었다. 살고 있던 기숙사가 방배동이어서, 메가박스가 있는 삼성역이 가까운 덕분이기도 했다. 주말이면 조조 영화를 보는 게 나름의 일상이었다. 그때만 해도 요즘처럼 영화와 멀어질 줄은 몰랐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저 게을러져서영화를 덜 보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평일에는 그저 퇴근이 급하고, 주말에는 오직 잠이 중해서 더 이상 전처럼 영화를 보지 않게 된 거라고. 작년에 가장 인상적인 영화였던 인사이드 아웃과 그저 흥미로운 영화였던 검은 사제들2번씩 볼 때만 해도 그렇게 여겼다.

 

 생각이 바뀐 것은 캐롤2번 보고 나서였다. 그동안 보고 싶은, 볼 만한 영화가 없었을 뿐이었다. 또 이제는 그저 아무 영화나 보기에는 집에서 음악 듣고 책 읽는 시간이 아까워졌다. 아무 사람이나 만나기에는 인생이 짧다는 것과 비슷하다면 비슷하다. 아마 캐롤과 테레즈도 자신의, 그리고 서로의 삶을 그렇게 여겼으리라. 하잘 것 없는 인간들에게 얽매이기에도, 더할 나위없는 사람과 함께하기에도 시간은 부족하다. 아마 앞으로도 영화를 예전만큼 자주 볼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봐야만 하는 작품을 놓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개봉 직전까지 존재도 몰랐던 이 영화를 마치 기다렸다는 듯 보고 나와 한숨을 쉬니 그런 예감이 들었다.

 

미국은 대부분 중산층을 상대하는 서비스 경제지만, 맨해튼의 판매사원들은 도시의 상류 부르주아들과 고급품을 사기 위해서 도시로 운전해 들어오는 교외 지역 거주자들을 상대한다. -p.234

 

 캐롤은 뉴욕 교외의 번듯한 저택에 살고, 테레즈는 뉴욕 시내의 아담한 방에 산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곳은 시내의 프랑켄버그(Frankenberg) 백화점이었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뉴욕의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할 때의 경험에서 이 작품이 비롯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캐롤과 테레즈는 자연스러운 사랑은 뉴욕 도심의 보편적인 흐름 속에서 시작된 셈이다. 테레즈가 캐롤의 차를 타고 그의 집으로 갈 때 테레즈의 애인이 너무 먼 동네라며 괜한 걱정을 하고, 캐롤 대신 밖에 나가서 담배를 사오겠다는 테레즈에게 이 동네가 어딘 줄 알고 나가겠다는 거냐며 캐롤이 괜한 역정을 부리거나, 캐롤이 태워다 준 역에서 전철을 타고 돌아오는 동안 테레즈가 눈물을 참지 않는 장면에서 두 사람 사이의 공간을 짐작했다.

 

 뉴욕이라는 도시의 서로 다른 영역에 머물던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캐롤의 배경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진행되었던 도시의 교외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다가오는 사람이 많아도 쉬이 그들과 섞이려 들지 않을 듯한 캐롤의 이미지를 생각할 때, 그가 뉴욕 교외의 널찍한 집에 산다는 것은 별반 이상하지 않지만, 그렇게 교외의 삶을 택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이 책의 저자는 지적한다. 미국 정부가 지금까지 꾸준히 중, 상류층 시민들의 교외 이주를 장려, 촉진해 온 결과, 도시들의 장점이 약화되고, 국가적으로도 자원의 배분이 비효율적으로 이뤄질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세계적으로도 환경 파괴의 원인까지 될 수 있다는 데까지 자연스럽게 문제의 범위가 확대된다.

 

아무리 매력적인 메트로폴리스라도 주택을 추가로 짓지 않을 경우 가장 부유한 사람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즐거움과 도시가 갖는 실질적인 이점이 사라지면서 부티크 도시처럼 변할 위험이 크다. -p.244

 

 물론 도시의 교외 확장 내지는 이전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도시의 가치와 기능에 대한 그의 낙관적인 인식에서 비롯된다. 이 책은 도시에서 다양한 능력과 취향의 사람들이 서로 인접해 거주하면서, 다양한 생각들이 교류되고 그 과정에서 현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발상이 도출, 형성됨으로써 인류의 삶과 사회의 질이 향상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전제한다. 그런 까닭에 중, 상류 계층이 도심을 벗어나 교외에 자신들만의 구역을 형성하는 흐름은 장기적으로는 도시와 국가 모두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국 저자는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도시의 중심부에 더 높고, 더 많은 건물을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미국의 경우에, 정부는 접근성과 경제성이 뛰어난 뉴욕 등의 도심에서 경관 유지와 역사적 가치를 이유로 건물 신축과 증개축을 막거나,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기후의 캘리포니아 해안 지대에서 자연 보호를 명분으로 건물 신축을 극히 제한함으로써 주택 공급을 위축시킨다. 또한 주택 구입을 위한 모기지 대출의 이자를 세금에서 공제해 주는 방식으로 시민들의 교외 이주를 더욱 촉진한다. 교외로 이주할 여력이 있는 시민들에게도 신축 주택이 적은 탓에 감당이 어려운 도심의 주택 가격은 물론이거니와 학업 능력이 부진한 저소득 계층의 아이들과 자신의 자녀들이 함께 배워야만 하는 공립 교육 시스템을 회피해 비슷한 배경과 능력의 아이들만 모인 학교에 진학시키려는 이주 동기가 있다.

 

일반 시민들은 그들 주변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시청의 도시 계획 수립자들보다 강력한 발언권을 가져야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들이 갖는 커뮤니티 통제권은 제한적이어야 한다. 지역 커뮤니티들은 건축 금지로 인해서 시 전역에 생길 수 있는 부작용을 생각하지 못할 때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p.293

 

 현재 미국의 도시가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를 교외화 현상으로 파악하고, 그 원인을 도심의 주택 부족과 일률적인 공립 교육 시스템으로 파악한 까닭에, 그에 대한 저자의 대안 역시 명료하다.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타당하지만은 않다. 도심의 건물 신축 억제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는 위의 문장이 단적인 예다. 시청의 공무원들보다 일반 시민들이 주변의 일에 강력한 발언권을 가져야만 하지만, 이 시민들은 시 전역의 일을 생각하지 못할 때가 있기 때문에 그들이 거주 지역을 지나치게 통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시 전체를 바라보는 공무원과 거주 지역을 이해하는 일반 시민 모두가 주택, 사무 공간의 신축을 지나치게 통제해서는 안 된다는 의도를 이해하더라도, 어느 쪽에도 우선권을 주지 않으려는 태도는 무책임하다. 결국 주민과 정부 모두의 관점은 불완전하다는 주장 아래, 토지와 건물을 매입해 새로 지으려는 자본, 더 나아가서 신축 건물에 입주할 기업과 개인들의 입장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도를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별도의 교실이건 마그넷 스쿨(Magnet school: 영재 교육 프로그램)이건 수준에 따라서 학생들을 그룹으로 묶으면 도시의 공립학교 교육은 똑똑한 아이들을 둔 부모들에게 더욱 매력적이 될 것이다. 이런 방식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가난한 아이들로부터 좋은 동료들을 빼앗아갈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들의 말이 맞다. 그러나 그러한 좋은 동료들이 (더 나은 학교가 있는) 교외 지역으로 도망가서 가난한 학생들이 그들을 잃게 된다면 차라리 부유한 가족들을 도시에 머물게 하는 게 더 낫다. -p.454~455

 

 반면에 시민들의 교외 이주를 부추기는 큰 원인 중 하나로 지목한 교육 문제에 대한 해답은 냉정하면서도, 명쾌하다. 학업이 부진한 학생들과 우수한 학생들이 분리되는 한계가 있더라도 수준별 교육을 도입해서, 적어도 같은 학교, 지역에 서로 다른 계층의 가족들이 잇도록 유도하자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도심의 공립학교를 활성화시키려는 시도가 완벽할 수는 없다. 하지만 경제적 여력이 있는 중, 상류 계층의 학생들이 아예 교외 지역의 학교로 집중되어, 도심에는 여력이 없는 저소득 계층의 학업이 부진한 학생들만 잔류하는 형태가 더 우월한 상태라고 주장할 수도 없다. 일단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야 하고, 거기서부터 문제가 해결된다는 저자의 관점은 확고하다. 다양성과 인접성이야말로 도시의 핵심이다.

 

나도 같은 부류에 속하지만, 오늘날 아시아인들에게 에너지 절약을 설득하고 있는 에너지에 미친 미국인들은 매우 위선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한 저명한 경제학자는 이런 모습을 보고 ˝SUV 운전자들의 나라가 자전거 운전자들의 나라에게 모페드(모터 달린 자전거)를 몰지 말라고 설득하는 것과 같다˝라고 꼬집었다. 나의 어색한 교외 생활은 분명 친환경적 모델은 아니다. 서양이 지구온난화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도덕적 권위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부터 솔선수범하는 것이다. -p.387~388

 

 이 책에서 도시의 순기능으로 강조하는 요소 중의 하나가 환경 보호다. 도심에 최대한 높고 많은 건물을 지을수록, 도시 밖의 환경을 파괴하며 건물을 지을 필요가 적어진다. 뿐만 아니라, 도심에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수록 사람들이 자동차를 몰며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양도 줄어든다. 저자는 어쩔 수 없이 교외로 이주한 개인적 경험을 수시로 인용하면서, 미국의 수많은 교외 거주민들이 각각 자동차로 도심과 곳곳을 오가며 배출하는 막대한 양의 온실가스가 지구 온난화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강조한다. 특히 저자는 이러한 미국의 소모적인 교외 생활이 현재 나날이 발전 중인 중국과 인도의 삶의 모델로까지 자리 잡을 수도 있다는 데에 대해 큰 위기감을 드러낸다. 미국의 교외화는 그들 경제의 비효율만이 아니라, 지구 환경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도시화가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의 크기와 현대 도시의 맥락을 놓치지 않은 저자의 폭넓은 시야를 동시에 보여준 부분이다.

 

 처음부터 미국의 도시를 바탕에 두고 전개된 까닭에, 이 책의 주장이 한국 도시의 미래에 구체적인 시사점을 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특히 도심의 지속적인 주택 가격 상승을 해소하기 위해 규제들을 풀어서 신축을 최대한 촉진해야 한다는 주장은, 현재의 주택 소유 구조는 외면하고 당장 공급량만 늘려서 해결하려는 피상적인 대책으로 흐르기 쉽다. 그렇다 해도 저자가 방대한 통계 자료 속 미국 도시들의 상황을 세밀하게 비교, 분석해서 제시했듯이, 최대한 다양한 다수의 사람들이 모여서 머무를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하는 것이 결국 도시 발전의 기반이라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서로 다르지만 또한 같은 캐롤과 테레즈가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곳이 뉴욕이었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은하영웅전설 10 - 낙일편
다나카 요시키 지음, 김완 옮김, 미치하라 카츠미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스포일러 있음.


 주인공이 죽고도 결말이 열려 있다고 여겨지는 소설은, 결국 인물이 아닌 세계를 이야기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주인공이 사라져도 그가 살아 온 세계는 남는다. 이야기와 주인공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내가 책을 덮은 후에도, 그 세계가 존속되는 것이 아닐까. 언젠가부터 작가가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암시했듯이 결국 라인하르트도 이 이야기와 함께 사망했다. 작품 속 세계의 절반에 거주하는 인간들은 그의 죽음을 붕어(崩御)라는 사뭇 추상적인 단어로 표현할 것이다. 이 카이저가 있었기에 내가 이 작품을 덮은 후에도 그들의 세계는 오래도록 이어질 테니까.

 

 10권에 이르는 작품인 이상, 대부분의 위기와 사건들을 이미 이야기했는데도 그저 뒷수습을 하기 위한 마지막 권이 필요하다. 이런 느슨한 인상을 피하기 위한 의도인지 여기서도 여러 사건이 빈발하기는 했다. 율리안 민츠의 이제르론 공화정부 군과 카이저 라인하르트의 은하제국 군이 우발적으로 충돌하거나, 도주·은신 중이던 페잔 자치령의 전 수장인 아드리안 루빈스키가 하이네센에서 벌인 대규모의 테러 사태로 그곳에 체류 중이던 라인하르트가 생명의 위협까지 겪기까지 했다. 친정에 나선 라인하르트가 페잔에 남겨 두고 온 카이저린 힐다와 그의 소중한 누이 안네로제 대공비 역시 이 작품에서 끊임없이 음모를 꾸며 댄 지구교도들의 습격을 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작품의 결말이 목전에 닿았을 때, 이 지구 근본주의자들도 은하제국 카이저의 임시 황궁에 난입해서 최후의 발악을 했다.

 

 은하제국과 이제르론 공화정부가 예기치 않게 맞붙은 시바 성역 회전은 율리안의 과감한 전술로, 막대한 희생을 감수하고 라인하르트의 기함인 브륀힐트에 침입해 그와 만나는 데 성공함으로써 종결되었다. 사실상 이 작품은 그 순간, 실질적으로는 매듭을 지은 것과 다름없었다. 은하제국의 황제인 라인하르트와 이제르론 공화정부의 군부 지도자인 율리안이 서로의 기량을 이해하고, 이제르론 요새를 반환하는 대신 행성 하이네센을 중심으로 한 바라트 성계와 그 자치권을 인정받는 강화를 체결한다는 결말은 굳이 명기할 필요도 없었다. 브륀힐트에 들어온 율리안 일당이 제국군의 저항을 돌파해 자신 앞에 당도한다면, 그들과 대등한 입장에서 강화를 논의할 수 있으리라고 말했을 때, 자잘한 이견들을 빌미로 이들이 다시 맞붙는 결말은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런 결말이 라인하르트와 율리안의 지위와 개성을 생각할 때, 치졸하기 때문은 아니다. 새삼스럽게 강화의 조건을 세부적으로 따지기에는 은하제국과 이제르론 공화정부의 무력 차가 현격한 것은 사실이지만, 오직 그 때문에 황제가 관대하리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율리안은 라인하르트에게 자신의 힘을 보였기 때문이다. 라인하르트는 실력이 동반되지 않은 신념은 인정하지 않는 인물이었으며, 그의 실력은 언제나 무력이었다. 전력이 압도적으로 열세였음에도 제국군의 허점을 파고들어 황제의 기함에 침투해 대면하기까지, 율리안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황제와 말하지 않고도 화친의 교섭을 마친 셈이다. 실제로 율리안과 라인하르트 사이에서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민주주의 세력의 자치권을 인정받는 협상은 파탄나지 않았지만, 구체적인 성립 과정이 등장하지도 않았다. 율리안 일행은 임종 직전의 황제를 만나기 위해 그가 머물던 임시 황궁에 들었지만, 두 사람이 미래의 정치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일은 없었다. 동어반복이기 때문이다.

 

 난공불락의 요새와 정복당한 옛 영토를 교환하고, 피정복자로서 자치권을 인정받는 지극히 복잡하고 민감한 정치, 군사, 외교적 사안이 여러 사람의 목숨을 바친, 기책에 가까운 율리안의 전술과 그 역량을 시험한 라인하르트의 인정으로 대체된 셈이다. 이 작품이 가장 현실과 멀리 떨어진 장면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먼 훗날 인류가 지구 너머로 진출하더라도, 이 작품 속의 정치적, 사회적 모순과 항쟁을 피해갈 도리는 없겠지만, 그 전란들은 언제나 지지부진한 협상과 지리멸렬한 파탄을 거듭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애초에 어떤 변란도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더 거칠게 말하자면 압도적인 승자의 위치에서 패자의 입장을 모욕하지 않는, 라인하르트와 같은 인간이야말로 이 작품을 은하계의 이야기로 만들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패배하지 않는 위세보다도, 승리한 후의 면모가 그를 현실 너머의 인물로 만들었다. 그는 지나간 승리에 집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국과 이제르론의 강화로 이어진 시바 성역의 전투를 제외하면 이번 권의 나머지 사건들은 지구교의 준동이었다는 사실 외에도, 사실상 제국의 요인들을 겨냥한 소요에 불과했을 뿐, 그동안 이 작품이 선 보였던 것과 같은 장대한 군사 행동은 아니었다. 여태 일어났던 수많은 전역(戰役)들의 부스러기들을 한꺼번에 마무리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만큼 작품 속 세계가 돌이키기 어려운, 안정된 상태에 접어들었다는 반증일 것이다. 장렬한 전투의 시대가 지나간 후에, 제국이 해결해야 할 사건들은 기껏해야 주요 도시에서의 연속 폭발 사고나, 황족을 겨냥한 암살 음모에 불과하리라는 암시이기도 하다. 길지 않은 장대한 전략의 시대가 결국 지나면, 길디 긴 모략의 시대가 역시 돌아오는 셈이다. 라인하르트와도 양과도 어울리지 않는 시대지만, 그들이 이루고자 했던 시대였다. 장대한 전략이 세계를 이루지만, 단소한 모략들은 세계를 꾸린다. 두 사람이 이루었으니, 힐다와 율리안 같은 이들이 어떻게든 꾸려 갈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은하영웅전설 9 - 회천편
다나카 요시키 지음, 김완 옮김, 미치하라 카츠미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해(誤解)라는 단어는 묘한 구석이 있다. 한자만 놓고 보면잘못 풀렸다.”라는 뜻이다. 잘못 묶은, 오결(誤結)이 아니다. 답은 나왔다, 마치 해결(解決)된 것처럼만 보인다. 하지만 그 생각은 틀렸다. 그렇다면 이 잘못을 어떻게 바로 잡을까. 다시 제대로 풀어 보려고 해도 이미 있던 매듭이 억지로 풀려 버렸으니, 무엇보다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매듭부터 지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오해는 풀기가 어렵다. 풀 것은 없고, 맺을 것만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풀렸다는 확신에서 벗어나, 다시 묶어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는 결코 쉽지 않다. 결국 오해는 당한 사람이 풀 수 없다. 오해에 빠진 사람이 맺어야 풀린다.

 

 은하제국의 황제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과 과거에 자유행성동맹이었던 노이에란트 지역의 총독을 맡게 된 오스카 폰 로이엔탈의 사이에서 마침내 내란이 벌어졌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도록 온갖 음모를 획책한 지구교도들의 발악이 있었다고는 해도, 결국 로이엔탈이 역모를 꾀한다는 오해에 빠진 것은 황제인 라인하르트 본인이었고, 로이엔탈은 그러한 오해에 변명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을 뿐이다. 로이엔탈의 구명을 청하는 볼프강 미터마이어에게 라인하르트는 “(전략) 허나, 그렇다면 왜 로이엔탈은 짐 앞에 해명하러 나타나지 않는단 말인가? 짐이 불명예스럽게 도망치는 동안 그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사죄문 하나 보내지 않았다. 루츠의 죽음을 애도하는 서한 또한 없었다. (후략)”(p.196)라며 로이엔탈의 부적절한 처신이 그의 역모를 확신하게 된 근원이라고 설파했다. 하지만 그는 이에 앞서서 짐이 습격을 당하고 루츠가 생명을 잃은 것도 누군가의 중상모략이란 말인가!”(p.195)라고 분노를 폭발시켰다.

 

 라인하르트는 로이엔탈이 스스로 무고함을 황제에게 밝히지 않아서 그의 역모를 확신하고 토벌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지만, 자신이 도주하고, 루츠가 피살당한 사태 자체에 대한 분노와 그런 짓을 저지를 사람이 그 외에는 표면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훨씬 앞서 있었다. 로이엔탈이 이 자리에 직접 있지 않았으나, 불시의 기습과 충신의 전사, 화급한 피신이라는 카이저의 변고는 알았으니 그의 심경 또한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았으리라. 그렇다면 이 지경에 이른 오해를, 당사자인 로이엔탈 혼자서 새로 음모의 매듭부터 지은 후에 제대로 풀 수 있을까. 쉽지도 않을뿐더러, 직접 음모의 주모자로 의심받는 그에게 그때까지 시간적 여유가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다. 백번 운이 좋아서 용서를 받더라도, 진상이 밝혀질 때까지사실상역도로 간주되는 불명예를 감수해야 한다.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이미 일으켰다고 간주된 군사 행동을 실제로 일으키는 것과, 어떻게 수용될지 알 수 없는 해명과 사죄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로이엔탈이 다스리는 노이에란트 지역에 순행을 나가, 중간에 들른 행성 우르바시에서 주둔 중이던 제국군에게 불의의 기습을 받고, 기함인 로엔그린으로 황급히 피신하던 중 황제를 호위하던 코르넬리우스 루츠 상급대장이 반란군에게 피살당하고 황제는 무사히 빠져나왔다는 것이 사건의 내용이다. 누가 봐도 이 지역을 총독으로서 통치하는, 로이엔탈의 짓처럼 보였다. 게다가 애초에 이 순행은 그가 반란을 도모 중이라는 시중의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이루어졌다. 이렇게 예기치 않은 변란을 당했을 때, 처음에 돌던 헛소문까지 진실로 받아들여 로이엔탈의 혐의를 확실시하는 것은 어쩌면 불가피한 인식의 함정일지 모른다.

 

 하지만 모든 권력을 한 손에 쥐고서도 최대한 이성적이며 합법적인 전제군주가 되고자 한, 카이저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이라면 모든 것이 너무나 분명해 보이는 마지막 순간, 그 불가역성에 상응하는 의심을 해 보았어야 하지 않을까. 모든 정황이 로이엔탈의 음모라고 짜 맞춘 듯 외친다는 사실 자체에 질문을 던졌어야 했다. 우르바시 사건 당시에, 황제를 공격한 반란군 중 누구도 로이엔탈의 지시나 사주를 받았다고 말한 적이 없었으며, 사건 이후에 로이엔탈이 황제에게 용서를 빌지도 않았지만, 반란을 공표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도 있었다. 이러한 요구가 역모의 피해자(?)인 라인하르트에게 지나치다고 생각된다면, 누구에게도 제지받지 않는 전제 군주 체제가 조금이나마 안정적으로 지속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내적 제약이라고 답하겠다.


 그렇다면 카이저 라인하르트에게 어떤 대안이 있었을까. 가상의 군주를 위해 그것까지 말할 이유야 없겠지만, 누구의 제안도 없이 군무상서 오베르슈타인 원수가 스스로 준비했듯, 그가 황제의 칙사로 노이엔란트의 로이엔탈을 방문해 먼저 관용의 의사를 표명하고, 형식적이나마 사죄를 받아낸 후에 사건의 진상을 밝히도록 지시하는 것이 두 사람 모두에게 최선이었을 것이다. 물론 힐데가르트나 미터마이어가 바랐듯, 오베르슈타인 원수와 랑 차관을 잠시라도 해임하는 것이 로이엔탈만을 위해서는 가장 나은 선택이었다. 이대로라면 로이엔탈이 황제에게 고개 숙이기 전에, 예전부터 그를 견제하거나 질시해 온 두 사람에게 먼저 죄를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라는 통찰은 정확했다. 또한 오래 전부터 준비해 온 이 세 사람의 대립 구도를 이렇게 결정적으로 활용한 작가의 수완도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목숨을 위협받고 아끼던 측근을 상실한 라인하르트의 자존심에 굴욕감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형식적으로나마 역모의 혐의를 받는 로이엔탈을 위한 황제의 과도한 배려로 보여 제국의 기강을 흐트러뜨린다는 점에서도 취하기 어려운 대책이었다.

 

 라인하르트는 로이엔탈의 역모를 확신한 후에 어떤 대안도 선택하지 않고, 토벌을 결행했다. 기어이 반란으로 폭발해 버린 사건은 말끔히 진압됐지만, 비하기 어려운 측근이자 명장을 상실한 라인하르트에게 다행한 결말이라고만 말하기는 곤란하다. 반란이 아닐 수도 있었던 사태가 오해로 말미암아 반란이 되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면에서 음모를 꾸몄던 지구교 세력이 원한대로 진행되었다는 사실도 무시하기 어렵다. 그런 탓에 모든 것이 로이엔탈의 역모라는 사실이 더없이 명백해 보였어도, 노이에란트 순행에 나선 라인하르트가 당한 변고와 로이엔탈의 명시적인 관계는 드러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할 수 있었던 짧은 시간이 중요했다. 전제 군주인 라인하르트는 그 시간을 어째서 로이엔탈이 이처럼 명백하게 범인처럼 보여야 하는지, 자신의 확신을 회의하는 데 쓰지 않았다. 그와 같은 인물조차도 자신의 생명이 경각에 달렸던 사건에서는 이처럼 조급했다. 음모를 경험했으니, 진상을 탐구할 필요는 없다는 선언이다.

 

 자신의 안위와 직결된 문제에서는 아무리 숙고가 필요한 사안이라도 간편하고 당연하게 오해가 진실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라인하르트처럼 명철한 이가 황제더라도 전제주의가 피할 수 없는 위기의 규모와 가능성을 암시하기에 충분했다. 로이엔탈이 황제에게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하는 대신, 오베르슈타인이나 랑 같은 자들에게 선처를 구하는 구차함을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켜서 무력으로 떳떳함을 증명하려 한 것은 그의 성정뿐만 아니라, 애초에 그런 식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행사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전제군주 체제의 사람이라는 사실도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추측도 해 보았다. 전제주의는 지배자의 의심을 제어해 오해가 행동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방지하는 장치가 없으며, 피지배자가 지도자의 자리를 물리력으로 찬탈할 가능성은 있다. 위에서도 아래서도 전제주의는 지속되기 어려운 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