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왕국의 성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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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어 갈수록 점점 더 흥미로워진 작품이었다. 그와 함께 내가 이 이야기 자체에는 별반 기대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처음 이 책에 관심를 가졌던 이유는, 일본어 원서의 표지였다. 흰 분필로 그린 유럽 어딘가의 성당이 교실의 칠판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주인공이 이 교실에 앉을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이리라 추측할 수 있었고, 그림의 작가가 칠판에 분필로 섬세하면서도 박력 있게 겨울 왕국의 일러스트를 그린 고등학생으로 화제를 모았던 나카지마 레나라는 사실을 듣고서 작품을 기억하게 됐다. 그저 유행을 따른 표지 컨셉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서로 잘 어울리는 표지와 작품을 적시에 결합시킨 출판사와 편집자의 기민한 감각이 발휘된 결과라고 생각했다.

 

 이 표지는 단순히 학생이 그린 일러스트가 중학교 졸업을 앞둔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야기에 실렸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 나이의 소설 속 인물이 그림에 매혹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작품이었다. 그런 까닭에 사람이 우연히 만난 그림 속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흔한 이야기에, 구체적인 형상과 설득력을 부여해 냈다. 모든 것이 웅장하고 세밀한데도, 어디선가 이 모든 것이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듯한 허망함이 감도는 그림이다. 고등학교 입시를 일찌감치 추천으로 통과하고, 다른 학생들이 명운을 건 것처럼 공부하는 교실에 혼자 무심하게 오가는 오가키 신이라면, 이 그림을 바라볼 여유와 빠져들 이유가 충분했을 것이다.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강한 때일수록 그림 속으로 깊이 들어가게 돼. 기량이 부족한 부분을 마음으로 메우는 거라고 할까.” -p.306

 

 하나다 시립 제3중학교의 3학년인 오가타 신과 시로타 다마미, 그리고 이 수수께끼의 그림 속에서 만난 사사노 이치로(파쿠 씨)가 펼치는 모험이 새롭거나 놀랍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 작품이 흥미로웠던 부분은 그들이 이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배경과 과정이었다. 자신의 평면적이고 현실적인 삶을 나름대로 인식하고 수긍하는 신과 학교와 집 모두에서 배척당하거나 외면당하지만 어느 쪽에서도 약해지지 않는 시로타,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유능한 어시스턴트로서의 삶에 의문을 갖게 된 파쿠 씨가 같은 그림 속에서 만나서 그 속에 갇힌 소녀의 정체를 밝혀 나가고, 과연 그를 구해야 하는지 대립하는 과정은, 그들이 매혹된 그림만큼이나 구체적이다. 현실적인 인물들이 세밀한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셈이다. 이 이야기는 약점만큼이나,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도 명확했다.

 

 그림 속에서 만난 소녀, 아키요시 이온을 둘러싼 사정을 평범하거나 익숙하다고 단정하기는 다소 곤란하다. 하지만 그가 처했던 문제의 무게에 비해서 다소 안이하게 해결했다는 인상이 남는다. 그렇다고 해도 작가가 이온에게 부여한 결말에는 큰 불만이 없다. 오히려 안도했다. 이 그림이 없었다면 서로 무관했을 신, 시로타, 파쿠 씨가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던 모험과 어울리는 매듭이기도 하다. 그림 안과 밖에서 그들이 서로를 도왔다면, 그림 속에 갇힌 이온을 돕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사람을 끌어들이는 그림이라는 기묘한 세계에서 비롯된 기이한 선의가 흔들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서 다행스러웠다. 결국 이 세 사람은 자신들을 만나도록 해 준 그 그림에게 답례를 한 셈이다.

 

 특히 붙임성이 좋은데다가 꿍꿍이속도 없는, 파쿠 씨는 모처럼 만난 어른스러운 인물이기도 했다. 자신보다 어린 신과 시로타의 의견에 착실히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의견을 조리 있게 이야기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가 없었더라면, 이 기이한 그림 속에서의 모험은 더욱 헐거워졌을 것이다. 그는 신과 시로타 두 사람만으로는 해결하기 힘든 그림 속 사건의 규모를 유지하면서도, 이 두 사람이 스스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지키는 훌륭한 조력자였다. 물론 한국과 일본을 막론하고, 이런 성인의 존재 자체가 일종의 비약이라는 지적은 가능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림 실력이 뛰어난 시로타는 파쿠 씨와 교감을 이루는 데 반해서, 항상 그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신의 심리 묘사가 읽을수록 인상적이었다. 분명 이렇게 희귀한 성인을 접한다면 의존하면서도, 경계하게 될 것이다. 시로타의 경우에는 스스로 소중히 여기는 그림에 대한 애정을 이해해 준 파쿠 씨에게 보다 친근함을 느끼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 면에서 신과 시로타를 존중하는 파쿠 씨는 이 두 사람에게 생동감을 불어넣기 위해 빠질 수 없는 요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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