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 문학과 예술로 읽는 서울의 일상
류신 지음 / 민음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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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 얼마간 도시에 대한 책들을 읽었다. 저마다 다른 분야였지만 도시를 주제로 삼은 책들을 여러 권 사들였던 덕에, 하나씩 읽어가는 동안 복잡한 도시를 다채롭게 살펴볼 수 있었다. 개별 건물의 관점, 건물들이 모인 거리의 크기, 건물을 짓고 허무는 사람들과 기업의 입장, 도시를 제어하는 정부의 위치, 건물·거리·사람·기업·정부가 모여 성장하거나 위축되는 도시 자체의 시야, 그리고 그런 도시 속에서 살거나 걷는 사람들의 기억까지 대강이나마 더듬어 온 것 같다. 책 속에서 도시를 여행한 느낌도 들었다. 책을 읽는 동안, 앞에서 읽었던 도시에 대한 책의 내용이나 실제로 가 보았던 도시에서의 경험을 상기했던 까닭이기도 하다.

 

 이 책으로 도시에 대한 여행을 일단 마무리하기로 했다. 이 책의 인상을 정리한다면, 사회의 일부로서의 도시에 대한 개인적 사유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자본주의와 도시의 관계,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깊숙이 탐구했던 발터 벤야민의 아이디어에 깊이 의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목까지도 그에게서 빌려온 것을 보면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화자인 구보는 단순히 21세기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첨단의 적나라한 단면으로서의 서울을 관찰했다.

 

하지만 상품 물신의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는 한 우리는 여전히 19세기 자본주의적 꿈의 도시를 거니는 대중으로 남을 뿐이다. 해결의 관건은 정신의 각성이다. 자본에 의해서 배제되고 망각되고 억압된 유토피아적 이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인식론적 전환이 필요하다. -p.269

 

 이 책의 단서가 발터 벤야민과 그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만은 아니다. 20세기 초 일본 제국의 통치하에 있던 조선 경성의 거리를 걷던 소설가 박태원의 작품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속 구보가 실마리의 반대편 끝을 잡고 있다. 그리고 2016년 서울을 바라보는 이 책의 허점 중 상당 부분은 저자가 택한 화자가 20세기 초반의 경성을 거닐었던 소설가이자 무직자 남성이었던 구보에 의존하고 있다는 데서 기인한다. 그에게 여전히 도시는 허망한 물질문명의 광휘에 눈부셔 하는 의식이 잠들어 있는 대중들의 무대이다. 이러한 인식은 20세기의 구보와 마찬가지로 21세기의 서울에서도 여전히 특정한 위치,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직업을 얻지 못한 구보 자신의 내적 인식을 반영한다.

 

 하지만 상품 물신이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을 그저 마취라고 단정하기에는 그것들이 대중의 삶에 미치는 실질적인 가치, 편익이 극적으로 증가, 변화했다. 약간 바꿔서 말하면 오늘날 생산되고 있는 대단히 다양한 물품들과 그것을 택한 사람들의 이유와 취향을, 이 책에서 물신화의 대상으로 통칭한 상품이라는 한 단어 속에 모두 우겨넣고 있다는 것이다. 분명 20세기 초의 구보와 벤야민의 경험 속에서 이러한 일반화는 무리가 아니었겠지만, 그 관점을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21세기 자본주의의 생산 과정과 결과는 너무나 입체적이다. 그저 물신에 빠져 눈을 감고서는 지금 저 수많은 상품들을 고르고 구입해서 사용할 수가 없다. 이미 사람들은 오래 전에 눈을 뜨고 저마다의 물신을 영접하고 있었다. 그것이 화자의 우려처럼 한낱 마취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 마취 상태는 그의 짐작처럼 단일하고 혼란스러울 수가 없다.

 

 상품 자체의 고유성과 다양성은 무시한 채, 그에 빠진 사람들은 여전히 ‘19세기자본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라는 화자 구보의 일갈은 그래서 설득력이 없다. 이런 관점에서 알렉산더 벨의 전화기와 스티브 잡스의 아이폰은 얼마나 유의미한 차이가 있을까? 화자도 짧게 언급했듯이, 그저 사람들이 지하철 안에서도, 거리 위에서도 언제든 들여다보며 남들과 연결될 수 있을 뿐 전화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정도로 이해한다면 굳이 21세기의 서울을 산책하는 의미도 그리 클 수 없을 것이다.

 

118개국 진출, 33000개 이상의 매장 수로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고 있다고 자처하는 외식 브랜드 맥도날드 안에서 구보는 고독했고 쓸쓸했고 섬뜩했다.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고 대화를 나누며 행복해야 할 식사 시간마저도 철저하게 고립되어 햄버거 하나와 사투를 벌이는 자신이 측은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p.126

소파에 앉은 구보는 어머니가 냉장고에서 꺼내 준 시원한 보리차부터 한잔 들이켰다. 그리고 라면을 끓여 먹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아까 코엑스몰 식당가에서 김밥 두 줄로 허겁지겁 저녁을 대신했던 터라 배가 출출했지만, 어머니가 손수 빚은 찹쌀떡 몇 개를 전자레인지에 해동해 먹는 것으로 간단하게 설요기를 했다. -p.298

 

 이 책에서 21세기를 사는 20세기풍의 지식인, 구보는 끼니를 챙길 때도 자신의 시대를 온전히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명동의 맥도날드에서 스스로에게 연민까지 느끼며 햄버거로 요기를 하면서, 행복해야 할 식사 시간을 되새기지만 정작 집에 온 그는 보리차조차 어머니가 꺼내 주고 직접 라면을 끓이는 대신 먹은 찹쌀떡은 어머니가 손수 빚었다. 그가 생각하는 맛있고 행복한 저녁 식사는 과연 누가 차리게 될까? 적어도 그가 차리는 밥상이었다면 그가 점심의 맥도날드에서 자기 연민까지 빠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결국 햄버거에서 느낀 서글픔은 어머니가 꺼내 주는 보리차에서 비롯된 셈이다.

 

구보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다. 강남대로 일대 빌딩의 유리들은 일제히 자살을 결심하고 지상으로 장렬히 몸을 던질지도 모른다. 이건 도시의 신의 분노가 극에 달했고 그의 인내심이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전조이리라. -p.299

 

 결국 화자는 21세기의 서울을 20세기의 파리로 끌고 가려하는 상품 물신의 파국을 경고하려 애썼지만, 이 책에서 드러난 것은 그가 20세기의 경성에서 왔다는 사실이었다.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간편하고도 거대한 파국을 상상하게 된다. 그리고 그 상상이 그의 부적응을 더욱 명확하게 증명하기도 한다. 김중혁의 단편 소설 유리의 도시를 인용하며, 강남대로를 가득 채운 빌딩들의 유리들이 비처럼 쏟아지는 상상을 해 보지만, 그것은 도시의 분노보다는 그의 분노가 현재 임계에 다다랐다는 전조에 더 가까워 보인다. 자신이 속하지 않은 상황의 모순일수록 더욱 거대해 보이는 법이다.

 

 화자는 어머니와 함께 사는 영등포의 아파트에서 아침 일찍 출발해, 숭례문, 경복궁, 서울광장, 롯데호텔, 세운상가, 홍대 입구, 코엑스몰, 가로수길, 강남역 등을 거쳐 자정에 가까워서야 다시 영등포로 돌아오는 긴 산책을 했지만 그가 보는 서울은 19세기의 파리 마냥 평면적이다. 롯데호텔의 지하 아케이드와 코엑스몰의 현란한 쇼윈도에서 마치 모두를 삼킬 듯한 물신의 현현에 근심하거나, 세운상가의 늘어선 쇄락처럼 버림받은 물신의 말로”(p.146)에 비애를 느낄 뿐이다. 이래서야 지금 이 거대한 서울 곳곳을 굳이 누빌 이유가 없다. 어디를 가도 물신의 흔적을 찾고, 있으면 두려워하고 없으면 안타까워할 뿐이니 명동과 삼성동에서도 차이를 찾지 못한다. 20세기 경성의 구보를 계승한 21세기 구보의 관점을 엿보는 데는 부족함이 없지만, 21세기 서울의 일상은 20세기 속에 갇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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