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모가와 호루모
마키메 마나부 지음, 윤성원 옮김 / 북폴리오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이달 초 67일 동안 교토에 다녀왔다. 이 회사에 들어온 후로는 매년 이 도시에 가고 있다. 대학 시절에 답사로 갔던 것까지 합하면 4번째 교토였다. 이번에는 엄마 아빠와 함께 34일을 보내고, 먼저 한국으로 가신 후에 혼자 34일을 보냈다. 걱정했던 정도의 문제는 없었지만, 역시 교토 역에서 배웅하고 나니 이제 막 교토에 도착한 것 마냥 기분이 들떴던 것도 사실이다. 1번 떠나, 2번 걷는 기분도 제법 괜찮았다. 

 

그것은 히가시 산의 단풍이 불꽃처럼 산의 사면을 물들이고 수학여행 온 학생과 관광객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교토 대로를 제멋대로 누빌 즈음의 일이었다. 나는 입학을 하고 거의 반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이와쿠라에 있는 다카무라의 자취 집을 찾아갈 기회를 얻었다. -p.98~99

 

 작년 12월 둘째 주쯤에 교토에 갔을 때는 단풍이 거의 졌던 까닭에, 올해는 일부러 그보다 1주일 정도 일찍 떠났다. 덜 물든 곳도 있었지만, 한창 붉게 타오르는 곳도 많아서 그저 눈을 뜨고 걷는 것만 해도 즐거웠다. 거리마다 교복을 입고 지도를 들고 몇 명씩 조를 이뤄 돌아다니는 학생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저 나이에 이 도시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구글 맵을 보며 편하게 교토를 돌아다닌 나는 그들이 꽤 부러웠다.

 

 지난해에 교토로 가서 읽으려고 챙겨갔지만 결국 고대로 들고 돌아왔던 소설을 올해 여행을 마치고 와서야 꺼내 들었다. 실은 이번 여행에도 이 책을 부러 다시 가져갔지만, 1쪽도 들추지 않았다. 실은 읽으려고 교토까지 가져 간 3권의 책 중 무엇도 읽지 않았다. 3년째 반복된 강박인 셈이다. 어쩌면 이 도시에서 내가 지치거나 재미없을까봐 나름의 대비를 하는 거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여태 그런 적은 없었다.

 

(다치바나 미카는) 원래는 류코쿠대 주작단이던 동아리 이름을 대만 마피아 같아 싫다는 이유로 선배들의 맹렬한 반대를 물리치고 류코쿠대 피닉스라고 개명한 여걸이다. -p.141

 

 이 소설은 교토대에 갓 입학한 아베, 다카무라와 같은 신입생들이 청룡회라는 수수께끼의 동아리에 들어가서 역시 교토에 있는 대학들인 리쓰메이칸대의 백호대’, 류코쿠대의 피닉스’, 교토산업대 현무파와 같은 이름만으로는 납득이 어려운 다른 동아리들과 상상할 수 없는 대결을 펼치는 이야기다. 그 와중에 이를테면 주인공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아베의 잡동사니 같은 연애사와 일상사까지 흩뿌려진다.


 오직 교토라는 도시에서만 가능할 법한, 기묘한 경기를 그려낸 이 소설은 분명 교토에서의 삶을 세밀하게 그려낸 풍속화와는 다르다. 오히려 이 도시 자체와 이 도시에서 보내는 일상이 어떤 상상력을 어떻게 불러일으키는지 선명하게 보여 주는 일종의 만다라라고 말할 수 있겠다. 서울에서 이 책을 읽고서야, 왜 교토에서 미처 읽을 생각을 못했는지 알 것 같았다. 두리번대며 밤낮으로 이 도시를 걷는 동안 이미 온갖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츠라 리큐를 보고서 어두운 밤에 다리를 건너 버스를 타러 천천히 걷고 또 걸을 때의 미묘한 즐거움이 떠올랐다. 단순히 낯선 도시의 알 수 없는 길이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두렵지는 않았으니까. 그저 무엇인가 있을지 모른다는, 있어도 나쁘지 않겠다는 분별없는 설렘에 가까웠다. 그런 까닭에 굳이 그곳에서, 하나같이 마음에 들었던 숙소들에서 이 책을 다시 펼칠 이유는 없었다. 이미 이 책을 하루 종일 걷고 왔으므로.


 아베는 같은 교토대 청룡회 신입 회원인 사와라 교코의 아름다운 콧날에 반해 이 미심쩍은 동아리에 눌러 앉았다. 그의 코가 아니었다면 이 소설은 존재할 수 없었다. 교토 도처에 숨은 괴이한 요괴를 모아 호루모라는 수상하기가 짝이 없는 경기에 나서기에는 충분한 동기다. 이리 기묘한데도 호루모에 대해 이 소설은 그리 세밀히 묘사하지 않는다. 이런 상상까지 가능한 교토라는 세계의 분위기에 집중한다. 그래서 오히려 더 그럴싸하게 여겨진 걸까.

 

사와라 씨의 자취 집은 어디였더라?”

슈가쿠인.”

꽤 머네.”

.”

혹시 걸어서 갈 생각이었어?”

, ?”

걸어가면 한 시간은 걸리잖아? 좀 위험하지 않나?”

고마워. 하지만 괜찮아.”-p.52

 

 무더운 여름 밤, 마루타마치 근처의 가모가와 강변에서 느닷없이 만난 사와라는 슈가쿠인의 집까지 걸어가겠다고 말한다. 그곳에는 동네 이름과 같은 슈가쿠인 리큐가 있다. 올해까지 3번을 다녀왔는데도 갈 때마다 더 아름답게 여겨지는 곳이다. 언제 교토를 가더라도 이곳을 빼 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걸어서 오갈 수 있다는 생각은 못했다. 꽤나 멀다고 여긴 곳이니까. 이렇게 다시 교토에 갈 이유를 찾은 것 같다. 요시다 신사도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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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01 21: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02 0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BRINY 2016-01-04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겨울 교토는 쓸쓸하고 추워서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시종님 글을 보니 따뜻한 규슈나 오키나와만 가지 말고 교토에도 더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자를 가이드로 앞세워서요~

로렌초의시종 2016-01-04 23:38   좋아요 0 | URL
겨울 복판의 교토도 전 마냥 좋았지만, 11월 말~12월 초의 가을 교토가 전 특히 마음에 들더라구요. 일본에서는 아직 간사이 몇 군데와 도쿄만 가봤는데 앞으로도 이곳들을 자주 갈 듯해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