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빛깔들의 밤
김인숙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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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묻은 곳은 나무 아래였다. 너무나 짧은 세월을 살다 간 아이가 나무로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서는 아니었다. 그곳에 묻는다면 적어도 다시는 그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아이가 사라지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 같았다. 사라지는 것은 한 번으로 족했다. 죽음도 마찬가지였다. -7쪽

젖먹이 아이 하나가 아직 남아 있었다. 아니, 젖먹이 귀신이었다. 그 어린 귀신은 순식간에 사라지는 방법을 알지 못해, 아직도 반이 남은 몸뚱이로 그의 아파트 안에 머물러 있었다. 반만 남은 몸뚱이에 반만 남은 팔을 뻗고, 안아달라는 듯이, 으앙으앙, 목을 놓아 울어대면서. -16쪽

씹새의 패거리들은 항상 다리 밑에 모였고, 그의 패거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17쪽

그는 소리에 미쳐 살다가 귀머거리가 돼서 죽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열여섯 살이 되기 전에 죽고 싶다고 생각했었던 적도 있었다. 무슨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냥 그랬다. 지금은 열일곱 살이 되어버렸다. -17쪽

머리가 참 동그랗다고 해서 네모라고 이름 붙여준 고양이였다. 조안은 늘 역설적인 것을 좋아했다. 주황색 눈을 가진 고양이의 이름은 블루였다. -21쪽

희중은 그 약들을 오래 쳐다보았다. 마법의 약들이었다. 어떤 약은 광장을 견디게 해주고, 어떤 약은 밀실을 견디게 해준다는...... 그리고 어떤 약은 기억을 없애고, 어떤 약은 기억을 찾아준다는...... 희중은 그 약들의 효능을 믿을 수가 없었다. 존재해야 할 것이 사라지고 사라져야 할 것이 존재한다면...... 그러면 조안의 삶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면 조안과 자신의 삶은 어떻게 될 것인가. -22쪽

결정적인 순간에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해 일을 망칠 때가 있었다. 그러니까 몸이나 주먹이 말을 해야 하는 순간에 머리가 먼저 쫑알대기 시작하는 것이다. 내가 왜 이 자식을 패야 하는 거지? 내가 왜? 그런 날은 어김없이 자신이 선빵을 맞게 되어 있었다. -32쪽

어금니를 앙다문 상윤의 입속에 더는 껌이 남아 있지 않았다. 주먹질을 하는 사이에 삼켜버렸을 것이다. 주먹이 한 번 날아갈 때마다 짝짝, 껌이 씹히는 소리가 났다. 입속에서가 아니라 몸속에서 껌이 맹렬하게 씹히고 있었다. -34쪽

상윤이 환기시킨 `아빠`라는 말 때문이 아니었다. 희중을 못 견디게 만든 것은 그 말이 과거형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일어나서는 안 될 온갖 일이 일어나는 동안, 그 참혹했던 모든 순간들에, 그에게 과거 시제 따위는 없었다. 모든 것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 양아치 새끼가 감히 말한 것이다. 아빠였잖아, 라고. -41~42쪽

사고 이후 영화가 싫어진 건 희중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조안처럼 영화 속에 등장하는 폭력을 감당할 수 없었다. 아무리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골라도 부지불식간에 폭력이 등장했다. 총알이 날아다니지 않고 차량이 폭발하지 않는다고 해서 비폭력적인 것은 아니었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주인공들도 상처를 입었고, 눈물을 흘렸고, 피를 흘렸다. -55쪽

형편 없는 애인을 챙기는 여자는 한심하기 짝이 없지만, 형편없는 동생을 챙기는 누나는 위대한 법이다. -87쪽

아버지가 미안하다고 말하는 소리를 난생처음 들어본 것 같았다. 미안하다는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아버지가 편안해진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또 그만큼 뻔뻔해진 것도 같아 미운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93~94쪽

복도에서 내려다본 새벽 한시의 아파트 주차장에는 빈틈 하나 없이 차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사람들의 차들이었다. 밤마다 하루도 빠짐없이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의 차들이었다. 그는 그 수많은 차들의 지붕을 내려다보며, 홀로 물었다.
누가 아프지 아니하냐. 지금 아프지 않은 사람은 누구이냐. -115쪽

카메라가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긴 무엇을 기대했을 것인가. 아이의 보모를 들이기 전 카메라를 구입할 때도 그들이 기대했던 건, 보모가 아이를 학대하는 장면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감시카메라의 기능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었고, 목적 역시 그러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희중의 유일한 소망이었다. -124쪽

상윤의 손에 들린 봉지가 보였다. 봉지 속에 들어 있는 게 보였는데, 또 소꼬리였다. 이 자식은 소꼬리밖에 살 줄 아는 게 없나! 엉뚱한 것에 왈칵 화가 치밀었다. 조안이 자신에게 남은 하나뿐이라면서 자기 누나가 채식만 하게 된 것조차 모르고 있는 것이다. -125쪽

세상의 수많은 거짓말 중에 자기 자식을 부인하는 거짓말이 있을 수 있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건 소음의 문제도 아니고 거짓말의 문제도 아니고 일종의 악의의 문제로 여겨졌다. -156쪽

그리고 미안한 것은 아마도 무서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생의 허방마다 도사리고 있는 불길한 일들이 무서워 어머니는 닫힌 문 앞에서뿐만 아니라 혼자 잠드는 당신 집의 방안에서도 미안하다, 미안하다 흐느껴 울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166쪽

조안의 고통과 슬픔을 이해하기는 쉬웠다. 그건 정말이지,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조안의 병을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침과 점심과 저녁마다 약을 먹고, 잠자기 전에도 또 약을 먹고, 비로소 그 약기운으로 숙면을 취하고, 비로소 그 약기운으로 살아간다는 걸 아무나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심지어는 동생인 상윤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168~169쪽

기차사고 이후, 좋지 않은 일에 대한 예감이 그에게서 사라진 적이 없었다. 그보다 더 나쁜 일은 있을 수 없으리라는 생각을 할 때마다, 늘, 어쩌면 세상에는 그보다 더 나쁜 일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곤 했었다. -184쪽

(건달인) 상윤에게는 보여줄 수 있는 문신이 없었다. 아버지 때문이었다. 어느 날 외국 출장에서 돌아온 아버지의 손목에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당시에는 결혼 전이었던 멕시코 여자의 이니셜이었다. 그때 아버지의 나이가 이미 오십 즈음이었다.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구역질 이후에는 분노였고, 분노 이후에는 증오였다. 성장기 내내 상윤은 아버지와 늘 불화했다. 아버지는 늘 상윤이 갖고 싶은 것을 먼저 가졌는데, 어머니가 그러했고, 돈이 그러했고, 금발 미녀가 그러했으며, 문신도 그러했다. 멕시코 여자가 금발도 아니고 원주민 혼혈이라는 것을 당시의 상윤은 알지 못했으나 알았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어떻덴 상윤은 그때부터 문신 따위에는 완전히 흥미를 잃어버렸다. -208쪽

그러나 시간이 많이 흘렀다. 위로조차도 받아들일 수 없던 마음이 물렁해져 이제 와서는 아무 상관도 없는 누구에게라도 위로를 받고 싶어질 만큼. -227쪽

˝잊을 수 없으면 지워야 하고, 지울 수 없으면 죽여야지 어쩔 거냐 이 말이지.˝ -229쪽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내 말은, 어떤 때는 사람이 모질게 맘을 먹어야 한다는 거지. 그래야, 산 사람은 산다는 거지. 산 사람은 죽은 사람이랑 같이 살아갈 수 없다는 거지. 그러니까 산 사람이 살려면 죽은 사람을 한번 더 죽여야 한다는 거지. 악착같이 그래야 한다는 거지. 그래야 그 죽음이 평화롭지 않겠나. 아무렴, 어린 아들놈하고 단둘이 있다가 심장마비로 죽는 것보다야 백번 낫지. 죽는 건 다 혼자 조용히 죽어야 한다는 것이지.˝ -229쪽

여자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것도 무섭지만 등뒤로 문이 닫히는 것도 무섭다고 했었다. -239쪽

아버지는 중학교 생물선생이었다. 학생들이 좋아하는 선생이었는지, 아니면 모욕적인 별명으로 불리는 선생이었는지는 모른다. 아버지가 자신의 직업을 좋아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280쪽

저녁때가 훨씬 지난 시간이었지만 상윤은 아직 식사 전이었다. 그가 사실대로 말하면 (누나인) 조안은 당장이라도 밥상을 차릴 것 같았다. 왜 굶고 다니느냐고 잔소리를 해댈지도 모른다. 예전에라면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상윤은 먹었다고 말했다. 조안이 예전과는 다를까봐, 그걸 확인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287~288쪽

그 모든 것은, 생의 어느 한순간에 시작되는 불행은, 단지 모두 다 우연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그 우연은 어떻게 끝을 맺어야 한다는 말인가. -314~315쪽

˝혼자가 되는 게 무서웠다고.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 다시 여름 방학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 그런 개 같은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고! 나한텐 당신도 있고, 아이도 있는데...... 우린, 그렇게 다시 완전해질 수 있는데...... 절대로 다시는 혼자가 될 수 없었어, 조안.˝ -322쪽

아무 이유도 없이, 혹은 모든 이유를 다 합쳐, 세상은 그들의 적이었다. -336쪽

사고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져버렸다. 그들은 무서웠고, 너무나 무서운 나머지 사랑만이 전부였다. 무서워서 고독했고, 고독해서 무서웠고, 그래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종교처럼, 마치 광신처럼...... 사랑해, 사랑해. 영원히 너만을 사랑해. 그 마음이 너무나 뜨거워서 두려울 지경이었다. -340쪽

자취방의 좁은 침대에 나란히 누워 희중은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열두 살의 여름방학에 대해 이야기했다. 천장만 바라보며 이야기를 했는데 베개가 어느새 축축했다. 그는 돌아누웠다. 그러면서 여자아이가 그를 안아서 다리 돌려눕혀주기를 바랐다. 여자아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희중은 여자아이가 떨고 있는 것을 알았다. 희중은 그 떨림이 슬픔 때문인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자아이가 돌려눕혀주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돌아누웠고, 그리고 여자 아이를 안으려고 했다. 여자아이가 비명을 질렀다. -349~3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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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21 2015-03-31 0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찌 글을 이리 잘도 쓰시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