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제국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그녀는 아현동의 재개발 예정 지역의 단층집에 세들어 살고 있었다. 곧 된다던 재개발은 하염없이 지연되고 있었고, 덕분에 그녀는 저렴한 전세금으로 몇 년째 마당에 사과와 목련이 열리는 나무들을 바라보며 살 수 있었다. 오래된 동네답게 하늘을 가리는 높은 빌딩이 없었고 골목들이 남아 있었다. 전봇대와 전봇대 사이에선 `경축, 재개발추진위원회 결성`이라는 플래카드만 남루하게 나부꼈다. -249~250쪽

˝우와, 신기하네요.˝
무능한 남자에게서 풍기는 이 매력은 진화과정의 산물이 아닐까? 그녀는 맥없이 웃었다. -268쪽

이 호텔(웨스틴조선호텔)은 유사시에 어디로든 달아나기 좋은 장소였다. 롯데백화점 쪽으로 가면 인파 속으로 파묻힐 수 있었고, 소공동 지하도는 남대문시장 입구까지 이어졌다. 명동이나 시청 방면의 무수한 지하 아케이드와 어두운 골목들도 도망자를 능히 숨겨줄 것이었다. 호텔의 지하 주차장은 프레지던트호델의 주차장과도 연결돼 있었다. -274쪽

˝내가 알기론, 무지가 인류에 도움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어. 무지는 모든 무의미한 폭력의 원천이었다구.˝ -278쪽

˝소지, 넌 작가잖아.˝
˝응, 그런데?˝
그녀가 대답했다.
˝혹시 작가로서, 그 어떤 일이 인생에 일어나도 기쁘게 받아들이겠다, 설마 이런 생각 하는 거야?˝ -283쪽

그는 평생 단 한 번도 그런 식의 에피그램에 매혹되어본 적이 없었다. 멋진 말, 재치 있는 표현, 역설적 수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그게 삶의 진실을 드러낸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284쪽

˝형은 변했어. 아니, 변했을 거야. 난 형을 알아. 형은 히레사케와 초밥, 하이네켄 맥주와 샘 페킨파나 빔 벤더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잖아? 제3세계 인민을 권총으로 쏴 죽이는 뫼르소의 이야기를 사랑하고, 극우파 게이 미시마 유키오의 미문에 밑줄을 긋는 사람이잖아? 일요일 오전엔 해물 스파게티를 먹고 금요일 밤엔 홍대앞 바에서 스카치 위스키를 마시는 사람이고. 안 그래? (북한으로) 돌아가기 싫어서 나한테 털어놓은 거잖아. 내가 잡아주기를 내심 바라는 거잖아. 아니야?˝ -289쪽

˝왜 있잖아. 아주 오래, 십 년 혹은 심지어 이십 년씩 장기 공연하는 연극들 있잖아. 형은 그런 연극에 너무 오래 출연해서 자기가 원래 누구였는지를 잊어버린 사람 같아. 낮에는 어떻게 살든지 간에, 밤에는 그 배역으로 사는 사람. 그러다보니 낮의 삶보다 밤의 삶이 더 일관성이 있는 거야. (하략)˝ -290쪽

그는 연신 목덜미를 만지며 취객들이 약 먹은 바퀴벌레처럼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하는 거리를 걸었다. -329쪽

요약하자면, 역사상 유명한 스파이는 모두 실패한 스파이다. 최고의 스파이들은 절대 발각되지 않고, 그래서 조용히 은퇴해 노후를 즐기다 죽는다. -345쪽

깨끗한 인간이란 없다. 아직 그럴듯한 유혹을 받지 않았을 뿐. -345쪽

˝(전략) 지금 내가 견딜 수 없는 건, 당신이 내 고통을 뻔히 알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자기 고통과 견주고 있었다는 거야, 아니야? (중략) 당신 마음속엔 그 빌어먹을, 고통의 우월성에 대한 확신이 있었어. 자기 고통을 절대화하고 그것만 최고인 줄 아는 이기주의자, 독선주의자. (후략)˝ -349쪽

˝좀전에, 그러니까 좀전에 말야. 마리랑 만났어.˝
˝네에......˝
˝마리랑 만났는데......˝
울컥, 감정이 북받쳐올라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지만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순간 그는 문득 소지가 마리와 자신의 결정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지는 그것을 통해 조용히 자신의 결심을 알리고 있었다. 기영은 그녀가 자신의 인생에 더는 개입하지 않기로, 그런 위험한 모험을 떠나지 않기로 결심했음을 직감했다. 그는 화제를 돌렸다. 마지막에라도 좀 현명해질 필요가 있었다.
˝아, 아니다. 내가 괜한 소리를 할 뻔했네. 그래, 그럼 잘 있어.˝
˝그래요, 나도 그만 자야 될 것 같아요. 내일 다시 통화해요.˝
˝이 전화는 곧 버릴 거야. 아마 오래 통화 안 될 거다. 좋은 작품 써라.˝
˝......형도 몸조심하세요.˝ -363~364쪽

˝그러니까 개새끼라고. 아무 생각 없이 제 할 일만 하는 거, 그게 바로 개새끼야.˝ -370쪽

˝(전략) 저는 부모로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자식들에게 아름다운 추억을 많이 만들어주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저는 또 부모로서 더 중요한 일은 가능하면 끔찍한 기억을 남겨주지 않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후략)˝ -3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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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LA 2014-09-17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척 마음에 드시나 봐요 ㅎㅎ

로렌초의시종 2014-09-18 10:28   좋아요 0 | URL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갔더니 그대로 채워 준 것 같아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