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풀 사이언스 - 아름다운 기초과학 산책
나탈리 앤지어 지음, 김소정 옮김 / 지호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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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들보다 오래 대학에 머무는 동안 여러 강의를 들었지만, 자연과학에 대한 강의는 솔직히 말하자면 단 하나뿐이었다. 비전공자인 나 같은 사람이 들을 수 있는 강의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을 뿐더러,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 사이에서 지적 균형을 잡아야한다는 당위성보다는 흥미를 끄는 다른 강의들에 대한 현실적인 욕구가 항상 앞섰기 때문이다. 그래도 대학에서 들었던 단 하나의 자연과학 강의가 아직까지도 조각으로나마 기억에 남아있는 건, 워낙 희소한 경험이었던 탓인지도 모르겠다. 자랑은 아니어도. 그 강의의 교수님은 화학과 교수님이셨는데, 우리가 흔히 쓰는 ‘과학기술’이라는 단어에 유난히 민감하셨고, 거부감을 표시하셨다.

 이제는 너무도 흔하고 게다가 당연하게 쓰이는 이 단어가 왜 그리 싫으셨을까? 기억은 어렴풋하지만, 교수님은 이론을 다루는 과학과 현실을 다루는 기술이 혼용(混用)하는 이 단어가 과학에 대한 우리 사회의 오해를 초래하는 근원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후로 나 역시 과학기술이라는, 너무도 친숙했던 단어의 사용을 자제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이유에 대해서도 나름의 생각을 덧붙여보게 되었다. 이론이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을 이해하고 설명하며 연구한다면, 기술은 그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변화를 추구하기에 단순히 서로 공유되는 측면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결합시키기에는 지향점이 매우 다르다. 좀 더 나아간다면, 이론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있지만, 기술은 현실화 내지는 상용화가 목적일 수밖에 없다고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 중에서도 기초과학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그에 있을 것이다. 현실에 적용되는 기술과 바로 등을 맞대고 있는 응용과학들과 달리, 현실적인 조건과 제약에 구애받지 않고, 오직 우리 자신과,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 우주에 대한 이해만을 추구할 수 있으니 말이다. 역설적이게도, 현실을 탐구하고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 현실이 주는 어떠한 제한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이 기초과학이 과시하는 아름다움의 원천이다. 기초과학의 탐구 대상은 우리의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현실의, ‘안정적인 표면’이 아니라 그 현실을 지탱하는, ‘유동적인 이면’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기초과학들은 거대한 현실에 대한 자유로운 상상과 그로부터 도달한 미세한 현실에 존재하는 법칙을 아우르고 있다.

 그렇다면, 무한한 상상력이 허용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우리가 지각할 수 없는 미세한 현실의 법칙으로서 실제로 수용되기까지 하는, 이토록 아름다운 기초과학과 우리는 왜 이리도 멀어졌는가? 바로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저자는 먼저 개별적인 기초과학 학문과 별개로 세 개의 주제를 가지고 말문을 연다. 과학적으로 생각하기, 확률, 척도라는 언뜻 보기에는 뭔가 어색해보이는 이 세 조합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결국 기초과학과 우리를, 자연과 우리를, 우주와 우리를 떨어뜨린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의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편견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한계가 명백한 감각과 지각 속에 스스로를 속박하고 있으며, 그 결과 기초과학을 추하다고 곡해하기에 이르렀다.

 ‘과학적으로 이해하기’에서 기초과학은 우리의 생각과 달리 수학과 불가분(不可分)의 관계에 있지 않으며, 수학은 자연을 표현하는 방법이지만 자연을 이해하는 필수조건이 아니라는 지적은 그동안 과학과 수학의 관계에 대해 품고 있던 오래된 오해를 해소시켜 주었다. 수학과 과학 사이의 이러한 관계에 대한 이해는, 실상 과학 전체를 관통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과학은 찬반을 따지는 의견이 아니며, 증거와 사실의 양적이고 질적인 누적을 통해 객관적인 진실을 추구하는 학문이지만, 동시에 과학은 끊임없이 새로운 불확실성을 추구한다. 진실을 추구하더라도, 그것이 완벽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그 진실 속에 새로운 불확실성, 곧 새로운 진실 추구의 목적을 찾는 것이 과학이다. 수학이 그렇듯이, 과학이 필요로 하는 것이 오직 진실뿐이라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과학은 오직 가능성만을 원한다.

 이어지는 확률의 부분에서 저자는 우리가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서 형성한 협소한 인지구조를 벗어나면, 이 세상은 어떤 사건이라도 결국은 일어날 수 있으며 그런 원인을 이미 충분히 내포하고 있는, ‘우연이 우연일 수 없는’ 세계임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의 직감이 사건이 일어날 확률을 조작하도록 허용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우연이 아닌 사건을 우연이라고 오해하는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확률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우연을 이용해서 과학의 엄밀함을 부인하려하는 우리의 편견에 대한 해법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이러한 해법 위에서 우리는 과학이 가진 광범위한 확률을 바탕으로 더욱 더 자유롭게 가정하고 상상하도록 자극받게 된다. 우리가 상상한다면, 과학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줄 준비가 되어있으니 말이다.

 확률이 자신의 협소한 인식에 광대한 현실을 끼워 맞추려는 우리의 지각적인 한계를 지적한다면, 척도는 자신의 신체기관을 통해서만 현실을 이해하려하는 우리의 감각적인 한계를 지적한다. 우리의 신체, 두뇌로 인지할 수 없는 너무나 크거나 작은, 시간과 공간의 범위가 있으며, 기실 과학이 다루고 있는 대상들은 바로 이러한 범위에 속해있다는 사실은 궁극적으로는 과학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로 확장된다. 사실 이 책을 통해 배우게 된 가장 결정적인 사실은 과학에 대한 이해가 결국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이며 따라서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름다운 만큼 과학도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과학적 인식에 바탕한 자유로운 상상은 가능하며, 이것이야말로 과학에 대한 이해의 시작임을 실감했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척도’ 부분에서 언급되는 우주의 크기에 대한 마르텐 슈미트의 관점이다.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우주의 끝이 우리 은하와 가장 가까운 안드로메다 은하 사이의 거리의 3천배 떨어진 지점이라는 가정이 먼저 제시된다. 이로부터 이 노(老) 학자는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집이 100미터 정도 떨어져있다고 생각해본다면, 그 거리보다 3천 배 먼 곳이라 해도 겨우 300킬로미터에 불과하기에, 이를 우리 우주에 대입한다면 지름 300미터의 원에 둘러싸인 관리하기 쉽고 균형 잡힌 곳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을 보여준다. 물론 그 자신부터 이런 생각이 완전히 허점투성이라고 인정하고 있지만, 이런 상상이야말로 진정 자유로우면서도 법칙에 부합한다고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우주를 인간의 관점으로 끌어들여서 축소시켰듯이, 과학에서는 우리 주변을 미생물의 관점에서 확대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이러한 자유와 법칙의 공존은 과학 자체에는 항상 적합한 기준과 확률의 법칙이 준비되어 있기에 가능하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참으로 놀랍다. 바로 이 세계, 엄밀하고 체계적이면서도 작은 것이 무한히 커지고, 무한히 큰 것이 작아질 수 있는 무한한 자유를 우리에게 주는 세계, 그리고 우리 자신이 이런 세계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말이다. 그보다 더 아름다운 사실이 어디 있는가? 무엇보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무한한 상상의 주역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기에, 기초과학은 ‘아름답다’는 수식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미세하다는 말로도 표현이 안 되는 원자의 내부는, 핵과 핵을 중심으로 쉴 새 없이 회전하는 전자 사이가 텅 빈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 밑도 끝도 없는 공간 속으로 추락하지 않고, 이렇게 자판 위에서 손가락을 두드리고 있다. 어째서? 원자핵은 모두 음전하를 띤 전자에 둘러싸여있기 때문에 각 원자들은 서로 반발력을 띠게 된다. 이 ‘전자기력’은 ‘강한 핵력’ 다음으로 강해서 그 크기가 무려 10의 40승에 달한다. 결국 내 엉덩이는 그런 힘에 맞서서 지금 앉아 있는 의자를 뚫고서 지구의 핵으로 돌진하기에는 너무 무력한 것이다. 하나만 더, 왜 서로 다른 전하를 띠고 있는 전자와 원자핵의 양성자는 서로 껴안고서 원자를 터뜨리지 않는지를 이야기하자면, 둘이 만나기에는 전자의 운동량이 너무 크다.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의 원리’에서 전자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알 수는 없다고 설파한 대로.  

 앞에서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 이 순간에 대해서 무한하면서도 납득 가능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준 무대는 물리(物理)로부터 마련되었다. 그렇다면 물리와 한 쌍으로 내 고등학교 시절을 괴롭혔던 화학은? 수분을 제외한 우리 몸은 탄소로 이루어져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무엇보다 탄소는 다양한 원자들과 견고하면서도 다양한 형태로 결합할 수 있기에, 신체 내의 어떤 조직이라도 탄소결합을 기본 골격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자유로운 형태의 구성을 통해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는 탄소결합의 장점은 지금보다 훨씬 혹독한 환경이었던 생명 탄생 무렵 지구에서 생존하기 위한 적응의 결과였다. 심지어 지금 우리가 섭취하는 음식물의 대부분도 탄소 화합물이어서, 우리 몸은 그 안정된 화합물이 분해될 때 나오는, 저장되어 있던 에너지를 흡수하고 있다고 한다.  

 탄소라는 원자를 매개로 지금 나의 신체가 기능할 수 있는 안정성이 머나먼 과거의 혹독했던 지구와 이어지고, 동시에 그러한 탄소의 안정성은 지금 이 순간 내 신체의 외부와 내부를 이어주는 에너지의 공급원(供給源)이 이뤄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탄소 원자가 다른 원자들과 결합하는 힘이 조금만 약했던들, 지금의 내 신체 구조는, 내가 먹는 음식들은 어떻게 바뀌었을지, 화학으로부터 또 다른 상상의 무대가 주어졌다. 이러한 원자들로 구성된 생물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분자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신체 내부를 보니 또 다른 놀라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실상은 간단명료하다. 나 자신은 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수행할 수 없는 복잡 미묘하며 다급한 임무를, 나의 신체(특히 간)은 항상 무리 없이 완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숨 쉬고 있는 건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 내 안의 무엇 덕분이다.  

 처음으로 접한 나탈리 앤지어의 저서는 미국에서 인정받는 과학 작가의 저술답게 명쾌하면서도 신중하고, 진지하면서도 유쾌했다. 기초과학이라는 부제에, 서슴없이 ‘아름다운’이라는 형용사를 적어 넣을 수 있는 저자라면, 분명 뭔가 다를 거라는 예상이 시원스럽게 맞아 들어간 책이었다. 과학에 대한 그녀의 지극한 애정과 참신함은, 과학이 일방적으로 암기하거나 복종해야 하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며, 오히려 지금까지 이룩된 과학의 발전 위에서 우리가 상상하고 증명해야 할 더 많은 불확실성과 가능성이 탄생했음을 보여주었다. 과학이 우리들에게 그저 고압적이고 지루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도록 방치하기에는 그녀의 과학 사랑이 너무 지극했다.  

 그녀의 서술은 독자를 의식하되, 아첨하지는 않는다. 전문적인 지식을 마냥 쉽게 풀어헤치기 보다는, 먼저 기초과학에 접근하기 위한 기본적인 인식의 틀을 확립하는 동시에, 개별 과학들 사이의 연관성을 중시하여 책을 읽는 동안 전체적인 이해의 틀을 형성하도록 도와주었다. 개별 과학마다 하나의 주제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는 부분도 적지 않아, 반복의 효과도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 본 참고서들은 암기를 목적으로 반복해서 보았다면, 요즘 읽는 대부분 소설들은 공감이 목적이기에 반복해서 읽지 않는다. 그에 비해 이 책은 암기가 아닌 이해를 위해, 지난 페이지를 다시 들추며, 읽고 있는 페이지의 내용과 연결하도록 했다. 억지로 쉽게 풀어서 한번만 보고도 전부 이해한 것처럼 가볍게 지나치도록 하는 대신, 적절한 인도(引導)로 구조(構造)의 맥을 잡아준 저자의 명민함이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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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okk73 2017-10-23 2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고르던 중 리뷰를 정독하기는 처음이네요..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