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론물리학자다. 새로운 물리 이론을 만들어 논문을 쓰는 게 내 일이다. 논문을 왜 쓰는가? 승진, 인정, 명성 등 여러 가지 현실적인 이유를 들 수 있지만, 가장 원초적인 이유는 남들과 공유하고 싶은 나만의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남들이란 나와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다른 연구자들이다. 대상이 좁을 수밖에 없다. 전 세계를 다 훑어봐도, 내가 반년 동안 온 힘을 기울여 완성한 논문을 읽고 관심을 가질 만한 사람은 겨우 스무 명 남짓하다. - P11

더 이상 대학교에서 승진의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될 나이, 30여 년의 연구 경험, 그리고 지난 수년간의 대중 강연과 글쓰기 경험. 이런저런 요소를 모아봤을 때 내가 책 한 권쯤 써도 좋을 시점이란 생각이 들었다. - P12

(엠페도클레스는 불, 흙, 공기, 물의) 네 원소가 서로 결합하거나 분해되면서 물질이 형성되고 붕괴한다고 보았는데, 결합하는 힘은 사랑이요 분해하는 힘은 미움, 혹은 갈등이라고 불렀다. 요즘 말로 하자면 입자와 입자 사이의 끄는 힘이 사랑이고, 서로 미는 힘은 갈등이라고 부른 셈이다. 독특한 이론만큼 독특한 인격의 소유자였던지, 엠페도클레스는 자신이 신이라 믿었고, 자기 몸이 부활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고향 시칠리아 섬의 에트나 화산에 몸을 던져 세상을 떠났다는 속설이 있다. - P19

흔히 환원주의reductionism라고 부르는 관점을 자연과학자들은 대단히 좋아한다. 될 수 있는 대로 적은 수의 변수만을 동원해서 나머지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 체계를 만들어보겠다는 것이 환원주의적 태도이다. 환원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플라톤의 개념은 데모크리토스의 개념보다 분명히 한층 ‘현대적’이다. 무한 개의 원자를 단 4개의 원자로 줄여버렸으니 말이다. 플라톤이 생각했던 것보다 좀 많긴 하지만, 지금까지 발견된 원자의 종류는 겨우 100개 남짓하다. - P25

모든 원자는 완벽하게 동일하고, 따라서 원자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분자도 완벽하게 동일하다. 왜 모든 원자는 완벽하게 동일한가. 일단 그 원자를 구성하는 재료, 즉 전자와 양성자와 중성자가 우주 어디서 구해 왔든 상관없이 모두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모든 양성자는 서로 동일하고, 모든 전자도 서로 똑같을까? 그건 자연법칙이 단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약 지구에서 발견된 전자의 질량과 안드로메다에서 발견된 전자의 질량이 서로 달랐다면, 은하계와 안드로메다의 물리법칙은 서로 달라야만 한다. 하지만 그렇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매우 세속적인 사고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에이, 세상에 완전히 똑같은 게 어디 있어. 아주 조금씩은 차이가 나겠지"라는 쪽에 오백 원을 걸겠지만 어쩌겠는가. 우주에는 정말 단 한 종류의 전자, 단 한 종류의 양성자, 중성자밖에 없다. 우주는 순진하리만치 적은 가짓수의 재료만을 사용해 요리를 만드는 주방이다. - P41.42

복제의 비법은 양자역학이 제공하는 자연의 디지털화에 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차이는 CD와 LP의 차이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CD는 음악의 정보를 0과 1이란 숫자의 조합으로 변환한다. 0과 1 사이에 무수히 많은 다른 숫자들이 있지만 이런 것들은 하나도 정보 저장에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0과 1이란 숫자의 배열로만 정보를 저장한다. 그러다 보니 CD는 0.25, 0.872에 해당하는 정보는 저장하지 못하게 되고, 미묘한 음색의 차이까지는 살려내지 못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반대로 LP에는 그런 미묘한 차이가 허용되기 때문에 동일한 앨범 두 장을 사더라도 재생되는 음악이 완전히 같을 수 없다. 한쪽에서 0.872로 저장된 음이 다른 LP판에선 0.873으로 저장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정성 들여 판을 제조한다고 해도 이런 미묘한 차이까지 모조리 제거해서 완벽한 복제판을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까닭에, 만약 우리가 저장하고 보존하려는 정보가 완벽히 재생, 재현 가능한 것이어야만 한다면, 아날로그 방식 대신 0과 1 같은 디지털 저장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다. - P43.44

원자는 호텔과 같다. 호텔의 몇 번 몇 번 방에 손님이 투숙했느냐에 따라 그 호텔의 상태가 완벽하게 결정된다. 궤도라는 개념 대신 방 번호(양자수quantum number)로써 물질의 상태를 규정하는 것이 양자역학의 진수다. - P45

과학자가 가장 슬퍼해야 할 때는 그가 했던 일이 실패했을 때가 아니라, 무의미할 때이다. - P45

다시 말하면 위치에너지와 운동에너지를 합한 양, 총 에너지는 시간이 흘러도 바뀌지 않는 불변량이다. 뉴턴Sir Isaac Newton의 운동방정식을 이용하면 쉽게 증명할 수 있는 사실이다. 계곡물이나 폭포수가 떨어지는 과정은 위치에너지가 운동에너지로 변환하는 과정에 불과하며, 어떤 운동이든 총 에너지는 일정한 값을 유지해야만 한다. 불변량의 관점에서 보기 시작하면 다양한 운동현상이 하나의 일관된 원리에 따라 작동한다는 걸 알게 된다. - P57

어떤 물질의 상태를 표현하는 위상수학적인 숫자는 그 대상의 이름을 붙이는 데 사용하기 딱 좋다. - P61

새롭게 발견된 사실 앞에서는 아무리 우아한 이론이라도 무력해진다. 현실과 맞지 않는 이론은 폐기될 수밖에 없다. 톰슨(켈빈 경Lord Kelvin)이 제안한 위상수학적 원자 이론은 현실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 P71

입자물리학의 표준모형에서는 전자나 쿼크 같은 기본 입자의 안정성을 처음부터 주어진 (자명한) 사실로 받아들인다. 다시 말하자면 입자의 안정성 문제는 완전히 풀리지 않은 채 그대로 봉인된 셈이다. - P75

통상적인 물리학 역사에서 잘 다루지 않는 위상 원자(톰슨), 위상입자(스컴Tony Skyrme) 이론을 이렇게 정리하다 보니 묘한 생각이 든다. 버밍엄에서 인생 궤적이 겹쳤던 스컴, 바이넌William Vinen, 사울레스David Thouless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스컴의 핵자 이론은 대표적인 위상수학적 입자 이론이다. 바이넌은 헬름홀츠 시절부터 위상수학적 상태로 잘 알려진 소용돌이에 대한 연구로 명성을 쌓은 사람이다. 사울레스는 (앞으로 자세히 다루겠지만) 양자 물질에서 발현되는 위상수학적 상태를 이론적으로 연구한 학자였다.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르겠지만 2016년 위상 물리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상을 공동 수상한 사울레스와 다른 두 명은 모두 영국인이었다. 톰슨으로부터 시작된 위상학적 물리학의 정신이 은연중 그 후배들에게 스며든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게 만든다. 이런 게 바로 학문적 전통 아닐까? - P76

잘 생각해보면 어떤 층에 있는 방의 딱 절반만 숙박 손님으로 차 있을 때 손님의 유동성도 가장 좋아질 것이란 짐작이 간다. 절반보다 적으면 이동할 수 있는 손님의 수 자체가 적어 유동성이 줄어든다. 절반보다 많으면 이번엔 이동할 수 있는 빈 공간이 적어져서 유동성이 줄어든다. 딱 절반을 채운 상태가 유동성을 늘리기 위한 최적의 조건이다. 마침 전기를 가장 잘 통하는 금, 은, 동 같은 물질의 전자 구조가 꼭 이런 상황이다. - P84.85

새로운 연구 주제를 찾는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이전 연구자들이 고려하지 않았던 변수 하나를 추가하는 것이다. 제이만Pieter Zeeman은 자기장이라는 새로운 변수를 그의 연구에 도입했다. 그 결과는 놀라웠고, 당대 물리학자들에게 머리를 싸매고 고민할 문제 하나를 제공해주었다. 그 덕분에 파울리의 배타원리도 탄생했다. 놀라운 실험은 놀라운 이론을 잉태한다. - P89

뛰어난 이론가의 역할 중 하나는 실험물리학자들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방향을 제시해주는 일이다. - P90

한 덩이의 물질 속에는 아보가드로의 수라고 하는 10의 23승 개, 혹은 그 이상의 전자가 살고 있다. 이 많은 전자들이 낮은 층의 방부터, 남녀 한 쌍씩 자리를 차곡차곡 차지하고 앉아 있어야 한다. 자연히 파울리 호텔의 층수는 어마어마하게 많다. 대부분의 전자들은 상온, 즉 절대온도 300도의 군불을 때줘도, 그저 가만히 앉아 있다. 빈방은 너무나 높은 층에 있기 때문에 도저히 낮은 층에 있는 전자가 올라갈 도리가 없다. 조상님께 물려받은 금두꺼비를 금고에 보관해두고 10년 만에 다시 꺼내보아도 그 광택이 바래지 않는 것은 배타원리 덕분이기도 하다. 금덩이 안에 있는 대부분의 전자들이 할 일이란, 그저 ‘아무것도 안 하기‘ 밖에 없다. 전자들이 아무것도 안 하니 금두꺼비 상태가 변할 리 없다. - P97

전자의 상태를 표현하는 수학적 함수를 파동함수라고 한다. 이 파동함수를 들여다보면 그 전자 상태의 마디 개수를 셀 수 있다. 어떤 전자는 물질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가는 사이에 주름을 세 번 접는다. 다른 전자는 네 번, 또 다른 전자는 다섯 번, 이렇게 전자마다 주름의 개수가 다르다. 전자의 상태를 구분하는 방법은 바로 이 주름의 개수를 세는 것이다. 물질은 보통 3차원적이니까 주름도 X, Y, Z 각각의 방향으로 다 접혀 있다. X방향으로 주름이 A번, Y방향으로 B번, Z방향으로 C번 접혀 있는 꼴이다. 다 모아보면 3개의 정수 A, B, C가 그 전자의 주름진 상태를 표시해준다. 이 숫자의 모임이 바로 파울리 호텔의 방 번호다. 전자는 예외 없이 물질 전체에 편재해 있지만,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편재하는 것은 아니다. 각각의 전자는 서로 다른 주름 수 (A, B, C)를 갖고 있다. 파울리 호텔은 지구상의 여느 호텔처럼 실제 공간에 토대를 쌓고 지은 건물이 아니라 이런 추상적인 공간, 즉 (A, B, C)란 정수의 집합이 존재하는 수학적인 공간에 세워져 있다. - P100

그 26년 동안 오너스Heike Kamerlingh Onnes가 과학적인 성과라고 할 만한 것을 딱히 거두었을 리 만무하다. 그가 했던 일이라고는 그저 세계 최고의 저온 냉장고를 만들기 위해 장비를 설계하고, 설계를 수정하고, 장비를 만들고 관리할 전문 숙련공을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과학자의 인생이나 그의 성취를 너무 낭만적으로 묘사하거나 영웅시하는 일은 물론 경계해야겠지만 이 대목에서 한 번쯤 가슴 뭉클해지는 감정이 들지 않을 수 없다. 26년이란 세월을, 딱히 세상에 자랑할 만한 논문 한 편도 없이, 어떻게 버텼을까! 오너스의 집념, 그 주변 사람들의 이해와 도움, 그리고 그의 연구실에서 하는 사업을 꾸준히 지원해주었던 네덜란드라는 국가나 레이던대학교의 제도 등을 상상해보면 놀라움과 부러움과 존경심이 한꺼번에 교차된다. - P114

온도가 올라갈수록 하나의 물질은 더 작은 구역으로 갈라지고, 더 많은 종류의 파동함수가 각자의 소구역을 관리하는 지역 영주 노릇을 한다. 이런 상태를 양자역학에서는 ‘결이 깨졌다decoherent‘고 표현한다. 결이 많이 깨진 물질일수록 하나의 파동함수로 기술할 수 있는 영역이 작다. 거꾸로 말하면 물질의 온도를 내릴수록 서로 결이 맞는 영역은 점점 넓어지고, 절대영도에선 그 물질이 통째로 하나의 결, 즉 하나의 거대한 파동함수로 기술된다. 아래 보이는 그림처럼, 온도가 낮아지면서 서로 군웅할거하던 파동함수가 하나의 함수로 천하통일된다. - P119

그(오너스)가 만든 절대 냉장고에 집어넣었을 때 비로소 양자 물질적 본성을 드러내고, 상온에서는 보이지 않던 기묘한 물성을 발현하는, 그래서 노벨 물리학상의 영광까지 누렸던 물질을 하나씩 꼽아보자. 우선 저항이 없는 금속과 액체, 즉 초전도체와 초액체가 있다. 초전도체와 관련된 노벨상 수상은 역대 세 번 있었다. 초액체와 관련된 노벨상 수상은 무려 네 번이나 있었다! 나중에 6장 ‘양자 홀 물질‘에서 다룰 2차원 전자계는 이른바 위상 물질의 첫 사례였다. 그 발견 역시 차디찬 냉장고 속에서 이루어졌다. 양자 홀 물질의 발견 혹은 그 이론에 대한 노벨상 수상은 세 번 있었다. 21세기 물리학의 중요 쟁점이 될 게 분명한 양자 컴퓨터가 작동하는 환경도 절대영도 근방이다. 말 그대로 물질의 양자성이 제대로 발현될 때만 작동하는 게 양자 컴퓨터이니만큼, 극저온 환경이 꼭 필요한 것도 당연하다. - P138

빛에 대한 이해가 정확해지면서, 드디어 "빛도 입자구나!"라는 자각에 도달했고, 그 깨달음을 바탕으로 입자와 물질에 대한 양자역학 이론이 탄생했다. 거꾸로 말하면, 과학자들은 빛이 입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서야 비로소 양자역학이란 건물을 지을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 양자역학의 한가운데에는 플랑크상수라는 수가 하나 있다. 어떤 물리학 공식이나 풀이에 이 상수가 등장한다면, 그 수식은 결코 뉴턴식 역학에서 유도할 수 없는, 온전히 양자역학적인 틀 안에서만 존재하는 결과라는 뜻이다. 양자역학에서 절대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 상수, 따라서 모든 양자 물질 이론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 상수가 도입된 역사적인 맥락은 흥미롭게도 빛의 기묘한 거동을 이해하려는 시도였다. - P144

모든 정보를 디지털화해버린 컴퓨터를 통해 우린 아날로그적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본다. 초당 24개 이상의 화면을 보여주기만 하면 그걸 연속적인 영상, 즉 영화로 착각하는 게 우리의 시각적 능력인데, 수억분의 1초, 수조분의 1초 사이에 벌어지는 원자의 빛 방출 현상에 대해 우리의 경험이 어찌 단호한 판단을 내릴 수 있겠는가.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우리의 불완전한 인지 능력이 가진 허점을 교묘하게 파고들어, 빛도 디지털적 존재라고 볼 여지가 충분히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직접 보지 못한 것에 대한 우리의 불완전한 경험을 근거로 섣불리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 20대 중반의 청년 아인슈타인이 스스로에게 내린 명령이었다. 그리고 그는 플랑크Max Planck가 말했던 진동자가 곧 빛이라는 해석을 조심스럽게 내비친다. 이 새로운 해석에 따르면 플랑크가 상정했던 hf라는 에너지 덩어리를 갖는 존재는 바로 빛이었다. - P160.161

아인슈타인의 광전효과 논문은 물리학자로서 그의 강점이라고 할 만한 사고의 흐름을 잘 보여준다. 아인슈타인은 왜 빛에너지가 양자화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굳이 구하지 않았다. 빛을 양자화하기로 선택한 것은 자연이고, 우리는 그저 자연이 택한 방식이 주는 함의를 잘 탐구하기만 하면 된다. ‘만약 빛이 광자라면…‘이라는 취지로 시작되는 그의 논문 8단원(광전효과 논문은 총 9단원으로 구성되어 있다)은 이런 아인슈타인의 사고 흐름을 특히 잘 보여준다. 일단 빛이 광자라는 사실에 우리가 동의한다 치고, 그 가설을 검증할 만한 실험 하나를 제시한다. - P161

뉴턴역학의 체계에선 질량이 없는 입자라는 것 자체를 상상할 수 없고, 만약 그런 입자를 억지로 가정한다면 그 입자의 운동량은 항상 0이 될 수밖에 없다. 아인슈타인이 제안한 새로운 역학 체계에선 질량이 더 이상 입자의 절대적인 속성이 아니다. 설령 질량이 없는 입자라고 할지라도 운동량과 에너지라는 속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특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빛 알갱이는 c라는 빠르기로 끊임없이 움직이는 에너지 덩어리다. - P163

반면, 가장 근본적인 방정식을 찾아내고, 그 방정식의 풀이를 통해서 자연의 작동 방식을 수학적으로 유도하고자 하는 좀 더 근본주의적 접근법이 있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이나 일반상대성이론은 이 범주를 대표하는 업적이고, 그 덕분에 아인슈타인은 뉴턴과 함께 물리학 최고의 근본주의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사실 아인슈타인은 현상론적 이론을 만드는 데도 어마어마한 능력이 있었다. 현상론자는 실험 결과가 주는 속삭임에 예민하게 귀기울이는 반면, 근본주의자는 이론 자체의 엄격함, 완전무결성에 흥분한다. 1급 현상론자가 동시에 1급 근본주의자가 되기 힘든 이유는 각기 요구하는 기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그 이분법적 분류를 초월한 20세기 최고의 현상론자이면서 동시에 근본주의자였다. - P167168

보스Satyendra Bose와 아인슈타인의 논문이 발표된 지 몇 년 뒤에는 온 우주의 입자를 딱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한 종류는 페르미온fermion으로, 전자는 이 집단에 소속된 대표적인 입자다. 다른 부류의 입자는 보스의 이름을 따서 보손boson이라고 부른다. 광자는 가장 대표적인 보손이다. 두 종류의 입자는 각각 파울리 호텔과 보스 호텔에 거주한다. 파울리 호텔의 거주 규칙은 3장 ‘파울리 호텔‘에서 설명했고, 보스 호텔의 거주 규칙은 조금 전 설명했다. 페르미온 부류에 속하는 입자는 개인주의적이고 독거주의자다. 반면 보손은 보스 호텔 제일 아래층에 모여 있기를 좋아한다. 높은 층으로 올라가는 건 힘(에너지)만 들 뿐이다. 1층에도 얼마든지 들어갈 자리가 있기 때문에 아무리 마천루 같은 보스 호텔을 지어줘도 보손은 그저 1층에만 모여있으려고 한다. - P175

상자 속에 (보손인) 원자를 잔뜩 모아놓으면 이 원자들 역시 보스호텔의 규칙에 따라 각자 들어갈 방을 정한다. 물론 원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방은 1층에 있고, 가능한 많은 원자들이 다 1층에 들어가려고 한다.
아인슈타인은 이런 원자의 특성과, 잘 알려진 수증기의 응축 현상 사이의 유사성을 깨달았다. 한증막에 가면 수증기의 밀도가 아주 높은 탓에 우리 피부 여기저기에 물방울이 맺힌다. 본래 기체 상태로 있어야 할 수증기는 밀도가 너무 높아지면서 갈 곳이 부족해지고, 그 과밀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공간을 훨씬 덜 차지하는 상태, 즉 액체 상태로 자발적인 전이를 일으킨다. 아인슈타인은 보스 호텔의 1층에만 모여 있으려는 보손의 친화성이 어느 순간부터는 응축 현상을 유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상자 속에 충분히 많은 보손 원자를 집어넣으면 어느 순간 이 원자의 집단이 기체 상태에서 액체 상태로 자발적인 전이를 일으킬 것이란 예측이었다. 수증기의 액화 현상과 비슷하긴 했지만 보손의 액화 현상은 절대영도 근방에서 일어난다는 큰 차이점이 있었다. - P176.177

과학자로서 성공하는 한 가지 요령이 있다면, 선배 학자의 주장을 잘 분석하여 약점을 찾아내는 것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 P185

이런 아름다운 수학과 물리학의 만남은 수학자들에게도 관심거리였다. 수학자들이 사울레스의 논문을 이해하기 시작한 순간, 그가 유도했던 아름다운 공식은 1946년 위상수학자 천Shiing-Shen Chern(1911~2004)이 이미 발견했던 ‘천 숫자Chern numnber‘로 알려진 표현과 동일하다는 점이 밝혀졌다. 이미 위상수학에선 오래전부터 천 숫자로 통용되던 그 정수가, 위상수학이 무엇인지 한 번도 제대로 교육받은 적이 없는 이론물리학자의 칠판 위에서 ‘재발견‘된 셈이다. 나는 언젠가 사울레스 교수에게 위상수학도 잘 모르면서 어떻게 그 유명한 위상수학의 식을 재발견할 수 있었는가 물어본 적이 있다. 그의 대답은 지극히 상식적이었지만, 또한 가슴을 찌르는 진리였다.

나는 양자역학하고 19세기 수학자들이 만들어낸 수학을 꽤 잘 알고 있었지. 그것만 알고 있어도 상당히 많은 걸 해낼 수 있다네. - P205

마침 선배도 학위를 마치고 버클리대학교 연구원으로 온다고 했다. 우리는 그렇게 버클리에서 다시 만났고, 우연히도 라피엣Lafayette이라는 같은 동네에 집을 구했다. 가족을 한국에 두고 단신으로 와 있던 나는 종종 선배의 차를 얻어 타고 학교로 출근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가 지도교수로부터 받은 임무는 ‘그래핀 만들기‘라고 했다. 나는 ‘고온 초전도체의 소용돌이 구조 이론‘이라는 당시 꽤 인기 있던 주제를 받아 일을 시작하던 참이었다. 내 주제가 더 멋져 보였고, 선배의 임무는 유행과 동떨어져 보였다. 나의 첫 번째 착각이었다. - P210

현실적으론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얼마나 얇아야 2차원 물질일까? 얼마나 가늘어야 1차원 물질일까? 아주 가는 물질의 대명사인 머리카락의 두께는 0.1밀리미터 정도라고 하니 상당히 가늘어 보이기는 하지만 따지고 보면 원자 수십만 개를 나란히 포개고도 남을 엄청난 두께다. 머리카락은 당당한 3차원 물질이다. 일상생활에서 우리 눈에 띄는 물질은 모두 3차원 물질이다. 2차원이나 1차원 물질은 일상생활이 아닌 실험실과 공장에서 주로 합성된다. - P212

물질이 물질다우려면, 외부 도움이 없어도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1차원이나 2차원 물질을 접하기 힘든 것도 그런 이유다. 낮은 차원의 물질은 구조적으로 불안정하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두면 서로 뭉쳐서 3차원 물질로 바뀌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어떤 특별한 원자를 이용하면 3차원, 2차원, 1차원 구조를 모두 만들어낼 수 있다. - P213

선배가 버클리대학에서 연구원 일을 시작할 무렵인 1999년에는 이미 탄소 나노튜브 연구가 ‘정상적인‘ 상태에 접어들고 있었다. 풀어서 말하자면 여전히 ‘새롭고 흥미로운new and interesting 결과는 계속 나오지만 깜짝 놀랄 만큼 흥분되는novel and exciting 결과는 더 이상 기대하기 힘든‘ 그런 상황을 가리킨다. 모두 다 좋은 단어로 구성된 문구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다. 날마다 연구실에 출근하는 과학자들에게도 그 구분은 결코 쉽지 않다. 타석에 들어선 타자는 내심 홈런을 기대하면서 방망이를 휘두르지만 대부분의 공은 파울이나 아웃, 아니면 겨우 일루타에 머문다. 그렇다고 해서 홈런을 때릴 때의 타구 자세가 평범한 안타를 칠 때의 자세와 눈에 띄게 다른 것도 아니다. 연구자는 자신의 연구가 파란 대양blue ocean으로 나가는 항해 길이 되길 기대하지만 막상 완성된 논문은 빨간 대양red ocean에 합류하는 물 한방울이기 일쑤다. - P215

가만히 생각해보면 흑연(‘검은색 납‘이란 의미)이란 물질은 참 신기하다. 흑연은 탄소로만 만들어진 3차원 물질이다. 흑연으로 만든 연필심은 3차원짜리 고체 덩어리인데 막상 종이 위에 글씨를 쓸 때는 연필심의 껍질이 살살 벗겨져서 글자로 변한다. 3차원 물질이었던 연필심이 2차원적인 글자로, 별다른 연금술적 도움 없이 어린아이 손끝에서 차원 변환을 겪는다. 크레용에도 비슷한 성질이 있다. 크레용은 양초와 동일한 파라핀 성분에 색을 내는 염료를 섞어 만든 물질이다. 크레용의 미끄럽고 잘 벗겨지는 성질은 파라핀 때문이다. 파라핀은 탄소와 수소가 결합해서 만들어진 분자다. 그 분자들이 아주 약한 힘으로 느슨하게 결합해서 겨우겨우 고체 덩어리를 만들어놓은 게 양초다. 그 덕분에 양초나 크레용은 조금만 힘을 줘도 껍질이 슬슬 벗겨진다. - P216

흑연은 층상 구조 물질이다. 어떤 2차원 구조가 층층이 쌓여 있는 구조라는 의미다. 그중에 딱 한 층만 떼어놓고 보면 다음 그림처럼 벌집 격자(육각 격자) 모양으로 탄소 원자들이 배열되어 있다. 육각 격자의 모서리 위치에 탄소 원자가 하나씩 있고, 그들끼리 공유결합이라는 강력한 화학결합으로 결속되어 있는 구조가 바로 그래핀이다. 흑연은 그래핀을 차곡차곡 쌓아올려서 만들어졌다. 그래핀과 그래핀 사이에는 원자 간의 결속이 거의 없다. 그래서 연필심을 종이에 꾹꾹 누르면 위층에 있는 그래핀 층부터 한 꺼풀씩 벗겨져서는 종이 위에 남는다. 흑연 덩이에 남아 있는 나머지 그래핀 친구들은 떠나는 친구의 손을 잡아주지 않는다. - P217.218

2018년 개봉된 영화 <스카이 스크레이퍼skyscraper>에서 주인공 역할을 했던 드웨인 존슨이 남긴 명대사 "덕트 테이프로 고쳐지지 않는 건, 테이프를 충분히 쓰지 않았기 때문이지If you can‘t fix it with duct tape, then you ain‘t using enough duct tape"가 떠오른다. 선배가 알려준 연금술적 비법은 이러했다. 연필심에 스카치테이프를 붙였다 뗀다. 테이프에 연필가루가 묻어난다. 그 테이프를 유리판 위에 문지른다. 그럼 테이프에 묻었던 연필 가루가 유리판에 옮겨 붙는다. 현미경으로 유리판을 잘 관찰한다. 한 장짜리 그래핀이 여기저기 보인다. 이 엉뚱하고도 단순한 방법을 제안한 두 물리학자 가임Andre Geim과 노보셀로프Konstantin Novoselov의 이름을 접한 것도 그날 선배를 통해서였다. - P219.220

전자처럼 질량이 있는 입자라도 엄청나게 큰 운동량을 갖고 움직이면 마치 질량이 없는 입자처럼 거동하긴 한다. 아인슈타인의 에너지 공식에서 운동량 값이 엄청나게 커진다고 가정하면 앞쪽에 등장하는 (mc)라는 숫자는 있으나마나 한 미미한 숫자가 된다. 거대 입자가속기 시설에서는 전자를 어마어마한 빠르기로 움직이게 만들 수 있다. 다만 입자가속기를 운영하는 데는 굉장히 많은 돈이 들어간다. 본래 상대론적인 운동을 하지 않던 입자를 강제로 질량이 있으나마나 한 상대론적인 운동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려면 많은 투자가 필요하다. - P221.222

물리학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안목의 차이는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앤디와 미란다의 패션 안목 차이만큼이나 천자만별이다. 그런 안목의 차이가 누구의 업적은 파란 대양을, 또 누군가의 연구는 빨간 대양을 향해 가도록 만든다. - P232

출중한 선배 과학자가 던진 질문을 받아 탐구하는 것은 후배 과학자가 자신의 경력을 쌓는 아주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 P247

하드디스크라는 평면을 작은 조각으로 나눈 뒤, 각 조각마다 일정한 자화 방향을 준다. 한 방향으로 자화된 공간이 차지하는 면적은 곧 정보의 집적도를 결정한다. 1밀리미터×1밀리미터 단위의 공간마다 자화 방향이 바뀌는 저장 장치에 비해 1미크론×1미크론 면적 단위로 자화 방향이 바뀌는 저장 장치의 집적도는 무려 100만 배나 크다. 작은 공간에 정보를 집어넣을수록 정보 저장 장치의 크기도 줄어든다. 그러나 정보 저장 공간이 작아질수록 그 정보를 읽어내기도 힘들어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자화된 공간이 100만 배 작아지면 그 공간에서 발생하는 자기장도 대략 100만 배 정도 작아진다. 정보를 읽어내려면 이 자기장의 방향을 알아야 하는데 그 작업은 거꾸로 100만 배 어려워진다. 대안은 이전보다 100만 배 섬세한 자기장 측정 장치를 개발하는 것이다. 거대 자기저항 원리는 이 섬세한 자기장 측정의 문제를 해결해주었고, 그 덕분에 하드디스크의 집적도가 높아질 수 있었다.
2007년 페르Albert Fert와 그륀베르크Peter Grnüberg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 이유를 노벨 재단 홈페이지에서 찾아보면 이런 문장이 보인다. "올해 노벨 물리학상은 하드디스크의 정보를 읽어내는 기술에 대해 수여되었다." 단지 컴퓨터의 정보를 읽는 소자를 개발했다는 이유만으로 노벨상을 준다고 명시했다. 그만큼 노벨 재단은 물리학이 정보 과학의 발전에 기여한 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 P249

아무리 단순한 물질이라고 한들 그 물질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하나의 방정식에 다 담아낼 도리는 없다. 설령 그렇게 복잡한 방정식을 만든다고 해도 그런 문제를 수학적으로 풀어서 깔끔한 답을 구하기란 불가능하다. 때문에 물리학자들은 이해하고자 하는 현상에 가장 관련이 깊은 상호작용만을 남겨둔 채 나머지 효과는 모조리 없앤 가장 단순한 수학 모델을 만들어서는, 그 모델의 성질을 분석함으로써 물질의 성질을 이해하려고 한다. 망간-실리콘은 금속이면서 동시에 나선 자석이다. 우리는 일차적으로 이 물질의 자성, 즉 나선 자석이란 성질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자성 효과만을 담아낸 모델을 만들었다. - P253

이번 장에서는 위상 물질topological material 이야기를 다룬다. 이미 꼬인 원자, 양자 홀 물질, 그리고 위상 자석처럼 위상수학적 숫자가 지배하는 물질계를 이 책에서 여러 차례 다룬 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상‘이란 단어는 여전히 생소한 감이 있다. 일단 작명부터 좀 이상하다. "김연아 덕분에 대한민국의 위상이 높아졌다", "BTS 덕분에 한국 대중문화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표현이 우리에게 익숙한 게 오히려 탈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위상‘과 위상 물리학의 ‘위상‘은 모두 같은 단어, 한자로 쓰면 ‘位相‘이다. 영어 단어로 바꾸면 한쪽은 ‘status‘, 다른(물리학) 쪽은 "topology‘라는 전혀 다른 두 단어로 번역이 되는데, 어쩌다 보니 한글에서는 똑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 P266

역시 <사이언스>에 출판된, 그래핀 발견을 보고한 논문은 지금까지 4만 번 넘게 인용됐다. 그 논문의 두 저자(안드레 가임, 콘스탄틴 노보셀로프)는 2010년 노벨 물리학상까지 받았다. 신물질 탐색에 열을 올리는 재료과학자나 실험물리학자들에게 그래핀은 신대륙의 발견이었다. 전 세계 실험실이 그동안 하던 일을 내려놓고 앞다투어 그래핀 연구에 투신했다.
이론물리학자들의 반응은 좀 더 미온적이었다. 7장 ‘그래핀‘에서 그래핀 속 전자의 거동이 꼭 상대론적 입자와 비슷해 흥미롭다고 하긴 했지만, 사실 이런 예측도 이미 1950년대에 만들어진 낡은 지식이었다. 순수 이론가들이 보기에 그래핀은 그다지 흥미로운 물질이 아니었다. 물리 이론가들은 눈앞에 보이는 이득보다는 명분을 챙기길 좋아하는 남산골 선비 같은 기질이 좀 있다. 여기서 말하는 명분이란 건 물론 이론 자체의 새로움, 우아함이다. - P275.276

물론 수학적으로 따졌을 때 얻은 결론이 반드시 자연현상에도 드러나야 할 필요는 없다. 자연의 진리는 수학적으로 가능한 진리의 아주 작은 부분집합이라는 게 많은 물리학자들의 믿음이다. - P284

탁월한 양자 물질 이론가 앤더슨Philip Anderson이 어느 학회에서 이런 말을 했다. "계산이야 뭐 홍보용으로 하는 거지Calculations are for PR." 일단 아이디어가 맞으면 그걸 뒷받침할 계산은 어떻게든 만들어낼 수 있다는 뜻이다. 아이디어의 세계는 그림과 비유와 직관과 상식으로 움직이다. - P295

탁월한 물리학자는 어떻게 남들보다 한발 앞서는가? 내가 듣고 보고 대화해본 최고의 물리학자들은 그렇게까지 정보 취득에 민감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가장 뛰어난 물리학자들은 아마존에 투자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마존을 창업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안목이 있다. 자신의 안목을 믿고, 아무도 가본 적 없는 길을 힘들게 덤불을 헤치면서 개척한다. 그리고 기다린다. 자신이 개척한 숲속의 오솔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차츰 많아지기를. - P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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