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에도 나는 안진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몇 편 더 썼다. 첫 장편소설인 『다른 사람』 의 배경도, 「호수」를 비롯한 몇몇 다른 단편소설의 배경도 안진이다. 아니, 사실 내 소설의 인물들은 다 안진에 산다. 전라북도의 조용한 중소도시. 구區는 오직 두 개이고, 그다지 크지 않은 호수가 하나 있으며, 혼자 사는 여자들이 많다. 그들은 새벽에 홀로 산책을 하며 자주 운다. 잠잘 때는 꿈을 꾸지 않는다.
소설을 쓰기 시작한 이후, 언젠가부터 나는 같은 질문을 받곤 했다. "혹시 안진은 당신의 고향인 전주를 모델로 한 곳인가요?" 나의 대답도 늘 같은데,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 P10

그러니 두 사람은 다시 만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유일하다는 건 계속 기억한다는 것이니까. - P29

"이러는 게 어딨어. 이러면 내가 어떡하니."
그러자 엄마가 이모의 손을 잡으며 대답했다.
"너도 참, 네가 나한테 어떤 사람인데."

여전히 그 말을 기억한다. 잊지 않는다. - P35

추웠다. 하지만 공기는 맑고 깨끗했다. 기분좋은 감각이 엄마의 마음에 마법처럼 흘러들어왔다. 엄마는 옹주의 꼿꼿한 자세를 떠올렸다. 바느질을 하는 내내 그녀는 한 번도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그 상태로 옷을 만들었다. 어쩐지 그녀는 계속 그렇게 살아왔을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건 한 번도 꺾이지 않고, 강한 마음으로 한자리에서 버텨왔을 것 같았다. 그제야 엄마는 이모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 그것이 바로 귀티였다. 무언가를 망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 꼿꼿하고 흔들림 없는 자세로, 망설이지 않고 계속 그 일을 하는 것. 엄마는 옹주의 말이 믿음을 얻기를,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녀의 ‘귀티‘를 알아봐주기를 바랐다. - P41

이제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안다. 말할 수 있다. 절대 풀리지 않는 원한, 그리하여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망치고 지워버리고 싶어하는 마음.

악의. - P49

원한怨恨.

누군가에게 쏟아붓기 위해 만들어진 마음. - P56

어김없이 중화루가 문을 닫았다. 뢰이한은 새벽부터 시장에 갔다. 건물이 텅 비었다. 우리는 이 기회를 알뜰하게 쓰기로 마음먹었다. 연주가 가장 좋아하는 반찬인 나라즈케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나라즈케는 울외를 술지게미에 버무린 뒤 숙성시켜 먹는 일본식 반찬이었다. 나도 좋아하긴 했지만 술냄새 때문에 많이 먹지 못했는데, 연주는 나라즈케를 반찬은 물론 주전부리로도 먹고 야식으로도 먹었다. 울외를 구하기 힘들어지면 다른 재료를 동원할 정도였다. 그녀는 시간만 나면 무와 오이, 당근, 무청 등등 구할 수 있는 모든 야채를 소금에 한번 절인 뒤 술지게미와 함께 장독에 담아두곤 했다. 나는 연주가 나라즈케를 만드는 것이 좋았다. 반찬을 만드는 건 어쨌든 일거리였지만, 적어도 나라즈케는 연주가 자신을 위해 만드는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연주가 소금에 절여놓은 시래기를 손으로 꽉 눌러 짜며 중얼거렸다. - P133

"어릴 때부터 그랬어. 여기를 드나들기 시작했을 때부터 말이야. 여기에는 언제나 우리 외에 누군가가 있는 것 같았어. 아니, 때때로 이 건물이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해. 이 건물은, 원한을 끌어들이는 것 같아. 사람들의 미움을, 증오를 자꾸만 집어삼키는것 같아. 서로를 배반하라고 부추기는 것 같아. 가끔 잠을 청할 때면 그런 목소리들이 들려, ‘누구 마음대로 여기에 누워 있어? 네까짓 게 뭔데 여기에서 발을 뻗고 있지? 너를 끌어내리겠어. 잡아먹겠어. 어디 한번 뭐든 해봐. 다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그들은 끊임없이 나를 손가락질해. 나는 귀를 막고 싶지만 막을 수가 없어. 막아도 다 들리거든. 사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싶어. 들어야만 할 것 같아. 그런 기분에 사로잡혀. 늘, 언제나. 그들이 나에 대해 뭐라고 하는지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어. 결국 나는 그 목소리들에 파묻히지. 소리는 또다른 소리가 되어 굴러오고, 나는 점점 희미해져. 사라져버리지." - P158.159

우리에게 사랑이란 덧없는 기억이고, 불행은 오래 남는 이야기죠. - P207

그런데, 웃기는 이야기 하나 해줄까. 동네 국민학교에 지영현을 물고 빨고 하던 선생이 하나 있었어. 그런데 그 여자가 왜 그렇게 지영현을 아꼈는지 알아? 지씨 놈이 돈을 줬거든. 아니, 평등이 어쩌고저쩌고하더니 지 자식 잘 봐달라고 하면서 선생한테 돈을 멕인 거야. 글쎄, 따로 영어를 가르쳐달라고 했다더군. 그 코쟁이 놈의 말을 말이야. 지영현 그 요망한 것은 지가 잘나고 똑똑해서 따로 과외를 받는 줄 알았지. 그래서 나중에 진실을 알고 나서 아주 동네가 시끄럽게 난리를 피웠어.
마을 한복판에서 지 부모에게 뭐라고 지껄였는지 알아?
"처참하고 불경해요."
이랬어. 아우, 되바라진 것. 그런 말을 할 줄 아는 애였지.
정말 똑똑했어. - P229

해방 후에는 많은 것이 엉망이었어. 법도 없고 질서도 없었어. 매일매일 뭔가가 뒤집어졌지. 그래. 그 여름 이후로 정말 많은 것이 변했어. 함께 술을 마시거나 서로의 일을 도와주는 모습이 사라졌지. 우리는 서로를 의심했으니까. 좌익일지 모른다. 우익일지 모른다. 그냥 미친놈일지 모른다. 아무튼 우리를 해칠지 모른다…… 우리는 서로를 증오했어. 같은 마을에서 벌거벗고 같이 자랐는데, 서로를 미워하는 데 더 익숙해졌지. - P230

누군가를 구하고 싶지 않았어.
나를 구하고 싶었을 뿐이야. - P232

나는 그가 낯설었다. 그리고 익숙했다. 그에게서도 느껴졌던 것이다. 사랑하지 않는 가족을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서만 일렁이는 낙담과 체념. - P250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싶은 마음이란, 어쩜 그렇게 공감하기 쉬울까. - P252

느닷없는 이야기일 수 있는데, 나는 시련이 사람을 강하게 해준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시련은 시련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고통 이후 단단해지는 마음이나 냉정한 판단력 같은 것은 결과론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할 만한 여유가 생겼다는 뜻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람을 여유 있게 만드는 것일까. 사람마다 다르다는 건 알겠다. 물질적인 안정일 수도 있고, 정서적인 휴식일 수도 있고, 새로이 닥쳐온 또다른 고난일 수도 있고, 하지만 누군가에게 여유란 영원히 찾아오지 않는 불가해한 감각일지도 모르겠다. 영원히 지속되는 원한. 상처를 주고 싶은 마음. 가라앉지 않는 분노. - P273

"형님, 저는 가게를 하고 싶어요. 바로 여기서요. 이 땅에서요. 저는 중국인이지만 중국에서 태어나지 않았지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제 고향은 람청인데, 저는 그곳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요. 저는 이곳에서 태어났어요. 그리고 고향 음식을 먹으면서 자랐지요. 대체 그 고향의 음식이란 뭘까요? 람청 음식일까요? 인천 음식일까요? 어쨌든 저는 계속 그 음식을 먹고 싶어요. 그리고 만들고 싶어요. 아마 앞으로 제가 만드는 음식은 저와 같은 사람들을 위한 음식이 되겠지요. 고향이 없지만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들, 고향이 없기에 고향을 만들어야 하는 사람들. (후략) " - P284

나 역시 어떤 원한을 가졌지만, 그건 사실 비대한 자의식의 일부이기도 했다. 내가 대단한 무언가를 만들고 있고, 이걸 해내야만 한다는, 나만이 이걸 할 수 있다는 특별한 마음 말이다. 물론 그것 없이 소설을 쓸 수는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전부인 것도 역시 아니다. - 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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