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입니다 - 안희정 성폭력 고발 554일간의 기록
김지은 지음 / 봄알람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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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티콘을 사용하지 않아서 상대방 기분을 상하게 하면 어떻게 하나, 내 말투가 딱딱하다고 느끼고 오해하면 어쩌나 불편하고 어색하기도 했다. 마음이 괴로웠다. 하지만 더 나를 괴롭게 만든 것은 따로 있다. 법정에서 ‘넹?’ 하며, 내 메시지를 재현하는 변호사의 목소리를 수차례, "넹? 넹? 왜 이런 말투를 쓰셨죠? 증인, 넹?" 하는 것을 듣는다면, 미쳐버릴 것 같은 "넹?"의 목소리가 귓가에 종처럼 ‘넹넹넹’ 울리면서 바로 딱 ‘ㅇ’에 가던 손가락이 멈춘다.- P226

여자 정장에는 주머니가 많이 없었지만, 수행에 필요한 물품들을 가지고 다녀야 해서 위 주머니와 안감의 안쪽 주머니까지 보면서 샀다. 주머니가 없는 옷에는 내가 직접 달기도 했다. 안희정의 물건을 모두 지참하고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안희정은 ‘슈트발‘이 안 산다고 절대 양복에 물건을 넣지 않았다. 휴대폰도, 담배도, 라이터도, 명함도, 신분증도, 휴지도, 펜도, 안경닦이까지 모두 수행비서가 가지고 다녀야 했다. 손으로 부르면 달려가 원하는 걸 전달해야 했다. 나는 만물트럭이었다. 사람들이 내 주머니에서 자꾸 뭐가 나오는 걸 보며 놀라워했다. 가방은 슈퍼를 차려도 될 정도였다. 내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그 흔한 화장품 콤펙트도 없었다.- P227

가끔은 예쁜 옷을 입고 싶어서 박하 맛 사탕처럼 톡톡 튀는 잔꽃무늬 파자마를 입고 잔다. 팔부의 긴 소매 옷이다. 어디 나가지는 못하지만 색깔 있는 꽃무늬 파자마를 입으면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그리고 다시 외출을 할 일이 있으면 우중충한 검은색 옷으로 갈아입는다. 스스로 피해자다움에 갇혀버린 건 아닐까 걱정도 된다.- P227

나는 업무로 안희정을 수행하여 수많은 국내외 일정을 출장으로 다녀야만 했고, 그 업무 장소에서, 업무 시간 중에, 상사였던 안희정에게 잦은 성희롱과 성추행 등 성폭력을 당했기에 장소에 대한 트라우마(심리적 후유증세)가 심한 편이다. 안희정이 수장으로 있었던 충청남도를 포함하여 곳곳의 장소가 모두 사건 장소로 기억되고 있어 어디 하나 편안히 숨 쉴 만한 안전한 공간이 없다고 느껴진다. 사건 이후로 공포의 땅 위에 고립되어 있다.- P228

나는 멤버십 회원이지만 적립할 수 없다. 확인 차원에서 "김지은 회원님 맞으시죠?" 하고 계산대에서 이름을 불리는 일이, 사람과 마주하는 일이 여전히 숨 막힌다. 쉽지가 않다. 그저 재빨리 가게를 나가고 싶을 뿐이다. 사실 가게에 가는 일도 드물다.- P232.233

성폭행은 성폭행대로, 2차 가해는 2차 가해대로, 사생활 침해는 사생활 침해대로, 언어폭력은 언어폭력대로, 괴롭힘은 괴롭힘대로, 모욕은 모욕대로, 명예훼손은 명예훼손대로 각기 다른 화살들이 모두 다 내 심장을 정확히 관통했다.- P235.236

8개월 만에 다시 입원했다. 통원 치료를 꾸준히 받아왔지만, 그것만으로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아서였다. 최근 몇 달 새 체중이 9킬로그램이 늘었다. 병원에서는 폭식증이 너무 심해서 더 이상 살이 찌면 안 된다고 했다. 그전에는 영양실조라고 했는데, 이번에는 폭식증이라고 했다. 몸도 마음도 바스라진 상태였다. 추슬러서 살아야만 한다는 생각에 응급실을 경유해 전문의 진료를 받았고 의료진 판단에 따라 늦은 밤 긴급히 입원이 결정됐다.- P270.271

우울의 구름이 내 머리 위에 비를 내린다. 한참을 맞다 우산이 필요할 것 같았다. 내리는 우울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간호사 호출기를 눌렀다. "안정제 좀 부탁드릴게요." 약이 흡수되어 안정을 찾아갈 때까지는 엄마와 통화를 했다. 엄마 목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좋다.- P278

어느 친구가 내게 말했다. "이런 사람들이 대통령이, 영부인이 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다시 한 번 고마워." 민망할 정도였다. 서글펐다. 내가 그들을 위해 진심을 다해 일한 시간들이 스쳐 갔다. 온 몸이 서늘하고 머릿속은 스산해졌다. 내가 죽을 때까지 이 고통은 계속될까? 벗어나고 싶다.- P279

가족들이 나를 걱정하는 게 싫었다. 어쩌면 핑계일지도 모르겠다. 나도 모르는 내 불안한 미래를 들킬까 봐 철저하게 가림막을 치고, 좋은 것만 짜잔 하고 선물처럼 드리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잘 해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부모님은 늘 나를 믿어주셨다.- P286

24시간 업무 중인 수행비서에게 상사의 지위는 24시간 그대로 유지된다. 그것을 고의적으로 성범죄에 이용한 가해자는 마땅히 처벌받아야 한다.- P294

성폭력 신고는 쉽지 않다. 얼굴과 이름을 내놓고 자신의 인생을 걸어야 한다. 비공개로 신고를 하더라도 피해자가 속한 조직 내에서는 신고자가 누구인지 금세 알아낸다. 알음알음 피해자의 신상이 퍼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대부분의 성폭력은 권력의 차이에서 비롯되기에 가해자들은 여전히 조직의 핵심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피해자를 향한 조직적인 공격을 시작한다. 2차 가해다. 가해자는 여전히 해당 분야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서 피해자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피해자가 그 힘 밖으로 나오려면 그 분야에서 쌓아온 자신의 미래도 함께 버려야 한다.- P295.296

피해자의 SNS를 모두 털어서는 왜 이날 이렇게 웃었냐며, 왜 아무렇지 않게 일했냐며 공격했다. 피해자의 삶은 잘게 분절되어 해체당했다. 성폭력을 겪었고, 문제를 제기했을 뿐인데도, 그 문제를 해결하기까지 겪는 부당함은 온전히 피해자의 몫이었다. 오랜 시간이 걸려 피해 사실을 인정받은 이후에도 피해자는 회사와 학교로 되돌아가지 못했다. 이게 내가 만난 미투 이후 피해자들이 겪는 진짜 현실이다.- P296.297

도청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안희정의 운전비서에게 성희롱과 성추행을 당했다. 이에 대해 조직에 호소했지만 아무도 귀담아 들어주지 않았다. 조직이 제대로 굴러가야 한다는 이유로, 외부에 알려지만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는 핑계로 내 피해는 감내되어야만 했다. 그런 조직인 것을 알았기에 나 역시 참고 참다 고심 끝에 시정을 요청한 것이었지만 결과는 같았다. 일말의 기대는 산산조각 났고, 자존심은 무너졌다.- P298

가끔은 나의 삶이 너무 끈질긴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내게는 작은 숨결만 있으면 되었다. 메마른 겨울 나무처럼 소리 없이 죽어가다가도, 아주 작은 봄의 기운만 느끼면 새순을 피워내는 그런 삶. 손톱만큼의 희망만 있으면 되었다. 미투를 하기까지, 거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래도 그 작은 희망을 보고 말할 수 있었다.- P311

다만, 성폭력 피해자는 당신과 다르지 않다. 그저 잠깐 교통사고를 당했을 뿐, 그 사고가 깊어 후유증을 극복하는 데 어려움이 따를 뿐, 결코 이상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겪지 말아야 할 끔찍한 경험을 했을 뿐이고, 보통의 사람으로 보통의 일상을 살아간다.- P317

나는 안희정의 다른 피해자들에게 고소나 미투를 권유하지 않는다. 그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P337

저는 단 한 번도 피고인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저한테 피고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지사님이었습니다. 누구보다 피고인 스스로 더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수행비서는 지사님 옆에서 지사님이 업무하는 데 조금의 불편함도 없게 하는 역할입니다. 그것이 바로 저의 임무라고 인수인계받았고, 최선을 다해 일했습니다. 그때는 저의 이러한 열심을 성실하다고 칭찬하였던 주변 동료들이 이제는 법정에서 저의 그런 성실과 열의의 마음을 피고인에 대한 사랑인 양, 애정인 양 몰아가는 것에 다시 한 번 좌절하였습니다. (2018.07.27 1심 결심공판 최후진술)- P344

어쩌면 그는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저한테 했던 말들, "나는 어떤 여자와도 잘 수 있다" "모든 여자들은 나를 좋아한다" "나는 섹스가 좋다" "내가 그렇게 잘생겼니?"라는 말, 그건 왕자병이 아니라 치료받지 못한 비정상적인 성적 욕구를 숨기지 못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피고인은 말로는 민주주의라고 이야기했지만 그 방식은 굉장히 폭력적이었습니다. 여성, 인권, 젠더 감수성이 중요하고, 이 사회에 대화가 없는 불통을 척결해야 한다면서 실제로 피고인은 폭력과 불통을 행하고 있는 무자비한 사람이었습니다. (2018.07.27 1심 결심공판 최후진술)- P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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