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입니다 - 안희정 성폭력 고발 554일간의 기록
김지은 지음 / 봄알람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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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의) 지인이 감장을 하는데 가뭄과 홍수로 고춧가루를 구하기 어렵다 하니 좋은 고춧가루 10근을 사서 보내라고 시켰고, 가족에게 줄 간식과 선물도 내가 사 오도록 했다. 그리고 이런 비용들은 수행비서의 사비로 내야 했다.- P100

안희정의 부인이 빵이 먹고 싶다고 하면 나는 다른 사람들이 식사하는 시간에 그걸 사러 다녀왔다. 유명 빵집이 멀든 그래서 내 밥을 못 먹든 상관없이 말이다. 이런 구매에 들어가는 돈은 누구에게도 받을 수 없었다.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더 주장할 수도 없었다. 처음 수행비서 인수인계 때 선배가 만들어두라고 한, 한도를 최대로 높인 개인 신용카드의 쓰임을 알게 되었다.- P100.101

정치인 안희정의 대외적 이미지와 내가 업무를 통해 겪는 실상은 낱낱이 상반되었다. 그는 신분과 계급이 존재하는 세계에 살았다. 나의 자리에서는 그에게 아주 기본적인 인권이나 노동권도 존중받기를 기대할 수 없었다.- P101

안희정은 성 평등을 지지하는 진보적 지도자인 것처럼 알려져 있었지만 내가 본 그는 누구보다 자신의 권세를 잘 알고 누리는 사람이었다. "내 위치에 이런 것까지 해야 되겠느냐"며 일정을 당일에 취소하기도 했다. 국제 행사였던 한 토론회 참가 일정을 바로 전날 취소하기도 했는데, 패널들이 자신의 격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거기서 반문할 수 있는 이는 그의 주변에 없었다. 나를 포함해 그의 주변인들은 그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대령하기 위해 노력했다.- P105

고통스러웠던 일은 노동자로서 내가 할 이유가 없으며 해서도 안 되는 일들을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안희정이 아들과 가는 요트 강습을 예약하거나 의약품을 대리 처방받아 전달하는 등의 일이 비일비재했다. 더러 주위에 어려움을 토로하면 "비서는 업무 범위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지사가 지시하는 것이라면 뭐든 해내야 한다"는 말이 돌아왔다.- P105

늘 괜찮은 척 웃으며 일했다. 행사 중 그에게 다가오는 팬들을 제대로 막지 못했다며 비난받으면 그다음부터는 더 열심히 막으려 노력했다. 수해 현장을 방문한 지사를 수행했을 때 공식 일정은 10여 분 만에 끝나고 지사는 평소 연락하던 여성과 술자리를 가졌지만 나는 잠자코 수행하며 술에 취해 그가 여성과 어울리고 있는 자리를 지켜야 했다.- P106

노동자로서도 극한에 몰려 있던 상태에서 성범죄가 더해지면서 나는 극도로 피폐해졌다. 고민하고 주저하기를 반복하다 용기 내어 주변에 SOS를 보내기도 했다. 내 상황을 직, 진접적으로 들은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런 자리와 부름을 피하라고 내게 말했다. 그런 조언을 하는 이들은 내가 회피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내게 "네가 조심해라"라고 말했다.- P106

이곳에서 나는 암묵적 제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안희정의 일부 측근들은 모임이 있을 때면 대부분 안희정의 좌석 옆에 여성들을 앉게 했다. "지사님은 여자밖에 몰라." "지사님 가까이 여자가 있어야 분위기가 좋아져." "지사님의 기쁨조가 되고 싶어도 우린 남자라서 못 하니까 너희가 최선을 다해." 여성 참모들에게 그런 말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했다.- P107

안희정의 참모들 중 일부는 감옥에 다녀오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안희정이 대선 자금 수사를 받고 감옥에 갔던 일은 조직에서 우상화되어 있었다. 안희정은 대의를 위해 감옥에 다녀왔다며 훈장처럼 이야기했고, 주변의 오랜 참모들은 수시로 ‘부하는 주군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아야 한다‘와 같은 언급을 했다. 안희정을 대신해 감옥에 다녀왔다는 한 참모는 ‘성골‘로 대우받았다. 법과 원칙보다 조직을 위한 희생이 중요한 곳이었다.- P108

거듭되는 사과와 이어지는 강도 높은 업무들은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안희정은 내가 정신적으로 흐트러지는 모습이 잠깐이라도 보이면 괜찮아 보일 때까지 내내 미안하다고 했다. 그렇게 부하 직원을 성폭행하고도 암묵적인 복종을 하게 만들고, 입을 막아버렸다.- P110.111

사람들은 나에게 묻는다.
"왜 네 번이나 당해?"
나는 이것을 안희정에게 묻고 싶다.- P111

그러나 그(안희정)가 미투를 언급하며 네 번째 범행을 내게 가할 때 나는 이것이 마지막이 아닌 또 다른 처음일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의 사과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어느 때보다도 선명히 깨닫게 되었다. 진정한 사과가 아니었다. 다음 범죄를 위한 수단이었다. 그저 나를 범행에 이용하고 묶어두기 위한 목줄 같은 것이었다.- P114

"조배죽."
안희정 조직의 회식 자리에서 고위 참모가 종종 하던 건배사다. "조직을 배신하면 죽는다"는 뜻의 기 건배사를 모두가 웃으며 따라했지만, 의미는 뇌리에 새겨야 했다.- P115

안희정을 대통령 만들고 그 곁에 오래 있으려던 사람들에게 나는 ‘조배죽‘의 대상이었다. 한 나라를 경영하겠다는 ‘대의‘로 모인 사함들의 조직을 뛰쳐나왔기에 내게 가해지는 형벌은 더 가혹했다. 온라인의 댓글, 주변의 평판, 지인들을 동원한 조직적인 죽이기까지 다양한 보복이 시작되었다. 악성 댓글을 달고, 법정에 나와 위증을 하고,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것은 작은 사례에 불과하다.- P116.117

미투 이후 모든 과정은 위력 그 자체였다. 나는 사실을 밝히면, 물론 어렵고 시간이 걸린다 해도,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내 생각은 순진했다. 내가 상대해야 할 가해자는 한 명이 아니었다.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권력 조직이었다. 내가 순진했음을 깨닫고 후회한 적도 많다. 안희정은 30대에 대통령을 만들었고 이후 재선 도지사, 유력 대선 후보로서 권력을 가진 수많은 사람과 친분관계를 맺어왔다. 그렇게 맺어진 관계는 촘촘했다. 관계가 곧 권력이 되는 한국 사회에서 안희정은 도지사직을 내려놓았지만,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P117

‘안희정의 000‘임을 캐치 프레이즈로 내세우고 그 후광으로 국회의원이 된, 이제 재선을 노려야 할 의원들에게 이 재판은 어떤 의미일까? 답이 정해져 있는 싸움을 나는 왜 하고 있을까? 다들 두려워하는 싸움을 왜 나같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하고 있을까.- P117.118

지사는 전화번호를 직접 누르지 않는다. 수행비서가 전화를 건다. 송신음을 듣다가 전화가 연결되면 귀에 가져가 대드린다. 상대방 목소리가 나오는 순간에 딱 맞춰 전달해야 한다.- P119

안희정의 잦은 외부 강연과 해위 출장이 언론과 의회에 의해 여러 차례 지적을 받았다. 그러나 안희정은 하던 대로 밀고 나갔다. 처음부터 1월엔 스위스, 2월엔 호주, 3월엔 중국, 4월엔 일본 등 한 달에 한번 해외 출장 계획을 잡으라고 지시했다.- P119

안희정이 해외에 가 있는 동안에는 조직 구성원들은 휴식을 취했다. 업무를 지시할 사람이 없으니 모두 해외 휴가를 다녀왔다. 나는 갈 수 없었다. 안희정이 퇴임 이후 사용할 일명 ‘안희정 포털‘을 만들어야 했다. 8년 동안 도지사로서 행한 정책과 인명 기록들을 정리하고, 향후 대선 레이스에서 사용할 데이터베이스를 축적하는 일이었다.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도와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에 도청에 들어간 지 채 6개월밖에 안 되는 내가 프로젝트 매니저가 되어 일을 추진해야 했다. 일부 참모는 재판 중에 ‘이 작업을 위해 전문가를 소개시켜줬고, 자신들도 열심히 도와줬다‘고 증언했지만 실제로는 제대로 된 도움을 받지 못했다. 예정된 회의에도 대부분이 다른 이유를 대며 참석하지 않았다.- P120

일반 공무원들도 이 작업을 탐탁지 않게 보았다. 합법적인 일 처리처럼 보이게 하면서도 실제로는 도청 예산을 이용해 개인 포털을 만드는 일이었다. 일의 이면을 들여다본 사람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중략) 도와주기로 했던 일반 공무원은 사무실에 와서 내게 커피를 타오라고 시키고는, 이어 커피를 마시며 ‘이 일은 불법이고, 자신은 일반 공무원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도와줄 수 없다‘고 말한 뒤 돌아갔다.- P120

"여자가 있으면 분위기가 좋아져. 지사님이 부드러워져."
그리고 그렇게 분위기를 풀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내 역할은 충분하다는 말을 들었다. 처음 들었을 때는 무슨 말인지도 잘 몰랐다. 불쾌했지만, 그 말이 성희롱이며 어떻게 부당한 것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P122

상대적으로 어린 내게 선배들은 반말과 비속어, 욕설을 쉬이 내뱉었다. 나보다 나이가 적은 남자들도 자신이 정치권 선배라며 선배로 대우받기를 원했다. 이곳의 위계질서에서 나는 가장 하층민으로, 모두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조직의 막내였다. 이토록 위계를 중시하면서도 호칭은 ‘오빠‘라고 부르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이 차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일터에서나 술자리에서나 늘 대화의 첫마디는 "오빠가......"로 시작했다. 징글징글했다. "나는 당신 같은 오빠 없습니다. ‘여동생 같아서‘라는 말 제발 그만하세요." 수도 없이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P123.124

나는 미투를 하고 나서야 높은 굽에서 내려왔다. 미투 이후에야 주변에서 처음으로 내게 물었다. "신발이 너무 높은 거 아니에요? 힘들어 보이는데." 그러고 나서 활동가가 내게 운동화를 선물했다. 끝없이 외모 품평을 받던 환경에서 시작된 높은 굽 생활이 끝나던 날이었다. 불편한 줄도 몰랐던 그 굽 높은 신발이 정말로 불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운동화를 신게 되었다. 물론 가끔은 내 의지로 높은 굽도 신고, 멋진 옷도 입고 싶다. 어디까지나 내가 원할 때 말이다.- P124

짐을 빼서 다른 비서실로 옮길 때는 무거운 상자를 혼자서 옮기는데 빨리 나가지 않는다며 큰소리를 들었다. 불안한 상황 속에서 동료에게 당한 대우가 너무 비참해서 소리 없이 눈물이 흘렀다. 이때 보였던 눈물은 이후 안희정과 멀어져서 울었던 것이라는 거짓말이 되어 세간에 돌았다. 정무비서가 된 것은 승진한 것인데도 내가 슬퍼했다는 거짓 주장도 나왔다. 역시 잘못된 사실이다 급수는 그대로였고 보직만 변경되었다.- P126

수행비서를 하면서도 여자라는 이유로 비협조적이었는데, 정무비서가 되면 더 심할 것이 뻔했다. 무엇보다 가장 불안하고 괴로웠던 것은 내게 왜 정무비서로 가는지 아무도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현실이 납득되지 않았다. 주변에서 내가 ‘잘렸다‘고 여기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상황이었다.- P126.127

(충남도청 상급 공무원의 기간제 근로자에 대한) 도청 성희롱 사건에 대해 깊이 있는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바로 이어진 화제는 안희정이 스위스 다보스포험으로 출국할 때 공항패션으로 사진 기사를 한번 내는 게 어떻겠냐는 주제였다. 토론은 활발히 이어졌다.- P130

(1심 재판부에서는) 피해자 진술 시 피고인과 분리해주겠다고 했지만, 피고인이 소리가 잘 안들린다고 하자 내게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바로 재판정 안으로 들였다. 얇은 가림막이 설치되었지만 숨소리까지 그대로 들렸다. 나는 두려워서 그 방향은 쳐다보지도 못했다. 사실상은 피해자 바로 옆에 피고인을 앉힌 것이다. 공포스러웠다.
피고인이 움직이는 소리와 기침 소리가 들렸다. 안희정은 내가 진술할 때마다 수시로 헛기침을 했다. 마치 수행할 때 관용차 안에 있는 것처럼 아주 작은 공간에서 안희정 옆에 꼼짝없이 갇혀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16시간을 덜덜 떨면서 진술했다. 한여름 날이었지만 체온이 급격히 내려가 손끝과 입술이 보랏빛으로 변했다.- P144

증인들은 첫 번째 피해 이후 내가 찾지도 않은 순두부를 찾았다고 했고, 들어가지 않은 부부 방에 들어갔다고 했으며, 마지막 피해 이후 만나지도 않은 날 나와 만났다고 돌아가며 위증했다. 모욕적이고 괴로운 말들이었다. 언젠가 위증의 죄도 꼭 묻고 싶다.- P145

3심 상고심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배정된 대법원 재판부의 대법관이 기피 신청을 했다. 피고인과의 연고로 인한 이유라고 했다. 피고인이 연고를 갖지 않은 재판부가 과연 있을까? 1심, 2심, 3심 모두 두 번 이상 재배당됐다. 전직 대통령이나 대기업이 주로 받곤 한다는 재판부 재배당과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관과 얽힌 인연들이 왜 이토록 빈번하게 생길까?. 이 반복되는 유예가 안희정의 위력을 증명해주는 것 같았다. "위력은 존재하나 행사하지 않았다"던 서울서부지방법원 조병구 재판부의 말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내가 겪은 재판 과정의 면면이야말로 곧 그 위력이 어디까지 닿는지를 절실히 느끼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P146.147

피고인(안희정) 측 변호사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답변이 나오지 않거나 내가 혼란스러워할 때 검찰 조서에는 있지도 않은 말들을 조서를 넘기듯 보며 마치 내가 한 것처럼 질문했다. 안희정의 변호인에게 항의하자, 변호인은 "변호사는 얼마든지 유도심문할 수 있다"고 당당히 답했다.- P148

(1심) 재판부는 내게 정조보다 무엇이 더 중요했는지 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반박하고, 관련된 증거를 내고, 담담이 이겨내는 것뿐이었다. 수치와 감내 모두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P149

직장에서 나의 생사여탈권을 쥔 안희정은 내가 도망쳐 나가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P150

세 명의 판사는 안희정에게는 묻지 않았다.

‘왜 김지은에게 미안하다 말하며 여러 차례 농락했는가?‘
‘왜 직접 페이스북에 합의에 의한 관계가 아니었다고 썼는가?‘
‘왜 세 번이나 입장을 번복하였는가. 일관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왜 검찰 출두 직후 휴대폰을 파기했는가?‘- P150.151

하지만 자극적인 말들과 허위 증언 앞에 내가 낸 객관적인 증거와 수십여 시간에 걸쳐 받은 진술들은 아무 의미 없는 것들로 치부되었다. 사실이 중요한 것으로서 대우받지 못하는 채로 여론과 선정성만이 중요한 상황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상황을 만드는 데 얼마 전까지 나의 동료였던 사람들이 참여했다. 2차 피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큰 배신감과 인간관계에 대한 깊은 회의를 느꼈다. 권력 앞에서 사인 간의 우정은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음을 배웠다. 인간은 없고, 조직만 있었다.- P156

1심 재판의 심문이 검찰 측 증인은 일부 공개, 피고인 측 증인은 전부 공개가 되면서 언론에 노출된 정보의 불균형이 극심했고 수많은 억측과 거짓이 양산됐다. 이 거짓의 파도에 쓸려 내려온 거친 유리 조각들을 지금도 여전히 줍고 있다. 하지만 언제쯤 다 치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괴로운 일이다.- P157

이후 2심 중 안희정은 ‘연인 관계‘에 대한 진술을 여러 번 번복했다. 모든 성추행에 대해서도 여러 차례 번복했다. 결코 그런 적이 없다, 어쩌다 그랬을 수도 있다, (나는) 대중의 시선이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없는 사람이다, 친밀한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손을 잡는 등의 가벼운 접촉은 할 수 있었을 수도 있다, 호감이 있었기 때문에 잠깐잠깐 만지는 스킨십은 있었을 수 있다, 연인 관계라면 그 정도는 가능한 것 아니냐......- P158

안희정의 수행비서로 일하기 전 정부 부처에서 오랜 시간 일을 했지만 그 어떤 상사도 친하다는 이유로 내 손을 잡지 않았다. 그것이 엄연한 성추행이라는 것은 사회인 모두가 알고 있는 상식이다. 안희정이 그것을 모르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무엇이든 허용된 자리라고, 자신은 그래도 된다고 그는 생각했던 것 같다.- P158

함께해주는 사람들은 말했다. 조직의 배신자로 비난받고 있지만 김지은을 돕는 게 내 소신을 지킬 수 있는 길이어서 다행이라고, 김지은 개인만을 돕는 것이 아니라 내 자아를 지키고 내 가족을 위하는 길이라고 말이다.- P160

모든 것이 끝나고 마음이 추슬러지면 정식으로 항의하고 싶었다. 어떻게 피해자도 받지 못한 (항소심) 판결문 전문을 단독 입수하게 되었는지, 왜 개인정보 보호도 없이 공개했는지 묻고 싶다. 왜 법원은 이것을 정식 절차를 거치지 않고 외부에 주었는지, 왜 실명 버전을 주었는지, 성폭력 사건의 판결문이 단독 입수되고 외부로 노출되어 버젓이 기사화되는 데도 왜 어느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는지 묻고 싶다. 피해자가 겪을 고통과 모욕은 아무도 고려하지 않았다.- P168

그저 믿어주고, 지지해주고, 신뢰해주는 것, 그것이 성폭력 피해자에게는 가장 큰 힘이 됨을 직접 경험했다.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는 잘못이 없고,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고 말해주는 것, 그 말 한마디에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성폭력 피해자는 세상 밖으로 걸어 나온다.- P170

전략의 목적은 명확했다. 메시지를 반박하지 못하니 메신저를 공격하는 방식이었다. ‘이 여자가 어떠어떠한 사람이기 떄문에 피해자의 말을 믿을 수 없다‘ ‘어떤 과거가 있기 때문에 피해자가 아닐 것이다‘와 같은 식으로, 내가 낸 증거들과 상관없는 진술들로 나의 말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애초에 ‘피해자의 과거의 이력‘을 묻는 것은 해외에서는 금지되어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P172

위력의 무서운 점은 위협적인 말을 듣지 않아도, 스스로 몸이 굽혀진다는 것이다. 위력은 상대를 압도하는 힘이다. 타인의 의사를 제합할 수 있는 유형적, 무형적인 힘이다. 폭행이나 협박을 동원한 경우는 물론,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이용하여 의사를 제압할 경우도 포함된다. 우리는 살면서 그런 힘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고, 느끼고, 경험하고 있다. (중략) 그 위력에 어쩔 수 없이 따르고 참는 일은 많다. 그럼에도 개인은 그 안에서 자신의 업무나 학업을 쉼 없이 이어나간다. 위력이 존재한다고 해서 학교나 직장을 바로 그만두지는 않는다. 그것이 위력의 실상이자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실이다.- P174.175

안희정의 성폭력 범죄를 증명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증거는 따로 있었다. 그런 자료들이 재판에서 증거로 다루어졌고 판결문에 인용되어 유죄 판결을 이끌어낸 것이다. 그러나 재판은 비공개였다. (중략) 합리적이고 공정한 판결에 의문을 제기하는 언동들이 2심 재판부를 비난했다. 일부 언론들도 "같은 사안, 다른 판결"이라며 "피해자 말이면 다 믿는 성 인지 감수성"이라고 기사를 썼다. 추가 증거와 추가 증인 신술에 피고인 진술까지, 그 외 모든 점에서 1심과 2심은 엄연히 다른 재판이었다. 그저 공소 제기된 범죄가 같을 뿐이다.- P178

성폭력 기사만 봐도 내 얘기가 아닐까 심장이 쿵쾅거리고, 다른 뉴스에 사건을 연상시키는 말들, 충남도청, 민주당, 국회의원, 도지사, 러시아, 스위스, 미투 등이 나오면서 나는 불안에 휩싸인다. 연쇄 작용이라는 것은 놀랍다. 찰나에 순간이동을 해 나는 다시 한 번 사건을 경험한다. 어느 때는 내 심장이 콩콩콩 뛰는 것조차도 아프고 저리다. 마음의 병이 몸의 병이 된 것 같다.- P221

수행비서를 할 때 안희정에게 꾸중을 듣고 욕도 먹었지만, 안희정 팬들에게는 더 심한 욕과 위협을 받기도 했다. 저런 깐깐한 년, OO년, 지사 옆에 붙어 있는 년, 비서년, 여자수행년...... 인수인계받은 원칙대로 일했지만 나는 여자라는 이유로 이전 남자 수행비서들이 듣지 않았던 욕을 더 들어야 했다.-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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