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센트
이언 매큐언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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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전 시대를 아주 조금이라도, 정말 어이없을 정도라도 경험했다는 사실이 이 책의 긴장감과 슬픔을 이해하는 데 꽤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소련이 한때는 얼마나 크고 강한 동시에 난해한 국가였는지 그 흔적이라도 접할 수 있었기에, 2차 세계 대전 직후의 독일 서베를린에서 소련의 기밀 정보를 빼내기 위한 기밀 작전이 얼마나 중요하고 급박했을지 상상하기가 한결 쉬웠다. 혹은 어쩌면 북한이 휴전선 북쪽에서부터 땅굴을 파서 침공하려 했던 남한에 살고 있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때는 그 땅굴에 무려 안보 교육을 간 적도 있었다. 요즘에도 그런 짓 하려나.

 

밤은 이런저런 변주와 함께 반복되었고, 아침은 변주 없이 반복되었다. -143

 

 이 작품의 배경은 1955년 여름부터 1956년 봄까지의 독일 베를린이고, 사건들은 그중에서도 미국, 영국, 프랑스가 점령 중이었던 서베를린에서 주로 이루어진다. 이때 동베를린에 주둔 중인 소련군과 소련 본국 간의 통신선을 도청하기 위해 미국 CIA와 영국 MI6가 공조한 기밀 작전이 추진된다. 영국 체신국 소속의 통신 엔지니어인 레너드 마넘은 바로 이 작전을 위한 비밀 시설을 구축하기 위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영국 바깥으로 나와 전쟁이 끝난 지 10년이 지나도록 도처에 상흔이 남아 있는 옛 제3제국의 수도이자 동서로 분단된 도시 베를린에 온다. 레너드는 히틀러의 수도였던 베를린에서 낮에는 영국, 미국과 함께 히틀러에 맞서 싸웠던 옛 연합국 소련을 도청하기 위한 비밀 작전에 열중하고, 밤에는 이곳에서 만난 마리아 에크도르프와 난생 처음으로 연애와 성애에 몰입한다. 모든 사건은 이런 배경 뒤로 펼쳐진다.

 

만남의 자리를 주도한 쪽은 로프팅 중위였다. “이것 봐요. 마넘 선생. 방금 도착했으니 상황을 알 리가 없지요. 이곳의 문제는 독일인도 러시아인도 아닙니다. 프랑스인도 아니에요. 미국인들이지. 그치들은 뭐 하나 아는 게 없어요. 설상가상 배우려고 하지도 않는다니까. 남의 말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요.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위인들이에요.” -9

(레너드)에게 영국적이라는 것은 이전 세대가 느끼는 편안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공격당하기 쉬운 약점이라는 느낌이었다. 반면 미국인들은 자기네 방식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그는 스포츠 재킷과 어차피 손뜨개 하이넥 스웨터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을 선명한 빨간색 니트 넥타이를 골랐다. -21

 

 독일에서 영국인 젊은이 레너드가 미국인 밥 글래스의 지시를 받아가며 소련을 도청하기 위한 작업에 종사하고, 패전한 독일군 출신의 오토 에크도르프와 이혼한 독일인 마리아와 사랑에 빠짐으로써 드러나는 국가와 국민의 단면은 여러모로 복잡하며 흥미롭다. 이런 관계 속에서 드러날 수 있는 양상들을 예리하게 포착해 섬세하게 교차시키는 이언 매큐언의 수완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종전 직후의 영국인들을 사로잡았을 승전국로서의 우월감과 세계의 중심에서 밀려나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는 상실감, 열등감 간의 분열상을 레너드 마넘이라는 한 인물의 짧은 청춘기에 담아냈다는 점에서 영국 작가로서의 매큐언의 가치가 드러났다고 말할 수도 있다.


(글래스의) 감색 정장은 구겨지고 군데군데 천이 닳아서 반들거렸다. 레너드는 유심히 보았다. 저렇게나 제각각으로 어울리지 않게 옷을 입는 법도 있다. 그러고도 아무렇지 않은 것이다. -23쪽

베를린에서의 첫날이 다시 떠올랐다. 독일인. . 불구대천의 적. 패퇴한 적. 이 마지막 생각은 소름 끼치는 전율도 함께 안겨주었다. 그는 순간 특정 회로의 전체 임피던스(*교류회로에서 전압과 전류의 비율)을 구하는 계산으로 생각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마리아)는 패했다. 당연히 그의 소유였다. 정복자의 전리품, 상상을 뛰어넘는 폭력과 영웅적인 행위와 희생을 통해 얻어낸 그의 것이었다. 얼마나 굉장한 희열인가! 옳다는 것, 승리한다는 것, 보상받는다는 것은. -148~149

 

 레너드는 미국인 상급자인 글래스가 독선적이며 조화롭지 못하고 조악한 인사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자신에게 베푸는 거친 호의, 호감에 공명하며 그와 밀접해진다. 작품 곳곳에서 당시 영국과 영국인들이 미국에게 느낀 미묘한 감정이 표현되지만, 이 두 인물의 관계야말로 전쟁 당시에 윈스턴 처칠과 프랭크린 루즈벨트가 보여 주었던 복잡한 친밀감의 보다 사사로우며 영국 입장에서는 보다 비굴한 변주다. 이 영국인과 미국인의 관계 속에서 영국인이 당당할 수 있었더라면 레너드가 자신의 상급자인 글래스와 자신의 연인인 마리아의 관계를 그토록 구차하게 의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레너드는 미국에 기댈 수밖에 없는 영국의 처지를 상기시키는 소련 도청 작전에서 비롯된 자존감의 균열을, 패전국 독일 출신의 마리아가 미국인 글래스가 아니라 영국인인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으로 봉합하려 부심(腐心)했다. 레너드가 마리아에게 육체적, 물리적 폭력을 행사해서 성욕을 채우려 하면서 마리아도 이것을 원하리라는 망상에 빠졌던 착란적, 변태적 상황도 이런 미국, 글래스에 대한 열패감이 기저에 있었다. 마리아가 상징하는 독일을 미국의 도움 없이 자신의 힘만으로 굴복시켰다는 충만감을 레너드가 갈구했다고 이해한다면, 서로의 애정이 절정에 이르던 시기에 레너드가 주제넘고 부조리한 지배욕에 빠져들었던 연유가 훨씬 명확해진다.


레너드는 부모님이나 친구들이 추지도 않고 출 수도 없는 춤을 추고 그들이 싫어할 음악을 좋아하고 그들은 절대 오지 않을 도시를 고향처럼 느낀다는 사실에 흥분 이상의 만족감을 느꼈다. 그는 자유였다. -228

이 모든 게 갑자기 사라진다 해도, 과거의 두 사람으로 돌아가려면 힘겨운 시간을 거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부터 두 사람이 하려는 일은 그 길을 영영 막아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두 말할 나위도 없이, 그러므로 지금 하는 이 일은 잘못이었다. -299

 

 레너드의 변태적인 행위가 초래했던 연애의 위기를 마리아의 애정과 관대함으로 극복한 후에, 때때로 마리아를 찾아와 폭력을 휘둘렀던 그의 전 남편 오토와 레너드 사이에 예기치 못한 파괴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이 사건은 레너드가 통제하지 못했던 그의 폭력적인 과시욕, 지배욕의 원인이 마리아나 패전한 독일, 독일인과 무관한 그 자신의 문제임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남은 삶 동안 자신은 승전했으나 자립할 수 없는 영국인으로 살게 되리라는 사실을 목도한 청년 레너드의 열패감은 그 자신의 힘을 가장 저열한 방식으로 확인하도록 강요했다. 그가 동시대의 다른 영국 청년들처럼 영국 안에 머물렀더라면, 비굴한 현실을 직시당하지 않았을 것이고 새삼 자신이 승리했고 승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폭주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거대한 역사적 상황의 한복판에서 영국인으로서의 그의 자의식도 한낱 평범한 가정 출신의 청년 엔지니어인 그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팽창하다가 끝내 폭발해 버린 셈이다. 그리고 레너드가 일으킨 충격은 다시 그가 속했던 체제 전체를 무너뜨리고 그의 삶도 돌이킬 수 없는 지점까지 몰고 가 버렸다.

 

그러나 이제는 승리의 그늘이 우리를 덮고 있으므로...... 이 전쟁이 끝나면 우리는 쇠약해질 테고, 돈도 힘도 없이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서 가만있어야만 할 거라고 수상은 덧붙였다.

 

얄타 회담이 끝나고 열흘 후 수상 별장에서 벌어진 처칠과의 만찬에서,

존 콜빌, ‘권력의 언저리: 다우닝 스트리트 일기, 1939~1955’-5

 

 인물들의 관계와 사건 속에서 과거의 시대상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훌륭한 역사 소설이라고 할 만하다. 거대한 역사적 상황이 그에 속한 한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것이 그의 사적인 삶을 변화시켜서, 그런 인간이 다시 역사적 변화를 일으키게 되는 흐름을 정교하게 구축해 냈다. 이런 흐름 사이사이에는 저마다의 사정, 감정, 오해가 있었고 그것이 원하거나 예측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흐름을 몰고 갔음을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되기도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이런 이면(裏面)을 알 도리가 없다. 과거에는 주어진 조건과 상황 안에서 타당해 보이는 판단을 내렸다는 사실을 절감시킬 뿐이다. 시간이 지난 후에 드러날 핵심적인 단서들은 실은 중요하지 않다. 이런 핵심을 정작 그것이 가장 중요했던 시기에는 모르거나 외면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역사의 핵심이다. 이 소설은 이런 역사적이며 인간적인 사실을 과거의 맥락 속에서 다시금 묘파(描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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