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센트
이언 매큐언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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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의 첫날이 다시 떠올랐다. 독일인. 적. 불구대천의 적. 패퇴한 적. 이 마지막 생각은 소름 끼치는 전율도 함께 안겨주었다. 그는 순간 특정 회로의 전체 임피던스(*교류회로에서 전압과 전류의 비율)을 구하는 계산으로 생각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마리아)는 패했다. 당연히 그의 소유였다. 정복자의 전리품, 상상을 뛰어넘는 폭력과 영웅적인 행위와 희생을 통해 얻어낸 그의 것이었다. 얼마나 굉장한 희열인가! 옳다는 것, 승리한다는 것, 보상받는다는 것은.- P148.149

이제 그만의 비밀스러운 연극으로는 부족했다. 그는 두 사람 사이에 뭔가 다른 것을 원했다. 판타지가 아닌 리얼리티를. 어쨌든 그녀에게 말하는 건 불가피한 다음 수순이었다. 자신의 힘을 인정받고 그 힘 때문에 마리아가 아주 조금만 괴로워하길, 그래서 최고의 쾌감을 느끼길 바랐다.- P152

시키는 대로 하기 시작하면 그녀도 이 무언극이 모두 쾌락을 위한 것임을, 그만이 아니라 그녀의 쾌락을 위해서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해하겠지. 그러면 두려움도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내 말대로 하게 될 거야." 그는 그래주겠느냐 묻고 싶은 걸 간신히 억눌렀다.- P155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턱이 툭 떨어지고 입술은 벌어져 있었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에 떠오른 것은 경이, 아니 심지어 감탄 섞인 존경이었을지도 모른다. 곧 모든 게 달라져 즐거운 순응과 변신이 이어지겠지. (중략) 이제 같이 깔깔 웃고 있어야 하는데, 그는 생각했다. 이건 게임이었다. 짜릿한 게임. 이런 식으로 지나치게 극적인 반응을 보이는 그녀가 잘못이었다.- P156

"이제 네 차례야, 이 개새끼야, 떨려나기 싫으면 웃어."- P175

그후 몇 달 동안 가끔씩 블레이크 부인을 집 근처에서 보았다. 등이 꼿꼿한 미모의 그녀는 레너드를 보면 미소지으며 인사했지만 그는 그녀를 피했다. 그녀 앞에서는 스스로가 초라한 느낌이 들어 거북했다. 로비에서 어쩌다 그녀가 얘기하는 걸 들었을 때도 주눅들게 하는 목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P180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남자가 강간을 사과하면서 어둠 속에서 슬금슬금 다가온단 말인가?- P196

두번째 사건은 옥토버페스트 기간중에 일어났다. 그들은 일요일에 티어가르텐을 찾았고 다음날과 그 다음날 저녁에도 갔다. 텍사스 로데오도 보고 소규모 공연도 샅샅이 구경하고 맥주를 마시고 통돼지를 꼬치에 끼워 굽는 것도 구경했다. 파란색 네커치프를 한 어린이 합창단이 민요를 부르고 있었다. 마리아는 움찔하면서 그애들을 보니 히틀러유겐트가 떠오른다고 했다. 그러나 레너드에게는 노래가 아련하면서도 퍽 아름답게 들렸고 아이들은 어려운 화음을 자신만만하게 소화했다.- P211

크리스마스를 맞아 귀국하면서 레너드는 마리아에게 함께 가자고 설득했지만 실패했다. 그녀는 자기가 연상의 이혼녀에 독일인이고 더욱이 약혼한 사이도 아니니 레너드 어머니의 환영을 받을 리 만무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가 너무 융통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부모님이 여러 규칙들을 고지식하게 지키며 절제된 생활을 한다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집에 온 지 하루 만에 그녀가 옳았다는 걸 깨달았다. 쉽지가 않았다.- P214

레너드는 마리아가 그리웠고 마리아만큼이나 터널도 그리웠다. 팔 개월 가까이 매일같이 터널 끝에서 끝까지 발소리를 죽이고 다니면서 습기가 차지는 않는지 전선을 점검했던 그였다. 그러는 사이 터널의 흙과 물, 금속은 물로 지상의 그 어떤 정적과도 다른 깊고 숨막히는 정적을 사랑하게 되었다. 멀리 떠나와 있는 지금, 동독군의 발밑에서 비밀을 훔친다는 게 얼마나 대담무쌍하고 터무니없이 신나는 일인지도 깨닫게 되었다. 구조물의 완벽함, 제대로 된 첨단장비, 비밀 엄수 습관과 그에 따른 온갖 소소한 의례가 그리웠다. 구내식당의 조용한 동지애, 목적의 단일성, 모든 구성원의 유능함, 이 기획 전체와 어울리는 넉넉한 음식에 향수를 느꼈다.- P216.217

마리아는 말했다. "자기(오토)가 얼마나 용감한 사람인지 알려주고 싶을 땐 자기가 목격한 온갖 전투 얘기를 늘어놓는 거야. 그러다 술에 취하면 자기가 얼마나 똑똑한지 자랑하고 싶어서 야전본부 전화교환병으로 간 덕분에 전투를 피할 수 있었다고 떠벌리지."- P224

파트너의 의도를 짐작하는 것, 상대의 마음을 읽는 것은 신나는 놀이였다.- P227

레너드는 부모님이나 친구들이 추지도 않고 출 수도 없는 춤을 추고 그들이 싫어할 음악을 좋아하고 그들은 절대 오지 않을 도시를 고향처럼 느낀다는 사실에 흥분 이상의 만족감을 느꼈다. 그는 자유였다.- P228

블레이크는 한참 동안 레너드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레너드를 조용한 구석으로 데려갔다. "충고 하나 하지요. 저기 저 친구, 글래스 맞습니까? 저 사람은 빌 하비 밑에서 일합니다. 나한테 저 사람과 같이 일한다고 하면 당신 일이 뭔지 알려주는 꼴이에요. 알트글리니케. 작전명 골드. 나는 알 필요가 없는 것이죠. 당신은 보안상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겁니다."- P235

이 모든 게 갑자기 사라진다 해도, 과거의 두 사람으로 돌아가려면 힘겨운 시간을 거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부터 두 사람이 하려는 일은 그 길을 영영 막아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두 말할 나위도 없이, 그러므로 지금 하는 이 일은 잘못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모든 고민을 마쳤고, 밤새도록 상의했다. 그녀는 그를 등진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갑은 벗었다. 손끝을 테이블에 대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피곤했지만 한때 두 사람이 그랬듯 질문처럼 끝을 살짝 올려서, 사랑, 섹스, 우정, 함께하는 삶, 그 무엇을 막론하고 본질적인 문제를 상대에게 환기시킬 때면 그랬던 방식으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고 애썼다.- P299.300

그들은 시스템을 갖췄으니, 꼭 필요하다면 이 일을 다시 해낼 수도 있었다.- P310.311

상상은 현실보다 더 잔혹했다.- P318

난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고, 그건 정말 너무나, 너무나 잘못된 생각이었어. 지금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자니 당신이 내 말을 들어주고 또 믿어주길 내가 얼마나 바랐는지 새삼 깨닫게 돼.- P407.408

나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 누구와도 그렇게 가까워질수 없었어. 이런 말을 한다고 밥의 추억을 더럽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내 경험으로 볼 때,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는 것 같지만. 우리 관계는 정말 아주 특별했어. 그건 진실이니까 그 말을 하지 않고, 그 점을 확실히 적어두지 않고 이 생애를 흘려보낼 수는 없는 거야.- P411

그가 옳았다. 분명 그녀의 편지를 이해하기 위해 이 먼길을 올 필요가 있었다. 아달베르트 가가 아니라 여기, 이 폐허의 한복판으로. 서리Surrey의 거실에서 포착할 수 없었던 의미가 여기서는 충분히 또렷해졌다.- P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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