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센트
이언 매큐언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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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찬 후에 우리는 재미있는 영화를 보았다. 밥 호프가 나오는 ‘공주와 해적‘이었다. 그러고 나서는 대강당에 앉아 축음기에서 지나치다 싶게 느릿느릿 흘러나오는 ‘미카도‘를 들었다. 수상은 이 오페라가 ‘빅토리아시대, 그러니까 영국 열도의 역사에서 안토니우스 피우스 시대에 필적할 팔십 년‘의 기억을 불러일으킨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승리의 그늘‘이 우리를 덮고 있으므로...... 이 전쟁이 끝나면 우리는 쇠약해질 테고, 돈도 힘도 없이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서 가만있어야만 할 거라고 수상은 덧붙였다.

얄타 회담이 끝나고 열흘 후 수상 별장에서 벌어진 처칠과의 만찬에서,
존 콜빌, ‘권력의 언저리: 다우닝 스트리트 일기, 1939~1955‘- P5

만남의 자리를 주도한 쪽은 로프팅 중위였다. "이것 봐요. 마넘 선생. 방금 도착했으니 상황을 알 리가 없지요. 이곳(제2차 세계 대전 직후 독일 베를린)의 문제는 독일인도 러시아인도 아닙니다. 프랑스인도 아니에요. 미국인들이지. 그치들은 뭐 하나 아는 게 없어요. 설상가상 배우려고 하지도 않는다니까. 남의 말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요.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위인들이에요."- P9

아까 오후에 템펠호프 공항에서 레너드를 데려온 육군 운전병이 올림픽 스타디움 주차장에 대기중이었다. 레너드의 숙소는 차로 몇 분 거리였다. 상병은 조그만 카키색 자동차의 트렁크를 열어주었지만, 슈트케이스들을 꺼내는 것까지는 제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P12.13

자기만의 집이라니. 그로 인해 이렇게까지 기분이 좋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P13

전쟁 당시 할머니와 함께 살던 웨일스의 시골 마을 하늘에는 적군 비행기 한 대 뜬 적이 없었다. 총을 만져본 적도, 사격연습장 밖에서 총성을 들은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심지어 베를린을 해방시킨 건 러시아군인데도 그날 저녁 베를린의 쾌적한 주거지역을 활보할 때는-바람은 잦아들었고 아까보다 따뜻했다-이 땅의 주인인 양 뻐기며 처칠 수상의 연설에 박자라도 맞추듯 걷게 되는 것이었다.- P16.17

지붕을 날리고 내부를 박살내 창문들이 빠끔히 뚫린 건물 전면만 남겨둔 천 파운드짜리 포탄들을 떠올리면 소년처럼 들뜨지 않기 힘든 법이다. 십이 년 전이었다면 자축의 의미로 두 팔을 벌리고 엔진 소리를 내면서 일이 분쯤 폭격기 흉내라도 냈을 텐데.- P17.18

다음날 아침 그는 여섯시에 일어나 목욕을 했다. 그러고는 다양한 명도의 회색과 다양한 질감의 흰색을 두고 한참 고심하며 천천히 옷을 골랐다. 그는 두번째로 좋은 양복을 입었다가 다시 벗었다. (밥 글래스와) 전화 통화를 할 때처럼 어수룩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팬티 한 장과 어머니가 챙겨준 매우 두꺼운 조끼만 걸친 채 옷장 앞에 서서 정장 세 벌과 트위드 재킷 한 벌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이 젊은이는 미국 스타일의 힘을 어렴풋하게나마 감지하고 있었다. 뻣뻣한 자신의 태도에 어딘가 우스꽝스러운 구석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에게 영국적이라는 것은 이전 세대가 느끼는 편안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공격당하기 쉬운 약점이라는 느낌이었다. 반면 미국인들은 자기네 방식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그는 스포츠 재킷과 어차피 손뜨개 하이넥 스웨터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을 선명한 빨간색 니트 넥타이를 골랐다.- P21

(글래스의) 감색 정장은 구겨지고 군데군데 천이 닳아서 반들거렸다. 레너드는 유심히 보았다. 저렇게나 제각각으로 어울리지 않게 옷을 입는 법도 있다. 그러고도 아무렇지 않은 것이다.- P23

레너드는 로프팅과 만났던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듣기에도 목소리가 꼭 새침데기 같았다. 글래스를 존중하는 뜻에서 그는 자신의 ‘t‘ 발음을 순화하고 ‘a‘ 발음을 죽이려 애썼다.- P24.25

글래스는 딱하다는 눈으로 레너드를 바라보았다. "영국인들이란. 스타디움에 들어앉은 친구들이 뭘 좀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들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닐세. 신사인 척하기 바빠 일들을 안 하신다니까."- P25

글래스는 운전대 윗부분을 양손으로 움켜잡고 보행자들과 다른 운전자들을 낱낱이 뜯어보았다. 수염이 난 턱을 치켜든 채였다. 그는 미국인이고 이곳은 (베를린의) 미국 구역이었다.- P27

과묵한 사람은 실수가 훨씬 적다. 아니, 적어 보인다.- P28

"(전략) 하지만 그 친구 생각은 틀렸어. 3급을 받았다면 그게 레이더기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테니까. 셸드레이크에게 브리핑을 받았다면 자네도 알 테고, 나야 알지만, 자네 보안등급을 조정해줄 자격은 없거든. 그래도 요점은 이거야. 누구나 자기 보안등급이 최고인 줄 알고, 누구나 자기가 전모를 알고 있다고 생각해. 더 높은 등급이 있다는 건 누군가 알려줄 때야 알게 되는 거지. 이번 일에도 4급이 있을지 모르네.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내 등급이 조정되는 일이 생기면 그때 가서야 알게 되겠지. 하지만 자네는......"
(중략) 글래스가 재빨리 덧붙였다. "자넨 2급이지만, 3이 있다는 걸 알지. 그건 사실 규정 위반이야. 변칙적 상황이라고. (후략)"- P31.32

정말이지 공을 던지기 직전 왼손을 그렇게 과장스레 쭉 뻗거나 상대의 피치를 보고 바보처럼 야유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주황색 공을 높이 띄우는 것은 솔직하게 발산되는 의기양양한 힘이었다. 하얀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공의 정확성, 상승했다 낙하하는 포물선의 대칭, 캐치를 절대 놓칠 리 없다는 확신은 거의 아름다울 지경이었고, 그 배경-콘크리트, 이중 철책과 그것에 딸린 기능적인 Y자형 기둥들, 그리고 추위-을 자연스럽게 무너뜨리고 있었다.- P34.35

"(전략) 저 (쇠네펠트) 대로 너머 배수로에 모스크바 고위사령부와 연결되는 소련 육상통신선이 매설돼 있네. 동유럽 수도들과 주고받는 모든 통신은 베를린을 거쳐 다시 나가지. 옛날 제정 통치가 남긴 유산이랄까. 그쪽 일은 위로 파올라가서 도청장치를 설치하는 거야. 나머지는 우리가 처리할 거고."- P43.44

레너드는 뭐라 설명하긴 어렵지만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옴계를 하나 집어들었다. 갈색 베이클라이트 합성수지로 마감된 독일제였다. "저항이 낮은 물질에는 이보다 더 정밀한 기기가 필요합니다. 통풍장치도 필요해요. 이 안에서는 결로가 문제될 수 있으니까요."
글래스는 치하하듯 수염 난 턱을 치켜들더니 레너드의 등을 툭 쳤다. "바로 그런 정신이야. 무리하다 싶을 만큼 요구를 하게. 그런 건 전부 존중할 테니."- P45

"내(글래스)가 말해주지. 다 정치적인 문제야. 우리가 직접 도청장치를 설치 못해서 안 하는 줄 알지? 우리라고 엠프가 없을 것 같나? 자네들을 끼워주는 건 다 정치적 이유 떄문이야. 자네들하고 특별한 관계를 맺어야 하거든. 그래서야."- P48

"그저 보안이나 망치지 말게. 입조심하고. 같이 있는 사람들도 조심하란 말이야. 자네 동포 버지스와 매클린(*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으로 소련을 위해 첩보활동을 한 ‘케임브리지 파이브‘의 멤버 가이 버지스와 도널드 매클린)을 잊지 말라고."- P49

두 사람은 RASC(영국 육군 병참단) 소속으로, 특별히 귀향을 서두르지 않는 징집병이었다. (베를린의) 맥주와 소시지, 여자들이 마음에 든다는 것이었다. 작업을 시작한 그들은 고무 덩어리에 감은 사포로 나무 부분을 매끈하게 문질렀다. 월섬스토 출신이라는 첫번째 남자가 말했다. "여기 여자들은 말이에요. 그쪽(레너드)이 러시아인만 아니면 절대 실패할 일이 없어요."
루이셤에서 온 그의 친구도 동의했다. "러시아인들이라면 끔찍이도 싫어하더라고요. 45년 5월에 이리 진군해 들어왔을 때 짐승처럼 굴었나봐요. 진짜 짐승이요. 이 여자들은 그러니까, 자기네 언니나 엄마나 심지어 망할 할멈까지 강간당하고 찔려 죽었으니까, 아니면 건너건너라도 그런 사람을 아니까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거죠."- P56

"이 삭막한 거리가 한때 도시의 신경중추였습니다. 유럽에서도 가장 유명한 간선도로 중 하나였지요. 운터 덴 린덴이라는...... 저기가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정식 국호)의 진정한 본부라 할 수 있는 소련 대사관입니다. 원래 그 자리에는 호텔 브리스틀이 있었어요. 한때 부유층이 자주 찾던......"- P60

러셀은 십 년 전 자신이 스물두 살의 젊은 중위였던 1945년 5월 미국 점령구역 접수를 위해 베를린으로 출발한 프랭크 하울리 대령의 선발대에 합류했다고 말했다.
"우리는 러시아인이 좋은 놈들인 줄 알았어요. 수백만 사상자를 감수했잖습니까. 투지가 넘치는데다 보드카를 들이켜는 덩치 크고 활달한 놈들인 줄 알았죠. 전쟁 기간 내내 우리가 그쪽으로 산더미 같은 장비들을 보내기도 했고요. 그러니 동맹이라고 철석같이 믿을 수밖에요. 하지만 그건 직접 만나기 전의 얘기입니다. 베를린 서쪽 90킬로미터 지점에서 그 친구들이 나오더니 길을 막더라고요. 트럭에서 내린 우리는 두 팔 벌려 그들을 맞았죠. 선물도 준비해놨고, 직접 만난다는 생각에 들떠 있었거든요." 러셀은 레너드의 팔쭉을 덥석 움켜쥐었다. "하지만 놈들은 냉랭했어요! 냉랭했다고요. 레너드! 우리는 샴페인도 준비해놨어요. 프랑스 샴페인이었는데, 그들은 손도 대지 않더군요. (후략)"- P65.66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 루이제 에크도르프였고, 나이는 서른살, 레너드의 아파트에서 차로 이십 분 거리에 있는 크로이츠베르크의 아달베르트 가에 살고 있었다. 슈판다우의 작은 영국 육군 차량정비소에서 타이피스트 겸 통역으로 일하는 그녀에게는 일 년에 두세 번 불시에 찾아와 돈을 요구하는 오토라는 전남편이 있었다. 가끔은 그에게 머리를 얻어맞기도 했다. (중략) 영어는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스위스에 있는 영국 여학교에서 독일어 교사로 근무했던 할머니에게 배웠다.- P76

"근무시간에 대해 할말이 있다 이건가? 어디까지가 자네 일인가 하는 것도? 이게 그 유명한 영국 공산당 노조의 말투인가? 보안등급을 부여받은 순간부터, 여기서 자네가 맡은 일은 명령을 수행하는 걸세. (후략)"- P84

지금보다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다면, 그리고 조금만 덜 피곤했다면 자기도 사랑에 사로잡힌, 사랑에 빠진 남자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꾸벅꾸벅 졸지 않고 좀 제대로 앉아서 그 문제에 정신을 쏟을 필요가 있었다. 환상이 피어날 수 있도록 권태와 닿아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일이었다.- P85

그녀(마리아)의 아파트 현관문은 다른 집과는 달리 새로 칠한 녹색이었다. 봉투를 문틈으로 밀어넣고 나서 그가 한 행동은 설명할 수도 없고 전혀 그답지도 않은 것이었다. 문손잡이를 잡고 밀어보았던 것이다. 어쩌면 잠겨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 일상을 채우는 무의미하고 사소한 행동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문은 저항 없이 활짝 열렸고, 거기 그녀가, 그의 눈앞에 서 있었다.- P94

뒤편의 그 아파트들은 창문이 가운데뜰이나 비좁은 공간 너머의 옆 건물을 향해 나 있었다. 그런 까닭에, 레너드는 성가시게 깊이 따져보지 않았지만, 그때 어떻게 열린 욕실 문에서 늦은 오후의 겨울 햇살이 두 사람 사이의 마룻바닥으로 비쳐들 수 있었는지, 어떻게 허공에 떠돌던 먼지가 붉은 기 도는 황금색의 비스듬한 빛기둥 속에서 반짝였는지 하나같이 수수께끼였다. 이웃 창문에 반사된 빛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아무 상관 없었다. 당시에는 좋은 징조로 느껴졌으니까.- P95

꼭 그가 상상했던 그대로 그녀(마리아)는 쪽지를 두 번 반복해 읽었다.
"무슨 뜻이죠, 이 ‘들렀다’는 게? 다짜고짜 우리집 문을 열어젖히는 게, 그게 들른 건가요?" 그가 막 해명하려는데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게다가 바이 탄테 엘제로 왔으면 좋겠다고요? 탄테 엘제. 그러니까 그 창녀들이 나오는 술집으로?" 그녀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바람에 그는 깜짝 놀랐다. ‘미국의 소리’에서 항상 틀어주는 노래였다. "어째서 당신은 나를 그렇고 그런 여자라고 생각한 거죠?"(*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 중 ‘Take Back Your Mink’라는 곡의 가사) 브루클린 억양을 흉내내려는 독일 여자에게 이런 말도 안 되게 달콤한 조롱을 당하다니. 레너드는 이대로 기절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참하고 또 짜릿했다.- P96.97

그녀는 영국식으로 차를 끓이고 있었다. (중략)
그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그녀는 영국 육군 전기기계기술부대 제12장갑정비소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 소장과 부소장을 위해 하루 세 번 차를 끓이는 게 담당업무였다고 말했다. (중략) 젊은 여자들이 대접해준 차는 전에도 여러 번 마셔봤지만, 우유를 밀크저그에 따로 담아내는 수고를 하지 않는 여자는 처음이었다.- P99.100

더이상의 침묵을 견디느니 차라리 시시한 얘기라도 하자고 마음먹은 그는 "여기서 오래 살았어요?"라는 질문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불쑥 말했다. "안경 벗으면 어떻게 생겼어요? 한번 보여줘요. 부탁이에요." 이 마지막 단어를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나치다고 여길 만큼 길게 끄는 바람에 레너드의 뱃속에 종잇장이 파르르 떨리는 듯한 섬세한 전율이 퍼져나갔다. 그는 낚아채듯이 안경을 벗고 그녀를 보며 눈을 끔벅거렸다. 1미터가 좀 안 되는 거리까지는 상당히 잘 보였기 때문에 그녀의 얼굴도 부분적으로만 흐릿해졌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생각했던 대로네요. 눈이 이렇게 예쁜데 그동안 내내 가리고 다녔던 거예요. 눈이 예쁘다는 얘기 아무도 안 해주던가요?" (다음)- P101.102

(이어서) 처음 안경을 꼈던 열다섯 살 때 레너드의 어머니가 비슷한 이야기를 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몸이 방에서 부드럽게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안경을 가져가 다리를 접어 선인장 화분 옆에 놓았다.- P102

"그러면 영국에서는 여자 친구들이 있었어요?"
"많진 않았어요."
"얼마나 있었는데요?"
그는 주저하다가 진실을 향해 돌진했다. "그게, 사실, 한 명도 없었어요."
"한 번도 사귄 적이 없다고요?"
"그래요."
마리아가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니까 그 말은 당신 한 번도......"
그녀가 어떤 표현을 쓸지는 몰라도 그는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네, 한 번도 없습니다."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쿡쿡 터져나오는 웃음을 억눌렀다. 1955년에 레너드 같은 배경과 품성의 남자가 스물여섯이 다 되어가도록 성 경험이 없다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남자가 제 입으로 털어놓는 건 엄청난 일이었다. 그는 대번에 후회했다.- P104.105

그녀는 그가 또렷하게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이 다가와 섰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 남자가 두렵지 않다니. 그 사실은 그녀로 하여금 그를 좋아할 기회를, 단순히 그의 욕망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욕망을 품을 기회를 주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감싸쥐었다. "하지만 전 아직 당신 눈을 다 들여다보지 못했는걸요."- P109

한번은 옆자리의 수직굴착기사 둘이 미국인 동료들 앞에서 웃음을 애써 참아가며 옛날 얘기를 하는 걸 들었다. 빈에서 이런 터널을 팠던 전례가 있는 모양이었다. 1949년 MI6가 굴착한 그 터널은 슈베하트 교외의 사유주택에서 시작해 도로 밑으로 20미터가량 뻗어가 임페리얼 호텔 주재 소련 점령군 본부와 모스크바 사령부 사이의 통신을 도청하는 용도로 쓰였다. "위장을 해야 했거든." 기사 하나가 말했다. 동료가 그의 팔에 손을 얹자 목소리를 낮추었고, 덕분에 레너드는 귀를 쫑긋 세워야 했다. "도청 장치를 설치하는 동안 드나드는 것들을 위장할 뭔가가 필요했던 거야. 그래서 해리스 트위드(*스코틀랜드의 해리스 섬에서 생산되는 최고급 트위드) 수입 상점을 열었지. 빈 사람 중 누가 그런 데 관심을 가질까 하는 생각으로 말이야. (다음)- P117

(이어서) 그런데 어떻게 된 줄 아나? 거기 사람들이 해리스 트위드를 너무 좋아했던 거야. 줄을 서서 사가는 바람에 처음 들여온 물량이 며칠 만에 동났어. 그래서 그 불쌍한 치들은 해야 할 일은 하지도 못하고 하루종일 주문서를 쓰고 전화나 받아야 했지. 결국 손님들을 돌려보내고 가게를 닫아야 했어."- P117.118

이 작은 소동의 와중에도 레너드는 반사적으로. 거의 무의식 중에 또다른 영국인의 지위를 읽어내는 영국인의 특기를 발휘해 남자의 몸가짐과 외모, 목소리를 평가하고 있었다.- P124

소탈하고 재능 있는 인물들로 이루어진 이 특별한 세대는 현대 과학전의 필요에 따라 1940년대에 정부 요직에 기용된 사람들이었다. 레너드가 그간 만나본 정부 과학자들은 존경스러웠다. 그에게 자신이 매사 어설픈데다 올바른 단어도 구사하지 못한다는 자괴감을 불러일으키는 퍼블릭스쿨(*주로 상류층 자제를 위한 대학 진학 예비교육이나 공무원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영국의 사립학교) 출신들과는 달랐다. 그런 녀석들은 구내식당에서 절대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적당한 라틴어와 그리스어 실력에 기대어 사령부의 고위직으로 출세할 생각뿐이었다.- P125

그(존 맥나미)의 치아는 낡은 묘석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P127

맥나미가 다시 그의 귓전에서 중얼거렸다. "이 프로젝트에서 마음에 드는 게 뭔지 말해줄까. 바로 태도라네. 미국인들은 일단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제대로 해내고 비용은 신경도 안 쓰지. 나도 원하는 건 전부 얻어냈는데 군말 한 번 들어본 적이 없다니까. ‘예산을 절반으로 줄여서 해볼 순 없겠나‘ 따위의 헛소리는 절대 하지 않아."
레너드는 누군가 자신에게 속내를 털어놓는다는 생각에 우쭐해서는, 재치 있게 받아쳐보려고 했다. "음식 준비에 얼마나 갖은 애를 쓰나 보세요. 전 미국인들이 감자튀김을 요리하는 방식이 정말 좋아요......"- P129

"간단히 설명해주지. 발견된 사실에 따르면 말이지, 메시지를 전기신호로 암호화해서 송신하면 희미한 전지 반향, 그러니까 원본의 암호화되지 않은 평문의 자취가 함꼐 전송돼. 그런데 그게 너무 희미해서 30킬로미터 이상 가면 사라져버리지. 하지만 적절한 장비만 있다면, 그리고 30킬로미터 이내에서 회선을 도청할 수만 있다면 아무리 암호화를 잘해놔도 판독 가능한 메시지가 텔레프린터로 곧장 들어온다고. 이것이 여기서 벌어지는 전체 작전의 근거야. 별 시답잖은 전화 수다나 듣자가 이런 규모의 설비를 건설한 게 아니라고. 그 사실은 (칼) 넬슨이 발견한 거야. 장비도 그가 고안했고. 빈에서 그 장비를 러시아 회선에 시험해볼 좋은 장소를 찾아 돌아다니던 차에 마찬가지로 러시아 회선을 도청하려고 우리가 만든 바로 이 터널로 들어온 거지. 그래서 우리는 아주 너그러운 마음으로 미국인들을 터널에 들이고 설비를 내주고 도청장치도 쓰게 해줬다고. (다음)- P134.135

(이어서) 그런데 저들이 어땠는지 아나? 우리한테 넬슨의 발명품은 언급조차 안 했어. 우리가 암호를 풀려고 골머리를 썩이는 동안 그 물건을 워싱턴으로 가져가 평문을 읽고 있었던 거지. 이런 게 우리 동맹이란 말이야. 황당해서 기가 막힐 노릇이지, 안 그런가?"- P135

"(전략) 자, 저쪽에선 뭐든지 발견하는 대로 우리한테도 알려주기로 약속을 했어. 우리는 그걸 무조건 믿을 수밖에 없거. 그렇지만 저쪽 식탁에서 흘려주는 부스러기에 의지해 살 생각은 전혀 없어. 그건 우리가 생각하는 양측 관계가 아니란 말이지. 우리는 넬슨의 테크닉을 우리 식으로 개발중이고, 훌륭한 잠재적 작전지역도 몇 군데 찾아냈어. 미국인들에게는 함구하고 있지. 고만간 러시아인들도 같은 발견을 할 것이고 그러면 기기를 손볼 테니까 속도가 중요해. 돌리스 힐 팀이 매달려 있지만 누구 한 사람이 여기서 눈과 귀를 열어놓고 있다면 도움이 되겠지. 여기도 넬슨의 장비에 대해 아는 미국인이 한 둘은 있을 거라 생각돼. 기술 분야의 경험이 있으면서 지위는 너무 높지 않은 인물이 필요해. 그들이 나(맥나미)를 보면 1킬로미터는 도망갈 테니까. (다음)- P135.136

(이어서) 우리가 찾는 건 세부사항일세. 전자기기에 관련된 자질구레한 뒷소문이라든가, 뭐든 상황을 진척시킬 수 있는 정보. 양키들이 얼마나 경솔한지는 자네도 알지. 말도 많고, 뭔가 그렇게 흘리고들 다니거든."- P136

밤은 이런저런 변주와 함께 반복되었고, 아침은 변주 없이 반복되었다.- P143

휘파람을 불며 이 노래 저 노래를 조금씩 흥얼거렸다. 처음에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야성적인 노래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가 아는 감미로운 사랑 노래들은 지나치게 점잖고 차분했다. 사실, 지금 그에게 딱 어울리는 노래는 그가 경멸한다고 생각해온 요란한 미국식 허튼소리들이었다.- P144.145

어떤 심리적인 요소가, 자아의 편린, 정말로 좋아하지는 않는 편린이 스멀스멀 스며들고 있었다. 처음이라 모든 게 새롭던 단계가 지나고, 자신도 다른 사람들처럼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고, 너무 빨리 사정하지 않을 자신이 생기고, 이런 문제들이 말끔히 해결되자, 그리고 마리아가 진심으로 그를 좋아하고 원하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확신이 생기자, 사랑을 나눌 때마다 도저히 쫓아낼 수 없는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이 생각들은 욕망과 떼어놓을 수 없게 되었다.-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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