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지음 / 난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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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 모든 일은 결코 한아의 외모 때문에 벌어지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의 추측과는 달리.
어쩐지 친해지고 싶은 호감형이기는 하지만 평일 오후 두 시의 6호선에서 눈에 띌 정도지, 출퇴근 시간 2호선에서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을 희미한 인상이었다.- P9

언젠가 자기 브랜드를 갖게 될 거라고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한아는 기대했던 사람들을 모조리 배신한 셈이지만, 그 조그만 가게에서 매우 행복하게 일했다.- P12

잦은 배웅은 간절함을 감소시켰다.- P15

유리가 늘 하는 말을 하며 먹을 갈기 시작했다. 한아는 자시니 그 먹 냄새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늘 알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향긋하면서도 꼬리꼬리했다.- P20

경민을 사랑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문제라고, 한아는 그 순간에도 체념하듯 생각했다. 체념이라고 부르는 애정도 있는 것이다.- P23

˝(전략) 우주적 규모로 잘할 필요 없어요. 동네 규모로 좀 잘하면 안 돼?˝- P33

처음에 얼마짜리 옷이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빛과 습기와 오염으로부터 소중하게 보호받은 옷이라면, 귀한 옷이다. 여왕의 옷자락을 드는 시동처럼 두근거리며 나무 옷걸이에 옮겨 걸었다. 상하지 않도록 한 솔기 한 솔기 치밀하게 뜯어내는 건 다음의 일이었다.- P39

한아도 디자이너지만, 디자이너들은 결국 남 좋은 일이 될 걸 알면서도 디테일 하나에까지 성실하다는 점에서 사랑스럽고 안쓰러운 존재들이었다.- P41

얼굴 붉힐 일 많고 번거로운 상황에 자주 놓이면서도 (아폴로 팬클럽 운영을) 계속해온 것은, 팬클럽이 망하기 시작하면 얼마나 쉽게 끝장나는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P56

아직은 포기할 때가 아니었다. 포기할 수 있는 마음이 아니었다.- P78

경민에게 반할 수밖에 없었던 그 마음을 재생시켜야 한다고 다짐한다. 어딘가 한아 안에 4K 화질로 저장되어 있을 거라고.- P90

최근의 상상이 최악이었던 것은 기본 전제가 더 끔찍했기 때문이라는 걸 이제야 도출해낸 것이다.- P94

˝(전략) 우주가 아무리 넓어도 직접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들이 있으니까. 이거면 됐어.˝- P95

나쁜 새끼. 이마에 뽀뽀를 하고는 우주 끝까지 달려가버린 싸가지 없는 새끼......- P108

˝일단 친구부터 해. 그리고 지구를 침략하려 들면 바로 파혼할 거야.˝- P109

경민의 손보다 온도가 높고 굳은살이 없는 손이었다. 쌓인 기억이 없는 손이었다.- P109

한아는 계속 묻고 싶었던 것을 물었다.
˝다시 여행하고 싶지는 않아? 공항에 오니까 여행 싫어하는 나도 막 그런 기분이 드는데.˝
˝네가 내 여행이잖아. 잊지 마.˝- P137

그러고 나서 한아가 느낀 감정은 새로웠다.
˝보고 싶어.˝
그 말이 자연스럽게 새어나왔다. 망할, 외계인이 보고 싶었다. 익숙해져버렸다. 그런 타입도 아니면서 매일 함께 보내는 데 길들여져버렸다.
˝이런...... 이런, 말도 안 되는......˝- P143

한아는 이후 채 겪어보지 않은 광막함에 대해 계속 떠올렸고, 우주가 언제나 광막한 곳이어서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마음속에도 그것이 일부 녹아들지 않았을까 여기게 되었다. 누군가는 어렴풋하게, 누군가는 살을 찔러오는 강렬함으로 안쪽의 춥고 비어 있는 공간을 더듬는 것이다.- P161

˝(전략) 자연스럽게 불규칙한 것일수록 재현하기 힘들대. (후략).˝- P171

한아는 일을 하다가 짬짬이, 드레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표백을 하지 않은, 그래서 눈이 시린 하얀색은 아닌 따뜻한 미색의 원단을 바탕으로 애틋한 손님들의 옷에서 떨어져나온 흰색 계통의 자투리천들이 들어갔다. 한아는 11월의 바다처럼 짙은 코발트색 실을 썼는데 그로써 드레스 하나에 새로운 것, 오래된 것, 빌린 것, 파란 것 모두가 들어간 셈이었다.- P173

하루 푹 자고 나서 쌀뜨물에 담가두었던 식기들을 친환경 세제로 설거지했다. 두 사람은 설거지를 하느라 차가워진 서로의 손을 잡고 차를 마셨다.- P180

˝(전략) 넌 어슐러 르 귄이랑 몇 년이나 같은 별에 살았잖아. 그건 자랑스러워해도 되는 일이야. 끝까지 노벨문학상을 안 주다니. 멍청이들.˝- P183

흐르지 않는, 진득한 피가 갈라진 입술 사이로 배어나왔다.- P194

떠나지 않았다면 내 평생이 모두 네 것이었을 거라는 잔인한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던 한아는 그저 엑스가 조금이라도 편해지길 바랄 뿐이었다.- P204

˝응. 따지고 보면 전혀 자연스러운 관계가 아닌데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워. 대화가 끊이질 않아. 매일 소리 내어 웃고, 서로를 할퀴지 않아. 경민이의 한도는 어디까진지 모르겠어.˝- P205

˝다음번에는 속하게 된 곳을 더 사랑할 수 있거나, 아니면 함께 떠날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면 좋겠어. 여기도 아니고 나도 아니었지만, 다음번에는 꼭.˝- P211

칫솔에 치약을 근사할 정도로 적당량을 묻혀 한아에게 내밀었다.- P214

아무리 애를 써도 벗어날 수 없는 껍질은 언제까지나 남기 마련이었다.- P216

흔하지 않지만 어떤 사랑은 항상성을 가지고, 요동치지 않고, 요철도 없이 랄랄라 하고 계속되기도 한다.-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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