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열두 방향 어슐러 K. 르 귄 걸작선 3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용준 옮김 / 시공사 / 201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타인의 상상력을 엿보면 그의 다채로운 세계에 매혹되는 동시에, 나의 단조로운 사고를 자각하게 된다. 전자가 전적으로 재미의 문제라면 후자는 일종의 학습의 문제다. 어느 작품에서 이 두 문제를 모두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하나라도 제대로 제시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좋다. 이 책에는 두 가지 문제가 모두 들어 있는데, 하나의 작품이 둘을 모두 갖춘 경우는 거의 없어서 그조차도 흥미로웠다. 두 종류의 이야기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르 귄이 무슨 의도를 두었던 것인지까지 생각하거나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이야기 속 의도의 명료함과 흥미의 농밀함이 반비례한다는 인상은 받았지만 어디까지나 짐작일 뿐이다.

 

“(전략) 그런데 당신(샘레이)은 우리가 당신을 어디로 데려갈지 궁금하지 않소?”

바로 떠날 수 있을까요? 집을 오랫동안 비우고 싶지 않거든요.” (샘레이의 목걸이)-40

 

 책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자신이 가져야 한다고 굳게 믿고 머나먼 길을 떠난 엔기어의 이야기 샘레이의 목걸이로 시작한다. 르 귄이 만족한 그 자신의 낭만성이 무엇인지 참 잘 보여 주었다. 얻을 수 없을 것만 같은 것이 의외로 가뿐히 손에 들어오는 것도, 그렇게 없던 것을 쥐는 사이에 당연히 내 것이리라 생각했던 무언가가 어느새 사라져 버리는 것도, 무척이나 낭만적이었다. 얻는 만큼 잃어서 낭만적이라는 뜻이 아니다. 얻는 것과 잃는 것이 제각각 그렇다는 소리다. 그리 쉽지는 않겠지만 처음에는 내 것이 아니었던 그것을 결국은 얻을 것이다. 하다못해 그 일부라도. 그리고 그렇게 갖는 동안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다른 것이 사라지고야 말 것이다. 너무나 당연해서 그게 어떻게 없어지는지도 몰랐던 것이 사라지는 이치를 그렇게 배운다. 이렇게 될지 알았다면 없는 것을 찾지 않고, 있는 것을 잃지 않았을지 모른다고 한 번쯤은 생각하겠지만 입 밖에 내지도 깊이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저 그때는 원하는 것이 있었을 뿐이므로. 누구나 지나치게 낭만적이다.

 

르누아르가 좀이 슨 검은 가운을 입는 동안 키슬크는 자신의 은색 튜닉을 실용적이면서 특징 없는 외투로 가렸다. 페니위더가 생각에 잠겨 목에 벌레 물린 곳을 긁는 동안 보타는 머리를 빗었다. 그리고 넷은 아침거리를 구하러 집을 나섰다. 연금술사와 성간 고고학자가 프랑스어로 말하며 앞서 가고, 갈리아에서 온 노예와 인디애나에서 온 교수가 라틴어로 말하며 손을 잡고 뒤따랐다. 좁은 길은 붐볐고, 햇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네 사람 위로는 노트르담 대성당의 사각탑 두 개가 하늘을 향해 솟아 있었다. 옆으로는 센 강이 부드럽게 출렁였다. 바야흐로 파리는 4월이었고, 강둑에는 밤꽃이 피어 있었다. (파리의 4)-77

 

 「파리의 4이 참 아늑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일 뿐인데도 이 이야기를 읽는 동안만큼은 그저 평온했다. 시간을 건너뛰고서도 어떤 소란도 없이 그때 겪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경우만을 잘도 이어서 붙여 놓았다. 르 귄은 이 네 사람이 이 이야기가 끝난 후에도 이대로 그렇게 파리의 골목골목을 거닐며 지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도록 그려냈다. 대단한 갈등이나 사건, 무엇보다도 사유가 없어서 이런 마음을 끌어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달리 생각하면 그렇게나 소소한 서사로 이렇게 따사로운 정취를 이루었다는 것이야말로 탁월하다. 봄날의 교토를 거닐 때 감도는 감미로운 몽상이 무엇이었는지 여기서 배운 듯하다.

 

극한 지방 탐사대원들은 팀 동료가 지성인이고 착실히 훈련을 받았으며 정서가 불안해도 개인적으로 공감대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랐다. 대원들은 밀폐된 선실과 역겨운 장소에서 함께 일해야 했으며, 따라서 각자의 망상, 절망, 편집증, 혐오감, 강박 관념 따위가 대원들 간의 관계를 해칠 정도로 크지는 않을 거라고 기대하는 게 당연했다. 늘 그럴 수는 없다 할지라도 적어도 대부분의 시간 동안에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315

 

 인간을 자유롭게 우주로 보낼 수 있는 시대가 되어도 인간관계는 여전히 복잡하고 미묘하며 왜곡될 수밖에 없겠지만, 그렇게나 발전한 시대인 까닭에 오히려 인간들이 서로를 더욱 못 견디게 될 수도 있다.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에서 르 귄은 그런 상황을 보여 준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뿐인 배경 속에서, 여전히 지금과 같은 상황이 이어진다. 과학과 기술이 그렇게나 나아졌는데도 인간이 여전히 상대의 한계를 용인하기 위해 저렇게나 애를 써야 할 정도라면 지금보다 더 인간관계에 시달린다고 생각해도 틀리지는 않을 듯하다. 여러 사람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상대를 견디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끼리 서로를 견디지 못하는 방식도 견디지 못해서 결국 자신을 망가뜨릴 때까지 서로에 대한 감정을 키우고야 만다. 이방인인 그들을 공격하는 숲 속의 나무들은 그들 사이에서 자란 무수한 혐오감과 비슷해 보인다.


앞쪽에, 그곳에, 저녁 녘의 넓은 들판에서 마른 하얀 꽃들이 나부끼며 속삭였다. 72년이 지나도록, 라이아는 저 풀들의 이름을 배울 짬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혁명 전날)-498 


 이 책에 담긴 모든 이야기를 되새길 수는 없다. 그저 내 상상력의 범위를 넓혀 준 것만으로 충분했던 이야기도 있고, 읽어 나가는 것만으로 유쾌했던 이야기도 있으므로 그 이상 말을 더하면 번거롭다. 다만 어느새 왕년의 혁명가가 되어 버린 혁명 전날속 라이아가 그랬듯이 모르는 이름의 존재만큼은 기억해 두는 것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