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 세계를 떠도는 듀나의 탐사기 - 도대체 이야기가 뭐냐고 물으신다면
듀나 지음 / 우리학교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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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듀나가 생각하는 장르의 원칙이란 무엇보다도 그 장르의 오래된 팬들에게 휘둘리지 않는 것인 듯하다. 이 책은 장르의 범위, 개념, 문법부터 그에 반영된 사회의 통념까지 끊임없이 바뀌었고 바뀌고 있음을 설명하면서, 그런 까닭에 이 세계에서 기득권을 지녔다고 자부하는 팬들은 장르에게 도움을 주기보다는 훼방을 놓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시종일관 신랄하게 지적한다. 듀나가 생각하는 장르의 특성과 각각에 부합하는 문법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듣고 싶어서 이 책을 집어든 독자가 있다면, 퍽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는 하나 이상의 장르의 애호가라고 자부하는 사람일 테니까. 보다시피 이 책은 이른바오래된 장르 팬들이 개인적 취향과 추억을 내세워서 장르와 사회의 변화를 외면하며 장르의 변화와 성장을 지체시키는 원인이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오리지널 스타트렉 시리즈는 당시의 기준에 따르면 엄청나게 진보적이었습니다. 흑인 여성과 아시아인과 러시아인 남성, 외계인과 지구인 혼혈 남성이 당연한 고정 멤버였고 미국 텔레비전 역사상 최초로 흑인과 백인의 키스 장면을 내보냈던 프로그램이었죠. 지금 와서 보면 여러모로 낡아 보이지만 진보를 향한 방향성은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설정 놀이를 하는 팬들은 시리즈의 방향성 대신 고정된 설정에 집착하게 됩니다. 함장이 여성이고 함교에 백인 남자가 한 명밖에 없었던 스타트렉: 보이저 시리즈에 대한 반발이 얼마나 컸었는지. 그때를 생각하면 좀 이가 갈립니다. -126~127

 

 작가로서 골수팬의 애정이 지니는 한계를 지적하는 것은 분명 쉽지 않다. 특히 오랜 독자들의 열성이 세계관과 저변을 확대시키는 강한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장르 문학에서 그런 팬들의 한계 효용을 인식하기는 쉬워도 적시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장르 문학의 경계와 저변이 확대되는 이 시기에 작가 중 누군가는 해야만 할 이야기이기도 하다. 최근 들어 꾸준히 한두 권 씩 꾸준히 나오고 있는 장르 문학 소개서들 사이에서 이 책이, 다름 아닌 듀나의 책으로서 갖는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렇듯 내부를 향한 (자각 혹은 자정에의) 충고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당연히 장르의 탐험에서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알려고 하지 않고, 비슷한 자극을 반복하고 싶어 하며, 변화를 거부하니까요. 이들을 이해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해 가능하다고 경멸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죠. -99~100

 

 바로 그래서 듀나, 혹은 이 책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래 보아야 자기 손해다. 설령 장르 문학에 닥친 페미니즘의, 다문화의, 다인종의, 비백인의, 탈경계의 흐름이 부당하고 역차별적이라 하더라도 이제 이 추세는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오래고 충실한 팬들의 분노와 저항을 가볍게 무시하고 그들을 계몽하려 노력하는 대신, 앞으로 장르 문학이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서 어떻게 변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도록 돕는다. 한 사람의 낙오자라도 정성스럽게 교화시켜서 함께 미래로 향하는 역할은 자기 몫이 아니라는 사실을 거듭해서 강조한 덕분에, 읽는 내내 즐거웠다. 어쩌면 사회나 문화의 변화란 무엇인가가 크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변화조차도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집착하지 않는 데서 비롯될지도 모른다. 장르 문학도 그렇지 않을까.

 

허구의 세계가 젊음을 유지하고 살아남으려면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에 질문을 던지고 새로운 세계관과 아이디어를 가진 세대를 받아들이고 늙은이들은 뒤로 빠져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변화한 세계는 아무리 훌륭해도 분명 근본주의자 팬덤의 맘에 들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을 굳이 신경 써주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154

 

 단순히 장르 문학의 범주를 소개하고 현재의 문법과 미래의 가능성을 논의하는 책이었다면, 과거와 현재의 자산인 팬덤과 그들이 신봉하는 장르 세계의 기존 규칙들은 소중하고 섬세하게 서술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공적이며 정중한 이론평론서들이 택하는 방식이며, 물론 타당하다. 보편적으로 생각한다면 앞으로의 이야기는 이제까지의 그것과 떼어 낼 수 없으니까. 하지만 미래가 전적으로 현재와 과거에 구속될 수는 없으며, 그렇지도 않다. 다가오지 않은 시간인 까닭에 예측할 수 없는 사고(事故)의 지분은 미미하지 않다. 하물며 미래에 닥칠 이야기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거기서 지분의 크기를 걱정해야 하는 쪽은 과거와 현재에 속한 존재들일 것이다. 이 책은 그 점을 사뭇 편파적으로 저격했다. 그동안 즐기며 아껴온 이야기에서 벗어나야만 이야기가 이어질 수 있다는 말은 냉소적인 동시에 낙관적이다.

 

SF나 판타지는 우리에게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자유를 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야기꾼이 그걸 원한다고 해도 독자들이 받아들이지 못해요.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는 인간이거나 인간처럼 행동하는 존재들에 대한 것입니다. 우주 어디를 무대로 삼아도 그런 존재가 주인공이어야 해요. 저에겐 좀 짜증 나는 제한입니다. 이 세계에서 달아나려고 이런 이야기를 만드는 건데 아무리 멀리 가도 인간성이라는 목줄에 잡혀 있는 거죠. -53~54

 

 앞으로의 이야기를 생각하며 이 책이 신경 쓰는 대상은 과거에 집착하며 발목 잡는 낡은 팬들이 아니라, 인간을 독자로 삼는 이상에는 벗어나기 어려운 인간성이라는 속성 자체이다. 이 조차도 자신들의 관심과 애정과 투자가 갖는 힘을 과신하는 애호가들에 대한 냉소로 여겨지는 면이 있지만, 그보다는 누구나 필연적으로 집착하고야 마는 인간성의 개념이 결국은 바뀔지, 어떻게 바뀔지의 문제가 장르 문학의 미래에서 중요하다는 사실을 명쾌하게 짚어 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앞으로의 이야기는 낡은 팬과 새로운 팬의 요구를 적당히 중재하는 차원이 아닌, 인간성에 대한 관점을 넓히는 데에 있다는 사실이 일종의 극적 설득력을 발휘한 셈이다. 버리고 떠나야 할 대상과 떠나서 쫓아갈 대상을 집요하고 명쾌하게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일종의 장르적 매력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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