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의 오래된 상점을 여행하다 - 소세키의 당고집부터 백 년 된 여관까지
여지영.이진숙 지음 / 한빛라이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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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에 사는데, 굳이 도쿄에 가야 하나?”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주제 파악 못한 소리다. 아니다, 실은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기는 하다. 휴가를 내서 일본에 간다면 역시 교토에 가고 싶으니까. 도쿄에 가면 이곳을 베끼려다 말아 먹은 서울이 생각나지만, 교토에서는 굳이 한국을 생각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그동안 몇 번 다녀왔지만, 여전히 도쿄로 향하는 길은 좀 어렵다.

 

 올해 초에 며칠 시간을 내 도쿄에 다녀왔다. 1월이어서 아직 겨울이라고 부를 법한데도 제법 포근했다. 산토리홀에서 NHK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셰에라자드>를 들었고, 우에노(上野)의 도쿄국립박물관에서는 안진경(顏眞卿) 특별전의 제질문고(祭姪文稿)와 이공린(李公麟)오마도권(五馬図巻)을 보았으며, 우에노노모리미술관에서는 베르메르 특별전을, 국립서양미술관에서는 루벤스 특별전을 보았다. 도쿄는 도쿄다웠다.

 

호메이칸은 서민을 위한 여관이다. 창업 때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운영하고 있다. 과거, 특히 전쟁 시에는 군인들의 사택이었고, 전쟁이 끝나고는 집을 잃은 사람들의 임시 숙소로 사용되었으며, 이후에는 지방에서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이 주 고객이었다. 이때 지방에서 온 아이들 중에는 가난한 아이도 많았는데, 그런 아이들에게는 쌀이나 잡곡 등을 숙박료 대신 받았다. -249

 

 45일 중에서 앞의 2박은 숙소가 마침 우에노 근처의 호메이칸(鳳明館)이었던 덕분에, 아침부터 밤까지 부지런히 저 세 미술관을 한 번에 모두 둘러보았다. 딱히 료칸(旅館)을 동경하지 않고 서민풍의 숙소에 애착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1898년에 지은 오래된 건물을 아직까지 여관으로 쓰고 있다기에 한번 묵어 보고 싶었다. 마침 가격도 부담스럽지 않았고. 처음 지었을 당시에는 근처 도쿄대학 학생들을 겨냥한 하숙집이었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이 책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무릎 꿇고 시중드는 여주인과 종업원이 있는 그런 격식 높은 료칸이라기보다는, 학생 시절에 수학여행의 숙소로 묵었을 법한 정취가 감도는 여관에 가까웠다.

 

 하지만 실은 허름하지도 근사하지도 않은 그 나름의 위치를 지금까지 지켜왔다는 사실이야말로 어느 격식보다도 대단한 것이다. 부담스럽지 않은 적절한 요금을 받고, 그에 맞는 안온한 시설과 접객의 수준을 유지한다는 것은 이 요소들 사이의 현실적인 균형을 찾아내는 감각과 그 가치에 대한 확신이 계승되어야만 가능한 까닭이다. 이만한 규모와 자본의 도시에서 이런 적당한 공간과 그 지향이 지금까지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도쿄는 충분히 인상적이다.

 

며칠 전 우리 가게(세이운도인방)에 스물두세 살 정도로 보이는 손님이 찾아왔다. 막 취직을 했는데 자신만의 도장을 갖고 싶어 물어물어 찾아왔다고 했다. 나로서는 아주 고마운 일이다. 물건에 대한 철학을 가진 것이 고맙고, 그것이 좋은 고집으로 보였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자신이 지닌 물건에 대한 고집이나 좋은 것을 구분하는 안목을 지녔고, 작은 도구건 큰 도구건 상관없이 원하는 물건에 대한 생각과 고집이 훌륭했다. 그래서 솜씨가 좋은 장인이 많았던 거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문화가 없다. 장인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이유다.” -237

 

 도쿄의 각 지역에서 저마다 개성과 가치를 지닌 상점들을 하나씩 뽑아서 소개한 이 책은 오래된 가치를 대를 이어 계승하는 공간과 그곳의 사람들을 소개한다는 점에서는 누구나 쉽게 상상하는 일본의 전형적인 면모를 보여 주고 있지만, 그 매장들이 현재 처한 난관과 미래에 닥칠 위기를 외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상당히 솔직하다. 그들이 지금까지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도 지켜온 원칙과 그것을 가능케 한 저력을 존중하고 이방인으로서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그러한 과거가 앞으로 감당해야 할 변화와 압력을 극복하도록 도와 줄 것이라고 낙관하지는 않는다. 오래된 가게란 앞으로도 오래 갈 가게이기도 하지만, 이미 충분히 오래되었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는 까닭이다.

 

 이 책에서는 이미 없어졌거나 곧 없어질, 혹은 지금쯤 없어졌을지도 모를 가게들도 적지 않게 등장한다. 애초에 지금 여행객들이 꼭 찾아가야 할 명소로 이곳들을 소개하는 대신, 한 가게가 도쿄의 거리에서 그 동네의 사람들과 함께하며 긴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목적이었을 것이다. 물려받은 전통과 자신의 역할을 의심하지 않고 꾸준히 해 나가면 오래도록 가게를 이어갈 수 있다는 비결은 물론 정성스럽고 위안도 되지만, 그것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상황도 당연히 존재한다. 가게가 오래되었으므로 없어졌다면 한편으로는 스산하면서도 실은 무척 자연스럽다. 적어도 오래되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어떻게든 버티는 가게보다는 훨씬 명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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