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에 대하여 - 다니자키 준이치로 산문선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고운기 옮김 / 눌와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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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인과 사귀기 전, 80일간 교토에 머물 때에 이 도시는 그늘이 빛나고 빛은 그늘질 때가 많아요.”라고 전한 적이 있다. 그때는 아직 이 책을 읽기 전이었지만, 내용을 전혀 모르지는 않았던 까닭에 나름대로 의식하며 건넨 말이었고, 애인은 그 맥락을 잘 알고 있었다. 교토는 그늘이 그저 가라앉게 버려두지 않고, 빛이 아무렇게나 흩어지도록 들이붓지도 않아서 구석구석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도시의 사람들은 어떻게 꾸며야 사람과 거리가 지루하지 않을지 항상 깊이 생각하고 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오래되었다고 무작정 받들지 않고, 새로 나왔다고 그저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리고 이런 여러 가지 향토요리를 둘러보면, 현대에는 도시인보다 시골 사람의 미각이 훨씬 더 확실하고,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화려함이 있다. 그래서 노인들 중에는 점차 도시를 단념하고 시골로 은둔하는 사람이 있는데, 시골 거리도 은방울꽃 모양의 장식용 가로등 따위가 설치되어 해마다 교토처럼 되기 때문에, 그렇게 안심하고 있을 수는 없다. (그늘에 대하여)-p.65

 

 그러다 보니 때로는 모두가 교토를 부족하다고 여기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늘이니 마냥 어두워야 하고, 빛이라면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무슨 큰 깨달음인양 가르치려 드는 사람은 의외로 많으니까. 심지어는 이 책의 저자인 저 다니자키 준이치로조차도 좋았던 과거에서 멀어지는 옛 수도를 사뭇 호들갑스레 걱정할 정도다. 물론 그가 그늘에 대하여를 쓴 1933년이라면 거리에 은방울꽃 모양의 가로등만 놓여도 밤의 어둠이 송두리째 사라진 듯 불안했겠지만, 역시 경박한 불평이라는 생각이 더 크다. 이미 40대 후반이었던 그는 캄캄한 어둠에 익숙해진 나머지, 그것을 허무는 조금의 빛도 용납할 수 없었던 것 아닐까.

 

나는 우리가 이미 잃어 가고 있는 그늘의 세계를 오로지 문학의 영역에서라도 되불러 보고 싶다. 문학이라는 전당의 처마를 깊게 하고, 그 벽을 어둡게 하고, 지나치게 밝아 보이는 것은 어둠 속으로 밀어 넣고, 쓸데없는 실내장식을 떼 내고 싶다. 어느 집이나 모두 그런 것이 아닌, 집 한 채 정도만이라도 그런 집이 있었으면 좋을 것이다. , 어떤 상태가 되는지, 시험 삼아 전등을 꺼 보는 것이다.

_1933. 12 (그늘에 대하여)-p.67

 

 그는 이 글의 끝에서 자신은 그저 문학의 영역에서라도인공적인(그리고 서구적인) 빛이 침입할 수 없는 세계를 다시 이루고 싶을 뿐이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범위를 좁히더라도 왜 굳이 문학만이 사회와 동떨어져서 음예(陰翳)가 아닌 암흑(暗黑)을 추구해야 하느냐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집집마다 놓인 전등, 골목마다 선 가로등이 밤을 낮으로 바꾸지 못했다는 사실은 지금에 와서 보면 너무도 당연한데, 세계의 변화를 찬찬히 숙고하기보다 부르르 반발부터 한 탓에 마치 어둠이 아닌 그늘이 없어질 것처럼 역정을 낸 셈이다.


한 가지 일이 만 가지 일이다. (게으름을 말한다)-p.87

 

 게다가 사회의 전등과 격리된 문학이라고 해 보아야, 기껏 한다는 소리는 방종하여 노골적인 것보다도, 내부로 억제된 애정을 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아서, 때로 무의식적으로 말씨나 몸짓 끝에 드러나는 것이 한층 남자의 마음을 이끈다. 색기라는 것은 대개 그런 애정의 뉘앙스이다.”(연애와 색정, p.137)라는 수준의 구차한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백번 양보해서 남성이 이런 색기에 끌릴는지는 몰라도, 어째서 여성이 자신의 마음을 숨기는 듯 숨기지 못하며 표현해야하는 것일까. 다니자키는 물론 여기에 대해서 어떤 숙고도 하지 않는다. 이렇게 때 지난 망상을 언제까지고 중얼대기 위해서 어떤 빛도 들지 않는 골방, 혹은 문학이 필요하다고 자인한 셈인데, 이렇게 소수의, 고립된, 신념만 강한 문학이 얼마나 해로운지 충분히 확인한 현재로서는 역시 어둠에 빛을 들이대서 새로운 그늘을 만들어야 한다고 되새길 뿐이다.

 

나는 꽃구경을 좋아해서, 봄에는 뭐니 해도 화려하게 꽃이 한창인 경치를 보지 않으면 봄의 기분을 충분히 느끼지 못하는데, 이때도 역시 지금의 요령으로 간다. 빈틈없는 철도성에서는 매년 산들의 눈이 녹아서 스키를 탈 수 없게 된 때부터 서서히 꽃 선전을 시작해, 4월 중은 꽃구경 열차를 내보내는 것은 물론, 다음 일요일에는 어디가 볼 만한 곳인지, 어디가 곧 만개할 정도로 피었는지 일일이 게시를 해 주고 있으므로 조용한 꽃구경을 하고 싶은 사람은 그런 장소를 피해서 돌아가면 괜찮다. 어쨌든 꽃을 보는 사람으로서는 명소의 꽃에 한정하는 것은 아니어서, 보기 좋게 핀 오직 한 그루의 벚꽃이 있으면, 그 나무 그늘에 휘장을 펴고 찬합 도시락을 열면, 마음 어딘가가 즐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p.170

 

 물론 이 책 속의 글에서 그가 무턱대고 암흑과 음예를 혼동한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이 경험했던 그늘의 미묘함에 집착한 나머지, 더 이상의 빛을 완고하게 거부했을 뿐이다. 그가 자신이 생각하는 그늘을 말할 때의 섬세하고 경묘한 표현은 그 그늘 혹은 문화의 미래를 염려할 때의 편협하며 장황한 훈계와 뗄 수 없는 관계처럼 보인다. 85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보면 다니자키의 역할은 음예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것뿐이었음이 꽤나 분명하지만 일본에 오래도록 드리웠던 전통의 그늘이 마치 사라질 듯 끊임없이 급변한 당시의 시점에서는 이 둘이 뗄 수 없는 인과로 오해되었을 법도 하다. 다니자키 같은 사람 덕에 여태껏 교토의 그늘이 옛 모습을 좀 더 지켜 냈다고 역성은 들 수도 있겠지만, 돌이킬 수 없는 것들만 굳이 골라서 아쉬워하는 사람에게는 별반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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