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의 굴욕
[시평]박상주 논설위원
 

2009년 04월 21일 (화) 17:31:07 박상주 논설위원 ( parksangjoo@yahoo.co.kr)
 

그가 높은 사람 앞에서 깊숙이 허리를 굽힌 채 정신없이 손바닥을 비빈다. 온 세상이 그의 모습을 보고는 쯧쯧 혀를 차고, 낄낄 조롱한다. 하지만 권력자의 눈치를 살피기에만 급급한 그의 눈과 귀엔 아무 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산 권력’ 앞에다 사냥해온 ‘죽은 권력’을 물어다 바치며 살살 꼬리를 흔드는 그 역겨운 사냥개 본능. 세상은 참 놀랍게도 바뀌는데 군둥내 물씬 풍기는 그 구태는 바뀔 기미가 없다. 오늘날 대한민국 검찰의 자화상이 아닐 런지. 검찰은 세상의 질타와 비웃음을 듣고 있는가. 눈이 있으면 보고, 귀가 있으면 들어라.

# “희한한 뉴스다(Oddly Enough)!”

정부 정책에 비판적인 글을 올린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의 구속은 시작부터 세계적인 조롱거리였다. 로이터 통신은 즉각 ‘희한한 뉴스’라고 소개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한국에 표현의 자유가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고 썼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박씨 구속은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에 한국 정부가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결국 ‘미네르바’ 박아무개씨가 1심의 무죄 선고와 함께 풀려났다. 사이버 공간은 온통 검찰을 성토하는 글로 도배되다 시피하고 있다. 한 누리꾼(희망모으기)은 “인터넷 논객 구속으로 우리나라 후진성을 세계에 떨쳐 국가브랜드를 크게 떨어뜨린 손해가 수십 조 원에 달할 것”이라며 “검찰은 다양성을 훼손하여 국가 발전을 가로막은 점을 고려해 징역 2000년, 추징금 100조 원쯤 내야 할 듯 하다”고 비꼬았다.

# “이런 수사 방식은 처음 본다!”

야당의 정치공세도, 시민단체의 항의성명도 아니다. 인터넷 누리꾼이 올린 익명의 댓글도 아니다. 여당인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가 이른바 ‘노무현 게이트’에 대한 검찰 수사를 놓고 한 쓴 소리다. 박 대표는 20일 한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검찰이 매일매일 진행 상황을 브리핑하다시피 지금 하고 있다. 나는 이런 수사 방식은 처음 본다”고 혀를 찼다. 그는 이어 “검찰이 일정 기간 수사를 해서 이제 자, 이건 중간 발표다, 또 그 다음에는 최종 발표다 이렇게 하고 정치권에서는 여기 일체 관여를 안 하고, 이게 전통적인 수사 방법이었다”라고 꼬집었다.

정세균 민주당 대표는 이날 오전 최고위원회의에서 “검찰이 피의사실을 유포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되어있음에 계속 중계방송하고 있어 국민 모두는 지금 수사는 4·29 재보선용이라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정 대표는 또 이명박 대통령 최측근으로 알려진 천신일 세중나모회장의 10억 수수설, 30억 당비 대납설, 한상률 전 국세청장 기획 출국설 등 3대 의혹을 거론한 뒤 이에 대해선 전혀 진실규명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검찰의 편파수사를 비난했다.

# “정녕 양심의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가!”

전국언론노동조합이 대한민국 검찰에게 던진 질문이다. 범죄혐의 성립조차 어렵다며 문화방송(MBC) ‘PD수첩’의 제작진 소환을 거부하던 담당 검사를 갈아치우고, 약혼자의 집까지 압수수색하고, 결혼을 나흘 앞두고 있던 예비신부 김보슬PD를 체포했던 검찰…. 언론노조의 이어지는 항변 그대로 검찰 스스로가 비굴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지난 50년 검찰 역사를 되돌아보면 그 오욕의 얼룩이 자못 흉하다. 국민들은 검찰의 이름 앞에 ‘권력의 시녀’. ‘떡검’, ‘견찰’ 등 불명예스러운 수식어를 붙여 불러왔다. 미네르바와 MBC PD 긴급체포사건, 노무현 게이트 수사 등을 둘러싼 최근 검찰의 처신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도 여전히 사납기만 하다. 미네르바와 PD수첩에 대한 무고죄, 노 전 대통령 관련 수사에 대한 피의사실 유포죄로 검찰을 고소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일고 있다. 예전처럼 그저 찍어누를 수 있는 국민들이 아니다. 인터넷 논객의 구속, 정부정책을 비판한 언론인의 체포, 지난 권력에 대한 편파 수사와 마구잡이 피의 사실 유포…. 이런 코미디를 한꺼번에 벌이는 검찰은 이젠 웬만한 후진국에서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검찰은 그 오욕의 역사에 얼마나 더 흉한 얼룩을 덧칠하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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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끈한데 2009-07-13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도 많이 바쁜게로군..ㅋㅋ
 

‘보수’에 대한 상념(想念)

이상돈 (2009년 4월 1일)


우리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헌정사는 자유당 이승만 정권의 장기집권,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그리고 5공화국의 압제 등 많은 곡절을 겪어 왔다. 비록 우리가 빈곤탈출과 경제발전에 있어서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고 하지만 입헌주의와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서는 후진적이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987년 개헌과 더불어 본격적인 민주주의 시대가 열렸지만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자유민주주의’의 한 축인 ‘자유’가 훼손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진보’ 또는 ‘좌파적’ 견지에서 평등, 사회적 균등 같은 가치를 앞세웠기 때문에 이로 인해 자유주의가 손상된다는 비판이 일었다. 그런 점을 강조한 집단은 ‘뉴라이트’나 ‘아스팔트 우파’가 아니라 공병호 같은 시장자유주의자였다. 그런데 시장자유주의자도 아닌 사람들도 ‘보수’가 아니라 ‘자유’를 내걸었다. 자신을 ‘보수주의자’라고 말하기 보다는 ‘자유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과거에 좌파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모여서 단체를 만들고 ‘뉴라이트’라는 영어 간판을 내건 것도 ‘보수’라는 명칭을 쓰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이른바 보수 단체 중에도 정작 ‘보수’라는 명칭을 내건 곳은 별로 없고, ‘자유’를 내건 경우가 많은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 일 것이다. 이재오, 김문수, 김진홍 등 과거에 운동권이었던 사람들도 좌파를 비난하는 발언을 한 경우는 있었지만 그들이 스스로 ‘보수’임을 자임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생각된다. 과거에 좌파 운동권에 몸담았던 사람들이 별안간 ‘보수’를 자처하기에 떨떠름했던 것은, ‘보수’라는 단어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고, 또 그들이 젊었을 때 죽어라고 읽은 책이 모두 ‘좌파’ 책이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보수’ 행세를 하자니 ‘보수’에 대해 무언가 알아야 할 것이지만 ‘보수’를 공부할 기회도 없었을 뿐더러, 우리나라엔 ‘보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변변한 책이 있지도 않은 것이 현실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선 보수주의에 관한 담론 자체가 없다. 보수 세력이 권력과 금력 같은 제도에 안주해 와서 지적 기반(intellectual base)이 취약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보수’라는 단어가 ‘이미지 문제’를 안고 있다. ‘보수’가 부패하고 기회주의적인 집단으로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원조보수’를 자처하는 JP가 DJ와 야합했던 것을 상기하면 더 이상 다른 말이 필요 없다. ‘더러운 단어’였던 ‘보수’가 노무현 정권의 실정(失政)에 힘입어 일어나나 했더니 이명박 정권과 같은 길을 가는 바람에 그나마 회복했던 ‘정당성’을 다시 상실했다. 우리 국민의 과반수가 무당파(無黨派) 부동층이 된 것은 그런 사정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고요한 보수’(The Silent Conservatives)는 새로운 변신을 하면서 다음을 기약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MB는 경선이나 대선 과정에서 단 한 번도 자신을 ‘보수’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대북정책에서도 기존의 햇볕정책을 폐기하거나 수정하겠다고 약속한 적이 없었다. 그러한 유화적 대북정책 때문에 이회창 총재가 대선에 출마하게 되었던 것은 우리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이제는 미국에 오바마 정권이 들어선 덕분에 이명박 정권은 결국 햇볕정책을 답습하지 않을 수 없게 됐으니, 오히려 홀가분해 진 것이 아닌가 한다. 햇볕정책을 오바마 때문에 지속할 수밖에 없다는 좋은 ‘핑계’가 생긴 셈이다. “오바마를 좌파로 불러서는 안 된다”는 궤변이 “오바마의 햇볕은 괜찮다”는 또 다른 궤변을 만들어 낸 것이다.

보수정당을 표방했던 자유선진당은 대북 정책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제3의 길’을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야당의 ‘대북 정책’은 본질적으로 구두선(口頭禪)에 불과한 것이니, 자유선진당의 정체성은 오히려 중도를 지향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민주당 일각에서도 전교조 민노총과 선(線)을 긋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니 ‘제3의 길’ 전성기가 오는 듯하다. ‘제3의 길’을 표방한 ‘국민통합’ 세력 앞에 대립적 이데오르기로서의 보수주의는 오뉴월에 눈 녹듯이 무력해 지지 않을까 한다. ‘고요한 보수’도 ‘제3의 길’을 향해 보이지 않는 변신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명박 정권이 내 걸었던 대운하 사업, 그리고 ‘꿩 대신 닭’이라는 식으로 추진하는 경인운하, 4대강 사업 같은 것은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보수’가 앞장서서 반대해야 할 사안이다. 토목공사로 경제위기를 극복하겠다는 발상을 흔히 ‘뉴딜’이라고 하나, ‘보수’의 입장에서 보면 ‘뉴딜’은 ‘실패한 진보정책’의 대명사다. 미국 공화당이 ‘뉴딜’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강을 파헤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잠실 초고층 건물 건축허가에서 보듯이 이명박 정권은 국가안보를 오히려 경시하고 있다. 국가안보의 보루라는 국정원의 책임자에 병역도 하지 않은 안보 문외한을 임명하는 정권을 보수 정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 일은 아마추어 진보정권인 카터 행정부에서 있었다. 진정한 보수언론, 보수단체라면 이런 일련의 사태를 신랄하게 비판했어야 했지만 모두 침묵했다.

최근에 일어난 신영철 대법관 사건이나 MBC 기자 구속 사건은 ‘진보’와 ‘보수’의 대립으로 볼 사안이 아니다. 사법권 독립, 언론의 자유와 국민의 알 권리는 정치이념이나 정책 문제가 아니고 자유민주주의의 기초이다. 그것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는 말이다. 재판개입을 한 것으로 판명된 신영철 대법관의 사임에 반대하고, 명예훼손 혐의로 언론인을 구속하는 사태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없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 지식인으로 뽑히는 고(故) 러셀 커크와 고(故) 윌리엄 버클리 2세가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보수주의를 내걸고 출마를 선언한 공화당의 배리 골드워터 상원의원을 만나서 한 이야기 중에는 이런 부분이 있다. 러셀 커크는 골드워터에게 “보수주의를 표방하더라도 남부의 인종차별주의자 등 더러운 집단을 멀리하라”고 했다. 윌리엄 버클리는 그런 집단을 ‘쓰레기’라고 지칭했고, 자기가 발행하는 ‘내셔널 리뷰’지(誌)에 존 버치 협회 같은 남부의 수구집단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연거푸 발표했다. 이렇게 해서 미국의 보수주의 운동은 부패와 무지(無知)와 결별하고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반대한 데 있어서 윌리엄 버클리와 존 버치 협회는 다를 바가 없었지만, 이런 과정을 거쳐 존 버치 협회는 몰락하고 버클리는 1980년대 미국 보수주의 전성기의 지적 기초를 닦았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반대하는데도 격(格)이 있는 법이다.

(c) 이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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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도 상급법관 뜻대로'? 적은 내부에 있다

출처 :
'재판도 상급법관 뜻대로'? 적은 내부에 있다 - 오마이뉴스
법관의 헌법·법률·양심 무시한 '촛불재판 몰아주기 사건'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
ⓒ 김태헌
서울중앙지법



대통령에 충성심 강한 사람이 판사?

 

군사정권시절에 서울지방법원은 형사지법과 민사지법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리고 정권이나 대법원장은 형사지법원장이나 형사지법 부장판사 등에 소위 코드가 잘 맞아 믿을 만한 인사들을 대거 포진시켰다. 형사지법에서는 소위 시국사건들의 재판이 많이 열린 탓에 이 법원 고위판사들의 인사에 법원 내외부의 입김이 많이 작용했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 군사정권이 물러난 1993년에 서울민사지법 단독판사들에 이어 대한변협이 사법부의 근본적인 개혁을 촉구하고 나서는 제3차 사법파동이 일어났다. 이 때에 사법 개혁방안의 하나로 주장되던 것 중에 과거 군사정권에서 정치권력에 영합해 법과 양심을 저버린 판결을 한 '정치판사'들의 퇴진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정치판사'에는 대법원장 등 사법부 수뇌부뿐만 아니라  군사정권에서 사건배당권 행사 등을 통해 시국사건 재판을 조정하고 통제하려 했던 서울형사지법 수석부장출신의 일부 고위판사들도 우회적으로 지목되어 있었다.

 

원래 근무평정권과 사건배당권은 법원장의 권한이다. 그런데 많은 경우 단독판사들에 대한 근무평정권이나 사건배당권은 사실상 수석부장판사에게 곧잘 위임된다. 군사정권은 과거에 서울형사지법원장과 수석부장판사를 코드가 맞는 믿을 만한 인사로 앉혀놓은 후 이들을 통해 시국사건의 판결을 마음대로 조정하고 주물렀다. 소명이 부족한 시국사범의 영장도 수석부장판사에 의해 비밀리에 발부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유신시절에 판사를 지냈고 나중에 제1기 헌법재판소 재판관까지 지낸 변정수 전 재판관은 회고록에서 "서울형사지법 수석부장은 중앙정보부나 검찰에서 보기에 유신관이 투철하거나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사람, 적어도 검찰이나 중정에 협조를 잘해줄 것으로 인정받은 사람들이었다"고 꼬집기까지 했다. 

 

적용 법조항이 다른 사건을 비슷한 사건이라니...

 

요즘 법원이 이래저래 시끄럽다. 작년에 서울중앙지법에서 촛불집회 참가자에 대한 여러 건의 사건들이 다소 보수적이라 알려진 특정재판부에 몰아주기식으로 배당되자, 이에 대해 다른 13명의 단독판사들이 반발하였고 법원장이 나서서 이를 무마한 뒤 다시 사건들을 관행대로 무작위 시스템에 의해 배당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 일이 최근 언론에 의해 파헤쳐지고 보도되면서 법원 안팎에서 몰아주기 사건배당의 배경과 이유에 많은 의혹의 시선들이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당시 사건배당권을 행사했던 형사수석부장판사나 대법원은 그 사건들이 쟁점이 비슷한 중요사건들이라 결론이나 양형에 큰 차이가 날 것을 우려해 배당예규에 따라 사건을 그렇게 한 판사에게 몰아준 것이라 해명하고 있다.

 

궁색한 변명이다. 몰아주기식으로 배당된 사건들은 촛불집회 참가자가 기소된 사건들이라는 점에서만 공통적일 뿐, 사건의 구체적 내용이나 쟁점, 적용 법조항들이 다르다. 어떤 사건은 경찰 기물 파손 사건이고, 어떤 사건은 전의경 폭행사건이며, 또 어떤 사건은 촛불집회행사 사회자가 허가되지 않은 행진을 유도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사건이다. 따라서 비슷한 사건들이어서 결론이나 형량의 차이를 줄이기 위해 한 명의 판사에게 사건을 몰아주려 했다는 설명은 납득하기 어렵다.

 

또한 결론이나 형량 차이는 이후 상소를 통해 해결될 수 있는 것들이다. 오히려 이 사건들이 왜 하필이면 언론에 의해 보수적 성향을 가진 것으로 평가되는 판사에게 몰아주기가 되었느냐에 많은 의혹의 시선들이 쏠린다.

 

그리고 이 판사가 있던 13단독은 원래 피고인이 외국인인 사건을 다루는 재판부였다. 외국인 사건  전담 재판부에 무작위 시스템이 아니라 인위적인 몰아주기식 배당으로 촛불집회 관련 시국사건 재판을 맡긴 이유는 정녕 무엇인가?

 

원래 사건배당은 컴퓨터 추첨 등에 의한 무작위 배당이 원칙이다. 사건 배당에 어떤 의도가 개입되었다는 의혹을 사지 않기 위해서다. 그런데 우리 법원의 배당예규는 특별한 경우에는 임의배당을 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집회 및 시위사건들은 보통 무작위 배당을 하는 일반사건들로 다루어지는데, 이를 임의배당했다는 자체가 이 사건을 다른 집회 및 시위사건들과 달리 차별적으로 취급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사건배당에서 촛불시위사건들만 이렇게 달리 취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사건 피고인들의 범죄사실이 다른 집회 및 시위사건의 피고인들과 비교해 특별히 중대하지도 않다. 백번 양보해서 이 사건들이 임의배당을 통해 한 명의 판사에게 몰아줘야 할 사건들이라 하더라도, 하필 그  한 명의 판사가 언론에 의해 보수적 성향을 지녔다고 평가될 판사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른 판사들보다 그 판사가 재판능력이 뛰어남을 입증할 만한 자료는 없는 것 같다. 그 이유가 혹시 법원장이나 형사수석부장이 보기에 '믿을 만하다'는 것이라면 어떤 의미에서 '믿을 만하다'는 것인가? 누가 보더라도 몰아주기식 사건배당의 숨은 의도가 무엇인지 뻔히 들여다 보이는 경우다. 

 

선고와 영장 심리까지 간섭, 법관 독립 뒤흔드는 일

 

그런데 여기까지도 어떻게 보면 덜 심각하다. 몰아주기식 사건배당을 했던 그 형사수석부장판사가 단독판사들에게 촛불집회에 참가한 혐의로 즉심에 회부된 피고인들에게는 통상적인 벌금형이 아니라 더 무거운 구류형을 선고하라고 요구했다는 언론보도는 가히 충격적이다.

 

또한 촛불집회 참가자에 대한 경찰의 구속영장 신청을 기각할 때에는 '증거인멸과 도주우려 없음'의 사유보다 '혐의 소명 부족'의 사유를 제시하라는 요구도 했다고 보도되고 있다. '소명 부족'으로 구속영장이 기각되면 검찰의 보강수사를 통해 영장 재청구와 영장 발부가 가능하지만, '증거인멸과 도주 우려 없음'을 이유로 한 영장기각은 검찰의 영장 재청구가 있어도 그 후 영장이 발부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즉, 재청구를 통해서라도 영장이 잘 발부될 수 있는 결정을 하라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법관의 독립'을 뿌리채 뒤흔드는 일로,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헌법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어떤 형으로 처벌할지, 영장사건에서 무엇을 기각사유로 할지는 재판의 중요한 핵심사항이다. 이 판단에 근무평정권이라는 인사권을 갖고 있는 상급법관이 개입하여 노골적인 요구를 했다면, 법관은 헌법, 법률, 양심이 아니라 상급법관의 '주문'에 따라, '독립하여'가 아니라 상급법관에게 '예속되어' 재판을 한 것이 된다. 아주 심각한 위헌적 상황이다.

 

이러한 언론보도가 사실인지, 사실이라면 왜 그랬는지, 당시 법원장이나 형사수석부장 등 당사자들이 국민들에게 정확하게 설명을 해야 한다. 나아가 대법원장은 즉각 진상조사에 착수해야 한다. 그리고 바로 잡을 일이 있으면 바로 잡고, 책임져야 할 사람이 있으면 책임을 져야 한다.

 







  
임지봉 서강대 헌법학 교수
 
임지봉



문민정부에 들어와서부터는 특히 전국 모든 법관들의 인사권을 틀어쥐고 있는 대법원장이나, 인사권을 사실상 나눠가지는 법원장, 부장판사들로부터 개별법관의 독립이 침해되고 있다는 지적들이 많았다. 고위법관들이 인사권을 무기로 하급법관들을 줄세우고 길들이려 한다는 불만들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사법부의 제일차적 당위목표이자 존재이유인 '사법권 독립'이 사법부 밖으로부터가 아니라 이제 사법부 안으로부터 위협당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또 다른 모습의 '사법권 독립의 위기'라고 볼 수밖에 없다. 법관이 재판에서 헌법, 법률, 양심이 아닌 다른 그 무엇을 더 중요하게 고려하기 시작한다면 국민들은 이런 법원을 불신할 수밖에 없다.

 

법원이 신뢰를 얻는 데에는 부단한 노력과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군사정권하의 법원에서 목도했듯이 국민의 신뢰를 잃는 것은 잠깐임을 명심해야 한다. 국민들이 더 이상 법관과 법원의 '정치적 독립성'을 걱정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 그동안 많은 신뢰와 지지를 보내준 국민들에게 법원이 해야 할 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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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가 어렵다는 것은 이제 조금도 새롭지 않다. 1년이 다 되가는 정부의 무능을 질타하는 소리도 새롭지 않다. 한미FTA 비준동의안 상정을 둘러싼 국회파행은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한다. 물론 원인은 한나라당이 제공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민주당 역시 미국행정부가 한미FTA 이행법안을 의회에 제출하면 우리 국회에서 30일내에 비준동의안을 관련법안과 함께 처리해 주겠다고 밝혔다. 그런 민주당을 지켜보노라면 과연 한미FTA 비준동의안은 민주당이 저지하고자 하는 'MB악법'인지, 아니면 여야가 타협할 수도 있는 '민생법안'인지 판단이 쉽지 않다.

한나라당이 28일 국회의장에게 직권상정을 요청한 반드시 처리할 85개 법안가운데 한미FTA비준동의안이 '경제살리기'법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한미FTA 연내처리의 빈약한 명분을 '경제살리기'와 연계하리하는 것은 비준동의안 단독상정 전후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정부 측이 실은 한미FTA 배너광고에서 예측된 일이었다.

동시에 정부 측은 경제살리기를 위해서는 한미FTA가 있어야 한다는 내용의 메일을 전국에 뿌렸다. 그 자체 새로운 내용은 없다. 논리도 허술하다. 그저 한미FTA 되고 나면 GDP 6%가 성장하고, 일자리 34만개가 늘어나고, 대미수출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2007년 4월 말 한미FTA가 타결되고 난 직후 관변 연구소가 한데 모여 만든 경제효과 분석에 나오는 내용이다. 정권도 바뀌었고, 포털사이트 배너광고비를 조금이라도 아꼈더라면 얼마든지 가능했을 법한데도 분석 내용은 참여정부가 만든 낡은 효과분석 그대로이다. 그 당시에도 이는 논란이 되었다. 일설에는 당시 참여정부 청와대 정책실인가에서 국책 연구기관이 제시한 효과분석이 기대치에 미달하자 진노했다고도 한다. 진위는 아직 알 길 없다. 경제효과를 분석한 방법이 이른바 CGE (연산가능일반균형모형)다. 그렇지만 다시 짚어 두건대 한미FTA 경제효과 분석은 좋게 말해 권력자의 입맛에 맞게 과장되었고, 좀 심하게 말하자면 '조작'된 것이다. 그 주요내용을 되짚어 보자.

첫째, 당시 관변에서 제시한 경제효과 GDP 6%증가와 비교해, 경기대 신범철 교수가 이후 동일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조사해 제시한 경제효과 분석결과는 GDP 약 0.2%증가였다. 30배가 차이가 난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대략 10년치를 합한 것이기 때문에 한미FTA 경제효과를 연도별로 보자면 각각을 10으로 나누어야 한다. 하지만 관변 특히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라는 곳에서 사용한 연구방법이 전세계적으로 인정받은 표준모형이 아니라 '그들 만의' 것이란 점에서 신뢰를 보내기는 어렵다. 신범철 교수의 연구결과를 기준으로 볼 때, 한미FTA 연간 경제효과는 GDP 0.02%, 금액으로 1.8억 불(환율을 달러당 1400원으로 할 때 2500억 원)정도 이다. 한국경제의 규모로 볼 때, GDP 0.02%는 실로 너무 미미하거나 FTA를 하지 않더라도 다른 방법을 통해 얼마든지 도달가능한 수준이다.

둘째, 정부 측이 말하는 일자리 34만개 추산은 GDP 6%를 가정하고 여기에 고용유발계수 (대략 GDP 1%당 7-8만개)를 곱해서 얻은 값이다. 그래서 GDP 0.2%를 기준으로 해서 이 값을 구해보면 10년에 걸쳐 약 1만5000개 일자리가 나온다. 정부계산처럼 34만개가 되려면 한미FTA를 200년 넘게 해야 한다. 한미FTA를 하게 되면 일자리가 많아질 것처럼 말해서는 안된다.

셋째, 특히 대미무역 수지는 한미FTA 협상 초기부터 조작논란이 불거졌던 사안이다. 2007년 4월 관변 연구소 합동 연구결과의 대미무역 수지 흑자 46억 달러 증가 역시 이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 수치는 그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CGE 분석결과가 아니라, 각 부처별 추정치를 단순 합산한 것이다. 당시 내가 들었던 설명으로는 CGE분석 결과가 정확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각 부처별 추정치를 합산했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이미CGE분석의 신뢰성은 의문이 제기된다. 그러나 이 보다도 수치 잘못 보고 했다간 목이 달아날 판이었는데 누가 감히 있는 그대로 보고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전 부처가 '살기 위해' 추정치를 과장했을 것이다.

시중에 나와 있는 열 개가 넘는 한미FTA CGE 경제효과 분석 모두가, 단 하나 2007년 4월말의 연구결과를 제외하고 하나의 방향을 가리킨다. 즉 한미FTA 체결시 대미무역흑자가 약 40억-73억 달러가 감소한다는 것이다. 실행관세율이 한국측이 미국보다 3배 높은 조건에서 동시에 관세를 축소 내지 철폐할 때 미국측이 더 많은 이익을 가져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결국 수출로 먹고산다는 우리가 한미FTA를 하게 될 경우 오히려 무역수지가 악화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말이다.

넷째, 이런 경우을 상상해 보자. 한미FTA가 발효된 뒤에 미국발 금융위기가 터졌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래서 기관투자자는 물론이고 '개미'투자자들조차 온갖 파생상품을 구매하고 난 뒤에 터졌다면 말이다. 아마 우리 금융시장은 지금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혼란을 겪고 있을 것이다. 한미FTA를 한다고 미국으로부터 양질의 직접투자가 물밀듯 들어올 것이라고 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지금도 미국으로부터 유입되는 자금은 대부분 주식투자 자금이거나 잘해야 M&A자금이다. 가뜩이나 극히 취약한 한국 금융시장의 조건에서 한미FTA는 미국 월가의 돈지갑으로 가는 지름길일 따름이다.

다섯째, 통상협정의 평가 잣대는 일정 정도 계량화가 가능한 부분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측면도 있다. 그래서 당시 정부 측은 이를 일컬어 '제도개선', '제도선진화'라고 불렀다. 하지만 한미FTA 협상과정에서 다루어진 쟁점 대부분의 처음 목표와 최종 결과를 비교 분석해 보면, 접근가능한 쟁점 약120여개 가운데 한국 측이 협상 목표를 관철한 것은 10개도 되지 않는다. 나머지 양측이 타협한 10개 남짓을 제하면 거의 모든 쟁점에서 미국 측의 입장이 관철되었고, 이후 정부 측은 이를 '제도선진화'라고 불렀다. 두 가지 중요한 사례만을 들어 보자.

첫째, 현재의 경제위기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한 미국발 금융위기로부터 비롯된 것임은 자명하다. 한미FTA 금융서비스장을 보면 이번 금융위기의 가장 큰 원인이 되었던 통화부도스왑(CDS)과 같은 파생상품, 그리고 우리 우량 중소기업에 치명적 타격이 되고 있는 키코(KIKO)등 환율 및 이자율상품에 대해 협정문에서는 '신금융서비스'라는 이름으로 투자자-정부 소송제(ISD)를 비롯한 각종 특혜를 부여하고 있다.

둘째, 한미FTA는 미국 자동차 3사 즉 '빅3'을 전제로 만들어진 것이다. 빅3를 전제로 한미FTA 협정문은 한국이 배기량기준 세제 철폐, 미국산 자동차에 대한 배기량 기준 완화 등 각종 특혜를 부여하고, 스냅백 (한국 측이 협정위반시 2.5% 관세를 원래대로 환원하는 미국만의 일방조치) 조항과 같은 전대미문의 독소조항을 삽입하였다.

예로 든 이 두 가지 부문만 하더라도 우리 측이 '사정변경의 원칙'을 들어 얼마든지 재협상을 요구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나마 당시 참여정부가 협상을 잘 했다고 동네방네 떠들던 분야가 이 정도라면 나머지 농업을 비롯한 투자, 지적 재산권, 의약품 등 사실상 일방적으로 퍼주기한 분야는 이루 말할 필요가 없다. 이 자리에서 일일이 열거하기에도 숨가쁜 온갖 독소, 불평등 조항은 또 어쩔 텐가.

그나마 대미 수출은 자동차와 반도체가 사실상 축이고, 이는 재벌경제가 담당하고 있다. 곧 재벌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과연 한미FTA가 보탬이 될지도 의문스럽다. 현재 미국의 실물 경제위기로 인해 미국내 시장 상황이 매우 불투명하고, 미국내 현대차는 감산에 돌입하고 있는 실정이다. 상당한 변화가 예고되어 있지만, 오바마 통상정책이 모습을 드러내자면 아직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미 공적 자금을 투입한 자동차3사를 살려 내기 위해 각종 정책 팩키지가 나올 것임은 충분히 예상가능하다. 머지않아 미국 현지 생산비율이 70%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한국 자동차로서는 굳이 FTA를 통한 수출증가가 아니라 이미 현지화 전략을 통해 대응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고 또 그렇게 해 왔다. 또 다른 주력품목인 반도체는 오래전부터 관세가 0%이기 때문에 FTA와 무관하고, 자동차 수출증가야 말로 한미FTA의 목표인데 그것마저도 미국 현지 경제위기와 또 현지생산을 감안하면 도대체 한미FTA는 왜 하는 것인지 의문은 더해간다.

요컨대 한미FTA는 '경제살리기'가 아닌 '경제죽이기'로 가는 길이다. 조작된 아니 백보를 양보해 '재검토'가 필요한 경제효과분석과 이에 기생하는 경제관료들의 욕망, 오바마로 정권이 바뀌었음에도 경제논리라기 보다 '한미FTA=한미공조'식의 이념화된 신화를 붙들고 있는 현정부의 이상한 오기, 민주당의 우유부단, 이 틈새에서 한미FTA라는 독버섯이 그 질긴(?) 생명력을 이어가는가 보다. 

/이해영 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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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발바닥 2008-12-29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0을 놓고 상대와 협상하여 상대방에게 95를 주고 5를 얻어 놓고, 협상 잘했고, 우리에게 이익이라고 큰 소리쳤는데, 상황이 바뀌어 상대방이 5중에 4를 달라고 할 가능성이 큰데도 불구하고 일단 Go를 외치는 듯한 형국이다.

이렇게 국민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사회제도 전반을 바꿔버리고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사항에 대하여 말도 안되는 논리로 국회에서 통과시키려 하고, 주류언론은 이에 대하여 아무런 비판도 하지 않고, 대다수 국민들은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참 원망스럽다...
 
즐거운 나의 집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이 소설을 읽기 전에 소설가 공지영(이하 존칭생략)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그녀가 이혼을 세번이나 한 잘나가는 여류 소설가라는 점이었다. 특히 소설가 공지영에 대한 내가 가지고 있던 지극히 작은 지식 중에 그나마 방점이 찍혀 있던 것은 ‘이혼을 세번이나 한’이라는 점이었던 것 같다. 이혼은 어찌되었건 완전히 어느 한 당사자의 책임만은 아니고 양쪽 모두에게 어느 정도의 책임은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기에, ‘이혼을 세번이나 한’ 공지영에 대하여 내가 가지고 있던 추상적인 이미지는 아마 ‘성격이 강하고 페미니스트적인 어딘지 모난 것 같은 자기주장 강한 여자’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 소설을 읽을 때쯤에는 그녀가 성이 각각 다른 세명의 아이를 키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나도 아이가 생겨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조금이나마 알게 된 상태였기에 그녀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그래도 조금 긍정적인 쪽으로 바뀌었던 것 같다.

즐거운 나의 집을 다 읽고 난 후 내가 느끼는 한 가지는 이혼을 세번이나 했다는 사실이 소설가 공지영의 삶 전부, 또는 그녀가 어떠한 사람인지 자체를 나타내는 것은 결코 아닌데도 불구하고 나도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처럼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단지 그녀가 이혼을 세번이나 했다는 사실만으로 이혼녀에 대한 비뚤어진 이미지로 그녀를 낙인찍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이혼을 세번이나 했다는 사실은 작가의 일상적인 삶을 언제나 짓눌렀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실제로 접하고 느끼기에 앞서 그녀를 이혼을 세번이나 한 이혼녀로 바라볼 것이고, 그녀 자신도 그러한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녀는 그러한 사실이 다 까발려질 정도로 유명한 소설가다. 마치 부모가 빨갱이라거나 범죄자라는 사실 때문에 자식도 빨갱이 또는 범죄자와 똑같을 것이다라는 세상의 색안경에 끊임없이 상처받는 상황과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유명인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사생활이 다 노출된 여자연애인의 상황과 비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즐거운 나의 집이 어느정도 공지영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녀는 그녀 나름의 긍정적, 낙천적 사고방식으로 세상의 색안경에 적응하면서 사는 법을 터득한 듯하다.

한편으로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가족사를 근거로 자전적 소설을 썼다는 사실이, 비록 즐거운 나의 집은 어디까지나 소설이고 결코 작가나 가족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전 남편이나 자식들과의 관계에서 좀 부끄럽거나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소설속의 작가의 큰 딸의 생각이 반드시 실제 작가의 딸의 생각과 같으리란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작가가 전남편이나 자식들, 더 나아가 스스로에게 당당하기에 그런 자전적 소설을 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비록 소설이지만, 소설속 위녕의 엄마와 소설가 공지영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믿는다. 암튼, 즐거운 나의 집을 읽고 우리는 일상속에서 너무나도 쉽게 다른 사람에 대하여 알고 있는 아주 작은 지식으로 그 사람의 삶 또는 그 사람 자체를 재단하고 있고, 결코 그래서는 안되겠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되었다.

즐거운 나의 집을 읽고 생각하게 된 또 한가지 주제는 작가의 말에서 작가가 밝히듯이 이 소설의 계기라고도 할 수 있는 ‘새로운 의미의 가족’이라는 화두였다. 이혼과 재혼이 흔해진 지금, 전통적인 가족의 이미지와 개념 만으로는 자신의 가족을 설명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즐거운 나의 집에 등장하는 가족도 전통적인 가족의 범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극단적인 한 예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다면 과연 가족의 의미는 무엇일까? 어려울 때 힘이 되어주는 것이 가족이라고 하지만, 정작 가족 때문에 큰 고통을 겪는 경우도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자식의 교육을 위하여 가족이 함께 사는 것도 포기하고 가장은 단지 돈을 부쳐주는 것만으로 가장의 역할을 수행하는 기형적인 가족구조인 기러기생활이 사회적인 현상이 될만큼 우리사회는 가족에 집착하면서도 정작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 중에 상당부분이 가족과 관련된 일이라는 것이 참으로 역설적이지 않은지…가족을 어느 한 단어나 문장으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기쁠때나 슬프고 힘들때나 그 순간순간을 함께 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힘이 되어주는 삶의 안식처 같은 존재이지만, 가족관계가 엇갈리고 뒤틀리는 경우 서로에게 주는 상처가 그만큼 더 큰 존재가 가족이 아닌가 싶다.

끝으로 소설 속에서 인상깊었던 귀절 몇 군데를 적어본다.  

p85
“어떤 순간에도 너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을 그만두어서는 안 돼. 너도 모자라고 엄마도 모자라고 아빠도 모자라….. 하지만 그렇다고 그 모자람 때문에 누구를 멸시하거나 미워할 권리는 없어. 괜찮은 거야. 그 담에 또 잘하면 되는 거야. 잘못하면 또 고치면 되는 거야. 그담에 잘못하면 또 고치고, 고치려고 노력하고….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남을 사랑할 수가 있는 거야. 엄마는…엄마 자신을 사랑하게 되기까지 참 많은 시간을 헛되이 보냈어.”

p89
우리가 보는 것들 이면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얼마나 많이 감추어져 있는가를 생각했다. 그리고 때로 그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얼마나 치명적인가.

“가족이라는 것은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견고한 울타리 같은 거야.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전적으로 사적인 영역이니까. 당연히 보호받아야 하고 침범당해서는 안 돼. 그런데 그런 폐쇄된 영역에서 힘이 센 한 사람이 힘이 약한 사람에게 폭력을 쓰고자 들면 힘이 약한 사람은 당하게 마련인 거야. 타인들이 볼 수 없는 장막 저쪽의 세계니까. 그게 부인이든 남편이든 혹은 아이든 노인이든….그 사람이 페미니스트든 사회정의의 화신이든 힘이 센 사람이 폭력을 쓰면 약한 사람은 당하는 거…그게 가족의 딜레마일 거야. 낯선 사람이 가하는 폭력은 피하면 되지. 친구가 그러면 안 만나면 되지. 그러나 사랑해야만 한다고 믿는 가족이 그런 일을 저지를 때 거기서 모든 비극이 시작되는 거야.”

p225
“…스님,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습니까? 하고. 그랬더니 그 스님이 대답하더구나. 앉아 있을 때 앉아 있고, 일어설 때 일어서며 걸어갈 때 걸어가면 됩니다, 하는 거야. 아저씨가 다시 물었지. 그건 누구나 다 하는 일 아닙니까? 그러자….그 스님이…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앉아 있을 때 일어날 것을 생각하고 일어설 때 이미 걸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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